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뢰즈, 시몽동에서 '가속주의'로
이리저리 궁리 중이었는데요, 최근 읽은 논문이 하나 눈에 뙇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 논문입니다.
만만치 않은 난이도를 가진 글입니다. 같이 슬슬 접근해 봅시다.
제가 종종 보곤 하는 [들뢰즈 연구]라는 학술지에 2017년 11월에 실린 논문입니다. 이 저널은 주로 질 들뢰즈에 대한 연구논문을 싣지요. 에딘버그 대학에 소재한 들뢰즈 연구학회에서 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논문은 텍스트 전체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 논문 제목을 번역해 보면, <강도의 정치: 시몽동과 들뢰즈에게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제목에서 뭔가 감이 오시나요? 전혀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목부터가 이렇게 범상치 않아서 이걸 쓴 사람은 어떻게 생겨 먹었나 싶어 구글링을 해봤습니다(공부하기 싫을 때 딴짓... ).
왼쪽 사진을 보고 무서워지는 건 저뿐인지 모르겠습니다. ㄷㄷ. 그런데 공저자인 루이스 모렐(Louis Morelle)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군요. 다만 파리 1 대학의 대학원생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육-후이에 대해서만 설명해보도록 할게요. 이 분에 대한 오피셜한 정보 원문은 http://www.digitalmilieu.net/yuk/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분 현재 소속은 독일 루네부르그에 소재한 루파나 대학이에요. 여기서 하빌리타치온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오는 2018년 여름에 과정을 마친다는군요. 아, 하빌리타치온 과정이란 우리나라 대학에는 없는 코스인데요, 박사를 졸업하고 '강사' 자격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이 과정을 거쳐야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분 대학을 두 번 다녔는데, 한 번은 홍콩대에서 컴퓨터를 전공했고, 또 한 번은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어요. 역시 21세기의 철학은 공학적 사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이 분이 주로 연구하는 분야가 바로 '기술철학'이라는 파트입니다. 오늘 소개할 논문도 그 방면 이야기가 정치철학과 결합되는 글이고요.
책이 한 권 출판되어 있는데 아주 읽어 보고 싶게 만듭니다. 이 사람의 박사논문을 출간한 것이거든요. 게다가 기술철학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가 서문을 써 주었네요. 바로 이 책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논문 제목에 두 사람의 철학자가 나옵니다. 시몽동과 들뢰즈. 그러고 보니 제가 시몽동에 대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들뢰즈에 대한 소개는 이미 다른 브런치 글에서 했습니다(<낯선 타인과 춤추기>).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은 물론 철학자입니다. 태어난 곳은 생-에티엔이라는 곳이고요. 이 분은 철학 중에서도 '기술철학'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기계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지요. 기계철학은 들뢰즈 이후 현대철학의 핫테마라고 할 수 있는 분과입니다. 이제 철학을 하려면, 공학과 물리학 정도(덤으로 생물학)는 같이 해야 한다는 이야기되겠습니다(공학도 물리학도 모르는 저는 어디로?).
시몽동은 프랑스의 수재들만 간다는 '에꼴 노르말 수프리외', 즉 '고등사범학교'와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요. 스승들도 쟁쟁합니다. 조르쥬 캉길렘(이 분은 과학철학자이고 들뢰즈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마르시알 게루(스피노자 철학의 권위자입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유명한 현상학자이지요)가 그들입니다. 1958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소르본과 푸아티에, 파리 4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일반 심리학과 기술공학 실험실>을 설립하여 연구활동에 매진했습니다. 주요 저서는 박사학위 논문([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인데요 이 논문은 처음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출판됩니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논문 전체가 온전히 출간된 것은 2005년이고, 밀롱(Millon)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2013년에 개정판이 나왔지요). 그리고 부논문도 아주 중요합니다. 프랑스에서는 대체로 이렇게 주논문과 부논문 2개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씁니다. 부논문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입니다. 시몽동의 주논문과 부논문 둘 다 한국어 번역판이 있어요(번역자들의 노고에 박수를!)
시몽동 철학의 핵심 개념은 '개체화'입니다. 이 개념만을 거의 평생 물고 늘어져서, 과학철학, 기술철학, 기계철학을 일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존재론을 전개했지요. 이런 시도는 당대의 들뢰즈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후 안토니오 네그리 등의 정치철학, 브라이언 마수미와 베르나르 스티글러와 같은 과학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전에 푸코가 들뢰즈를 두고 이와 같이 말했지요.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다"라고요.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21세기는 들뢰즈와 시몽동의 세기가 될 것이다.
