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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Apr 29. 2018

카르페 디엠, 즐거운 인생

- 에피쿠로스와의 대화

장소: 그리스 아테네 아고라 광장

시간: 기원전 어느 날

  

노마: 안녕하세요 에피쿠로스 님. 저는 노마라고 합니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시는지요?

에피쿠로스: 아, 안녕하세요. '정원'(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의 학당)에 급한 일이 있어서 가는 중이지요.

노마: 안 그래도 님을 찾고 있었는데, 가시는 길이라도 배웅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될까요?

에피쿠로스: 그러지 못할 것도 없지요. 자 함께 걸읍시다.

노마와 에피쿠로스는 저기 위쪽 아고라에서부터 큰 길을 따라 맨 아래 성문 바로 전의 '정원'으로 걷고 있는 중이에요.

노마: 제가 요즘 괴로운 일이 좀 많습니다. 에피쿠로스 님은 '사는 일'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으시니 제 갑갑한 마음을 확, 뚫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 제가요? (양손을 휘두르며) 아이고, 저도 골 속이 복잡 다난한 사람랍니다. 노마님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어쨌든 고민을 들어나 봅시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 '정원' 공동체의 '우정'이니 말이요. 

노마는 고뇌에 찬 표정으로 에피쿠로스에게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윤리학 질문이네요.



에피쿠로스, 

행복한 삶과 철학하기의 유용함을 설파하다


노마: (고뇌에 찬 표정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허리가 휘고, 머리가 지끈지끈 합니다. 


도대체 삶의 목적이란 무엇이어야 하는 걸까요?


에피쿠로스: 님이 고민하는 부분은 저도 평생 동안 몇 번을 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지요. 일단 한 번 들어 보세요. 그리고 되도록이면 제가 하는 말을 요약해서 외워두시면 좋은데... 사실 '삶의 지혜'는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몇 마디 말을 잘 익혀두고 그대로 실행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지요. 제가 알기로는 우리 제자들이 그걸 '핵심 교설'(Kyriai Doxai)로 정리할 걸로 아는데...


에피쿠로스의 4가지 핵심교설이 정리된 파피루스 조각이에요. 이 네가지를 '테트라파르마콘'이라 합니다.


노마: 헉, 님은 예언까지 하시나요?

에피쿠로스: 아니, 아니 어제 꿈에 봤던가... ㅎㅎ 암튼 그 내용의 핵심 가운데 핵심을 네 가지로 정리했는데, 다음과 같아요. 


첫째, 신을 두려워하지 말라. 
둘째, 죽음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셋째, 좋은 것은 얻기 쉽다.
넷째, 나쁜 것은 견디기 쉽다. 


내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아마도 이 네 가지 약(테트라=4, 약=파르마콘)을 설명하는 게 될 거예요.

노마: 잘 알겠습니다. 


에피쿠로스: 우선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즉,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한 삶이 목적이다'라는 것 말이에요.

노마: 네 맞아요. 저도 그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걸 알면 저도 좋아질 텐데 말이지요. 에피쿠로스: 노마 씨는 그래도 철학을 하고 있으니 행복의 문으로 성큼 들어선 것이에요. 무엇보다 '철학하기'가 행복하게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노마: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에피쿠로스: 철학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에요. 우리 생활과 밀접하다는 것이지요. 누구나 '행복하고 싶은데, 그 방법은 무엇일까?'라고 질문하는 순간만큼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부'와 '명예' 그리고 '가족'이라는 좁은 틀 내에 국한시키고 말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짧은 기간 행복을 느낄 수 있지만, 오래가지는 못하지요. 보다 근본적인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철학하기' 즉 철학하는 삶'이 필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 질문하고 답하고, 또 질문하면서 보다 지속적인 행복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중과 도시의 빌딩과 소음 속에서도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철학적 사유의 시작입니다.

노마: 맞아요. 그런데 철학을 한다고 해서 곧장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행복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해서 곧 행복해지지는 않잖아요?

