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 들뢰즈와 미셸 투르니에
제가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대한 글(<스페란차에서의 절대고독>)을 쓰면서 약속했던 대로 들뢰즈의 아주 '아름다운 논문' 하나를 살펴보도록 할게요.
들뢰즈란 철학자가 워낙 방대한 체계를 설파하고, 난해한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이라 이걸 쉽게 설명하기가 녹록치 않겠지만, 일단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선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라는 철학자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소개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철학을 하는 사람이든 일반적인 교양에만 관심이 있으신 분이든, 들뢰즈는 반드시 알아야 할 현대철학자 중 한 명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각종 논문과 평론, 예술에서 들뢰즈의 철학이 적용, 응용되고, 그 개념들이 전거를 밝히지 않은 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최근에는 심지어 드라마에서 들뢰즈의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제가 요즘 즐감하는 드라마인데요, 이 장면에서 전 느닷없는 개념의 등장에 박장대소했지요.
참, 미셸 투르니에에 대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스페란차에서의 절대고독>에 소개해 놨으니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사진들에서 들뢰즈가 가진 요상한 습관을 발견한 분이 있다면, 대단히 눈썰미가 좋은 분입니다. 재미 삼아 한 번 찾아 보시죠. 참고로 어떤 인터뷰어가 들뢰즈에게 왜 그러고 다니느냐고 묻자, 들뢰즈는 신경끄시라고 별 의미 없다고 했답니다. (정답은 이 글 맨 아래에)
들뢰즈의 생애를 한 번 살펴 볼까요?
1925년 1월 28일 파리에서 태어난 본 투 파리지앵입니다.
1944-48 카르노 중고등학교 졸업하고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 페르디낭 알키에, 조르주 캉길렘, 장 이폴리트, 모리스 드 콩디악 등에게서 배움. 프랑수아 샤틀레, 미셀 뷔토르, 클로드 란츠만, 미셀 투르니에와 친분을 맺음.
마리-마들렌느 다비가 주관하는 작가 및 지식인 모임에 자주 참석하여 페싸르 신부, 피에르 클로소브스키, 자끄 라깡, 란자 델 바스토, 쟝 폴랑 등과 만남.
1947 데이비드 흄에 관한 연구를 끝으로 대학을 졸업. 이때 쓴 졸업논문이 『경험론과 주체성: 흄에 따른 인간 본성에 관한 시론』이며, P.U.F. 출판사에서 1953년 책으로 출판됨. 이 단행본 전에 흄에 대한 다른 작은 연구서인 『흄, 그의 삶, 그의 작품』(P.U.F. 1952)이 출간되었음.
1948 철학교사 자격시험 통과.
1948-57 아미앵, 오를레앙, 파리(루이르그랑 고등학교) 등에서 철학을 가르침.
1955 『본능과 제도』(Hachette) 출간.
1957-60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사 분야 조교로 일함.
1960-64 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원으로 재직.
1962 미셀 푸코와 함께 클레르몽페랑 대학의 쥴 뷔으맹의 집에서 만나 학생운동에 가담. 『니체와 철학』이 P.U.F.에서 출간됨. 푸코는 이 저작을 탁월하게 평함. 1983년 그의 회고에서 푸코는 “우리가 진정으로 니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함으로써 들뢰즈와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드러냄.
1963 『칸트의 비판철학』(P.U.F.) 출간.
1964-69 리옹대학 철학부 강사로 재직. 『프루스트와 기호들』(P.U.F., 1964) 출간.
1965 『니체』(P.U.F.) 출간.
1966 『베르그송주의』(P.U.F.) 출간.
1967 『사세 마조크 소개』(Minuit) 출간.
콜리와 몬티나리가 간행한 니체 『비판 전집』(유고)의 불역본 총책임을 푸코와 함께 맡음. 1965년에 작성한 「총론」에서 이들은 오류없이 출간된 이 최초의 유고와 함께 “니체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함.
