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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Jul 06. 2018

그는 오만하고도 슬펐다

- 불과 로고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흐느끼는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매우 오만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늘 심각한 표정으로 다녔습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많이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헤라클레이토스

그의 슬픔과 오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의 일부. 맨 오른쪽에 심각하게 팔을 괴고 있는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대략 기원전 535년에서 475년 상간에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에페소스를 건국한 안드로클로스 가문 출신입니다. 왕족인 것이지요. 


단편 글에서 자신이 “왕위(basileia)를 포기하고 동생에게 내주었다”라고 말하는 데에서 그것을 알 수 있지요.


그가 썼다고 알려진 책은 『자연에 관하여』(Peri Physeos)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는 것이 당시에는 유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당대의 철학자들의 저서에 동명의 제목이 붙어 있어요.


이 책은 크게 우주론, 정치론 그리고 신론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당시에 매우 난해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난해함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를 읽고 많은 신봉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고스'를 모르는 당신은 무지하다.


헤라클레이토스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로고스’(logos)입니다. 그는 로고스를 대중들의 ‘경험’으로부터 유리되고 ‘은폐’된 어떤 것으로 보고 있어요. 철학자가 그것을 ‘본성에 따라’(지금으로 말하면, '쉽게') 설명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그는 사람들을 비난하길,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마치 자면서 하는 것들을 잊듯이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로고스라는 것이 특별히 초월적이고, 인간사와 먼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아예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놓친다는 것이지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로고스는 공통의 것임에도 사람들은 마치 자신만의 생각을 지니고 있는 듯이 살아간다.

이것은 로고스가 보편적으로 경험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스스로의 아집에 빠져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집'이란 대중적 앎이며, ‘본성에 따른’ 앎이 아닐 것이에요. 이런 앎은 로고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저 견해(억견, doxa)나 ‘~인 듯한’ 지식(확실하지 않은 '풍문' 같은 것) 일뿐이라고 합니다.


대중들에 대한 이런 견해는 종종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군중을 경멸하는 태도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의 출신과도 연관이 있겠지만, 주로 대중들의 지적 열등함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의 상황이 플라톤의 경우와 같이 헬라스 민주주의의 쇠퇴기와 겹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이에요. 플라톤이 당시의 아테네 대중들을 지배자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는 우매한 군중이라고 여겼던 것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헤라클레이토스는 대중들의 지적 우둔함을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누스(정신적 활동, nous)나 프로네시스(지혜, phronēsis)는 몇몇 고귀한 귀족들에게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대중들은 그러한 것을 설명해도 모르며, 배우고서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로고스를 대하면서 이성적으로가 아니라 매우 감정적으로 대하기 일쑤라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생각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말에도 흥분하기 십상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군중심리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어쩌면 구제불능의 엘리트주의에 빠진 지식인이라고 해도 별 이의가 없을 것 같아요.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 오만한 철학자가 대중의 무지함만을 비웃은 것이 아니라 당대의 지식인과 선배 지식인들까지 싸잡아 바보들이라고 조롱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오만함은 그나마 평등했다고 할까요?


    


당신들은 엉덩이를 걷어 차여야 해!


헤라클레이토스는 당대의 현자들을 호명하면서 이들을 희롱합니다. "당신들은 엉덩이를 걷어차여야 한다"라고 말하지요.


이들의 죄는 자신의 지성을 가지고 사유하지 않고, 지식에 기대어 논변했기 때문이에요. 헤라클레이토스가 보기에 이것은 일종의 ‘정당하지 않은 권위에 기댄 논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많이’ 알고 있느냐 보다, ‘어떻게’ 사유하는가가 더 관건이었던 셈입니다. 이 ‘어떻게’는 분명 로고스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로고스적인 사유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진, 지혜로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 말은 로고스적 사유가 일상과 멀리 떨어진 저 멀리 있다고 새겨서는 안 될 겁니다. 이 말은 현자라면 마땅히 지혜를 구하기 위해 대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즉 상식적인 사유를 벗어나 자신만의 사유를 하라는 것이지요.      


어쨌든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감각적으로 인지되고 영혼에 의해 제대로 사유되는 진리의 대상은 ‘로고스’이며 이는 당대의 현자들이 묘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러한 신적인 로고스를 불신(apistis)한다면 이것은 알려지지 않고 은폐된 채로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그러하듯이 말이지요.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신과는 달라서 예지(gnōmē)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인간적인 영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코스모스(kosmos), 즉 ‘조화로운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진정한 지식이 어떤 ‘공통된 것’(xynōi)이며,  “지배하고(kratei),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하지요.


헤라클레이토스가 지식에 대해 가지는 관념은 이를 통해 볼 때, 어떤 개별적인 사항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대상’에 가깝다고 보입니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러한 지식을 호흡을 통해 빨아들인다는 언급을 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러한 지적인 영혼의 능력은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에요. 즉 로고스를 알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통된 본성을 활용하는 것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사려하는 것(sōphronein)은 가장 큰 덕(aretē)”이지만 “참을 말하는 것과 본성에 귀 기울여가며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지혜(sophiē)는 이와 다른 사항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공통된 본성이 보편적인 대상(kosmos)에 적용될 때 우리는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즉 지성을 통해 우주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또 자연을 살피면서 로고스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그 사실뿐이다.

