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루타르코스의 스파르타 이야기
그때 그 영웅의 이미지를 형성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준 책을 들라면
어린이판 또는 청소년판 '영웅전'이 그때에는 있었지요.
하지만 이 책들은 주로 플루타르코스의 책에서 정말 '영웅스러운 것'들만 추려서 편집한 경우가 많지요. 교육적 목적이 강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진실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들이 어떻게 보면 전혀 위대하지 않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고요? 그러니까 플루타르코스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을 정말 위대하게만 그리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그 영웅들은 아주 잘 각색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들이기 때문입니다.
각색되지 않고 원전 그대로를 번역한 좋은 책이 있어요. 바로 이 책입니다.
단국대 천병희 선생님의 헬라어(고전 그리스어) 원전 번역판입니다.
노마가 명색이 철학잔데, 훌륭한 책을 접하고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지요. ㅎㅎ
일단 플루타르코스 소개부터 할게요.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AD.50 이전~120 이후)는 그리스 중부지방인 보이오티아, 카이로네이아의 유서 깊은 집안 출신입니다. 그는 아테네의 플라톤 학파 철학자인 암모니오스(Amonios)에게서 철학을 배웠지요. 그리고 이집트와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를 방문해서는 그곳의 명사들과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이를 기회로 그는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지요. 플루타르코스는 평소에 아테네를 교육자로 로마를 통치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두 국가 모두에 이롭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영웅전을 공명정대한 관점에서 쓰려고 여러모로 노력했다고 합니다. 영웅들의 업적을 역사가로서 보되 정치적인 부침들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기술하려고 한 것이지요. 이를 위해 그는 표면적인 연대기 서술이 아니라 각 영웅들의 내면을 관찰하고, 성격을 묘사하는데 신경 썼습니다. 그의 영웅전이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이런 면모 때문입니다.
사실 플루타르코스에게 로마는 저무는 그리스를 이어받은 새로운 제국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수용했지만, 결코 그것에 아부하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의 영웅을 기술할 때에나 그리스의 영웅을 기술할 때에나 똑같이 위대한 면모와 더불어 치부에 해당되는 사실까지 쓴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 30년을 고향인 아테네로 돌아와 아폴론 신전에서 사제로 지내며 고향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책에는 여러 영웅들이 나옵니다. 그중 플루타르코스가 가장 조심스럽게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접근한 것은 아마도 국가의 창립자들이지 않나 싶어요. 그중 스파르타를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 같습니다. 분량이 다른 것보다 많거든요. 이제부터 플루타르코스를 참조하여 스파르타가 강대해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영웅인 리쿠르고스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파르타의 정체는 플라톤을 위시한 여러 철학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지요. 그것은 매우 특이한 정체였고, 어떻게 보면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정체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웅이 바로 리쿠르고스입니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는 다른 영웅들에 비해 꽤 긴 분량을 리쿠르고스에 할애하고 있기도 합니다.
리쿠르고스의 생몰년은 분명치 않아요. 그리고 그의 성품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혹자는 리쿠르고스를 실존하지 않은 인물로 보기도 하지요. 이에 따르면 리쿠르고스 이야기는 기원전 4세기경에 성립되었는데, 이때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국가의식의 고취가 절실한 때였다는 것입니다. 리쿠르고스라는 인물은 이런 필요성에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고, 스파르타의 정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확실히 리쿠르고스를 실존인물로 보며 여러 철학자들도 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평가들에 대해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차근차근 이야기해 줍니다.
소피스트 힙피아스는 리쿠르고스가 전투에 참가한 뛰어난 전략가라고 전하지만, 데메트리오스에 따르면 그가 군사작전에는 참여한 적 없는 온유하고 평화로운 성품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렇지만 뤼쿠르고스의 출신이 왕가라는 것은 분명한데, 그가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려 얼마간 스파르타를 떠나 크레테, 소아시아, 이집트를 여행했다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여행기간 동안 여러 폴리스의 정체(정치체제)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다시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들어 보죠.
마치 의사가 건강하지 못한 병든 신체를 건강한 신체와 비교하듯이, 낭비적이고 사치스러운 이오니아의 생활방식과 검소하고 엄격한 크레테의 생활방식을 비교함으로써 양쪽의 생활 방식과 정체의 이런저런 차이점을 연구했다.
