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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Jun 14. 2018

안녕, 스토아 부엉이!

- 스토아 철학 특대호

안녕하세요. 지난번 브런치에서 만났던 그 부엉이입니다(->진상인 너, 아파테이아 한 방). 절 사람들은 '스토아 부엉이'라고 부르지요. 제일 현명한 새라나 뭐라나. ㅎㅎ 암튼 오늘은 노마 씨의 부탁을 받고 이렇게 스토아 철학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안녕, 스토아 부엉이!!!!! 스토아 철학 갈쳐줘~~~~~


'스토아 철학'이라고 하면 대개 '그게 뭐지?' 그럽니다.

그런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세네카, '명상록' 이러면 '아~'하지요.


아빠 서재에 있던 그 책들이지요.
ㅎㅎ 혹시 들춰 보신 적이 있나요?


대개 윤리적 교훈과 단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읽다 보면 무슨 회초리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끊임없이 훈계하고 나무라고, 욕망을 절제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는 딱,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스토아=금욕주의


그리고 시험문제로 나오지요. (싫다 싫어)


저는 이런 현실이 뭐랄까, 웃기기도 하지만 좀 슬픕니다.


뭐 이런 기분?

스토아 철학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서점 스테디셀러이고 처세와 연관 지어 팔리는 그 수많은 스토아 철학책들은 스토아 철학의 후기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요.


스토아 철학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그 책들이 아니라 아직 번역조차 잘 안되어 있는 초중기 스토아 철학을 살펴봐야 하지요.


지금부터 부엉이인 제가 한 번 제대로 썰을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오게네스는 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별명은 '미친 소크라테스'였지요.


스토아 철학의 시조라고 할 만한 철학자는 디오게네스입니다. 이 철학자, 상당히 기백 있는 분이지요. 들어 보시면 모두 아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만났을 때 이야기지요. 알렉산더가 "내가 당신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요?"라고 말하자, 디오게네스는 "내 햇볕을 당신이 가리고 있으니 비키시오."라고 했습니다. 전거가 그리 분명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와 다른 다른 일화들을 살펴보면 거리낌 없고, 시니컬한 그의 성품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니컬'[Ctnical]이라고 한 말의 어원이 바로 '시니시즘'[Cynicism] 즉 디오게네스의 철학을 지칭합니다.)


당대의 권력자에게뿐 아니라 석학에게도 디오게네스는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플라톤은 디오게네스에게 여러 번 혼쭐이 난 것 같아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집니다. 


플라톤이 이데아에 대해 설명하면서, 책상에는 '책상성'(책상의 이데아), 술잔에는 '술잔성'(술잔의 이데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 디오게네스는 "내 눈에는 그딴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책상과 술잔만 보이는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달리 큰 집에 살던 플라톤의 허식을 고발하기 위해 진흙투성이의 맨발로 플라톤의 집을 돌아다니기도 했다는군요. 플라톤으로서는 같은 동료로서 좀 창피하긴 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플라톤은 디오게네스를 존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던히 디오게네스의 패악질에 당하면서도 그를 받아주었으니까요.

유명한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부분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바로 앞에 방만하게 널부러져 뭔가를 읽는 저 노인이 디오게네스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자연적 욕망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지요. 심지어 아테네 도시 한가운데에서 버젓이 부끄러운 짓을 하기도 했으니까요(무슨 짓인지는 19금).  왜냐하면 그러한 욕망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 위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스토아 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디오게네스의 이러한 행동들을 살펴보더라도 스토아 철학이 금욕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에 따르는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말을 유의해서 보세요. 


자연에 따르는 삶
Kata Physin


이 슬로건이 스토아 철학 전체를 대표합니다. 이제부터 왜 그런지 알아볼게요.


일단 스토아 철학자들을 연대기적으로 하나씩 살펴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스토아 철학이라고 하면 대략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정도까지에 걸쳐 있습니다. 이를 보통 초기와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눕니다. 가장 기록이 잘 남은 시기는 후기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서점에서 그토록 쉽게 구할 수 있는 세네카와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책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스토아 철학이 초기 스토아(제논, 안티파트로스, 크리시포스)와 중기 스토아(파나이티오스와 포세이도니오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후대의 저술가가 남긴 인용과 요약을 사용하여 그 빈자리를 메울 수밖에 없지요. 이 두 시기에 스토아 철학자가 쓴 저술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정말 전혀 없습니다. 


더 불행한 사실은 후기 스토아 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초기 스토아주의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초중기 스토아 철학의 자연학과 존재론은 윤리학적 경구들을 생산하기 위해 왜곡하기까지 했습습니다. 가령 영혼의 능력에 관한 연구와 같은 경우에 세네카와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모두 초기 스승인 크리시포스로부터 벗어나 플라톤적인 영육 이원론(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나누는 이론)에 기댑니다. 먼 스승인 디오게네스가 알았다면 경을 칠 일이겠지요?



