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영 Aug 19. 2019

들뢰즈-가타리 평전 (1)

프랑수아 도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교차하는 삶], 서문


역자 서언: 이 책이 왜 지금까지 번역이 되지 않았을까? 책을 읽을수록 궁금하다. 들뢰즈에 대해 '대가연'하는 자들이 이 한국사회 학계에는 얼마나 많은가?(심지어는 매스컴에 버젓이 스스로를 '들뢰즈 대가'라고 표명하는 웃지 못할 사태도 발생할 정도다. 부끄러움은 언제나 후학들의 몫인가?) 때로는 칸트의 가면을 들뢰즈에 씌우면서 또 때로는 하이데거의 가면을 억지로 들뢰즈에게 강요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들뢰즈의 진짜 가면은 '가타리'였다는 것, 아니 오히려 더 도발적으로 말하자면, 들뢰즈가 가타리의 가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물론 긴가민가까지는 했겠지) 

누군가 성실한 번역자가 출판계약이라는 족쇄를 찬 채로 이 책을 이미 번역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노마는 늘 오다가다 번역해서 올릴 작정이다.



원문 서지사항: Françoi Dosse, (trans.) Deborah Glassman, Deleuze & Guattari-Intersecting Live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번역문 중, ‘[ ]’는 역자 보충이다.


[앙띠오이디푸스] 집필 중인 가타리의 뒷모습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교차하는 삶


프랑수아 도스 지음

        


서문-가까워지는 또는 가까운 사이

2인 합주.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작업은 지금까지도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누가 저자인가?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다?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다른 감각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유별난 두 사람이 근 20년 이상(1969-1991)을 함께 지적인 작업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밀접할 수 있었던 것일까? 서로를 호명할 때 형식적인 ‘당신’(vous)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거리를 두었는데도 말이다. 하긴 그들은 비공식적으로는 ‘너’(tu)라는 말을 서로 간에 쉽게 사용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특이한 모험이 가지는 도발적인 에너지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두 작가 사이에 협동작업이 어떤 식으로 기능했던 것일까? 그들이 글을 쓰는 동안에 공유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그리고 특출나게 상이한 방향을 추구하면서도 공통된 기획에 따라 협력하는 동안 어떤 가설적인 ‘제 3의 인격’이 있다고 보는 것도 다소 과장된 것이다.      


1968년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매우 다른 세계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이 만날 만한 기회라곤 전혀 없었다. 들뢰즈는 두각을 나타내는 철학자로서, 이미 두꺼운 책 하나를 출판한 상태였으며, 가타리는 전투적인 정신분석학자로서, 정신 요양원의 책임자이자, 여러 편의 논문을 쓴 사회학자였다. 그들이 만난 것은 운명이라는 로베르 맛지오리(Robert Maggiori)의 말[주석1]에 동의한다 해도, 그 만남에는 어떤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곤 찾을 수 없다. 그들의 두 세계가 어떤 식으로 서로 간에 접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열려진 채로 남겨져 있다. 우리가 살펴본 바로는 1968년 5월이라는 거대한 강렬도(intensity)의 사건이 그와 같은 낯선 만남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보다 평범한 계기를 말하자면, 우리는 장-피에르 뮈야르(Jean-Pierre Muyard) 박사가 보르드 병원(La Borde)에서 일하면서, 두 사람의 만남에서 활달하고 중요한 중개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펠릭스 가타리는 두 사람의 첫 번째 공동출판물인 『앙띠오이디푸스』를 이 사람에게 헌정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장-피에르에게, 이 요상한 탐구작업의 진정한 장본인이자, 지도자, 그리고 선구자.”  

   

1950년대 후반, 장-피에르 뮈야르는 리용의 의대생이었고 프랑스학생총동맹(National French Students’ Union, UNEF) 내 좌익 진영의 전투적 구성원이었다. 이 조직은 알제리 전쟁을 극렬히 반대했다. 그는 1960년에 UNEF의 리용 지역 위원장이 되었고 같은 해 파리 의대 일반 학생회장이던 장-클로드 폴락(Jean Claude Polack)을 만났다. 뮈야르는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리용대학 인문학부에서 사회학 코스도 수강하고 있었는데, 그는 특히 철학자 앙리 말디니(Henri Maldiney)의 수업에 흥미를 가졌다. 1965년 뮈야르는 프랑스학생총연합(National French Students Mutuelle, MNEF)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대학생들을 위한 심리상담을 제공하는 사무실(BAPU)을 만드는 일에 합류했다. 그가 가타리를 처음 만난 것은 1964년 푸아시(Poissy)에서 좌익 반대파에 의해 결성된 세미나 기간 동안이었는데, 여기 장-클로드 폴락이 그를 초대했던 것이다. 뮈야르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내가 가졌던 인상을 기억합니다. 가타리는 어떤 깜짝놀랄만한 진동, 어떤 연결의 과정과 같은 느낌을 내게 안겨 주었는데, 그 인상은 마치 생리적인 어떤 것처럼 묘사될 수 있을 겁니다. 그 연결이 그때 거기서 이루어졌고 나는 그의 인격이나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에너지를 받아들였지요. 그는 라캉과 마찬가지로, 악마처럼 탁월하고, 놀랄만큼 지적이었습니다. 물론 루시퍼(Lucifer)는 빛의 천사이기도 하지요.[주석2]          


1966년에, 니콜 구이에(Nicole Guillet)는 뮈야르에게 보르드에 있는 병원으로 이사오라는 요청을 한다. 장기 요양 환자가 늘어서 의사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해에 그곳으로 가서 1972년까지 머물렀다. “뮈 박사[뮈야르의 별명]의 보르드에서의 작업과 능숙한 일처리는 그를 ‘펠릭스 갱단’의 진짜 구성원으로 만들었지.”      

리용의 학생으로서, 뮈야르는 다른 친구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리용대학 인문학부를 가끔 방문했다. 그 친구들은 들뢰즈의 강의를 열광적으로 이야기했다. 1967년, 들뢰즈의 자허-마조흐에 대한 책이 그를 감동시켰다.[주석3]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으며, 들뢰즈는 정신병자들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뮈야르와 줄기차게 토론을 이어갔다. “그는 말하길, 내가 정신병과 광기에 대해 논하지만 내적으로 그것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마찬가지로 미친 사람들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고, 보르드 병원에는 단 한 시간도 머물지 못했지요.”[주석4]         


1969년에 이르러 뮈야르는 보르드에서의 가타리의 지칠줄 모르는 행동주의에 지쳐갔다. 가타리는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 내기 위해 기성의 그룹들을 끊임없이 파괴했다. “그는 리탈린(Ritalin[주의력 강화제])같은 뭔가를 요구했고,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과잉행동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주곤 합니다. 우리는 그를 진정시킬 뭔가를 발견해야 했지요. 심지어 그는 뭔가를 쓰고 싶다고 해 놓고선, 금새 결코 그것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였습니다.”[주석5] 뮈야르는 들뢰즈와 가타리를 만나게 하기 위한 계획을 짜기로 결심했다.      


