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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Jun 29. 2018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중에 녹아 사라진다

- 희귀종시인강목#2 송승환 편


"미래파 시인 그룹에 속하지 않으셨나요?"

"무슨 파요? ㅎㅎ 저는 그냥 송승환 파입니다."

어느 토론회에서 노마가 던진 질문에 시인이 대답했다.

우문에 현답이다.




"바라본다", "들린다", "두드린다"


이 세 단어는 시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집 맨 앞 페이지 자서와 맨 뒷페이지 에필로그를 연달아 장식하고 있다.


마치 이제 전개될 시와 더불어 다음 시집을 예고하듯이.



시인은 자신의 언어가 어떤 운명을 겪을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한 시인의 언어가 자신의 나침반을 가지고 일생의 궤적을 그려간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다.  대개 시인이라는 종족은 다분히 낭만적 천재성에 사로잡혀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긴 그런 류는 하급에 속한다.


송승환은 그렇지 않다. 언어가 정확히 '지성'의 엔텔레케이아에 상응한다고나 할까?



송승환은 감정이 최저점을 통과하고, 지성이 비등점에서 찰랑댈 때, 시어를 조탁해 낸다. 마치 얼음의 도가니에서 벼려내는 고드름과 같이.


"제 첫 시집은 정확하게 45편이 45페이지에 걸쳐 쓰여 있습니다."

"그것은 계산된 것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같은 토론회에서 노마와 시인이 주고받은 다른 대화다.

송승환은 이런 시인이다.


그리고 천기누설도 한다.

"제 다음 시집은 15편에 100페이지를 맞췄습니다."

놀라울 뿐. 송승환은 '수'를 가지고 천지를 창조한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처럼 한 권의 시집을 바라보는 것 같다.


평론가 황현산도 노마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첫 시집 [드라이아이스]에 대한 평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감정이 가장 낮게 가라앉은 순간을 관찰과 생각의 표준으로 삼는다."


첫 시집은 이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다.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그는 정말 '바라본다', 철저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산과 산 사이에는 골이 흐른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골과 왼쪽으로 돌아가는 산이 만나는 곳에서 눈부신 햇살도 죄어들기 시작한다 안으로 파고드는 나선은 새들을 몰고 와 쇳소리를 낸다 그 속에 기름 묻은 저녁이 떠오른다 한 바퀴 돌 때마다 그만큼 깊어지는 어둠 한번 맞물리면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떠올랐던 별빛마저 쇳가루로 떨어진다 얼어붙어 녹슬어간다

봄날 빈 구멍에 새로운 산골이 차 흐른다

- '나사', [드라이아이스] 중 전문



사물에 대한 응시, 그리고 그 응시로부터 흘러나오는 잡티 하나 없는 언어들. 순수한 존재성이라고 해야 할까? '나사'라는 시시한 사물이 어쩌면 과분한 존재성을 현시(presence)하면서 독자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노마는 송승환의 첫 번째 시집의 편편이 등장하는 이 시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 진다.


응시와 현시의 시학

 



이런 송승환 시인과 같은 종족이 프랑스에 있다.



밤은 때때로 이상한 나무를 되살아나게 해 그 나무의 빛이 어두움으로 가득 찬 방들을 분해한다. 그 나무의 금 잎은 새까만 육각에 의해 흰 대리석 기둥의 파인 곳에 태연히 붙어있다.
초라한 나비들은 숲을 흐리게 비추는 높이 뜬 달보다는 이것을 선호하여 공략한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이내 불에 타고 지쳐 모두가 혼미에 가까운 광란 상태에서 전율한다.
그렇지만 양초는 첫 연기의 치솟음으로 책 위에 빛의 반짝임을 통해 독자에게 용기를 주고- 이윽고 받침대로 기울어져 자신의 자양분 속으로 녹아내린다.

- 프랑시스 퐁주, '양초',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 중 전문


다시 토론회에서 오갔던 대화로 돌아와 보자.


"저는 송승환 선생님의 시를 처음 보고 프랑시스 퐁주를 떠올렸어요."

"네 저도 그 시인을 알지요."

"그리고 김춘수 시인도 말이지요."

"헐~ 선생님 저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계시네요. ㅎㅎ"


(노마의 촉이 맞아떨어진 것 같았다. 하긴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험험)

Francis Ponge(1899~1988)

'사물의 편'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프랑시스 퐁주는 송승환과 매우 가깝다. 둘 모두 시의 언표주체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응시만이 남아 있다. 마치 고양이 없는 고양이 미소처럼. 그리고 언표행위주체는 자의식을 잃고 대상과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 일치에는 어떤 열락도 신비도 없다. 그저 현시뿐.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의 현존성을 비끌어 매고 그 안에서 어떤 '세계의 음성'이 소리치게 만든다.


