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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May 02. 2018

해변에 앉아 들뢰즈를 읽다

- '일의성'이 뭐라고?

노마가 예전 글에서

'일의성'이니 '하나의 목소리'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 적이 있는데 기억나실지 모르겠습니다(<바람의 뼈>).


사실 이 개념이 철학에서 유행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질 들뢰즈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저 멀리 중세로부터 가져와서 새롭게 만들어 유포한 것이지요. 들뢰즈에 대해서는 <낯선 타인과 춤추기>를 보시면 자세히 설명드려 놓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철학이라는 것이 별게 아니라, 이렇게 옛 개념 들을 일신하거나, 새로운 개념들을 발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철학자란 개념의 발명가인 것이지요.

 

자, 그럼 오늘의 주제어인 '일의성'(univocity)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이 개념이 들뢰즈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기 때문에 제가 들뢰즈의 책들을 가지고 설명을 많이 할 것 같습니다. 최대한 쉽게 쉽게... (노마 씨의 소원은 '쉽게 쉽게'입니다.)  


먼저 이 개념의 역사적 연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들뢰즈는 그의 박사논문이자 주저인 [차이와 반복]에서 '일의성'의 최초 발설자로 중세 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를 들고 있어요. 이 분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다음에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 개념에 집중해서, 들뢰즈의 설명을 따라가 보도록 할게요.


둔스 스코투스(1265~1308)입니다. '영민한 박사'라는 별명이 있지요.


'일의성'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둔스 스코투스이다. 그는 보편적인 것과 독특한 것이 교차하는 이질적인 존재를 식별했다.


말이 다소 낯설지요? 여기서 '이질적인 존재'란 것이 곧 '일의성'의 존재, 즉 '하나의 목소리를 가진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이런 기사 보신 적 있으신가요?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700753.html


이것을 물리학자들은 '암흑물질 가설'이라고 하지요. 우리 주변에는 그 성질을 알 수 없는 암흑물질들이 있고, 또 은하라는 큰 단위에서도 암흑물질이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태초에 암흑물질로부터 만물이 생성되어 나왔다는 가설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모든 존재자들은 암흑물질과는 상관없는 듯 그 생명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기사의 헤드라인을 좀 따와서 변형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존재는 일의성이라는 유령이 지배한다.


모든 것이 나오는 저 정체불명의 물질은 우리가 논하고 있는 이 '일의성'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보편적으로 퍼져 있지만, 당최 잘 잡히지 않고, 그러나 우리가 감각하고 있는 이 모든 독특한 존재자들의 근원이기도 한 것이지요.


둔스 스코투스의 경우에 일의성으로서의 일의적인 존재는 여러 속성들과 양태들로 생성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속성이 되어 나아가는 것을 '형상적으로 구별된다' 또는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라고 합니다. 예컨대 일의성으로부터 뻗어 나온 사과 한 알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사과의 속성은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계열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둥그스름함-붉은색-단맛-꼭지가 길고 이파리가 달림-...' 이 계열은 아마 무한히 이어지겠지요? 이렇게 무한한 '규정'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과가 아니라 바로 우리 눈 앞에 놓여 있는 '이' 사과를 정의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과 옆에 같은 속성을 가진 다른 사물, 즉 '사과-양태'가 아니라 'x-양태'가 놓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요.


붉은 사과-붉은 토마토-붉은 아이언맨

갑자기 웬 아이언 맨이냐고요? ㅎㅎ 아이언 맨도 붉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이 세 양태적 존재들은 붉음이라는 속성에 있어서는 같다, 또는 일의적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들뢰즈는 '속성의 일의성'이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붉음이라는 속성이 각각의 다른 존재자, 즉 다른 양태들에 부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한 번 질문을 던져 볼게요.


사과와 토마토와 아이언 맨의 '붉음'은 어떻게 다른가?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아마 다들 다르게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으면 이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사과의 붉음은 새빨갛고, 토마토는 불그스름하고, 아이언 맨은 뭔가... 차갑다'라고 말이지요. 대단히 어색하지요? 붉지만 다른데, 그걸 표현하기기 수월치 않아요.


들뢰즈는 이러한 구별 불가능하지만 구별되는 양태들의 '차이'를 '강도적 차이'라고 일컫습니다(이 '강도'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글, <21세기 정치철학 교본>에서 잠깐 설명했습니다). 즉 같은 붉음이 양태들에 구현될 때 강약의 차이가 있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들뢰즈가 '일의성의 두 번째 단계'라고 일컫는 철학자는 바로 스피노자입니다. 아래 분입니다.


스피노자(1632~1677)에요. [에티카]라는 걸출한 저작을 남겼습니다.


스피노자는 일의성을 둔스 스코투스처럼 무차별적으로 '존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일의적 존재란 '자연'이자 '신'입니다. 어떻습니까? 뭔가 좀 잡히는 게 있지 않나요? 그냥 '존재'라고 할 때보다 '자연'이나 '신'이라고 할 때는 그나마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일의성'을 실체적 존재로서의 신=자연, 그리고 속성, 양태 모두에 적용하지요. 따라서 스피노자에게서는 다음과 같은 일의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신=자연=실체 -> 속성 -> 양태들
-------------
<일의성의 '표현' 관계들>

 

여기서 '표현'은 점선 위의 화살표가 됩니다. 즉 신=자연=실체는 속성과 양태들 가운데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이 표현 관계로 인해 실체, 속성, 양태가 모두 일의성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실체에서 양태로 갈수록 수적인 다양성은 늘어납니다. 신은 하나지만 지상의 생물체들은 수도 없는 많은 것이 그 예이지요. 그러나 그 양태들 속에는 일정한 수의 '속성'과 하나의 '실체'가 함축되어 있지요.


