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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Mar 08. 2018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기형도 29주기, 그의 책을 다시 꺼내다

3월 7일은 기형도 시인(1960~1989)의 29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를 생각하면 싸늘하고, 우울한 늦은 겨울의 빗물이 천천히 가슴을 쓸고 갑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하겠지만, 필자에게도 기형도 시인은 아주 특별합니다. 새파란 20대에 새벽까지 그의 시를 하나씩 하나씩 읽을 때 손끝에 느껴지던 전율이 아직 남아 있지요. 이후로 기형도는 제가 '시'라는 형식의 글을 쓸 때마다 따라다니는 어떤 영혼의 그림자처럼 문체 곳곳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자취방에 빗물이 차올라 심하게 상한 책들을 버려야 했을 때에도 그의 책만은 햇볕에 말려 다시 살려냈지요. 그 책을 다시 찾아 봤습니다.


기형도 산문집, 1990년 살림출판사 초판

표지는 형체도 없고 속페이지들도 삭아서 제 색을 잃었지만, 이맘때면 늘 한 번씩 펼쳐보게 됩니다. 물론 이 산문집이 아니라 1989년 5월에 나온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더 유명합니다. 그러나 전 시집보다 이 산문집이 그의 내면을 아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더 좋아하지요. 여기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그가 대구 여행을 가면서 산 노트에 적은 글들이지요.


신문을 6개나 읽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 그리고 창가에 앉아 불편하게 왼손으로 노트를 바치고 이 글을 쓴다. (...)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차라리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버리는 상태까지 가고 싶었다. 
나는 어떤 시에선가 불행하다고 적었다.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노트를 사고, 버스에 오르기 전, 터미널 창가에 다리를 외로 꼬고 앉아 노트에 글을 쓰는 더부룩한 머리의 청년이 눈 앞에 떠오릅니다. 이런 절망의 언어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유독 한 단어가 도드라져 보입니다. 바로, "불편하게"라는 단어지요. 무엇이 불편할까요? 왼손으로 노트를 받치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신체와 영혼 전체가 불편합니다. 이에 대해 시인의 친구인 원재길 시인은 흥미로운 그의 잠버릇을 말해줍니다. 참고삼아 인용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다른 친구네 집에서 외박을 했다. 잠결에 나는 몇 번인가 설핏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때마다 그는 내처 묘하게도 팔 하나를 세워서 허공에 한쪽 턱을 받힌 자세로 잠을 자고 있었다. 스르르 팔이 앞으로 기울다가 한계에 이르면 한번 머리 전체로 흔들해보이고는 다시 원상 복귀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잠이었다([기형도 산문집], 살림, 1990, 252쪽).


보기에 따라서는 아주 재미있는 잠버릇이지만, 그의 시를 읽고 나서 이 구절을 살피다보면 뭔가 슬프고, 처연합니다. 그는 왜 이리 불편하고 불안한 것일까요?


이제 다시 기형도의 말들을 따라가 보지요.


내가 아직 죽음 쪽으로 가지 않고 죽은 듯이 살아 있는 이유를 (...)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대구행 첫 차표를 끊은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초중고 시절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누구나 가고 싶어했던 언론사에 취직하였으며, 누구보다 바쁘게 보냈을 일상 속에서 그는 왜 이런 지독한 권태와 절망을 스스로에게 느꼈던 것일까요? "죽은 듯이 살아 있"다는 느낌은 우리들에게도 종종 생겨나지요. 하지만 시인의 산문 속에서 이 말은 그가 언제부턴가 오랫동안 이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제는 생경하지도 않은, 만성 통증과 같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마치 말기암 환자처럼 그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일까요?


