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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Aug 27. 2019

디지털 대상은 존재하는가?

이 책은 아마 많은 분들이 모르고 있을 것 같다. 육 후이는 기술철학 분야에서 이제 막 떠 오르는 신성이니까. 물론 이 책도 누군가 번역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뭐 상관없다. 나 좋자고 하는 번역이다. 누군가 좋아해 주면 더 좋고. 
Yuk Hui


Bernard Stiegler



『디지털 대상의 실존에 대하여』(Yuk Hui, 2016)1) 


서문

-베르나르 스티글러 / 다니엘 로스 옮김 


육 후이의 이 책은 여러 방면에서 특출한 저작이다. 무엇보다 저자의 사유를 구체화하기 위해 그가 다루는 원자료들과 그 질문들의 넓은 시각 덕분에 그러한데 그는 이를 영혼과 정신에 있어서 보기드문 엄격함과 매우 가치있는 개방성으로 해내고 있다. 정신의 개방성(정신의 자유로움, Ouverture d'esprit)은 이 경우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육 후이는 이러한 개방성, 즉 정신적 삶으로서의 그러한 개방성을 실행하는데, 규모의 관계성(relations of scale)과 크기정도(orders of magnitude)2)라는 방법을 통해 철저하게 진행한다. 그는 인문사회과학과 더불어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인지론과 현상학 그리고 컴퓨터 이론을 소환하며, 이를 통해 그것들 간에 존재하는 관계와 비관계가 개념화되지 않은 규모의 문제라는 점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그의 이론은 어떤 가장 관대한 사유의 형식이다. 즉 그는 철학과 이론들을 크기정도의 측면에서 관련시키는 규모들 위에 위치시킴으로써 모든 방식의 엄격하고 근원적인 사유에 대해 환대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한다. 


누군가는 현대 지식의 군도(archipelago)를 합리적으로 질서짓는 어떤 기획 안에서 철지난 체계의 욕망을 보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틀렸다. 그러한 체계는 육 후이에게 실재로 하나의 질문일테지만 크기정도, 즉 관계성 측면에서 정돈된 크기정도는 그러한 질문을 훌쩍 넘어선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하나의 질문이기 보다는 [학문적] 환경(milieux)이다. 과학과 자동화 기술 그리고 자동화 이론, 이를테면 루드빅 폰 버탈란피(Ludwig von Bertalanffy)에서부터 빅 데이터에 이르기까지, 인공두뇌학을 지나 정보이론과 오픈 시스템 이론 그리고 열역학과 생물학에서는 질문을 변형하고 재활성화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또한 그것[크기정도라는 방법론에 따른 체계]은 넓은 의미에서 체계에 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갱신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체계가 세계화된 자본주의 장치의 생산을 형성하는 한에서, 그 체계는 맑스가 『요강』의 '기계에 관한 단상'에서 열어젖힌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 즉 이 정치경제학적 지평 안에서부터이다. 


하지만 '디지털 대상'이라는 개념으로 육 후이는, 산업적 혁신으로부터 출현하여 인공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재형성하는 역동적 체계 안에서, 형성과 해체를 반복하는 그런 규모의 새로운 상대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가능성들도 보여주는데, 이것은 가능성들이 도출되는 체계를 넘어서 그리고 그 위에서 늘 동역학적으로 초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러한 시스템[기계적, 동력학적 시스템]은 하나의 체계로서뿐 아니라 무엇보다 전개체적인 환경(milieu)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개체적인 것의 바깥으로부터, 질베르 시몽동이 연합된 환경(associated milieu)이라고 불렀던 것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환경’이라는 말은 하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육 후이는 시몽동을 경유한다. 하지만 그는 또한 하이데거를 재소환하고, 그들 간의 상호대면을 시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이데거 자신이 야콥 폰 윅스킬(Jacob von Uexkkul)의 독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에게 환경의 문제는 주변세계(Umwelt)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존재와 시간』의 실존적 분석 안에서 그 단어의 개념내용을 구성하는데 힘썼다. 


디지털 대상의 개념에 기반한 오늘날의 자동화 시스템을 이해한다는 것은, 따라서 전개체적인 환경, 개체, 세계, 세계-내-존재, 손 안에 있음(Zuhandenheit) 그리고 이것의 연합된 환경이라는 경로를 통해 재정의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이데거가 탐색한 ‘닦달(Gestell)’과 존재사건(Ereignis)이라는 개념을 해석함으로써 그가 탐구한 것으로부터 사이버네틱 시대에 대한 새로운 원천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셸링에 관한 강의에서 하이데거가 수행한 체계 분석은 재해석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3) 20세기에는 칸트에 의해 완결된 ‘관념론 체계’로부터 발생된 근대성의 철학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체계 이론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만약 하이데거가 논증했듯이, 체계의 개념이 셸링에 있어서 영혼[정신]의 자유에 대한 질문과 불가분하다면, 이에 따라 체계 개념이 사이버네틱 시대의 ‘닦달’이라는 새로운 방식 안에서 제기된다면, 규모[척도]와 크기 정도(scale and orders of magnitude) 간의 관계를 직조하는 개체화 과정에 대한 분석과 그 관계의 실재성과 관련하여 시몽동을 재정의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디지털 대상의 실존에 관하여』와 더불어 영감을 받으리라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산업 환경(industrial milieu)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데, 이 환경은 젊은 헤겔, 횔덜린 그리고 셸링 모두가 칸트의 관념론을 두고 논쟁하던 바로 그 시기 동안 처음 출현하기 시작했다. ‘열역학’을 비롯하여 이 시기에 나타난 과학 개념들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형성된 여러 체계 이론들의 핵심이 된다. 하지만 이 20세기 체계이론은 이미 이 세 명의 사상가들로부터 빠져나왔으며, 그 이유는 매우 특이하게도 그러한 학문적[과학적] 개념들(일리아 프리고진과 이사벨 스텐저스가 생각하려고 한 ‘새로운 동맹’ 안에서 우리가 모색하며 발견한 ‘새로운 합리성’을 형성하는 개념들)이, 그것들의 기술적 구체화, 즉 증기기관에서 나노기술과 네트워크 컴퓨터를 지나고 그것들과 대면하면서 바로 우리 시대에 이르러 모두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이 중 네트워크 컴퓨터는 1993년 이래 있어 왔으며, 이로부터 디지털 대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체계는 이제 어떤 망상조직[그물조직]화된 환경이 되고 있거나, 시몽동이 기술지리학적 환경4)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실존의 유형’(type of existence)이라는 의미에서 실존의 양상과 관련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디지털 대상의 실존에 관하여』는 이 특별히 새로운 대상의 유형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한다. 체계가 망상화된 환경으로 진입할수록 이러한 체계 생성의 기술적 구체화들은 ‘기능적 어리석음’(functional stupidity)5)의 형태를 포함하여 기능적인 도전들을 야기한다. 『디지털 대상의 실존에 관하여』가 어떤 ‘체계’의 생산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의 개념들은 체계적 사유의 다양한 형식들뿐 아니라 전산과정(computational concretions)을 생산하는 자동화 체계로부터도 도출된다. 