그러던 중 스파르타인들이 그의 능력을 흠모하여 다시 불러들였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스파르타의 법(레트라) 제정 작업에 착수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리쿠르고스의 폴리스 개혁은 입법 개혁이었던 셈입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리쿠르고스가 ‘성문법’에는 반대했다는 점이에요. 그 이유는 플루타르코스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뤼쿠르고스는 법률을 성문화 하지 않았는데, 이른바 레트라 가운데 하나가 그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의 번영과 탁월성에 기여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대한 원칙은 시민의 습관과 태도에 뿌리내리고 있어야만 든든하고 변함이 없으며, 젊은이 각자에게 입법자 역할을 하는 교육에 의한 강요보다 이러한 성향이 오히려 더 강한 구속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 성문화 한 강요와 고정된 관행으로 규정화하는 것보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교육받은 자들이 결정하는 대로 수정해나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법의 기능을 교육에 일임했던 것이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38쪽).
특이한 점은 리쿠르고스가 탈레스를 본국으로 데리고 와 입법의 정당성을 확산시키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탈레스는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이지요. 뤼쿠르고스는 그 명성을 흠모해 탈레스와 친근하게 사귀며 스파르타로 가도록 탈레스를 설득했다고 합니다. 탈레스는 크레테 사람이거든요. 탈레스는 서정시인으로 행세하며 예술로 자신의 실체를 은폐했지만, 사실은 가장 강력한 입법자들이 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 그의 노래들은 복종과 조화를 권유했기 때문이지요.
요즘으로 치면 리쿠르고스는 탈레스를 비밀 참모처럼 대우하면서, 일을 하게 한 것이지요. 여기서 플루타르코스는 리쿠르고스의 선동가적 풍모, 또는 음모주의자적인 풍모를 그립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편성기준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치 않아요. 혹자는 이런 변화를 혈연적 부족이 지연적 부족으로 바뀐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구분으로 리쿠르고스는 혈연중심의 구체제가 지역중심의 신체제와 긴장관계를 형성하도록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존 권력을 분산시키는 꽤나 영리한 전략이라는 것이지요.
원로원 또는 원로회는 2명의 왕과 다른 원로 28명 그래서 30명으로 구성되었지요. 이 ‘두 명의 왕’ 제도는 다른 폴리스에서는 볼 수 없는 상당히 특이한 것이에요. 그러나 원로원이라는 회의체는 그리 특이하지도 않고 리쿠르고스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구성원 수를 30명으로 정한 것은 리쿠르고스의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30이라는 숫자는 스파르타의 세 부족에서 10명씩 원로들이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원로회의 성원은 왕을 제외하면 모두 60세 이상의 연장자들이었고, 이들은 왕과 더불어 국사를 논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리쿠르고스의 개혁 중 가장 잘 한 것이 이 원로원 정비라고 보았습니다.
뤼쿠르고스의 수많은 개혁 가운데 으뜸가는 위업은 원로원 창설이다. 원로원은 플라톤의 말처럼 왕들의 과열되기 쉬운 통치를 완화하고 중대한 사안에 대등한 표결권을 가짐으로써 국가에 안정과 절제를 가져다주었다. (...) 원로원은 바닥짐 역할을 하여 국가라는 배를 평평한 용골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국가는 가장 안정적이고 질서 있게 정돈되었다. 28명의 원로원 의원은 민주주의에 대항해야 할 때는 왕들의 편에 서고, 참주 정치의 출현을 막아야 할 때는 백성의 힘을 강화해주었다(PH, 26).
민회 자체도 그리스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던 전통이었으므로 리쿠르고스 자신이 창설했다고는 보기 어렵지요. 다만 30세 이상의 스파르타 시민이라는 조건, 그리고 장소를 특정했다는 점이 예전과 다른 점입니다. 역사가들은 원로회와 민회가 귀족과 민중간의 갈등을 표현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조항에는 “민중이 잘못된 의견을 말하면 왕과 원로회는 이를 무효로 한다”라는 것과 더불어 “민회가 원로회의 제안을 반대하면 원로회는 아펠라를 해산한다”라는 것도 있어,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권위를 더 존중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법안의 발의와 부결에 있어서는 또한 시민들의 권리를 내세웠기 때문에 권력의 견제를 유지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법안을 발의하고 부결하되, 결정권과 권력은 민중이 갖게 하라(아리스토텔레스, 『라케다이몬 인들의 정체』)
감독관은 60세 이상의 귀족 중 민회에서 선출되며 왕을 견제하는 직능을 가집니다. 왕과 대등한 권력을 가진 감독관이 민중 가운데에서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민주정의 요소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헤로도토스는 이 제도를 리쿠르고스가 정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130년 후에 테오폼포스왕이 정한 것이라고 썼습니다.
