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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Mar 08. 2018

잿빛과 분홍, 마리의 집에 가다

- [마리 로랑생展 | 색채의 황홀]

철학자들에게는 네 개의 원소가 있습니다.

물, 불, 흙, 공기.


하지만 화가들에게는 빛의 원소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신성에 더 가까운 그 빛 말이지요. 마리 로랑생의 빛은 어떤 것일까요? 
그녀의 신성한 빛은 어떤 색채로 어우러질까요? 
저와 아내는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전시관 입구에서 일단 자판기 커피 한 잔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은 그녀의 그림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로 시작하는 기욤 아폴리네르 시의 실제 주인공으로 더 유명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예술가가, 게다가 여성 화가가 연애담으로만 소비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도 그녀를 기욤의 연인으로만 알고 있었고, 이 선입견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었지요. 그녀에게 '사랑'이 그녀 작품과 삶의 중요한 주제였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Self-Portrait,  1905


뭐랄까.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자의식이 강한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강한 자의식은 곧 외로움, 고독으로 이어지지요. 유난히 자화상이 많은 것이 이를 드러냅니다. 이 그림은 초기 자화상입니다. 붓터치와 표정으로 내면을 드러내는 화풍이 야수파와 인상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긴 인상파 화풍은 워낙 많은 후계자들을 거느리고 있지요. 마리도 예외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초기 자화상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묘파한 빛의 어우러짐보다는 콘트라스트(명암)의 강약이 더 두드러집니다. 아마도 이런 양식은 야수파의 영향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검은 머리와 환한 볼살,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자기 자신을 뚫어지듯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는 명암의 대조만으로 내면의 고독을 드러내고 있지요. 그리고 이 그림에서부터 쟂빛과 분홍의 묘한 대조가 보입니다. 까만 눈동자 밑의 회색 그림자를 보세요. 그 아래 굵은 선으로 흐르는 분홍의 입술이 그림 전체에서 강한 질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의 이런 화풍이 입체파를 만나면서 바뀝니다. 아래의 그림들을 보시죠.

 

(좌) Self-Portrait, 1908; (우) Pablo Picasso, 1908

                                     


1908년 당시에 마리는 피카소, 브라크 등이 참여하고 있던 입체파 그룹에 있었습니다. 좌측의 자화상은 1905년의 그것보다 선이 뚜렷하고, 붓질이 경쾌합니다. 우측의 피카소 인물화도 마찬가지지요. 혹자는 마리가 이러한 입체파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류라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파들 자신은 마리야말로 자신들의 화풍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고 하니 그런 혹평은 뭔가 빙퉁그러진 면이 있습니다.


마리의 본래면목이 드러나는 그림들은 1919년을 전후해서 탄생합니다. 사랑하는 기욤을 전쟁터로 떠나보내면서, 그리고 그와 헤어지면서 그녀는 삶의 환희로부터 물러나 뭔지 알 수 없는 회색의 광선을 쫓아 다닙니다.


(좌)The Dancer, 1919; (중)Woman with Dove, 1919; (우)Portrait of Baroness Gourgaud with Pink Coat, 1923


어떻습니까? 그림의 뉘앙스가 완연히 달라지지요? 마치 빛이 회색의 그림자와 서로 다투는 것 같습니다. 아니, 달리 보면 하늘의 큰 빛이 지상의 네 가지 원소와 어울려 우아하지만 슬픈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입체파와 영향을 주고받던 시기에 사라졌던 인물들의 쟂빛 눈그늘도 다시 나타나는군요. 그런데 쏟아지는 쟂빛 가운데 처연하게 늘어진 분홍도 혹시 보이시나요? 참 이상하지요?저 분홍이 마치 지상에 내려온 태양, 또는 어둠이 내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석양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쟂빛은 흰색 터치를 가득 품고 있어서 환하게 빛납니다. 이런 색감은 아래 그림에도 나타납니다.


The reader, 1913

이 작품이 위 작품들보다 이전입니다. 가만 보면 이 그림에서는 빛의 입자가 다른 오브제들의 견고함을 이기고 그 위로 너울거립니다. 다만 인물의 표정은 보다 심각하군요. 탁자에 누운 고양이는 이 햇살 아래 아주 평화롭습니다. 금방이라도 그루밍을 할 것 같습니다.


마리의 그림을 여기까지 보고 있노라면 어떤 고독감이 보는 사람에게로 젖어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일까요? 굳이 사생아로 태어나고, 사랑하는 이와 생이별 한 후 불확실한 결혼생활을 한 그녀의 불행한 삶을 알지 않아도 그림 자체가 그걸 건네주고 전염시킵니다.