6월에 그는 펠릭스 가타리와 프랑수와 푸케(François Fourquet)를 태우고 들뢰즈가 살고 있는 리무쟁(Limousin)의 생-레오나르-드-노블라(Saint-Léonard-de-Noblat)로 데려갔다. 가타리와 들뢰즈는 즉각적으로 연결되었다. 가타리의 대화는 들뢰즈의 흥미를 끄는 주제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이를테면 정신병, 보르드 요양병원 그리고 라캉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파리 프로이트 학회’에 제출할 「기계와 구조」[주석6]라는 논문을 막 마친 상태였다. 그는 증명을 위해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의 논증을 차용했다.[주석7]       


Félix Guattari(1930-1992)


이 텍스트는 중요하다. 가타리는 그때까지 라캉의 제자였으며, 그 스승이 그를 친근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성수를 부어주기를 기다리며, 라캉의 대화상대자로 스스로의 입장을 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캉의 그를 향한 태도는 모호했다. 그는 울름가[rue d’Ulm, 고등사범학교] 출신의 마오이스트-알튀세르주의자를 더 선호했는데, 여기에는 자크-알랭 밀러(Jaques-Alain Miller)와 미너(Milner)가 속해 있었다. 가타리는 배제된 채 냉대받았다. “내가 1969년 들뢰즈를 만났을 때, 나는 정말 기회를 잡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두 가지 상이한 주제에 있어서 라캉과의 논쟁으로 진입했었지요. 즉 그의 논문에서 드러나는 바, 오이디푸스 삼각형과 기표로의 환원주의가 그것입니다. 차례차례로 썩은 이빨처럼, 부식중인 벽처럼 그것들은 사라져갔습니다.”[주석8]     


그 당시에 들뢰즈는 그의 교수 이력에서 전환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철학사 작업 – 흄, 칸트, 스피노자, 니체 –을 진행 중이었으며, 1969년에는 두 개의 보다 독창적인[개인적인, personal] 책인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를 출간했다. 이 시기에 철학은 구조주의와 라캉주의적 사유의 지배 하에 있었고, 라캉에 대한 일반적인 열광이 철학을 압도했다.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났을 때, 그는 이런 분위기에 대해 응답할 최적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가타리와의 만남은 들뢰즈를 재생시켰다. 그는 가타리를 리무쟁에 있는 그의 집에 초대했다. 거기서 그는 한 해 전에 있었던 심각한 수술 이후 회복기를 보내고 있었다. 폐결핵에 걸렸던 폐 하나를 들어낸 것이다. 그 이후 계속 그는 만성호흡곤란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또한 알콜중독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들에 대해 클레르 파르네(Claire Parnet)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주석9]     


가타리가 들뢰즈와 더불어 시작했던 정신의학에 대한 토론을 계속하기 위해, 뮈야르는 두 사람이 뒤종(Dhuizon)에서 다시 만나도록 주선했는데, 그곳은 보르드 근처의 성으로 가타리가 살고 있었다. 거기서 질 들뢰즈, 장-피에르 뮈야르 그리고 펠릭스 가타리는 『앙띠오이디푸스』의 내용이 될 것들을 끊임없이 토론했다. 프랑수아 푸케가 그의 친구인 제라르에게 보내는 1969년 8월 19일자 편지에 보면, 뒤종의 분위기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여긴 상당히 낯선 분위기야. 들뢰즈와 뒤종에 함께 있는 동안, 내가 오랫동안 계속할 만한 일련의 사건들이 촉발되었어.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펠릭스와 알레트(Arlette) 옆에 있지. 로스텡, 리안, 에르베, 뮈야르, 엘다 등등. 그들은 모두 나날의 주요한 일거리를 찾아 부산하게 돌아 다니고 있지. 그 일들은 펠릭스와 들뢰즈가 강렬하게 창조한 것들이야. 들뢰즈는 노트와 비평들을 쓰고 교정하고, 펠릭스의 철학사 작업과 연결해. 한 마디로 잘 진행되고 있어. (쥬네비에브와 나를 포함해서) 이 작은 가족 안에서는 일이 쉽게만 진행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야. 이 젊은 형제자매들 중 한 사람은 신들의 전투를 살필 특권을 가지고 있지. 뮈야르 말이야. 그는 가타리와 펠릭스를 만나게 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어.[주석10]       


뮈야르는 그곳을 떠나기 전, 한동안 중개자 역할을 했다. “나는 내 일을 끝냈고, 메피스토(Mephisto)는 물러나야 했습니다. 비록 들뢰즈가 나와 함께 일하고자 원했고 내가 모임에 있기를 원했지만, 나는 내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느꼈지요. 나는 내가 펠릭스를 성가시게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요. 이제 연금술은 작동했으며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그런 것이었습니다.”[주석11]

      

1969년 봄 동안, 그들이 만나기 전, 들뢰즈와 가타리는 편지 몇 통을 주고받았는데, 그들의 초창기의 우정이 거기서 뚜렷히 드러난다. 1969년 4월 5일에 가타리는 들뢰즈에게 편지를 써서, 보르드에서의 활동 때문에 시간을 내지 못한 그의 무능력을 필자모임에게 넌지시 설명한다. “경애하는 친구, 내가 당신에게 보낸 여러 논문들에 대한 당신의 관심으로 아주 깊히 감동받았다는 것을 설명할 방법을 발견해야만 하겠네. 난 『의미의 논리』를 아주 신중하게 읽고 있고, 우리의 관점과 근본적으로 유사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자네가 편할 때 만난다면, 그것은 내게 현재에도 여전히 남은 여러 옛일들과 더불어 하나의 사건이 될거야.”[주석12] 이런 편지글과는 다른 방면에서 가타리는 『의미의 논리』라는 초감각적인 방법으로 들뢰즈와 소통하고 있다고 느꼈다. 초기의 편지에서 들뢰즈는 그의 이전의 학생이었던 아얄라에게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가타리에게 보냈던 모든 텍스트들을 취합하는 것이 흥미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이에 대해 펠릭스는 여전히 [들르즈와의 우정이] 의뭉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깜짝 놀랄만한 속임수는 아닐까?”[주석13]      


1969년 5월에 들뢰즈는 가타리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난 또한 우리가 서로 만나기 전에 친구가 되었다고 느꼈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요구를 하는 나를 용서해 주길 바래. 자네가 이런 저런 매우 새롭고, 복잡하며 중요한 아이디어들을 발명한 것은 분명해. 그것들은 우리 관계 안에서 보르드에서의 실천적 탐구로 발전되었지. 예를 들어, 집단환상(group fantasy), 또는 자네의 횡단성(transversality) 개념이 그것이네. 이것들은 내 생각에 오래된 것들을 넘어설 수 있게 만들어 주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개인적인 무의식과 집단적인 무의식 간의 강력한 이원성이 남아 있어.[주석14]     


들뢰즈는 이 아이디어들이 이론적으로 가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최근 상황이 최상의 상태는 아니라는 가타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글쓰기를 겸손하지만 활동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 말고, 사태가 그저 잘 흘러갈 때 우리는 정말로 글쓰기만을 할 수 있지만, 잠시 전투를 벗어나는 것도 효과적이며 기분을 좀 더 좋게 하는 방법이네”[주석15]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들뢰즈는 이론을 완성할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가타리에게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마침내 “현재 상태에서 가장 앙망하는 바는 논문들을 출판할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야.”[주석16] 이 출판물이 바로 들뢰즈가 서문을 쓰고 1972년에 출간된 『정신분석과 횡단성』(Psychoanalysis and Transversality)이었다.[주석17]     