이러한 개념들 가운데, 재귀 함수(recursive function)6)는 중심적이다. 재귀(recursion)란 알고리듬과 전산기능을 통해 전산화된 개발체계(computerized systems of exploitation)에 의한 실행을 의미한다. 이로써 육 후이는 컴퓨터 과학과 인공지능(AI) 연구에 있어서 최초의 행동가이자 이론가가 된다.7) 더 나아가 디지털 대상의 특성으로서 재귀는 이 책이 그러한 대상에 대한 탐구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바, ‘세 번째 미리-당김(tertiary protention)’이라는 개념의 핵심에 놓인다. 후설을 경유함으로써 육 후이는 오늘날, 시몽동이 시간을 사유하면서 이해했던 관계의 실재성 이후 하나의 ‘새로운 종합’으로서 시간을 재사유하고자 ‘세 번째 미리-당김’이라는 이 개념을 활용하는 것이다. 


디지털 대상은 완전히 관계적이다. 그 자체로 디지털 대상은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이를테면 GML, SGML, HTML 또는 XML과 같은 인터넷 언어의 규범이나 표준)인 사회공학적 인공물들과 더불어, 디지털 환경(digital milieu)을 조성한다. 이것은 루치아노 플로리디(Luciano Floridi)가 정보역(infosphere)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적절하게 이해될 수 없다. 정보역이라는 개념을 넘어, 이미 본 바와 같이 우리는 연합된 환경, 전개체적 환경, 손 앞에 있음(Vorhandenheit), 손 안에 있음(Zuhandenheit)이라는 개념을 통과하되, 이 개념들을 재정의해야 한다. 디지털 대상에 대한 이러한 이론은 어떤 새로운 ‘제일 철학’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 철학을 근본적으로 참조하는 일반적인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육 후이는 월드 와이드 웹 협회(W3C)8)의 질문과 문제의식, 그리고 기획들, 그리고 팀 베르너스-리(Tim Berners-Lee)에 의해 제기되고 사유된 시맨틱 웹(semantic web)9)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것은 베리 스미스(Berry Smith)에게서 일종의 형식 존재론, 앤디 클락(Andy Clark)에게서 ‘확장된 의식’(extended mind) 등등을 의미한다. 


연구의 방법론적인 지침으로 돌아오자면, 그것의 즉각적인 개념적 결론들과 야심이 의미하는 바는 필연적으로 꽤나 오랜 기간을 겨냥하고, 포함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몽동의 관계의 실재론이 기술적 도식을 크기정도들 간의 소통을 위한 변환적 작동자(transductive operator)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그 중요성, 대담함,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접근의 막대한 영향력(enormity)을 분명히 한다(나는 여기서 ‘막대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랭보가 그의 ‘투시’(voyance)의 사유를 통해 전개한 의미로 사용한다.)10) 


크기정도가 이러한 관계들의 실재론(이는 뱅상 봉땅Vincent Bontemps이 시몽동의 기술에 대한 강의11)를 분석하면서 밝힌 것이다)을 구성한다는 탁월한 시도에 기반하여, 육 후이는 글자 그대로 하이데거를 의문에 부침으로써 시간의 문제를 재정립하려고 하며, 그것을 넘어 도식성(schematism)과 관련하여 칸트와 『순수이성비판』도 또한 의문시한다. 그는 이를 그의 근본 개념인 ‘세 번째 미리당김’을 도입함으로써 수행한다. 이 지점을 분명히 하기 전에, 우리는 크기정도에 관한 질문이 처음으로 가스통 바슐라르의 연구에서 출현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의 저작 안에서 시몽동이 끊임없이 대화하는 사상가가 바슐라르이기도 하다. 또 다른 사상가는 강길렘이다.) 바슐라르는 현상학적 사유를 설명하면서, 도구에 관한 질문을 통해 크기정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20세기에 물리학의 영역에서 정밀한 방식으로 분명해진 것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이 드러낸 바, 규모의 상대성에 관한 질문이다. 


세 번째 미리당김의 개념은 내가 시도한 세 번째 다시당김(retention)과 공명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한 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판에 나오는 상상력의 문제를 재사유하게 된다. 나는 『기술과 시간』 3권에서 세 번째 다시당김이 후설이 말한 첫 번째 다시당김과 두 번째 다시 당김 사이에 있는 활동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숨겨진 조건이라고 논증했다. 이 논증은 앙드레 르루아-구랑(Andre Leroi-Gourhan)이 시간과 공간을 인간이 기술화함으로써 지배하는 어떤 과정으로서의 인간화(hominization)라고 묘사했던 것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 운동의 기술적 외재화에 의해 발생된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다시당김은 [칸트적인] 지성의 도식론의 조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것은 그 자체로 범주의 초월적 연역의 조건인 것이다. 


육 후이는 디지털적인 [의미에서] 세 번째 다시당김(retention)이 철학과 과학을 요청한다고 보는데, 이때 철학과 과학은 이 새로운 유형의 대상, 즉 디지털 대상을 디지털적 미리당김과 관련시키면서, 재귀함수를 활용하여 알고리듬적으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자동화된 환경 안에서 묘사한다. 알고리듬론은 실뱅 오로(Sylvain Auroux) 이후 내가 문법화(grammatization)의 과정이라고 부른 역사에 속한다. 이것이 바로 육 후이에 의해 파악된 바, 디지털 대상이 그토록 특유해진 그 과정이다. 디지털 대상은 그가 재귀 함수라고 부른 것을 구성한다. 그것은 디지털 대상이 직조되는 이산화된(discretised) 관계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이 디지털 대상은 스스로를 망상화(reticulating)하면서, 그에 따라 그 자신의 실존적 관계들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목적은, 문화와 기술을 조화시키려는 기획을 담고 있는 한 시몽동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문화와 기술 사이의 대립과 오해가 어떤 곤란하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맥락 안에 놓인다. 그와 같은 것은 일반적으로 ‘사회 공학’이라고 불리는 맥락인데, 특히 페이스북이 가진 정규화된 도식들은 『디지털 대상의 실존에 대하여』의 핵심적인 예시를 구성한다. 


