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제주 민중항쟁을 추념하며
뭐 어쨌든 이야기를 하자면, 오늘은 1948년 제주 4.3 항쟁이 시작된 날이입니다. <효리네 민박>에서도 '너븐숭이 4.3 기념관'에 갔다 온 민박 손님들과 효리가 4.3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똑 부러지는 연예인인데, 역사의식까지 겸비한 것 같아 참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 추념식 진행을 맡았더군요.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4.3 제주 항쟁'에 대해 여러 매체들이 말하고 있어 많은 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교과서에도 기술되어 있지요. 그런데 제 또래의 분들은 이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자란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대학에 가서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역사들을 알아가면서 일종의 '내면적 충격'을 통해 역사의식을 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여기서 효리와 민박 손님들이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요, 그게 바로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2012, 오멸)입니다. 제주 4.3을 다룬 극영화인데,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글의 커버로 쓴 사진이 바로 이 영화 포스터 일부입니다.
이 영화로 오멸 감독은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의 유수한 영화제에 초청받았지요. 그리고 최고의 독립영화상인 '선댄스 영화제' 월드 시네마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프랑스의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에서도 황금수레바퀴상(경쟁부문 대상)을 받았습니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시민평론가상, 무비콜라주상, 아시아영화기구상을 휩쓸었습니다. 그러니 제주 4.3 항쟁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봐야 할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슬> 이전에 4.3을 다룬 대중적인 프로그램은 두 개 정도가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들도 이 드라마 기억이 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총 36부라는 대작으로 제작되었지요. 바로 <여명의 눈동자>입니다.
그리고 MBC에서 1999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 회로 '제주 4.3 사건'을 다룬 것이 있습니다. 이 르포를 보고 많은 분들이 충격을 받았고, 저도 당시에 화면으로 참상을 접하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자료들 외에 <4.3 평화재단>에 들어가면 더 많은 자료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사이트에 게재된 '4.3 사건 일지' 중 일부를 보도록 하지요. 전체 한글 파일은 제가 파일 첨부해 놓겠습니다.
객관적인 자료들 외에 제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대학 1학년 때 줄을 쳐가면서 읽었던 '다쓰현'([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박세길 지음)을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책을 '다현사'라고도 하더군요. 어쨌든...
제가 한국 현대사에 입문한 책이기도 하지요. 아마 다른 많은 분들도 이 책을 아실 겁니다. 워낙 유명해서요. 못 보신 분들은 가까운 도서관에서 빌려 보시길 권합니다. 이 책 서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4.3 제주항쟁은 가혹한 미군정의 학정과 그것의 영속화를 의미하는 단선단정의 추진이라는 상황 하에서 유일한 최후의 선택으로서 감행되어졌다. 다시 말해서 학정의 노예로 전락되느냐, 아니면 스스로 무기를 들고 싸우느냐 하는 절박한 상황 하에서 남달리 의지가 굳은 제주 민중은 기꺼이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지금 보니, 문장이 쏙 들어오지는 않네요. 하긴 오래된 책이니까요. 그래도 이 책이 견결하게 '민중사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민중사관의 기본 전제는 '민중의 자발성'이지요.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지배사관'(혹은 '왕조사관')의 기본 전제는 '민중의 수동성' 더 나아가 '민중의 무지몽매함'이에요. 전자의 입장에 선 학자들이 혁명적 상황을 분석할 때 반드시 민초들의 하부구조, 즉 경제활동과 당대의 사회운동이라는 기저의 움직임에 집중하는데 반해, 후자의 입장에 선 학자들은 당시의 지배계급의 정치역학이나 정치공학 또는 어떤 한 사람이나 여러 지도자(들)의 결단 따위를 중요시 하지요. 이 논쟁지점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에요. 중요한 역사적 사안 마다마다에서 이 입장들은 부딪힙니다.
저는 민중사관을 옹호합니다. 왜냐하면 지배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 그렇게 무지몽매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청맹과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마치 자신들은 뭔가 다른 족속들 인양 이론적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엘리트주의가 너무 훤히 들여다 보여서 역겨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 더 문제는 이런 관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점입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처럼 보여서 안쓰럽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배사관과 민중사관을 대조하면서 전자를 우익의 사관, 후자를 좌익의 사관으로 재단하는 것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좌우익으로 나누는 진영논리는 민중사관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민중사관은 역사에서 단 하나의 '실체'(더 적확하게는 동적 실체), 즉 민중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지배계급도 그 실체에서부터 파생되는 것이지 그것과 대립되는 다른 '실체'가 아닌 것이지요. 민중사관은 철학적으로 말해서 '일원론'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어떤 좌와 우가 있을 수 없지요. 그것은 역사의 실증성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이에 반해 지배사관은 '지도층' 또는 '지배계급'이라는 허수를 민중과 대립되는, 또는 지배하는 또 하나의 '실체'로 상정합니다. 이는 '이원론'입니다. 이 관점은 두 실체 간의 모순, 대립을 민중의 실체성(주체성) 보다 더 상위의 운동으로 놓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추상적이며, 관념적으로 흐릅니다.