1969년 6월 1일, 가타리는 그가 약해졌음을 깨달았고, 그것은 그의 들뢰즈에 대한 ‘극단적인 혼란’ 때문이었다.[주석18] 그의 작가병[아이디어 고갈, writer’s block]은 그가 작업을 하지도 꾸준하게 이론을 정독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에서 야기되었으며, 또한 그가 오랫동안 지연시켰던 어떤 것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의 그의 공포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여기에는 또한 그의 복잡한 개인사도 한 몫 했다. 미결정된 상태의 이혼, 세 명의 자녀, 병원일, 이런저런 갈등들 그리고 전투적 그룹들과의 관계, ‘학술단체와 제도연구 연합’(Federation of Study Group and Institutional Research, FGERI)에서의 일들도 마찬가지다[주석19]. 이론에 있어서 가타리는 “아이디어란 개념적 도구, 사물/사태들”이라고 생각했다.[주석20]     


May 22, 1981, Félix Guattari  talked to Tetsuo Kogawa


들뢰즈는 1969년 6월의 첫 번째 만남 이후 그들이 어떻게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즉시 가타리에게 편지를 썼다. “물론 우리는 수사적인 겸손함이라는 모든 형식들을 내려놓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 간에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우정의 형식들은 그렇지 않아. 그에 관한 말들은 이를테면 ‘당신을 이해할거야’, ‘난 모르겠는걸’, ‘그건 틀렸어’ 따위지. 뮈야르가 이 서신교환에 참여해야 해. 결국 강제된 규칙성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주석21] 들뢰즈가 기억해 냈던 첫 번째 회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신병의 형식은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 전개되지 않거나, 적어도 필연적으로 그리고 기존에 주장된 방식으로는 되지 않지.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것 (...) 그것의 엄마-아빠와 더불어 정신분석의 가족주의 너머로 가기 힘든 것이네(자네가 여전히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내 텍스트 말이야). 따라서 문제는 정신분석에서, 예를들면 어떻게 해서 사회경제적인 메커니즘이 직접적으로 무의식을 함축하느냐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난 메커니즘 그 자체 – 이윤 남기기, 이익 따위 - 는 신경쓰지 않아. 이건 훨씬 더 복잡한 문제지. 그리고 자네가 광인이 단순히 어떤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함께 어떤 정치경제학을 창조한다고 말할 때 이것을 표명하는 셈이야. 또는 자네와 뮈야르가 자본주의의 위기와 정신분열적 균열 간의 관계를 토의할 때도 마찬가지지.[주석22] 

       

들뢰즈는 이어서 그가 아직 충분히 친숙하지 않은 가타리의 두 가지 아이디어들 – “기계와 반생산에 관한 것” –을 덧붙인다. 그것은 사회구조가 어떻게 심리적인 무의식에 매개되지 않고 영향을 주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들뢰즈는 마찬가지로 가타리의 가족주의(familialism)에 관한 비판에 동의한다.  

    

나는 자네가 아주 풍부한 추론의 노선을 제안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지. 우리는 어떤 도덕적 이미지를 무의식에 부여함으로써, 심지어 그것이 문제 없다고 부가하면서, 무의식이 비도덕적이라든지 범죄적이라든지 등등으로 말할 수 있어 또는 도덕이 무의식이라고 말하기 위해 그렇게 하지(초자아, 법칙, 위반). 나는 언젠가 뮈야르에게 그건 타당하지 않으며, 무의식은 종교가 아니라고, 거기에는 법칙도 위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어. 그런 것들은 모두 멍청한 개념들이야. (...) 뮈야르는 내가 너무 멀리 나아간다고, 라캉에 따르면 법칙과 위반은 그것들 중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다고 했지. 물론 그는 옳아.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지. 여전히 초자아에 관한 이론 전체는 내게 그릇된 것이고 전반적으로 죄의식에 관한 이론으로 보인단 말이지.[주석23]          


1969년 8월 동안 뒤종에서 연구작업을 하는 긴 기간 바로 전에 쓰여졌으므로, 이 편지는 『앙띠오이디푸스』가 출판되기 3년 전에,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논란이었고, 그것이 가족과 관련된 환원주의라는 것이 이미 두 사람에게는 명백해 보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가타리는 재빨리 답장했다. 7월 19일자 편지에서, 그는 기계에 관한 그의 생각을 기술한다. “기계란 환유적으로 산업사회의 기계를 표현하는 것이야.”[주석24] 7월 25일자 편지에서 가타리는 자본주의와 정신분열 간의 방정식을 써 놓은 몇몇 노트를 들뢰즈에게 보냈다. “자본주의는, 사회-구조가 ‘분열자’(schizo)의 생산을 지지할 수 없는 한에서, 정신분열이다.”[주석25]   

   

처음부터 그들의 관계는 이론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즉각적인 난해함은 개인적이면서 지성적인 것이지만, 그들은 결코 근본적으로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두 개의 매우 다른 세계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각각은 상대방이 속한 관계의 네트워크를 존중했다. 그들 공동의 지적 작업이 성공한 것은 그들의 다른 점들을 활성화하고 이용한 데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삼투되어 작업하는 척 하지 않았다. 그들 각각은 우정에 관한 어떤 고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장 카바이에가 ‘친애적 거리’(amtive distance)라고 불렀던 그러한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특별한 위치는 제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현학적[gnosological, 비의적] 거리와는 반대로, 친애적 거리는 화해(rapprochement) 또는 거리두기(distancing)와 관련 있습니다.”[주석26] 가타리는 들뢰즈와의 만남에 애를 태웠다. 그는 언제나 집단적으로 작업했으며 제도적 탐구, 연구, 훈련 중앙학회(Center for Institutional Study, Research and Training, CRRFI)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거기 소속되는 것을 더 선호했던 것 같다.[주석27] 첫 번째 CERFI 그룹은 뒤종에서 결성되었고, 그때에는 참가에 의의를 두는 정도였지만, [마침내] 프랑수아 푸케가 거기에는 아무런 토의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들뢰즈는 끝이 없는 집단 토론을 증오했으며, 단지 최대한 둘이나 셋 정도와 함께 작업하고자 했고, 그럴 수 있을 뿐이었다.      


