- 요것만은 알고 가자
기원전 600년 이전에는 자그마하고 볼품없는 공동체에 불과했던 로마가 전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 배경에는 로마의 지리적 위치가 차지하는 역할이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즉 로마의 지리와 기후는 이 국가가 강성해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이탈리아 반도 서부에 위치한 로마는 비옥한 땅과 적절한 강우량 그리고 온화한 날씨를 가졌습니다. 또한 지중해에 연한 항구가 있어 농업과 해상무역이 부의 원천이 되었지요.
아시는 것처럼 이탈리아의 지형은 매우 아기자기합니다. 지중해 쪽으로 뻗은 장화같이 생긴 땅에 평야, 계곡, 언덕, 산 등이 가득 들어차 있지요. 북쪽으로는 알프스 산맥이 유럽 대륙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습니다. 이 산은 연중 눈에 덮여 있기 때문에 북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외부세력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알프스 산맥 바로 아래에는 포강이 흐르며, 그 아래에는 아펜니노 산맥이 있어 북부 평야 지대를 이루지요. 북부 평야지대를 형성하는 북부 아펜니노 산맥을 지나 중부와 남부로 내려오면, 이 산맥의 동쪽과 서쪽으로 또한 넓은 평야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중 서부평야가 더욱 비옥합니다. 나폴리항을 둘러싼 캄파니아 평야가 대표적이지요.
이와 같이 지형적으로 보았을 때 이탈리아는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 그리스 가이드북에서는 그리스는 이와 반대라고 소개했습니다. 로마와는 반대로 그리스는 지리적으로 고립된 지역이 폴리스를 형성했기 때문에 통합 가능성이 그만큼 낮았다고 말이지요.
로마의 원래 위치는 반도의 서쪽 해안 평야지역인데, 이때는 그저 오두막집에 모여사는 수준이었다고 고고학자들은 전합니다. 이 오두막집들이 작은 촌락으로 발전하면서 주변의 언덕으로 정착촌이 퍼져갔고, 점차 세력이 커졌지요.
티 베리스 강에 설치된 오스티아 항구는 해외무역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육로로의 이동도 해안을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이탈리아의 지형이 지중해 깊숙이 뻗어 있기 때문에 바다를 오가는 배들은 자연스럽게 이 항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바로 옆에 시칠리아라는 큰 섬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곳도 해상 무역상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역상들은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를 오르내리며 장사를 한 것이죠.
[로마사]를 쓴 역사가 리비우스는 로마가 가진 천혜의 지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들과 인간들이 이 지역을 우리의 도시로 선택한 좋은 이유가 있었다. 이 도시의 온갖 이점 덕분에 로마는 세계의 많은 도시들 중에서 가장 위대해질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이러한 로마의 자연환경은 자연스럽게 인구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이탈리아의 평야지대는 험준한 그리스에 비해 농업과 목축업에 유리했으며, 이는 이탈리아가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여력이 됨을 의미합니다. 초창기의 작은 촌락이 급속하게 도시화된 것에는 이런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초기 로마인들이 인도-유럽어 계통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위계가 분명한 가부장적 질서를 선호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들 로마인들의 조상은 트로이 전쟁 이후 그곳으로부터 이주해왔다고 합니다. 로마인들의 조상들에 대한 직접적 증거들은 기원적 9~8세기경의 무덤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드러나지요. 이들 로마의 초기 주민들의 유골을 고고학자들은 ‘빌라노바인’(Villanovans)이라고 부릅니다. 유골과 유적이 발굴된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지요. 이들은 농사를 짓고, 청동과 쇠를 다루었습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데, 주석은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것이므로, 이들이 장거리 무역도 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경에는 그리스 무역업자들이 주로 왕래하면서 로마의 초창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들 그리스인들은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영구 정착하는 경우가 빈번했지요. 그렇게 해서 나폴리에서 시칠리아 섬까지 그리스인들의 정착촌이 번성한 것입니다. 시칠리아에는 페니키아인들도 정착했습니다. 이들 그리스인들과 페니키아인들은 당시까지만 해도 저발전 된 로마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이주 상황은 이 글 맨 처음 지도를 보세요~). 그리스인들의 경우 기원전 5세기에 문화의 꽃이 피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로마에는 나름의 문학이나 기념비, 건축 등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로마가 탁월한 그리스의 문화적 가치를 추종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 보여요.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학문적, 문화적 발전은 흠모했지만, 그들의 정치적 분열과 군사적 열등성은 경멸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의 이런 태도는 역으로 생각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뭐랄까... 힘만 센 골목대장이 동네 우등생에게 가지는 열등감이랄까요?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 뿐 아니라 반도 중부의 에트루리아 인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지요. 에트루리아 인들은 로마인들의 계통인 인도-유럽어족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들은 아나톨리아의 리디아에서 이주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소스는 그들이 반도의 원주민이었다고 하는데, 현대 학자들은 후자의 견해를 더 선호합니다.
에트루리아 인들은 여기저기 분산된 독립된 집단을 유지한 도시들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나름의 예술작품과 보석 세공, 조각 등을 생산했으며, 무역을 통해 그리스나 다른 폴리스들로부터 거액의 사치품들도 수입했지요. 특히 그리스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에트루리아 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대거 수용했음을 알 수 있어요. 이들의 문화는 무덤에 장식된 커다란 채색 벽화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화려한 복장과 악기, 종교의례를 위한 절차 등을 개발했지요. 이러한 문화가 다소 변형된 상태로 로마에 정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로마 문화의 원형은 고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에 있는 것이지요.