자, 그럼 시몽동과 들뢰즈에 대해 대강 알아봤으니 논문으로 들어갑시다. 우선 목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논문제목: 강도의 정치: 시몽동과 들뢰즈에게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
저자: 육 후이(루파나 대학), 루이스 모렐(파리 1 대학)
- 논문 초록
- 키워드: 강도, 가속주의, 개체화, 기술, 시몽동, 들뢰즈
I. 존재론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강도
II. 들뢰즈의 '가속': 강도에서 변조로
III. 또 다른 '가속': 내적 공명으로서의 강도
IV. 변조, 도래할 강도의 정치
V. 결론
논믄초록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뭐, 이런 도입부는 거의 정형화되어 있어요. 논문의 목적을 밝히는 것이지요.
이 논문은 시몽동과 들뢰즈의 사유에서 속도와 강도의 문제를 명료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 말의 속 개념들을 살펴보면 아마 철학 전공자들도 다소 낯설 것 같습니다. '속도'와 '강도'라는 개념이 그렇지요. 사실 이 개념은 전통적인 철학 개념이라기보다는 과학 개념에 가깝지요? 전공자들이라 해도 과학철학이나 기술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낯설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말 뒤에 후이는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이는 가속주의(accelerationism)와 그것의 정치학에 대한 논쟁을 조명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가속주의'가 뭘까요? 자동차를 씐나게 밟아가는 철학이란 뜻일까요? ㅎㅎ
그...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찾아본 후 꽤 긴 글을 썼는데, 여기서는 다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아 다른 페이지에 써 놓았지요. 요기요-><속도를 더 내, 지옥을 건널 때까지!>
그런데 또 하나 문제가 있네요. 저기 논문의 목적을 밝혀 놓은 부분에 보이는 '강도'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이 논문 안에 한 장을 할애해서 설명이 되고 있어요. 그러니 이건 찬찬히 따라가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아무튼 저자들은 목적을 밝힌 후에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을 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가속주의 정치와 더불어 강도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속도에 대한 집착 없이 어떻게 강도의 정치학을 사유할 수 있는가?
정말 무지무지하게 아리송합니다. 이게 질문인지도 의문이군요. 자, 좀 더 참을성 있게 접근해 보도록 하죠. 이제부터는 저자들의 목소리를 제가 쉽게 풀어서 요약해 보겠습니다. 그림을 곁들여서 말이지요.
우선 저자들은 시몽동의 이론에서 개체화(individuation)는 강도에 대한 논의의 핵심에 자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가 보기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어요. 시몽동은 이 한 개념을 가지고 평생 철학한 사람이니까요.
이 개념은 생성과 존재의 조화를 목표로 합니다. 쉽게 말해서 개체화라는 개념은 여기 내가 '있다'라는 사실과 내가 '움직인다'라는 두 사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몽동은 이 개념에 현대의 기술과 과학적 성과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철학을 구사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개체화를 좀 더 설명해 보지요. 개체화란 처음부터 끝까지 준안정(metastable)적인 상태로 지속되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개체'는 안정된 '결과'라면 개체화는 계속되는 요동과 불일치로 이루어지는 '과정'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이건 사실 우리가 잘 지각하지 못하는 측면을 시몽동이 발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 여기 있어요~'(존재)라고 말하지 '나 여기 있게 되어요~'(생성)라고 말하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보다 근본적인 것은 내가 여기 붙박여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있다는 사실(존재)이 아니라, 늘상, 시시각각 변하면서, 최소한 눈이라도 깜박이면서 뭔가가 '되어 간다'(생성)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만물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몽동에게는 '개체화'라는 개념과 더불어 변환(transduction)이라는 개념도 중요합니다. '변환'은 본래 물리적으로는 에너지의 전환을 의미하고 생물학적으로는 유전형질의 변화를 의미하지요. 그런데 시몽동은 이 두 의미를 포괄하면서, '논리적 의미'로도 이 말을 사용합니다. 즉 변환은 연역과 귀납과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저자들의 말을 직접 들어 보시죠.
전통적 논리학인 귀납과 연역은 명제들의 추론에 대해 작동하지만, 변환은 질문에 속해 있는 존재의 구조를 변형시키도록 이끈다.
요상한 말처럼 들리지요? 그런데 다음에 오는 설명을 들으면 좀 수긍이 갑니다. 끝까지 들어 보시죠.