가타리의 동료인 알레트 도나티(Arlette Donati)는 그에게 들뢰즈의 취향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들의 첫 번째 책은 최초에 편지를 통해 쓰여졌다.[주석28] 이러한 글쓰기 접근방식은 가타리의 일상을 완전히 혼돈으로 몰아 넣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를 홀로 일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룹을 감독하는 것에 익숙했던 그에게 그것은 습관이 될 수 없었다. 들뢰즈는 가타리가 자고 일어나서 아이디어를 종이위에 그려넣기 위해 곧장 그의 책상으로 가길 바랬다. 그리고 그가 썼던 것을 재작업하거나 재독해 하지 않고, 그의 나날의 작업들을 편지로 보내길 바랬다. 그는 그가 작가병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권했다. 가타리는 신뢰를 가지고 그 규칙들을 따랐으며 그의 사무실로 물러갔다. 거기서 그는 매일 오후 4시까지 노예처럼 일했다. 그후 대략 6시 경에 뒤종으로 돌아가기 전 회진을 빨리 하기 위해 보르드로 갔다. 장 우리(Jean Oury, [보르드 병원의 동료 의사])는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다. 가타리는 보르드 병원의 일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지만, 이제 그는 들뢰즈와의 일에 푹 빠져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알레트 도네티는 심지어 매일 그의 점심도시락을 가져다 주었는데, 먹는 것 때문에 일을 멈추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앙띠오이디푸스』를 위한 글작업은 가타리가 들뢰즈에게 보낸 것이었다. 들뢰즈는 그것들을 최종 판본으로 만들기 위해 재작업했다. “들뢰즈는 펠릭스가 다이아몬드 광부이며 자신은 광택제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타리가 쓴 텍스트들을 그에게 보내는 족족 그러한 작업을 했지요. 일은 그런 식으로 되어갔습니다.”[주석29] 그들의 공동 노력은, 비록 매주 목요일 오후에 들뢰즈의 집에서 만났기는 했지만, 대화를 통해서라기 보다 편지 교환에 의존하는 측면이 훨씬 많았다. 심지어 그들이 만나는 날에는 들뢰즈가 뱅센에서 아침 강의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 들뢰즈는 가타리를 찾아 갔지만, 그는 보르드에서 감당할 수 없는 광인을 피해다녀야 했다. “어느 날, 펠릭스, 알레트 도나티, 질 그리고 나는 뒤종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보르드에서 전화가 걸려 왔어요. 한 남자가 성의 예배당에 불을 지르고, 숲으로 달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질은 흠칫 놀랐으며, 나는 얼어 붙어 버렸고, 펠릭스는 그 남자를 찾으려고 도움을 청했지요. 그 순간 질은 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미친놈들을 견딜 수 있는 것이지?’ 그는 광인들을 눈 앞에서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겁니다.” [주석30]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러 기회에 그들의 공동 작업에 대해 기술했지만, 그들은 다소 신중했다. 『앙띠오이디푸스』가 처음 출판되어 나왔을 때, 그들의 공동 글쓰기 작업에 대해 기술하면서,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협력작업은 두 사람 사이의 단순한 만남의 결과가 아니다. 여기에는 상황을 이끌어가는 특유한 것이 부가되는데, 그것은 물론 어떤 정치적인 맥락이다. 처음부터 그러한 작업은 우리의 불확실성의 총합을 공유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공통의 이해를 공유하는 문제에 불과했으며, 게다가 1968년 5월 혁명이 대번에 야기했던 방식과 관련된 어떤 불편함 그리고 혼란이라는 맥락이 존재했다.[주석31]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함께 글을 쓸 때, 거기에는 아무런 특유한 어려움도 없었고, 우리 둘은 이러한 기술적인 방식이 몇몇 명확한 기능을 가진다는 것을 천천히 깨달아 갔다. 정신의학이나 정신분석에 대한 책들의 매우 놀라운 측면들 중 하나는 환자가 표면적으로 말하는 바와 환자에 대해 치유자가 말하는 바, 그 의미에 있어서 이원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신기하게도,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전통적인 이분법을 넘어서려고 했는데, 왜냐하면 우리 둘 모두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 누구도 환자가 아니었고, 정신과의사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어떤 과정을 수립하고 있었는데 (...) 그 과정은 우리가 ‘흐름’(flux)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주석32]   

   

1991년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출판되었을 때,[주석33] 로베르 맛지오리는 들뢰즈, 가타리와 긴 토론을 가졌는데, 그때 다시 한 번 그들이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에 대해 상기했다. “펠릭스와의 만남은 정신분석과 무의식에 관한 주제 주변에서 이루어집니다. 펠릭스는 내게 새로운 장을 열어주고, 비록 내가 이전에 정신분석에 대해 말했던 것이라 해도, 내가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도록 이끌지요. 이것이 그가 나에 대해 흥미로워하는 부분입니다.”[주석34]       


장-피에르 뮈야르는 그들을 만나게 했던 사람이긴 하지만, 그들의 묘사 안에 등장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펠릭스가 나를 찾아낸 것이지요.”라고 말했다. 가타리는 들뢰즈의 이 말을 확증한다. “내가 그를 찾으러 갔지만, 그 만남 이후, 그가 공동작업을 제안했지요.”[주석35] 그들은 초고가 실재로 어떻게 쓰여졌는지 - 들뢰즈는 그것은 ‘비밀’이라고 말했다 - 에 대해 그닥 많은 시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공동작업에 대해서는 길게 말했다. 들뢰즈는 가타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술하기 위해 클라이스트(Kleist)를 참조했다. 대화를 거듭하며 작업을 하는 것은 더듬거리고, 생략하고 그리고 연결되지 않는 소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어떤 상황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처음 처하는 상태였습니다” 들뢰즈는 말한다. “둘이서 ‘스스로를 그런 상태로 밀어넣는 것’이 보다 쉬울 때가 있어요.”[주석36] 그들은 만나서 이야기했고, 토론이 정제되면, 작업할 주제를 선택했다. 그리고 토론했던 것에 대한 연속적인 글을 각자가 이어 썼다. “우리 각자는 서로 간의 텍스트에 무늬를 새겨넣거나 그것을 인용하듯이 작업했지만, 어느 순간에 오면 우리는 더 이상 누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게 되었지요. 그것은 글쓰기와 그것의 변주였습니다.”[주석37] 이러한 작업방식은 존재, 사유 그리고 세계에 대한 반응의 공통체(community)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한 쌍으로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그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공유되고, 암시적이지만 펼쳐지지 않은 기초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웃거나 염려하면서 그것을 만들어갔지요. 우리는 같은 사물/사태에 의해 흥분하거나 자극을 받았습니다.”[주석38]      



가타리는 또한 그 만남과 그들의 텍스트에 관한 상이한 판본의 교환에 대해서 말했다. 그에게 그들의 대화는 매우 다른 두 사람 사이의 대화와 같은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매우 달라요. 결과적으로 어떤 주제나 아이디어에 대해 동의하는 우리의 리듬들도 다르지요. 하지만 우리는 물론 만족합니다. 나는 보다 모험적인 것에 더 끌리는 편이지요. 이것을 낯선 땅을 방문하길 좋아하는 어때 개념적 전투원이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이와 달리 질은 어떤 철학적 실력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완전히 도서 관장과 같은 존재이지요.”[주석39] 들뢰즈는 늘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토론을 증오했다. 그는 화자가 오직 어떤 내재적 비판에 참여한 후에만 대화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들의 대화는 마치 “정화의식같은 것으로, 한 사람이 말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조용히 듣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서로 간에 이해하고 어떤 일치에 도달할 뿐 아니라, 한쪽이 늘 다른 쪽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주석40] 그들 중 하나가 다른 이에게 터무니없어 보이는 어떤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한 사람의 일은 사유의 기초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에게 지구의 중심이 산딸기잼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면, 그의 임무는 그 아이디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들지를 발견하는 것이지요(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것을 아이디어라고 부를 수 있다면).”[주석41] 그들의 의견 교환은 정말 “연구 기계”와 같은 것을 생산했다. 그것은 누가 무엇을 쓰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들뢰즈는 이것을 설명할 때, 중요한 것은 ‘이다’(is, est)를 ‘그리고’(and, et)로 변형하는 것인데 이것은 어떤 특수하고, 순수하게 연접적(conjunctive) 관계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관계의 계열 안에 접혀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리고’는 창조의 가능성, 창조적 말더듬, 다양체에 의해 할당된다. “‘그리고’는 하나도 다른 하나도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이, 두 사물/사태의 사이에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경계선이며, 언제나 경계, 탈주선 또는 흐름의 선인 바, 우리는 그것이 지각가능한 최소치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탈주선을 따라가면서 사물들이 지나가고, 진화해 가며, 혁명이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주석42] 결과적으로 그들의 책은 총체적으로 특이한 것이다.      


