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인들의 눈에 비친 세상
제가 이전에 <잿빛과 분홍, 마리의 집에 가다>라는 글에서 이 표현을 썼었습니다.
'원소'라고 하면 아마 1997년에 개봉한 영화 <제5원소>(뤽 베송 감독)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온종일 얼굴 근육을 삐딱하게 찌푸리고 다니면서 툴툴거리는 브루스 윌리스와 지금은 중년이지만 당시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20대였던 밀라 요보비치가 열연을 펼쳤지요. 이런 예들 외에도 4 원소는 여러 영화, 소설, 게임 등에서 사용됩니다. 그만큼 이 개념이 우리에게 친근하다는 의미겠지요.
사실 우리에게 '친근한 개념'이 수천 년 전 고대인들에게도 친근했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경우입니다. 시간이 그토록 흘렀고, 과학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도 고대인들의 사유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자연현상에 대해 전문지식이 없더라도 이 4개의 개념만으로도 설명이나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개념의 설명력'이 탁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개념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거기에 고대인들의 치열한 사유의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철학'이라는 사유의 최초 흔적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보다 고도의 사유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그 최초의 흔적이 바로 이 '4 원소'라는 개념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흔적을 탐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지요. 바로 성경입니다.
왼쪽 성경 본문의 큰 글자가 헬라어(고대 그리스어) 엡실론(E)입니다. 그것과 뉴우(N)가 한 단어지요. 엡실론과 노란색 박스의 문장을 함께 쓰면, 오른쪽 문장이 됩니다. 헬라어(성경의 헬라어를 '코이네 헬라어'라고 합니다.)를 로마나이즈 한 것이 바로 'En arche en ho logos'(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입니다. 이 말을 한글로 번역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유명한 구절이 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원소'와 관련해서 유심히 봐야 할 단어는 오른쪽 사진의 붉게 동그라미 친 '아르케'입니다. 헬라어 '아르케'는 '시초'라는 뜻 외에 '원리'라는 뜻이 있지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아르케'는 '시초'라는 의미로 쓰이는 빈도만큼, 아니 그보다 더 '원리'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쓴 기독교 사제들에 의해 '시초'라는 의미가 더 중요하게 간주된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로고스'는 여기서 '말'이라는 의미로 쓰였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이법', '법칙'이라는 의미가 더 강했지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의 이 말을 그리스식(기독교 철학 입장에서는 이건 '이교 도식'이 되겠지요)으로 바꿔 쓰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태초의 원리 안에 법칙이 있었다.
물론 이런 식의 번역은 성경 안에서는 말도 안 되겠지요. 하지만 제가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원리'를 위해서 잠정적으로 바꿔 쓴 것이니 용서하시길. 아무튼 이렇게 바꿔 써 놓고 보면 요한복음의 이 중차대한 언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명확해집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의 원리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법칙으로 존재하였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해석-번역해 놓고 보면, 고대 그리스 사상의 맥락과 기독교 사상의 맥락이 함께 보이지 않나요? 좀 더 나아가 보죠. 이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원리'와 '말씀'입니다. 또한 '법칙'과 '원리' 그리고 '말씀'의 '동위성'입니다. 말씀이 곧 법칙과 원리인 것이지요.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원리'에 집중하면, '말씀', 즉 하나님의 '말'이 곧 '원리'라는 의미가 됩니다. '아르케는 로고스'인 것이지요.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예수님의 말씀이 곧 '원리'이자 '시초'이자 '법'입니다.
헬라어 '아르케'는 이와 같이 어떤 사상의 고갱이, 즉 핵심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론적 어휘로 기능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말을 통해 기독교의 핵심을 드러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인들 자신이 '아르케'를 그와 같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히브리 사상을 지나 그리스 사상으로 진입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위에 모아 놓은 여섯 사람의 철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에서 최초로 '원리'를 탐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원리'를 '원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기도 하지요. 이제 좀 전에 이야기했던 기독교 사상과 다른 점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리스인들은 원리가 '말씀'이라기보다 '원소'였던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세계의 시초를 이루는 것이 '신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 '신'이란 그토록 멀리 있으면서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신이란 그들 자신 또는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와 같은 존재였지요. 그러니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지금 현재 이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냐는 질문입니다. 즉 시간적인 '시초'가 아니라 우주를 이루는 '으뜸 실체'('아르케'에는 '으뜸'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더 중요했지요.
서양 최초의 철학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은 바로 탈레스(BC 624-546)지요?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탈레스에게 원리는 '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으뜸 원소'는 '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물은 모든 것의 제일 원리이다.
