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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Mar 26. 2018

혁명과 사랑, 이 한 장의 사진

- 혁명사#1 혁명은 사랑이다, 1968 프랑스 

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봄이 되면 다른 분들은 벚꽃구경이나 진달래꽃이 흐드러진 산을 떠올리시는데요, 저는 다른 것이 떠오릅니다. 바로 1968년 프랑스와 1980년 광주이지요. 응?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네요. 공부하는 인간이다 보니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하시길...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우선 1968년 5월 프랑스로 가 보겠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혁명을 지금은 '68 혁명'이라고 부르지요. 이 브런치 글의 커버로 쓴 사진들은 68 혁명 당시의 거리를 가득 메웠던 학생, 시민, 노동자들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생생히 전해줍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는 달리 당시에는 사진 기술이 발달하던 때라 혁명의 각 순간들을 온전히 프레임 안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68 혁명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이 영화가 떠오르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몽상가들]입니다. 68 혁명 당시 최루탄이 난무하는 파리에서 세 명의 아름다운 젊은이가 서로를 공유하면서 혁명과 사랑을 연기하는 영화였지요. 감독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입니다. 우리나라 개봉 당시 수위를 넘나드는 컷들은 다 잘리고 스크린에 걸렸습니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와 아래에 제가 소개할 68 혁명의 한 컷은 정말 잘 일치합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처음으로 68 혁명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요, 특히나 사진과 포스터가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컴퓨터 폴더 안에 모아 놓았었지요. 하나같이 멋진 사진들이었는데, 그중 한 사진을 보고 저는 충격이랄까... 어떤 거대한 '관점의 전환'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커버 사진들 속에도 그 사진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바리케이드를 앞에 두고 동지와는 어깨를 두르고, 연인과는 키스하는 이 장면.

제가 이 사진을 처음 접한 것은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책, [신좌파의 상상력](원제: Imagination of the New Left)을 통해서였습니다. 1987년 브루클린에 있는 South End Press 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왔고, 1999년 '이후' 출판사에서 이재원 선생의 번역으로 한국에 처음 나온 책이지요. 이 표지 사진은 68 혁명의 이념에 딱 맞아떨어집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왜냐하면 68 혁명은 기존의 1917 러시아 혁명식 정치혁명과는 다른 면모, 즉 학문-문화혁명의 모습을 많이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8 혁명의 이념을 표현한 구호들이 많이 있지만, 전 다른 무엇보다 아래의 말을 좋아합니다.


당신들의 정책들은 모두 형편없는 쓰레기요. 어째서 '성'에 대한 것은 없지요?


아주 당돌하고 저돌적인 언어지요? 이 말은 68 혁명의 아이콘이자 학생 지도자인 다니엘 콩방디(Daniel Cohn-Bendit, 당시 23세)가 학교를 방문한 당국자의 면전에서 담배를 꼬나문 채 쏘아붙인 말입니다.


(좌)1968년 당시 학생 지도자로 거리에서 연설하는 붉은 다니(콩방디의 별명), (우) 현재 유럽의회 의원으로 의회에서 연설하는 다니엘 콩방디(현재 72세).


어떤 것이 느껴지시나요? 저는 이 말과 그 상황을 상상하면, '권위에 대한 조롱'과 '혁명의 의제 전환'과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나이 지긋한 장관급 당국자에게 담배연기를 뿜으며 '형편없는 정책들'이라고 할 만한 배짱이 다니에게는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성'이 혁명의 주요한 의제로 떠올랐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미투 열풍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페미니즘'은 68 혁명 이후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고,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지요. 68 혁명이 정치체제의 변화뿐 아니라, 탈권위를 통한 체제의 문화적 기틀 자체를 변혁하려고 했다는 것에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저 한 장의 사진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당시의 상황들을 따라가 볼까요?


1968년 당시의 낭테르 대학 캠퍼스 전경입니다.