에피쿠로스: 그것은 철학을 '머리'로만 해서 그렇지요. 머리에서 생각한 것을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제자인 메노이케우스에거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철학을 해 나가야 한다. 철학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지나간 일들에 감사하게 하고, 축복 속에서 젊게 되도록 만들며, 또한 젊은이의 경우, 그가 철학적 사유를 통해 미래의 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지 않게 함으로써, 비록 나이가 젊지만 노련하게 만드는 것이다.


노마: 아, 그렇군요. 결국 철학이 생활과 만나게 만드는 것은 과거의 기쁨을 되새기고, 미래의 두려움을 떨치게 한다는 것이지요? 과거와 미래를 이렇게 잘 이용함으로써 현재를 활력 있게 보낼 수 있게 되겠군요. 

에피쿠로스: 맞습니다. 기쁨을 되새기고, 두려움을 떨치며 현재를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철학이고, 철학적 사유입니다. 그래서 이런 철학에는 특별한 기쁨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다른 일들의 경우에는 그 일이 다 끝났을 때 비로소 기쁨의 열매가 수확되지만, 철학은 사유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는 매 순간이 기쁨입니다. 즉 철학에서 기쁨은 모든 것을 배우고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배움과 함께 하는 것이라서 특별한 것이지요.


(위)유명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에요. 누가누군지 사람들마다 좀 다르게 보지만, 노마가 적어보았습니다. (아래) 에피쿠로스를 확대했어요? 웃는게 보이시나요?


아타락시아를 위해 욕망을 구분하다


노마: 아, 그래서 님께서 "웃으면서 철학을 해야 한다"라고 저번 아고라 강연 때 외치셨던 것이군요. 집안일을 하면서도, "올바른 철학의 소리를 중단 없이 알려야 한다"라고 하셨잖아요? 

에피쿠로스: 그래요. ㅎㅎ 용케 그 강연을 기억하시네요. 그 말에 좀 더 부가해 볼게요. 철학을 통해 웃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지요. 

노마: 네, 아주 구체적으로 들어가시네요. 

에피쿠로스: 철학은 구체적인 것으로 육박해 들어가야 맛이 나지요. 그냥 관념과 추상 속에서만 노닐면 아무 맛도 안나지요. 철학의 기쁨이라는 이 주제도 그래요. 만약 철학이 기쁨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우리의 욕망을 잘 살펴서 구분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요.


욕망의 구분
1. 자연적, 필수적 욕망
2.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
3.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은 욕망

이 중에서 3은 우리에게 없어도 되니까, 신경 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2의 경우는 우리가 쉽게 끄달리는 욕망이에요. 그래서 잘 절제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이 욕망은 생각보다 물리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이를테면 우리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쓰레기통을 뒤지지는 않잖아요? 


노마: 네 맞습니다. 대개의 상식적인 사람들은 이런 욕망을 잘 참지요.

에피쿠로스: 그래요 그것은 불충분하다 하더라도 고통스럽지 않으므로 쉽게 억제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1의 욕망만 남지요?

노마: 네 그렇습니다. 

에피쿠로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가 추구해도 되며, 추구해야 생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욕망 이외의 다른 두 가지 욕망을 추구하다 보면,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아요. 왜냐하면 어떤 욕망의 대상, 이를테면 수십억 짜리 다이아몬드를 원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면, 곧 불행감을 느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노마:그래서 무릇 현자라면 그런 욕망을 물리치고, 담백하고, 우아하게 살아갈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에피쿠로스: ㅎㅎ 네 맞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면서, 이제 비로소 철학을 한다면, 그 철학하기를 통해 무한한 쾌락을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쓸모없는 욕망으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고 마음을 집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지요.


'아타락시아'는 에피쿠로스의 핵심 개념이에요.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는데, 저는 이를 '적멸'이라고 옮기고 싶네요.


노마: 철학을 하고, 필수적이고 자연적인 욕망을 추구하면서 산다는 것은 행복하지만, 그런 상태를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네요.

에피쿠로스: 네 그래서 제가 그런 상태를 '아타락시아'(적멸)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고통이 최소화되고 쾌락이 극대화된 상태가 바로 아타락시아이지요. 이 아타락시아는 좀 애매한 구석이 있는데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쾌락과 고통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노마: 네 에피쿠로스 님의 말씀을 경청하겠습니다. 

