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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Apr 21. 2018

속도를 더 내, 지옥을 건널 때까지!

- '가속주의'와 기술정치철학

노마가 최근에 읽은 논문이 있는데요, 바로 <강도의 정치: 시몽동과 들뢰즈에게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육-후이, 루이스 모렐)입니다.


이 논문은 매우 흥미로운 최근의 철학 경향과 그것의 정치철학적 응용에 관해 논하고 있지요. 그 경향을 '가속주의'라고 합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가속주의는 현존하는 가장 진보적인 정치철학이다.


논문 전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해 보도록 하고요(이 글을 쓰고 얼마 후 브런치글 작성 완료ㅎㅎ-<21세기 정치철학 교본>), 우선 최근의 따끈따끈한 철학 사조에 해당되는 이 '가속주의'라는 게 뭔지 알아보도록 할게요.


'가속주의'가 뭔지 문헌을 살펴보려고 구글 검색을 해 봤는데요, 다행히 훌륭한 입문서 전체가 pdf로 올라와 있더군요.


로빈 맥케이(Robin Mackay)와 아르멘 아바네시안(Armen Avanessian)이 편집한 [#가속하다# 가속주의자 입문](#Accelerate# The Accelerationist Reader)이라는 책입니다. 여기 실린 필자들은 죽은 분들도 있고 살아 계신 분들도 있네요. 다들 쟁쟁합니다. 칼 맑스의 '기계에 관한 단상'이 처음에 실려 있고요, 토스타인 베블렌의 글도 보이네요. 그 외에 사무엘 버틀러, 질 들뢰즈와 가타리, 리오타르도 있습니다. 가속주의라는 정치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개론서로는 맞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꼭 읽어 봐야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예쁜 책이네요.

 

꼭 읽고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책 서문에 다음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가속주의는 정치적 이단이다.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해 가능한 유일하고 근본적인 정치적 응답이다. 그러한 응답은 자체 모순을 품고 있는 자본주의의 손아귀 안에서 저항하거나, 그것을 방해하거나, 또는 비평하지 않으며, 그것의 종말을 넋 놓고 기다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의 전복, 소외, 탈코드화, 추상적 경향성을 가속하려고 한다. 이 개념은 정치 이론 안에 어떤 특정한 허무주의적 동맹을 도입한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와 자본주의 문화 혹은 반문화의 과잉 상태와의 동맹이다. 또한 이 개념은 이러한 자본주의에서의 소외 과정의 내재성을 추구하는 글쓰기 안에 구체화된다. 가속주의는 체제에 대한 전복과 묵인 사이, 현실주의적 분석과 시적 격정 사이에서 요동치는 불안정한 지위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위가 가속주의를 치열하고도 경쟁적인 이론적 상태로 만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습니까? 첫 문장부터가 도발적이지요. 그리고선 새로운 세기와 문명의 반자본주의 대안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뭔가 대단한 녀석이 출현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응? 아니라고요? 뭐라 하는지 모르시겠다고요?

음... 제가 좀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실린 <가디언>지의 내용은 이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인지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한 번 보시죠.


가속주의자들은 기술, 그중 특히 컴퓨터 기술과 특유하게도 가장 공격적이고 글로벌한 다양성을 추구하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광범위하게 가속되고 있으며 강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것이 인간성을 전진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며, 또는 어떤 대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도래할 디지털 기술과 인간의 융합을 선호한다. 그들은 사업상의 규제 철폐와 극단적으로 작은 정부를 선호하곤 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경제와 기술에서의 진보가 통제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가속주의자들은 종종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대격변이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가속주의는 보수주의, 전통적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환경보호론, 보호무역주의, 대중추수주의, 국가주의, 지역주의 그리고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들에 반대한다. 이 이데올로기들은 현대 세계에서 벌어지는 막대한 기능 차질과 겉보기에 순식간인 변화 양상들에 대해 온건하거나 퇴행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언뜻 들으면 그냥 '막 살자' 처럼 느껴지는군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문헌을 뒤져 봤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노마의 눈에 아주 중요한 문헌이 발견되었습니다. 뭐 이미 알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서도.


