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원문 주소: https://www.academia.edu/32412247/Speculative_Fabulation_A_Median_Voice_to_Care_for_the_Dead
내가 요즘 따라가고 있는 주요한 실마리는 사변적 우화라는 것인데, 이것은 SF 실천의 한 종류라고 하겠다. 그리고 보다 특별하게 나는 쑬루씬(Chthulucene)에 대해, 즉 어떤 두터운 현재에 대해 쓰고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사변적 우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변적 우화의탐구를 이끄는 두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
우선 사변적 우화는 『불편함과 함께 있기』의 어슐라 르귄과 옥타비아 버틀러에 대한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인 ‘카밀 이야기’를 비롯한 모든 곳에 있다. 그러나 사변적 우화는 단지 어떤 주제나 어떤 종류의 글쓰기도 아니다. 이 책에서는 “살고 죽은 것 안에서 그의 일이 이야기하기(storying), 세계(상)화(worlding)하기이기를 그치지 않는 반려종”2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이야기하기”와 “세계(상)화”는 동의어로 쓰인다. 스토리텔링은 쑬루씬, 즉 두터운 현재의 지속성을 위한 조건으로 보인다. 이 책은 얽히고 섥힌 이야기들과 더불어 또 그것에 대해 쓰여지며, 이러한 이야기 없이 현재를 두텁게 하기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의 세계(상)화 안에서도 존속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그 이야기들이 쑬루씬의 바로 그 직조물(fabric)이며, 그 이야기가 존재자들과 종들 사이의 관계를 가공하고 지속시키는 하나의 방법이고, 그러한 이야기 없이는 두터운 현재는 존속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두 번째로, 나는 ‘사변적 우화’ 자체, 즉 개념과 관념들로서의 ‘사변적’이라는 말과 이야기하기와 허구로서의 네러티브 사이에 어떤 발생적 알력(friction)을 운반하는 그 말에 흥미를 가진다. 『불편함과 함께 머물기』는 허구-글쓰기(fiction-writing)의 방향으로 가지만, 나는 마찬가지로 ‘사변적 우화’가 철학적 글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또는 보다 넓은 의미의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적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변의 이론적 실천과 발명하는 이야기들의 실천 사이에 어떤 생생하고 계속되는 연결을 어떻게 기획할 수 있을 것인가? 사전은 우리에게 ‘사변적’이라는 형용사의 가장 일반적 쓰임이 어떤 추상적인 종류의 추론이라고 말해주는데, 이것은 실천적 결론과 관련되지 않는다.3 우리가 여기 심포지움에서 행하는 사변적이라는 개념의 이해는 이사벨 스텐저스와 디디에 드바이스에 의해 추진된 바, 그 너머로 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만약 사변적 양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생성과정 중에 있는 어떤 상황의 잠재성들(potentialities)과 가상성들(virtualities)에 주의를 기울이는 특정한 양태라면,4 즉 그것이 투기꾼(speculator, 잠재적인 변화의 기호들을 살피는 로마식의 ‘염탐꾼’5)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어째서 스토리텔링이 이 과제의 유용한 요소가 될 수 있는지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들은 우리의 주의 양태를 변경하고 잠재적인 위험들과 기회들을 감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사변적 우화를 두터운 현재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변경하는가? 안나 칭은 『세상 끝에 있는 버섯』에서 스토리텔링을 도구이자 풍부한 지식 생산의 분야로 간주하자고 제안한다. “쇄도하는 이야기들을 말하고 듣는 것은 하나의 도구다. 이것을 하나의 과학이자 지식의 추가라고 부르자,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자.”6 몇 페이지 뒤에 칭은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붙잡은 과거는 하나의 기억,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말하길,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빛나는’ 그 기억.”7 이야기들과 역사가 “위험의 순간”과 연결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벤야민의 1940년 텍스트인 「역사철학 테제」 6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유럽은 나치즘에 굴복하기 직전이었으며, 불과 몇 달 후 벤야민은 자살한다.