에피쿠로스: 먼저 어째서 쾌락 그리고 고통이 중요한 주제가 되는지부터 이야기해 볼게요. 사실 쾌락과 고통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서 발생하는 것이에요. 아마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철학자 중 한 분이 이에 대해 또 이야기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동물해방]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생태주의 철학자 피터싱어. 위에서 에피쿠로스 선생이 말한 것처럼 싱어는 '쾌고감수능력' 즉 쾌락과 고통의 능력이 모든 생명의 공통점이라고 했습니다.


노마: ㅎㅎ 또 예언을 하시네요.

에피쿠로스: ㅎㅎ아마 그럴 것이라는 게지요. 어쨌든 논의를 진행하면, 우리에게 몸과 마음의 쾌락은 곧 '선'이고, 고통은 곧 '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쾌락은 우리의 본성에 맞기에 우리를 구원하지만, 고통은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파괴하는 것이지요.


노마: 그렇지만 에피쿠로스 님 우리가 보통 '덕 있는 사람' '현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쾌락보다는 '덕' 그 자체에 집중해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나요? 예전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분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지요.

에피쿠로스: 그분들은 사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덕을 선택하는 것이 왜일까요? 그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 아닙니까? 아무런 즐거운 감정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덕이란 건 있지 않아요. 덕을 선택하는 것도 쾌락 때문이지, 덕 그 자체 때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건강을 위해 의술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플라톤 선생이 말한 4 주덕(지혜, 절제, 용기, 정의)도 쾌락의 수단일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에요.     


분별하면서, 쾌락을 즐겨라


노마: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에도 일정한 지혜나 분별력이나 그런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무작정 쾌락을 추구한다면 흥청망청한 삶일 것이고, 그건 아까 말씀하신 아타락시아와도 거리가 먼 것으로 보입니다.

에피쿠로스: 잘 지적하셨습니다. 쾌락이 최고의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는 일정한 지혜와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혹자들은 제가 먹고, 마시고, 성적인 쾌락만을 추구한다고 오해하는데, 그건 정말 억울한 일이에요. 저는 절대 그런 무분별한 쾌락의 추구를 옹호하지 않습이다. 저 이전에 퀴레네 학파의 아리스티포스 같은 분은 그걸 추구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 분과는 아주 다릅니다. 


키레네의 아리스티푸스입니다. 에피쿠로스와는 달리 쾌락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철학을 펼쳤습니다.

노마: 저도 좀 그 점이 의아합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에피쿠로스 님을 그런 부류로 음해하는 것이 말이지요. 

에피쿠로스: 아마 그것은 우리 공동체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 아닐까 저는 추측합니다. 아무튼 전 분별력 있게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요긴하다고 봅니다. 분별력이야말로 쾌락의 원천이자 출발점이지요. 심지어 저는 분별력이 철학 그 자체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나머지 덕들은 이 분별력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이지요. 제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그래서 다음과 같습니다. 


분별력 있고 고상하고 정의롭게 살지 않으면 즐겁게 살 수 없고, 즐겁게 살지 않으면 사려 깊고 고상하고 정의롭게 살 수 없다.


노마: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에피쿠로스 님, 님께서는 만물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신 걸로 압니다. 사람들은 이를 '원자론' 또는 '유물론'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에피쿠로스: 네 맞습니다.

노마: 궁금한 것은 님의 쾌락주의 윤리학과 그것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이에요.

에피쿠로스: 정말 좋은 질문을 하시네요. 대답해 드리지요. 저는 기본적으로는 저의 존재론, 즉 원자론과 윤리학을 밀접하게 연관시키고자 하지는 않아요. 윤리학이 존재론보다 중요하고, 마땅히 존재에 대한 탐구는 윤리학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이는 우리 공동체와 늘 논쟁하는 스토아 철학자들과는 다른 지점이지요. 그들도 윤리학을 중시하긴 하지만, 존재론을 아주 중요시하거든요. 그래서 그들에게 윤리학은 존재론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지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원자론이 우리의 쾌락주의와 무관한 것은 아니에요. 