로마의 주요한 신들을 보면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의 제왕인 유피테르, 그 아내인 유노,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이름과 면모들은 모두 이 두 문화의 신들과 아주 유사합니다. 또한 동물을 죽여서 그 내장을 들여다보고 점을 치는 복점술은 에트루리아 전통이기도 하지요. 마찬가지로 여자를 만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에트루리아 풍습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에서는 금지사항이었지요. 만찬에 참석할 수 있었던 그리스 여자들은 기생이나 고용된 음악가, 또는 노예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의 영향이 모든 로마에 획일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발견되는 많은 문화적 흔적들은 당시의 지중해 지역에 광범위하게 공유되던 문화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로마의 첫 번째 정치 제도인 왕정은 에트루리아의 왕권 제도를 닮았으나 이런 통치 형태는 당시의 지중해 지역에서 일반적인 경우였고, 로마의 군대 조직인 중장보병 역시 지중해 민족들의 공통적인 군대조직이었숩니다.
알파벳도 에트루리아로부터 오긴 했지만, 이는 그리스인들이 동부 지중해 민족들(주로 페니키아)을 접촉하면서 창조한 문자를 체계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에트루리아 인들의 무역기술(항해술)을 로마가 배웠다는 것도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이지요. 요컨대 문화의 수준이라는 것이 우월한 문화가 열등한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는 사고는 위계를 전제로 한 것이며,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문화 이동과 영향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이러한 문화의 발전이 지역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상호 촉발을 통해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에요.
문화적 접촉은 지도 민족과 피지도민족의 하방 전파가 아니라 동등한 자들끼리의 혁신의 경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역사적 실재와 부합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로마인들은 자신의 문화를 이러한 상호 촉발과 경쟁을 통해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신들과 타인들에 대한 의무를 제1의 가치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얻게 되는 사회적 평판과 지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요. 그렇다면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처신이나 태도, 행동 등은 어떤 것일까요? 대표적으로 소위 ‘보호자-피보호자’ 관계, 로마 가정의 권력관계, 여성들의 삶, 교육, 종교의 역할 등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먼저 정치적으로 로마의 상류계급은 공화국의 개인적, 공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들은 건국 초기에 권력을 분점함으로써 1인 독재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였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권력을 민중들에게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로 이들이 늘 조심한 것은 권력이 민중들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지요. 왜냐하면 이들 귀족들은 가난한 민중들이 1인 왕을 더 선호한다는 선입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류계급의 수는 적었기 때문에, 사회적, 재정적 위치가 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로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타협의 가능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막강한 로마 군대는 민중들의 자발적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이렇게 봤을 때,
로마의 통치 역사는 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과 폭력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력투쟁은 공화국 말기에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습니다. 폭력적 갈등 상황은 내전의 지경에까지 이를 만큼 치열하고 처참했습니다. 사실 공화국 말에 이르면 로마에는 공동체적 가치관보다 개인주의가 더 극심해졌다고 볼 수 있어요. 일단 공동체적 가치가 우선시 되고 그다음으로 개인의 공적에 따른 지위와 재산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공화국 후기에 이 가치가 전도된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전통’ 또는 ‘조상들의 관습’(mos maiorum)은 오랫동안 검증된 것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였습니다. 반대로 이들에게 ‘새로운 것’은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것이었지요. 기본적으로 로마인들은 보수적이었으며, 때로는 그것이 변화와 혁신의 발목을 잡았다고 볼 수 있어요. 새로운 것(res novae)은 곧 ‘혁명’을 의미했는데, 혁명은 로마인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올바름(덕), 신의, 존경심, 지위 등을 조상들이 확립한 핵심적 가치로 여기며 그것을 비판하거나 반기를 드는 것을 싫어했지요.
‘올바름’(virtus, 덕)은 한 개인이 다른 개인과 맺는 관계를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치는 원래 남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올바름을 뜻하는 ‘비르투스’(virtus)는 남성을 의미하는 ‘비르’(vir)에서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올바름이란 남자의 도덕적 특성으로 국한된 것이었지요. 이렇게 덕을 갖춘 남성은 선악을 구별하고, 부적절한 것, 수치스러운 것, 특히 불명예스러운 것을 피하며, 악인을 적으로 여깁니다. 그는 선한 대상과 선한 친구의 보호자이고, 국가의 안녕을 최우선에 놓습니다. 그다음으로 가정의 안정, 그리고 자신의 이해관계는 맨 마지막에 놓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아주 전형적인 '군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
로마인들의 가치관은 군인의 가치관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들은 신체를 잘 보존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전쟁에 나가 승리할 수 있었으며, 가정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전투에서의 영웅적 행동은 이 ‘올바른 남자’의 최고의 영예였습니다. 단 그 용기는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구하는 용기어야 했지요. 여성들의 경우에 군 복무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가정 안에서 올바름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자식들을 교육하면서 그들을 공동체적 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것도 전형적인 가부장 사회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신의(fides)'도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이 가치는 남성과 여성에게 공히 적용되었지요. 신의는 공식적, 비공식적 상황에서, 또 비용과도 상관없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지키지 않는 것은 신들을 불쾌하게 하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요. 여자들은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키고 결혼 후에는 일부종사하는 것이 신의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혼생활의 신의는 남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지요. 남자들은 자유롭게 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신중한 판단 하에서라면 거리의 여성과 관계를 맺는 일도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기함할 이야기들이지요? 결과적으로,
신의란 약속을 어기지 않고, 빚을 꼭 갚고, 모든 사람을 (계급질서에 따라) 공정하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경건’(pietas)은 영어로는 ‘존경을 표시하다’(showing respect)입니다. 즉 신들을 경배하고 가정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로마인 남녀는 집안의 원로들, 조상들, 신들의 우월한 권위를 존경함으로써 경건을 표시했습니다. 신들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종교적 의례를 정기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지요. 신들에게 경건히 예배할 때 신들은 로마 공동체에 은총을 내린다고 그들을 믿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도 이러한 가치의 일부였고요. 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통을 이기고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의 의무를 완수하는 것은 로마인의 필수적인 과제에 속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는 것, 그것이 경건함이었지요.
