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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Mar 29. 2018

바람의 뼈

- 유실된 존재들의 신체

'바람 뼈'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으신지요?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이 단어를 생각해 내고 먹먹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 이 말씨앗 하나에 제가 감당하기 힘든 수많은 다른 감정과 의미들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말이 떠오른 계기는 책이 아니라 음악에서 입니다. 뉴에이지 피아니스트인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 1942~  )의 음악을 듣는 도중이었지요. 우선 음악을 들어볼까?


마이클 존스, <Sunshine Canyon> 입니다.
<Sunshine Canyon>이 수록된 1987년 앨범 [Amber]의 자켓입니다.


어떻습니까? 음악을 들으시고 어떤 감정에 젖게 되나요? 저는 이 피아노 선율이 처음에는 '바람소리'와 같구나라고 생각하다가, '노을 지는 저녁의 바람소리'라는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겨울나무 한 그루가 추운 바람에 제 가지들을 내놓고 떠는 장면이 떠올랐지요. 그리고 아, 이것이 '바람의 뼈'로구나, 하고 작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이 말씨앗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그래서 이것저것 뒤져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전 제가 좋아했던 시인의 시에 '바람의 뼈'라는 제목이 보이더군요. 바로 이 시입니다.


바람의 뼈
                                                                                   - 윤의섭

바람결 한가운데서 적요의 염기서열은 재배치된다  

어떤 뼈가 박혀 있길래
저리 미친 피리인가   

들꽃의 음은 천 갈래로 비산한다
돌의 비명은 꼬리뼈쯤에서 새어 나온다
현수막을 찢으면서는 처음 듣는 母語를 내뱉는다   

생사를 넘나드는 음역은 그러니까 눈에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후에는 공중에 뼈를 묻을지라도
후미진 골목에 입을 댄 채 쓰러지더라도   

저 각골의 역사에 인간의 사랑이 속해 있다
그러니까 모든 뼈마디가 부서지더라도 가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파열은 생각처럼 슬픈 일은 아니다   

하루 종일 풍경은 바람의 뼈를 분다
來世에는 언젠가 잠잠해지겠지만
한없이 스산하여 망연하여 그리움이라든지 애달픔이라든지
그런 음계에 이르면 오히려 내 뼈가 깎이고 말겠지만  

한 사람의 귓불을 스쳐오는 소리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음성을 전해주는 바람 소리
그대와 나 사이에 인간의 말을 웅얼거리며 가로놓인 뼈의 소리

저것은 가장 아픈 악기다
온몸에 구멍 아닌 구멍이 뚫린 채
떠나가거나 속이 텅 비어야 가득해지는


이 시를 찾아 다시 읽으니 저 '바람의 뼈'라는 말씨앗 안에 뭉쳐진 이미지의 타래가 슬슬 풀려 나가가는 것 같더군요. 그러나 이 시가 품고 있는 이미지들을 다시 잘 살펴보면 슬슬 풀려나가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의미들, 사물들 더 나아가 '존재들'을 만나게 됩니다.


시를 한꺼번에 느껴 보세요. 그럼 이 시가 제목처럼 너무나 황량하고 공허한 울림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시의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결코 '바람의 뼈'가 무엇인지 분명히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시는 그 바람의 뼈의 '이미지들'을 한 행 한 행 쟁여갑니다. 종국에 독자는 이 시에서 지성의 분석을 거부하고 오직 이미지들의 충격파에 따라 이리저리 춤추는 정(pathos) 몸짓 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그 춤은 현란한 현대무용이라기보다 마치 무당의 씻김굿과 같은 율동입니다. 시인은 '온몸에 구멍 아닌 구멍이 뚫린 채/ 떠나가거나 속이 텅 비어야 가득 해지는' 그런 가장 슬픈 악기를 위로하듯 어떤 스산한 공간에 서서 시어들을 웅얼거리고 있는 것이지요. 하긴 이 공간이 스산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바람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시인의 귓전을 때리는 그런 곳으로 보입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일까요? 아니면 설산의 정상일까요? 그런 것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공간, 그리고 불분명한 시간대, 시인이 자신의 목소리보다 풍경과 감각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이 시는  7연에 와서 상응하는 언어를 두 행에 걸쳐  배치함으로써 '바람의 뼈'가 단지 '하나'의 '소리'임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무슨 소리일까요? 바로 중천의 소리, 이승과 저승, 인간의 소리와 귀신의 소리가 혼재된 '웅얼거림'입니다. 그리고 강조하자면, 그것은 '단 하나의 소리'입니다. 유일한 하나의 소리지요.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음성을 전해주는 바람 소리
그대와 나 사이에 인간의 말을 웅얼거리며 가로놓인 뼈의 소리