결과적으로 뤼쿠르고스는 혼합 정체[참주제+과두제+민주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원로원의] 과두제적 요소는 여전히 섞이지 않은 채 우세했다. (...) [이를 방지하기 위해 뤼코르고스 사후 130년 후] 테오폼포스는 감독관을 선출했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9쪽)
어쨌든 감독관은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감시하며, 조력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크세노폰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왕은 매월 기존 법을 준수할 것을 맹세하고 감독관은 왕이 맹세를 지키는 한 그의 권력을 훼손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맹세라는 절차는 처음부터 있지는 않았고, 민중과 귀족 간의 권력투쟁이 일단락되던 제2차 메세니아 전쟁 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죠. 이렇게 해서 스파르타의 정체는 왕정과 과두정 그리고 민주정의 요소가 혼합된 정체를 형성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감독관'을 민주적인 제도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는 우선 국유토지를 추첨으로 균등하게 분배했습니다. 즉 스파르타 땅은 9000개의 분할지로 나누고, 라코니아 땅은 3만 개의 분할지로 나누어 그것을 스파르티아테스와 페리오이코이에게 나눠 준 것이지요.
리쿠르고스의 제도개혁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것은 토지의 재분배였다. 당시에는 극심한 불평등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 생계 수단도 없는 무산 대중이 도시에 큰 부담이 되었고,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교만과 시기, 범죄와 사치, 그리고 국가의 심각한 고질병인 부와 가난을 추방하기 위해 리쿠르고스는 토지를 모두 공동 출자해 다시 분배함으로써 저마다 동등한 조건에서 동등한 수입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시민을 설득했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30쪽).
그리고 출입국을 통제했지요.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조치는 스파르타인들의 사치를 예방하고 타국으로부터의 나쁜 영향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개혁은 “무엇보다도 스파르테의 부자들을 들끓게 했”지만 리쿠르고스는 개의치 않았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34쪽).
공동식사 제도는 크레테에도 있었지만, 스파르타에서는 각자의 분할지에서 생산되는 산물을 가지고 와야 했다는 점과 이것을 지키지 않을 시에는 처벌(시민권 박탈)이 뒤따랐다는 것이 달랐습니다. 상당히 강제성이 셌지요. 공동식사를 크레테인들은 안드레이아(andreia), 라케다이몬 인들은 피디티아(phiditia)라고 했는데, 그 까닭은 공동식사가 우의(philitia)를 증진시키거나 검소함과 절약(pheido)을 몸에 베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동식사를 하는 이유는 이들 폴리스들에서 공통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정교한 개혁[은] (...) 백성이 함께 모여 정해진 음식을 먹게 하는 공동식사제도[이다.] (...) 그리하여 그들이 집에서 (...) 온갖 욕망과 과식에 빠져들어 긴 잠과 더운 목욕과 많은 휴식과 어떤 의미로는 일상적 간병을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성격뿐 아니라 몸까지 망치는 일은 없어졌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업적이었다. (...)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한 까닭에 재물이 많아도 쓸 수도, 즐길 수도, 볼 수도, 보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태양 아래 모든 도시 가운데 오직 스파르테에서만 부의 신은 눈이 멀어 그림처럼 생기없이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 집에서 부자들이 미리 배불리 먹고 나서 공동식사에 참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이 함께 먹거나 마시지 않는 자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를 자제력이 없는 자라고, 공동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유약한 자라며 나무랐기 때문이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33-34쪽).