또한 자기 자신을 존중한다는 것은 감정 노출을 억제하여 절제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따로 로마인들은 ‘신중함’(gravitas)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중함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매우 높았기 때문에, 비록 부부간이라 할지라도 대중 앞에서 키스하는 것은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감정의 절제에 실패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런 가치들을 모두 실천했을 때, 로마인들은 ‘위엄’(dignity)이라는 가치가 그에게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즉 위엄은 한 개인이 앞서 말한 전통적 가치를 실천한 데 대한 사회적 보상으로서, 타인으로부터 받는 존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자들도 적자(嫡子)를 낳고 도덕적으로 양육함으로써 명성과 사회적 승인이라는 보상을 얻어 위엄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어머니는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었으며,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지요. 구체적으로 남자들은 영예로운 공직에 선출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공직은 보수가 없었기에 부자들만이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지위를 매우 높게 보는 로마인들은 비록 권력이 부여되지 않은 지위라 할지라도 크게 존경받았습니다. 위엄의 정상에 오른 자들에게는 ‘권위’(auctoritas)가 부여되었고, 그것을 타인에게 행사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권위가 있는 개인이 추천하는 일을 군말 없이 수행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복종은 어떤 법적 강제가 아니라 그가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적인 삶의 이상에 따라 살아온 탁월한 모범에 대한 존경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가문의 지위가 중요했습니다. 이런 면은 그리스인들도 있었는데, 로마인들은 그 정도가 더 심했지요. 상류계급일수록 지켜야 할 개인적 가치에 대한 기대치는 더 높아졌습니다. 그러므로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한 집안의 배경은 태어나자마자 당사자를 높은 사회적 지위에 놓지만, 동시에 의무도 더 엄격하게 지킬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상류계급들은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란 그만큼 탁월하게 행동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계급의식과 일견 오만한 자세는 로마 사회에 계급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요인이기도 했지요.
이론적으로 부는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자녀들에게 가난하지만 덕성 높은 로마 영웅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킨킨나투스에요. 그는 외적을 물리침으로써 로마를 구했지만, 공을 세우고 난 뒤 개인적인 권력을 취하는 것을 거부하고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는 단독 통치도 가능했던 공직을 물리고 야인으로 돌아가 자기 농장을 관리하는 일에 만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들의 이야기도 로마가 제국화 되자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 것이지요. 엘리트들은 공공건물의 건축이나 공동체의 행사에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지위를 높일 수 있게 되었고, 대중들도 이러한 기부행위를 공공연히 권위와 연관시켰습니다. 모든 부패는 '돈'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동서고금의 진리가 여기서도 맞아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사실상 이것은 매수행위로 발전하게 됩니다. 기원전 2세기경에 이르면 부유한 로마인들은 존경을 사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돈을 쓰기 시작합니다. 특히 콜로세움 경기 준비에 마구 쏟아부었지요. 이러한 역설적 상황, 즉 아무리 좋은 가치라 하더라도 어떤 개인이 그것을 극단으로 추구하다 보면 타락하게 되는 상황은 어떤 사회에도 존재합니다. 후기 공화정의 로마인들은 스스로가 타락한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로마 사회가 전통적 가치와 위계를 중시했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말했지요. 이제는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구현되는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로마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간관계는 소위 ‘보호자-피보호자’ 관계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상호 의무의 연결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로마 사회는 전 사회계층이 이 관계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 관계는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전제합니다. 즉 보호자는 사회적 지위가 우월한 자로서, 낮은 지위의 사람에게 혜택을 베푼다는 것이지요. 이 혜택을 로마인들은 ‘베네피키아’(beneficia)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혜택을 받은 쪽은 피보호자가 됩니다. 그는 혜택의 보답으로 보호자에게 의무(officia)를 다해야 하지요. 이 관계는 호혜적이지만 동등한 자들 간의 호혜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관관계는 상대적인데,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의 보호자이면서, 다른 사람의 피보호자일 수도 있게 되겠지요?
로마인들은 이러한 관계를 당사자간의 ‘우정’(amicitia)라고 부르길 좋아했는데, 실제로 로마인들은 피보호자를 ‘나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피보호자는 보호자를 ‘나의 보호자’라고 불렀고요. 이러한 행위는 상호존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는 그렇게 부담 없는 관계는 아니었어요. 비록 우정의 외양을 취하고는 있었지만, 당사자들은 의무사항을 수행하도록 강제당했습니다. 이를테면 BC 449년에 제정된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 표법은 피보호자를 기만한 보호자를 범법자로 규정했습니다. 또한 피보호자는 보호자를 재정적으로 후원해야 했지요. 예컨대 피보호자는 보호자의 딸들이 시집갈 때 지참금(결혼 선물)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했습니다.
정치분야에서도 피보호자는 보호자의 선거운동을 도울 의무가 있었지요. 피보호자들은 평민들의 표를 끌어오는데 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공직은 무보수였기 때문에 만일 보호자가 공직에 선출되면, 피보호자는 그가 내는 공공지출을 꽤 많이 대출해주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이 관습법이 평등한 시민들 사이의 법인지, 아니면 뒷골목 주먹들의 법인지 좀 분간이 안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 인간관계가 많이 왜곡되어 이탈리아 마피아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지요.
후기 공화정에 이르러서는 보호자가 피보호자를 많이 거느린다는 것은 높은 지위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피보호자들은 아침 일찍 보호자의 집에 모여 문안하고, 그가 포룸(로마 중심지, forum)에 출근할 때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함께 모여 연회를 했습니다. 보호자들은 연회를 위해 더 큰 집이 필요했는데, 이에 따라 크고 잘 정돈된 ‘저택’은 그의 사회적 성공의 상징이 되었지요. 결과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돈이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수많은 피보호자들은 그의 저택과 다른 피보호자들의 위신을 보고 더 모여들었고, 보호자는 이들로부터 후원받았지요.
