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사#3 코뮌도시, 1980 광주
여러분들의 관심과 보살핌 덕이지요. 감사합니다.
올해는 유독 한 분의 안부(?)가 광주는 궁금합니다. 연희동 그분 말입니다. 자서전도 내시고 바쁘신가 봐요?
http://v.media.daum.net/v/20180515131211979
'본인은 ~ 아무 상관도 없어~ 나만 갖고 그래~'
이렇게 말하실 것 같군요. 하지만 어쩌지요? 너님께서 저지른 만행이 앞으로도 쭈욱~ 역사책에 실릴 텐데 말입니다.
특히 고마운 영화 관계자 분들께서 1999, 2007, 2012년, 그리고 작년 2017년에도 잊지 않으시고 그때의 슬픔과 감동을 매번 전해주고 계시지요.
올해에도 저에 대한 영화가 개봉되더군요. 많이들 보셨으면 좋겠어요. 이 영화입니다.
*광주 518 간략 일지
5월 18일 전남대 학생들과 계엄군 충돌. 시민, 학생 다수 부상.
5월 19일 시위와 충돌 계속됨.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최초의 실탄 사격).
5월 20일 고등학생들 시위 참여. 계엄군 실탄 분배.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사망. 시민 수십 명 부상.
5월 21일 시민군 무장. 시가전 시작.
5월 22일 광주 고립.
5월 23일 대책위 명령에 따라 무장해제. 계엄군의 살인 계속됨.
5월 24일 시민 학살 계속.
5월 25일~26일 산발적 시위. 시내전화 두절.
5월 27일 화요일 02시 00분: 계엄군 광주 재진입.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 시가전.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07시 00분: 공수부대 도청 장악.
당시를 생각하면 다시 제 몸의 이곳저곳이 아파옵니다. 그렇지만 제가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이 상처들을 알려야겠기에 이렇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 또 나쁜 놈들이 저를 모욕하고 상처를 후벼 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특히 이 정신 나간 분은 언제 패륜을 그만둘지 참 난망합니다.
http://v.media.daum.net/v/20180515052704487
그럼 여러분 제 말에 잠시 귀 기울여 주세요. 제 말들은 그저 그런 개념이 아니라, 살이 있고 피가 돈답니다.
제가 겪은 일들을 여러 가지로 이름 붙이지요. 최근에는 그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말은 제가 겪은 사건들에 비해 너무 나긋나긋합니다. 제가 어떤 일을 겪었냐고요? 한 번 보셔요. 제 상처와 죽음들을. 놀라진 마시고요.
이것은 '민주화 운동'이기도 하지만 차라리 '살육'이 더 맞습니다. 비무장의 시민들을 항해 발포하고 대검으로 찔렀으니까요. 시민들이 무장하기 시작한 것은 살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시민군이 조직되고 계엄군과 시가전을 전개한 그 시간부터 이 사건은 바로 '혁명'이라고 불러야 마땅해요.
그런데 왜 여러분들은 저를 '광주혁명'이라고 부르시지 못하나요? 최근의 촛불시위도 여러분들은 '촛불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기간이 짧아서? 실패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제 신체는 그때 짧지만 아주 강렬하게 타올랐고, 패배했지만 실패하진 않았거든요. 우린 역사 안에서 성공한 혁명을 했어요. 반면 계엄군과 전두환이는 그때 승리했지만 역사 안에서 영원히 실패한 겁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혁명이라는 것이 역사 안에서 결코 단발마적인 사건으로 나타났다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인간이 기억을 갖고 있으며, 학습 능력이 있고, 그런 인간의 연합과 그 활동이 사회며 국가고 역사라면 혁명은 하나의 거대한 기억이며, 역사 안에서 늘 ‘효과’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효과’라는 측면이 있기에 혁명이 다른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 중차대한 사건으로 다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 이름은 민주화운동이기도 하지만 올바르게 쓴다면 '혁명'이라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겪은 사건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정도로 그 파급력이 엄청났습니다. 그리고 이후 한국 현대사의 ‘곁에’ 늘 따라다니는 것이었지요. 마치 유령처럼 말이에요. 이 유령의 힘은 그 시대를 살아냈던 사람들 뿐 아니라, 이후의 세대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광주’라는 제 이름은 그래서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징’이지요. 그것도 이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전체를 꽉 채우며 진동하는 그런 상징 말입니다.
제 이름은 또 부당한 국가권력을 떨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이기도 해요. 그리고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끊임없이 재규정하면서 체제 자체를 꾸준히 변화시키는 추동력이기도 하지요. 저는 절대 과거의 흘러간 그렇고 그런 일이 아니라, 현재에 다른 신체를 입고 나타납니다. 그 신체는 바로 저항의 신체, 이를테면 억압받고 억눌린 모든 소수자들입니다.
제가 유린당하고 있던 당시 언론들은 '폭동'이라고 보도하며 진실을 가렸지요. 용기 있는 몇 분이 있어서 사실이 알려졌는데 그런 기록 중 하나가 다음 글입니다.