1968 1968년 5월 혁명. 정치적 격변기에 들뢰즈는 여러 소수자 그룹에 참여함. 국가 박사 학위 논문 체출. 주논문은 『차이와 반복』(지도교수: 조르주 캉킬렘), 부논문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지도교수: 페르디낭 알키에)였음. 각각 P.U.F.와 Minuit 출판사에서 논문 제출과 같은 해에 출간됨. 들뢰즈의 철학적 도제수업(철학사 수업)이 일단락됨.
1969 『의미의 논리』(Minuit) 출간. 정신과 의사이면서 정신분석학자였던 펠릭스 가따리와 처음으로 조우함. 공동작업이 시작됨.
푸코의 뒤를 이어(푸코는 이후 1971년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로 감), 파리 8대학(벵센느 대학, 후에 생드니 대학으로 개명) 철학과 교수가 됨. 심한 폐질환으로 수술을 받음.
이곳에서 들뢰즈는 1987년 퇴임할 때까지 프랑수아 샤틀레,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그리고 잠시 동안이지만 푸코와 함께 가르침. 1970년대 프랑스 강단에서 벵센느는 ‘68혁명’이 전개되는 중요한 지적, 제도적 실험의 장이었음. 들뢰즈는 이 혁명을 “프랑스에서 시도된 가장 중요한 교육개혁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함. 벵센느에서는 관심분야가 다른 각양각색의 대중들이 정규코스를 거치지 않은 채로 강의를 들었음. 여기서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과는 다른 철학이 시도되고 있었으며, 실험적인 수업이 가능했음. 부르주아 교육권력에 의해 좌초되었지만, 들뢰즈는 그때나 후에나 이 시도를 열렬히 옹호했음.
1970 『스피노자: 실천철학』(P.U.F.) 출간.
《비평》지에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에 대한 푸코의 서평이 실림. 이 서평에서 푸코는 그 유명한 말을 함. “아마 언젠가는 들뢰즈의 세기가 올 것이다.”
1971 푸코, 다니엘 드페르가 창설한 GIP(Group d'information sur les prisons)에서 활동함.
이 그룹의 목표는 프랑스 감옥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고 감옥-체제에 특유한 권력의 유형을 연구, 서술하는 데 있었음. 들뢰즈의 회고에 따르면, 감옥에 대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수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 그들에게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이 ‘실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게 됨.
푸코, 싸르트르, 장 주네, 클로드 모리아크 등과 함께 파리 구트 도르 지역에서 팽배해져 가던 인종주의적 폭력에 반대하고 이민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시위에 참여함.
1972 가따리와 함께 『앙띠 오이디푸스』(Minuit) 출간. 《라르끄 L'Arc》의 들뢰즈 특집호가 나옴. 이 지면에 ‘지식인과 권력’에 대한 들뢰즈와 푸코의 대담이 실림.
여기서 두 사람은 보편적 지식인과 특수한 지식인을 대립시킴. 보편적 지식인은 정치 투쟁에 개임하여 진리를 공식화하고 이념적 방향과 목표를 부여하는 고전적인 유형의 인물이지만, 특수한 지식인은 모든 이론이 국지적으로밖에는 적용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전문 영역인 ‘현장에서’ 권력에 맞서 저항과 항거에 나선다고 함.
1975 가따리와의 두 번째 공저,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Minuite)를 출간함.
1976 『리좀』(Minuit) 출간. 후에 『천 개의 고원』에 재수록.
1977 제자인 끌레르 파르네와 함께한 『대담』(Flammarion) 출간. 『앙띠 오이디푸스』 영어판 출간. 푸코가 서문을 씀. 여기서 푸코는 이 책을 “비-파시스트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안내서”, “프랑스에서 저술되어온 책들 중 아주 오랜만에 나온 윤리학 서적”, “정치를 슬픔 정서, 부정과 원한의 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책” 등으로 평가함.
1978 푸코와 결별. 결별의 이유는 테러리즘의 역할, 테러리즘에 대한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의 대처 방식등을 둘러싼 정치적 견해차에 있었고, 소위 ‘신철학자들’에 대한 입장차이도 있었음. 『성의 역사 1: 앎에의 의지』에 대해 논평한 메모들을 푸코에게 보내지만 답장은 없었음.