피보호자들만 후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호자들도 연회에 돈을 쓰고, 피보호자들이 힘들 때 돈을 빌려주었지요. 공화정 시대에 보호자들은 피보호자가 공직에 나서거나 지원하면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사소하게는 아침에 모여든 피보호자들에게 도시락을 제공하는 것도 해당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보호자가 피보호자에게 베푸는 가장 큰 은혜는 소송을 돕는 일이었어요. 로마 사법체계에서 소송 당사자들은 영향력 있는 친구들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소송에서 지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보호자가 키케로처럼 대중연설에 뛰어난 사람이라면 더욱 유용했습니다. 로마 법정에서는 오늘날처럼 검사와 변호사라는 법률대리인이 없고, 직접 변론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보호자-피보호자 간의 법적 의무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이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 관계는 대를 이었지요. 해방노예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자신의 옛 주인이자 보호자들에게 충성하도록 했으며, 해외에서 상업과 군사에 종사하던 로마인들은 외국인을 피보호자로 삼기도 했습니다. 돈 많고 영향력이 강한 로마인은 해외 식민지 전체를 피보호자로 삼기도 했지요. 결국 이렇게 의무와 대를 이어 거듭되는 보호자-피보호자 관계는 로마 사회 인간관계와 사회관계의 중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국가의 평화가 이러한 유대의 연결망이 잘 돌아감으로써 얻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로마의 초기 역사와 영웅들을 훑어볼까요?
로마를 건국한 자를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의 저자)는 로물루스라고 전합니다. 리비우스의 『로마시 창건 이래의 로마 역사』에도 건국 이야기가 등장하며, 디오니시오스의 『고대 로마사』에도 나오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약간씩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종합하면 로물루스는 기원전 783년에 로마시를 창건했으며, 동생 레무스와 치열한 권력다툼을 한 끝에 동생을 살해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음울한 건국사를 되새기면서 권력투쟁의 위험성에 대해 늘 음미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전설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37년간 통치한 후 기원전 716년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하늘로 사라졌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상류계급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지도자를 암살하고 그의 시신을 감추었다고 의심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상류계급과 대중들은 대립하지만 곧 화해하게 되는데, 이는 로마의 이후 역사에서 전개된 소수 엘리트들과 다수 평민들 간의 대립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귀족들이든 평민들이든 로마가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형태의 정부와 제도가 더 나은지에 대해서는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계급적이고 근본적인 불일치로서 해결이 되려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난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후 로마는 일곱 왕을 거치지요. 두 번째 왕인 누마 폼필리우스(재위 기원전 715~673)의 경우, 신들에게 로마의 보호를 요청하는 종교의식의 절차와 사제단을, 확립한 왕으로 기억됩니다. 다음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재위 기원전 578~535)는 로마의 시민들을 정치적, 군사적 목적의 집단으로 조직하고 해방노예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관습을 확립하게 돼요. 그러나 이러한 제도혁신은 도시의 귀족계급들이 반발하는 바람에 붕괴했습니다. 이 부유한 가문들은 왕과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동률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왕이 더 큰 권력을 누리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것이지요. 또한 그들은 평민들이 왕을 지지하는 것에도 분개했습니다. 이런 상류계급들로 인해 왕은 항상 이들이 폭력으로 왕위를 뺏지 않을까 불안해했다고 합니다. 이렇다 보니 왕은 더욱더 평민들의 지지가 필요해지는 것이었지요.
기원전 509년경에 있었던 타르퀴니우스 왕의 폐위는 이러한 세력 다툼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유명한 고대의 강간사건이 등장하는데, 이 사건도 폐위에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타르퀴니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가 상류계급 남자의 아내인 루크레티아를 강간한 것이지요. 루크레티아는 복수의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습니다.
타르퀴니우스를 왕좌에서 몰아낸 이들은 스스로를 ‘해방자’라고 불렀으며,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를 주도했습니다. 이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우게 됩니다. 로마 공화정의 시작인 것이지요. 이들은 한 사람이 지배하는 왕정은 루크레티아 강간 사건과 같은 권력남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명분으로 혁명을 정당화했습니다.
‘공화국’(Republic)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서 온 말로서, ‘인민들의 것’, ‘인민들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공화국은 전체 공동체에 의해 구성되며, 전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이상을 표명하는 말이지요. 따라서 어떤 일에서든 인민의 동의와 그들의 이해관계가 고려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후의 로마 역사는 이 이상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음을 증명합니다. 이 이상의 좌절은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와 가이유스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와 살해라는 정치적 사건에서 잘 드러나지요. 두 형제는 로마의 저명한 상류계급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형제의 유명한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저명한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이었습니다. 이제 로마 공화정의 비극으로 기록되어 있는 그락쿠스 형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제가 참조하는 책은 바로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입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33년에 평민 호민관(말 그대로 '민중의 지킴이'로서 민중들에 의해 선출됩니다)의 직위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트리부스 평민회(평민들의 의회)를 움직여 개혁 법률을 채택하여 원로원(귀족들의 의회)을 분노케 했지요. 개혁법의 내용은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공전(노는 땅)을 땅 없는 로마인에게 재분배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농지 개혁'입니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합법적이었지만 로마 정치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이런 농지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원로원의 뜻을 무시함으로써 전통을 거역 한 셈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로마인들은 이 '전통과 관습'을 어기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특히 귀족들이 말이지요.