이렇게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시작해서 그 진정한 철학적 위상을 부여받게 됩니다. 즉 그에게서부터 이 개념은 우주론적, 윤리적 함축을 함께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로고스는 무엇보다 ‘만물의 이법’에 해당합니다. 이 이법은 하나뿐이고 유일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들은 하나로 잡힌(접힌) 것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서구 형이상학의 근본 주제 중 하나인 ‘일과 다’의 문제가 여기에서 등장하는 겁니다. 여기서 '다' 즉 '여럿'은 '일'(하나)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구도를 이룹니다. 즉 여럿이 없으면 일, 즉 하나도 없는 것이지요.


유명한 말이 있지요.


만물은 흐른다.
'판타 레이'라고 읽습니다. '만물은 흐른다'는 뜻이지요.



이 말은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의 근본 입장을 드러내는 말이지요. 즉 '영원 불변성' 보다 '생성 변화'를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흐름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바로 '대립과 긴장'이 이 흐름 속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이것은 ‘투쟁’(‘불화’)와 ‘조화’라고 합니다. 이렇게 투쟁과 조화가 서로 뫼비우스 띠의 양면처럼 하나의 평면에서 서로를 떠받쳐주는 존재론적 구도는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처음 발견됩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 철학사에 있어서 매우 특유한 사유 이미지라고 해야 하지요. 헤라클레이토스 이전에도 물론 원질들의 상호이행에 대한 사유는 존재했습니다. 예컨대 아낙시만드로스는 근원적 원질(stoicheion)을 아페이론(apeiron)으로 보고, 이로부터 대립자들이 생성되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로부터 한정, 즉 페라스(peras)가 가해짐으로써 우주가 조화롭게 형성된다는 것이지요


이 사상이 헤라클레이토스와 다른 점은 대립자들의 생성과 ‘그 이전’의 apeiron 상태가 로고스에서와 같이 동일 평면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낙시만드로스에게 대립자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대립자는 서로 투쟁과 조화를 '동시에' 이루어낸다는 것이에요.

 

이것을 쉽게 상상하기 위해서는 헤라클레이토스 자신도 예로 든 '활'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힘과 뒤로 당겨지는 힘이 서로 모순되지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긴장을 유지하면서 말입니다.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


헤라클레이토스 이후 이 로고스의 역설적 모습은 엠페도클레스에게 이어지는데, 그는 불화(neikos)와 사랑(eros)의 테제를 통해 우주 발생론을 전개하게 됩니다.  

   



세월은 강 같이 흐르고...


이 '만물은 흐른다'라는 말과 더불어 또 하나 유명한 말이 있지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이 한 마디 말을 아주 감각적인 영상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한 번 감상해 보시죠.




어떠세요? 직관적으로 이해되시나요?


수수께끼 같은 헤라클레이토스 특유의 이 언급은 플라톤에 따라 읽을 경우 가장 무난한 독해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플라톤은  『크라틸로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것은 나아가고 아무것도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 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술을 반만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다 심층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할까요?


우선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말은 어떤 ‘동시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애니메이션에 잘 드러나지만 강물의 ‘흐름’은 여기서 부단한 '연속성'이지요. 이것은 '있음'과 '없음'이 부단히 갈마드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요.


여기서 존재와 비존재는 하나의 접면을 형성하며 배치됩니다. 그래서 개별적인 존재가 강에 들어서는 ‘순간’은 그 접면에 서는 순간이며 연속성에 단절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의 접면에서 강물에 들어선 사람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불분명해집니다. 덧없어지는 것이지요.  불연속면은 연속성에 의해 삼켜집니다. 다시 말해 덧없는 시간 안에서 '존재'하고자 해도 우리는 늘 비존재라는 것과 만나면서 불안한 것입니다.



불타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흐르는 물과 더불어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자신의 존재론을 전개하는 아주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불’의 테마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우주론에서 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불’은 로고스 자체이며, 변화와 같습니다.  


 만물의 ‘공통 척도’이며, 사멸하지 않는 존재라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주장하지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불로서의 이 세계가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점이에요. 그러나 이  동일성이 단순히 고정된 정체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불은 늘 위로 타오르다가도 아래로 꺼져 드는 운동을 합니다. 즉 좀 전에 말했듯이 반대운동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즉 현재로부터 과거와 미래로 찢어지는  양방향성을 가진 시간과 같이 불의 전환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반대극으로의 전환은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그 불빛의 번쩍임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대극끼리의 투쟁과 전쟁은 늘 이 불의 조화 또는 흐름(강의 흐름)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전쟁과 투쟁은 불 그리고 강의 흐름이 표현하는 효과들입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지요. 투쟁과 전쟁이라는 원리는 인격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는 투쟁과 ‘필연’을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투쟁전쟁우주뿐 아니라 우리 삶의 운명인 것입니다.


운명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므로, 이제 운명과 전쟁은 동등한 상태로 상호적인 양상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모든 것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만하고도 슬픈 헤라클레이토스. 그는 로고스를 아는 현자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우매한 대중들과 현학적인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그는 우주와 존재에 대한 명확한 '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물'과 '불'의 이미지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던 이 존재의 비밀을 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만함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 존재의 비밀은 그를 슬프게 만들기도 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강은 덧없고, 불은 가차 없기 때문입니다.


가차 없이 타오르고 꺼져 드는 법칙, 덧없이 흘러가며 존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법칙, 그것이 바로 로고스였던 것이지요.


인간의 삶이란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순간 속에 명멸하다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었지요.


그가 오만하고도 슬픈 것은 다른 사람의 무지를 대하는 그의 양가감정이기도 했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자세이기도 했던 것이지 않았을까요?


그는 불행한 철학자였을까요? 그 불행으로 인해 위대한 철학자가 된 것이었을까요? 이 질문들은 이제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이 한 번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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