1979 『중첩』(avec Carmelo Bene, Minuit) 출간.
1980 가따리와의 세 번째 공저, 『천 개의 고원』(Minuit) 출간. 대중적으로는『앙띠』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함. 이탈리아어판 서문에서 들뢰즈는 상황을 빗대어 이렇게 말함. “앞의 책이 출간된 시기는 68 혁명 운동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뒤의 책은 천박한 양상의 침체와 무관심의 시기에 출간되었다”
1981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La Différence) 출간.
1983 『영화 1. 운동-이미지』(Minuit) 출간.
1984 병을 앓고 있던 푸코가 재회를 원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음. 이 해 6월 25일 푸코 사망. 들뢰즈는 푸코가 죽은 직후 출간된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의 한 구절을 읽는 것으로 추도사를 대신함.
1985 『영화 2. 시간-이미지』(Minuit) 출간.
1986 『푸코 Foucault』(Minuit) 출간. 이 책에서 들뢰즈는 “항상 수많은 위기와 동요를 넘어서는” 사유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했으며,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또 푸코에 대한 존경 때문에” 이 책을 썼다고 말함.
1988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Minuit) 출간. 『페리클레스와 베르디. 프랑수아 샤틀레의 철학』(Minuit) 출간.
1991 가따리와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공저, 『철학이란 무엇인가?』(Minuit)출간. 이 책에서 두 사람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기되는”, “내가 일생 동안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던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시도함.
1992 펠릭스 가따리 사망.
1993 건강상태 악화.
1995 들뢰즈의 마지막 글, 「내재성: 하나의 삶 ......」을 《철학》에 기고함. 이 글은 몇 페이지 안되지만 들뢰즈 철학의 기본 주제들을 담고 있음.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
보시면 아시겠지만, 1968년 혁명기(<혁명과 사랑> 참조하세요~)를 제외하고는 삶 자체가 글쓰고, 강의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책상물림 철학자 같지요. 들뢰즈에게서 가장 극적인 삶의 장면을 택하라면, 아마 그의 '자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그의 철학적 배경(특히 스토아 철학의 자살 옹호론)을 통해 조명하는데,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신체가 고귀함과 탁월함을 벗어나 비참해지기 전에 그 신체를 버림으로써, 자신의 그 수많은 철학적 선언들에 화답한 것이 아닐까요? 가장 힘들고, 드문 선택을 함으로써 말이지요. 그가 가장 좋아한 스피노자의 [에티카]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그런데 이 철학자의 저작들은 그의 얌전한 일생과는 반대로 폭발력과 인화성이 강한 다이너마이트처럼 철학사 안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 사유의 기본질서를 뒤흔들어 놓는 힘이 거기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들뢰즈 사상 전반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어서 좀 아쉽네요.(이는 다음 기회에 일단의 '연재물'로 다루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대신 그의 '타자 철학'이 농축되어 있는 <미셸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을 소개함으로써 그 사상의 일면을 살짝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논문은 들뢰즈의 1969년도 책인 [의미의 논리] '보론 4'로 실려 있습니다. 본 저작의 논의를 보충할 수 있는 부록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 부록들(모두 5개의 보론)이 제가 보기에는 들뢰즈 철학의 강력한 요약본이에요.
이제 <미셸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차근차근, 하지만 결론은 단호하게.
들뢰즈가 분석하고 있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지난번 브런치(<스페란차에서의 절대고독>)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철학적 각색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 대한 분석의 초두에서 들뢰즈는 소설의 주인공이 로뱅송(로빈슨의 불어식 발음입니다)과 방드르디(프라이데이의 불어 명칭입니다) 뿐 아니라 '섬' 즉 스페란차도 주인공이라고 말합니다. 즉 로뱅송이 섬 생활을 하면서 변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섬도 변화의 과정을 겪는 어떤 인격체처럼 보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투르니에의 소설에서 이 세 주인공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명'하면서 삶의 순간순간을 함께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들뢰즈는 듣기에 다소 기이한 말을 내뱉습니다. 이렇게요.