이런 저런 아이디어의 기원을 탐색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스테판 나도(Stephane Nadaud)가 쓴 것처럼, “배치(arrangement)라는 아이디어를 놓치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의 연구작업에서 기초적인 것이다.”[주석43] 그들의 글쓰기는 언표의 집합적 배치를 수립하기 위해 조직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발명된 아이디어들의 진정한 기원이다. 이것은 어떤 세 번째 인격[제 3자]의 탄생, 그들의 융합, 어떤 펠릭스-질이나 ‘가타뢰즈’ 같은 인간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인가? 들뢰즈를 읽다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상이한 두 사람처럼 협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세 번째 강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합류하는 두 개의 강물과 같았어요. 난 우리를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주석44] 그러나 이것은 실재와는 다소 다르다. 두 사람은 어떤 상호존중의 거리를 유지했으며, 그들의 차이도 인정했다. “우리 사이의 거리에 있어서 어떤 진정한 정치학이 있는데, 이것은 비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깨달음을 주고 상대방의 특이성을 수용하는 이질성의 문화와 같은 것이에요. 우리는 이것이 효과적이므로 함께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가 우리를 움직입니다. 질은 나의 친구이며, 그는 나의 단짝입니다.”[주석45]     


배치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본질적인 것은 이러한 환경이 얼마나 비범한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그의 일본어 번역자인 쿠니치 우노(Kuniichi Uno)에게 “언표는 주체를 가리키지 않아요. 거기에는 어떤 진술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어떤 배치만이 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배치 안에서 ‘주체화와 과정들’이 상이한 주체들에 할당될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몇몇은 이미지로 그리고 다른 몇몇은 기호들로 말이지요.”[주석46] 이전에는 그의 학생이었고, 다음으로 친구가 되었던 우노에게, 들뢰즈는 그와 가타리가 함께 작업한 방식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말했다. 가타리는 그 그룹의 별이었고, 들뢰즈는 그들의 관계를 기술하면서, 언덕을 부딪히는 바다라는 선명한 은유를 사용했다.      


그[가타리]는 바다에 비유되어야만 할 겁니다. 영원히 움직이면서, 표면에 끊임없이 일렁이는 빛을 반사하는 그런 바다 말이에요. 그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뛰어다닐 수 있어요. 그는 많이 자지도 않지요. 그는 여행다니면서, 결코 멈추지 않고, 쉬지도 않아요. 그는 특별한 동력장치를 가지고 있어요. 나는 그보다 언덕에 가깝습니다.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한 번에 두 가지를 할 줄도 모르지요. 나의 아이디어들은 정적이며, 우연찮게 움직이더라도 그것은 대개 내적인 것이에요. 우리 둘, 즉 펠릭스와 나는 아마도 훌륭한 스모선수 일수도 있어요.[주석47] 


게다가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당신이 펠릭스를 아주 가까이서 보기만 하면, 당신은 그가 혼자인 것을 깨달을 겁니다. 두 가지 다른 행위들 사이에서, 또는 집단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고독 속으로 깊이 침잠할 수 있지요.”[주석48] 들뢰즈는 가타리를 비범하게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아이디어들의 발명자로 묘사했다. “그의 아이디어들은 디자인이나 심지어 다이어그램이지요. [이와 달리] 나는 개념들에 흥미가 있었습니다.”[주석49]

      

기계에 관한 가타리의 아이디어는 구조에 대한 생각을 대체했으며, 들뢰즈에게 구조주의적 사유 바깥의 가능한 길을 제공했다. 그것은 그가 이미 『의미의 논리』에서 탐색했었던 어떤 것이기도 했다. 라캉의 언어와 같이 구조화된 무의식 개념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그리고 1969년에 그들이 만났을 당시, 정치적 무의식과 관련해서 가타리는 그의 친구를 앞서 갔다. 들뢰즈는 철학사에 있어서는 가타리를 앞서갔다. 하지만 1972년에 그는 많은 전공 영역에서 그가 가타리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난 개념을 가지고 혼자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상 다소 소극적인 방식이었지요. 펠릭스는 내게 그가 이미 ‘욕망하는 기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의 기계로서 무의식 즉, 정신분열적 무의식에 대한 전체적인 이론적이면서 실천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 자신은 그가 나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고 생각했지요.”[주석50] 그 둘 모두의 친구였단 제라르 프로망쥬(Gérard Fromanger)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일을 하면서 즐거워했고, 상호 간에 풍부해졌으며, 유머와 재치가 넘쳤다. “그들은 서로를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각자는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에 의해 고무되었지요.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신뢰했어요. 그건 마치 본래 쌍둥이였는데 나중에 함께한 사이와 같았습니다. 질투는 거기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그들은 만날 때마다 전적으로 개방적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글쓰기의 질, 즉 이런 종류의 완전한 개방성과 신뢰의 선물로 이루어진 그 글의 특질을 결정했습니다.”[주석51]       


두 사람은 그들 연구작업의 횡단적 본성 덕분에, 아이디어들을 검사하기 위한 진정한 실험실을 창조한 것이었다. 들뢰즈에 대한 가타리의 기여는 특히 의견을 다듬어 가는데 있어서 신선한 공기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당신은 그가 펠릭스와 만날 때 반색했다는 것을 느꼈지요. 그들은 미묘한 인간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서로 충분히 보지 못했다 해도, 만나면서 행복해 보였습니다.”[주석52]   

    

그들의 인격에 있어서 차이들은 두 개의 속도 기계를 생산했다. “우리의 리듬들은 언제나 달랐어요. 펠릭스는 내가 그의 편지에 응답이 없었다고 불평했지만, 나는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답장 하기까지는 내게 한 두 달이 걸렸지요. 그 동안 펠릭스는 이미 다른 생각으로 옮겨가 버리는 겁니다.”[주석53]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그들이 함께 일을 할 때, 각자는 자신의 입장을 견고하게 유지하도록 강제하기도 했다. 이것은 두 싸움꾼이 완전히 지칠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들이 토론하고 논증하고 있었던 생각들은 서로 닮아갔다. 그 생각을 위해 ‘정립’하는 것이나 기초를 잡는 것과 같은 무언가가 확산과 전파라는 작업을 통해 생겨났다. 즉 “나는 펠릭스가 정말 통찰력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떤 근거에 해당되는 빛나는 지침을 발견해서 아이디어를 상이한 형태로 취할 수 있었던 반면, 펠릭스는 그것을 교정하곤 했지요. 그것이 우리가 일을 전개하는 방식이었어요.”[주석54]  

   

Edouard Glissant and Felix Guattari


1971년 8월, 그들은 브뤼-쉬-메(Brusc-sur-Mer)의 툴롱(Toulon) 해변에서 『앙띠오이디푸스』를 마치기 위해 마지막으로 긴 연구세션을 조직했다. 두 사람은 가족을 대동하고, 해변 근처의 집을 빌렸고, [가족들은 즐기고] 두 사람만 그들의 토론을 시작했다. 마지막 원고는 12월 31일에 완료되었다. “우리의 책은 12월 31일에 마무리되었어. 그것은 결론의 내용들이 교묘하게 시작 부분을 가리키도록 만들어졌지. 자네의 창조적 에너지와 나의 발명적 노력에 대한 상호간의 증인임을 암시한 것이지. 이건 매우 흡족한 것이야.”[주석55]        


하지만 1972년 3월에 그 책이 실재로 출판되었을 때, 가타리는 어떤 어려운 상태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그 책에 투여된 그의 과잉활동과 과도한 노력이 어떤 붕괴로 그의 정신 상태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공허감이었다. 연구를 완성한다는 것은 결코 많은 상상적인 가능성들을 만족시키지 않았으며, 일이 진행되는 중에 속했던 지속적인 즐거움도 이어지지 않았다. “난 작은 공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이 모든 현재의 정치적인 것들과 명성 따위를 제거하고 있다고 느꼈지. (...) 그 느낌은 너무나 강해서 난 이 엉망진창인 일에 나를 끌어들인 질을 원망할 정도였어.”[주석56] 일기에서 그는 자신의 종잡을 수 없는 작업 습관과 들뢰즈의 능숙한 성향을 비교할 때 생긴 감정 과잉 상태을 기술했다. “들뢰즈는 일을 너무 많이했어, 우리는 정말 달라. (...) 난 어떤 종류의 고질적인 독학형 인간이고, 망설이는 데다가, 쥴 베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같지.”[주석57] 무엇보다도, 초고의 결론부가 쓰여질 때와 책의 출간 시점 사이의 수정 기간이라는 중요한 시간 동안, 가타리는 그의 염려를 쏟아냈다.      