디지털 대상, 다시 말해 전산 대상들은 기술적 본성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이데거와 시몽동이 사유했던 방식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육 후이는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시몽동을 넘어 기술적 개체화(technical individuation)를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더 이상 기술적 환경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 관계의 중심부에 어떤 해리작용(dissociation)을 도입하는 것이다. 여기서 역동적 관계란 토마스 번즈(Thomas Berns)와 앙투아네트 루브로이(Antoinette Rouvroy)가 묘사했던 바, 알고리즘 통치성(algorithmic governmentality)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데이터 경제의 맥락에서 에브게니 모로조프(Evegeny Morozov)가 기술 정치학이라고 불렀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대상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대상(또는 고대적 의미에서의 ‘실체’)에 대한 사유라는 관점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 수수께끼처럼 남겨져 있다. 이것은 칸트적 의미에서 직관의 대상도 아니며 경험적 대상도 아니다. 과학적 대상과 이 대상이 공유하는 어떤 상태는 과학적 도구로부터 출현한다는 점이다.12) 디지털 대상은 데이터 즉 주어진 것들(données)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장-뤽 마리옹이 현상학 개념에 의뢰하면서 이해하는 그러한 감각 안에서의 어떤 줌(donnation)의 결과가 아니다. 디지털 대상은 데이터, 메타데이터, 데이터 형식(data format), “온톨로지들”13) 그리고 모든 것이 문법표지화(grammatization) 과정에 속하는 여타 형식요소들(formalisms)로 구성된다. 그리고 디지털 대상은 이러한 것들이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성을 통해 직조되는 디지털 환경(milieu)을 형성하는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연합된 환경(associated milieu)만이 아니라 어떤 해리된 환경(dissociated milieu)의 가능성도 열어 놓는다. 즉 개체화와 비개체화 양자의 새로운 형식을 초래하는 것이다. 디지털 대상은 재귀함수를 통해 형성되고 이에 따라 새로운 디지털적인 미리당김을 구성함으로써 프로그램 가능하다. 이 프로그램 가능성은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언급한 의미에서 고도로 파르마콘적(pharmacological)이다. 그리고 [이 양면적인 것 중] 유익한 측면에 대한 의문이 이 디지털 파르마콘에 의해 제기되는데, 이는 소여(giveness), 즉 ‘주어짐’(donation)에 대한 새로운 문제기에 해당된다.14) 


이것은 인간이 오직 죽음을 예상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즉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유지하는 어떤 미리당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그들의 불가능한 미리당김이기도 하다(공통적인 불가능성, 다시 말해 죽음은 사람들이 살아 가는 동안에는 결코 그들에서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내면적 삶의 중심에 각인된 공통된 비결정성이기도 하다). 그들은 세 번째 다시당김(retension)15) 안에서 결정되지 않은 잠재적인 '미리당김의 특성'을 기록한다. 이는 네트워크와 사람들의 배려(Besorgen)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들은 '심려'[염려, 마음씀](Sorge)의 상실로 끊임없이 위협받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상실은 어떤 망각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육 후이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언어, 글쓰기, 도구들 그리고 제스처”의 기술 안에서 그들의 기억을 외면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기술이, 하이데거가 명명한 바 ‘현존재’의 역사성(historicity)을 조건 지으면서 이미-거기 그 자체로 그것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로 실존적 질문들이 디지털 환경에서 등장하는데, 이 환경은 후이가 6장에서 말하는 바, 그 안에서 "인간 정신이 반복을 이해하지만, 그러한 반복의 경로를 계속 유지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인간과 기계의 연결이 디지털 사회의 네트워크들을 통해 (많은 기계들과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망상조직화되었을 때,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정확히 이 지적에서 그리고 컴퓨터 해석학16)의 질문이 도입된 이후에 세 번째 미리당김에 관한 질문이 생겨난다. 후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간과 기계 양자가 관계들의 근원적인 관점에서 이해될 때, 그것은 새로운 능력을 생산하는데, ... 나는 그것을 세 번째 미리당김이라고 이름붙인다." 


미리 당김의 새로운 형식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수동적 종합과 반복의 문제를 통해 다루어진 것이기도 한데, 이는 범주들과 알고리듬들의 산업화로부터 야기된다. 이런 방식으로 시간의 새로운 종합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디지털 대상에 의해 세 번째 미리당김으로 이러한 시간이 정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현대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가져다 주지만, 이러한 편의는 또한 기능들 뿐 아니라 시공간의 측면에서 수렴(convergence, 디지털 컨버전스17))의 표현으로서 '심려'(care)의 기계적 형식으로 개체와 집합체 둘 모두에 있어서의 '배려'의 구조가 대체되리라는 위협을 가져다 준다."(6장) 


이것은 따라서 "배려의 새로운 구조를 위한 탐구"에 관한 하나의 질문인데, 이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통제 사회에서 집합적, 정신적 개체들의 분석적 문법화에 의해 생산되는 "분리체들"[분기체](dividuals)이라고 할 때의 그 의미에서 "분리"[분기](dividuation)로 스스로를 현전시키는 것과 대면하게 된다. 그 안에서 "각각의 사회적 원자에 관한 관심은 더 작은 조각들로 얇게 썰려 나가고 네트워크를 가로질러 분산된다. 이것은 상업적 목적을 위한 상태 업데이트, 상호작용, 광고와 같은 세번째 미리당김의 메커니즘에 의해 수행된다."(6장) 

육 후이는 내가 기관-정치학적(organologico-political)이라고 부른 어떤 전망을 열어놓음으로써 그의 책을 마무리 한다. 이러한 전망은 세번 째 미리당김의 네트워크에 관한 새로운 건축술을 창조함으로써 디지털 환경에 실존적인 미리당김들의 재구축의 가능성에 관한 조건을 기획하는 것이다. 디지털 환경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참여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집합적 개체의 과정을 실존적인 미리당김의 지평을 구축하는 하나나 많은 그룹들의 구성에 새겨 넣는 것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은 과정들은 “창조적인 제약”(creative constraint)을 통과한다. 여기서 “사용자들은 그 혹은 그녀가 어떤 그룹에 참여하거나 어떤 프로젝트를 창작함에 있어서 전체 기능들을 사용할 수 있다”(6장). 또한 이에 따라 연합된 환경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육 후이는 야콥 모레노(Jacob Moreno)18)의 그래프를 시몽동적인 의미에서 집합적 개체화의 과정으로 대체한 것이다. 

[역자그림 1]모레노의『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에 실린 사회도식(sociogram)


따라서 이러한 접근은 '예술산업회'와 '연구 혁신을 위한 기구'(IRI)에서 우리가 일반 기관학(organology)이라고 부른 영역 안에 놓인다. 후자의 기구는 언제나 이론적이면서 실천적이다. 육 후이에 의해 달성된 연구작업들은 그가 IRI에서 해리 할핀(Harry Halpin)과 더불어 수행된 것들이다. 이 연구는 최근에 해석학적 웹이라는 관점에서 탐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 점에서 그 프로젝트 실행 그룹은 횡단개체성(transindividuation)의 과정이기도 한 집합적 개체의 과정들을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실존적 미리당김[의 과정들]을 재구축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래픽 언어의 주석에 기초해서 생겨나는데, 이를 통해 어떤 도움이 되는 해석학적 플랫폼 위에서, 그리고 온라인 교육이라는 맥락에서 대립들은 수준별로 조정될 수 있게 되며, 공유된다.  