로뱅송의 목적, 궁극 목표는 ‘탈인간화’, 리비도와 자유로운 원소들의 만남, 우주적 에네르기 또는 원초적인 건강함의 발견이다. 이는 섬 안에서만, 그리고 섬이 공기나 태양이 되는 한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로뱅송은 섬과 물아일체가 되길 원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리비도'란 성적인 에네르기, 즉 원초적인 '힘'을 의미해요. 로뱅송이 지닌 성적 힘과 스페란차 섬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이 만나는 것이지요. 그것들이 서로 갈마들고 섞여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에는 일종의 성적인 유비와 더불어 소설 속 내용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소설 속에서 로뱅송은 실제로(!) 섬과 섹스를 합니다. 처음에는 나무둥치를 껴안고, 다음에는 말랑말랑한 대지와 말이지요. 좀 낯뜨거운 내용이지만, 철학적으로다가 이해하도록 하죠.
여하튼 들뢰즈는 이러한 '결합'과 '공명'의 원초적인 과정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무슨 환청을 듣는 것은 철학자들의 전통 같아요. 소크라테스도 늘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했거든요. 점점 이상한 족속이 되어가는 듯한 ... .
기본원소들의 울음 소리
그렇습니다. 들뢰즈는 소크라테스가 초월적인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과는 달리 이 지상의 원소들의 소리, 그것도 '울음소리'를 듣는다고 말하는군요(철학적 의미에서 '원소'가 무엇인지는 저의 브런치글 <원소들의 카니발>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들뢰즈가 이런 판단을 하는데는 소설 속 내용이 근거가 되는 듯합니다. 조금 아래에 설명을 하겠지만, 투르니에의 소설에서 방드르디가 만드는 연과 악기가 있는데, 그건 숫염소의 가족과 내장으로 만든 것이에요. 일종의 현악기에 가죽으로 만든 연을 거기다 매어 놓는 것데요, 바람이 불때마다 연이 춤추면서 악기가 말 그대로 웁니다. 자연의 원소에 방드르디의 원시적인 손끝이 가해져서 만들어진 그 연-악기는 바로 스페란차와 로뱅송의 결합을 유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두 결합은 모두 '기본원소들의 울음소리'을 냅니다. 여하튼 우리 같은 범인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대철학자(?)만의 '환청'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로뱅송의 모순된 행동의 이유가 있습니다. 디포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투르니에의 이 소설에서도 로뱅송은 섬을 소위 '문명화'합니다. 버지니아호로부터 끌어온 물건을 밑천으로 섬에 집을 짓고, 댐을 건설하고, 밭과 논을 일구고, 또 '시계'도 만들지요. 모든 것을 문명세계와 흡사하게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뱅송은 자신의 '목적'은 위에서 설명했던 대로 섬의 원시적 신체와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문명화와는 반대 방향의 원시화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들뢰즈는 로뱅송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묘파합니다.
로뱅송은 필연적으로 이 세계를 재생산(문명화)해야 하지만, 목적들(섬과의 일치)과 관련해서는 필연적으로 일탈한다.
이렇게 기원, 즉 자신의 원시성으로 향하는 경향과 문명화하려는 경향 사이에서 로뱅송은 왔다갔다 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떨 때 보면 로뱅송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대지와 성을 나누는 그 장면은 매우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지요. 이를 두고 들뢰즈가 일종의 "신경증의 원소"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 자신도 이러한 경우가 일상속에서 자주 드러납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신경증적 경향이 우리 모두의 저변에 깔린 보편적 증상이 아닐까요? 문명화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야만성을 늘 곁에 두고 살아갑니다. 일례로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범죄들을 들 수 있지요. 그리고 우리 개개인의 내면에도 야만성을 시시때때로 꿈틀대며 우리 의식을 비집고 올라오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요. 그러한 야만성은 우리의 극단적인 감정들로 드러나다가, 가끔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혹시 이러한 야만성을 달래기 위한 기제가 문화와 문명이라는 것이 아닐까요?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우리의 문명이란 우리의 야만적인 정욕을 승화시키고, 질서 잡기 위한 궁여지책이 아닐까요?