가속주의를 정치철학적 신조로 받아들이는 두 사람이 바로 닉 스르니체크과 알렉스 윌리암스인데요, 이 두 사람이 '가속주의 선언'이라는 것을 썼습니다. 이 글은 앞서 소개드린 [가속주의자 입문]  347~362쪽에도 있습니다.

찾아보니 이미 번역하신 분이 계시네요. 요기.

이 기존 번역도 참조하여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은 제가 새로 번역하였습니다(특히 modernity를 일률적으로 근대성으로 번역한 부분은 문제가 있어요). 좀 기니까 일단 마음의 준비를... 중간중간 제가 그림을 곁들여 설명해 보도록 할게요.




가속주의자의 정치를 위한 선언


- 알렉스 윌리엄스(Alex Williams), 닉 스르니체크(Nick Srnicek)
    


01. 서론: 당면한 사태에 관하여     

1. 2010년대 초, 지구 문명은 새로운 형태의 대변동에 직면해 있다. 도래하고 있는 이런 종말론적 사건들은 국민국가의 탄생, 자본주의의 발흥, 그리고 전례 없는 이십 세기의 전란들 안에서 정련된 정치 규범과 그 조직적 구조들을 조롱한다.

가속주의자들은 임박한 환경위기를 비롯한 파국적 사건들에 대응하고자 합니다.


2.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 기후 환경 체계의 붕괴다. 이것은 현재 세계 인구의 존속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인류가 직면한 위협들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이 이 사태다.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다소 덜 위협적이지만 잠재적으로는 그와 똑같이 불안정성을 강화하는 일련의 문제들이 있는데, 이는 그것과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구제불능의 자원 고갈, 특히 물과 에너지 보존 자원의 고갈은 대량 기근, 경제적 패러다임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열전과 냉전들을 예고한다. 지속적인 금융 위기 상황으로 인해 각국 정부들은 긴축, 복지 사업 민영화, 대량 실업, 그리고 임금 정체라는 정책들을 수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 정부들을 무력화하는 치명적인 악순환을 초래했다. 지적 인 노동을 포함하는 생산 공정들의 자동화 증가는 자본주의의 세속적 위기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머지않아 [잘 사는] 북반구 국가들의 중간 계급들에게도 현재의 생활 기준을 유지할 수 없게 강제할 것이다.     

3. 이러한 파국적 사태들이 시시각각 가속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정치는 무능력에 유폐되어 있다. 여기서 무능력이란 도래하는 파멸적 상황에 대응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를 변형하는데 요구되는 새로운 이념들과 조직 양상을 일구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위기는 점점 더 힘과 속도를 더하는데, 정치는 퇴행하고, 정치적 상상력이 마비되면서, 미래도 함께 소실되어 버렸다.

가속주의는 좌파와 우파를 망라한 현대정치의 실패를 신자유주의에서 찾습니다.


4. 1979년 이래 전 지구적 정치 이데올로기를 주도한 것은 신자유주의였다. 이는 경제적 선진국들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발견된다. 새롭게 제기되는 전 지구적 문제들이 신자유주의에 심각한 구조적 도전을 부여함에도,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들은 오히려 심화되어 왔다. 이 문제들이란 이를테면 가까이는 2007-2008년 이후에 발생한 신용위기, 금융위기, 그리고 재정위기를 포괄한다. 신자유주의 2.0이라고 불리는 심화된 신자유주의 기획의 지속은 다시 한번 구조 조정 정책들을 국가 단위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 적용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현재 남아 있는 사민주의적 제도와 서비스들로서, 이에 대해 민간 부문(기업)은 침투 양식을 일신하여 공격 중이다. 이런 상황은 그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경제와 사회에서의 부정적 효과를 가져오고,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전 지구적 위기를 해결하는데 근본적인 장애를 만듦에도 계속되고 있다.