프랑스 68 혁명의 진원지는 낭테르 대학입니다. 이 대학은 파리 근교에 위치한 작은 캠퍼스지요. 2차 세계대전 이후 베이비부머 시대를 거치면서 프랑스의 대학생 수는 엄청나게 늘었는데요, 1946년 12만 3천 명에 불과했던 학생 수는 1968년에 이르러 무려 51만 4천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국은 낭테르 캠퍼스와 같은 학교들을 서둘러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관리와 지원은 미미해서, 학생들은 늘 불만에 차 있었습니다. 수업을 듣기 위해서 학생들은 아직 공사 중인 캠퍼스의 진흙탕길을 질러가야만 했지요. 위의 사진을 보시면 학교 앞 등굣길이 비포장 상태의 지저분한 흙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생들 중 통학하지 않는 학생들은 보다 가난한 집 자식들이었어요. 파리 물가에 비해 싼 기숙사에서 산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기숙사에 학생들이 몰리면서 수용소를 방불케 할 정도로 생활공간이 좁아졌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이 대학에는 매우 급진적인 정치 서클들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주로 마오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었지요. 이런 정치 서클들은 낭테르뿐 아니라 당시 프랑스 전 대학에서 유행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들 중 '마오주의'를 따르는 학생들이 상당수였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이들 젊은이들은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 이념에 싫증을 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1968년 5월 1일 소르본 대학 건물 전면에 걸린 마오쩌뚱 초상입니다. 왼쪽에 걸린 레닌의 초상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네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의 영웅이자 대통령이었던 드골 장군은 프랑스 인민들의 신뢰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제조업은 1948년과 57년 사이에 무려 75%나 성장했으며, 53년과 58년 1/4분기 사이의 성장률은 57%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당시 서유럽 전체의 평균 성장률 33%를 훨씬 상회하는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권태롭고 심드렁한 시기라는 것도 분명했지요. 가파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국가행정체계는 구시대적이며, 관료적이었고, 교육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교육부라는 무소불위의 권력 아래에 촘촘하게 짜인 보수적인 공무원들의 조직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는 숨 막히는 억압이었고, 때로는 조롱거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프랑스의 대학조직 위계구조는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학부 구조는 제1제정 시기(1804-1815)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포화상태인 대학은 자연스럽게 중도탈락청년실업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대학에 다니고 있는 사람의 70%가 자신들의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있으며, 졸업자들 중에서조차 놀랄 만큼 많은 수의 실업자들이 있습니다.


 68년 5월 당시 인터뷰에서 <프랑스 전국학생연맹UNEF. Union Nationale des Étudiant de France>의 부의장이었던 자크 소바조(Jaque Sauvageot)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것이 혁명의 원인이라고 단언하기도 했지요. 사정이 이러니 당연하게도 학생들은 학교 안이든 사회에서든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관료들은 이러한 불만들을 애써 모른 체 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그들의 정책을 강요하기만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푸셰 개혁안’입니다. 이 개혁안의 핵심은 ‘2년 학위제’예요. 의도는 분명했지요. 2년 안에 자본주의 맞춤형 인간을 빠르게 생산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전후 프랑스의 호황을 이어간다는 것이 이 정책의 숨은 의도였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교과과정도 인문학에서 기술과정으로 바꾸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당연히 이 개혁안에 반대했지요. 혹시 당시 프랑스의 이런 교육 개악을 통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교육'개혁'(?)이 떠오르신다면 잘 맞추신 겁니다. 지금 한국의 대학들이 꼭 이렇게 개악되고 있습니다.

  

이제 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혁명의 장면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1968년 영국 런던에서 여성들이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이끌고 있습니다.

국제정세에 있어서 이슈는 68년 5월 전후로는 온통 베트남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국제정세가 이제 혁명의 씨줄이 생성되는 위로부터의 힘점이 되는 것이지요. 3월 20일에는 ‘베트남 전국연합’의 학생들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무실의 유리창을 깨트리고, 성조기를 불태웠고, 이 사건으로 학생대표들이 체포, 구금되었어요. 3월 22일, 낭테르의 활동가들은 정파를 불문하고 이에 항의하면서, 학교 행정실 점거에 들어갑니다. 총장인 그라팽은 학교폐쇄로 맞섰습니다. 이런 조치는 일반학생들의 잔잔한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어리석은 짓이었음이 뒤에 밝혀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해 프랑스전국학생연합(UNEF)이 낭테르 학생지도부에 대한 지지선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좌) 경찰에 연행되는 소르본대 학생, (우) 시위대와 경찰

5월 3일, 불길은 소르본 대학으로 옮겨 붙었습니다. 학교 영예의 전당에서 집회와 토론을 이어가던 학생들에게 경찰들이 들이닥친 것이지요. 낭테르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한 로슈 총장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순순히 닭장차에 올라탔습니다. 하지만 그때 사건이 발생했지요.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학생운동 진영이 아니었던 일반학생들이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무리로부터 첫 번째 짱돌이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경찰차 앞유리를 박살 내면서 운전석의 경찰 머리를 강타했지요. 이후 경찰들의 대응은 무자비했습니다. 소르본 대학 ‘영예의 교정’과 그 앞 ‘소르본 거리’가 일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숩니다.