변환이란 긴장들과 불일치들로부터 초래되는 강도에 의해 지배되며 조건 지어진다. 변환은 정보라는 측면에서 형태를 구성하며, 강도라는 측면에서 정보를 구성한다. 또는 이것은 불균등성(disparation)이기도 하다. 불균등성은 개체화의 조건이며, 물리적, 생물학적, 심리적 존재자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환이라는 것이 '정보'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존재하는 것들의 '과정'이라는 의미로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유전자들은 '정보'의 덩어리들이지요. 그 정보들을 교환하는 것이 유전자의 일입니다. 이는 컴퓨터와 같은 인공지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물리적 차원에서는 '결정화' 작용(물이 얼음이 되는 과정이 대표적인 사례이지요)에서 입자들 간에 '형태'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일정한 기하학적 결정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강도'의 작용이 없으면 불가능해집니다.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변환 작용은 그 오가는 작용에 필요한 '힘'을 강도로부터 얻습니다. 정보가 형태를 구성하고, 또 그 정보는 존재하는 것들의 '강도'가 구성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것이 어떤 원리에 따라 구성되느냐고 물을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이쪽과 저쪽의 '불균등성'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변환은 일종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흐르려면 양쪽 간에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즉 높낮이, 에너지의 차이 등등이 말이지요.
강도는 변환이 수행되는 그 '차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한 항에서 다른 항으로 움직이면서 변환되는 과정은 '질문-응답'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래'라는 정보를 '위'에 주면(질문하면), '위'는 '아래'에 응답하면서 강도를 선사하는 것이지요. 생명체들의 변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체들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유전자라는 미시 수준과 신체라는 거시 수준 모두에서 환경에 질문을 던지고, 환경은 생명체에 '강도'를 선사하면서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불균등성'이 해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유지든, 폭포의 흐름이든 '차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흐름이 이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시몽동뿐 아니라 들뢰즈에게서도 개체화는 중요한 개념인데요, 이것은 강도로부터 생산되는 활동입니다. 그런데 들뢰즈를 참조하다 보면, 개체화 과정이 '차이'와 결정적인 관련을 가지고, 또한 이 차이는 '강도'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몽동에게서는 '차이'보다 '불균등성' 개념이 개체화를 설명하는데 관건인데, 들뢰즈에게서는 '차이'가 더 중요해 보입니다. 둘 다 비슷해 보이는데, 좀 다른 점은,
시몽동이 불균등성을 통해 강도를 설명한다면, 들뢰즈는 불균등성의 핵심이 차이이고, 이 차이가 곧 강도라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철학사적으로 봤을 때도 이 둘이 겨냥하는 지점은 다른데요, 시몽동은 아주 고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비판하고자 하지만, 들뢰즈의 경우에는 칸트의 감각과 지성 개념을 비판하고자 하지요. 칸트에 반대하면서 들뢰즈는 지각 과정(사물을 감각하고 개념화하기 직전까지의 과정)은 순수 직관(시공간에 대한 직관)에 의해 지배되지도 않고, 지성의 범주(양. 질. 관계과 같은 보편적 개념 도구)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지각 과정은 감각의 강도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폭포의 물 알갱이 하나하나처럼 지각과 대상이 서로 부딪히면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감각적 강도 이전의 지배 주체가 없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표상', 범주라는 '표상' 이전의 상황이에요. 표상은 지각 과정, 즉 강도적 감각 과정 이후에 구성되는 것이지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에서 자주 등장하는 '강도'란 무엇일까요? 논문 저자들도 인용하고 있고, 많은 철학자들이 흔히 예시로 드는 것은 '온도'입니다. '강도'는 온도를 측정하면서 양으로 표시됩니다. 이를테면 31도 C와 같은 것이 있지요. 그런데 이 31도 C는 그 자체로 특이성(단독성, singularity)입니다. 즉 그것이 21+10도 C로 분해될 수 있다거나, 1X31도 C로 결합되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31도 C는 그 자체 기온의 '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강도는 해당 존재자의 특이성을 지시하는 것이며, 다수의 단위들로 분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와 같은 강도의 특성이 속도와 가속도에도 적용됩니다. 속도와 가속도는 각각의 시간에 본성적인 변화 없이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즉 이 두 물리량은 '연속되는 특이성'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칸트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고, 들뢰즈는 이를 원용합니다. 하지만 칸트의 논의를 더 밀어붙이게 되지요. 이렇게 하는 데 있어서 시몽동의 철학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강도'를 '양'이라는 칸트적 범주뿐 아니라, '관계'와 '양상'이라는 시몽동의 동력학적 범주에도 연결시키는 것이지요.