그 일이 있기 전에 사망한 페르가뭄의 아달로스 3세가 로마에 기증한 소아시아의 왕국이라는 유산에 대해 원로원이 접수 여부를 두고 의견을 결정하기도 전에 티베리우스는 그 기증된 땅을 땅 없는 사람들이 농장을 세울 수 있는 재분배용 토지로 사용하자고 발의했습니다. 땅 없는 농부들을 도우려는 티베리우스의 개혁안에는 확실히 정치적 의도가 있었지요. 그는 정치적 경쟁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했고 또 대중의 옹호자임을 자처함으로써 대중에게 인기가 높아지기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집 없는 동료 시민들을 동정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한다면 그건 너무 냉소적인 판단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는 맹수들도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고 죽은 사람들은 집도 절도 없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유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명목상 세상의 주인일 뿐, 그들의 땅뙈기 한 조각도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의 절절한 정의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농지 개혁안이 전례 없는 것이었다면, 티베리우스가 민회를 움직여 다른 호민관을 자리에서 쫓아내려 한 움직임 역시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호민관은 티베리우스의 새 법안을 계속 거부했던 인물이었지요. 티베리우스는 또한 다음 해에 호민관으로 다시 입후보하겠다고 선언하여 로마 국제의 오래된 금기 사항을 위반했습니다. 공화국에서는 어떤 관직을 연임하는 것을 관습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그의 일부 지지자들도 조상들의 관습을 무시한다며 그에게서 떠났습니다.
그 뒤에 벌어진 사건은 공화국의 정치적 건전성이 이제 끝나가기 시작한다는 신호였지요. 스키피오 나시카라는 전집정관이 한 무리의 원로원 의원들과 그들의 피보호자로 히여금 자신의 사촌인 티베리우스에게 기습전을 감행하라고 사주했습니다. 이 상류계급 테러단은 기원전 133년 후반에 카피톨리움 언덕에서 티베리우스와 그의 일부 동료들을 몽둥이로 구타하여 죽이고 맙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후기 공화국의 정치적 전략으로 폭력과 살인이 동원되는 슬픈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형의 뒤를 이어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전통적인 연임 금지 관습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123년과 그다음 해인 122년에 연속하여 호민관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가이우스도 로마 엘리트들을 위협하는 개혁안을 주도했지요. 가이우스는 형이 내놓았던 농지 개혁안을 되살렸고 로마의 시민들에게 국가 보조금에 의한 할인 가격으로 곡식을 배급하는 법안을 도입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 전역에 공공 토목 공사를 추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려 했고,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시민들에게 농업과 무역의 새로운 기회를 주려 했습니다.
가장 혁명적인 개혁안은 일부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자는 안과, 지방 총독 근무 시 부정부패로 피소된 의원들에게 배심원 심판을 받게 하자는 안이었습니다. 전자는 실패했고, 후자는 논쟁의 테이블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기소 제도는 자신과 가족을 범죄에 대한 징벌로부터 보호하려는 원로원의 권력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새 배심원들은 원로원 의원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에퀴테스(equites, '기사'라는 뜻)라는 사회 계급에서 충원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계급은 로마 시 이외의 지역에 가족의 터전과 연고가 있는 지주 상류계급 출신의 부유한 사람들이었지요. 공화국 초창기에 기사들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말을 제공할 수 있어서 기병으로 복무한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후기에 이르러 그들은 상류계급 중에서 제2진을 헝성하면서 정치보다는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정치적 관직에 야심을 가졌던 기사들은 종종 원로원의 주도세력에게 봉쇄당하곤 했습니다. 원로원 의원들은 의원이 상업으로 손을 더럽히는 것은 부적절하다면서 의원과 기사를 구분하여 사회적 신분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내려 했던 것이지요. 예를 들어 기원전 218년에 호민관 클라우디우스가 통과시킨 법은 원로원 의원과 그 아들이 대형 화물선을 소유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처럼 이윤추구 행위를 공식적으로 매도했는데도 원로원 의원들은 몰래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는 고리대금업이 그들에게 인기 있었지요. 그들은 중간 대리인이나 총애하는 노예를 고용하여 그 일을 담당하게 하여 이익을 챙기면서도 상업적 이득을 공식적으로는 감추었습니다.
속주에서 금품 갈취로 고소당한 원로원 의원들의 재판에 기사들을 배심원으로 앉힌다는 가이우스의 법안은 로마 정계에 기사 계급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신호였습니다. 더불어 원로원 귀족들의 부정부패가 백일하게 드러나는 일이기도 했지요. 원로원의 권력을 향한 이러한 위협은 의원들을 화나게 했지요. 그러자 가이우스는 경호대를 조직하여 상원의 적들이 저지를지 모르는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그는 형의 비극을 직접 목도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의원들은 기원전 121년에 사상 처음으로 투표에 의해 비상 결의를 발령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그것은 원로원이 집정관들(명령권을 가진 최고 권력 계층)에게 공화국이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하는 결의였습니다. 이 비상조치로 집정관 오피미우스는 로마시 안에서도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비상계엄령과 같은 것이지요. 로마 경내에서는 전통적으로 임페리움(명령권)을 가진 행정관들도 이런 권력을 휘두르진 못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가이우스는 체포당하여 처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노예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목을 치게 했습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암살과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강요된 자살은 로마 상류계급의 정치적 유대를 최종적으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야기했습니다. 두 형제와 그들의 적이 모두 상류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 계급이 이제 하나의 집단으로서 통일된 이해관계를 보호해주는 합의를 통해 통치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던 것이지요. 앞으로, 상류계급의 구성원들은 민중(포풀루스Populus)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는 평민파(포풀라레스 populares)와, 전통적인 상류계급인 '훌륭한 사람들', 즉 귀족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귀족파(옵티마테스optimates)로 점점 더 갈라지게 됩니다. 어떤 정치 지도자들은 각 당파가 주장하는 정책에 대한 동맹에 따라 이 파 혹은 저 파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또 다른 지도자들은 그들의 개인적 정치 경력에 이익이 되는 편의에 따라 이쪽 혹은 저쪽에 붙는 것을 편리하게 여기게 되었지요. 아무튼 로마 상류계급 내의 이런 분열은 후기 공화정 시대에 정치적 불안과 살인적 폭력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카이사르는 공화정 말기 로마의 위대한 영웅이지요. 그 이전에는 폼페이우스가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정복 사업은 엄청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교했고, 그에게 마그누스 Magnus(최고로 위대한)라는 별명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로마 속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을 확 늘렸다고 자랑했으며, 병사들에게 그들 몫의 전리품으로 12개월에서 6개월치 봉급을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땅들에서 정치적 조치를 취할 때 원로원과 의논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왕 노릇을 했고 전혀 공화국의 관리답게 행동하지 않았지요. 그의 성향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외국인들이 그의 조치가 부당하다고 항의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우리에게 법을 인용하는 것을 그만두시오 우리는 칼을 가지고 있소.