탄압당하는 학생들과 거리로 나선 시위대

이 일로 학생운동의 지도자 4명이 체포되어 구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콩방디, 소바조, 크리빈, 웨베르가 그들입니다. 다음날 언론에는 경찰의 과잉대응을 비판하는 기사가 났습니다. 이제 전국고등교육교원노조(SNE-Sup)가 학생들을 석방하고 당장 캠퍼스에서 경찰들을 물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나서게 됩니다.



5월 6일부터 5월 10일까지, 소르본과 라탱지구의 바리케이드 위로 짱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난무합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전투와 휴전이 번갈아가며 진행되었지요. 학생들이든 경찰이든 퐁피두(당시 총리)든 이제 이 사건이 혁명적 정세가 될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물밑에서는 학생대표와 총장, 그리고 총리인 퐁피두 간의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타결되는 것이 더 이상해 보였지요.


마침내 라탱지구는 학생들에 의해 해방구로 선언됩니다. 이때 많은 세계적인 프랑스 지식인들이 학생들과 더불어 행진하고, 구호를 외치며, 토론을 하는 진풍경도 생겨나게 됩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지요.

 

(좌) 연단에서 연설하는 노년의 사르트르, (중) 메가폰을 든 미셸 푸코, (우) 야간 행진하는 왼쪽 옆모습의 질 들뢰즈, 가운데 사르트르, 오른쪽 푸코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들이 고립된 것도 사실이었어요. 그리고 최후의 결전, 학생들이 '바리케이드의 밤'이라고 명명한 5월 11일이 왔습니다. 새벽 2시, 경찰들은 전병력을 동원해서 바리케이드를 넘어 학생들을 침탈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동틀 무렵, 학생들은 소르본 대학 건물을 빠져나와 울름 거리에 있는 ‘고등사범학교’ 건물로 피신하게 되지요. 고등사범학교 강의실이 안에서부터 폐쇄되었습니다. 아침, 퐁피두는 여론이 학생들 편이라는 것을 정치적 본능으로 직감했고, 구금된 학생들을 석방할 것임을 공표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퐁피두 내각이 관대해서가 아니었어요. 총리가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5월 11일 노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연대'라는 계기는 모든 혁명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혁명이 하나의 변곡점을 지나 확대되는 과정이기 때문이지요. 혁명이 하나의 특이한 사건, 예컨대 콩방디의 이죽거리는 말이나 소르본에서의 첫 번째 짱돌의 포물선을 따라 그 첫 번째 씨줄을 엮어낸다면, ‘연대’는 씨줄이 날줄과 만나 종횡으로 직조되는 결정적인 사건인 것이지요.


이 사건의 화살은 구체제의 심장을 관통하면서 응고된 조직들을 해체하고,
억압된 욕망들을 해방시킵니다.


이때부터 사건들의 무한한 운동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혁명은 비로소 역사 전체를 바꾸는 '대사건'이 되어 새로운 대지와 평면을 창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 역사는 거시적 측면에서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흔적을 역사에 남깁니다. 나선형 순환의 변곡점을 통과한 것이지요. 그래서 한 번의 혁명은 그 안에 n개의 사건들을 품고 있는 하나의 대사건과 같습니다. 그런 연후 다음에 오는 혁명들은 첫 번째 혁명으로부터 어떤 교훈과 격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건들은 이제부터 대규모로 변합니다. 5월 13일 학생-교원-노동자 연대 행진이 레퓌블리크에서 당페르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미 총파업에 돌입한 상태였고, 시위 규모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납니다. 행렬의 선두에는 제스마르, 소바조, 콩방디 등 학생지도부가 있었지요. 그런데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은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이들 노회한 노동자들의 눈에 학생들은 그저 새파랗게 어린것들이고, 너무 과격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콩방디는 그날 밤 연설대에 서서 소심한 CGT 지도부를 향해 이렇게 한 방 날립니다. “제가 기쁜 것은, 선두에 섰을 때, 스탈린주의자들은 꽁무니나 쫓아왔다는 점입니다.” 제도화된 노동조합주의자들의 종속적 태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롱에도 기층 노동자들은 속 시원해했습니다. 이후 이들 지도부는 결정적인 국면에서 혁명으로부터 퇴각하게 됩니다.