스피노자에게서 존재=자연=실체=신의 일의성을 도식화하면 이렇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두 개의 큰 속성만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연장'(extension: 물체의 면적, 부피 같은 것입니다.)과 '사유'(thought: 말 그대로 정신적인 것이지요)입니다. 그래서 연장 속성, 사유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자연=신=실체에는 '무한한 속성'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단지 저 두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무한한 자연=신=실체의 속성이 우리의 우주에 '표현'될 때 저 두 가지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이 속성이 양태 안에서 구현될 때, 강도적인 차이를 가진다고 하는데, 이런 설명은 둔스 스코투스의 경우에도 적용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양태 안의 강도적 속성과 실체의 속성은 다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태와 실체는 같은 방식으로, 같은 의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일의적'인 것입니다. 이것도 둔스 스코투스에게서와 같은 설명이군요. 즉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존재의 일의성'이 관철되고 있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실체, 속성, 양태는 존재 안에서 일의적이며,

실체의 표현으로서의 두 개의 속성도 일의적이며,

다양성으로서의 양태도 속성의 강도적 표현으로서 일의적입니다.


들뢰즈는 아래에 인용한 구절에서처럼 여기에 '목소리'라는 표현을 도입하는데요, 이는 위에서 말한 '일의적'이라는 말이 마치 이러저러한 단어로 달리 규정 내려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아우르는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원을 살펴봐도, 일의성은 '목소리'라는 함축이 있지요.


'일의성'이라는 개념은 자주 위와 같은 이미지로 설명되곤 합니다. 소용돌이쳐 들어가는 중간 끝에 '존재'가 있고, 바깥쪽의 각각의 고리들(양태들)도 무한히 숨어버리는 고리가 있지요


존재의 목소리는 단 하나일 뿐이다. 이 목소리는 존재의 모든 양태들, 상이하고, 다채롭고, 분화된 것들 모두에 관계한다. 존재는 이렇게 단 하나의 목소리일 뿐이고, 단 하나의 의미로 표현되지만, 각각의 존재자들에게 있어서는 차이에 의해 지배받는다. 즉 존재는 차이 자체를 통해 언명된다.


이 문장에서 '존재는 차이 자체를 통해 언명된다'라는 말을 잘 보세요. 들뢰즈에게 '차이 자체'는 '강도'인데요, 그렇다면 이것은 강도적 차이, 즉 '양태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 말은 '존재는 양태들을 통해 언명된다'라고 고쳐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말을 들뢰즈는 하는데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의성이 의미하는 것은, 일의적인 것은 존재 자체이고 이런 일의적 존재가 다의적인 존재자를 통해 언명된다는 사실이다.  존재를 언명하는 것은 차이 자체이다. 천 갈래로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다.


여기서 '바다'와 '물방울'의 비유가 꽤나 명징하게 다가옵니다. 다양한 강도적 차이로서의 양태는 물방울들이고 그 물방울들이 모인 바다가 바로 일의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마치 암흑물질로 이루어진 우리 자신과 우주 자체처럼 말입니다.



잔잔하고 한덩어리인 바다(일의성의 바다)가 파도(속성)를 통해 스스로 물알갱이(양태)로 부서집니다.


자, 이제 저 일의성의 바다 한가운데로 좀 더 들어가 볼까요? 이 바다의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이 '일의성'을 어디서 제대로 알거나 볼 수 있을까요?


바로, 언어 안에서 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일의성'이란 그 자체로 '목소리'이고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들뢰즈는 언어 중에서도 '의미'에 집중합니다.


존재의 일의성(uni-vocité)은 존재가 목소리(Voix)라는 것, 그리고 존재가 말해진다는 것, 모든 대상의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에 있어 말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이 언급이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건네주는 사실은 존재의 일의성이 드러나는 것인 주로 '언어'에 의해서고 그렇다면 인간의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언어에 의해 드러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부정사, 즉 시제가 정해지지 않은 동사

입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일의성은 신적인 것으로서 '영원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의성은 인간적 시간, 즉 과거-현재-미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어야 하지요. 인간적 언어 중 '부정사'는 이러한 신적인 것이 표현되는 유일한 어구가 됩니다.


이를테면, '간다'라는 현재형 동사, '갔다'라는 과거형 동사, '갈 것이다'라는 미래형 동사는 모두 '감' 또는 '가다'라는 부정사로부터 뻗어 나온 양태들인 것이지요.


이제 종합 정리해 볼까요?


1. 일의성이란 '존재의 일의성'을 의미한다.


2. '존재의 일의성'은 다시 실체, 속성, 양태의 일의성으로 설명된다.


3. 존재의 일의성은 실체, 속성, 양태로 나아갈 때, '표현'의 형식을 취한다. 즉 양태에 이르러서야 일의성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바다와 물 알갱이처럼.


4. 일의성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언어며, 언어 중에서도 '부정사'에 의해서다.

 



'일의성'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파도' 소리입니다. 가만히 이 사운드를 듣고 있으면, 뭔가 멍해지면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지요. 비유적으로나마 일의성을  느끼시게 될겁니다. 들으시면서 한 번 실험해 보시지요. 주무셔도 상관없습니다. ㅎㅎ


https://www.youtube.com/watch?v=dsDTJ__jioo






<참고 문헌>

질 들뢰즈 지음,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질 들뢰즈 지음, 이정우 옮김,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질 들뢰즈 지음, 이진경, 권순모 옮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인간사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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