그럼 초기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도리겠지요?


이들에 따르면 보통 철학은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자연에 관한 것(피시콘), 윤리에 관한 것(에티콘), 이성에 관한 것(로기콘)이 그것이지요. 이런 구분은 각각의 스토아 철학자들에 의해 토포이, 에이데, 게네 등으로 불립니다. 이 세 부분을 현대적 어법으로 쓰자면 자연학, 윤리학, 논리학 또는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크리시포스, 파나이티오스, 포세이도니오스, 제논

스토아학파는 이 세 부분의 관계에 대해서 세 분야의 혼합을 주장하는 쪽, 세 분야의 선후를 따지는 쪽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분야들의 혼합이 근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삶 또는 자연(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이러한 것이 자연학이라는 한 분야에서 시작된다고 볼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지요. 왜냐하면 어쨌든 스토아 철학에서 중추는 '자연학'이니까요. 


그렇다고 이들이 인식론이나 논리학을 경시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이 분야는 이들에게 매우 특화되어 있습니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들에게 논리학이나 인식론은 존재론(자연학)의 연장입니다. 존재론 없이 인식론이나 논리학이 없고, 인식론이나 논리학 없이는 존재론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지요. 윤리학이요? 윤리학은 이 모든 것의 '결실'입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후기 스토아 철학이 무엇을 누락했는지 말입니다. 이들은 윤리학의 '기초'에 해당되는 존재론을 누락하고 자신들의 말을 한 겁니다. 그러니 그 말들이 모조리 금욕적인 경구처럼 들리는 것이지요. '왜?'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니 무슨 꼰대들의 잔소리처럼 되는 것이고요. 


스토아주의의 논리학에 대해 좀 이야기해 보죠. 스토아주의에서 논리학은 언어를 소재로 삼습니다. 그런데 스토아주의가 '언어'라는 말로 사용하는 그리스어 원어는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말과 이성을 모두 뜻하지요. 그리고 이 '로고스'는 '자연의 이법'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언어가 바로 자연의 이법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마지막으로 윤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논리학과 자연학 그리고 윤리의 소재는 하나입니다. 바로 '로고스' 즉 '이법으로서의 우주' 즉 이성적 우주인 것이지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윤리는 스토아 철학의 모든 부분을 알려주긴 합니다. 그러나 스토아주의에서 철학의 분과인 윤리는 탁월함과 충동, 자연에 따르는 행위(의무)와 같은 일련의 주제를 가리키는데, 이러한 주제를 연구하려면 기본적으로 자연학과 논리학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요.


디오게네스 이후 스토아 철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사람은 바로 '키티온의 제논'입니다('거북이와 아킬레우스' 논변을 펼친 제논과는 다른 사람이에요). 기원전 301년 또는 300년 경에 키티온의 제논은 아테네에 있는 채색 주랑(스토아: 아크로폴리스와 사원, 주요 공공건물이 내려다 보이는 곳)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곳에서 철학적 논의에 종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유명한 쾌락주의 서클인 에피쿠로스 학파도 아테네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 외곽에서 은둔하던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제논은 아테네 중심의 공공장소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지요. 그 장소(스토아)가 그의 제자들과 그들의 철학 체계를 나타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아테네 중심지에 위치한 '채색주랑'을 오르내리며 토론하면서 학파를 만들어갔습니다.


학파를 창설했을 때 제논은 삼십 대 초반의 새파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333년 또는 기원전 332년경에 퀴프로스(Kypros)에 있는 키티온(Kition)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기원전 311년경 22세에 아테네에 도착했으며, 기원전 262년 또는 261년에 72세의 나이로 죽었지요. 이러한 연대기에 따르면, 제논은 자기 명의로 철학자 개업을 하기 전에 아테네에서 10년 정도 지낸 셈이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아테네에 왔는데, 이러한 시기는 에피쿠로스가 정원을 그의 중심지로 세우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제논이 철학을 가르치던 곳에는 채색주랑이 서 있었으며 그를 둘러싼 철학 그룹이 매일매일 가르치고 토론하기 위해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체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토아주의’라고 불려졌지요. 이 철학은 일찌감치 당대의 지배적인 철학이 되었습니다. 채색 주랑 주위를 배회하던 이 사람들이 하나의 학파를 형성할 당시 제논은 62세였습니다. 

   


이제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 또는 '논리학'이라고 불릴만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요.     