5. 여러 세력들, 이를테면 우파 정부, 비정부기구, 기업권력들이 신자유주의를 이렇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좌파세력과, 그와 관련된 세력들의 계속된 무능력과 마비 증상에도 일부 이유가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한 지난 삼십여 년 간 대개의 좌파 정당들은 그 급진성을 잃어버렸고, 공허해졌으며, 그에 따라 인민들은 그들에게 권한을 주지 않게 되어 버렸다. 전후 사민주의의 발생을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조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 정당들은 기껏 케인스주의 경제로의 회귀를 요구하면서 현재 위기에 대응해 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케인스주의적 명령에 따라 산업적인 포드주의적 대량 노동 체제로는 결코 회귀할 수 없다.

남아메리카 볼리비아 혁명의 신사회주의 체제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현대 자본주의의 전횡에 저항할 수 있는 그 역능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 체제들조차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인데, 이들이 여전히 이십 세기 중반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노동은 신자유주의적 기획에 따른 변화들에 의해 구조적으로 약화되면서, 제도적 층위에 머물러 경화증에 걸려 있다. 이들은 단지 새로운 구조 조정 정책들을 완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당분간 새로운 경제의 건설에 대한 체계적 접근, 또는 그런 변화를 헤쳐 나가기 위한 구조적 연대가 부재한 상태가 계속될 것이고, 노동의 역능은 무력하게 이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은 퇴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냉전이 끝나고 2008년 이후에 부활하면서 새롭게 출현한 사회 운동 인자들도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적 전망을 발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기존 체제에 대한 전략적 유효성을 생각하기보다, 내부의 직접민주주의적 과정과 감정적인 자기 평가에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는 "진정성"이라는 허약하고 덧없는 공동체적 즉물성으로 후퇴하고 있다. 이들은 이와 같은 것이 세계화된 자본의 추상적 폭력에 반대하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스스로를 신원시주의적 지역주의의 변화된 양태로 내세우고 있는 실정이다.

6.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전망이 부재한 근본적 사태 안에서, 이니셔티브를 쥔 우파 세력은 이러저러한 증거들이 있든 없든 간에, 자신들의 편협한 사유와 상상력을 끊임없이 전개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 좌파는 최악의 공격들 중 몇몇에 대해서만 부분적으로, 임시변통으로 저항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저항이란 결과적으로 저항 불가능한 조류에 맞서는 허풍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전 지구적인 규모에서 좌파 헤게모니를 새롭게 발생시키는 것은 가능한 미래들을 상실에서 구해내는 것일 뿐 아니라, 사실상 미래 자체를 구해내는 것과 함께 가는 것이다.



02. 이행기: 가속주의에 대하여


1. 만약 지금껏 어떤 체계가 가속이라는 관념들과 관련되어 왔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신진대사에서 필수적인 것은 경제 성장이다. 경제성장은  각각의 자본주의 주체들 간의 경쟁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에서 기술 발달을 누승화한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이데올로기적 자기표현은 창조적 파괴의 힘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 가속하는 기술적, 사회적 혁신들을 계속 해방시키는 것이다.     


기술적 특이점 이론은 자본주의 안에서의 혁신과정이라는 한계점을 지닌다고 가속주의자들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기술혁신을 자본주의 너머로 밀어붙이는 것.


2. 철학자 닉 랜드(Nick Land)는 전 지구적 전환이 자본주의적 속도를 통해 전대미문의 기술적 특이점을 향한 도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포착했다. 이는 다소 근시안적이지만 매혹적이며 예민하고 가치 있는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 관한 이 전망에 따르면, 인간적인 것은 결국에는 폐기될 운명이다. 여기서 인간적인 것이란 추상적이고 글로벌화된 지능에 대한 단순 무지한 장애물이다. 현재의 지능은 이전 문명들의 파편들로부터 빠르게 구성되는 브리콜라쥬이다. 그렇지만 랜드의 신자유주의는 속도를 가속도와 혼동한다.