노마: 원자론이 윤리학과 연관되는 지점은 어디인지요?

에피쿠로스: 원자론적으로 쾌락과 고통을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인간의 쾌락과 고통을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체 안의 원자가 적절하게 움직이고 장소 이동을 할 때 수반되는 것이 쾌락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러한 원자가 동요하면 고통이 뒤따르지요. 달리 말하자면 고통은 자연적 구성의 붕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붕괴 상태에서 원자가 신체 안에서 제자리로 되돌아올 때, 다시 쾌락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이러한 논의는 제가 처음은 아니에요. 플라톤 선생도 [필레보스]라는 대화편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지요. 

노마: 그렇군요. 원자의 안정상태와 동요 상태가 곧 쾌락과 고통의 근원이군요.

에피쿠로스: 네 그렇습니다. 


정적 쾌락동적 쾌락이 있는데...


노마: 제가 듣기로는 님께서는 쾌락을 둘로 나눈다고 하던데요?

에피쿠로스: 네 맞습니다. 정적 쾌락과 동적 쾌락이 그것이지요. 정적 쾌락 안에 아타락시아가 포함됩니다. 아타락시아는 정적 쾌락 중에서도 '마음의 동요가 없음'에 해당되고요, 아포니아(aponia)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몸의 고통, 즉 동요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동적 쾌락은 즐거움과 환희 같이 마음과 몸의 움직임으로 인해 생겨나는 쾌락이에요.

노마: 그런데, 만약 쾌락에 이르러 마음의 동요가 없어진다면, 그것을 쾌락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에피쿠로스: 아주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쾌락주의의 역설'이라고 부르곤 하는데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마음의 동요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원자의 운동이나 배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부자연스러운 격동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 격동이 자연스러운 운동으로 바뀌는 것을 마음의 동요가 없어진다고 표현한 것이지요.


노마: 하지만 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쾌락의 부재로 인해 고통을 느낄 때에는 쾌락을 필요로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더 이상 쾌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잖아요?

에피쿠로스: 그래요. 제가 보기에도 이 말은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네요. 이 말을 하면서 제가 의미하고자 한 것은 '고통의 제거가 곧 쾌락이다'라는  것이었어요. 

노마: 그렇다면 님께서는 쾌락을 매우 소극적으로 보고 계시는군요.

에피쿠로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이 그러한 고통의 제거라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조차 매우 힘들 겁니다. 그러니 저의 그런 쾌락주의는 '소극적'이라고 말하기보다 '현실적'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요?

노마: 오, 그렇군요. '현실적 쾌락주의'라... 옳은 말씀 같습니다.


에피쿠로스: 이러한 쾌락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만족'(autarkeia)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노마: 네, 처음 말씀하신 것처럼 필수적인 욕망의 충족에서 즐거움을 얻고 만족할 필요가 있다는 그것이지요?

에피쿠로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 자기만족에는 필수적인 욕망의 충족과 더불어 하나가 더 있습니다. 

노마: 그게 무엇인지요?

에피쿠로스: 바로 자연탐구이지요

노마: 학문탐구, 즉 철학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에피쿠로스: 맞습니다. 만족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을 올바로 바라보고, 시중에 떠도는 감언이설이나 공포스러운 이야기에 대해 맞서서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노마: 아, 테트라페르마콘 말이시군요?

에피쿠로스: 그렇지요. 그중 첫째와 둘째가 자연탐구, 즉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와 연관되지요. 신은 우리 세계와 인접해 있지만,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도 않으며,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지요.

노마: 그런 측면에서 에피쿠로스 님은 '운'이나 '운명'을 거부하시고, '죽음에 대한 사유'를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이지요?