제 입장에서 볼 때 4.3을 지배사관으로 재단하는 것은 당시 학살당하고, 불가피하게(살기 위해) 게릴라가 되었던 사람들의 영령을 욕보이는 짓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각에서 제기하는 '남로당' 음모론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당시 제주도에 남로당 제주도당이 있었지만, 그 조직의 연원은 해방 후 자발적으로 결성된 '인민위원회'에 뿌리를 둔 풀뿌리 모임입니다. 게다가 제주도는 섬이기도 했기 때문에 남로당 인자들이 이들을 지배하고, 견인하고, 부추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당시의 제주 민중들을 그저 수동적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물론 남로당은 4.3 항쟁이 무장투쟁으로 전개되는데, 조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로당은 민중들 안으로 형해화되어 그 조직적 형태를 간직하지 못하게 됩니다. 남로당 조직이 4.3의 주축이었다는 사고는 지배사관의 단순 무지한 두뇌에서나 가능하지요.
이런 견해를 피력한 것이 바로 조남현의 [제주 4.3 사건의 쟁점과 진실](돌담, 1993)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도 꽤 오래되었지만, 지배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4.3을 보는 방식은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한 번 들어 보도록 하지요. 조남현은 이렇게 말합니다(이 책도 제 서가에 꽂혀 있지요).
첫째,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 그 정치적 목표의 실현, 곧 '인공'[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일으킨 무장폭동, 또는 반란이었다. 그것은 소영웅주의와 극좌 모험주의의 산물이었다.
둘째, 따라서 그 주체는 남로당이었고 민중은 남로당이 정치적 이해에 의해 동원되고 내몰린 대상적 존재였을 뿐이다. 또 민중은 폭도 또는 반란군과 토벌대 사이에서 수난을 당하고 희생된 희생자들이었을 뿐이다.
셋째, 남로당은 당시 전국적 봉기와 북한의 남침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또한 경비대 및 미 주둔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에서 무장투쟁의 성공을 낙관하고 있었다.
조남현의 관점은 너무 명확하다 못해, 단순하기까지 합니다. 이러저러한 문헌들을 들어 주장을 뒷받침하지만, 그 자료들은 편향되어 있으며, 관점이 자료들의 해석에 부단히 개입하면서 자료의 실증적 언어와 주장의 가치판단 간에 비약이 심합니다. 우선 인용문에서는 남로당과 민중의 수직관계라는 전제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전제의 필연적 결과로 민중들은 '동원되고 내몰리'는 대상으로 격하되지요. 결과적으로 남로당이라는 거대하고 탁월한 조직이 무수한 민중들을 자신들의 '소영웅주의와 극좌 모험주의'의 제물로 썼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되뇌는 정치인이 수두룩합니다. 대표적으로 오늘 이런 말을 하신 분이 계시네요.
하지만 앞서도 말했지만 혁명적 상황에서는 어떤 지도층도 민중들의 움직임보다 빨리 나아가서 그들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늦게 도착하는 것이 그들이지요. 레닌조차 1917 혁명이 발발하고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 매우 놀라, 황급히 망명지로부터 돌아왔다고 하지요. 어떤 지도층, 어떤 전위도 민중의 예측불허의 움직임을 앞서갈 수 없습니다. 이는 그들이 특별히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그들도 민중의 한 일원이라는 당연한 사실로부터 나오는 결론이지요. 그들이 영웅이 된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민중이 그들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는 '민중항쟁론'에 대해 "'민중적 관점'을 당위로 하여 사건을 이해하려는 데서 나온, 따라서 다분히 작위적이고 추상적인 결론에 다름 아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비난은 고스란히 '조'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는 '지배계급의 관점'을 당위로 하여, 남로당의 위상을 과포장하면서 4.3을 이해함으로써 작위적이고 추상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이지요.
'조'의 관점은 그가 문헌이나 논조에서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책, [남로당 연구](김남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제가 이 책은 상당히 분개하면서 본 기억이 납니다. 아니, 그러면 안 보면 안 되었냐고 하시겠지만, 제가 이 책을 볼 당시에는 문헌들이 그리 많지 않았음을 알아주시길.
암튼 책에 보니 이렇게 된 부분들이 많네요.