 

야간 연설하는 다니엘 콩방디(붉은 다니)

이날, 마찬가지로 소르본이 점거됩니다. 그리고 노동자 지구인 낭트는 그 이전부터 이미 노동자들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고요. 소르본의 대강의실에서는 매일 혁명의 진로와 권력의 향배에 대해 토론이 이루어졌습니다. 5월 20일, 레지스탕스였고, 프랑스 진보의 표상인 사르트르가 소르본에 와서 학생들과 밤새 격론을 벌였습니다.


소르본 대학 강당에 모인 학생, 시민, 노동자들과 토론하는 사르트르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밤을 새워 당대의 감각이 듬뿍 살아 있는 포스터들이 대량으로 제작되어 새벽에 거리에 도배되었습니다. 사실 이 포스터들도 굉장히 유명합니다. 이 포스터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혁명이 예술가들의 창의성을 폭발시키는 시건장치처럼 느껴질 정도지요.


에콜 대 보자르에서 제작되어 거리에 뿌려지고, 붙여진 포스터들. 이 외에도 수많은 종류의 포스터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 ‘코뮌’(혁명 공동체)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배자들도 가만있지는 않았지요. 그 첫 번째 조치는 붉은 다니에게 내려집니다. 네덜란드에서 5월 정신을 강연하고 돌아오던 콩방디가 입국 금지당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 혁명은 지도자에 의해 이끌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콩방디가 입국 금지 상태에 있었어도 혁명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이 도도히 흐르는 중이었습니다.


이제 5월 24일이 되었습니다. 드골은 한 발 물러선 후 두 발 앞으로 나아갈 패를 던지기로 합니다. ‘국민투표’가 그것이지요. 이에 학생들은 증권거래소 방화로 화답합니다. 노학연대라는 궁지에서 드골은 결정적인 패를 던졌지만, 학생들 중 급진적 분파는 그 패를 펴 보지도 않고 태워버린 것입니다. 제 생각에 당시 학생들의 이 판단은 잘못되었습니다. 결국 고립된 학생들은 그날 밤, 센강 근처에서 유래 없는 폭력과 마주칩니다. 청년 한 명이 사망하고, 경찰 간부 한 사람이 트럭에 압사했지요.


이 틈을 타서 퐁피두는 급진적 학생 분파들과 개량화된 노동조합 지도부 간의 간극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조합 측 임금인상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최저임금 시간당 3프랑 인상, 임금 10% 인상, 주 40시간 근무제 시행, 기업 내 권리 행사 인정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27일 아침의 이 전격적인 협상안은 발랑쿠르 노동총연맹(CGT) 대표와 노조에 가입되어 있지 않던 젊은 노동자들, 그리고 중간 간부들에게는 그저 달콤한 사탕발림처럼 들렸습니다. 이들 중 3만여 명은 샤틀레티 스타디움에 모여 시위를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합니다.


(우) 체 게바라의 유명한 말이 담벼락에 씌여 있군요.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하지만 지배자들의 움직임도 더 집요하고 교묘해졌습니다. 5월 29일 바덴바덴에서 돌아온 드골의 안주머니에는 회심의 연설문이 접혀 있었지요. 그리고 그는 프랑스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상투적인 연설을 라디오 전파에 실어 프랑스 전역에 날렸습니다. 극도의 피로감에 빠져 있던 시민들은 이 상투성을 ‘휴식’처럼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5시 30분 콩코드 광장에는 이제는 지쳐버린 드골 숭배자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혁명을 이끌던 시민들조차 드골에 대한 숭배감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드골이 나치 지배하의 프랑스에서 했던 투쟁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6월 12일은 이들 지배자들의 총반격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모든 시위를 금지시키고, 진보적 조직들에 대한 강제해산을 명령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다음 조치들은 아주 신속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진행됩니다. 6월 14일, 오데옹 극장에 잔류하던 시위자들을 끌어냈습니다. 다음, 16일, 소르본 대학의 혁명 본부가 경찰들에 의해 해산되었습니다. 노동계도 마찬가지였어요. 끝까지 버틴 것은 금속노동자들이었습니다. 6월 13일 타협안에 대한 찬반 투표는 찬성 55%, 반대 43%로 가결되어 버렸습니다.


