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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Jun 20. 2018

혁명을 원하니? 나도 그래

- 혁명사#0 서론

'혁명'이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러시아 혁명? 프랑스 혁명?


아니면, '그런 건 개나 줘버려!' 그러시나요?


(표지사진: Traxcala Photo Jenny Tsiropoulou/ThePressProject)


혁명이란 말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시는 분은 아마 '브런치'조차 모르실테니 그건 좀 안심이네요.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권력을 끌어내린 운동을 우리는 '촛불혁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고 보니 촛불 이후 우리는 '혁명'이라는 말에 더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촛불혁명이후 우리는 '혁명'이란 말에 익숙해졌습니다. ⓒ 한겨레 신문

이건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 변화된 세상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빈부격차가 일상화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국제 구호단체인 옥스팜(Oxfam)은 2016년 현재 세계 최고 부자 62명이 자산 하위 50% (약 36억명)의 자산을 다 합친 것과 맞먹는 부(富)를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2010년에는 388명이 세계 50%의 부를 가졌고, 2014년도에는 85명, 2015년도엔 80명, 2016년엔 62명까지 줄어든 것이지요.


이는 세계의 부가 점점 더 소수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이런 문제에 대해 현대 자본주의에는 ‘영원한 혁명’(permanent revolution)이라는 처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피케티가 말하는 혁명의 형식은 아마도 ‘글로벌 부유세’일 것입니다. 글로벌 부유세는 그가 쓴 『21세기 자본주의』에 제시된 부의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지요. 이 방안은 세계 0.01% 초고소득층에 막대한 세금을 물려 그것을 불평등 해소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이 책은 무려 680여 페이지에 이르는 데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 저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나게 많이 팔렸어요. 10명 중 4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나라인데도 말이에요.


그리고 얼마 전 타계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영웅 스테판 에셀(Stéphane Hessel)이 쓴 불과 30페이지 밖에 안 되는 책도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보다 직접적인데, 『분노하라!』에요. 이 도발적인 제목의 책도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몇 년 전 미국 하버드 대 교수인 마이클 샌들(Michael J.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책이 국내에서 130만부나 팔렸습니다. 지금도 스테디셀러에요. 이 책은 미국에서는 불과 10만부 정도 판매되는데 그쳤다고 합니다. 이 책이 특히 한국에서 호소력을 지녔던 이유는 한국사회의 지독한 불평등과 부정의를 해석하고자 하는 나름의 갈증을 잘 짚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책들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바는 이 세상이 부정의하며, 그것이 대체로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부전상태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전세계 90% 이상의 사람들은 이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지만, 나머지 극소수는 호화찬란한 생활을 주체 못할 정도라는 것이지요.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라고 한 것은 이 체제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동력이 현상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전복하는 것이며, 그 최초의 운동이 ‘분노’라는 정념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의 기능부전과 다른 세상에 대한 꿈. ⓒ gustavemoke.blog


불평등과 부정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독서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지요. 2016년에 발표된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소득 불평등지수는 OECD 국가 중 4위로서 이스라엘, 미국, 터키 다음이며, 임금불평등 지수는 무려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한국 불평등 4위’, 《경향신문》 2016. 2. 12일자).


단단히 잘못되어서 지옥이 된 세상은 구성원들에게 좌절과 절망만을 안겨 줄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역사적 ‘변혁’의 필요성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개 우리는 '혁명이 뭐지?' 그럽니다. 느낌상 오는 게 있긴 한데, 구체적으로 잡하지 않으니 그런 겁니다.


혁명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아요. 브리테니카 백과사전 영문판에 나옵니다.


혁명이란 사회과학과 정치학에서는 보통 정치체제 그리고 연합체와 구조에 있어서 중대하고, 갑작스럽고도, 폭력적인 변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혁명은, ‘산업혁명’이나 경제적, 기술적 조건의 ‘근본적인’(profound) 변화도 함축한다고 해요. 웹스터 사전도 살펴보죠.


혁명이란 보통 다수 민중(many people)이 한 정치체제의 통치에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정치체제의 통치가 시작되게 하는 폭력적인 시도이다. 이것은 민중의 삶과 노동 등에서의 갑작스럽고, 극단적이며, 완전한 변혁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혁명이라는 말이 완전히 왜곡되어 쓰이곤 했지요. 호랑이 담배피던 유신시절(박정희 시절)에 이 왜곡이 완성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뻔뻔스럽지요.


더 심각한 것은 그런 내용을 '국정교과서'에 버젓이 서술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요.