확실히 읽으면서 제가 화가 많이 났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무리 입장이 다른 책이라 해도 저렇게 난도질(?)을 하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김남식의 이 책은 다소 묘한 구석이 있어요. 왜냐하면 제주 4.3을 저렇게 묘사하면서도, 이상하게도 논조가 지배사관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뭔가 할 말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책이 처음 나온 때가 1984년, 전두환이가 집권할 때에요.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아무튼 이 책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4.3의 역사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지요. 4.3 항쟁은 해방 이후 제주도가 처해 있던 상황과 '섬'이라는 특수한 지역성과 역사성을 고려할 때 전반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제주도는 일제 시기 동안에도 갖은 수탈을 견디다 못한 반도의 민중들이 이주한 인구가 절반 정도에 육박했습니다. 이들 이주민들로 인해 인구는 두 배 가까이 늘었는데도, 생산능력은 줄어들어 물가상승이 엄청났습니다. 분단이라는 상황은 이 같은 경제적 궁핍을 더욱 극대화했습니다. 예컨대 북에서 생산되어 공급되던 탄소(석탄)가 부족해서 고기잡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요. 생업이 불가능해진 겁니다. 연료가 부족하니 발전소도 정지되고 맙니다. 여기에다가 제주가 강제로 '도'로 승격됨으로써 세금 부담도 가중되었습니다.
제주 민중들은 곤궁함을 해결하기 위해 '인민위원회'(당시의 지방자치기구)를 결성하게 됩니다. 위원회는 우선 일본인 재산을 몰수하고, 이를 무상 분배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건설하고, [제주신보]라는 신문도 간행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해방 후 약 2개월이라는 단시일에 이룬 성과였지요. 하지만 이런 자치의 기운은 미군정이 주둔하게 된 1945년 9월 28일 이후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미군정은 한반도를 통치하는 기본원칙으로 '민족의 주체성'이라 아니라 '효율성'을 앞세우게 되지요. 즉 행정과 사법, 군사 모든 부문에서 자신들이 다루기 쉬운 인자들을 활용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과거 일제 부역자들이거나 새로운 친미주의자들로서 민중들의 뜻과는 반대인 인사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1946년 1월 15일을 기하여 그동안 인민위원회가 시행한 적산 무상분배를 폐지하고, 그 재산을 다시 몰수하여 미군정과 그 수하들 손아귀에 쥐어주게 됩니다. 당시 미국인인 마크 게인의 [일본 일기]에는 이러한 재수탈을 바라보는 양심적인 미국인의 심정이 쓰여 있습니다.
나는 번뇌와 부끄러움으로 인간이 기본적 권리를 탄압하는 데 있어서 단연 으뜸간다 할 수 있을 야만적인 경찰국가가 우리 국가와 함께 탄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왔다.
이렇게 경제적인 질서를 반동적으로 바꿔놓으면서, 다른 쪽에서는 민중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탄압이 시작되고 있었는데요, 그 시발점이 바로 1945년 12월에 발발한 '한라단 사건'입니다. '한라단'은 제주도의 친일파들이 결성한 테러조직이었습니다. 이들이 12월 12일 밤 도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습격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이에 분개한 일군의 젊은이들에 의해 다음날 시위가 발생합니다. 이에 시민들이 대거 합류했고, 시위대의 수가 순식간에 불어납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민중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라단은 다시 인민위원회를 습격합니다. 이에 자치 보안대가 이들을 힘으로 내쫓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다툼에 미군정과 경찰이 개입하면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됩니다. 이들은 지프차에 나눠 타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인민위원회를 포위했고 사람들에게 곤봉을 휘둘렀지요. 이때부터 미군정은 제주 민중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후 1947년 3월 1일 3.1 운동 기념 집회에서의 유혈진압(이 사건은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에 치여 사망하면서 발발합니다), 이어진 동맹휴업과 노동자 파업, '서북청년단'과 같은 관제 폭력집단의 동원으로 이어지면서, 대립 상황은 거의 '내전'을 방불케 하는 지경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1948년으로 접어들면서 반도의 정치상황이 단선단정에 대한 반대 투쟁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제주도민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단독선거는 그들에 대한 미군정과 이승만 일파의 탄압이 용인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지요. 왜냐하면 남한 안에서만큼은 저들의 권력이 더욱 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2월 중순 단선단정 반대 시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민중들은 거의 처음으로 경찰들을 제대로 공격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의 경찰들도 도민들을 보이는 족족 잡아 빨갱이로 몰고, 고문하고 학살하게 되었습니다. 제주도 곳곳에서 끌려가고, 실종되고, 시체로 발견되는 형제, 자매, 이웃들이 속출하게 됩니다. [다쓰현]에서 박세길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정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점점 높아지고 그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드디어 제주 민중은 유일한 최후의 선택으로서 무장봉기를 위한 준비 작업에 하나같이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핵심적인 유격대 조직이 행정의 말단 지구까지 만들어지고 민중의 저항 자위 투쟁을 더욱 강화하는 조치가 주도면밀하게 취해졌다. (...) 확실히 민중들은 서로 단합하여 유격대의 손발이 되고 눈이 되고 귀가 되는 일에 기꺼이 호응하여 나섰다.