'이 세상에 없는 음성'은 누구의 음성일까요? 그것은 '그대'의 음성이지요. 그대의 음성을 전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바람'입니다. 그 음성은 귀신의 소리며, 그래서 단지 인간의 말로 변환될 때 '웅얼거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소리'의 원천은 '그대'인데, 이 인물은 공간적으로 저승에 가깝지만, 또한 시간적으로 먼  과거에 이미 죽은 자이지요. 백골이 된 '그대', 그리고 '뼈'는 마침내 '시간', 그것도 아주 오래된 시간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대가 백골이 되는 그 세월 동안 바람은 소리를 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뼈의 소리'외에 다른 것이 아니지요. 한 생이 다하고 끝까지 남은 하나의 소리 말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바람의 뼈'일까요? 그것은 '그대'가 가뭇없이 사라진 세월 속에 내게 살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겠지요. 형체가 없으므로, 실체도 없고, 그래서 '바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무형의 '그대'를 시공간을 거슬러 내 앞에 불러오고자 욕망합니다. 그 욕망의 구성물, 손에 잡히지 않고, 규정되지 않는 그것이 '바람의 뼈'라는 단어가 됩니다. 이 욕망은 수 십 년이 아니라 마치 수 백 년, 수 천년의 전설 같은 시간 동안 옹이처럼 맺히고, 굳어지고, 속으로 응어리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응어리가 결정화되어 저 단어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이 '나'조차 실체도, 형체도 없는 '바람'같이 느껴집니다.  


저는 이 시를 이렇게 설명하면서도, 자꾸만 '바람의 뼈'라는 것이 당최 잡히지 않는다는 생각을 또 합니다. 과연 '나'는 '그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이고, 이 시는 그런 그리움을 드러낸 것인가? 아닙니다.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시에 드러난 '바람의 뼈'에는 이와 다른 의미가 어딘가 웅숭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와 비슷한 기형도의 시가 있습니다. 보도록 하지요. (기형도 시인에 대해서는 제가 이전에 쓴 브런치 글이 있지요. <사랑을 읽고 나는 쓰네>)


소리의 뼈
                                                                     -기형도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여기서는 '바람'이 아니라 곧장 '소리의 뼈'가 등장합니다. 윤의섭의 시에서는 바람의 소리, 뼈의 소리였는데, 기형도는 그 '소리'를 뼈와 연관 짓는  것이지요.


보면 아시겠지만 이 시는 상당히 구체적이에요. 대학 선생들 중 특이한 분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학설을 설파한 겁니다. 그는 주위의 무시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의견을 굽히지 않지요. 그리고 한 학기 내내 수업마다 '침묵'하는 고집을 보여줍니다. 학생들은 이 침묵을  말 그대로 "참지 못하고" 떠들어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소리의 뼈에 대해 주절거리는 학생들의 말들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수업을 한 학기 경험하고서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를 윤의섭의 시와 함께 생각해 보면 뭔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보입니다. '윤'의 시에서 소리는 바람과 뼈의 '하나임'을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철학 용어로 표현하면 '일의성'(univocity)이라고 하지요. 이 일의성은 '기'의 시에 와서 오히려 '뼈'가 됩니다. 그리고 '침묵'이라는 새로운 계기가 발생하는데요, 이는 '윤'의 시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지요. 그의 시에서는 침묵이 아니라 웅성거림, 날카로운 소리들이 난무하는 시공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전 요상한 역설에 사로잡힙니다. 윤의섭 시의 '소리'와 기형도 시의 '침묵'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잘 보시면, 이 소리와 침묵은 똑같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의사소통을 위한, 수신자와 발신자가 분명하고, 기표와 기의가 제대로 연합된 일상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두 시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시어들을 계열화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바람 - 뼈 - 소리 - 바람의  뼈
소리 - 뼈 - 침묵 - 소리의 뼈


