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흄에게서 주체의 문제와 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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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어지러우실지도 모릅니다.
습관으로 인해 표상화된 관념들과 그것들의 운동에 대한 믿음은 논리적 신념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공의 운동이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설명될 수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de facto)의 문제이지 권리상(de jure) 문제는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즉 공이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언젠가는 공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념은 우리가 동의하는 표상[개념, conception]과 동의하지 않는 표상 사이의 어떤 차이를 만든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차이를 신념이 만들어 놓고, ‘동의하는 표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어떤 방식으로 부여하는 것일까요? 습관이 형성하는 논리적 신념은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신념은 단순히 확증되는 어떤 원리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러나 그러한 원리도 추론의 결과 파악된 하나의 또 다른 신념에 불과합니다다. 이 신념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사실의 권리’라는 이상야릇한 요청에 부딪히게 될 것 같습니다. 즉 원리라고 믿어버리는 대신 사실들을 더 섬세하게 관찰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이상야릇한 요청이 흄에게 현전한 것이 “어렴풋한 관념”(loose ideas), “어렴풋한 표상작용”(loose conception)이라고 보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흄은 이 부분의 논변 전개를 하면서 표상 작용을 분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어렴풋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생한 것'이지요. 이 두 관념은 ‘완전히’ 다른 것일까요? 원문 전체를 보도록 합시다.
"저자는 계속해서 신념을 어렴풋한 표상 작용과 다르도록 하는 방식 또는 그 느낌을 설명한다. 그는 이 느낌을 말로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것 같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각자 자신의 가슴으로 이 느낌을 의식하고 있다. 저자는 이 느낌을 때로는 더욱 강한 표상 작용, 때로는 더욱 생생한 표상 작용, 또는 더욱 생동적인 표상 작용, 더욱 확고한 표상 작용, 더욱 강렬한 표상 작용 등으로 일컫는다. 사실 신념을 구성하는 이 느낌에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붙이든 간에, 저자가 명백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느낌이 허구나 순수 관념(mere conception)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느낌이 정념 및 상상력에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정념이나 상상력은 진리 또는 진리로 받아들여진 것에 감동될 뿐이다. 시가는 그 모든 기교를 동원하더라도 실제 생활에서 같은 정도의 정념을 결코 유발할 수 없다. 시가는 그 대상을 근원적으로 표상하기에 부족하며, 우리 신념과 의견을 유발하는 대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느낄 수 없다."([인간본성론]).
이 구절은 혼란스럽습니다. 흄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지금 사실과 권리 가운데서 길을 잃은 듯이 보입니다. 여기서 중심적으로 사용되는 ‘느낌’이라는 어휘는 각각의 문맥을 거치면서 보다 강한 함축을 띄며 발전합니다.
처음에 이 느낌은 ‘구분’의 능력이지만, 그 다음으로 ‘강한 표상 작용’ 자체와 동일시되지요. 그리고 정념이나 상상력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어떤 것이 되었다가, 진리 자체를 최초로 선별하는 임무를 부여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흄은 진리를 실제생활과 같은 ‘사실’의 영역에 두는 것처럼 말하는 동시에 ‘시간’의 진리성을 기각하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다시 한 번 물어 봅시다. 누가 이러한 ‘권리’를 가지는지요?
이후로 흄은 이러한 ‘느낌’을 ‘신념’의 차원에 연결합니다. 이때 신념은 매우 과격한 방식으로 그 능동적 성격을 박탈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이성이 아니라 오직 습관”이 경험의 중요성을 알게 하며, 정신은 습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고, 신념도 마찬가지로 표상을 형성하거나 결합하지 않고(!) 표상의 느낌을 달리 하는데 그친다는 것이지요.
“신념이 그런 표상에 새로운 어떤 관념을 결합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념은 그 표상이 다르게 느껴지도록 할 뿐이며, 그 표상을 더욱 강하고 생생하도록 한다”(T 656).
결국 여기서 우리는 신념이라는 최종적 국면이 전도되어 ‘느낌’이라는 최초의 매우 불분명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최초에 느낌은 표상자체였지만, 이제 느낌은 신념의 도움을 받아 더욱 생생하고 강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흄의 비일관성을 발견하는 것이 정당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흄의 어떤 류의 철저한 일관성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논의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정신이나 사유가 가지는 위상이 흄에게 어떤 것인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분명해 집니다. 그는 정신을 어떤 구성된 것으로 보며, 지각으로부터 비롯된 관념들이 그 안에서 활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것은 ‘유사’, ‘인접’, ‘인과’라고 할 수 있지요.
만약 우리 정신이나 자아가 이렇게 구성되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관념들의 연쇄 속에서 가뭇없다면, “이 연합의 원리들이 우리 사유의 유일한 끈이므로, 이 원리들은 실제로 우리에게 우주의 접착제이며, 모든 정신 작용은 대개 이 원리들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해서 뭔가 새로운 것이 ‘발명’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길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흄의 이 나긋나긋한 논지를 뒤집어 봐야 합니다. 과연 이 ‘실험적 추론’ 아래에 뭐가 들끓고 있을까요? 그 흄의 ‘느낌’에 의해 ‘선별’되기 전의 그 “어렴풋한 관념”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이상한 관념의 ‘시초’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질문하지 말아야 합니다. 흄에게 발생론적 사유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앞서 이야기 했다시피 흄에서 중요한 것은 심층도 발생도 아닌 표면이며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물체들(objects)의 항상적 합일(constant union)일 뿐이다. 그리고 필연성(necessity)도 그러한 항상적 합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T 146)
그래서,
“무엇보다 원인과 결과의 관념에 들어오는 필연성은 정신의 결정일 뿐이며, 이 결정에 따라서 정신은 한 대상에서 그 대상의 일상적 수반물로 넘어가고, 한 대상의 존재에서 다른 대상의 존재를 추정한다.”