드디어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한 발의 총성이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집니다. 이 총성을 신호탄으로 약 3000명의 무장, 비무장 대원들은 제주 각지의 산봉우리에 봉기의 봉화를 올립니다. 이것은 4.3의 무장투쟁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본격적인 유격전이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에 경찰과 군대는 제주도를 폐쇄하고, 토벌대의 인원을 늘리면서 학살의 잔혹성을 더욱 높이게 되지요. 이후 진행된 민중학살의 잔혹성은 다음의 글에서 잘 드러납니다.
유격대에 의해 참패를 겪은 토벌대는 5월 19일, 한림면 상명리를 봉쇄하고 부락민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한 후 마구잡이로 몽둥이질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중의 22명을 '빨갱이 공범자'로 몰아 지서로 연행하던 도중 음부동의 어느 보리밭에 일렬로 나란히 세워 사살한 후 그대로 들판에 내버렸다.
1948년 7월 5일, 애월 주둔 토벌대는 주민의 대부분을 몰살시키기 위해 학교에 시국강연회가 있다고 속이고 주변 부락민 약 1천여 명을 총검으로 위협하여 모아 왔다. 그들은 욕설과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면서, 무자비한 집단 고문을 가한 후, 그중에서 80여 명의 주민을 유격대 혹은 그 협력자로 선별해 내어 군용 트럭에 태워 제주 비행장으로 끌고 가 일제 사격을 가하여 죽였다. 또 김두봉의 부인을 포함한 17명은 산지 시장에서 공개 총살된 후 바다에 버려졌고, 김기우를 비롯한 수 명은 몸에 돌추를 달아 바다에 빠뜨려졌다고 한다.
표선면 출신의 박남연이라 불리는 경찰이 마을의 살벌한 악덕 보스와 한패가 되어 표선, 가시, 성읍 토산 지방은 '유격대의 소굴이다'라고 날조하고 토벌대에 선도역으로 되어 토산 지방을 강력히 탄압하고 주민을 손 닿는 대로 체포하여 잔인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 악랄한 고문을 참지 못하고 1명의 청년이 감시의 눈을 피해 민가의 옥상에 숨어 올랐다. 그는 추적해 온 경찰을 지붕에서 찔러 떨어뜨리고 지붕이 닿는 고해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주인이 죽창을 가지고, 즉시 여기를 떠나지 않으면 토벌대에 통보한다고 위협했다. 그것에 울컥한 청년은 창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도주했다. 그것이 부락민 대량학살의 동기라고 한다. 그 날 100여 명 이상이 토산리의 청장년은 염주처럼 꿰어져 표선면의 모래 구덩이로 연행되었다. 1열, 2열, 3열로 나란히 세워지고 기관총과 소총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마치 밭에 빈틈없이 자란 잡초가 한 번에 쓰러뜨려지는 것처럼 쓰러져 갔다. 모래 구덩이를 뒤덮은 피의 흐름, 총성에 뒤섞여 절규하는 어린애와 부인들의 소리, 주 도면밀히 계획된 학살에 마을 사람들은 '앗'하는 사이에 몰살되었다. 그리고 본보기를 위해 거기에 널려졌다.
그리고 한 자료는 그 학살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8만 6천 명 살상, 1만 5천 호 방화
이것은 '초토화 작전'이라고 불려졌습니다. 1949년 6월 7일 마지막 유격대장 이덕구가 사살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창으로 난도질당하기까지 제주도 전역은 그야말로 홀로코스트였지요.
이제 숨을 좀 고르고 마지막으로 노래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제주 4.3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수록)입니다.
노래 영상 아래에는 [산, 들, 바다의 노래-제주 4.3 헌정앨범]에 수록된 요조의 노래('그리운 옛날')가 있습니다. 이 앨범에는 '3호선 버터플라이', '사우스카니발', '백현진', '방준석', '갤럭시 익스프레스'와 '요조', 힙합 그룹 '가리온' 등의 뮤지션들이 참여했습니다. 이 제목으로 2014년에 mbc에서 다큐가 제작되기도 했지요.
효리의 또릿또릿한 말이 다시 떠오르는군요.
사람들은 제주도를 그저 관광지로만 알고 있지.
하지만 사실 여긴 아픔이 많은 땅이야
잊지 말아야겠지요?
<참고문헌>
박세길 지음,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 돌베개, 1988
조남현 지음, [제주 4.3 사건의 쟁점과 진실], 돌담, 1993
김남식 지음, [남로당 연구 1], 돌베개,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