스토아학파 사람들에게 로고스(법칙)가 지배하는 우주에서 인과적 연관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논리적 연관이며, 거꾸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논리적 연관이 곧 실재적 연관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순수 논리학에는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논리는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스토아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논리학을 해야 하는 이유이지요. 


스토아적 우주는 법칙 또는 내재하는 로고스가 있는 세계입니다. 이는 스토아주의에 나타난 근본적인 생각이며, 그들 철학의 세 가지 측면[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에 모두 흐르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지요. 스토아 철학자가 보기에 논리학의 기초는 우주 전체에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초는 단순한 체계가 아니에요. 즉 인간의 마음이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물이 실제로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에 추론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우주는 물체적 구성요소가 이루는 이성적 구조리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한데요, 제논에 따르면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움켜쥐거나 파악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움켜쥠을 가리키기 위해 스토아 철학자가 사용하는 그리스어가 카탈렙시스(katalēpsis, 파악 또는 파악인상)입니다. 제논은 손이라는 비유를 들어 인식의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손이 완전히 펴진 상태는 아직 외부 대상의 인상이 영혼에 오기 전입니다. 손을 약간 움츠려 가리게 되면 영혼이 인상에게 보이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러한 반응은 마음이 인상에 동의한다는 반응이지요. 이어서 그는 주먹을 쥐고서 이것을 '파악' 또는 '파악인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손으로 그 주먹을 잡으면 지식이 되는 것이지요.


스토아 철학자는 인상의 수동적 수용과 마음의 동의 행위를 구분함으로써, 어떤 것을 알아채거나 그것에 주목하거나 그것에 주의하는 일을 단순 인상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때 '통치원리'(hegemony)라는 것이 인식에 작용하는데요,  이것은 앞서의 인식 작용이 누적되는 경험을 통해 얻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통치 원리는 인상을 해석하고 분류하는 기능을 하지요. 

'검은 개'를 인식하는 과정을 그림으로 나타내 봤습니다. 

가령 어떤 인상을 '검은 개'라고 여기는 반응이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형태'와 '검은'이라는 단순 인상을 '개'라는 종적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숨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인상에 동의할 때, 표현할 수 있는 특정 사실과 우리의 감각적 경험이 일치한다고 보는 겁니다. 가령 '내가 보는 것'이 '검은 개'라는 사실과 일치한다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상'들은 확실히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감각 인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감각적이지 않은 인상들도 있지 않나요? 이를테면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든지 '5 곱하기 5는 25다'라는 것들 말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러한 감각적이지 않은 인상도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인상은 그 자체로 '파악 인상'이고 '개념' 즉 통치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때 통치 원리에 해당되는 개념을 '일반 개념'이라고 합니다. 즉 이 일반 개념이 우리 안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상에 상응하는 대상이 있다고 보고 그것이 '파악 인상'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진리의 기준'은 바로 이 일반 개념이 되는 것이지요. 일반 개념에 따른 파악 인상은 그것과 정확히 상응하는 일부 대상이 실제로 있음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 스토아 사상에서 특히나 강조되는 '언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상이 길을 안내하고, 사유는 그 결과를 말로 표현한다.

 

스토아 철학자의 논증에 따르면 경험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때 언어는 밖으로 드러나는 '소리'라기보다는 성찰의 언어, 즉 내면적 언어를 말하는 것이에요. 즉 사람은 외적으로 말하는 언어 때문이 아니라, 내면적인 언어 때문에 비이성적인 동물과 다르다는 것이지요. 까마귀와 앵무새, 어치도 소리를 분명하고 뚜렷하게 냅니다. 그래서 사람은 단순한 인상 때문에 그 밖의 생물과 다른 것이 아니에요.  동물들도 그러한 인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인간은 추론과 결합이 만들어낸 인상 때문에 그러한 생물과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은 분명하고 뚜렷하게 사고하고 내면에서 말하며, 경험의 인상을 정돈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곧바로 우주의 법칙, 즉 로고스와 이어집니다. 스토아 철학자가 보기에, 세계 전체는 내재하는 로고스의 작품 또는 이성의 작품인데, 분명하고 뚜렷하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우주의 사건을 반영하는 진술을 할 수 있는 수단을 사람이 확보했다고 여겨지는 것이지요. 언어는 자연의 부분이며, 사람과 세계의 관계를 표현하는 수단을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법으로서의 로고스 안에, 인간의 언어라는 작은 로고스가 포함되어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의 이성(로고스)는 우주의 이법(로고스) 안에 있으면서, 이법을 이해하고,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언어철학에 좀 더 다가가 보도록 하지요. 물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목소리'는 '공기의 진동'이지요. 그래서 스토아 철학자는 음성학적 측면에서 보는 단어를 '물체적'이라고 여겼습니다. 반면 술어나 문장에 의해 '말해지는 것'은 '비물체적'이라고 봅니다. 공기와 목소리는 작용과 수용이라는 물체적 조건을 충족시키지만, 문장의 의미는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의미가 있는 것을 말하려면 특정의 물리적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특정 종류의 말을 특정 순서에 따라 발화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말을 순서에 따르게 만드는 이성적 존재가 있다는 전제가 있어요. 이 이성적 존재가 사고하거나 말함으로써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의미는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물체적인 음성과 사유의 작용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의미 자체는 스스로 작용하지도 못하고 작용받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미'는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중요한데요, 그것이 일정한 '효과'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문장이나 발화는 그것을 듣는 자나 말하는 자로 하여금 '이해'를 동원하게 하지요. 그리고 어떤 의미는 한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크리시포스에 따르면 이 ‘의미’를 다루는 분야는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합니다. (1) 완전한 레크톤 즉, 명제(아크시오마) 및 삼단논법에 관한 이론, (2) 불완전한 레크톤, 즉 능동형 및 수동형의 술어(동사)에 관한 이론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레크톤'이라는 요상한 말을 잘 보세요.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명제'가 되는데요, 원어의 의미를 모두 담아내기에는 다소 부족해요. 그래서 보통 레크톤이라고 그냥 씁니다. 