5월은 끝난 게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광주의 5월은 비극적 참사가 아니라 (...) 출발점이며, 우리는 그 5월을 기념비나 신화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 새로운 행동의 실천을 뿌리내려야 하며, 그런 뒤에야 죽은 이들의 피에 값하게 될 것이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황석영 기록 지음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머리말 중).
여기서는 미래세대의 여러분들이 제 이름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외침은 실제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후의 민주화 과정과 최근의 촛불 혁명은 이 사건이 명령하는 의미를 말 그대로 미래세대가 ‘살아 낸’ 것이 아닐까요? 제 이름이 ‘혁명’으로 불려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지요.
1980년 제 신체 위에서 이루어낸 사람들의 모습들입니다. 그건 정말 슬프고도 감동스러운 모습이었어요. 전통적으로 이 모습들을 사람들은 ‘해방구’라고 불렀는데, 최근에는 이를 ‘공동체’ 또는 ‘코뮌’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혁명적 상황이 거기 참여하는 개별적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518 영화에서도 이 힘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지요. 이 힘은 일차적으로 ‘공감’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이 공감은 운동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민주주의’라는 이념에서 전적으로 나온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것은 차라리 일차적으로 국가폭력이 야기하는 참혹한 상황, 타자들의 비명소리, 갑작스러운 죽음들에서 나온다고 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함께 겪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최초의 공감은 처음부터 ‘나가서 싸우자’라는 식의 투쟁의 결단을 불러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일단 ‘공포’며 ‘움츠림’, ‘비겁함’ 같은 것을 불러오겠지요. 그 봄날에도 그랬어요. 사람들은 처음에는 모두 집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도 못하고 공포에 떨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미약하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있습니다. 개개인을 수동적으로 만들 때조차, 타자와의 최소한의 이 '수동적인' 감정적 기반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비탄에 빠진 자들과 함께 우는 그 힘이 밖으로 뛰쳐나오게 하는 최초의 정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연대는 이렇게 ‘수동성’에 토대를 둡니다. 그리고서 이 연대는 점점 더 큰 무리를 이루면서 ‘공명’과 ‘전염’ 과정을 통해 능동적인 투쟁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지요. 가까운 러시아 혁명의 예를 들어 봅시다. 황제의 군대에 맞서 가족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민중들의 위축된 정서가 40만의 노동자 연대를 만났을 때 혁명의 힘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광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5월 21일 ‘발포’ 이후 27일 도청이 함락되기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연대의 힘은 윤리적인 탁월함도 발휘하게 만들었지요. 계엄군이 외곽으로 물러난 일주일 동안 시민들은 ‘코뮌’ 즉 지배권력 없는 ‘공동체’로서 자기 자신들의 가치와 도덕률을 창조했습니다. 어떤 절도도, 상호 폭력도, 방화도 없는 평화로운 상태가 이 기간 동안 지속된 것이지요.
오히려 민중들 상호 간에는 대가 없는 증여와 봉사가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때의 공동체는 허약한 개인을 넘어서는 것이었어요. 최초의 공포와 슬픔을 극복하고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까지 이들에게 어떤 변화인지 분명치 않지만, 어떤 새로운 삶, 새로운 체제가 감성과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변화시킨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새로운 것들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 아니라, 광주 시민들 자신이 만든 것이에요. 공동체를 스스로 구성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공동체와 공명하며 구성하고, 마침내 집단과 타자와 자신이 식별 불가능한 하나의 신체가 된 것입니다.
사실상 혁명 안에서 개인은 무력하지요. 그리고 여기에 어떤 ‘지도부’가 있어서 결정적으로 작용하지도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때 지도부의 일부는 이 당시 ‘수습대책위’였는데, 이에 반대하고 도청에 남은 투사들은 끝까지 계엄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투사’나 ‘전사’라는 이름은 대책위의 인물들이 아니라 여기서 산화해간 사람들에게 걸맞은 명칭이 된 것이지요.
그러면 도대체 이때의 이 분들은 뭐라고 해야 할까요? 개인으로서의 이 분들은 모두 그저 학생, 가장, 목사, 버스 기사, 택시 운전사, 잡역부 등등 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혁명 가운데 서서히 드러나다가 갑자기 산화하거나, 그 이후로도 우리 역사에 남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주체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주체’일까요?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광주의 혁명적 주체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집단-자아-타자가 한데 어우러져 끊임없이 서로 감응함으로써 유동하는 그런 '과정'일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거기 어디 정해진 주체가 있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그동안의 자신의 정체성을 접어두고 새로운 어떤 것이 되어 세상을 바꾸려고 나선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촛불 혁명 때에도 그랬지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생업을 잠시 미루고 그것과는 다른 과정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저는 지난 촛불 혁명도 바로 제가 겪은 사건의 반복이라고 생각합니다. 518의 다른 버전이 촛불 혁명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미래에도 권력이 타락하고, 사람들을 괴롭히면 다른 방식으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이래서 부패한 권력은 늘 민중들을 두려워하는 것이겠지요.
전두환 씨, 자신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늙은 신체가 추해 보입니다. 좀 측은하기도 하군요.
하지만 보세요. 나는 이렇게 늘 되살아나 젊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요.
이번에도 재판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 아무쪼록 '내란죄'와 '반란수괴죄'에 합당한 형량을 언도받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