Self portrait, 1924

가장 유명한 1924년 자화상이에요. 전 이 그림 앞에 한참을 붙박혀 있었습니다. 이 가느다랗고 허약한 여자아이가 중년의 마리 자신이란 말인가?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짧은 곱슬머리, 늘 그렇듯이 피로한 눈은 분명 마리의 붓터치지만 이전의 자화상과는 분명 다른 뭔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내가 이 그림에서 새로운 것만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지금껏 지나쳐온 그림들 에서 정작 내가 놓친 것을 이제야 깨달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전의 그림들에서도 느껴오던 것인데, 확연하지 않았지만 이제야 드러나는 무엇, 그것은 바로 '눈동자'였지요. 보세요. 이 그림에서 이 소녀 마리가 단순히 '소녀'가 아니라 중년의 깊은 고뇌를 간직한 부분은 바로 '눈동자'입니다. 실험삼아 신체의 다른 부분들을 가리고 눈만 보세오. 그럼 그 눈동자가 매우 깊이 깊이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깨닫고 그림 앞으로 앞으로 점점 다다가 제 눈과 이 그림의 눈이 거의 닿을 듯이 해 보았지요. 그러자 지금껏 본 다른 그림들의 눈동자들이 이와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인하기 위해 전시실을 되돌아 가며 봤습니다. 제 생각이 옳았지요.

 

마리는 예전부터 이후로도 쭉 저 검고 깊은 눈동자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기 작품들에서는 눈동자의 색채가 다소 푸르게 변하더군요. 그와 더불어 색채의 파스텔톤이 더 강조되고, 눈그늘의 쟂빛은 분홍빛으로 완연히 물듭니다.


(좌)Portrait of Madame Paul Guillaume, 1928; (중)Two Heads, 1935; (우) The Rehearsal, 1936


이제 마리의 그림에는 보다 분명하게 분홍의 불빛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한겨울의 쟂빛 얼음 안에 숨어 있던 봄의 태양이 세계를 녹이며 빛을 흘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분홍의 밝디 밝은 태양이 마리의 본 모습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이후 코코 샤넬과 같은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해졌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검은 색이거나 어둠을 겨우 뚫고 올라오는 푸른색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여전히 우울했고, 사랑을 갈구했으며, 그림들에서처럼 결코 웃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음 작품들을 보시죠.


(좌)Apollinaire and his friends, 1909; (우)Three young girls, 1953


기욤을 만나고 사랑했던 1909년의 그림과 말년의 그림 안에 사라지지 않고 남은 오브제가 보입니다. 바로 저 다리 말이죠. 연인이었던 아폴리네르를 중앙에 두고 뒷 편에 멀리 그려진 저 다리와 노래하고 연주하는 세 소녀들 뒷쪽에 쟂빛으로 옅어져가는 다리는 동일한 다리입니다. 유명한 '미라보 다리'인 것이지요. 초기 그림에서 그녀는 기욤의 오른쪽에 즐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지만, 오른쪽의 후기 그림에는 그녀도, 기욤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붉은 빛에서 쟂빛으로 흩어져 가는 다리만이 어떤 사랑의 흔적을 애써 놓치지 않으려는 듯 우울하게 서 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날,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아폴리네르의 편지를 달라고 해서, 가슴에 얹은 채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리의 그림에서 늘 나타나는 저 눈동자가 기욤의 그것과 참 많이도 닮았습니다. 제 착각일까요?



이쯤해서 아폴레네르의 시를 읽지 않으면 안되겠군요.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사랑은 흘러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 1921)




자, 그럼 제가 처음 했던 질문을 다시 해 보겠습니다.

마리 로랑생의 빛은 어떤 것이며, 그것은 어떤 색채로 어우러졌을까요? 
많은 평자들은 마리의 빛을 파스텔톤, 분홍과 파랑, 검정과 회색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틀렸습니다.

마리의 빛은 쟂빛입니다.


회색과 검정이 한 팔레트 안에 휘저어질 때, 
모든 색채들이 빨려들어가는 빛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빛은 그녀가 그린 여인들과 인물들, 
자기자신과 기욤의 눈동자에 새겨진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리의 색채는 분홍의 태양,

마지막 이내가 펼쳐지기 직전의 석양의 색채입니다.

 
푸르스름하게 변해가는 붉은색, 그리고 당장에 저무는 그 색깔 말이지요.
그것은 지상의 4원소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예술의 제5원소가 아닐까요?



참고문헌

닐 콕스 지음, 천수원 옮김, [입체주의], 한길아트, 2003

정금희, '마리 로랑생 예술의 디아스포라 성향 연구', [디아스포라 연구] 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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