난 내 방식으로 내 문체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난 정말 『앙띠오이디푸스』에서 나 자신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난 질의 이미지 뒤에서 작업하려는 것을 그만 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책의 최종적인 판본에 부여했던 궁극적인 완성도도 필요하지 않았다. (...) 그는 익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일어서게 될 것이고, 이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 ‘연구’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최종적인 ‘배치’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단지 노트들, 최초의 자료들일 수만은 없다. 이것이 내가 『앙띠오이디푸스』에 의해 다소 덧코드화되어 있다고 느끼는 이유다.[주석58]       


가타리와의 협력 덕분에 들뢰즈는 새롭고 실험적인 종류의 책을 쓸 수 있었다. 그것은 『차이와 반복』 안에도 있다. 그는 원했던 바를 말했다. “시간은 그것이 오랫동안 수행했던 방식으로 어떤 철학책이 쓰여질 수 없을 때 다가온다: ‘아! 옛날의 스타일이여 ...’ 니체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철학적 표현 방법을 위한 이러한 탐구는 오늘날 어떤 다른 예술의 갱신과 관련하여 추구되어야 한다.”[주석59]  아르노 부아니쉐(Arnaud Bouaniche)가 주목했던 것처럼[주석60], 들뢰즈가 스리지(Cerisy)에서 유목적 사유라는 주제에 대해 니체를 10년 동안 연구했던 바를 말했을 때, 그는 새로운 문체를 생산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니체와 관련해서 그는 전통적인 코드들을 벗어나는 새로운 유형의 책을 정의했다. “우리는 코드화의 중요한 도구들 세 개의 주요 예시들에 익숙하다. 즉 법, 협약 그리고 제도가 그것이다.”[주석61] 하지만 니체는 모든 코드화의 시도들에 저항했으며, 마찬가지로 그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들의 글쓰기에 대해 생각한 방식이다. “모든 코드들을 뒤섞는 것은 어렵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글쓰기와 언어의 수준에서조차 그러하다.”[주석62] 이 작가들은, 외적 강제들이 그들을 과도하게 비전통적인 형태들을 생산하도록 이끌어가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모든 형태의 코드화를 벗어날 수단을 찾은 것이다. 이들이 1980년에 출판된 『천의 고원-자본주의와 정신분열 2』에서 성취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중에 가타리는 카프카를 통해 그의 리듬을 되찾았다. 카프카는 그에게 어떤 세계, 즉 그의 창조에 관한 거대한 욕망과 열망에 걸맞는 그런 세계를 제공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의 것과 매우 흡사한 어떤 창조적인 무질서였다. “거기에는 두 개의 기계 사이에 연접이 존재한다. 카프카의 작품 속에 있는 문학 기계와 나 자신, 가타리 기계가 그것이다.”[주석63] 가타리적 글쓰기는 들뢰즈라는 더 나은 방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카프카를 경유한 것인데, 그것은 들뢰즈와 더불어 카프카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 그러했다.[주석64] 이것이 그들이 나중에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라는 것으로 발전시켰던 생각의 개요이며, 그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각했던 책의 형식이다. “주체가 이중체이든 아니든, 균열되거나 개념화 되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언표행위가 주체에 귀속된다고 믿지 않는다.”[주석65]      


‘두-속도’의 기계는 『천의 고원』을 위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에서의 중심 개념은 ‘배치’였다. 이번에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함께 다소 다른 방식으로 썼다. “이 책의 구성은 보다 복잡한데, 그것이 드러내는 영역이 보다 다양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작업습관은 이전과 비슷하겠지만, 하나가 사유하는 지점에서 다른 하나가 가설추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주석66]  이 새로운 기획이 가지는 복잡한 특성의 바깥에서 강력한 논의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천의 고원』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여기저기에 중대한 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구술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이루어진 공통의 노력의 생산물이다.     



책이 1980년에 나왔을 때, 『천의 고원』은 1969년에 시작되었던 어떤 것에 근접한 것을 이끌어 내었다. 1984년,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썻다. “이 지점에서 펠릭스와 나는 둘 다 숨을 고르기 위해 다시 혼자 일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다시 함께 연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주석67] 들뢰즈는 영화에 관한 책에 뛰어들었다. 가타리는 그의 문화-정치적 행동주의로 의기양양하게 되돌아갔다. 하지만 가타리는 다시 한 번 어떤 부재, 공허, 고립과 고독의 감각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으며, 들뢰즈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해 편지를 썼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난 자네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네. 자네가 우리가 함께 작업했던 것은 사라졌으므로, 그것이 자네에게 더 이상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거나 자네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그 구절을 말일세. 하지만 나에게 사태는 매우 명확해. 난 자네가 ‘야생적’ 생각들의 어마어마한 창조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것은 내가 저 영국 경험론자[흄]를 발견하고 매혹당했던 그 이유이기도 하지. 그러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자네야. (...) 기회가 되면 우리 둘이 다시 연구할 것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어.[주석68]      


이것은 위로를 위한 빈 말이 아니었다. 1980년에 영화에 관한 그의 강의를 시작했을 때, 그는 가타리와 했던 그의 연구를 잊어 버리지 않았다. 1991년에 출간된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주제에 대해 그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1년치 연구계획이 있네. 내 생각에, 한 편으로 난 ‘영화와 사유’에 관한 강의를 베르그송의 위대한 저작인 『물질과 기억』과 연관지어 해 나갈 작정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난 자네의 연구작업에 부응하는 이 범주표 연구를 지속하고 싶네. 그 중심에 내가 보기에 어떤 명석하고 단순한 질문이 놓여 있는데, 그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지. 따라서 여기에 두 가지 질문이 놓여 있게 되네. 하나는 자네가 묻고 있었던 것인데, 내 생각에 그것은 왜 그것을 ‘‘범주들’이라고 부르는가?’라는 것이야. 그러니까 내용, 표현, 특이성 등등의 생각들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것이지. 퍼스(Pierce)와 화이트헤드(Whitehead)는 현대적인 범주표를 만들었지. 이 범주들에 관한 사유를 진행해 보는 것이 어떤가? 그리고 두 번째로 만약 우리가 가장 단순한 범주인 내용와 표현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난 내 질문을 되뇌일 거야. 다시 말해 어째서 자네가 배치의 관점에서 표현에 특권을 부여하는지에 대해 말이야. 자네는 내게 이것을 참을성 있게 설명해야 해.[주석69]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이보다 먼저 나온 저작들 보다 다소 다르게 쓰여졌다. “가타리는 그 책 속속들이 있어요. 아스피린이 물 속에서 녹아드는 것처럼, 도처에”라고 로베르 맛지오리가 말한 것처럼, 맛지오리는 그 책의 근본 작업에 대해 그렇게 본 것이다.[주석70] 가타리는 들뢰즈가 그에게 보낸 초고부터 손을 봤다. 제안을 하고, 교정하고 그리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했다.      