따라서 들뢰즈는 강도라는 개념을 칸트적인 초월적 층위에서 내재성의 층위로 되가져 옵니다. 즉 표상의 논리에서 강도의 논리로 말이지요. 표상의 논리를 '초월적'으로 강도의 논리를 '내재적'으로 옮기는 것이 좀 이상해 보이지요? 이것은 좀 전에 예를 든 온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온도는 초월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내재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어요. 초월적으로 표현된 온도는 '31도 C'라는 단순한 숫자를 측정 절댓값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재적으로 표현된 온도는 같은 수치를 절댓값이 아니라 상대값으로 치환하는 것이지요. 31도 C 안에 존재하는 여러 온도의 느낌들, 또는 31도라는 기준값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잔여값들, 30. 9999999... 도 C, 또는 31.00000000001.... 도 C 같은 것들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2장으로 와서 들뢰즈의 '가속' 개념이 '강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논지를 전개합니다. 강도와 가속이 기본적으로는 개체화 안에서 상호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도란 구조적 변환으로 향해가기 때문이다. 여기 비로소 강도와 연관하여 시몽동과 들뢰즈의 기획 사이에 주목할만한 분기점이 형성된다. 시몽동의 경우 강도란 유적 과정(generic process)으로서의 '개체화'와 동일시되는 반면, 들뢰즈의 경우 강도란 '차이로서의 존재'라는 이름을 획득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들은 들뢰즈의 존재론을 정치철학과 접목시키고자 합니다. 존재론과 정치철학의 행복한 만남이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선 저자들은 시몽동과 들뢰즈의 차이가 위와 같다는 것을 제시한 다음, 강도 개념이 역사 정치적 맥락에서 변형된다고 봅니다. 그 변형된 개념이 '흐름들'과 '욕망'이라는 것이지요. 이 개념으로의 변형과정은 가타리(Felix Guattari)와의 공저인 [앙띠 오이디푸스]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논문 저자들이 인용하는 [앙띠 오이디푸스]의 해당 부분을 옮겨 볼게요.
어떤 혁명적 길이 있을까? 하나라도 있을까? 사미르 아민이 제3 세계 나라들에 충고하듯, 세계시장에서 파시스트적 <경제해법>이라는 기묘한 갱신 속으로 퇴행하는 것?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말하자면 시장의 운동,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더욱더 멀리 가는 것? 왜냐하면 아마도 고도로 분열적인 흐름들의 이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보면, 흐름들은 아직 충분히 탈영토화 되지도, 탈코드화 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퇴행하지 않고, 더 멀리 가야 한다. 니체가 말했듯, <과정을 가속하라.> 사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p. 406).
# # 페이지수는 김재인 2014 번역판입니다. 번역은 일부 수정했어요).
이 구절은 '가속 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특히 '과정을 가속하라'라는 말은 이들의 슬로건이기도 하지요. 들뢰즈와 가타리, 혹은 니체의 이 슬로건을 위에 언급한 단어들과 더불어 다르게 해석하면, '흐름'과 '욕망'을 가속하라, 또는 '기존의 흐름과 욕망을 탈영토화 하라'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가속주의자들과 저자들은 이 부분에서 존재론이 정치철학으로 변형되는 어떤 '문턱'을 보는 것이지요.
저자들에 따르면, 바로 [앙띠 오이디푸스]야말로 '존재론의 정치철학'이라는 가장 첨예한 철학의 분과를 드러내는 중요한 저작이 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란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서 두 가지 항목에 따라 형성됩니다. 하나는 바로 '욕망'이지요. 이것은 '정치화된 강도'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의 '근원적인 불안정성'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요? 쉽게 말해 자본주의 체계라는 것은 끊임없는 불안정성 하에 진행, 발전, 퇴행되는데(공황이나, 노사갈등, 전쟁 등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촉진시키거나 저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또 이 욕망의 흐름에 촉발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불안정성과 욕망의 피드백이 자본주의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소비심리를 구성하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고등학교 경제나 사회문화 시간에 배우는'이스털린 역설'이나 '트레드밀 효과'를 예로 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이러한 욕망의 흐름과 불안정성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라는 것이 저자들과 들뢰즈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한계는 곧장 사건을 향해 가는데요, 이것은 아마도 '혁명적 사건'일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들뢰즈의 개념은 [천의 고원]이라는 저작에 와서는 '배치'(assemblage)라는 것으로 바뀌는데요, 사실은 그 이전에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라는 짧은 논문에서 이에 관한 논의가 이미 진행되었다고 봅니다. 이 짧은 논문은 들뢰즈가 푸코의 '규율사회'(또는 '훈육사회')에서 '주권사회'로의 이행이라는 테제를 이어받아 '통제사회'라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기술합니다. 이에 따르면 통제사회의 특성은 '돌연변이 변형'(mutation)입니다.