신과 죽음, 운명이란 헛소리에 불과하다


에피쿠로스: 네 그래요.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볼까요? 먼저 '운'이라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 감지하지 못하는 어떤 것인데요, 이것은 미신입니다. 우리 지성이 지금은 못 보더라도 나중에는 그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의 운행이며,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더더욱 필요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지요. 이런 의미에서 저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행운의 여신이여, 나는 당신에 대해 미리 대비했고, 당신이 숨겨 놓은 공격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켜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당신이나 다른 어떤 환경의 포로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명'이 인간의 지성을 폄훼하고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들처럼 운명의 노예로 사느니 신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운명론은 희망을 없애지만 신화는 인간에게 헛된 위안이나마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운명을 배척하고 자신의 지성을 활용하여 숙고를 거듭한다면, 설사 그로부터 나오는 행위의 결과가 실패할지라도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는 비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마: 아, 그래서 님께서는 원자론에 '클리나멘'(우발성)을 도입하신 거로군요. 

에피쿠로스: 그렇지요. 클리나멘이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자연 안에 '자유'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궤적을 따라 서로 부딪히지 않고 움직이는 원자들이 어느 순간 방향을 바꾸어 부딪히고 이로 인해 세상이 다양한 형상을 띄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원자 단위에서도 필연적인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노마: 죽음에 관해서는 에피쿠로스 님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 제가 읊어 볼게요.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ㅎㅎ 부끄럽군요. 그걸 다 외우고 계시다니.

노마: ㅎㅎ 워낙 유명한 구절이라...

에피쿠로스: 알고 계시니, 좀 자세히 설명해 드려도 어렵진 않겠군요. 저 말은 우리 공동체의 '감각론'과 관련 있어요. 우리는 감각이 살아 있음의 증표라고 여기지요. 그런데 죽음은 그 감각이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미리 걱정하는 데서 마음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말을 새기고 있으면 소위 '불멸'에 대한 헛된 희망도 사라지게 되지요. 감각이 사라지면 모든 게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영혼조차 물질적인 것이라, 죽음이 흩어버린다고 봅니다. 그러니 죽음은 산 사람에게나 죽은 사람에게나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 쾌락주의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 2: 금욕주의 상태. 3. 과도한 쾌락상태(동적 쾌락의 과도함). 4. 최고의 쾌락상태(아타락시아, 아포니아). 빈 부분은 고통의 부분입니다


일생 동안의 쾌락과 고통가늠하며 살아라


노마: 그렇다면 이제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하면 더 즐거울 수 있는가가 문제겠군요.

에피쿠로스: 그렇지요.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저는 지속적으로 쾌락과 고통을 측정하라고 가르칩니다. 

노마: 쾌락과 고통의 측정이요? 

에피쿠로스: 그렇습니다. 최고의 쾌락은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의 제거이지요. 마치 물통에 빈자리, 즉 고통이 사라지도록 물, 즉 쾌락을 채워 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과도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되는 것이지요.

노마: 오호, 그러려면 우선 어떤 '기준'이 필요하겠는데요.

에피쿠로스: 좋은 지적입니다. 


쾌락과 고통의 측정 기준은 바로 '크기' 또는 '강도'와 '지속성'입니다.


여기서 크기, 강도는 양적인 기준이고, 지속성은 시간적 기준이에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양적으로 적정해야 하고, 시간적으로 오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자는 주로 우리 느낌 또는 감정의 양이고, 후자는 현재로부터 죽음이 도래하는 그 시간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쾌락의 양이 평생 지속되도록 분별, 선택하고, 고통의 양이 최소화되고, 순간에 그치도록 분별, 선택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폭식은 쾌락의 양과 느낌이 강하지만, 지속되지 않으므로 우리가 선택할 만한 행동이 아닙니다. 반면 단식은 고통의 양과 느낌이 강하지만, 오래 지속되므로 우리가 선택할 만한 행동이 아닌 것이지요. 

노마: 오호, 그렇군요. 늘 어떤 중용이 필요한 것이군요.

에피쿠로스: 그렇습니다. 쾌락을 측정할 때에도 고통을 측정할 때에도 그것이 요구되는데, 그러한 이때 분별이 요구되지요.

노마: 저 규칙이 좀 어려워 보이는데, 보다 쉽게 말씀해 주실수는 없나요?

에피쿠로스: 좀 더 단순하게 말하면 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분별하라는 것이지요. 


내 욕망의 대상이 성취된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만약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노마: 오호라, 이제 보다 분명해지는군요.