많은 학자들이 추론하는 바로는 탈레스는 귀납적인 방식으로, 즉 삼라만상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원리'를 사유한 최초의 철학자입니다. 그러니까 탈레스가 보기에 우리 주변에 가장 공통적인 원소가 '물'이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지금의 과학적 관찰과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우리 지구 표면의 물과 인간 신체의 물이 전체의 70%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탈레스의 머리 속에서 지구의 모습은 물 위에 둥둥 떠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지구의 모양이 위의 사진처럼 둥근 것이 아니라 평평한 것이었지만 말입이다.
그런데 탈레스의 제자라고 알려진 아낙시만드로스(BC 610-546)는 스승의 견해와는 질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원리'를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불렀지요. 이것을 번역하면, '비한정자'(형태를 갖추지 않은 어떤 것)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원소에 해당되는 것을 '냉(冷), 온(溫), 건(乾), 습(濕)'으로 봤습니다. 이 생각이 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그의 스승이 '물'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대상을 원리로 지목한데 비해, 아낙시만드로스는 다소 추상적인 것들을 원리와 원소로 취급했다는 점이지요.
아낙시만드로스에 따르면, 모든 것은 아페이론으로부터 와서 그리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원소들도 '형태를 갖추지 않은 것'에서부터 나와서 '형태를 갖추고', 마지막으로 형태를 잃고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냉, 온, 건, 습이 번갈아 작용하게 됩니다. '형태를 갖추는 것'을 아페이론의 반대말로 '페라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 놓고 보면 윤회가 생각나시지 않나요? 사실 아낙시만드로스가 있을 때에도 '윤회'(물론 불교식 윤회가 아니라 그리스식 윤회입니다만)가 민간 사상으로 전승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 이와 흡사하다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인 아낙시메네스(BC 585-528)는 아마도 스승의 추상적 원리론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구체적인 사물'로 내려와서 원리를 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기'지요. 4 원소 중 하나인 이것을 으뜸 원리로 정한 데에는 '희박'과 '농축'이라는 과정으로 사물의 생성을 설명하기 용이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사물의 생성 과정은 상당히 합리적이에요. 왜냐하면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 되고, 농축되면 물과 흙이 된다는 생각은 상식선에서 봤을 때 매우 그럴듯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원리로써의 원소를 자연물에서 찾는 전통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설명방식이 아낙시만드로스 이후 추상적인 것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대단히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페이론, 냉온건습, 공기의 희박과 농축과 같은 것은 원리를 단순히 눈에만 보이는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와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BC 535-475)도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자연물 중의 하나인 '불'을 으뜸 원소이자 원리로 취합니다. 만물은 불이 가장 기본 되는 원소라는 것이지요.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을 원리로 본 것은 탈레스가 '물'을 원리로 본 연유와는 다소 다릅니다. 탈레스는 주위를 둘러보고 가장 '흔한' 것을 원리로 정했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 가진 '특성'이 원리에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 특성은 바로 '주기성'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가장 중요한 언급을 살펴보도록 하죠.
우주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이다.
그것은 적절한 만큼 타고 적절한 만큼 사그라든다.
이 말을 보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을 원소들 중에 가장 으뜸인 원소, 즉 원리로 생각한 이유가 드러납니다. 불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타오르고, 또 사그라들면서 영원히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우주의 불'은 꺼지지 않고 다만 타오르고, 사그라드는 운동을 할 뿐이지요. 헤라클레이토스는 여기 주목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불'이란 이런 운동하는 우주 자체였으며, 동시에 '법칙'이기도 했습니다. 자, 여기서 다시 '법칙'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볼 때 이야기한 그 로고스 말입니다. 성경의 의미에서 로고스의 주요 뜻은 '말씀'이었지요. 여기서는 '법칙'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불의 법칙' 즉 로고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만물은 흐른다.
이 말로부터 다음과 같은 귀결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다시 말해, 만물은 강물처럼 흐르기 때문에 우리들도 멈추어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 운동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불의 법칙'(로고스)의 속뜻이지요.
헤라클레이토스와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에서는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철학자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파르메니데스(BC 515)이지요. 파르메니데스는 철학사에서 어떤 사유의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의 사유 대상으로 지금까지의 '원리' '원소' 대신에 '존재'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진정한 '존재론'의 시작은 파르메니데스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는 생성 소멸하지 않으며, 흔들림이 없으며, 완전한 것이다.