공동식사를 마치면 포도주를 조금 마시고 나서 횃불을 밝히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이때도 다른 여행길에서도 불을 밝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데요, 이는 어두운 밤에 겁 없이 대담하게 길을 가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스파르타에서 가장 중심적인 일상은 바로 이 군사훈련과 그를 위한 체력단련이었으며, 자연스럽게 신체의 건강함이 중요한 가치가 되었지요. 이런 이유로 다소 반인륜적인 관습이 스파르타에는 통용되었는데, 건강하지 않은 아이가 태어나면 버려져 죽게 놔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너무나 잔혹한 것이지요
건강한 아이들은 6년간은 가정에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만 시기가 되면 집을 벗어나 소년병영집단에서 14년간 생활하게 됩니다. 20세에 이르면 병역의무를 지게 되어 전장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지혜가 출중하고 싸움에 가장 용감한 소년이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소년들은 그를 주시하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가 내리는 벌을 감수했으니, 소년들의 교육은 일종의 복종 연습이었던 셈이지요. 소년들은 읽고 쓰기를 필요한 만큼만 배웠으며, 나머지 교육은 순순히 복종하고, 어려움을 견디고, 전투에서 이기는 법을 배우는 일에 바쳐졌습니다. 따라서 나이가 들수록 체력 훈련이 증가되었지요. 소년들은 머리는 짧게 깎고, 맨발로 다녔으며, 대개 속옷 차림으로 노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열두 살이 되면 키톤[chiton, 무릎까지 내려오는 소매 짧은 셔츠]을 입지 않고 해마다 외투 한 벌을 지급받습니다. 살갗은 단단하고 건조했고, 목욕을 하거나 몸에 기름을 바르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그런 호강을 경험하는 것은 1년에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요. 소년들은 조별 또는 집단별로 마른풀로 만든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잤습니다. 이때 동성애인이 생기기도 합니다.
스파르타의 풍습상 이들 소년들은 사실 아버지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어떤 비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스파르타 공동의 자식으로 더 많은 관심과 훈육의 대상이 되었지요.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동성애는 스파르타뿐 아니라 헬라스 전체에서 허용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동성애는 스파르테인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어 점잖은 숙녀들도 미혼의 소녀들을 사랑하곤 했다. 하지만 사랑의 경쟁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두 남자가 같은 소년을 사랑하면 그것을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을 맺는 계기로 삼아 그때부터는 함께 사랑하는 소년을 되도록 고귀하게 만들려고 둘이서 힘을 모았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49쪽).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30세에 이르러 비로소 주어집니다. 이때에야 민회에 나갈 수 있고, 결혼도 허용되지요. 또한 병영에서 나와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공동식사와 훈련은 규칙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스파르타의 모든 제도와 관습은 시민들을 혼자서는 살고 싶지도 않고, 살 수도 없도록 훈련시켜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벌 떼처럼 늘 공동체의 유기적 구성원이 되어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고, 열광과 명예욕으로 거의 황홀경에 빠져 전적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데 익숙해졌던 것이지요.
그래서 음악 중 상당수는 군가에 해당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리타인의 아고게 훈련을 다음과 같이 혹평했습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금수가 아니라 문명인의 규범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는 것은 금수가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한 가지만 집중하고 다른 면을 무시하는 스파르타인들은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 국가 생활의 일면에만 몰두하게 함으로써 마침내는 그 면에서도 열등한 인간을 만들게 하고 만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꽤 오랜 기간 동안 헬라스의 패권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정하는 바이지요. 무엇보다도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인들이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인들에게 기술에 종사하는 것을 일절 금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부를 쌓기 위해 돈을 모으느라 애쓰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부는 이제 더 이상 선망의 대상도 존경의 대상도 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헬롯들이 그들을 위해 농토를 경작하여 공물을 바쳤지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소송은 돈과 관련된 탐욕과 결핍이 불러오기 때문이었지요. 대신 균등한 부와 단순한 생활방식의 안락함이 생겨났습니다. 전쟁이 없는 동안에는 합창을 곁들인 가무와 잔치, 축제와 사냥, 체력 단련과 집회로 모든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겁니다.
리쿠르고스가 입법한 것들 중 흥미로운 것은 남녀가 평등하게 교육을 받고 결혼생활에서도 평등을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소녀들도 거의 나체로 각종 체육과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제사에도 참여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장려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리쿠르고스는 여성의 자존감을 높이고 폴리스의 군사적인 역량을 보충하게 한 것이지요.
