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영 Jul 07. 2018

내 잘못도, 당신 잘못도 아니야

- 소수자철학 입문#2

최근 남성의 위기와 역차별에 대한 주장이 많이 나옵니다.


‘위기’라고 하는 말은 타당해 보이지만, ‘역차별’이라는 말은 다소 의아한 것이지요.


차별이란 동등한 능력임에도 부당하게 취급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남성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엄청 분노할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어쩝니까? 아래 그림들이 팩트인데)


이를테면 학부모들의 ‘남고 선호 현상’을 들 수 있습니다.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 비해 학력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내신 성적에서 불리해서 굳이 남고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여학생들과 함께 경쟁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주눅 들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지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학업성취도가 떨어지는 것은 국제적이네요. 뭐 그렇다고 이걸 위안삼으면 좀 지질하지요?


교사들도 대개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여학생들은 악착같이 공부하고 알토란같이 성적이나 스펙을 챙기는데, 남학생들은 너무 어리숙하며 하는 짓이 어리고 게임이나 자위행위, 섹스와 같은 말초적인 것에만 빠져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는 능력의 차이이지 부당한 차별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렇지 않은 남학생들도 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남녀 임금격차가 큽니다. 사정이 이런데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도대체 남자란 어떻게 정의될까요?


일반적으로 ‘남자’라는 성 정체성은 남자의 몸을 가지고 이성의 몸에 다가서는, 이성애자만을 지칭합니다.



이 정의의 전제는 ‘이성애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성 간의 사랑만을 관습적, 제도적, 이념적으로 긍정하며, 동성애나 다른 사랑의 방식을 억압하는 것이지요.



이성중심주의에서 이성애중심주의로, 그리고 동성애 혐오로.


사실 이런 남성성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남성들도 다소 고달프긴 마찬가지입니다. 이성애 질서 내에서만 인정되는 이런 규정에 따라 한 남성의 라이프 사이클이 어느 정도 결정되는데요, 아들, 아버지, 남편, 할아버지로 이어지는 완고한 선형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가부장 질서 내에서 부여되는 생산의 의무, 즉 ‘장자 생산’이라는 의무도 부가됩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장자 생산’의 의무는 동성애자들에게도 부모에 대한 일종의 ‘죄의식’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동성애 커플이 장자 생산을 못해서 불효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한국사회에서 ‘아버지, 남편, 할아버지’라는 남성성의 분화는 ‘가장’(breadwinner)이라는 개념 안으로 수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 세 가지 남성성이 구분된다기보다는 ‘돈 버는 사람’이라는 가장이라는 위치가 다른 것들을 압도한다는 것이지요.


가부장성이 강한 전근대와 근대에 ‘가장’이라는 지위는 상당한 권력을 동반했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은 더 이상 그런 권력을 가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전유했던 ‘경제권력’이 해체되어 재분배되었기 때문이지요. 단적으로 한국사회 가정의 경제생활 풍경은 누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취업에 목을 맵니다. 한 사람이라도 빈둥거리며 집 안에만 있으면 '눈칫밥' 먹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남성들도 궁지에 빠트리는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성은 여전히 확대 재생산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의 가부장성은 사회구조가 만들어내는 문화에서 재강화되고 재생산됩니다.

예컨대 남성들의 군대문화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여성에 대한 지배욕과 성적 우월감을 담론화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지요.


군대는 일종의 ‘권력 훈육 장치’로 남성성을 조형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로지 권력을 가져야 하며 권력을 가지는 순간 권력이 없는 자에게 절대적으로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군대 내에서 저질러지는 언어폭력과 우울증 유발율의 상관성. 이 모든 것인 '권력-복종'을 내면화하는 기제가 됩니다.



이 장소에서 특히나 여성과 여성의 신체는 ‘권력’이 거리낌 없이 발휘될 수 있는 상상의 대상으로 취급됩니다. 군대문화가 내면화된 남성은 사회생활에서도 여성을 도구화하고, 남성들 간의 권력감이 연대되는 장소(룸쌀롱 등등)에 불려 나오는 매개물로 보는 것을 당연시하게 됩니다.     


한국사회의 군대문화가 어떻게 남성성을 내면화시키고,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지 해부한 아주 좋은 연구서가 있습니다. 아래 책이지요. 일독을 권합니다.



이렇게 해서 '남성동성사회'라는 집단이 생성됩니다.


'남성동성사회'란 남성이 사회적 헤게모니를 가지는 것이 당연시되고, 이러한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한 규제들이 작동하는 사회를 의미합니다.


가부장적 가정에서 또래집단으로, 그리고 군대와 사회로 이어지는 ‘남성동성사회’라는 의미화와 신체화의 토포스는 일종의 호모소셜하고 호모에로틱하지만 호모섹슈얼한 것은 배제하는 특성을 띱니다.

실제로 호모섹슈얼은 엄격히 금지되지요. 왜냐하면 이 토포스(물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념이 구현되는 상징적 장소) 자체가 이성애라는 대전제에 기반하여 블록화(폐쇄적이지만 유사한 집단과만 동조하는 현상)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동성애 블록은 배제되거나 소수화되어 기껏 동정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남성동성사회는 사실상 동성애적 ‘실재’를 거부하는 상상의 토포스라는 가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 상상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상상의 대상, 즉 ‘에로틱하고 복종적인 여성’이 필요해지는 것이지요. 여기서 '여성'은 동성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방패막이자 희생물인 셈입니다.

  



도대체 이런 남성성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걸까요?   


사실 복종적인(수동적인) 여성의 대당으로 설정해 놓은 ‘능동적 남성’이라는 것도 실재와는 거리가 먼 것일 수 있습니다.