크리시포스에 따르면 이 ‘의미’를 다루는 분야는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합니다. (1) 완전한 레크톤 즉, 명제(아크시오마) 및 삼단논법에 관한 이론, (2) 불완전한 레크톤, 즉 능동형 및 수동형의 술어(동사)에 관한 이론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레크톤"이라는 요상한 말을 잘 보세요.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명제"가 되는데요, 원어의 의미를 모두 담아내기에는 다소 부족해요. 그래서 보통 레크톤이라고 그냥 씁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불완전한 레크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이 불완전한 레크톤은 다시 세 가지로 나누는데요, 능동형 술어와 수동형 술어, 마지막으로 이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이지요.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다시 이 ‘중간항’, 즉 어느 쪽도 아닌 레크톤입니다. 이는 예컨대 ‘생각하기’, ‘산책 하기’와 같은 부정법 동사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 부정법 동사의 특유성은 그것이 어떤 시제도 인칭도 없는 말이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일종의 ‘애매한 표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법 동사는 시간의 방향과 주체의 다양성이 가진 잠재성을 모두 포괄하는 것입니다. 스토아학파는 이 중요한 요소를 발견한 사람들이지요. 이 레크톤이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물리적이기도 하고 심리적이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묘하지요? 


'가다'라는 레크톤은 이 그림의 '남자'가 '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갈 수도 있고, 고양이가 갈 수도 있는 것이죠.


예를 들면, '가다'라는 레크톤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은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릴 수도 있고, 또 우리 신체를 움직이면 그것이 증명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애매모호함'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머릿속에 떠올리는 '가다'라는 레크톤은 일단 '누가', '어디서', '어떻게'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이 있어야 명확하게 그려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가다'라는 레크톤에는 그러한 것이 없어요. 또 내가 일어나서 곧장 걸어간다 해도, 그것이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레크톤은 분명 '내가 현재 간다'라는 걸 지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 불완전한 레크톤 중 능동도 수동도 아닌 것에 작용과정이 붙으면 이제 능동과 수동이 결정되고, 거기에 주체가 붙으면 명제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비물체적인 '의미'가 생성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참과 거짓이 분별될 수 있게 되지요. 이 스토아의 언어철학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이 단순한 의미 발생론이 아니라 의미라는 '사건'의 발생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대상이나 사태의 참 거짓을 분별하는 순간 거기서부터 모든 인간적 활동들 즉 문명의 발전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스토아 철학의 자연학 즉 존재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할게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로고스'입니다. 언어철학에서도 의미의 발생은 바로 로고스(이성이자 이법)와의 밀접한 연관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대전제입니다. 존재론도 마찬가지예요. 자연, 즉 '퓌시스'(physis)는 로고스와 거의 대등한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는 '이성'의 자격으로 자연의 로고스를 품고 있고, 이것을 밖으로 펼쳐낼 때, '언어'가 등장하는 것이지요. 

   

스토아철학에서 '로고스'는 아주 중요한 기본 개념입니다.


그래서 스토아주의에서 기본적인 두 가지 개념은 로고스와 퓌시스(자연)입니다. 스토아주의가 철학의 모든 측면을 통일하려는 이유는 이성이 전체로서의 자연을 알려준다는 데 있지요. 한편으로는 언어와 행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사건의 발생이 서로 완전하게 상응하는 방향으로 스토아 철학을 고안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습니다. 