그런데 들뢰즈는 갑자기 투르니에의 이 소설의 주제가 '일탈'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주제를 다루는 소설도, 인물들을 다루는 소설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이 소설에서 '타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고 보니 들뢰즈의 말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일탈을 하려면 그 일탈이 일탈이 되게 하는 기존체제가 필요한 것이고, 또한 그 체제를 만들고, 살아가고, 그것을 향유하는 '타인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스페란차 섬에는 현재로선(나중에 방드르디가 등장하지요) 아무도, 정말 인간이라곤 한 명도 없습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우주적 소설이다. 그것은 일탈의 주제 대신 로뱅송, 즉 타인 없는 섬 속에 버려진 인간이라는 주제를 펼치고 있는 소설이다.
'우주적 소설'이라는 요상한 말이 눈에 거슬리지 않으신가요? 갑자기 생각이 저기 안드로메다로 가는 듯합니다.
혼란한 생각을 정리해 보죠. 우선 들뢰즈는 투르니에의 소설에서 자연의 원소들과 일체가 되려는 로뱅송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체가 '목적'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목적은 '일탈'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일탈이 로뱅송의 목적은 아니라고 논의를 전환시킵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원소들과의 '일체' 자체지요. 원소들이란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기본요소들이고 그것은 로뱅송, 브런치 글을 읽는 우리 자신의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일체'란 본래 그러한 바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우주가 있다는 것, 로뱅송은 그 원초적 지경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이 소설이 매우 거창하게도 '우주적 소설'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주장에는 '전제'가 있다는 것 보이시나요? 좀 전에 했던 말들을 돌이켜 보아요. 전제는 바로 '타인 없는 세상'이지요. 타인이 없다는 것이 이 모든 생각과 상상을 가능하게 한 겁니다. 결국 들뢰즈가 보기에 투르니에의 이 소설은 일종의 '실험'이 됩니다. 타인이 없다는 가정하에 한 사람의 단독자가 어떤 경험을 겪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를 실험해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타인의 효과'를 유추해낼 수 있다고 봅니다.
타인의 첫 번째 효과는,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대상과 생각하는 각각의 관념 주위에서 바탕을 조직한다는 점이다.
들뢰즈의 이 말은 곧 타인이야말로 나의 '바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타인이 사라지면 '나'도 바탕을 잃고 마구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들뢰즈의 말을 들어 보죠.
나는 하나의 대상을 본다. 그리고 그로부터 눈을 돌린다. 그러면 그 대상은 다시 바탕으로 되돌아가며, 동시에 그 바탕으로부터 내 눈을 사로잡는 새로운 대상이 나타난다. (...) 애초에 새로운 대상을 그렇게 인식하거나 감지하는 것은 오직 타인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 대상에서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 그 부분을 동시에 나는 타인이 볼 수 있는 부분으로 정립한다. 내가 대상의 숨겨진 쪽을 보기 위해 돌아가면, 나는 대상 뒤에서 타인을 만나게 되고 타인의 봄과 나의 봄이 합쳐질 때 대상의 총체적 봄이 달성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없는 내 등 뒤의 대상들은 타인이 그것을 볼 수 있음으로 해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건 사실 우리 일상에서도 작동하는 '타인의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타인의 눈을 통해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들뢰즈가 아주 명민한 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매번 망각하는 사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지요. 모든 철학자들의 특이한 점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지요. 철학자들은 사태의 이면에 늘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지 않을까요? 역으로 사태의 이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누구나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열에 아홉은 나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입니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정말 희안한 결론에 도달하는데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다.
약간 섬뜩하고 불안합니다. 마치 내 안에 다른 유령이 있는듯한... 이 결론을 더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우리의 '지각' 또는 '감각' 그리고 '욕망'마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결정적인 소설 속 사건은 방드르디의 등장인데요, 그가 등장하자마자 로뱅송은 상당한 혼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자신이 방드르디인지, 방드르디가 자신인지 모를 분열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지요.