철학자인 노마가 보기에 송승환의 '응시'는 근대적 '시선', 즉 데카르트의 자의식 가득한 코기토를 멀찌감치 놓아둔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더 뒤로, 뒤로, 플로티노스에게로 향해 간다. 다시 희한한 것은 플로티노스에게 있었던 '일자와의 합일'에서 오는 신비감은 완전히 탈각된다는 점이다. 신비체험 없는 플로티노스, 자의식 없는 데카르트.


시인에게 부여되는 최고의 찬사란 '신성한 괴물'이 아닐까? 송승환은 멀쩡한 철학자들이 사유에 내기를 걸 때, 그 옆에서 다른 주사위를 던진다. 그 철학자들의 '살'이 뒤섞인 괴물의 모습을 하고서 말이다.

Francis Bacon Painting



마침내 시인은 그 사물의 현존성 마저 기화되어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 오랜 면벽 끝에 오는 선승의 환희랄까? 벽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다시 내린 눈으로

바퀴 자국이 지워졌다

찌그러진 자동차가 견인되었다

앰뷸런스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

눈물 없이 울던 그녀의 뒷모습

새벽 안개와 함께 지상에서 걷혔다

불을 품은 뜨거운 얼음에 데인 적이 있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중에 녹아 사라진다

하늘 한가운데 구름이 흘러간다

- '드라이아이스', [드라이아이스] 중 전문

 

"견고한..." 운운한 것은 시인도 밝히고 있다시피 맑스의 유명한 말이다. 맑스의 맥락에서 저 명제는 모든 것을 추상적 노동과 상품으로 치환해 버리는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의미했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사라지는 것은 상품일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 또는 그것의 사건성(eventuality)이다.


이 시는 단순하게 말하면, '교통사고'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뿐인가? 시인은 이 사고에서 존재 전체가 기화되어 날아가는 체험을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생명이 사라진 자리에 그 흔적을 드러내던 사물들이 사라져 간다. 시인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송승환에게 이런 질문은 다시 우문이다. 그는 다만 사건이 드라이아이스처럼 기화되어 날아갈 때 거기 존재해 있었을 뿐, 사건 안에서 또는 사건 밖에서.




두 번째 시집을 보자.  [클로로포름](문학과 지성사, 2011). 첫 시집은 2007년. 그동안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시인은 안녕한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노마는 두 번째 시집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시인 혹시 죽어 버리지나 않을까?"


왜냐하면 첫 시집에서 그나마 숨줄을 잡고 있던 언표행위주체가 여기서는 거의 아사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아간다

돌아서는 들판의 길목마다 먼 곳

숲 속의 빈터

솟아오른 빛의 기둥

사물을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낱말은 마비되어 잠들어간다

내 입술에서 이름은 투명하게 타오른다

아름다움은 불리워지지 않고

깨어나지 않은 채 있는다

무화과나무와 감복숭아나무 사이 자동차가 지나간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다

안개는 맑고 비는 멈춘다

검은 옷 입은 여인이 걸어 나온다

- '클로로포름*', [클로로포름] 중 전문


시인은 더 이상 언표행위주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그에게 언어는 이제 사물을 들여다볼수록 마취되어 버리는 마비의 언어다. '사물이 편'이라는 프랑시스 퐁주의 제언이 송승환에게 와서 '언어의 마비'가 된다.


이 두 번째 시집과 첫 번째 시집 간에 5년의 시간이 흘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노마는 그 힌트를 송승환의 평론집에서 찾았다. 평론집 [측위의 감각]은 2010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난 여기서 또 한 번 이 시인의 얼음 같은, 아니 시의 표현을 빌자면 "불을 품은 얼음"같은 시심에 섬뜩함마저 느낀다. 첫 시집, 2007년 '여름', 두 번째 시집, 2011년 '여름', 그리고 평론집 2010년 '여름'이다. 심지어 시인이 토론회에서 말하길 세 번째 시집도 2018년 7월에 나온다고 했다. 이것도 '여름'이다. 불같이 더운 여름 날들.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얼음의 도가니에서 벼려내는 고드름')



다음 인용문들을 보자. 모두 [측위의 감각] 서문에 나오는 문자들이다.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 나는 그 시를 받아 적고 시인이 되었다.


이 말은 낯설지 않다. 송승환은 시를 쓰고자 바둥거리지 않는다. 언어가 오기를 기다리고 그것을 충실히 받아쓴다. 또는 사물이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그것을 언어로 조탁해 낸다.


그리고 그는 등단했다. 2003년에 '나사'로. 그전에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뭘 하고 있었을까? 여기 또 아주 낯익은 문자가 보인다.


나는 기다린다.