혁명의 깃발은 내려졌고, 격론이 오가던 강의실도 텅 비게 됩니다.


붉은 깃발은 내려졌습니다. 반혁명의 일등공신인 퐁피두는 69년 6월, 드골에 이어 대통령이 됩니다. 운동세력들에게는 두 가지 길이 남아 있었지요. 극좌 테러리즘과 일상으로의 복귀. 둘 다 5월의 그 뜨거웠던 날들에 비해 턱없이 빈곤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테러리즘은 프랑스 68의 쾌락주의와는 더더욱 양립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독일이나 일본, 이탈리아에서는 실제로 이 길을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을 택했던 것입니다. 68의 아이콘 콩방디는 그 후 유럽의회 의원이 되지요.


그러면 이제 다시 처음의 그 사진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그리고 [몽상가들]도 함께 생각해 보지요. 앞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 영화에서는 68 혁명의 이념을 적절하게 표현한 대사가 둘 있습니다. 두 대사 모두 영화에서 도도한 혁명적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어딘가 허무주의자 같은 테오(루이스 가렐 분)가 과격하게 내뱉는 말입니다.


신이 없다고 해서 아버지가 그 자릴 차지할 순 없어.
총 말고 책, 폭력 말고 문화


테오의 첫 번째 대사는 바로 다니엘 콩방디가 담배를 꼬나물고 아버지뻘의 당국자에게 대들던 장면과 묘하게 오버랩됩니다. 아무것도 '권위'를 가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탈권위의 선언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대사는 정치혁명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는 학문과 문화의 변혁을 원했던 68 혁명의 생각과 일치하지요. 마찬가지로, 콩방디가 "왜 섹스에 대한 것은 없"냐고 따지던 그 말의 의미와도 통합니다. '성'은 가장 급진적인 문화의 축이었고,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곧 기성질서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거대한 관점의 전환'을 경험했던 저 사진은 이런 모든 의미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바리케이드라는 저항의 진지 안에서 '평등한'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거리낌 없이 키스를 하는 모습은 사랑과 우정 그리고 혁명이 하나의 동등한 가치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강렬한 선언이지 않을까요? 이전의 혁명이 혁명을 '대의'로 격상시키고, 그 대의를 위해 우정과 사랑을 희생하기를 강요했다면, 68 혁명은 그런 혁명의 고답성을 단번에 뒤엎는 사건이었던 겁니다. 베르톨루치는 이러한 핵심을 정확하게 영화로 짚어낸 것이고요.


'혁명'은 언제나 '사랑'과 함께 갑니다.


우정, 사랑과 함께 어우러지는 혁명이란 도대체 누구의 것이고, 어떤 혁명이라고 규정 내릴 수 있을까요? 전 그것을 '쾌락주의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군요. 심각하지 않게, 재미있게, 우리의 쾌락을 위해 혁명을 하자는 것이지요. 그것은 거대한 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우정을 나누고, 사랑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요. 그래서 세상이 바뀐다면 더 좋고요.


아, 그러고 보니 아주 유명한 영화 하나가 더 떠오르는군요. 바로 이 영화입니다.


(좌) 영화 <브이 포 벤데타> 포스터, (우) 영화 속 한 장면과 유명한 대사.

이 영화에서 혁명가인 브이가 여주인공과 춤을 추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춤이 없는 혁명은 쟁취할 가치가 없소


혁명에 대한 브이의 이런 생각을 잘 표현해 주는 시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혁명시(?)입니다. 이 시를 에필로그로 해야겠군요.


제대로 된 혁명
- D.H.로렌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쫓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짓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참고문헌>

수잔 앨리스 왓킨스, 타리크 알리, 안찬수, 강정석 옮김, 『1968-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삼인, 2001.

조지 카치아피카스, 윤수종 옮김,  『정치의 전복-1968 이후의 자율적 사회운동』 , 이후 , 2000.

조지 카치아피카스, 이재원, 이종태 옮김, 『신좌파의 상상력-전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년』, 이후, 1999; 이재원 옮김, 난장, 2009

아르노 뷔로, 알렉상드르 프랑 ,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68년, 5월 혁명』, 휴머니스트, 2012.

D.H. 로렌스, 류점석 옮김, 『제대로 된 혁명 - 로렌스 시선집』, 아우라,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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