(좌) 신림중학교 수학여행과 졸업식(맨 왼쪽), (중)연세대학교졸업식, (우) 중앙일보 재직시 동료들과


시인의 내면을 더 살피기 위해 그가 말한 저 시, 그러니까 '불행하다'고 적고, '또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적은 시를 직접 보도록 하지요.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어떻습니까? 여기 작중 인물과 화자는 작가의 내면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 인물은 이미 '죽은 자' 다시 말해 '유령'입니다. 그 유령이 죽은 자신의 신체를 겨우겨우 이끌고 가고 있는 것이지요. 잘 보면, 자신의신체를 마치 남의 몸 보듯이 묘사하는 시어들이 있습니다. 코트 주머니 속의 "딱딱한 손"이 그렇고, "변덕이 심한 다리여"라고 호명하는 부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는 시간이 느닷없이 멈추는 장면도 있습니다. 사각의 봉투가 떨어지는 그 순간, 화자가 허리를 굽히는 그 순간, 마치 영화의 '플래시 백'처럼 이미지가 일순간 정지합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기 시작하지요. '대학졸업', '어떤 소설', '어린시절'은 분명 과거의 회상이지만, 그 중간 중간에 있는 장면들, '추억이 밟히고',  '불켜진 빈 트럭', '눈 터는 사람들'은 과거인지, 현재인지 분간되지 않습니다. 진눈깨비 흩날리는 이 시의 세계는 시간 자체가 앞뒤로 흐르지 않고, 한꺼번에 출몰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산 사람의 시간이 아닙니다. 바로 유령의 시간인 것이지요. 제가 언급한 시의 오브제들은 이 유령의 시간이 임재하기 위해 잠시 빌리는 그런 육체들, 사물들일 뿐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인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시인이 사는 그 세계도 죽은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짧은 여행의 기록]에 나오는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그런데 그는 '불행하다'고 외칩니다. 자신의 죽은 신체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이 흐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죽어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불행하다'는 구슬픈 언어가 그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죽은 듯이 살아가는 이유가 그의 의지와는 어긋난다는 점을 암시하는 아주 중요한 언어이면서 시적 정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인의 삶은 왜 이리도 불행하게 되었을까요?


겉으로 보기에 기형도는 항상 많은 말을 하고, 즐거웠다고 합니다. 친구인 원재길 시인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그는 평소에 급하게 밥을 먹고, 아주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휙휙 지나치며, "소나기처럼 말을 쏟아낸다"는 것이지요([기형도 산문집], 살림, 1990, 251쪽).  이것은 그의 친구들과 학창시절의 선생님들도 증언합니다. 그의 초등학교 성적표에는 '밝고 명랑하다.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적혀있지요(<기형도 문학관> 내에 전시된 성적표에 있는 내용입니다).

(좌) 캠퍼스에서 문우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시인, (우) 연세문학회 시절

그럼 이 이유를 알기 위해 [진눈깨비]의 다른 시어로부터 다시 출발해 보겠습니다. 바로 '사각의 서류봉투'입니다. 이 단어가 속한 행을 다 읽어 볼까요? (사실 기형도의 시는 '단어'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장단위 전체가 의미와 더불어 시적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하얀 눈위로 떨어지는 서류봉투는 시간의 플래시 백을 잡아당기는 방아쇠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적 화자가 머물고 있는 대도시(아마도 서울) 직장인의 삶의 무게이자 생존의 이유를 상징하기도 하겠지요. 그는 서류를 무심결에 떨어트림으로써 삶의 무게로부터 벗어나지만, 곧바로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지요. '허리를 굽히다 말고' 그는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이상한 나라로 가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것은 악몽이지요. 마치 무간도처럼 그 세계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삼각벽, 그리고 현실의 삭막함과 과거의 좋았던 시절이라는 이중의 벽으로 그를 옥죄어 옵니다. 


그는 다른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 / 한 번 꽂히면 (...)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 또 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움직임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  - <오후 4시의 희망>