저자 서론- 디지털 대상에 대한 탐구 개요

인간은 항상 인공적이고 자연적인 대상들에 둘러싸인 잡종적 환경 안에서 살아 왔다.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두 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며, 더군다나 인공적인 대상이 단순히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도구인 것만도 아니다. 이와 달리 인공적 대상들은 인간적 경험과 실존을 조건짓는 역동적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 인공적인 것이 끊임없이 더 큰 구체성을 향해 전개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것의 특유한 역사적 조건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milieu)도 역시 변화해 왔다. 비디오테이프는 유투브 비디오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저녁 초대는 더 이상 편지를 통해 전달되지 않는다. 전화 사용은 거의 사라지고, 이메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페이스북 행사초대 기능은 더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대상들은 기본적으로 데이터이고, 공유가능하며, 통제가능하다. 그것들은 가시적이건 비가시적이건 간에 시스템의 환경설정(configuration)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디지털 대상들에 대한 연구작업을 수행하자고 제안한다. 독자는 이미 디지털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버그, 바이러스, 하드웨어 구성물, 가젯, 한 조각의 코드, 한 묶음의 바이너리 수들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연구를 보다 집중적으로 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의 범위를 데이터에 한정할 것이다. 나는 디지털 대상이라는 말을 컴퓨터 스크린 위에 모양을 갖춰 있거나, 프로그램의 후단부(back end)19)에 숨겨져 있는 대상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구조와 도식에 따라 규제되는 데이터와 메타데이터로 구성된다. 메타데이터는 말그대로 데이터에 대한 데이터다. 도식은 메타데이터에 의미론적이고 기능적인 의미화를 부여한다. 또한 전산처리과정에서 이것들은 온톨로지라고 불리운다. 이 단어는 즉각 철학과 연관된다. 이어지는 그림1은 아주 단순한 디지털 대상을 보여주는데(하이데거에 관한 조각의 접속 정보contact information),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라는 사람(버틀란트 러셀을 아는 누군가로)을 기술하는 메타데이터를 나타낸다. 이 메타데이터는 FOAF(Friend of a Friend)라고 불리는 웹 온톨로지를 사용하여 도식화된 것이다. 



물론 디지털 대상들이 접속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것들은 오늘날의 유비쿼터스 매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매국면을 침범하는 산업적 대상의 새로운 형태를 구성한다. 이를테면 온라인 비디오들, 이미지들, 텍스트 파일들, 페이스북 프로파일, 그리고 초대장들. 만약 우리가 페이스북 데이터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방식을 기술하는 페이스북 그래픽 API 20)를 살핀다면21), 그 모든 요소들이 페이스북 엔지니어에 의해 대상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지 말아야 한다(그림2). 그것들은 우리가 그것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스크린 위에도 있고, 후단부 또는 컴퓨터 프로그램 내부에도 존재한다. 컴퓨터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객체 지향적 프로그래밍(object-oriented programming, OOP)22)에서 사용되는 대상과 그것들은 매우 유사하다. 우리의 탐구는 주로 디지털 대상의 일반 개념과 그 재현 그리고 범주화에 집중할 것이고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에는 다소 덜 집중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책이 준비될 것이다. 그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대상의 본성은 여전히 명확해져야 한다. 이 주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 지금까지 발전 되어온 철학적 개념화의 방식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후기 근대 철학들에 이르기까지 데카르트, 칸트, 헤겔, 그리고 후설과 같은 사상가들을 거치면서 철학은 주로 실체와 사물의 현상에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대체로 자연적 대상의 이해에만 제한되었고, 따라서 디지털 대상의 문제들을 규명하는데 무능력하다. 철학의 개념적 도식들은 기계류와 같은 기술적 대상들에 적용될 때 단순히 정원 안의 나무와 같은 자연적 대상처럼 그것들을 취급한다. 두번째로 컴퓨터 과학의 범위 내에서 대상에 관한 강력한 관념이 아직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것의 쓰임새가 대부분 데이터의 생산과 상호연관성, 패턴에 대한 수집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빅데이터의 경우 그러하다. 기술공학은 표현을 위한 한 묶음의 구조들 즉 실제적인 애플리케이션들에 있어서 디지털 대상에 대한 그 이해정도가 제한된다는 의미에서 부족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그 형식이 질료형상적 사고 안에서 이해된다는 의미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근 디지털 매체에 대한 반성들은 디지털 기기와 정보에 초점이 맞춰 있으며 데이터에 대한 관심은 점차 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디지털 '대상'의 개념은 여전히 밝혀져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요컨대 디지털 대상들은 실용적인 공학적 문제나 디지털적인 것들의 현상 정도로 파악된다. 반면 이들의 사물성(thinghood)과 실존적 위상은 거의 의문시되지 않고 있다. 



디지털 대상들의 실존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이 책에 남겨진 과제다. 이 연구는 콤퓨터공학과 철학 간의 상호관계를 전제한다. 몇몇 컴퓨터 공학의 질문은 이미 인식론적 질문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지향성(intentionality)이란 무엇인가?'라든지 '집합성(collectivity)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역으로 컴퓨터공학은 새로운 유형의 물질성에 기반한다. 이 물질성은 철학에 대해 근본적인 몇몇 개념들을 교란하는데, 이를테면 '대상이란 무엇인가?'라든지 '디지털 대상은 본질(substance)을 가지는가?'(또는 그런 방식으로 논해질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 그것이다. 이러한 동력학은 내가 간학제적인 양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구성하는데, 이는 상이한 작업 분야들의 통일성(unification)이 아니라 그것들의 아래에 놓인 단일성(unity)을 항상 전제한다. 이 서론에서 나는 좀 더 나아가 디지털 대상의 이론이 어째서 필요하며, 내가 이 과제를 여기서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나의 중심적인 연구의 질문들과 방법들을 소개하면서 설명할 것이다. 서문의 나머지 부분들은 이 책의 핵심 관심사들에 대해,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의 순서와는 반대 방향에 따라 설명이 구성될 것이다. 


대상-디지털-실존의 방향. 

1부에서의 '대상'이란 말은 철학사 안에 디지털 대상의 출현을 이해하기 위한 길을 닦는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통해 디지털 대상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의해 이미 예견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디지털 대상이 역사적이고 기술적인 발전의 결과로 출현하였으며, 그러므로 특정한 형이상학적 전제를 물려받았음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디지털 대상이 철학의 주요 대상으로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흄, 칸트, 헤겔, 그리고 후설이라는 현상학적 전통 안에서 자연적 대상을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와 시몽동 안에서 기술적 대상으로의 이동을 사유하고, 디지털 대상에 대한 사유로 나아간다. 나는 또한 이 기획을 하이데거에 대한 신중한 독서를 바탕으로 그래함 하만(Graham Harman)의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23)과 명확히 구분할 것이다.  


2부의 제목인 '디지털'은 디지털 개념을 도입하면서 그와 더불어 디지털 대상도 가져온다. 나는 디지털 개념을 라이프니츠로부터 그레고리 샤으탱(Gregory Chaitin)과 에드워드 프레드킨과 같은 현대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살필 것이다. 이들은 디지털이 현상과 본질을 포함하여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체계라고 이해한다. 나는 샤으탱과 프레드킨의 디지털 물리학을 루치아노 플로리디의 연구와 대비할 것이다. 왜냐하면 플로리디는 정보철학을 발전시키면서 이 둘의 접근방식에 중대한 비판을 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자신의 디지털 대상 개념으로 돌아가서 관계의 유물론을 스케치할 것이다. 