자연은 창조하고 있는 솜씨 좋은 불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자연은 그것의 합리성(로고스)에 맞지 않는다면, 아무리 작은 사물이라 해도 개별 사물이 생길 수 없는 영역입니다.  외부의 많은 사물 때문에 개별 본성이 스스로를 완전하지 못할 수 있지만, 보편적 자연은 모든 본성을 결합시키고 유지시키기 때문에, 어떤 것도 보편적 자연을 방해할 수는 없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들이 자연(퓌시스)를 정의하는 방법은 다음 다섯 가지입니다. 


(1) 모든 사물을 형성하고 만드는 힘 또는 원리.
(2) 세계를 하나로 묶고 그러한 세계에 정합성을 부여하고 통일성을 주는 힘 또는 원리). 
(3) 스스로 움직이고 생성력 있는 호흡(또는 솜씨 좋은 불). 
(4) 필연과 운명. 
(5) 신, 섭리, 장인, 옳은 이성.

      

그리고 자연은 크게 보면 두 가지, 즉 물체적인 것과 비물체적인 것으로 나누어지지요. 이에 대해서는 앞서 잠시 말했는데요, 언어에서도 물체적인 음성과 비물체적인 레크톤이 있었지요? 언어보다 더 큰 범위인 자연에서도 이 원칙은 적용됩니다. 아니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고 봐야겠지요. 


그런데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학을 논할 때 매우 특이한 개념 하나를 가져오는데요, 그게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말로 읽으면 '프네우마'가 되지요. 이 말의 원뜻은 '숨', '공기' 또는 때로 '영혼'이라고도 합니다. 스토아에게 이 개념은 아주 아주 존재론적인 의미를 띠지요.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프네우마란, 


세계에 편만한 지성적 물질


입니다. 이 물질은 심지어 신과 동일하도고 일컬어집니다. 프네우마는 또한 개별 사물에 나타난 차이를 설명해주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즉 프네우마가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대상의 성질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프네우마는 로고스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크리시포스 이후부터 스토아 철학자들은 모든 세계의 주기에 걸쳐 있는 로고스를 공기로서의 프네우마와 불 사이의 혼합으로 여겼습니다. 


당대의 생리학의 영향이 이 말에는 보입니다. 프네우마는 말 그대로 '호흡'을 뜻하는데, 의학 저술가는 이러한 것을 동맥을 통해 전달되는 '생기 있는' 혼이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크리시포스는 이런 과정을 통해 프네우마를 로고스의 전달자로 삼았습니다. 이때 프네우마는 능동적 원리로써 기능합니다. 즉 세계의 물리적 구성 요소이며 동시에 이성적 행위를 할 수 있는 행위자인 것이지요.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프네우마는 물체적 대상보다는 '힘'이나 '에너지'와 유사한 것이 됩니다.  스토아 철학자가 강조한 것에 따르면, 프네우마의 구조는 얇고 작습니다.

프네우마는 불과 공기가 합쳐진 것입니다.


크리시포스의 설명에 따르면, 유일하게 영원히 지속하는 '원소'가 불입니다. 그러나 불은 '물질'의 동적 성향이어서, 뜨거움 외에도 차가움과 마름, 축축함이라는 다른 한정을 드러내는 원인이 된다고 하지요. 이렇게 불에 의해 한정된 물질은 각기 공기와 흙, 물이 됩니다. 


프네우마는 불과 공기의 복합물인데, 그러한 운동의 두 가지 방향은 차가움(공기)으로 인한 '응축'과 열(불)로 인한 '팽창'으로 설명됩니다. 공간적으로 연속된 프네우마는 그것을 이루는 원소 때문에 계속 능동적이에요. 그것은 우주를 동적 연속체로 만드는데, 연속체의 모든 부분은 그러한 것에 스며든 프네우마의 긴장과 혼합에 따라 개별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지요. 물질이 프네우마와 결합할 때 그것에 작용하는 힘의 균형이 물질을 연결시키고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에 따르면, 우주 자체가 구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것[4 원소]에는 모두 중심으로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수동적 원소와 달리 프네우마는 구 모양의 우주 전체에 퍼져 있지요. 프네우마는 우주의 원소들 전체를 결합함으로써, 우주가 붕괴되는 일을 막는 일을 합니다. 대우주에서 프네우마가 이렇게 하는 기능은 개별 물체에서도 모두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유기물과 비유기물 모두 똑같이 그들의 프네우마 덕분에 나름대로 동일성과 속성을 얻는 것이지요. 