우리는 재빨리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만 그러하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 안에 결단코 동요하지 않으며 엄격하게 규제된 일단의 매개변수를 가지고 있다. 이 안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가능성의 공간에서의 실험적 발견 과정이 아니라, 국부적 지평으로의 속도 증가, 다시 말해 우물쭈물하는 가속,  단순하고 멍청한 돌진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3.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적했듯이, 더 나쁜 점은 자본주의적 속도가 한편으로 탈영토화 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다른 편에서는 재영토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진보는 잉여 가치, 노동 예비군, 그리고 부동하는 자본이라는 기존의 틀거리 안에 긴박된다. 현대성은 경제 성장의 통계적 척도들로 환원되고, 사회적 혁신은 우리의 공통적인 과거에서 인용된 키치적 유물들로 장식된다. 이로써 대처-레이건식 탈규제는 빅토리아 조의 '기본으로 회귀하는' 가족적, 종교적 가치들과 평온하게 함께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신자유주의에서 더 심층적인 긴장은, 그것이 제공할 수 없는 구체적인 미래를 약속한다는 점에 놓인다. 다른 한편,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중, 자신을 문자 그대로의 현대화와 동의어처럼 여기면서, 현대화의 매개물로 본다. 그러나 사실상 신자유주의가 진전됨에 따라 보이는 것은 그 반대다. 여기서 현대성은 개별적인 창의성을 가능케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지적 발명을 제거하는 경향을 띤다. 이는 모두 전 지구적 공급 연쇄 라인들과 아시아적인 신포드주의적 생산 영역과 결합되어 계획된 상호작용을 위한 상호 촉발적 생산라인을 위한 것이다.  


가속주의자들에게 인지노동자들의 등장은 매우 중요한 계급구성의 변화입니다.


엘리트 지식 노동자들 중 사라져 가는 코그니타리아트(인지 노동자 계급)는 해마다 더 축소되고 있다. 그리고 감정과 지적 노동의 영역으로 알고리듬화 된 자동화 경향이 진입함에 따라 이러한 경향은 더 가중된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에 출한한 가치생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잠정적인 수단이었을 뿐,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필연적인 역사적 전개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위기의 극복이 아니라 위기의 누승화였다.     

5. 랜드도 그렇지만 맑스야말로 여전히 전형적인 가속주의 사상가이다. 현대 맑스주의자들의 천편일률적인 비판이나 행동과는 반대로, 맑스는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 변형시키고자 하는 시도에서 가장 선진적인 이론적 도구들과 경험적 자료를 사용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현대성에 저항했던 사상가가 아니라, 오히려 착취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여전히 가장 선진적인 경제 체계라는 점을 이해하고 거기서부터 분석하며 개입하려고 시도했던 사상가였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진보는 역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약을 넘어 그 가치 형태를 가속화해야 한다.     

6. 레닌은 1918년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회주의는 현대 과학의 최신 발견들에 기반한 대규모 자본주의적 공업이 없다면 생각할 수 없다. 또한 계획된 국가조직, 즉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생산과 분배에서 일치된 기준을 지속적으로 엄격히 준수하게 하는 조직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항상 이에 대해 언급해 다. 이마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아나키스트들과 당내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좌파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우리가 이를 설명하느라 단 한순간도 낭비할 가치가 없다."   

7. 맑스가 깨달았듯이, 자본주의는 진정한 가속의 행위주체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술사회적 가속에 대해 반대편에 존재하는 좌파 정치에 대한 호의적 평가도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심각한 허위진술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정치적 좌파가 미래를 선취하려 한다면 이런 억압된 가속주의적 경향을 최대한 수용해야 함에 틀림없다.       


03. 선언: 미래에 대하여    

1. 우리는 오늘날 좌파의 가장 중요한 분열이 전통적 정치과 가속주의 사이에 있다고 믿는다. 전자는 지역주의, 직접 행동, 그리고 끊임없는 수평주의를 견지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후자는 추상성, 복잡성, 전지구성, 그리고 기술의 현대성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가속주의 정치라고 불러야 할 것을 천명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또한 전자는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작은 임시 공간들을 확립하는 데 여전히 만족하며, 본질적으로 비지역적이고, 추상적이며, 우리 일상의 하부구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적들을 대면할 때 수반되는 진짜 문제들은 회피한다. 이런 방식의 정치는 애초부터 실패가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가속주의 정치는 후기 자본주의의 진전을 보존하려 하면서, 그것의 가치 체계, 통치 구조, 그리고 집단 병리가 허용할만한 것 너머로 자본주의를 밀어붙인다.     

가속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경제, 기술, 과학적 성과를 보존하면서, 그것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자 합니다.