이미지의 패턴이 <진눈깨비>와 흡사합니다. 한 사내가 있고,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며, 망상을 즐기거나, 그것에 시달리며, 자기비하의 상태에서, 마지막에 '울음을 터뜨리'지요. 그는 무너지는 중이지만 그 '몰락의 과정'은 질서정연합니다. 결국 그는 죽음 곁에 있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영혼의 피부가 죽은 신체의 싸늘한 속살에 갇혀 견뎌온 것이지요. '죽은 신체와 갇힌 영혼'이라는 이 테마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이 글의 제목으로 쓰인 <빈 방>에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납니다. 전문을 읽어 볼까요?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시의 첫 연에서는 죽은 육체를 벗어던지는 영혼의 해방감이 느껴집니다. 반복되는 '잘 있거라'라는 선언은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공포와 무지와 망설임과 슬픔과 죽음으로부터 비로소 달아난 자의 해방의 외침인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맨 앞 행의 토로는 실연과 같은 아픔을 이야기하며 시작하지요. 그리고 마지막 연은 문을 잠그는 자가 빈집에 갖힌 사랑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서글픕니다. 시를 읽는 우리는 이 짧은 시 안에서 아픔과 해방과 서글픔을 차례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해방과 더불어, 내가 버리고 온 모든 것들이 내가 사랑했던 대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도저도 못하는 절박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끝내 '갇혔네'라는 이 마지막 단어는 영혼의 속살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가지요.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상처는 스스로의 것이기도 하지만, 시인을 괴롭혔던 그 많은 세상의 욕망들에게 가하는 폭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육체를 벗어던짐으로써 캄캄한 죽음의 궁륭을 떠돌고, 동시에 삭막한 세계를 영원히 가두어 버리는 것이지요.  이 시는 그래서 시인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파탄내는 일련의 도저한 사도-마조키즘의 드라마입니다. 


시인 기형도는 이렇게 황량한 도시인으로 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친구를 만나고,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고, 여행을 다닙니다. 하지만 시를 쓰는 그 순간만큼은 아주 명징하게 스스로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내내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천형처럼 자신의 신체를 죽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그 신체 바깥에 놓인 세계와 잘 맞지 않는 영혼의 욕망을 버거워하는 것이지요. 


가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평론들이 있는데요, 그것은 기형도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려는 견해들이지요. 제가 보기에 기형도가 '희망'을 제대로 노래한 시는 없습니다. 그는 끝까지 세상과 신체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영혼이 겪는 불편함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염세적인 단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키에르케고르를 참고하며 논한 그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실존',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와 대면하는 자 말이지요. 기형도는 그 실존을 살아간 탁월한 페시미스트입니다. <짧은 여행의 기록>에 기록된 마지막 언어들은 시인이 절망의 인장을 신체에 박아놓고, 희망을 연기하는 자임을 드러냅니다.


나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상들을 향해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귀로에서 희망을 품고 걷는 자 있었던가? 그것은 관념이다. (...)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 그러나 통속의 힘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구원이란 없다. (...) 또 다시 움직이는 세계. 낮게 소리없이 서울에 섞여든다. 
(...)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


저는 시인이 여기서 말하는 '자기구원'이란 단어가 마지막 문장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와 심각한 불화를 겪고 있음을 느낍니다. '희망'이라는 통속적인 의지는 실제로 서울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여행은 '멎어'져야 하고, 그와 더불어 영혼의 진실을 마주하는 짓도 멈추어야 합니다. 마치 숨이 멎듯이 말이지요.


이제 제가 좋아하는 기형도의 시를 읊고 이 글을 마쳐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기형도의 흔적을 사진으로나마 만나보도록 하지요.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한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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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가 20여년간 살았던 당시의 생가 모습입니다. 그는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대부분의 생애를 광명에서 보냈습니다. 경기도 시흥군 소하동 701-6번지입니다.


기형도 시인 지금의 생가터입니다.

제가 찾아간 생가터는 그의 내면처럼 황량했습니다. 

시비라도 하나 서 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버려진 채로 있었습니다. 

근처에서 고물상을 하시는 아주머니의 말로는 매년 이맘 때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곤 한다는군요.



    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안개>의 배경이라고 알려진 '안양천'입니다. 생가 바로 옆을 흐릅니다.


(좌) (중) 기형도 문학관 전경, (우) 저희 아들녀석입니다. 사뭇 진지하네요.




<참고문헌>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9

기형도, [잛은 여행의 기록-기형도 산문집], 살림, 1990

기형도, [기형도 전집], 문학과 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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