난 혼합(mixture)과 상호반응(interaction) 사이의 대립이라는 주제를 제안하고 싶네 (...) 뇌가 스스로에 대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의 자기생산 체계(autopoiesis system)을 참조해서 (...) 난 ‘기계적 이종발생[hetrogenesis, 돌연변이]’ 안에 있는 이것에 대해 조금 말하고 싶었지 (...) 그 미학적[감각적] 경로는 개념의 무한운동과 기능의 유한 운동 사이의 교차로야. 거기에 무한성의 시뮬레이션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히스테리적인 전환지점에 창조의 패러다임을 가져다 주는 무한성의 개선된 책략이지.[주석71]

    

오늘날에는 가타리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단지 들뢰즈의 이름만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가타리 없는 들뢰즈로는 ‘진짜’ 철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의 내용, 문체 그리고 개념들은 그 책이 어떻게 ‘탈-가타리화’하여 들뢰즈 단독으로 가능했는지 상상도 못하게 만든다. 그러한 방식은 두 사람의 저자가 함께 작업했던 그 방식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리좀』에서 기술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이며, 가지치기에 관한 것, 말벌과 난초 간의 배치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난은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말벌을 흉내냄으로써 그 자신의 영토를 떠난다. 하지만 말벌은 동시에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고 난의 재생산 기제의 부분이 되는 동안 이 이미지 안에 있는 그것의 영토성으로 되돌아 온다. 말벌은 꽃가루를 옮김으로써 (...) 코드, 즉 잉여가치의 코드를 포획함으로써 (...) 난을 재영토화한다. 이것은 유전자 염색체의 수가 증가와 같으며, 진정한 되기, 난의 말벌-되기이고, 말벌의 난-되기이다.[주석72]      


거기에 어떤 수분과정은 있지만 그것을 위한 재생산 과정은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말벌이 난과 성적 관계에 연루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곤충학자들은 이것을 두 종들의 평행 진화 안에서 두 가지 다른 코드 항목들 사이의 어떤 관계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서로 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그들의 만남에서 그 둘 모두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이러한 배치는 그 밖의 모든 것이 닫힌 조건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만약 그것이 소멸되어질 수 있는 어떤 기회가 존재한다면, 들뢰즈는 강하게 반응할 것이고, 그들의 최초의 규칙과 조건들을 가타리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그들의 우정은 일반적으로 평화로왔으며, 아주 간혹 다투거나 긴장관계에 놓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창조해 냈던 배치와 관련해서였을 뿐이다. 1973년에 우연찮게 들뢰즈는 ‘규칙들’을 가타리에게 상기시키도록 강제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왜냐하면 그가 다른 어떤 사람의 행위에도 말려들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일치가 생겼다. 그 이유는 들뢰즈와 푸코가 공공사업장관에 의해 CERFI를 대표할 수 있는 두 명의 지식인으로 낙점되었기 때문이었다. 들뢰즈는 CERFI에 스스로가 얽메이는 것을 거부했다.        


펠릭스, 오 펠릭스, 친애하는 펠릭스, 난 당신을 사랑해. 그리고 어떤 것도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줄 수는 없어. 그래서 난 즉각 외적인 부분에서 나를 근심케 하는 것을 자네에게 말하고자 해. 최근에 난 이미 자네에게 말했지. 우리의 우정이 시작되었을 때, 난 알레트에게 말했어. 이것은 복잡한 문제가 될 것이고, 난 펠릭스가 나에게 결코 주기를 원하지 않을 만한 것을 그로부터 가져오고 싶다고 말이야. 그리고 자네는 내가 결코 가기를 원하지 않을 만한 어떤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자 할 것이라고도 말했지. 처음부터 사실상 자네는 우리의 작업에 다른 사람을 포함시키자고 제안했었어. CERFI의 몇몇 구성원들 말이야. 난 말했지. 그건 절대로 아니라고 말이야. 내가 아는 한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완전히 존중하고, 당신은 나의 고립을, 나는 당신의 그룹들을 방해하지 않았어.[주석73] 

       

그들과 가까운 모든 친구들은 이러한 우정의 강렬함을 알아차렸다. “난 질과 펠릭스와 같은 식으로, 두 사람이 그토록 진정하게 사랑하고 가치를 나누는 것을 [다른 인간관계에서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적 결속은 총체적으로 인간적이며 감동적이었지요.”[주석74] 몇몇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1980년대 후반이 그랬다. “두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냉랭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요. 질이 해야 하는 무언가에 대해 펠릭스에게 말하고 있었는데, 그는 ‘응 알았어, 형편없는 늙은 친구야’라고 말했지요. 질이 묻기를 ‘마르코, 펠릭스가 이해가 되나?’라고 했는데, 난 ‘그럼’이라고 했어요. 그러자 그는 ‘오, 그래 펠릭스 그는 좋은 놈이지, 그렇고 말고 ... ’라고 했지요.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답니다.”[주석75] 그들의 첫 번째 작업 기간동안 다소 말썽이 있었던 것 같다. 침묵의 기간, 보다 적어진 만남의 기간이 보다 길게 이어지는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끝에 와서, 들뢰즈는 가타리라는 비싼 대가를 인수하면서, 텍스트로부터 그의 흔적을 없애길 원하기조차 한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했던 바, ‘탈-가타리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타리의 절망이 오랫동안 이어지는 어둠의 기간 동안, 들뢰즈는 홀로 남겨졌다. 비셀 뷔텔(Michel Butel)은 다음과 같은 일을 기억한다.      


들뢰즈는 지친 채로 신선한 공기를 접할 심산으로, 내게 전화했습니다. 그는 그날 저녁에 뭘할거냐고 물었지요. 난 스포츠광답게 유럽컵 챔피언쉽 경기를 볼 것이라고 말했어요. 들뢰즈가 말했습니다.“나 펠릭스네 집 파티에 갈 건데, 그는 누군가가 오길 원해.” 나는 갔고 (...) 펠릭스는 무슨 사제처럼 바닥에 정좌하고 앉아서 축구 결승전을 보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질은 그의 옆에 앉았지요. 들뢰즈는 티비로 축구경기를 보는 그 파티에서 벗어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습니다. 들뢰즈에게 두 사람이면 충분히 한 무리의 군중에 비견할 만하기 때문입니다.[주석76]      






[주석]


1) Robert Maggiori, interview with the author.

2) Jean-Pierre Muyard, interviewwith the author.

3) Gilles Deleuze,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Paris: Minuit, 1967). Translated into English by Jean McNeil as Coldness and Cruelty (New York: Zone Books, 2001).

4) Jean-Pierre Muyard, interviewwith the author.

5) Ibid.

6) Félix Guattari, "Machine et structure," Change 12 (1969). Reprinted in Félix Guattari, Psychoanalyse et transversalité (Paris: Maspero, 1972), 240—248.

7) English quotations are from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 Paul Patt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Gilles Deleuze, The Logic of Sense, trans. Mark Lest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0).