이러한 추정[inference, 추론]이 어렴풋한 관념을 통해 형성되려면 여기에는 분명 저 유명한 ‘정신의 지각’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흄은 이러한 정신의 지각을 종종 ‘의지의 문제’와 연관시키곤 하지요.
즉 그는 정신을 한갓 ‘지각’(perception)과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 한다고 볼 수 있지요. 즉 그는 자주 “우리 정신의 지각”(perception of our mind)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을 의지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와 정신 그리고 지각의 상호연관성의 근저에는 늘 ‘정념’이 존재하며, ‘인상’(impression)이 정념의 본질로 상정됩니다.
만약 흄의 논의가 정합성을 가진다면, 이때 정신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방식의 오성 또는 지성(understanding)의 체계가 아니라 “내적인 인상”(internal impression)으로부터 야기되는 지각이며, 의지와 연관되었을 때 분명 신체성을 띄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의지란 우리가 의식적으로 우리 신체(body)의 어떤 동작이나 새로운 정신의 지각을 야기할 때, 우리가 느끼고 의식하게 되는 내적인 인상일 뿐”인 것이지요(T 399).
이렇게 되면 여기에는 더 이상 데카르트적인 심신이원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집니다. 정신은 신체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평면에 놓이게 되며, 오직 이론적으로만 구분될 수 있을 뿐이지요.
사실 이런 식의 발상은 데카르트에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흄의 특유성은 데카르트가 존재론과 논리학 사이에 펼쳐 놓았던 정신과 신체라는 텅 빈 간격을 아무런 철학적 정당화도 필요 없는 양 사유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 간극을 ‘인상’과 ‘정념’이라는 일종의 표면효과를 통해 거리낌 없이 왕복합니다.
흔히 우리가 흄의 철학을 보면서 느끼는 ‘깊이의 부재’는 여기서 연유합니다. 그에게는 내려갈 ‘바닥’이 없으며, 그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존속하는 기체, 정신과 신체를 이어주는 신의 신실성(veracitas dei), 원인들의 계열로서의 운명(fatum)은 그의 소관이 아닌 것입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상식’의 표면이며, 또는 물리적 실재의 ‘모습’(eidola)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습들’의 표면효과가 ‘실재’를 구성한다는 점이에요.
따라서 흄에게서는 보다 급진적인 방식의 자연주의(naturalism)가 소박한 실재론과 물리주의 양자를 넘어서서 제시됩니다. 이 자연주의는 그것이 환영의 효과라는 점에서 급진적이며, 인상의 해석가능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반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애초에 자유와 필연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흄은 ‘의지’를 정의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의지’가 정신과 마찬가지로 실체 없는 텅 빈 장소라면, 그것이 어떤 ‘지향성’(intentionality)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지향성’은 분명 의지의 ‘자발성’을 한 요소로서 함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흄에게서 의지는 ‘인상’이며 그것이 해석불가능하다면, 존재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지향성은 거의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이론적 아포리아는 앞서 논의했다시피 흄이 모든 주체적 근거들을 ‘정념’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정념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며, 자발성은 파생적이거나 수동적인 인상과 결합원리에 의해 사후적으로 조정된 것이 됩니다.
흄의 경우 의지는 어떤 것을 지향한다는 목적론적인(또는 현상학적인) 의미를 띄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연주의적인 방향으로 설명됩니다. 단 하나 명증한 것은 ‘인상’이며, 내적 인상으로서의 의지가 이제 도달해야 하는 것, 그 ‘필연적’ 경로는 외적 인상들, 다시 말해 ‘타자’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흄의 도덕론이 전개되는 지점이 됩니다. 이렇게 봤을 때 흄의 도덕론은 정념론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것은 분명 어떤 초재적(transcendent) 대상을 통해 도덕을 정당화하는 방향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히려 그것은 흄 당대의 근대적인 의미에서 물리학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견지해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원자’라는 점이지요. 흄에게서 ‘인상’이나 ‘정념’은 모두 일종의 ‘원자’처럼 다루어진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하나의 기초 단위(unit)라서 크기와 형태 또는 무게에 있어서 다를 뿐, 타자든 사회든 내적 인상이든 외적 인상이든 모두 유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물체들(objects)의 항상적 합일(constant union)일 뿐이다”(T 400).
필연성이라고 해서 예외는 될 수 없습니다. 일차적인 과정은 이 합일이며, 이차적으로 인과관계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필연성이라는 ‘관념’은 대상들이 규칙적으로 “연접”하는 동안 인과관계 안으로 도입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물체들의 항상적 합일이 있고, 다음으로 인과관계의 안개가 형성되며, 그것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기 위해 필연성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이 ‘도입’이 바로 “정신의 추론”이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이 ‘추론’은 또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정신의 능력’일까요? 과연 흄이 이 ‘능력’이라는 칸트적 용어를 활용할 수 있었을까요? 그보다는 흄이 이러한 추론과정조차 인상들의 연합과 동일한 과정에서, 즉 안개가 걷히듯이 함께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간에 그에게서 앞서 제기되는 것은 대상들의 항상적 합일이며, 그러한 합일을 생동하는 인과관계로 만들어 주는 것은 어떤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은 어떤 것인가요? 알려는 욕망인가요? 보다 윤리적으로 묻자면 그것은 사랑인가요? 분노? 아니면 둘 다인가요? 하지만 욕망이라 하더라도 자연주의적인 의미를 띄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이 욕망이 정념보다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능력처럼’ 보이게 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동안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들처럼) 서로 부딪히고 서로를 생성시킨다면, 욕망은 정신의 참다운 흐름이라 고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욕망을 담고 있는 신체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