로뱅송의 혼란은 단지 머리속에서만 일어나는 관념의 혼란이 아닙니다. 그의 감각체계 자체가 기능부전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한대로 타인이란 감각-지각 체계의 바탕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욕구가 하나의 대상을 수용하는 것은 늘 타인을 통해서이다. 나는 가능한 타인에 의해 보여지거나 생각되거나 소유되지 않은 어떤 것도 욕구하지 못한다. 이것이 내 욕구의 토대이다. 내 욕구를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늘 타인이다.
인용문에도 있다시피 타인은 '나'가 어떤 대상을 욕구하는 데에 있어서 기준점이 됩니다. 사실 들뢰즈의 이 언급들은 들뢰즈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 말이 들뢰즈의 저 언급에 대한 훌륭한 요약이 될 것 같아요.
나는 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뭔 생뚱맞은 소리냐 하시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도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실들을 아주 명료하게 해 줍니다. 사실 나의 '욕망'이라는 것이 과연 내 것일까요? 그것 혹시, 내 부모나 형제나 친구와 애인의 것은 아닌가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욕망은 그들의 욕망, 즉 그들이 '바라는 바'의 '나의 모습'이 아닐까요? 나는 언제부터 '나의' 욕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살았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자신 있게 대답할 분은 아마 아무도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우리 인생을 절망에 빠트리지는 않습니다. 좀 뒤에 얘기 하겠지만 이 사실은 오히려 타인과 더불어 살게 하는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만약 타인이 없다면 우리의 세계는 매우 공격적으로 각자에게 다가온다는 것이 들뢰즈의 가정이기도 합니다. 로뱅송이 스페란차 섬에 처음 도착해서 느꼈던 그 두려움과 불안감이 우리에게도 엄습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인식하고 있는 이것과 다른 어떤 것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고, 가능성으로만 우리 주위를 좁혀옵니다. 구체적인 것은 사라지고 오직 추상적인 예감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시절 놀이 공원에 있는 '귀신의 집'에 들어선 것처럼 컴컴한 심연 안에 홀로 내버려져 언제 공격당할지 모르는 공포감의 한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타인 없는 공포나 불안감이란 기본적으로 자아가 타인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들뢰즈도 그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투르니에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그는 타인을 이렇게 정의하지요.
타인이란 나의 지각장 안의 한 구조이다. 타인이 부재할 경우 이 장은 하나의 전체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자아의 기능부전 상태가 타인의 부재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은 이런저런 나의 행동이나 말이나 제스처들이 '나'를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타인'을 표현하는 매개물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타인들의 가능성들을 펼쳐내고, 타인들이 나를 통해 그들의 욕망을 실현하도록 돕습니다. 즉 자아는 타인의 잉여물, 또는 분비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실 매우 극단적인 '반주체론', '반자아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들뢰즈는 우리가 일상 안에서 늘 느끼는 '나'라는 그 확고부동한 감각을 폐기처분하려고 합니다. 기실 그 '나'라는 것은 기망이고, 허위며, 실재와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기망과 허위가 없으면 '나'는 존속할 수 없게 됩니다. 여기에 비극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나'가 실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있다', '나는 나다', '나는 ... '. '나는 ...' ...
들뢰즈는 투르니에의 소설에서 로뱅송이 방드르디를 만나서 겪는 자아정체성의 혼란과정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방드르디는 비록 미개한 야만인에 불과하지만, 스페란차 섬에 있는 유일한 '타인'입니다. 로뱅송은 이 유일무이한 타인으로 인해 자신이 그동안 일구어 놓은 '문명'(개간한 땅과, 집과, 길들인 개와 댐과 다리들)이 모두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들뢰즈의 눈에 이러한 과정은 아주 필연적인 것이겠지요? 왜냐하면 이제 로뱅송의 지각장은 방드르디라는 타인의 지각장, 언제나 자아의 지각장보다 앞서는 그 지각장에 의해 재구성되지 않으면 로뱅송 자신이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좀 다른 차원에서 들뢰즈의 말을 따라가 보도록 하지요.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타인이 나타나기 전에 예컨대 안정시키는 세계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의식과 구분하지 못한다. 타인은 하나의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표현하면서 등장하며, 이 세계는 타인 없이는 펼쳐지지 못한다. 나? 나는 나의 과거 대상들이며, 나의 자아는 바로 타인이 나타나게 만든 한 과거의 세계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이다. 타인이 가능 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이다.