지나간 과거의 것을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도대체 어떠했던가”를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유물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 예기치 않게 느닷없이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꼭 붙잡는 것이다. 위험은 전통의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전통의 수용자에게도 닥쳐 온다. 이 양자는 하나같이 동일한 위험, 즉 지배계급의 도구로 이용될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어떠한 시기든, 바야흐로 전통을 압도하려는 타협주의로부터, 언제나 새로이 전통을 싸워서 빼앗으려는 시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이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반그리스도의 극복자로서도 오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사람은 오로지, 만약 적이 승리한다면 죽은 사람들까지도 그 적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가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8
벤야민의 이 구절에 대해 나는 두 가지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역사를 거머쥐어져야 할 만큼 급박한 위험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곧 스토리텔링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벤야민이 “지배계급의 도구로 이용될 위험”이라고 쓸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하고, 역사 자체에 대해 쓰는 방식 안에 있는 위험이다. 그 위험은 순응주의자, 실증주의자가 고려하는 역사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역사만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최종적으로 쓰여진 것이며, 단지 과거의 거울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변적 양식의 모든 가상적인 것들, 모든 잠재적인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벤야민은 이 위험에 관한 감각에 따라, 그리고 그것에 직면하여 역사의 다른 버전들이 배양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불편함과 함께 머물기』에서 전개된 SF 양식은 분기하고, 복수주의적이며, 페미니스트적인 간종주의자(interspecist)의 역사 버전의 한 방식으로 고려될 수 있는가? 이 책의 한 미주에서 SF 양식은 다음고 같이 정의된다. “어떤 집중의 양식, 역사의 이론, 그리고 세계(상)화의 실천”, 이것은 “상상할 수 있고, 가능하며, 거침없으면서도 논리적인”9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맥락상 이 구절은 ‘SF 양식’을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과 주로 연관된다는 생각으로 이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공상과학소설또는 사변적 우화 또는 과학적 사실(science facts) 또는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과 연루되기에도 충분하다면 어쩔 것인가? 책의 도입부에 이에 대해 여러번 언급된다. “과학적 사실 그리고 사변적 우화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둘 다 사변적 페미니즘을 요구한다.”10 이것은 『불편함과 함께 머물기』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 중 하나이다. 즉 우리는 급진적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SF적 실천을 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역사에 관한 환원론적 사고에 역습을 가하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이고자 한다. 이것은 글쓰기에서, 지식의 생산에서, 우리가 공상과학을 과학적 사실로부터, 사변적 우화를 사회주의적/사변적 페미니즘으로부터 유리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버전의 역사 생산은 그것들을 어떤 사변적 양식 위에 절합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내가 흥미를 느끼는 벤야민 텍스트의 두 번째 측면을 보자. 그것은 매우 물질적인 위험, 매우 실재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주위를 맴돈다. 벤야민의 질문은 어떤 순전한 추상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만약 적이 승리한다면 죽은 사람들까지도 그 적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리라.” 만약 순응주의자의 역사 인식이 성공한다면, 죽은자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생활양식, 사유양식 그리고 지식의 전승 방법, 그들이 노고를 기울인 그 모든 잠재성들은 희생당할 것이다. 따라서 만약 죽은 자들을 돌보는 문제가 카밀 이야기의 핵심이라면, 그래서 막 멸종하려는 종들 주위를 맴돈다면, 그것은 확실히 단순한 과거와 미래의 일치 문제일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 전달(transmission)의 지성적인 실천, 그리고 애도의 실천 주위를 맴도는 문제이다.
사변적 우화와 죽은 자를 돌보는 방법의 발명 간의 연결은 내가 오늘 언급하고자 하는 마지막 저자로 이끈다. 질 들뢰즈와 그의 우화 개념이 그것이다. 들뢰즈의 우화 개념은 대지에 거주할 수 있는 잃어버린 민중의 문제를 함축한다. 들뢰즈는 우화를 실천, 즉 이런저런 변수들에 의해 그 민중이 사라져버릴 때 스스로를 발명하는 민중의 발화행위(speech-act)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민중을 사라지게 만드는가? 기본적으로 하나의 진리, 하나의 역사 버전을 부과하기를 원하는 제국주의적 지배가 그러하며, 따라서 이 지배는 민중이 존재하는 것을 방해한다. 들뢰즈는 이중으로 식민지화된 민중에 대해 기술한다. “[민중은] 어딘가로부터 와버린 이야기들에 의해 식민화되며,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신화에 의해 제국주의자(colonizer)가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는 비인격적 실체가 된다.” 하지만 우화는 민중들 자신에 의한, 그들의 집합적인 이야기하기이며, 권력의 진리를 부과하는 전쟁-기계를 빠져 나감으로써, 이러한 식민지적 시도를 방해한다. “주인이,또는 제국주의자들이 ‘여기에는 어떤 민중도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소리치는 순간, 잃어버린 민중은 되살아 나며, 스스로를 발명한다. 