들뢰즈의 통제사회는 푸코의 통치체제가 돌연변이 변형을 거쳐 전 사회적 기제로 확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권력은 더 이상 폐쇄된 공간(푸코의 경우 학교, 감옥, 병원, 공장)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개인에 대해 외적으로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열린 공간에서 개인들 각각의 내재성의 장 안으로 침투해 들어갑니다. 들뢰즈는 이를 '변조'(modulation)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바로 '강도' 개념과 연관이 깊습니다. 즉 통제사회에서 내재적인 권력화 과정은 강도를 통해 변조된다는 것이지요. 이때 규율은 개인들 각각의 자율적 과정 안에서 내면화됩니다. 이때 강도는 욕망이기도 하고, 심리적인 권력이기도 하며, 사회적 관계며, 심지어 사랑이기도 합니다. 이것들 모두가 규율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규율'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규율입니다.
통제사회에서의 개체화는 바로 규율의 내면화며 강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와 시몽동이 정치철학에서 만나는 지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러한 통제사회를 하나의 기계(machine)로 묘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시몽동의 개체화에 관한 저작들에서 가져온 이 '기계' 개념은 후기 들뢰즈 철학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누리게 됩니다. 이는 또한 가타리의 독립적인 저작들에서도 아주 중요한 개념이지요. 이것은 단순히 공학적인 기계류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의미로 쓰이지요. 그것을 정의 내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질적인 요소들의 배치
여기서 '요소들'이란 성적인 것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기도 하며, 경제적이기도 한 요소들입니다. 논문 저자들은 여기서부터는 다시 들뢰즈와 시몽동이 갈라지는 지점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시몽동에게 개체화는 다만 발생론적으로 중립화되어 있지만, 들뢰즈에게서 개체화는 그것 자체가 '문제'며, 사회 정치적 평면에서 펼쳐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라는 이 짧은 논문이 매우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이 논문에서는 들뢰즈의 존재론과 정치철학, 그리고 기술철학의 구분이 불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실제로 기계에 관한 이러한 개념 규정이 유의미한 것은 현대사회, 특히 포스트-포디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기술적 과정이 인간의 욕망, 그리고 정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돌아갑니다. 예를 들면, AI에 관한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거기 연결되는 인간의 지식에 대한 욕망, 직업에 관한 욕망이 변조되고, 정치적으로 그 기술을 통제하고자 하는 각축이 일어나며, 그에 관한 윤리학이 발전하게 되는 식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매우 빠르게 발생합니다.
시몽동은 이 변조 과정에서 인간과 기계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이를 그는 '공명'(resonance) 또는 개체화와 관련하여 '내적 공명'(internal resonance)라고 칭합니다. 이 내적 공명을 개체화와 연관해서 보면, 어떠한 준안정상태(matastable)로 진입하기 전의 개체화 과정, 변형과정에서 강도를 특징짓는 용어가 됩니다. 그런데 시몽동에 따르면 인간은 산업화 시기에 '기술적 개체'로서의 그 중심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소외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시몽동은 어떤 인간론적인 기술 윤리로 퇴행하지 않고, 논의를 더 진행시킵니다. 그는 산업화가 더 진행되면서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노예대 노예의 관계로 들어설 것이라고 예견하지요.