위의 시어 계열이 윤의섭의 것이고, 밑의 계열이 기형도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한 번 계열들을 훑어보시면 가운데에 계열화된 '소리'와 '침묵'이 상응하고, '뼈'는 두 시 모두 두 번 반복됩니다. 더 유심히 봐야 하는 것은 첫 번째 열의 '바람'과 '소리'예요. 이 둘이 같은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기형도 시에서 '소리'는 '바람'과 관련이 없고, 시 어디에도 '바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윤의섭의 시에서는 '바람'이 곧 '소리'와 연관되지요. 이것은 두 시인이 바라보는 시적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윤의섭은 지금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어떤 세계를 바라보면서, 무속에 육박하는 시선으로 소리를 듣고, 뼈를 봅니다. 하지만 기형도는 필시 자신의 대학시절일 아주 경험적이고 내재적인 방향에 자신의 시선을 걸쳐 놓으면서 침묵을 체험하고, 뼈를 사유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말 그대로 초월적 시선으로 환영의  뼈를 보고 체험하는 접신의 세계로 이탈 중이지만, 다른 한쪽은 아주 객관적이고 내재적인 시선으로 실재의 침묵을 체험하면서 뼈를 사유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탄생한 두 시어, '바람의 뼈'와 '소리의 뼈'는 완전히 다른 색채가 입혀집니다. 바람의 뼈에는 소리가 웅성거리지만 소리의 뼈에는 침묵만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 바람은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이지요. 이건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마치 영원히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의 세상과 완전히 멸망해 버려 멈춘 인간의 세계가 살을 맞대고 있는 형상입니다.


이 다른 색채를 저는 두 개의 음악을 통해 제시하고 싶네요. 한 번 들어 보시죠. 


Alva noto, Spray
John Cage, 4' 33''

위의 음악은 독일의 유명한 아티스트인 알바 노톤의 <Spray>이고, 아래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입니다. 알바 노튼의 음악을 장르상 '노이즈 뮤직'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어떤 특정하게 범주화된 악기를 쓰지 않고, 기계음이나 일상적인 소음들을 활용하여 정체불명(?)의 '소리'를 창조하는 작업을 지칭합니다. 들어보면 알 수 없는 소음들로 곡 전체가 꽉 차 있습니다. 그리고 존 케이지의 저 작품은 너무나 유명하지요. 연주가가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고 4분 33초 동안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제가 이 두 음악을 비교하는 이유는 윤의섭의 시와 기형도의 시에서 '바람의 뼈'와 '소리의 뼈'가 가지는 이미지의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함이지요. '바람의 뼈'는 알바 노톤의 음악처럼 기괴한 소음들로 가득 차 있는 세계며, '소리의 뼈'는 저토록 차분하고, 견고한 하나의 자세, '침묵'의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세계는 그토록 다르면서도, 서로 살을 마주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톤의 음악에서 노이즈들은 노이즈의 공백, 즉 '침묵'이 없이는 기능할 수 없고, 케이지의 곡에서 침묵은 연주홀을 간간히 스치고 지나가는 여주자와 관객들의 소음이 없이는 인지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두 세계는 결코 저 멀리 세계 자체 너머를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세계와 종잡을 수 없는 영혼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전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소리는 침묵이라는 단단한 뼈의 피부
피부는 뼈의 울림을 전달하는 소리통


뭐랄까, 저는 이쯤 해서 다른 예술 작품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아마 이 작품이 '바람의 뼈'라는 농밀한 단어를 '느끼도록' 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스위스의 키네틱 아티스트인 장 팅겔리(Jean Tinguely, 1925-1991)입니다. 



이 영상은 스위스 바젤에 있는 '장 팅글리 박물관'을 녹화한 것인데요, 소음과 침묵 그리고 '뼈'들이 어우러진 그로테스크한 세계의 언저리 같지 않나요? 저는 앞서의 음악들과 이 팅글리 박물관으로부터 '바람의 뼈'가 건네주는 다른 세상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마주친 감미로운 음악에서부터 아방가르드 예술에 이르기까지 '바람의 뼈'라는 말씨앗은 어떤 비범한 빛을 발하며 흩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거나, 느낄 겨를도 없이 지나치는, 그렇지만 우리의 내밀한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이 '바람의 뼈' 말고도 아주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고원한 철학이 아니라,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이 세상의 언어이자 이미지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또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 그것을 아예 인지조차 못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 번 실험해 보시지요. 우리 주위를 감싸고도는 저 침묵의 깊이와 소음의 광활함을 느껴 보세요. 그 안에서 우리의 실존 자체가 앙상한 뼈처럼 서 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 '바람의 뼈'라는 말씨앗은 자라면 자랄수록 더 야위어져서 종내는 바람 속으로 흩어지는 유골처럼 끝없이 유실되는 우리의 신체를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요?


Giacometti, <Three Men Walking >, 1942-9


 


<참고문헌>

윤의섭 지음, [묵시록], 민음사, 2015

기형도 지음,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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