그런데 프네우마는 각각의 존재자들에게서 '배치'를 달리합니다. 이 다른 배치를 통해 존재자들의 '차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프네우마의 한 가지 배열은 동물의 영혼입니다. 식물의 구조는 또 다른 배열이며, 둘의 결합은 그와 또 다른 배열이지요. 


스토아철학자들은 당대의 최첨단 의학지식을 가지고 와서 철학개념에 전용합니다. (좌) 갈레누스, (우) 근육의 긴장을 통한 신체의 안정성

특이한 것은 프네우마가 자신이 배열하는 것을 모두 '긴장'을 통해 함께 묶는다는 점입니다. 조화가 아니라 '긴장'이라는 것이 특이한 것이지요.  이 '긴장' 개념은 분명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왔다고 보입니다. 보다 흥미로운 점은 당대의 의학자이자 철학자인 갈레노스가 근육운동을 설명할 때 '긴장'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이지요. 앞서도 말했지만 스토아 철학자는 당대의 가장 첨단의 과학 지식을 철학에 도입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개별 사물의 프네우마에 어떤 종류의 '긴장'이 있는 경우에만 그러한 사물에서 생명이 생겨나는데, 생명의 종류는 긴장의 정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신기한 것은 이 프네우마라는 물질이 사태의 '원인'을 설명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즉  각 개별 사물이 자리 잡는 환경도 프네우마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프네우마는 자신의 서로 다른 성향에 따라 내적 원인이면서 동시에 외적 원인이기도 합니다. 크리시포스는 그의 인과 구분을 설명하면서 구르는 드럼통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크리시포스에 따르면, 드럼통이 구르는 것을 두 가지 원인을 통해 설명해야 합니다. 첫째 원인은 외부 행위자입니다. 어떤 다른 것이 그것을 밀어주지 않는 한, 평면 위에 있는 드럼통은 구르기 시작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둘째로, 드럼통에 어떤 종류의 형태가 없는 경우 그 드럼통은 구르지 못합니다. 아무리 세게 밀어도 사각형 상자라면 구르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드럼통이 구르는 것은 그것에 원래 있는 본성과 외부의 압력이 모두 작용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크리시포스는 첫 번째 유형의 원인을 '보조적 근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구를 수 있는 드럼통의 능력인 둘째 유형의 원인은 '완전한 주원인'이라고 부르지요. 나머지 한 원인이 없다면, 두 원인 모두 결과를 산출하기에 충분치 못합니다. 


그런데 그는 인과를 설명할 때 어떤 것에 원래 있는 속성을 외부의 자극보다 더 중요시했습니다. 크리시포스의 논증에 따르면, 모든 자연적 실체에는 구조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작용하려면,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원래 그러한 실체에 있는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요.

     

'크리시포스의 통', 모든 원인에는 내적 원인(통의 구조)과 외적 원인(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프네우마와 배치, 원인론까지 했으니 이제 '물체론'으로 가 볼까요? 


물체론은 스토아학파 존재론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이지요. 스토아학파의 존재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 '물체론' 또는 '물체-비물체론'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물체적인 것'과 '비물체적인 것'의 구분이 스토아학파의 기본 이론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존재한다고 엄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물체뿐입니다. 그렇다고 비물체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비물체적인 것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요. 앞서 말한 '레크톤'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어쨌든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은 작용하고 작용받을 수 있는 능력인데, 물체만이 이러한 시험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스토아철학자들에게 영혼은 신체와 똑같이 물체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마음' 또는 '영혼'도 물체적이라는 점이에요. 이것이 스토아 철학을 유물론으로 만드는 이유이지요. 제논에 따르면 마음이 비물체적 실재라면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논증은 플라톤의 주장과는 정반대여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주장의 근거에 해당하는 것이 '작용하는 힘과 작용받는 힘'이라는 존재의 기준이지요. 영혼도 작용하고 작용받으므로 물체라는 겁니다.


이러한 스토아의 존재 기준에 따라 영혼을 비롯한 물체가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분명히 물체를 능동적 구성요소와 수동적 구성요소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물체라면 전체로서 자신에게 작용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작용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스토아주의에 나타난 '물질'은 물체성과 동의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도리어 그것은 물체성의 한 측면이며, 개별 물체에서 능동적 구성요소와 결합됩니다.


여기서 스토아의 체계에서 물체란 '물질'과 '마음'(신 또는 로고스)의 혼합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신은 물체와 다른 것이 아니지만, 물체를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이며, 물질 내에 있는 '이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의 자연은 스피노자의 신 또는 자연처럼 사고와 연장이 모두 그것의 성질인 것입니다. 그러니 스토아 철학자에게도 자연의 모든 존재자들은 신성한 것입니다.