3부 '실존'에서 나는 이 연구의 방법론에 천착하는데 이를 가스통 바슐라르와 시몽동을 독해함으로써 설명할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분석의 방법으로서, 크기정도 혹은 입도(orders of magnitude or granularity)에 따른 것이다. 이 분석법은 기술 안에 도입된 추상의 수준으로부터 차이와 유사성을 설명한다. 이 방법론으로 우리는 디지털 대상들의 실존적 문제틀과 실존에 관한 질문을 표명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전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실존은 처음에 현행적 실체로서의 존재자들(ens, Seiendes)과 연관된 어떤 존재론적 질문과 더불어 우리에게 현전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가? 이것은 근본적으로 형식 존재론과 형식 논리와 관련된다. 전자는 언제나 있어왔지만, 베리 스미스나 니콜라 구아리노와 다른 사람들의 저작들에서는 특정한 분야를 형성한다. 후자는 계속 연구되어 온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어떤 몇몇 수학자들은 제외하고). 


두 번째로 3부는 존재(esse, Sein), 즉 대상이란 것이 실재로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된다.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거기 그리고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그것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 개념, 즉 존재와 존재자는 둘 다 ‘존재론적인 것’(ontological)에 구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서로 갈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세계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해석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개념들은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론적 차이’를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서문은 독자가 이 책의 정치적 아젠다에 참여하도록 초대함으로써 마무리 된다. 이것은 하이데거와 시몽동의 철학적 기획으로서, 망상조직과 컨버전스(수렴)의 여러 양태들에 대한 탐구와 관련된다. 하이데거와 시몽동이 탐구한 바에 따르면, 기술의 발전이, 예를 들어 전화기와 인터넷의 발명과 더불어 사물들을 더 가깝게 만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는 그가 사물(das Ding)이라고 불렀던 것으로부터 훨씬 더 멀리 나갈 것인데, 이는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관계에 관한 것이다. 시몽동에 의하면 과학과 기술, 즉 이론과 실천 간의 지식 생산의 분기는 문화와 기술의 대립을 초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사회를 통합하고 나아가 기술이 문화 안으로 재결합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철학적 사유가 요구되는 것이다. 


대상

자연적 대상들: 실체와 주체 사이

자연적 대상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채소나 동물과 같이 자연에 의해 주어진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자연적 대상이란 그것이 자연이든 또는 조직된 것이든 동일한 자연적 방식으로 분석되어진 모든 대상 안의 범주와 관점을 가리킨다. 여기서 자연적 방식은 하나의 대상이 그것의 특유한 존재를 결정하는 바, 본질이 파악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애초부터 대상 그 자체와 지식을 위한 대상을 전제한다. 이것은 절대적 확실성에 기여하는 연구작업으로서 사물 자체와 의식 사이의 상응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존재자를 실체와 우유성 개념으로 이해하자고 주장한다. 실체는 사물 아래에 놓여 있으며, 기체(hypokeimenon)를 품고 있는 주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실체라고 불리워지는 것은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엄격하게 최초의 것이다. 이것은 어떤 주체나 주체 안에, 예를 들어 개별적인 인간 또는 개별적인 말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다.”24)  


즉 실체는 ‘인간’ 류나 ‘말’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 안에서 관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오직 주체라고 일컬어지는 것일 수 있을 뿐이다.’25) 우유성이란 주체의 술어(속성)다. 명확하게도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어-술어 쌍을 어떤 문법적인 구조이면서 분류의 체계라고 지적한다. 분류화로서의 언어와 물리적 존재자로서의 사물 사이의 관계는 이미 확고한 것이다. 즉 『범주론』에서 제일 실체는 어떤 보편적인 ‘이것’으로 남는데, 이는 질료와 형상 양자의 조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더 세분화된 설명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형이상학』 Z권에 실체에 관한 생각으로 다소 흩어져 있다. 거기서 그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실재로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해당된다고 말한다.26) 여기서 실체는 본질(ousia)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한다. 그는 이때 실체를 기체(substratum)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기체는 감각적인 형상과 질료의 측면에서 기술될 수 있다. 감각적 형상은 “어떤 종류의 것”, 어떤 사물인 바와 관련되며, 질료는 “~으로 이루어진 것”과 관련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요소들 중 하나로 이것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형상 또는 질료, 또는 형상과 질료의 복합물. 이것들은 실체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후보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복합물 둘 모두를 실체로서 거부하는데, 전자는 그것이 주체의 어떤 속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고, 후자는 그것이 “본성적으로 후험적이며, 감각에 가깝기” 때문이다.27) 그는 결과적으로 형상이 유일하게 기체로 이해될 만한 방식이라고 결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Z 권에서 형상(form)을 말하면서 'morphe' 대신 'eidos'를 사용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eidos라는 말을 인위적 대상, 이를테면 건축가가 마음 속에 집의 형상을 떠올릴 때 사용한다. 따라서 τὸ τί ἦν εἶναι(무엇임)로서의 οὐσία(실체)는 eidos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그는 morphe라는 말을 존재자가 형상(form)과 질료(matter)로 이루어져 있다는 일반적 이해 안에서 사용하는 것이다.28)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지적해야 한다. 하나는 실체적 형상에 대한 질문이, 질료와 지성 둘 모두에 대한 결정사항을 동시에 드러내는 사물의 본질과 그것들의 재현과 관련하여 지속적인 철학적 질문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데카르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결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사유 아래에 놓인 대상은 주체이지 대상이 아니게 된다. 주체의 개념은 자아와의 연관성 덕분에 사물로부터 떨어지게 된다. 이때 자아란 이미 주체(의식/노에시스[noesis])와 실체(본질[essence]) 사이를 어렵사리 매개한다.29) 