1961년 5월 16일에는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혁명은 박정희 장군[고딕체 표기]의 영도 아래 추진되어 전격적으로 무혈혁명을 완성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치,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여 밝은 민주정치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 박진동, 「한국현대사-왜곡과 진실 4·19와 5·16」, 『역사비평』, 1995 가을호(통권 32호), p. 345에서 재인용.


좀 웃기는 문체지요? 무슨 북한 교과서도 아니고. '박정희 장군의 영도'에서 빵 터집니다. 이걸로 대입시험도 치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이게 불과 몇 십년 전입니다.  그러니 아직도 '박정희 장군의 영도'를 그리워하는 분들이 많은 것도 이해되는 바입니다. 수긍은 못하겠지만.


5.16 혁명공약을 허위 기술한 국정교과서인 1979년 <고교 국사> 329쪽. ⓒ 오마이뉴스


소위 ‘국정교과서’의 공인된 기록이란 것이 상당히 신빙성 있는 정보를 줄 것 같지만, 보다시피 현재의 관점으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이상한 맥락에 ‘혁명’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독재자’로 기억되는 인물의 이름을 굵은 고딕체로 처리하면서, 극진한 예우를 취하는 태도 또한 매우 낯 뜨겁지요.


사실 박정희의 군사반란에는 ‘쿠데타’(coup d'etat)라는 단어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쿠데타’에 대한 정의는 ‘국립국어원’의 국어사전이 가장 단순명쾌하지요.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 지배 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 이동.” 그리고 이 사전에는 이것이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는 구별된다”고 분명하게 덧붙입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애석하게도 80년대에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운 세대들은 기본적인 개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셈이 됩니다. 이 엉터리 교육의 효과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요.


브리테니커나 웹스터의 사전적 정의조차 무색케 하는 이런 혁명 따위는 이제 잊어버려야 겠지요? 대신 우리는 다른 혁명을 생각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사실 혁명이라고 해서 뭐 그리 대단한 대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어떤 것, 우리가 망각한 어떤 것이지 않을까요?


곁에 있는 혁명, 안 보이는 혁명 말입니다.


곁에 있다는 것은 우리 일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면서 결국에는 많은 것을 변혁한다는 것이고, 안 보인다는 것은 주류 역사 안에 묻혀 있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토피아는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보지 못할 뿐이지요. ⓒThe Double Negative ⓒ Karen Bray: A Revolution of Values?

다소 심오한 용어를 동원하자면, 이를 ‘혁명의 잠재성(virtuality)’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혁명이라는 것이 역사의 한 국면에서 나타났다가 그 뒤안길로 사라져버리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잠재성’이란 용어는 사건의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평화로워보이는 역사의 한 시기에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곳에서 늘 혁명의 ‘잠재성’(potentiality)이 들끓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재성’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것은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잘 안 보일 뿐이에요.


이를테면 우리가 매일 접하는 방송 3사의 메인 뉴스들에서는 다루어지지 않거나, ‘외신’이나 ‘단신’으로 처리되는 그러한 사건들, 바로 그런 실재 말입니다. 사실 혁명적 사건은 대대적으로 노출되기보다, 보다 은밀한 곳에서 진행된다고 해야합니다.

ⓒ Reimagining revolution: Amador Fernández Savater


공중파보다는 인터넷에서, 평화로운 중산층의 일상적 가정에서보다는 제3세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부엌에서, 또한 대도시의 휘황찬란한 마천루와 아름다운 야경이 아니라, 그 아래 잘 보이지 않는 게토(ghetto)에서, 두런거리고, 이동하고, 싸우고, 때로는 모의하는 곳에서 혁명은 진행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잠재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잠재적 혁명들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실재로 존재하고 있는 우리 이웃들이나, 우리 ‘곁의’ 사태들을 떠올리는 것이 가장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허구’가 아니라 ‘실재’ 자체며 ‘현실성’이에요.


다만 우리가 응시하지 않거나, 시선을 거두거나, 성찰을 중단하기 때문에 포착되지 않아서 그것을 실재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잠재성을 똑바로 응시하는 사람들이 바로 ‘혁명가’ 또는 ‘투사’, ‘전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또 이렇게도 묻습니다.


도대체 이 혁명들이 어째서 지금은 발생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것 자체가 ‘우문(愚問)’은 아닐까요? 뭔가 달라지고 있는데, 조금씩조금씩 또 안 보이는 곳에서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보지 못하고 저렇게 묻는 것이 아닐까요? 차라리 '원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렇게요.


혁명을 원하니? 나도 그래


그럼 뭔가 (모든 것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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