2. 우리 모두는 덜 일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욕망은 전후 세계를 이끌어간 한 경제학자가 계몽된 자본주의는 불가피하게 노동 시간의 급진적인 감소를 향해 간다고 믿었던 이유에 대한 흥미로운 문제제기이다. <우리 후손들을 위한 경제적 전망>(1930)에서 케인즈는 개인들의 노동 시간이 하루 세 시간으로 줄어들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견했다. 하지만 실제 일어난 사태는 노동과 삶에 대한 구분의 점진적인 제거로서, 노동이 (일터와 집을 구분하지 않는) 사회적 공장의 모든 측면에 침투하는 것이다.     

3. 자본주의는 기술의 생산력을 제약하거나, 그것이 불필요하게 최소화된 협소한 목적들을 지향하도록 명령하기 시작했다. 특허 전쟁과 아이디어 독점 현상은, 경쟁을 초과하고자 하는 자본의 요청과 기술에 대한 점점 심화되는 퇴행적 접근방식 둘 다를 가리키는 최근의 현상이다.

철저하게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의 가속적 전진은 노동의 감소나 스트레스의 감소를 초래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주여행, 미래 충격, 그리고 혁명적인 기술적 가능성의 세계가 아니라, 다소 개량된 소비상품만이 유일하게 발전하는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똑같은 기본 상품의 끊임없는 반복적 생산이 인간의 가속역능을 재물로 삼으면서 사소한 소비 수요를 통해 연명하는 것이다.     

4. 우리는 포드주의로 회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한 일은 결단코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는,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억압된 지루한 삶의 대가로 사회보장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우둔하게 만들었다. 또한 기본적인 생활수준만을 유지하게 하는 획일적인 공장 환경이라는 생산 패러다임을 전제로 했다. 그런 체계는 식민지, 제국, 그리고 미개발 주변부라는 국제적 위계,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의 국내적 위계, 그리고 여성 복속의 견고한 가족적 위계에 의존했다. 많은 사람들이 느낄지도 모르는 향수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는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이 체제로 귀환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가속주의자들은 포디즘을 비롯한 전통적 체제로 회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5. 가속주의자들은 잠재적인 생산력들을 해방하기를 바란다. 이 해방의 기획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물질적 플랫폼은 파괴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공동 목적으로 재정향 되어야 한다. 현존하는 하부구조는 분쇄되어야 할 자본주의 무대가 아니라, 탈자본주의를 향해 도약할 지지대다.     

6. 자본주의적 목표들에 대한 기술과학의 (특히 1970년 말 이래의) 종속을 고려하면, 우리는 현대의 기술사회 조직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한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이미 개발된 기술에서 이용되지 않은 어떤 능력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완전히 알겠는가? 우리는 기술적 , 과학적 연구 대부분이 가진 진정한 변형 능력들이 여전히 활용되지 않고 있으며, 단순한 자본주의 연합체를 넘어서는 전환 이후에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쓸모없는 특징들(또는 적응 이전의 성질들)로 가득 차 있다는  데에 내기를 건다.     

7. 우리는 기술적 진화의 과정을 가속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지하는 것은 기술유토피아주의가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데 기술이 충분할 것이라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그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 정치적 행동이 없다면 결코 충분하지 않다. 기술과 사회적인 것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둘 중 한쪽의 변화는 다른 쪽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거나 강화한다. 기술유토피아주의자들은 가속화가 자동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극복할 것이라는 점에 근거를 두고 가속화를 지지하는 논변을 펼치는 반면, 우리 입장은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갈등을 쟁취하기 위해 기술이 필요해지기 때문에 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속주의자들은 기술유토피아주의와 거리를 둡니다. 이들에게 유토피아는 자연스럽게 오지 않고 갈등을 쟁취함으로써 옵니다.


8. 우리는 탈자본주의라면 그 어떤 것도 탈자본주의자의 기획을 요구할 것이라고 믿는다. 혁명 후에 인민들이 결코 자본주의로 회귀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경제적 체계를 자발적으로 구성할 것이라는 신념은 좋게 말해서 소박하고, 나쁘게 말해서 무지한 것이다. 탈자본주의적 기획을 진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현존 체제의 인지적 지도와 함께 미래의 경제적 체계에 대한 사유 이미지를 개발해야 한다.     