주체-실체 문제는 자연적 대상의 철학적 개념성의 핵심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30) 나는 중세 철학에서 오랫동안 전개된 방식에 연루되지 않고 흄으로부터 후설에 이르기까지 제시된 바, 그 현상학적 접근에 즉각적으로 다가설 것을 제안한다. 이들은 대상을 항상 어떤 경험의 대상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논의전개의 방향성은 자연적 대상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스케치하기 위함이다. 이는 또한 어째서 현상학 전통이 기술적 대상과 디지털 대상을 파악하는데 실패한 것인지 설명하게 될 것이다. 영국 경험론은 실체에 대해 늘 미심쩍어했다. 왜냐하면 이 전통은 현상이 한 무더기의 경험적 감각자료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애초에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로크와 같은 초기 경험론자는 실체의 실존성을 고려하면서 그것을 여전히 미결정의 잔여로 간주하면서 의문시했고, 그러한 의문은 열려진 채로 남겨졌다.31) 그러나 흄은 실체의 관념을 총체적으로 거부했다. 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모든 관념은 감각인상들로부터 발전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어떤 것과 만나면서 앎의 계기를 야기한다. 만약 실체가 알려진다면, 그때 우리는 실체의 인상과 관념을 가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흄은 그의 철학적 분석에서 실체를 제거한다. 그것은 증명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사물에 대한 지식은 연합(association)에 의한 감각자료의 종합으로부터 나온다. 그는 어떤 관계들의 체계를 제안하는데, 이는 대상의 통일성에 관한 감각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한 묶음의 감각자료에 기반하는 것이다. 흄의 관계의 이론은, 내가 3부에서 제안하는 바, 디지털 대상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빛을 드리운다. 하지만 흄의 이론은 어떤 수동적인 종합32)으로 우리를 이끈다. 마치 대상들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와 같은 통일성의 필연성을 설명할 수 없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경험론과 합리론을 조화시킴으로써 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칸트는 어떤 형식적 구조를 제안하는데, 그는 그것을 경험의 가능조건에 놓인 것으로 논증한다. 칸트의 형식적 구조는 초월적이다. 즉 경험적 장 바깥에 그것이 있다는 의미다. 이 저작에서 칸트는 선험적 종합이 가능하다고 제시한다. 이것은 경험론 또는 합리론의 관점에서 용어상 모순이다. 경험론의 입장에서, 모든 경험은 후험적이며 따라서 종합적인 것이고, 경험적인 어떤 것은 선험적일 수 없다. 합리론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선험적인 것은 경험장 바깥에 있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경험을 넘어선다. 여기서 형식적 구조는, 마찬가지로 형식적으로 선험적인 종합을 이끌면서 어떤 선험적인 기능들의 체계를 제공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의 건축술은 이러한 형식주의가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는 초월적 감성론으로서 시간과 공간이 두 개의 순수직관으로 제시된다. 두 번째는 초월적 분석론으로, 초월적 연역을 수행하며 지성의 범주를 제기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초월적 변증론으로서 순수이성의 사용과 잘못된 사용을 다룬다. 칸트의 범주는 네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마지막 범주들은 앞선 두 범주의 종합이다. 범주는 도식으로 작동하는데, 그러는 동안 감각자료가 그것들 아래에 종합되며 초월적 파악의 진행을 통해 개념이 창조된다. 이러한 지성의 과정은 두 개의 구별되는 해석을 생산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뒤에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첫 번째 해석은 존재론과 컴퓨터 과학자들에 의해 채택된다. 그것은 보조적인 도식의 창조를 포함하는 바, 이를테면 메타자료 도식이 있다. 이것은 내재적인 논리적 기능자들을 통해 대상을 생산한다.33) 두번째 해석은 첫번째와는 매우 다른 접근이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수행한 것으로, 논리적 작동보다 시간적 과정으로 범주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의 가능조건을 정초하기 위한 칸트의 노력은 어떤 보수적 움직임이다. 왜냐하면 칸트에게 실체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충분히 대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자체'(Ding an sich)라는 다른 명명 아래에서 드러나는데, 이것은 현상계가 아니라 초월적 영역(noumena)에서 안식처를 찾기 때문이다. 우리가 칸트에 따라 알 수 있는 경험적 대상은 오직 현상적 경험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대상의 감성적 측면으로서, 이에 반해 우리는 그것이 진정 사물 자체인 바에 대해 파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자체를 파악하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결여 되어 있고, 신에게만 존재하는 어떤 지성적 직관을 요구한다. 칸트는 여기서 지성의 한계를 제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확실성은 현상계에 한정되어 있고, 그러므로 어떤 신앙의 영역에 여지를 남겨 놓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수적인 움직임은 피히테와 셸링과 같은 철학자에 의해 비판되었다. 이들은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이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헤겔이다. 


칸트에게서 우리는 대상의 지식과 대상자체를 구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지식은 대상적 세계 안에서의 우리 경험의 부분이다. 대상은 한 묶음의 감각자료가 종합될 때 알려진다. 초월적 능력들은 어떤 도구의 체계로 드러나면서, 지각과 종합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피히테, 셸링과 같이 헤겔은 알려지지 않는 물자체라는 관념을 거부했다. 실재로 피히테와 셸링은 칸트를 비판하면서 인간 지식의 근원으로 지성적 직관을 제안했다.34) [이와 달리] 헤겔은 절대적 시초35)로 지성적 직관을 거부하고, 즉자와 대자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실체와 주체 사이의 일치를 말한다. 헤겔의 의도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철학의 과학적 정신 안에서 작업하면서, 철학을 하나의 진정한 과학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칸트와 반대로 헤겔은 구성적 개념들의 충실한 조성에 있어서 이성의 중요성을 보존한 것이다.36) 우리가 보았던 것과 같이 칸트에게서 지성은 대상에 대한 초월적 파악을 허용하는 형식적 구조로 제시되며, 반면 이성은 이 과정에서 그것에 대한 반성 외에 아무런 역할도 가지지 않는다. 칸트의 지성이 형식적이고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헤겔은 사변이성이 진정한 경험으로 향해 가는 초석이라고 본 것이다. 헤겔에게 지식이란 대상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나 방법이 아니라, 지식 그 자체37) 특히 철학적 지식이며, 진리이며, 절대적이다. 헤겔은 이 명제를 『정신현상학』의 도입부에 정식화하면서 물자체와 의식 사이의 불일치를 즉각적으로 넘어선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이후 논의와 관련될 헤겔의 제안을 검토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대상이 감각적인 것들의 종합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경험론자들과 칸트의 주장에 반대하여 헤겔은 하나의 대상을 어떤 총체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의 명제는 '소논리학', 즉 '대상의 전개'와 관련된 세 번째 부분에서 명쾌해진다.38) 헤겔은 역학적, 화학적 전망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총체성을 통해 대상에 접근하자고 제안한다. 다발이론은 그 자체로 불충분한데, 그 이유는 논리적인 작동과정을 통해 데이터를 종합할 능력이 있는 기계체계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발이론, 또는 내가 그렇게 명명할 수 있다면, 원자론은 전산과정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러한 전체적 과정이 대상의 외양으로 주어지는 방법을 보여주는 새로운 체계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정신현상학』에서 발췌하여 하이데거가 그의 강의, 「헤겔의 경험개념」에서 하나하나 설명한 바는 우리에게 지각의 통일성 뿐만 아니라 통일성의 지각과 절대자로 향하는 변증법적 운동으로써 헤겔이 제기한 어떤 명징한 상을 부여한다.39) 대상이란 우리가 그것과 조우하면서 경험하는 것이며, 이미 우리 의식 안으로 존재자로 출현한다. 대상의 즉자와 그것의 의식 간의 구별은 극복된다.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가 탐구하는 대상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의식은 그것 자체의 기준에 의해 스스로를 제공하며, 탐구는 그 자신과 의식의 비교일 것이기 때문이다."40) 이러한 대립의 극복을 통해 헤겔이 의미하는 바는 실재적으로 실체로부터 주체의 평면으로 이동하는 단계이다. 이제 대상은 우리에게 하나의 대상으로 실존하며, 그것은 즉각적으로 두 개의 상이한 정체성으로 현전한다. 그것은 의식에 대한 즉자이면서 의식 안에서 그 자신의 지식이다.41) 이러한 두 가지 이성의 예화(examination)는 의식에 대한 두 번째 즉자를 생산한다. 경험에 대한 이런 이해는 처음부터 대상의 즉자태가 이미 유지되고 있으며, 이성의 역할은 그것의 개념(Begriff)에 도달하는 변증법적 운동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절대자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의 자기 의식에 의해 각인된 무차별화된 절대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우리가 역사에 대한 헤겔의 개념을 자기의식의 전개 역사로 고려할 때 드러난다. 