8) Félix Guattari, autobiographical interview with Éve Cloarec (October 27, 1984), Institut des manuscrits de l'édition contemporaine (IMEC) archives.

9) Gilles Deleuze with Claire Parnet, L‘abécédaire de Gilles Deleuze(1988) , 3 DVDs (Montparnasse: Arte Video, 1997). This was a video produced by Pierre-André Boutang shown on Arte in 1996. See also http://www.IangIab.wayne.edu/CStivaIe/D-G/ABC1.htm1

10) Frangois Fourquet, letter to Gérard Laborde (August 19, 1969), related by Francois Fourquet.

11) Jean-Pierre Muyard, interview with the author.

12) Félix Guattari, letter to Gilles Deleuze (April 5, 1969), IMEC archives.

13) Ibid.

14) Gilles Deleuze, letter to Félix Guattari (May 13, 1969), IMEC archives.

15) Ibid.

16) Ibid.

17) Félix Guattari, Psychoanalyse et transversalité.

18) Félix Guattari, letter to Gilles Deleuze (June 1, 1969), IMEC archives.

19) Félix Guattari created the FGERI in 1965.

20) Félix Guattari, letter to Gilles Deleuze (June 1, 1969), IMEC archives.

21) Gilles Deleuze, letter to Félix Guattari (July 16, 1969), IMEC archives.

22) Ibid.

23) Ibid.

24) Félix Guattari, letter to Gilles Deleuze (July 19, 1969), information provided by Frangois Fourquet.

25) Félix Guattari, some notes on President Schreber, sent to Gilles Deleuze on July 25, 1969, IMEC archives.

26) Robert Maggiori, interview with the author.

27) CERFI, or Centre d'études, de recherches, et defonnation institutionelles, was a social-science research group created by Guattari in the late 1960s. See chapter 15.

28) This is confirmed in Stéphane Nadaud, Écrits pour I'Anti-Oedipe (Paris: Lignes- Manifeste, 2004).

29) Arlette Donati, interviewed by Éve Cloarec (October 25, 1984), IMEC archives.

30) Alain Aptekman, interview with the author.

31) Félix Guattari, "Deleuze and Guattari s'expliquent," roundtable with Francois Chåtelet, Pierre Clastres, Roger Dadoun, Serge Leclaire, Maurice Nadeau, Raphael Pividal, Pierre Orse, and Horace Torrubia, La Quinzaine Littéraire 143 (June 16—30, 1972). Reprinted in Gilles Deleuze, L'ile déserte etautres textes. Texteset entretiens 1953—1974, ed. David Lapoujade (Paris: Minuit, 2002), 301. Translated by Mike Taormina as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New York: Semiotexte, 2003).

32) Ibid., 304—305.

33) References are to the English translation by Hugh Tomlinson and Graham Burchell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34) Gilles Deleuze, quoted by Robert Maggiori in Libération (September 12, 1991). Reprinted in Robert Maggiori, La philosophie aujour le jour (Paris: Flammarion, 1994), 374.

35) Ibid., 374—375 

36) Ibid.,375.

37) Ibid.,375-376.

38) Ibid., 376.

39) Félix Guattari, quoted in ibid., 376.

40) Gilles Deleuze, quoted in ibid., 376

41) Ibid.,377.

42) Gilles Deleuze, Cahiers du Cinéma 271 (November 1976). Reprinted in Gilles Deleuze, Pourparlers (Paris: Minuit, 1990), 65. Translated as Negotiations, trans. Martin Joughli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5), 45.

43) 배치(Agencement)는 들뢰즈에게 기초주체였다. 그것은 몇몇 요소들의 시간적 조우(이질적인 요소들의 중요성)를 의미한다(운동과 시간의 중요성 때문에). 이것은 예컨대 어떤 대상의 지각과 같은 것을 함축하는 맥락을 닮은 뭔가를 창조한다. 이 개념은 ‘assemblage’ 그리고 ‘arrangement’로 번역될 수 있는데, 들뢰즈는 여기 채택된 번역어에 대해 찬성했다. Stéphane Nadaud, Écritspour I'Anti-Oedipe, 12.

44) Gilles Deleuze, in Le Magazine Littéraire 257 (September 1988), interviewed by Raymond Bellour and Frangois Ewald. Reprinted in Deleuze, Pourparlers, 187; translated in Deleuze, Negotiations, 136. All quotations from this translation.

45) Félix Guattari, in Robert Maggiori, La philosophie au jour le jour, 378.

46) Gilles Deleuze, letter to Kuniichi Uno (October 25, 1982). Reprinted in Gilles Deleuze, Deux régimes de fous. Textes et entretiens, ed. David Lapoujade (Paris: Minuit, 2003), 185. Translated as Two Regimes ofMadness (New York: Semiotexte, 2006).

47) Ibid., 218.

48) Ibid.

49) Ibid., 219.

50) Gilles Deleuze, L'arc Reprinted in Deleuze, Pourparlers, 24; translated in Deleuze, Negotiations, 13.

51) Gérard F romanger, interview with Virginie Linhart.

52) Jean-Pierre Faye, interview with Virginie Linhart.

53) Gilles Deleuze, letter to Kuniichi Uno (October 25, 1982). Reprinted in Gilles Deleuze, Deux régimes defous, 219—220.

54) Ibid., 220.

55) Gilles Deleuze, letter to Félix Guattari (undated) , IMEC archives.

56) Félix Guattari, Journal (November 13, 1971) , NRF no. 564 (January 2003), 357.

57) Félix Guattari, JournaI (October 6, 1972). Quoted in Stéphane Nadaud, Écritspour l'Anti-Oedipe, 490.

58) Félix Guattari, Journal (October 13, 1972); quoted in Stéphane Nadaud, Écritspour l'Anti-Oedipe, 496.

59)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xxi.

60) Arnaud Bouaniche, "Le mode d'écriture de I'Anti-Oedipe, littéralité et transversalité," presentation at the Bordeaux philosophyworkshops, Poitiers, Toulouse, organized by Jean-Christophe Goddard (December 2—3, 2005). See Arnaud Bouaniche, Gilles Deleuze, une introduction (Paris: Pocket-La Découverte, 2007).

61) Gilles Deleuze, "Pensée nomade" (1972). Reprinted in Gilles Deleuze, L'ile déserte et autres textes, 353.

62) Ibid., 354.

63) Félix Guattari, Journal (October 14, 1972), quoted in Stéphane Nadaud, Écritspour I'Anti-Oedipe, 497.

64)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Paris: Minuit, 1975). Translated by Dana Polan as Kafka: Toward a Theory of Minor Literatur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6.

65) Ibid., 149.

66) Gilles Deleuze, letter to Kuniichi Uno, "How we worked together" (July 25, 1984). Reprinted in Deux régimes de fous, 220.

67) Ibid.

68) Gilles Deleuze, undated letter to Félix Guattari (early 1980s), IMEC archives.

69) Gilles Deleuze, undated letter to Félix Guattari (1981), IMEC archives.

70) Robert Maggiori, interview with the author.

71) Félix Guattari, typed notes on What Is Philosophy? IMEC archives.

72)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Rhizome (Paris: Minuit, 1976), 29.

73) Gilles Deleuze, letter to Félix Guattari (June 24, 1973), IMEC archives.

74) Gianmarco Montesano, interview with Virginie Linhart.

75) Gianmarco Montesano, interview with Virginie Linhart.

76) Michel Butel, interview with Virginie Linhar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