그야말로 대단한 위세지요? 이렇기 때문에 폼페이우스가 대대적인 군사적 성공을 거두자 로마에 있던 상류계급 경쟁자들은 분개하면서도 그를 두려워했던 것이지요.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으로 두 야심 찬 남자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노예 반란군의 지도자 스파르타쿠스를 진압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였습니다. 이들은 폼페이우스에게 반대하는 지원 세력을 얻기 위해 자신들을 '평민파(포풀라레스), 즉 평민들의 삶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지도자라고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그 진정성이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권력을 쥐기 위한 정치적 수사라고 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요?
사실 평민들의 삶은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았습니다. 로마 시의 주민은 근 100만 명 가까이 늘어났다 수십만 주민이 판자촌이나 다름없는 초라한 다층 건물에서 비좁게 살고 있었습니다. 일자리 찾기도 어려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정부의 배급 곡식에 의존하여 살았습니다. 개다가 로마에는 경찰이 없었기에 도시의 치안이 불안정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기원전 60년대에 이르러 경제 상태가 매우 불안정해졌습니다. 부동산 가치가 급격히 상승했다가 급격히 꺼지면서 생긴 불경기였지요. 술라(폼페이우스 이전의 독재자)가 징벌 고시를 발표하여 땅과 건물을 마구잡이로 몰수하면서 투기가 판치는 부동산 시장이 조성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장에 저당 잡힌 부동산들이 매물로 많이 나오면서 가격이 급락했습니다. 이 당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이 부동산을 저당 잡혀 지불 능력을 확보하려 했는데, 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런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기사 계급과 원로원 의원 계급의 많은 사람들은 생활이 고달프고 어려웠습니다.
기원전 63년에 터진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음모 사건은 상류계급 사람들이 부채와 가난 때문에 얼마나 고통에 시달렸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카틸리나는 부채에 시달린 귀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술라의 몰수 조치로 희생된 사람들과 상류계급의 채무자들을 자기 주위로 끌어모았습니다. 카틸리나는 집정관 선거에서 실패하자 좌절한 나머지, 폭력을 사용하여 정권을 잡으면 부와 재산을 지지자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목표를 밝히게 되지요.
그런데 기원전 63년에 두 집정관 중 한 사람이었던 키케로가 음모자들이 집정관들을 살해하기 전에 그들을 좌절시켰습니다. 카틸리나와 공동 음모자들은 설사 국가 권력을 잡았다 히더라도 불만을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산을 재분배하는 유일한 길은 그 당시 지급 능력이 있는 재산 소유자들을 전부 죽이는 것뿐이었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그들의 무모한 시도는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로마 정치에 폭력이 얼마나 흔해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62년에 동부 지중해에서 로마로 돌아오자, 정치지도자들 중 ‘훌륭한 사람들’은 그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의 군대에서 전역한 병사들에게 정복된 땅을 나누어 주는 토지 분배 조치에 대하여 지지를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원래의 의도가 좌절되자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함께 정치 동맹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 3인은 기원전 60년에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비공식 협력 체제를 맺었는데, 이를 가리켜 역사가들은 1차 삼두체제 Triumvirate라고 부릅니다. 이 동맹은 성공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동부의 토지 분배를 허가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제대군인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지요.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이 되어 5년 동안 골(갈리아) 지방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크라수스는 소아시아의 로마 세금 징수원들을 임명하는 권한을 확보하여 큰돈을 벌 기회를 얻었지요. 이들의 지지가 크라수스의 정치적 배경이 되었으며 그 수익 높은 사업에 그 자신도 한몫 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삼두체제는 각 거두에게 야망을 성취할 수단을 마련해주었지요.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대와 정복한 땅들에 대하여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여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를 바랐고, 카이사르는 최고위직인 집정관에 오르려는 야망을 성취하고 또 외국인들을 정복하여 영광과 전리품을 얻을 기회를 잡았습니다.
크라수스는 자신과 피보호자들을 재정적으로 도와 큰돈을 챙김으로써 나머지 두 거두와 정치적으로 어깨를 겨루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두 거두의 군사적 명성이 아무래도 크라수스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진행된 1차 삼두체제는 로마의 국체를 무시한 정치적 야합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 세 사람만을 위해 형성된 것이었지요. 그들은 공통적인 통치 철학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기에 삼두의 협력은 이 전통을 깨부수는 조치에서 개인적 이익을 얻는 동안에만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 체제의 불안정성을 잘 아는 삼두는 오랜 세월에 걸쳐 활용되어왔던 전략을 이용하여 그 체제에 영속성을 부여하려 했습니다. 즉, 그들은 그들끼리 정략결혼을 했던 것이지요. 이럴 때 여자는 동맹에서 교환품으로 거래되는 인질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자기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혼인시켰습니다. 그 딸은 다른 남자와 이미 약혼한 사이였으나 그 아버지는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딸의 선약보다 이 결혼을 더 중시했던 것이지요.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딸을 율리아에게 파혼당한 남자에게 내줌으로써 그를 위로했습니다. 상당히 야만적인 행태들이지요?