타인 현존의 일차적 효과는 공간에, 그리고 지각 범주들의 분배와 관련된다. 그러나 아마도 보다 심층적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째의 효과는 시간과 그 차원들의 분배에, 그리고 시간 속에서의 전항과 후항의 분배와 관련된다. 타인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을 때 어떻게 과거가 여전히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제 타인은 우리의 '지각장'이라는 공간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생의 시간을 규제하는 원리로 등극하게 됩니다. 자, 한 번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그 과거의 시간 안에 '타인'이 없던 적이 있었나요? 아마 아무도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이토록 타인은 우리의 시간의 '바탕'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럼 다시 가정해 봅시다. 타인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까 말했듯이 공포와 불안감이 우리를 옥죄어 오겠지요? 들뢰즈는 다시 묻습니다. 그 공포와 불안감이 나오는 근원은 어디인가?
그것은 이제 다시, '원소들'입니다. 날 것 그대로의 '원소들'이 바로 그 공포와 불안감의 근원이라는 것이지요. 앞서 이 원소들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들뢰즈는 이토록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논문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 원소들이 가지는 힘이 막대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 원소들은 타인없는 자아의 지각장을 이루는 공간적 특성을 띄기도 하고, 그의 과거, 현재, 미래에 모두 걸쳐 있는 시간적 특성을 띄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다시 한 번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원소들'이라는 말은 자연적 요소들이라고 옮겨도 된다는 것입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원시의 자연 자체라는 것이지요. 철학적으로 이는 '4원소'이기도 합니다.
리비도와 원소들의 결합, 이것이야말로 로뱅송의 일탈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탈은 타인 없는 세상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이 성적 욕망과 자연의 원소들이 결합한다는 기이한 상상을 들뢰즈는 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 일종의 증상, 정신병에 해당됩니다. 소설에서 로뱅송이 하는 짓들은 대개 편집증적이거나(노동에 대한 집착), 신경증적이거나(방드르디에 대한 신경질적인 태도), 분열증적(스페란차와의 섹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들뢰즈의 남다른 면모가 드러나는데요, 그의 말을 들어 보시죠.
신경증과 정신이상은 깊이의 모험이다. 타인구조는 깊이를 조직하고 안정시키고 살아남게 한다. 또한 이 구조의 문제점들은 (...) 탈규칙, 실성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원소들은 환각의 한 측면이다. 세계의 이 재구조화는 로뱅송의 위대한 건강함이며, 위대한 건강함의 정복 또는 ‘타인 추락’의 세 번째 의미이다.
타인없는 시공간에서 타인의 구조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각'과 같습니다. 로뱅송은 원소의 더미인 스페란차를 타인으로 보는 환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우리도 타인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할 때가 종종 있지요. 하지만 그것을 우리 삶에 종종 나타나는 증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 이러한 타인 없는 상태에서도 '건강함'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 건강함은 바로 '세계의 재구조화'가 이루어진다는 데 이유가 있습니다. 타인없는 상태에서 로뱅송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합니다. 절대고독의 상태에서 느끼는 삶의 희열은 그것이 비록 병적이라 하더라도 긍정할 만하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들뢰즈는 '나'의 환상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바대로 그 환상은 오히려 우리를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로뱅송의 타인없는 세상, 스페란차에서의 28년이 어떤 '발견'을 이루어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발견이지요.
타인은 원소들을 대지로, 대지를 물체로, 물체들을 대상들로 조직하는, 그리고 자아의 대상, 지각 작용, 욕구를 동시에 규제하고 측정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인간은 타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지요. 내가 그렇다면 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타인은 나를 타인으로 여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 진실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우리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진실이 이렇게 드러나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이 자아에 대한 집착이 병적인 상태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요.
분명한 것은 '타인'의 가치는 자아의 가치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낯선 타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곤란과 기쁨을 함께 하게 될 때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들뢰즈가 이 논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하나의 진실은 바로 이것이지요.
<참고문헌>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질 들뢰즈 지음, 이정우 옮김,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