평화로운 마을과 야영지에서, 또는 게토에서. [...]”11 그래서 우화를 통해, 어떤 권리를 박탈당한 민중이 스스로를 발명하고, 그들의 삶을 살 만하고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들수 있게 되며, 거기 거주 가능한 탈식민화된 대지를 발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여기서 상당히 사유할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 도나 해러웨이의 저작에서, ‘사변적 우화’는 어떤 유사한 종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대지와 거기 속한 민중들이다. 내가 아는 한 ‘사변적 우화’는 2011년에 나온 그녀의 책 『SF: 사변적 우화와 실뜨기』에서 중심적이고 전면적으로 된다. 여기서 그녀는 테라폴리스(Terrapolis)의 민중들에 대해 쓰며, 테라폴리스는 포스트 휴먼이라기 보다 콤-포스트(com-post, 퇴-적) [휴먼]으로, 휴머니티들(humanities,인류)이라기 보다 휴머스티들(humusities, 부식토)로 구성된다.12 똑같은 말인 ‘우화’가 두 가지 다른 접근과 전통들 안에서 유사한 질문과 관심에 도달한다는 것은 아주 최소한의 관심만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들뢰즈의 우화에 관한 특성화의 또 다른 차원을 부가하고 싶다. 내 생각에 이는 카밀 이야기 안에서 공명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우화란 어떤 중간자(median)의 목소리, ‘집합적 언표행위’를 통해 야기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저자의 단독적 목소리도 아니고, 순수하게 허구적인 성격을 가진, 이미 정의된 목소리도 아니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쓴다. “우화란 비인격적 신화도, 어떤 인격적 픽션도 아니다. 그것은 행위 중에 있는 말이며, 발화-행위인데 이를 통해 인물은 개인사를 정치로부터 분리하는 경계를 끊임없이 가로지르며, 스스로 집합적 언표행위를 생산한다.”13 우화는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과거 민중의 신화로서 생겨나지 않으며, 확실히 실증적 평가로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우화는 순수한 픽션에서의 운명론이나 현실도피 둘 모두를 거부한다. 우화는 그것이 다루는 현실의 부가물이며, 잠재적인 것들을 등장시키고 그 잠재적인 것들에 역능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발전시킨다. 이 측면에서 나는 우리가 카밀 이야기가 어떤 이중의 우화라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 궁금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우화라는 텍스트일 뿐 아니라, 그 안에 다섯 카밀들이 연루된 실험인 바, 그들 자신의 권리로서의 우화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 젠더들 사이, 민중들 사이, 생명체들 사이, 그리고 죽은 자들 사이에서 중간자의 목소리를 발명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터운 현재를 위해 생각하고 쓰는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사변적 우화와 관련된 나의 최초 질문에 대한 아주 짧은 결론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중간자의 목소리를 통해 실재에 부가되는 것으로서의 우화는 개체와 종의 수준에서 과거에 그리고 도래할 때에, 죽은 자를 돌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마도 그러한 종류의 목소리가 가진 사이성(in-betweeness)은 지식의 생산, 그리고 철학의 글쓰기가 두터운 현재를 만들기 위해 기여하기 위해 스스로를 끼워 넣을 수 있는 작은 틈일 것이다.
<끝>
1 [역주: 이 페이퍼는 『불편함과 함께 머물기』에 관해 도나 해러웨이와 함께 한 심포지움에서 낭독되었다. 이 심포지움은 ‘구성주의 연구 그룹 GECo’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2017년 3월 29일 브뤼셀 자유대학에서 개최되었다.]
2 Donna Haraway,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6, p. 40. 이하 SwT.
3 Le Littré, “spéculatif, ive.”
4 D. Debaise & I. Stengers, “Introduction,” to Gestes speculatifs, les Presses du reel, 2015, p. 4: “우리에게 ‘사변적 제스처’에 대해 말하는 것은 현재에 지각가능하게 되고, 현행화되어져야 하는 어떤 잠재성을 위해 그리고 그것에 의해 연루됨(engagement)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연루는, 생성 과정 중에 상황의 잠재성에 대한 주의를 요청하기 때문에, 희안하게도 윌리엄 제임스의 실증주의의 형태에 근접하게 된다.”
5 Didier Debaise & Isabelle Stengers, “L’insistance des possibles. Pour un pragmatisme speculatif,” Multitudes, vol. 65, 2017: “여기 상기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어원적으로 투기꾼이란, 상황 안에서 중요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예민하게 만들면서, 감시하고, 살피는 자로서, 상황의 변화에 관한 신호들을 일구어낸다.”
6 Anna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Princeton & Oxfor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p. 37.
7 Ibid., p. 50.
8 Walter Benjamin, “On the Concept of History,” in Selected Writings, vol. 4: 1938-1940, ed. H. Eiland and N. W. Jenning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p. 391, §6, 강조는 필자 [국역판-「역사철학테제」, 반성완 편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이데아, 1983 중, 346쪽, 번역일부수정]
9 SwT, p. 230 ; ‘LaBare’와 관련하여.
10 SwT, p. 3
11 Gilles Deleuze, Cinema II: The Time-Image, Trans. H. Tomlinson and R. Galeta, London: Continuum, 1989, p.217 (Fr: 283).
12 Donna Haraway, SF: Speculative Fabulation and String Figures, Kassel, Hatje Cantz Verlag, 2011.
13 Cinema II: The Time-Image, p.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