9. 이를 위해 좌파는 자본주의 사회에 의해 가능해진 모든 기술적 및 과학적 진보를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수량화가 제거되어야 할 악이 아니라 가능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할 도구라고 선언한다. 경제적 모형 구성은, 간단히 말해서, 복잡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신념에 근거하여 수학적 모형들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의 위험을 드러내지만, 이것은 수학 자체가 아니라 부당하고 불법적인 권위의 문제다. 사회적 연결망 분석, 행위자 기반 모델링, 빅데이터 분석학, 그리고 비평형 경제 모형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도구들은 현대 경제 같은 복잡한 체계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인지적 매개물들이다. 가속주의적 좌파는 이런 전문 분야들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10. 어떠한 사회적 변형이라 할지라도 경제적 및 사회적 실험을 포함해야 한다. 칠레의 프로젝트 사이버신(Project Cybersyn)이 이런 실험적 태도―정교한 경제적 모형 구성과 함께 선진 사이버네틱스 기술들을 기술적 하부구조 자체에서 예화 되어 나온 민주주의적 플랫폼과 융합하는―의 상징이다. 비슷한 실험들이 1950-1960년대 소비에트 경제에서도 실행되었는데, 최초의 공산주의 경제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사이버네틱스와 선형 프로그래밍을 채용한 것이었다. 이 실험들이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던 원인은 초기의 사이버네틱스 전문가들이 작업했던 정치적 및 기술적 제약에 있다.     

11. 좌파는 이념과 물질적 플랫폼의 영역 둘 다에서 사회기술적 헤게모니를 발전시켜야 한다. 플랫폼들은 전 지구적 사회의 하부구조다. 그것들은 행동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가능한 것들의 기본적인 매개변수들을 확립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랫폼들은 사회체에서 물질적으로 선험적인 것들을 구현한 것이다. 그것들은 특수한 행위, 관계, 그리고 권력들의 집합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현재 전 지구적 플랫폼의 대부분이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향해 편향되어 있지만, 이것은 불가피한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물질적인 생산, 금융, 수송, 그리고 소비의 플랫폼들은 탈자본주의적 목적을 지향하도록 재계획되고 재구성될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이다.     

12. 우리는 직접 행동이 이와 같은 것들을 성취하는 데 충분하다고 믿지 않는다. 행진하기, 표지판 들기, 그리고 일시적 자율 공간(temporary autonomous zone)을 구성하기라는 습관적인 전술들은 실질적인 성공에 대한 손쉬운 대체물이 될 위험에 놓여 있다. "최소한 우리는 무언가를 했다"라는 말은 유효한 행동이 아니라 자긍심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의 구호다. 좋은 전술에 대한 유일한 기준은 그것이 유의미한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지 여부다. 우리는 특수한 행동 유형들을 물신화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정치는 갈등, 적응과 반(反)적응, 그리고 전략적 무기 경쟁들로 분열된 일단의 역동적 체계들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반대편이 적응함에 따라 각각의 서로 다른 정치적 행동 유형이 점점 더 무뎌지고 비효과적인 것이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서, 전술의 대상이 되는 세력과 실체들이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반격하게 됨에 따라 익숙한 전술들을 폐기할 필요성이 점점 증가한다. 당대 불안의 핵심에 근접해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되어버린 당대 좌파의 무능력이다.    

13.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과도한 특권화는 폐기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급진적' 좌파 대부분에 의한 개방성, 수평성, 그리고 포괄성의 물신화는 무력함을 위한 무대를 세웠을 뿐이다. 비밀 엄수, 수직성, 그리고 배제도 효과적인 정치적 행동에서 나름의 자리(물론 배타적인 자리는 아닐지라도)가 있다.   