섹스에서든 아니면 노동에서든 신체적으로 ‘우월하다’고 가정된 남성이 그에 걸맞은 능동적 포지션과 작업을 맡는 것은 그러한 능동성의 환상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수행적 과정인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권리가 단지 수동적으로 사유되고 교육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성교육에서 여자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담론의 선택지는 “안돼요”, “손대지 마세요”, “싫어요”와 같은 수동적 반응에 치우쳐 있지요. 마치 여성들은 "이렇게 하세요", "내가 먼저 할게요", "좋아요"라는 능동성을 성적 자기결정권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이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주제는 교육적 측면에서도 보다 진보적으로 생각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노마의 생각입니다.


 ‘남성의 위기’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남성의 능동성이라는 사상누각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남성들이 느끼는 위기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상적으로 상상된 그런 '남성성'이니 얼마나 취약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이것이 단순히 생물학적 남성을 기준으로 위기감의 진원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위기’는 일종의 문화현상이고 젠더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이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까요?

      



여성의 능동적 활동이 남성 권력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지요.


여성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페미니즘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합니다. 이것은 남성의 능동성과 지배권력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는 뜻이지요.

일상 안에서도 균열은 감지됩니다. 이 균열이 심리의 장으로 옮겨지면, 불안감을 동반한 폭력성으로 발전하는 것이지요.


이는 대개 남성들이 여성을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여성은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이지요.

이것은 가부장적 남성성을 오매불망 원하고, 애지중지하던 사람들에게는 완전 날벼락입니다.


실재 안에서 자신의 상상계가 파괴되는 경험을 한 남성들은 너도 나도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로 몰려들고(‘일베’), 특히 권력의 각축장에 ‘느닷없이’ 현행화된 페미니즘에 대해 지질한 폭력을 가하게 됩니다(2018 지방 선거 신지예 후보 벽보 훼손 사건).

싫지만 드러내 놓고 경쟁해 봤자, 안 될 것이 뻔하다는 생각에서 하는 행위들인 것입니다.

   

 

2018 지방선거 녹생당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 선거홍보물 훼손 사건


여성의 소위 ‘경쟁력’이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 경향 아래에서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다시 말해 기존의 남성동성사회의 주류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쟁점이 있습니다.


이 주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남성들이 한 편에 있고, 반대편에는 이 흐름의 수혜자인 여성들이 있으며, 또 배제되는 여성들도 있는 것입니다.

노마의 생각에 이른바 ‘전선’이 형성되고 공격과 백래쉬가 일상화된 지점은 문화지체남성들과 수혜자 여성들이 공방을 벌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전선은 매우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문화지체남성들이 전면에 있는데 반해, 수혜자 여성들은 여기 없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공격을 행하는 남성들이 마구잡이로 여성들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장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따로 있어요.




이 공방 가운데 최종적으로 이익을 보는 것은 남성동성사회의 주류입니다.


애초에 이들이 노린 것은 여성의 노동은 좀 더 싼 값에 더 임시적이고 일시적으로 고용할 수 있다는 계산에 기반한 이윤 획득에 있기 때문이지요.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가 일상화된 현재 세계에서 비정규직이라는 협소한 노동시장 안에서 벌이는 전투는 결과적으로 남성 기득권을 강화할 뿐이지 않을까요?

    

남성들에게 유포되고 있는 ‘루저 문화’라는 것도 사실은 성별분업 관계가 붕괴하고 가장으로서 남성의 위치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 와중에 자신의 훼손된 남성적 능동성에 대한 르쌍티망(원한감정)으로서 여성들을 재타격하기 위한 방편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너, 여성들 때문이라는 반응적(reactive) 윤리(또는 노예 윤리)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정작 진정한 '적'은 유유히 웃으며 이 싸움을 관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개의 남성들이 ‘남성동성사회’ 기득권을 주류와 함께 누리던 호시절은 모두 흘러간 옛일입니다. 이제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한 적을 상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저 주류세력들의 디바이드 앤 룰(divide and rule, 이간질)에 놀아나는 결과만을 가져오지요.


남성 중심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주던 시민사회의 조직들(예컨대 노동조합)이 더 이상 협상력이나 기층 조직화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성성 해체의 근본 원인은 ‘여권 신장’이 아니라 근대적 노동(조직화된 노동)의 몰락에 있습니다.


쉽게 말해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변화가 남성 여성 모두를 위협하고 있는 중이지.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남성들의 적은 여성들이 아니라 여전히 건재한 남성 주류 세력들입니다.

사실상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젠더 구분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성별 구분보다 자본과 학력, 기술 등 개인이 가진 자원에 따라 젠더 범주가 유연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유연해진 젠더 구분 하에서 쓸모없어진 가부장성을 지키려고 헛된 적을 만드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보다는 진보적인 여성들과 연대하여 내 신체와 정신을 착취하거나, 내 생존을 위협하는 진정한 적을 똑바로 쳐다보고 싸워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로 노마는 역차별이니 뭐니 하면서 혐오발언을 하시는 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싶어요.


내 잘못도 당신 잘못도 아니여!!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란 말여!!!




<참고문헌과 인용된 자료 출처>

*영국도, 미국도 ‘페이 미투’…‘남녀 임금 격차 1위’ 한국은?

*서울 지역별·고교별 수능성적 비교해보니… 문과·이과 모두 상위권은 女高가 싹쓸이
*남학생이 여학생에 성적 뒤지는 건 세계적 현상… 한국 남녀 격차는 OECD 평균보다 크다
*"너 군대 갔다 왔어? 여자 있어?"

*“고문관 ××” “군바리 주제에” 안에서도 밖에서도 대못질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신지예 후보 벽보 27개 훼손

매거진의 이전글 그는 오만하고도 슬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