리쿠르고스는 소녀들이 달리기, 레슬링, 원반던지기, 창던지기로 신체를 단련하게 했으니, 태아가 자궁 안에 뿌리내릴 때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하게 출발해 더 잘 자라게 하고 임산부는 달이 찰 때까지 체력을 유히하여 산고를 더 쉽고 더 잘 견뎌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소녀들에게 연약함과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버릇과 온갖 여성다움을 버리게 하려고,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속옷 차림으로 행진하고, 어떤 축제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보는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습관을 들이게 했다. (...) 소녀들의 속옷 차림에는 수치스러운 데라고는 전혀 없었다. 부끄럼은 있어도 음란한 데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40-41쪽).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남녀평등에 해당되는지는 의문이에요. 왜냐하면 여성들이 훈련과 자존감을 갖게 만든 주된 이유는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고 리쿠르고스의 여성관은 당시의 아테네가 여성을 시민의 범주에도 넣지 않은 것에 비하면 상당히 급진적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결혼제도는 지금의 우리가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여성을 납치하여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자식 생산을 공동화하기 위해 남편의 허락이 있으면 그 아내와 교합하는 것도 허용하지요. 사실 이러한 조치는 지금의 모럴에서는 천만부당한 일이지만, 일부일처를 냉소했던 스파르타인들 입장에서는 지금의 우리가 더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당시 스파르타는 죽음에 대한 미신적인 공포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를 일소하기 위해 리쿠르고스는 시내에 매장하도록 허용하고, 신전 근처에도 매장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묘를 설치하게 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감시키기를 기대한 것이지요. 경제적으로도 상의 기간을 11일로 제한함으로써 효율성을 기했습니다.
그는 필요한 입법조치를 취한 후 그것이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 운용하고, 곡기를 끊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죽음을 선택한 지역도 델포이이고 매장이 아니라 화장을 남은 사람들에게 당부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자신의 시신이 스파르타에 들어가면 법에 대한 경각심이 없어질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법은 그의 소망대로 그의 사후 500년간 변치 않고 적용되게 됩니다.
아마 리쿠르고스의 입법과 정치가 완벽한 것은 아니겠지요. 보았다시피 반인륜적이며, 과도하게 군국주의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플라톤은 스파르타의 정체가 용기를 북돋우는 데는 유능하지만 정의를 고취시키지는 못한다고 비판했지요.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그러한 조치는 아마도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라고 플루타르코스는 생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리쿠르고스 사후 그의 입법이 추구했던 ‘평등의 이상’은 완전히 이룩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부의 평등은 이상으로 남게 되지요. 하지만 '평등'이라는 정체의 이상은 이후로도 정치사상의 기본적인 요소가 됩니다.
플루타르코스가 뤼쿠르고스와 그의 시민들의 관계를 논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정치철학적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스파르타의 정체가 가진 문제적 성격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냅니다.
스파르타가 안전한 것은 그곳의 왕들이 통치할 줄 알기 때문이라고 누가 말하자 테오폼포스왕은 "아니, 오히려 시민들이 복종할 줄 알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통치할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는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복종이란 통치자가 가르치는 학습인 것이다. 훌륭한 지도자가 훌륭한 추종자들을 만드는 법이다. 마치 기마술의 마지막 완성이 말을 온순하고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데 있듯이 말이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68쪽).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영웅전 중 '리쿠르고스 전'을 마무리 하지요.
왕권의 임무는 사람들을 기꺼이 복종하게 만드는 데 있다.
스스로 복종하는 민중과 귀족들,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해 부단히 신체와 정신을 바투 세우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삶, 이런 것을 플루타르코스는 리쿠르고스에게서 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삶이란 상당히 금욕적이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과 타인들에게 잔혹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잔혹함이 혹시 위대함의 본성이 아닐까요?
리쿠르고스로부터 플루타르코스는 전지전능한 영웅이 아니라, 사실은 영웅적이지 않은 한 입법자를 그려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만화 영웅전은 잊어야 될 것 같네요. 아쉽게도.
스파르타 영웅의 탄생 과정이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된 영화의 한 부분이 있어 가져와 봤습니다. 감상하시죠.
<참고문헌>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숲, 2010
토마스 R. 마틴, 이종인 옮김, [고대 그리스사], 책과 함께,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