14. 민주주의는 단순히 그것의 수단―선거, 토론, 또는 의회―에 의해 규정될 수 없다. 진짜 민주주의는 그것의 목적―집단적인 자기 지배―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우리의 시회적, 기술적, 경제적, 심리적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지배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정치를 계몽주의의 유산과 동조시켜야 하는 기획이다. 전제적인 전체주의적 자본주의 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창발적 질서의 노예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분산된 수평적 유형들의 사회성에 덧붙여 집단적으로 통제되는 합법적인 수직적 권위를 상정할 필요가 있다. 계획의 명령(The command of The Plan)이 네트워크(The Network)의 즉흥적인 질서와 결합되어야 한다.     

가속주의자들은 위계와 수평적 네트워크가 리좀처럼 얽힌 직물구조를 바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15. 우리는 이런 벡터들을 구현하기 위한 이상적인 수단으로써 그 어떤 특수한 조직도 제시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항상 필요했던 것―은 서로 간의 상대적 힘들에 공명하고 되먹임 하는 조직들의 생태계, 세력들의 다원성이다. 종파주의는 중앙집중화만큼이나 좌파의 종말을 알리는 징후며, 그리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상이한 전술들(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까지도)의 실험을 계속 환영한다.     

16. 우리는 세 가지 구체적인 중기 목표들이 있다. 첫째, 우리는 지적인 하부구조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혁명의 몽 페를랭 소사이어티(the Mont Pelerin Society)를 모방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쇠약해진 이상들을 대체하고 넘어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경제적 및 사회적 모형들, 그리고 재화에 대한 전망을 만들어내는 과업이다. 이것은 이념들의 구성뿐 아니라, 그것들을 가르치고, 구체화하며, 확산시키는 제도와 물질적 경로들의 구성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에서 하부구조다.     

17. 둘째로, 우리는 대규모의 매체 혁신을 이룰 필요가 있다. 인터넷과 사회적 매체에 의해 제공되는 명백한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매체 수단은 탐사 저널리즘을 수행할 자금을 소유하고 있고, 서사들의 선택과 프레임 구성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하다. 이런 매체들을 인민의 통제권에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시키는 것이 사태에 대한 최근의 흐름들을 무력화하는 데 중요하다.     

18. 마지막으로, 우리는 계급 권력의 다양한 형식들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런 재구성은 조직적으로 생성된 전 지구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미 존재한다는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 그 대신에 그것은, 흔히 탈포드주의적 불안정 노동 형식들에서 구체화되는, 분리된 일단의 부분적인 프롤레타리아적 정체성들을 함께 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속주의자들은 매체 혁신과 그것의 습득을 매우 중시합니다.


19. 집단과 개인들은 이미 이것들 각각에 대해 작업 중에 있지만,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요구되는 것은, 각각이 나머지 것들을 더욱더 효과적으로 만듦으로써 당대의 결합을 교정하도록 세 가지 모두를 서로 되먹임 하는 것이다. 새로운 복잡한 헤게모니, 새로운 탈자본주의적인 기술사회적 플랫폼을 생성하는 하부구조적,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및 경제적 전환에서의 긍정적인 되먹임 고리. 역사는 그것이 항상 체계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전술과 조직들의 폭넓은 조립체였다는 점을 예증한다. 이런 교훈들을 배워야 한다.

20. 가장 실제적인 층위에서, 이런 목표들 각각을 성취하기 위해 가속주의적 좌파는 효과적인 새로운 정치적 하부구조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자금의 흐름들에 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거리에 있는 조직체들의 '인민 권력'을 넘어서 우리는 정부, 기관, 싱크탱크, 노조, 또는 개인 후원자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런 자금 흐름들의 위치와 이동을 가속주의적 좌파의 조직들의 효과적인 생태계를 재구성하기 시작하는 데 본질적이라고 간주한다.    