폼페이우스의 딸 역시 다른 남자와 이미 약혼한 상태였으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략결혼을 통해 두 강력한 적대자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외동딸이며 폼페이우스의 새 아내인 율리아가 그 이해관계를 연결해주는 동아줄이었던 것입니다. 율리아는 폼페이우스의 세 번째 아내였다. 놀라운 것은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가 자신의 두 번째 아내를 유혹한 사실을 알고서 그녀와 이혼했다는 것입니다. 이 자들의 권력욕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지요?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모든 문서 기록에 따르면, 정략결혼임이 분명했는데도 폼페이우스와 율리아는 깊이 사랑했다는 것이지요. 율리아가 살아 있는 한, 폼페이우스는 아내에 대한 애정으로 장인인 카이사르와 노골적으로 불화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4년에 율리아가 출산 도중에 사망하고, 아이도 그 직후 죽게 되자 돌변하게 됩니다. 과연 그 사랑이 진정한 것이었는지 의심스러운 것은 여기서부터겠지요? 결국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이어주던 유대는 회복불능의 상태로 깨어졌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잘은 모르는 카이사르(시이저)의 면모에 대해 좀 더 알아볼까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매우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가문은 베누스 여신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했지요. 카이사르의 드높은 야망은 그 명망 높은 가문의 광휘만큼이나 번쩍거렸습니다. 그는 정치 경력을 쌓고 폼페이 우스와 경쟁하여 로마 제1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많은 돈을 빌려다가 뿌렸습니다. 기원전 58년, 삼두의 한 명이 된 카이사르는 로마를 떠나 골 지방에서 군대의 지휘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 후 9년 동안 그는 독일 서쪽, 현재의 프랑스 지역을 누비면서 많은 민족을 정복했습니다. 심지어 브리튼 섬(지금의 영국)의 남단에까지 진출했습니다.
그 군대가 거두어들인 노예와 전리품의 가치는 너무나 막대하여 그가 졌던 엄청난 빚을 갚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병사들을 부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병사들은 그를 사랑했지요. 용병들의 특성상 돈을 주는 장군을 그들은 좋아하기 마련이었습니다. 또 그는 병사들과 대화를 나눌 때 스스럼이 없었으며, 전투에 나아가서는 병사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기꺼이 함께 나누었습니다. 골에서 그의 군사적 성공이 계속되자 로마에 있던 그의 정치적 경쟁자들은 그를 두려워했으나, 지지자들은 그가 로마로 안전하고 명예롭게 돌아올 수 있도록 사전 준비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카이사르의 친구들과 로마의 적들 사이의 경쟁은 유혈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기원전 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젊은이들로 구성된 정치 깡패들이 반대파를 구타하거나 죽이기 위해 로마의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기원전 53년에는 이런 시가전이 너무 치열하게 전개되어 그 해에 예정된 선거를 치를 수 없었고 그 결과 집정관이 선출되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후 정치깡패들과 선거방해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면 너무나 흡사합니다.
이 해에 크라수스가 사망하면서 삼두체제는 깨졌습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경력에서 모자라는 군사적 영광을 얻기 위해 로마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가 파르티아 사람들(이란 사람들)과 교전했습니다. 파르티아는 왕이 다스리는 군사적 귀족제의 나라로, 그 방대한 영토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동쪽의 인더스 강에까지 이르렀지요. 크라수스가 북부 메소포티미아의 카라이 전투에서 사망하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동맹도 끝나버렸습니다. 기원전 52년에 키이사르의 적들은 폼페이우스를 그 해의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것은 로마 국제의 전통과 가치에 어긋나는 조치였지요. 그런데 이때쯤 이르면 '위대한 로마의 관습' 같은 것은 간단히 무시되기 일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이 로마로 돌아올 때 자신을 보호하는 특별 조치를 요구했습니다. 즉 자신을 다음 해의 집정관으로 뽑아달라는 것이었지요. 카이사르의 요구에 원로원은 그렇게 해 줄 테니 골 지방 군대의 지휘권을 포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은 그와 그의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정복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예전의 술라처럼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기원전 49년 초에 이탈리아 북부의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의 시작을 알리는 말을 그리스어로 내뱉었습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 말은 어떤 행위의 개시를 천명하기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지요. 카이사르 군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를 따랐고, 이탈리아 도시와 농촌 마을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로마에도 많은 지지자들이 있었지요. 특히 그가 돈을 빌려주었거나 정치적 후원을 베풀어준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사람들 중 일부는 영락한 귀족이었는데, 부자들과 반대로 카이사르를 지원함으로써 과거의 큰 재산을 되찾고 싶어 했습니다.
카이사르의 공격에 대중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하자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의 다른 카이사르 적대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들은 겁을 집어먹은 채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그리스로 이동시켜 훈련을 시키며 카이사르의 경험 많은 군대와 대적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카이사르는 평화롭게 로마에 들어왔으나 곧 스페인으로 떠나 그곳에 있는 적들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서 그리스로 들어가 폼페이우스에게 결투를 요구했습니다. 그때 폼페이우스가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카이사르는 거의 전쟁에서 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풀뿌리에다 우유를 섞어 만든 거친 빵을 먹으면서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폼페이우스의 외곽 초소로 달려가 그 조잡한 빵을 벽 위로 내던지면서 띵에서 풀뿌리를 얻을 수 있는 한 결코 싸움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외쳐 대자, 폼페이우스는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나는 사나운 짐승들과 싸우고 있구나!"
폼페이우스는 그 빵을 병사들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병사들이 카이사르의 군대가 얼마나 강인 한지 알면 용기를 잃어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지요.
카이사르 군대의 높은 사기와 폼페이우스의 아주 허약한 지휘력이 겹치면서, 카이사르는 기원전 48년에 중부 그리스의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는데, 거기서 소년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신하들의 배신에 넘어가 비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이 소년 왕은 그전에 누나이며 아내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을 추방시킨 바 있었고, 내전에서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 이집트에서도 힘든 전쟁을 치러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 피라오를 나일 강에 빠뜨려 죽였고, 그의 누나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왕좌에 복귀시켜 그녀와 애정 행각을 벌이게 됩니다. 그 후 카이사르는 3년 동안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스페인의 적들과 힘들게 싸움을 벌이면서 3년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빈번하게 전투를 치른 시기에 그는 한 친구에게 다음의 유명한 세 단어가 쓰인 편지를 보냈습니다.