에피쿠로스: ㅎㅎ 다행입니다. 제 말이 전달되었다니 말이죠. 이렇게 측정에 성공한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순간적인 쾌락에 젖어 평생을 망치거나, 긴 고통을 선택함으로써 삶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는 진정한 쾌락주의 현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 불같이 화를 내다


노마: 그러데 에피쿠로스 님 저는 이런 훌륭한 생각들이 우리 국가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정치를 해보실 생각을 없으신지요?

에피쿠로스: 허, 노마님 큰 일 날 소리 하시는군요. 저는 정치는 경멸합니다. 

노마: 아니 왜요?

에피쿠로스: 정치는 나와 우리 공동체를 외부에 노출시킴으로써 우리의 평화로운 자유를 훼방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늘 "우리는 스스로를 일상의 예속과 정치의 예속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라고 말해 왔어요.

노마: 아이고, 그럼 님의 쾌락주의는 정치사상이 되기에는 글렀군요. 그건 일종의 자폐적인 은둔주의 아닌가요? 그런 생각은 아테네 민주주의 이념과도 맞지 않아요.

에피쿠로스: (화를 내며) 아니, 민주주의 따위가 무슨 상관입니까?

노마: (당황하며) 아니, 그게 아니라...

에피쿠로스: 저는 대중으로부터 물러나 고요하게 있는 것이 행복한 삶의 기반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 하려거든 헤어집시다.

노마: 아니 전 좋은 뜻에서 드린 말씀인데...

에피쿠로스: 전혀 좋지 않아요. 그건 우리 공동체의 평화를 깨고 모욕하는 언사입니다.

노마: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에피쿠로스 님의 윤리학은 타자에 대한 어떤 '공포' 같은 것에 기반하시는 것 같아요.

에피쿠로스: (불같이 화를 내며) 아니, 뭐라고요?!! 이 사람이 점점 가관이네. 공포라니, 우리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노마: 아니,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떠나려고 하실 이유가 없잖아요?

에피쿠로스: 나는 우리 공동체 정도의 작은 규모면 족해요. 내 생각으로 민중들 모두를 계몽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너무 귀찮고, 짜증 나며, 불행을 앞당기는 일입니다. 

노마: 아, 이 부분에서 에피쿠로스 님의 한계가 있군요. 그토록 인자하신 분이 정치 얘기에 이토록 화를 내시다니.  

에피쿠로스: 한계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아, 이제 우리 '정원'에 다 왔네요. 그만 헤어집시다. 

노마: 앗,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아테네 아고라로 발길을 돌리는 노마. 생각이 복잡해진다.)




노마는 에피쿠로스와의 대화를 마치고 오는 길에 한 영화의 유명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는 바로 이 영화지요.


<죽은 시인의 사회>


"캡틴, 오 마이 캡틴!!"


(좌) 죽은 시인의 사회 오리지날 포스터, (우) 호라티우스


그리고 에피쿠로스와 관련된 유명한 장면은 바로 이 씬입니다. 여기서 키팅 선생이 읊조리는 "Carpe Diem"은 스토아 철학자-시인임에도 에피쿠로스를 속 깊이 존경했던 호라티우스의 시 마지막 행이지요. 


https://youtu.be/5GmMCNqVgpw


이 세상이 끝나는 날 신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 뒀는지 물으려 하지 말라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기에- 
바빌로니아 점술가들에게 
마지막이 언제인지 묻지 말라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받아들여라 
주피터가 우리에게 
또 한 번 시련의 겨울을 선사하든 말든 
혹은 투스칸 절벽이 무너져 버리고 
그 순간이 마지막 순간이 되든지 간에! 
그대가 현명하다면 포도주는 
바로 오늘 체에 걸러라 
짧기만 한 인생에서 먼 희망은 접어라 
우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을 우리를 시샘하며 흘러가 버리니, 
내일은 믿지 마라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 

- 호라티우스作 <카르페 디엠!> 







<참고문헌>

에피쿠로스 지음, 오유석 옮김, [쾌락], 문학과 지성사, 1998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아카넷, 2012

롱 지음, 이경직 옮김, [헬레니즘 철학], 서광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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