논문 저자들은 이 노예대 노예의 관계를, 베르나르 스티글러의 개념을 빌려 '프롤레타리아화'(proletarisation)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티글러와 저자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화'란 흔히 이야기되듯이 가난하거나 일하는 계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지식 소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를테면 어떤 사람의 기술이나 지식이 더 이상 쓸모없어지는 것이지요. AI의 발전으로 소위 전문직이라 할 수 있는 회계사나 변호사의 직업적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현상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게 어떠한 혁명적 정치학의 사유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들은 주장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고, 그것을 가속시키는 것이 바로 이 상황을 돌파하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들은 또 다른 이론가인 토스카노(Alberto Toscano)를 인용합니다. 토스카노의 테제는 '혁명적 가능성으로서의 불균등성의 변조'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스카노는 시몽동의 그룹(group) 개념을 정치철학적으로 전용하여, 혁명적 잠재성으로서의 그룹의 구성에 대해 논합니다. 다시 말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혁신하게 될 가능성은 잠재적 힘들을 변조해냄으로써 증폭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혁명의 개체화'라는 토스카노의 또 다른 테제는 바로 이러한 변조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개체화'라는 것이 '개별화'와는 아주 다르다는 점입니다. 개별화는 원자화와 같이 따로따로 떨어진 추상적 실체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재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에 불과하지요. 개체화는 사람과 사람, 동물과 동물, 또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사람과 기계 간의 집합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개인에게 있어서는 세포와 세포들의 집합화이지요. 이를 토스카노는 '그룹'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조 과정에 대항하는 것도 아니고, 강도라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비평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 자신을 이러한 패러다임 안에 위치시키고, 다른 변조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도적 과정들이 이미 근원적인 흐름이 되었다는 것을 목도합니다. 스티글러의 논의를 다시 도입하자면, 20세기는 소비주의 사회라고들 합니다. 이 사회는 이런저런 상징들, 기호들, 이미지들의 조작, 그리고 마케팅에서의 욕구의 조작을 통해 비개체화(disindividuation)를 달성하였지요. 이러한 경향은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스마트 기기들, 나노 기술, 인공 지능과 소셜 네트워크 등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스티글러에게 비개체화란 개체화를 달성하기 힘들게 하는, 다른 말로 해서 '다른 변조'를 생산하기 힘들게 하는 장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장애물은 누군가가 스스로를 개체화하기 위한 강도를 상실할 때 더 두드러집니다. 이는 통제불능 상태로 이끌고 끝내는 '죽음을 향한 가속'이 되고 말지요. 예를 들면 이런저런 유형의 기술 중독들(게임중독, 인터넷 중독, 스마트폰 중독들)이 이러한 것에 해당된다고 보입니다.
저자들은 논문의 말미에 들뢰즈와 시몽동을 포함하여 언급된 네 명의 철학자들(토스카노와 스티글러 까지)은 기술이 그 목적이 확정될 수 없는 방향으로 강도들을 이끌고 증폭하는 기능을 제공할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고 논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기술발전이 지속적으로 가속된다면, 그것은 기계들과 서로를 횡단하는 개체들 사이에 어떤 내적 공명을 찾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이를 토스카노의 용어를 빌려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발명의 정치
'발명의 정치'란 어떤 특이점을 향해 가는 기술의 가속에 찬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혁명적 기회를 위해 그러한 기술을 이용하는 것만도 아니지요.
발명의 정치란 그룹들의 잠재력을 공명 시키고 증폭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들을 발명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적 대상들이 그 자체로 개체 '횡단 개체적 관계', 즉 개체를 횡단하여 관계 맺는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저항방식(이를테면 오픈소스 운동이나, 탈중심화 운동 등등)은 기술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여전히 구닥다리 질료-형상론에 머물러 있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운동들은 기존의 전형들을 반복하기만 할 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저항'의 가능성을 재구성하기를 원한다면, '혁신의 정치'(politics of innovation), 즉 시장과 통제 정치에 의해 광범위하게 조정되는 그러한 정치가 아니라 발명의 정치를 구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이렇게 토스카노의 개념을 새로운 정치의 슬로건으로 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발명의 정치는 아마도 기존의 저항방식을 탈피하되, 자족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에 잘 적응하고, 그것을 매개로 삼아 전략과 전술을 발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러한 저항의 예로 '스노든'과 '어노니머스'가 떠올랐습니다. 앞사람은 자신의 기술자산을 활용하여 기존 권력의 정보를 누설함으로써 체제를 뒤흔들었고, 후자는 시시때때로 출몰하면서 해킹을 활용하여 같은 효과를 달성하는 집합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러한 예는 다소 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제 이 다소 난해한 논문에 대한 설명을 마쳤습니다.
어떻습니까? 여전히 어렵지요? 그래도 일단 이 정도로 하고, 다음에 다시 이 논문으로 돌아와 다른 측면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철학 텍스트라는 것이 본래 한 번 보고 던져 놓는 것이 아니라, 늘 다시 되돌아와 살펴보게 되는 것이라서요. 이렇기 때문에 철학 공부할 때에는 좀 느긋해질 필요가 있어요. 이번에 이해가 안 되면 다음 돌아와 다시 볼 때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되거든요.
** 이 브런치 글을 쓰고 한참 뒤에 이 논문을 번역했습니다. 전체 논문 번역문을 보고 싶으시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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