이 말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일단 위에 먼저 설명한 철학자들의 말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사유의 구도가 갑자기 추상성으로 도약하지 않나요?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니고, 공기도 아니고, '존재'라니 말입니다. 가만히 이 '존재'라는 낱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사실 앞서의 원소들처럼 구체적으로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파르메니데스에 와서 '원소'는 어떻게 보면 다소 촌스러운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 같습니다. 다음의 언급을 보면 그것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존재하는 것만이 사유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유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따라서 존재만이 있다.
어떻습니까? 이전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일종의 논리적 증명과정이 들어가지요? 그렇습니다. 이전의 철학자들은 어떤 '시적 감성' 또는 '직관적 과정'을 거쳐 철학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진정한 '논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를 이은 제자, 제논이 유명한 논리적 역설을 연구했고, 그 역설이 '거북이와 아킬레우스의 역설'로 지금까지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사유의 구도를 고도로 추상화시키면서, 구체적인 사유의 질감이 떨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는 이런 추상적 사유의 특성을 '초월성' 또는 '초재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사유가 발 딛고 선 현실을 떠나 저 멀리 아득한 하늘로 날아가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파르메니데스의 논변들은 '궤변'과 한 발짝 떨어져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한 발짝만 재겨 디디면 궤변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유의 추상성을 극복하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사람이 바로 엠페도클레스(BC 493-430)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4 원소를 제대로 확립한 철학자이기도 하지요. 이전의 철학자들은 4개의 원소들 중 하나만을 으뜸 원소로 취급했지만, 엠페도클레스는 4가지 모두를 원리로 추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리조마타'(뿌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4 원소는 이제 4개의 뿌리가 된 것이지요. 무엇의 뿌리인가요? 바로 모든 사물들의 생성, 발전의 원천으로서의 뿌리인 것입니다.
네 뿌리들은 어느 때는 자라나 여럿에서 하나로 되고,
다른 때는 다시 분리되어 하나에서 여럿으로 된다.
또한 이것들은 끊임없이 자리바꿈 한다.
이렇게 하여 생성이 이루어진다.
네 개의 뿌리가 얽히고설키는 과정이 상상이 되시는지요? 엠페도클레스는 이런 과정을 '사랑'과 '불화'라고 명명합니다. 자연의 필연적 과정을 아주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뿌리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사랑의 힘' 때문이고, 분리되는 것은 '불화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만물이 탄생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제 원리-원소와 관련하여 마지막 여섯 번째 철학자를 소개하지요. 아낙사고라스(BC 500-428)입니다. 그런데 이 철학자에 와서는 더 이상 4 원소가 가장 근원적인 원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4 원소 이전에 '종자'라는 것이 있어서 원소들을 생성시켰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 종자들이 혼합되어서 물, 불, 흙, 공기가 되는 것입니다. 종자들은 일종의 물의 가능성, 불의 가능성, 흙의 가능성, 공기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중 어느 가능성이 현실화되느냐에 따라 그것이 물도 되고, 기타 여러 원소들도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유 구도는 원소들의 결합, 분리 과정을 엠페도클레스처럼 '사랑'과 '불화'라는 방식으로 의인화하지 않고 보다 과학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낙사고라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즉 이 4 원소들의 종자들이 결합, 분리되는 것의 근원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라고 묻게 된 것이지요. 종자의 발현 가능성이 현실화되려면 그 가능성과는 다른 '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낙사고라스는 이를 누스(정신)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해서 이 '누스'를 맥락 없이 등장하는 말이라고 비난하게 되는데요, 어떻습니까? 정말 그런가요? 저는 소크라테스의 손을 들어줄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고대인들이 세상과 자연, 우주를 보는 방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이 '단순 명쾌'하다는 본능적인 직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물리학과 같은 현대 과학도 우주의 구도가 몇몇의 방정식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믿고 있지요. 복잡하게 발달한 학문과 눈부신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유 구도가 가진 원초적인 방향은 이렇듯 간결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저 유명한 방정식 안에는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된 인간 사유의 혁명적 발전과정이 농축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리 단순한 수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표현하는 인간 사유의 역사가 참으로 다이내믹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4개의 원소 안에 접혀 들어가 있는 만물, E=mc2라는 방정식 안에 접혀 있는 우주. 유명한 시구절이 생각나는군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찰나의 순간에 영원을 담아라.
영국의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입니다. 가장 미세한 것에서 가장 광활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원소들의 아름다운 춤이 떠오르는군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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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곤 외 편역,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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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균 지음,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 교보문고, 1996
코플스톤 지음, 김보현 옮김, [그리스 로마 철학사], 철학과 현실사, 1998
앤서니 케니 지음, 김성호 옮김, [고대철학], 서광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