그는 기다린 것이다. 언어를 말이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첫 시집이 나오기 전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바라본다'라고 적은 첫 시집이 나왔고, 그때에도 그는 뭔가를 기다린 것 같다. '나는 기다린다'라고 쓴 대학노트가 그에게 있었고, 그 대학노트에 뭔가를 적었으며, 이제 평론집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초두에 제시했던 세 개의 상형문자, 아니 차라리 '낙인'과 같았던 예감의 상형문자가 수정되어야 한다.


기다린다. 바라본다. 기다린다. 들린다. 두드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다. 그리고 듣기 시작한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었을까? 그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그리하여 내가 매혹된 시의 언어는 빈 방의 세게에서 우러나오는 침묵의 언어. 고통을 참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신음의 언어. 나와 더불어 사물은 왜 그렇게 있는가 하고 묻는 언어. 더 나아가 살아 있음의 신비를 다시 일깨우는 감각의 언어. 일상을 관통하여 미지의 세계로 비상하는 언어. 그 모든 언어가 마지막에 도달하려는 아름다움의 언어. 세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 실패하는 언어. 무로 회귀하는 언어. 다시 빈 방에서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언어였다.


서문의 이 문장들은 그의 첫 시집부터 평론을 거쳐 두 번째 시집이 나오는 과정, 그리고 심지어 다음 시집의 내용이 어떠할 것인지까지 예고한다는 게 노마의 생각이다.


등단 이전부터 그에게 시어는 '침묵의 언어'였다. 언어 자체가 그 침묵을 참을 수 없기에, 언표주체는 고통스러웠다. 시인은 그래서 '신음'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는 '사물'에 눈을 돌리고 '바라보았다.' 사물들은 그를 '살아 있게' 만들었고, 감각을 일깨웠다.


그것은 일상적이지만 즉시 미지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어떤 현시의 언어를 선사했다. 그 언어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오직 그것은 '마지막'에서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 도달할 수 있을까? 아니다. 끝까지 밀고 나가더라도 실패할 것이다. "무로 회귀하는 언어" 아마 송승환은 세 번째 시집을 내고 난 뒤 다시 그의 '빈 방'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노마는 그것을 확신한다.


Yves Bonnefoi(1923~2016)

송승환 시인이 좋아하는 이브 본느프와의 시 제목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미완이 곧 절정이다.
L'imperfection est la cime


그런데 심각하다. 그는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무로 회귀하는 언어' 혹시 그것은 '마비된 언어'가 아닌가? 그가 '클로로포름*'에서 적은 대로 낱말이 마비되었고, 이것은 분명 그가 빈방에서 체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뭔가를 들었는가? 들었다. 그것도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와중에 말이다. 그것은 바로,


침묵



등단 이전부터 빈방에서 듣고자 한 그 언어. 시어가 마비되자 들린다.

(철학자인 노마는 이것을 고쳐 부른다. '블랑쇼적인 침묵' 송승환은 하이데거를 가볍게 뛰어넘고 블랑쇼로 달려간다)


그는 침묵을 듣는 중이다. 자, 이제 시집 [클로로포름]으로 돌아와 보자. 마비된 시어들과 침묵의 들끓음이 전개된다. 그것도 정확히 '클로로포름*' 이후의 페이지에서 말이다. '클로로포름*' 다음 '클로로포름', 다시 동명의 시 '클로로포름'. 그다음의 시들은 적을 수가 없다. 칼리그램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맨 위 왼쪽 부터 아래로 페이지 순이다(60~75쪽)


이 시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아니 어떻게 하면 해석의 언어를 넘어 시인의 '체험'에 도달할 것인가? 무기력해진다. 송승환의 시어는 의도적으로 '침묵'을 택함으로써, 그 침묵을 마주하는 평론의 언어마저 무색하게 만든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침묵의 견고함, 그 안에 들끓는 존재의 노이즈


물론 이 시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철저하게 기획되고 계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 나온 시어를 가리키기도 하고, 두 페이지를 함께 읽어야 이미지가 환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기획 너머에서 시인이 독자에게 건네는 '다른 언어'다. 일단 그것인 '침묵'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다음은? 존재의 음성이라는 것, 시인이 '들린다'라고 했던 것이 침묵 말고는 없는 것인가? 그것은 저 시들의 여백이 득달같이 전해주는 어떤 도발성에 비해서는 너무 딱딱하다.


저기 뭔가가 있다!


그것, 노이즈와 같은 존재의 수런거림, 아직 시어로 조탁되지 않았지만 지지직거리며 백지를 뚫고 올라올 것 같은 사건들 말이다.


감히 예측하건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저 득달같이 달려드는 존재의 함성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가 두드렸다.


기다려 보자.

송승환 시인(1971~   )






<참고문헌>

송승환 지음, [드라이아이스], 문학동네, 2007

송승환 지음, [클로로포름], 문학과지성사, 2011

송승환 지음, [측위의 감각], 서정시학,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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