21. 우리는 사회와 그것의 환경에 대한 최대의 지배를 확보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정치만이 전 지구적 문제들을 다룰 수 있거나, 또는 자본에 대한 승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런 지배는 애초 계몽주의 시대 사상가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과 구별해야 한다.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면 매우 쉽게 지배되는 라플라스의 시계장치 우주는 오래전에 진지한 과학적 이해의 의제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이것은, 지배를 선천적으로 부당한 것만큼이나 원파시즘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탈근대성이라는 성가신 잔여물들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 행성과 우리 종을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문제들 때문에 새롭게 복잡한 모습으로 지배를 쇄신할 수밖에 없다고 제안한다. 우리는 우리 행동들의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확률적으로 가능한 결과의 범위는 결정할 수 있다. 그런 복잡계 분석에 결합되어야 하는 것은 새로운 형식의 행동이다. 이는 행동 과정에서만 보이는 것으로서, 지리사회학적 수완과 영리한 합리성의 정치 속에서만 발견되는 우연적인 것들로 작업하는 실천을 통해 설계될 수 있는 즉흥적인 행동이다. 복잡한 세계 속에서 최선의 행동 수단을 추구하는 귀추법적 실험 형식.   

22. 우리는 탈자본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만들어진 논변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부당할 뿐 아니라, 진보를 저지하는 체계다. 우리의 기술 발달은 자본주의에 의해 해방되었던 만큼이나 억제되고 있다. 가속주의는 이런 능력들이 자본주의적 사회에 부과된 제한을 넘어서게 됨으로써 해방될 수 있고 해방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믿음이다. 따라서 현재의 제약을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은 더 합리적인 전 지구적 사회를 위한 투쟁 이상의 것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십구 세기 중엽부터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벽까지 많은 사람들을 꼼짝 못 하게 한 꿈, 지구와 우리의 즉각적인 신체 형식들의 한계를 넘어서 팽창하고자 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탐색의 꿈을 회복하는 것도 포함해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이런 전망들은 더 순진무구한 시대의 유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것들은 우리 시대의 상상력의 놀라운 빈곤함을 진단하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약속을 제시한다. 이러한 약속은 지적인 활성화뿐 아니라 정동적으로 기분을 돋우는 것이다. 결국, 최소한의 기술적 개량의 세계를 넘어서 포괄적인 변화를 향해 움직이는 것은 가속주의적 정치―이십 세기 중반의 우주 계획들의 약속 어음을 이행할 수 있을―에 의해 가능해지는 탈자본주의적 사회일 뿐이다. 집단적 자기 지배의 시간과 그로부터 귀결되고 가능해지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미래를 향해. 자기비판과 자기 지배라는 계몽주의적 기획의 제거가 아니라 그 기획의 완수를 향해.     

23.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선택은 심각하다. 지구화된 탈자본주의냐, 아니면 원시주의, 영속적인 위기, 그리고 지구 생태계의 붕괴를 향한 느린 파편화냐.     

24. 미래는 구축(構築)될 필요가 있다. 현재, 미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어 더 큰 불평등, 갈등, 그리고 혼돈이라는 저렴한 약속으로 전락했다. 미래라는 이념 안에서의 이와 같은 붕괴는, 정치적 관점을 가로지르는 냉소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과 같이 회의주의적 성숙함의 신호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퇴행적인 역사적 상태가 드러내는 증상이다. 가속주의가 추진하는 것은 더 현대적인 미래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태생적으로 생성할 수 없는 대안적인 현대성이다. 우리의 지평을 외부(the Outside)의 보편적 가능성들을 향해 풀어놓을 때, 미래는 분명히 다시 한번 균열을 이루며 열릴 것이다.




요약:

1. 가속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과학기술 성과들을 긍정하면서,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합니다.


2. 이를 위해 새로운 노동계급들, 특히 인지노동과 관련되는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가속주의 혁신의 주체가 바로 그러한 인지노동자이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3. 하지만 마치 맑스의 <공산당 선언>이 그러하듯이 가속주의가 원하는 미래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혹시 그러한 청사진을 미루어놓고 있는 듯싶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 요약을 한 구절로 더 줄이면 아마 다음과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요?


후기 자본주의 안에서,

후기 자본주의를 이용해,

자본주의 자체 너머로.



'가속주의'는 이제 막 생겨나고 있는 가장 급진적인 정치철학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앞으로 어떤 논쟁과 발전 그리고 구체적 실천들을 해 나갈지 좀 지켜봐야겠지요?


가속주의, 지켜보겠어~~~




*이 글을 쓴 뒤 한참 뒤에 소개한 책의 '서문'을 편역했습니다. 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

https://nomadiaphilonote.tistory.com/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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