베니, 비디, 비키!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기원전 45년이 되자 이제 전장에서 그를 대적할 자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정치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싸움판보다 훨씬 더 위험했지요.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카이사르는 정치적으로 분열된 로마를 잘 다스려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가 대면한 문제는 아주 뿌리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그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분열된 정치판의 혼란스러운 폭력을 종식시키려면 단독 통치자가 필요했지요. 그러나 공화국 상류계급은 아주 오랫동안 왕정을 철저히 증오하는 전통을 유지해 왔습니다. 대 카토는 일찍이 그런 감정을 잘 표현한 바 있습니다.
왕은 사람의 살을 먹고사는 짐승이다.
사실상 카토의 이 말이 당시 로마 귀족과 민중들의 통념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카이사르의 해결안은 이름만 뺀 왕의 자격으로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48년에 자신을 독재관으로 임명하도록 원로원과 민회를 배후에서 조종했습니다. 기원전 44년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으로 임시직인 이 관직의 임기를 없애고, 자신의 조상을 새긴 동전이 보여주듯이, '상시 독재관 dictator perpetuo'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카이사르이지 왕이 아닙니다"라고 계속 말하고 다녔지요. 그러나 이런 명목상의 구분은 무의미했습니다. 겉으로는 정부의 절차가 예전과 다름없이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카이사르는 임기 제한이 없는 독재관으로서 친히 정부를 운영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장기적으로 어떤 정부를 구상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이후 행보를 보면 그의 숨은 야심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게 되지요.
카이사르는 아들이 없었기에 기원전 45년 9월에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Gaius Occavius(기원전 63-기원후 14년)를 후계자 겸 양자로 삼았습니다. 입양할 때는 통상 그러하듯 젊은이는 이름 끝부분을 옥타비우스에서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로 바꾸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 이름으로 알려졌다가 다시 아우구스투스 Augustus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나중에 로마의 통치자 자리를 옥타비우스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결국 로마는 카이사르의 야심대로 공화정을 버리고 황제를 추대하게 되었지요.
카이사르가 자신의 야심을 착착 실행하는 동안에도, 관직 선거는 계속되었고 카이사르는 지지자들이 장악한 민회를 통해 자신이 추천한 후보들이 당선되도록 결과를 조종했지요. 따라서 카이사르의 추천 인사들이 자연스럽게 당선되었습니다. 로마의 단독 통치자로서 그가 펼친 정책들은 야심만만하고 광범위했습니다. 그는 부채 규모를 축소했고, 보조 곡식을 받을 사람들의 수를 제한했으며, 공공 도서관의 건설을 포함하여 대규모 공공사업 프로그램을 개시했고, 이탈리아와 해외에 자기 군대의 제대병들을 위한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코린토스와 카르타고에 다시 식민 사업을 시작하여 상업의 중심지로 만들려 했으며, 이탈리아 도시들의 표준 행정 제도를 고시했고, 북부 이탈리아의 골족을 비롯한 비로마인에게도 시민권을 확대했습니다. 그는 원로원 의원 수를 600명에서 900명으로 늘리면서 비이탈리아인도 원로원에 들어오도록 허가했습니다 술라와는 다르게 그는 적들에게 징벌 고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관대함을 과시했지요. 그런 혜택을 받은 자는 로마의 전통상 고마움을 느끼는 피보호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특별 황금 의자 등 전례 없는 영예를 받았고, 한 해의 일곱 번째 달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영어의 7월은 July인데 그의 이름 Julius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1년을 365일로 규정함으로써 로마의 달력을 정비했는데,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달력에 바탕을 둔 것으로 현대 달력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살펴보면 카이사르는 참으로 정치에 능수능란한 자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독재 정치와 높은 명예에 평민들은 별로 불만이 없었으나 훌륭한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상류계급 사람들은 권력에서 배제되었다고 여겼고,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한 사람에 불과한 자에 의해 지배당한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게다가 그자는 공화국의 부자와 빈자의 영원한 갈등에서 빈자 편에 붙어버렸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로마 달력에서는 이날을 '3월의 이데스Ides"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카이사르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 음모자들은 자신들을 이른바 '해방자들이라고 불렀는데, 카이사르를 살해한 후에 로마를 다스릴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또 다른 폭력 없이도 공화국의 전통적인 정치 제도가 저절로 복원될 것이라고 믿은 듯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아무리 보아도 너무 단순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자칭 전통적인 로마의 자유 수호자들은 그 이전 술라 이후의 40년 세월이 가져온 공화정 파괴의 역사를 아예 무시해버린 것이지요.
실제로 카이사르의 장례식에서 폭동이 터져 나왔습니다. 일반 대중은 자신들의 영웅을 앗아간 상류계급을 향하여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귀족들은 단일한 공동 전선을 형성하기는커녕, 정치권력을 잡기 위해 자기들끼리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아주 무서운 기세의 또 다른 내전이 카이사르 암살 직후에 발발했지요. 이 시기에 이르러 공화국은 이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되었습니다. 이 갈등의 잿더미에서 서서히 변형된 왕정이 생겨났고 이 정치 체제 아래에서 로마의 역사가 그 후 수 세기 동안 전개됩니다. 그것을 바로 로마 '제정'이라고 하지요.
로마여행 잘 다녀오세요~~^^
참 마지막으로 2000년도 영화, 러셀 크로우의 출세작인 <글레디에이터>를 조금만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로마 검투사 막시무스의 이야기였지요.
<참고 문헌>
조르쥬 뒤비 편, [사생활의 역사 1-로마제국부터 천년까지], 새물결, 2002
토마스 R. 마틴 지음, 이종인 옮김, [고대 로마사-로물루스에서 유스티니아누스까지], 책과함께, 2015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숲,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