비물체적인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스토아학파에게  비물체적인 것은 네 가지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레크톤(sayable, lekton), 공허(허공, void), 공간 그리고 시간입니다. 이것들은 비록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사태의 내용을 이룰 수 있으며, '존속한다'(subsist)고 얘기될 수 있는 것이에요. '존속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존재하면서 효과를 가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토아 철학에서 만물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능동과 수동’, 즉 ‘작용하는 것’과 ‘작용받는 것’이고, 물체적인 것이든 비물체적인 것이든 이 신적 원리 안에서 움직입니다. 이 논지는 바로 스토아의 범신론적 경향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이 능동-수동의 원리는 생멸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지요. 그러나 구성요소들은 생멸합니다. 왜냐하면 원리는 비물체적이지만, 구성요소는 형체가 부여된 물체이기 때문이지요.


스토아의 우주론은 '범신론' 또는 '범재신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 범신론은 우주적 질서, 즉 코스모스라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코스모스는 전 존재를 자기 안에 흡수함과 동시에 또다시 전 존재를 자기 안에서 낳는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에 해당돼요(스피노자에 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올 겁니다). 우주는 지성과 섭리에 따라 움직이며, 이때 지성은 우주의 모든 부분에 골고루 스며 있습니다. 다만 그 침투의 정도는 우주의 이런저런 부분에서 다르지요.


참,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지성조차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에요. 이는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는 관점과도 통합니다.  


스토아 철학자는 이와 같은 그들의 철학이 정합적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우주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우주 자체가 이성적으로 질서 지워진 구조라고 그들은 확신했던 것이지요. 사람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 안에 있는 능력이 – 스토아 철학자는 이러한 능력을 로고스(logos)라고 불렀습니다 – 말 그대로 우주 전체에 구현되어 있다는 것도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의 본성(nature)의 본질에 있어서 인간 개인은 우주적 의미의 자연(Nature)에 속하는 성질을 함께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우주적 자연은 존재하는 것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정확하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인간 개인은 세계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사건과 인간의 행위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가지 질서에 따르는 사건이 아닙니다. 둘은 모두 똑같이 하나인 것, 즉 로고스에서 나온 결과이지요. 달리 표현하자면, 우주적 자연 또는 신과 사람은 존재의 본질이 이성적 행위자라는 점에 있어서 서로 연결됩니다. 


윤리적으로 풀어 보자면 인간의 합리성이 자연과 기꺼이 일치하려고 할 때 그러한 합리성이 탁월하다는 것이 보장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명함이며, 단순한 합리성을 넘어서는 단계이며, 한 사람의 태도와 행위를 실제 사건의 과정과 완전히 조화시키는 인간 존재의 목적이 되지요. 자연철학과 논리학(언어철학)은 이러한 윤리적 목적과 밀접히 연결됩니다. 즉 사람이라면 자연과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 어떤 사실이 참인지, 그러한 진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하나의 진리 명제가 다른 진리 명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사건이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람이 자연 또는 신과 전적으로 일치되는 삶을 계획할 수 있게 해 줄 일련의 명제를 그러한 사건이 뒷받침할 수 있다는 믿음에 스토아주의의 정합성은 토대를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 존재론에서 '물체론'과 더불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개체론'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는 존재하는 사물을 모두 개체라고 주장합니다. 즉 보편적인 어떤 것, 예컨대 사랑이나 정의와 같은 것도 개체로부터 형성되는 관념이라고 보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지요.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는 아주 극명하게 차이나는 지점입니다. 이를테면 스토아 철학자에게 있어서 '사람은 두 발 달린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진술은 엄밀한 의미의 '진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의미한 발화이기는 하지만, 참도 거짓도 아닌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러한 언명은 어떤 사람의 사고내용을 가리키지, 외부에 있는 사물을 가리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스토아철학에서는 보편자가 아니라 '개체'만이 존재합니다. 


개념으로서의 보편자는 사물을 손쉽게 분류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하지만, 실재의 구조를 정의하지는 못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보편자를 드러내지 않고 개별적 대상을 드러내 줄 뿐입니다. 철학자가 보기에 언어의 가치는 세계를 기술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로고스가 통제하는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연결하는 것이며, 옳은 기술을, 즉 자연의 알맞은 조각을 묶어주는 기술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철학자는 마땅히 개체로서의 자연 사물들을 올바르게 연결할 수 있는 기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토아 철학자들은 개체들의 형성 원리에 다시 '프네우마'를 가져오지요. 프네우마가 전체로서의 물질에 부여하는 한정은 물질의 서로 다른 부분 사이에 분화를 일으키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이렇게 서로 다르게 분화된 것은 우리가 이 사람, 이 말과 같이 개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프네우마 덕분에 분화는 모두 개체성을 얻는데, 프네우마가 물질을 한정해서 소위 개체는 모두 그 밖에 우주 안에 있는 어떤 것도 공유하지 못하는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한 특성이 지속되는 한 그러한 개체는 지속됩니다. 이렇게 해서 스토아 철학자들에 따르면 자연에는 실체의 개체적 분화만 있게 됩니다. 이와 달리 '공통된 성질'이란 우리가 일반화를 통해 도달한 개념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개별 사물의 한정을 분류하는 방법을 제공해 주지요. 이는 스토아 철학자가 명사에 대해 논의한 것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고유 명사는 개체를 만드는 성질을 나타내지요. 반면 보통 명사는 공통된 성질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자. 이제 스토아 철학자들의 철학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학의 원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사실 윤리학은 이번에 길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도입부에 해당되는 것 정도는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지요?


