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흄에게서 주체의 문제와 유물론
이 클래스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철학이라고는 쥐뿔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분부터 나 그래도 철학 좀 했다는 분까지 다양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이것 저것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게 진행하고자 합니다.
자 여행을 시작해 보시죠.
우리가 흄을 이해하는 길잡이로 삼을 분이 바로 아래 분입니다. 바로 질 들뢰즈이지요. 뭐 그렇다고 이 분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을 거에요. 철학이란 무릇 '스스로 생각하기' 아니겠습니까?
1953년에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그의 책 [경험론과 주체성]에서 흄을 논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흄의 입장에서는 이상한 하나의 질문을 제기하지요.
“정신은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
이 질문의 이상한 점은 정신(l'esprit, mind)이라는 특유한 주제가 가지는 명백해 보이지만 불가해한 특징으로부터 유래합니다. 우선은 흄의 입장에서 ‘정신’은 명백하지만, 들뢰즈의 입장에서는 불가해한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들뢰즈의 질문은 일종의 괴물의 탄생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흄이 정신에 대해 가졌던 꾸준한 의문 자체를 해소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철학에서 ‘질문’이란 그 질문이 어떤 답을 내리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 자체가 문제되고 있음을 드러낼 때 의미 있는 것이지요. 즉 사유의 평면을 새롭게 발명하거나 그것을 전복할 때 의미 있어 진다는 것입니다.
들뢰즈의 질문을 뒤집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체는 어떻게 정신이 되는가?”
놀랍게도 이 질문은 데카르트의 것이라는 것을 철학 좀 했다는 분들은 눈치 채실 겁니다. 따라서 들뢰즈는 흄의 인간론이 품고 있었던 철학사적 전복의 의미를 발굴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그의 실체이원론 따위를 논하지는 않을 것이에요.
현재로서는 흄이 겨냥했고, 들뢰즈가 ‘차이의 철학’으로 성취한 그 ‘비주체의 주체론’을 음미하는 것으로 족하지요. 왜냐하면 들뢰즈의 말마따나 주체란 사라져야할 어떤 것이고, 그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악명은 명성보다 오래가는 법입니다. ‘주체론’이라는 근대철학의 분야처럼 악명이 높은 것도 없을 것이에요. 그것은 어떤 철학적 법정의 검열에도 살아 남을 것만 같습니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이 ‘주체’와 더불어 살아가며 이것이 없다면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공허해져 버립니다.
오늘 아침에 자기자신을 부정한 자라도 저녁 어스름이 지면 살아 남았음에 감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그 살아남은 자의 위안이란 어떤 것일까요? 마치 자신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면”(라이너 마리아 릴케) 스스로 존재를 입증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흄은 이 모든 것을 ‘습관’(custom)이라고 말합니다. 우선 어떤 동일한 주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기억의 도움을 통해 증명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1715년 1월 1일, 1719년 3월 11일, 1733년 8월 3일 등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안다면 인격적 동일성은 증명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기억이란 것도 한계가 있으며, 인격의 동일성은 실재적으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드러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되지요. 다시 말해 주체는 인격적 측면에서 하나의 미약한 관념의 다발로서 ‘표현’되는 것이지 실재적 구별을 통해 관념이나 인상과 대별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표현’이 삶의 본질이라는 것이 비극이지요. 이를테면 그토록 찾았던 보물이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있다거나, 한 장의 사소한 진술서가 유명한 정치인의 타살 의혹에 열쇠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체론은 이제 표현의 문제, 혹은 표면의 문제가 됩니다. 주체는 어떤 실체가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주체'라는 말의 라틴어 원어인 수비엑툼(subiectum)은 더 이상 기체(휘포케이메논, hypokeimenon)이라고 할 수도 없게 됩니다. 또는 실체, 즉 우시아(ousia)도 단지 하나의 ‘재산’이나 ‘소유’ 정도가 될 뿐입니다.
거기에 어떤 ‘정신’(psyche, pneuma)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최소한의 의미에서 정신은 남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대체 인상이나 관념이 ‘어디로’ 갈 것인가, 즉 정신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들이 온통 흩어지지 않겠는가라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신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정신이란 이토록 사소하지만 또한 주체의 생존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체는 정신을 통해 연명하고 있지만, 또한 정신으로 인해 점점 마른다고나 할까요? 오히려 정신으로 인해 주체가 살찌는 경우는 환상에서나 가능할 것처럼 보입니다.
정신은 단지 주체가 거주하는 ‘장소’이지 않을까요? 또는 어떤 텅 빈 무대 자체가 주체인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흄은 “정신은 일종의 극장”이며 “이 극장에서는 여러 지각들이 계기적으로 나타나고, 지나가며, 다시 지나가고 미끄러지듯 사라지고, 무한히 다양한 자태와 상황 안에서 혼합된다”([인간본성론])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정신의 극장’이 잔혹극의 무대가 되는지, 낭만극의 무대가 되는지는 ‘습관’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그 습관은 흄에 따르면 어떤 ‘원리’(principle)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흄이 『논고』(인간 본성론)를 저술하는 와중에 가장 실재적인 ‘도덕의 문제’를 먼저 사유했으며, 이후에 ‘정념론’이 완성되었다는 캠프 스미스의 견해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완비된 형태의 체계는 출간순서와는 역순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정념에 관하여』가 가지는 흄 철학 체계 내에서의 의미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명시적으로 ‘정념을 정신의 기반’이라고 적시하며, 또한 도덕과 사회체가 정념(공감)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흄의 정념’에 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흄의 정념을 들여다 보기 전에 그가 능청스럽게 자신을 되돌아 본 몇몇 구절들을 살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흄의 유물론’이라는 이 글의 근본 의도를 드러낼 수 있을 겁니다.