맑스를 통해 보다 많은 주목을 받은 그의 역사철학과 비교해서, 인지과학으로서의 헤겔의 현상학은 관념론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서와 달리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유형의 현상학이 앞서 나아갔는데, 그것은 에드문드 후설(Edmund Husserl)에 의해 정립되고 '기술현상학'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바로 이 '기술'(description)이라는 말의 사용이 후설과 헤겔을 명백하게 구별해주는 것이다. 후설에게 있어서 현상학은 의식의 앎을 통해 대상을 앞으로 뒤로 탐색해 가는 기술적(descriptive) 과정이다. 반면 헤겔에게 현상학은 자기 의식의 여러 단계가 변증법적 운동과 지양을 획득하는 사변적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상이한 현상학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 안으로 파고드는 또 다른 탐색이며, 모든 과학의 절대적 정초를 제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후설과 헤겔은 동일한 철학적 야심을 공유한다.42)

  

또한 후설의 현상학은 우리가 지향성(intentionality)의 운동을 통해 대상을 실재적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며, 존재자로서의 물자체를 어떤 신비한 것으로 보는 칸트의 의견을 거부한다. 후설은 수학자로 출발해서 결과적으로 논리와 의식의 철학자가 되었고, 마침내 문화의 철학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전체 지성을 포획하는 방식으로 대상의 이론을 종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간결하게 말하자면(후설 논리학은 5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후설은 모든 것을 어떤 가능한 지향적 대상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숫자는 하나의 사과와 같은 대상이다. 후설의 기획은 그가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과 상대주의라고 불렀던 것에 대립하여 진행된다. 후설에게 대상은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러한 주어짐은 감각적인 것의 발생에 의해 구성되어진다. 소박한 실재론과 상대주의를 폐기하기 위해, 현상학자는 판단중지(epoche)에서 시작하는데 이는 그 대상을 이미 구성하고 있는 어떤 전제나 편견을 괄호치는 것을 의미한다. 괄호치기 과정은 후설에게 어떠한 전제로부터도 자유로운 절대적 자아로 되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때 지향적 행위는 주체에서 대상으로 곧장 방향을 잡고 들어간다. 그리고 이 행위가 촉발하는 반성은 대상의 이념성(ideality)이 드러나는 어떤 지평을 구성한다. 이 이념성은 오직 이념화의 과정 안에서만 가능하며 의미화의 지평을 재구축한다. 


대상에 관해 근대 철학의 궤적은 이러한 핵심 상들을 언급함으로써 대상탐구의 이런저런 일반적 방향을 개방한다. 첫번째로 실체 개념을 뒤흔드는 회의주의가 있다. 실체의 초월성은 자신의 자리를 신에게서 발견한다. 다시 말해 실체란 신의 유출 안에 숨어 있고 따라서 인간 경험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위험한 것은 대상에 대한 어떤 절대적 지식이 내재적 평면으로 끌어내려짐으로써 쉽게 파괴로 이끌려 간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철학적 궤적은 과학적 방법의 힘을 발견하고 보증하는 것을 지향함으로써 과학의 정신과 함께 간다. 두번째로 의식은 궁극적으로 신비로운 것이며 그러한 궁극성 자체 즉 영원한 진리를 기술할 수 있는 어떠한 권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다양한 모델들은 마음을 파악하려고 시도하고 거기에 상이한 기제를 부여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마음이란 아무리 더 복잡하다 하더라도 탐구의 대상과 동일하며 우리가 물자체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조각의 스테이크나 양배추를 다루는 것과 유사하다. 흄, 칸트, 헤겔 그리고 후설에 있어 의식은 특정한 기능들로 가득 채워진 것일 뿐 아니라, 인식 기관(organon of knowing) 중 한 부분으로 체계화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기관'이라는 단어에 적합성을 허용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하다. 세번째로 인식의 역할은 총체적으로 마음에 할당된다. 다른 면에서 대상은 언제나 경험의 대상이다. 대상의 속성들은 경험 가능한 질들이며, 모든 앞선 철학자들은 대상을 알기 위해 그것을 수용하는 의식의 구조를 발견하고자 애를 쓴 것이다. 바면 그들은 대상 자체의 실존과 어떻게 그 실존이 앎과 존재 자체의 과정을 조건지우는지에 대해서는 탐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기술적 대상들: 실체에서 환경(Milieu)으로 

실체와 주체의 변증법은 실재론과 관념론 간의 논쟁을 노정해 왔다. 철학에서 기술적 무의식은 산업혁명 이후 사회변화와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흡수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순한 비판만으로 [기술의] 외부에 서 있고,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와 사유의 순수성에 의존하는 철학자들의 생각은 기술적 발전 과정의 흐름에서 퇴출되어 버렸다. 후설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이전의 언급들이 산업혁명 전이며, 그래서 기술적 대상들을 간과했다고 논하는 것은 가능하다. 여기서 기술적 대상이란 필연적으로 복잡화된 기계가 아니라, 해머나 칼과 같은 것도 물론 해당된다. 사실상 후설은 산업혁명 이후 기계류의 빠른 보급을 목격하고 그것을 논의했던 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현상학 이론에는 그것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다.43) 새로운 철학적 자세 뿐 아니라 새로운 철학체계는 이러한 과정이 초래하는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구성되어야 한다.44) 만약 존재론이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면, 거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이해가 기술의 본성에 대한 고려 없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먼약 우리가 하이데거의 명제를 따른다면, 인공두뇌학(cybernetics)의 시작은 바로 형이상학의 종말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45) 그러므로 나는 기술적 대상이라는 개념을 조명하고, 그것에 대한 우리 연구의 기반을 준비하기 위해 두 사람의 철학자를 소환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인 질베르 시몽동(Gilebert Simondon, 1924-89)과 독일 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가 그들이다. 이들은 언듯 보면 비교불가능한 인물들처럼 보인다. 시몽동은 현대 기술의 숭배자인 반면 하이데거는 그것에 반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시몽동과 하이데거의 조화는 3장과 4장에서 제기되지만 여기서 나는 시몽동과 하이데거가 어떻게 기술적 대상에 대해 상이한 관점을 취했는지 간명하게 논하고자 한다. 