스토아학파에게 윤리학은 (1) 충동 이론, (2) 선악론, (3) 정념론, (4) 덕론, (5) 삶의 목적 이론, (6) 최고 가치와 행위론, (7) 상응 행위론, (8) 권고와 간지(諫止) 이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스토아학파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정교해진다고 하지요. 


윤리학에서도 이성을 먼저 앞세울 것 같은 스토아 윤리학의 근본 원리는 놀랍게도 ‘충동’이에요. 더 자세하게는 ‘자기보존 충동’이라고 합니다. 이성이 아니라 '충동'을 원리로 내세우는 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탁월한 윤리적 현실주의 덕분입니다. 이성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근원적인 것'은 인간에게 '충동'이라는 것을 그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는 사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인데, 해를 끼치는 것은 밀어내고, 친근한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 충동에서부터 시작해서 비로소 이성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성은 충동을 다루는 기술이며, 이는 ‘뒤에 덧붙여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적 삶도 자연에 따르는 삶인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스토아 학자들에게 자연은 곧 로고스이고 로고스는 다시 이성이기 때문이지요. 


즉 덕스러운 삶은 곧 자연에 따르는 삶, 즉 ‘자연에 의해 생기는 사항의 경험에 즉응’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삶은 자연과 ‘막힘없는 흐름’을 형성하게 됩니다. 자연에 따르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므로 이성과 의지는 모두 이 흐름 가운데 있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그 원칙, 즉 '자연에 따르다'(kata physin)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연(신, 프네우마, 원인, 로고스 또는 운명)은 완전한 존재인데, 그 밖에 세계 내에 있는 모든 것의 가치는 자연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자연에 따르는 것은 긍정적 가치를 가지며, 자연에 반대하는 것은 부정적 가치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떤 한 사건을 살펴볼 때 그 사건이 전체로서의 우주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살펴야 합니다. 


질병과 자연재해가 그 자체로 자연의 계획 대상이 아니라, 존재하는 좋은 것에서 불가피하게 나오는 귀결이라는 결론이 여기서 나옵니다. 자연에게는 옳은 이성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목적은 반드시 좋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섭리가 모든 것을 포함한다면, 상해나 고통을 일으키는 모든 사건은 모든 사실이 알려진 경우 이성적인 사람이 이롭다고 인정한 사건이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결국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스토아 철학자의 믿음은 감정이 없고 냉담한 구석이 있긴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들이 있지요. 

  

하여간 스토아 철학자들에 따르면 연속되는 사건이 나에게 불확실한 한, 나는 언제나 자연적 이로움을 얻는 데 보다 적합한 것을 고수해야 합니다. 이때 자연적 이로움을 선택하는 것은 좋은 사람에게만 특별히 나타나는 표식이 아닙니다. 키케로의 예에 따르면 예금의 반환도 자연에 따르는 일이라고 합니다. 즉 이성적인 토대 위에서 이러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으며, 그러한 거래를 하는 것은 '욕구될 만한' 사태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저, 스토아 부엉이가 스토아 철학에 대해 대체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꽤나 긴 이야기였지요? 뭐, 특집, 특대호니까 이해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할 이야기는 더 남아 있답니다. 특히 '윤리학' 부분에서 말이지요. 이 부분은 아마 다음 기회에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특대호는 윤리학은 핵심이 아니니까요. 








<참고 문헌>

코플스톤 지음, 김보현 옮김, [그리스 로마 철학사], 철학과 현실사, 1998

앤서니 케니 지음, 김성호 옮김, [고대철학], 서광사, 2008

앤서니 A. 롱 지음, 이경직 옮김, [헬레니즘 철학], 서광사, 2000

A. A. Long, D. N. Sedley,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Cambridge Univ Pr., 1989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지음, 전양범 옮김, [그리스 철학자 열전], 동서문화,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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