『도덕에 관하여』의 마지막에는 상당히 긴 제목의 부록이 딸려 있습니다(‘인간본성에 관한 논고’ 등의 제목으로 최근 간행된 어떤 책에 대한 초록‘). 이 부분에서 흄은 자신의 책에 대한 논평을 짐짓 익명을 취하여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록을 통해 전체 저작에 대한 아주 익살스러운 설명을 접하게 되지요.
상당히 능청스러운 어투로 시작되는 첫 부분은 자신의 저작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를 철학사에 대한 일람을 통해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목적은 “극소수의 단순 원리”(simple principles), “궁극적인 원리”(ultimate principles)를 획득하는 것입니다([인간오성론] 646).
이러한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서 ‘인간학’은 특권화 됩니다. 논리학이든, 정치학이든 윤리학이든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능력들과 사회적 관계를 다루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여기서 초월적인 방식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흄 특유의 분석적 방식으로 정의 내려집니다.
우선 인간의 정신은 지각(perception)과 다를 것이 없다고 흄은봅니다. 즉 그는 “정신에 현전되는 어떤 것도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따라서 지각은 정신이라는 ‘놀이터’에 들어선 맨 처음의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지각은 이 ‘터’에서 정념이든 사유든 반성이든 모든 것을 유발하고 촉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정신에 들어와 정신을 ‘구성’하는 지각, 즉 정신의 지각(the perception of the mind)을 흄은 ‘인상’(impression)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흄은 이렇게 인상에 대해 규정하는 방식이 매우 새로운 것이라고 부가합니다. 이 ‘새로움’은 추측컨대 로크가 보지 못한 측면일 것이다에요. 즉 로크에게 중요한 것은 ‘관념’이었지 그것과 ‘인상’이 어떻게 다른지, 나아가 ‘인상’이 어떻게 ‘제일성’이 되는지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다는 것이지요.
이 새로운 구분(또는 ‘발견’)에 따르면 “인상이란 우리의 생생하고 강한 지각이며, 관념이란 보다 희미하고 약한 지각”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부분은 흄이 로크를 비판하는 와중에 마치 데카르트의 ‘본유관념’(innate idea)을 수용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이런 능청떠는 구절들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본성’이 발생하는, 또는 일어나는(arise) 그 ‘터’는 어디일까요? 그것은 ‘자연’(nature)이며, 또는 ‘자연으로서의 정신’이며, 정신을 구성하는 ‘인상’들이고, 마찬가지로 그 인상을 촉발하는 ‘물질’이지요.
따라서 “모든 정념은 일종의 자연적 본능(natural instincts)”이고, “인간정신의 근원적 구성물(constitution)”이 되는 것입니다. 정념이 초월적 근원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무엇보다 정념의 일차적 구성조건인 상상력이 흄에게 있어서는 전혀 ‘정신적’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상력이 아니라 지성의 측면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인과관계’에 대한 ‘당구 사례’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논리적인 측면에서 딜레마를 초래한다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 딜레마가 어떤 문제틀을 드러냅니다. 그는 “두 개의 공은, 운동이 상호작용(communicated)되기 전에 서로 접촉했고, 충돌과 운동 사이에 어떤 시간간격도 없다”고 말합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 진술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철학적 내기에서 ‘불연속성’을 택한 흄의 논지가 드러나지요. 이러한 근본 전제로부터 흄의 ‘인접성’이라는 원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접성은 따라서 ‘시간적 선행’으로 설명됩니다. 이때 시간은 연속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하나의 순간으로 분할가능한 불연속적인 어떤 지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딜레마는 ‘항상적 결부’(constant conjunction)로 해결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 가지 원리가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수립되는데, 그것은
이 중 마지막 원리는 사고의 습관, 혹은 경험(hexis)이라고 할 것이에요. 흄의 경험주의는 여기서 머물지는 않습니다. hexis는 반드시 물질적 기반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유물론의 요청’이라 할 만 하지요.
“경험 없이 우리는 운동을 추론할 수 없다”(T 650;244)라는 것이지요. 즉, “이러한 일치는 사실의 문제(matter of fact)이며 이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면, 경험 이외에 어떤 증명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T 651).
그러므로 흄의 회의주의는 유물론의 요청으로 가는 에움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물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에 대해 추론하거나 감지된 그 성질을 물체와 결부시킬 수 있는 권리가 애초에 주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물체가 우리에게 습관을 부여하고, 상상력에 인상의 다발을 펼쳐 놓음으로써 모든 것이 가능해 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삶의 길잡이는 이성이 아니라 습관(custom)인 것”입니다(T 652).
그런데 여기 하나의 신산한 생각이 흄에게 떠오르는데 그것이 ‘신념’(belief)이에요.
이미 스크롤이 왠만한 압박감은 넘어선 듯 하니 이 부분부터는 다음 시간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