시몽동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1958)에서 그가 '기계학'(mechanology)라고 명명한 것을 전개한다. 기계학은 기술적 대상들의 진화 그리고 대상들과 그 환경(milieu) 사이의 관계를 통해 기술적 대상들의 실존을 탐구한다. 여기서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술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 인한 산업적 소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시몽동의 야심은 철학의 갈래에 또 하나의 가지를 늘리는 것이 아니었다. 반면 그는 철학 전체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재설립하고자 했다. 그의 기획은 대상을 질료와 형상으로 사고하는 질료형상론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질료형상론이 실체-속성 사고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는 질료가 그것의 본질에 주어진 개체화된 형상을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 대신 시몽동은 상이한 부분들의 인과적 관계라는 의미의 '변조'(modulation)를 통해 기술적 대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관계들이 기술적 요소들에서 기술적 개체들로 그리고 그것들의 앙상블로 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 보여준다. 시몽동은 이러한 점진적 과정을 기술적 대상들의 구체화(concretization)라고 부른다. 우리는 리 드 포레스트(Lee de Forest)의 3극 진공관(triode)에서 그가 구체화라는 말로 의미한 바를 이해할 수 있다. 이 3극 진공관은 2극 진공관(diode)에서 진화한 것인데, 한 방향으로 흐르는 전류를 제어하는 기계장치다. 그것의 가장 단순한 형태에 따르면, 진공관 안에서 음극이 가열되고, 이에 따라 전자가 방출되어 활성화되는 것이다. 양극은 능동적으로 충전되어, 그 결과 음극으로부터 전자들을 끌어당기게 된다. 전압의 양극성(polarity)이 역전될 때, 양극(anode)은 가열되지 않고, 이에 따라 전자는 방출될 수 없다. 따라서 거기에는 잔류가 흐르지 않게 된다. 3극 진공관은 양극과 음극 사이에 그리드(grid)를 설치한다. 직류 전류는 그리드에 어떤 방향(bias)을 부여하는데, 만약 그것이 부정적이라면, 몇몇 전자들을 음극 쪽으로 되돌려 보내며, 이에 따라 일종의 증폭기능을 제공하게 된다. 시몽동은 3극 진공관의 시작은 2극 진공관이 아니라, “전극의 비가역성과 진공관을 가로지르는 전하 전이 현상이라는 조건”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46)   



기술적 개체는 그것의 내적 구조의 기능을 지원하는 기술적 대상이며, 동시에 그 기능 안으로 외적 환경(milieu)이 인입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외적 환경은 시몽동이 '연합된 환경'(milieu associé)이라고 불렀던 것으로서, 시스템 자체의 평형을 보존하는 균형기능을 제공하는 것이다. 기술적 대상에 대한 시몽동의 접근은 그것을 의식의 지향적 결여로 환원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기존의 철학자들이나 현상학자들과 다르다. 이렇게 해서 시몽동은 이 대상을 지식으로 만든다. 그는 기술적 대상 자체의 발생을 구체화의 등급(the degree of concretization)과 관련하여 연구하고 기술적 대상과 양립가능한 철학을 발전시키자고 제안한다. 기술적 대상은 그것의 물질성을 되찾고, 인공지능학(cybernetics)이 말하는 "제어(통제, control)와 대조적으로 구체적인 것 또는 완전함이라는 이런저런 등급을 획득하게 된다. 또한 시몽동은 기술적 대상들의 구체화가 자연적 대상들의 지위로 육박해 가고 있음에 주목했다. 


구체적인 기술적 대상은, 이를테면 진화되는 것이다. 이는 자연적 대상의 실존 양식에 근접해 가고 있고, 어떤 내적 일치로, 그것의 폐쇄된 내부로 반복적으로 가해지는 원인과 결과라는 닫힌 체계로 향해가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기술적 대상은 기능의 조건으로 개입하는 자연적 세계의 한 부분으로 인입되며, 이에 따라 원인과 결과라는 체계에 참여하는 것이다.47) 


기술적 대상은, 만약 우리가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관계의 통일성이다. 실재로 시몽동은 '관계'라는 말을 종종 범주화하지 않고 사용한다. 우리는 대상의 완전성이 마찬가지로 그것의 관계들의 전개라고 말할 수 있다. 기술적 요소의 관계는 그것의 내적 작동방식에 한계지워져 있다. 예를 들어 2극 진공관은 전압과 극성에 의해 규제된다. 즉 그것이 어떤 개체가 될 때, 외부 환경으로 그 관계들은 확장되며 이러한 관계들을 그 정체성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만든다. 『기술적 대상의 실존양식에 대하여』에서 시몽동은 인간세계에 대한 기술적 대상의 관계와 그것의 진화과정을 관찰하는 방법을 통해 개체화를 살핀다. 여기서 우리는 시몽동이 사용한 두 개의 단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개체화(individuation)와 개별화(individualization)가 그것이다. 시몽동은 기술적 대상들의 개별화에 대해 말했지, 그것들의 개체화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개별화는 기능들과 관련된다. 즉 신체적(somatic) 특수화와 심리적인 도식화가 그것이다. 이 말이 생명체에 적용될 때에는 심리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 사이의 분할과 전개를 함축하게 된다. 반대로 개체화는 어떤 준안정적 평형상태에 도달하는 긴장의 해소와 발생에 연관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상전이(phase change)로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개별화가 어떤 기능화하는 질서로 상이한 요소들을 기입하는 위계를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개체화는 위계가 아니라 "위계적 상대성"48)을 생산한다. 


시몽동은 종종 개별화를 결정화(crystallization)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49) 이를테면 화학적인 포화용액인 염화나트륨(소금)이 있다. 결정화되기 전에, 이 화학적 포화용액은 준안정적 상태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고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아주 적은 열이 가해진다면, 결정화되기 시작한다. 현대 화학은 음이온들 간에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이온들 간에 새로운 결합이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염화나트륨 용액 전반에 걸쳐 점진적으로 확장된다. 결정화과정에서는 어떤 단일한 정체성도 없으며, 이미 결정화된 것은 열을 전달함으로써 앞으로 진행될 결정화를 위한 토대와 촉매제가 된다. 이 경우에 그리고 일반적으로 개별화는 세 가지 유형의 조건을 요청한다. (1) 에너지 조건, (2) 물리적(material, 재료적) 조건, (3) 정보적이고 일반적으로 비편재적인(nonimmanent) 조건.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은 관계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시몽동은 "관계란 실체에 관련된 어떤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구축된 존재자들의 실존 안에서 진행되는 구성적이고, 에너지적이며 구조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50) 시몽동을 따라 우리는 디지털 대상의 개별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1장에서 마크업 언어들의 역사를 살펴 보면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시몽동과는 반대로 나는 디지털 대상들의 개체화를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생각은 몇 년 간 나를 사로 잡았던 사유의 핵심이었다. 즉 시몽동이 주요 에세이인 『형상과 정보화에 비추어 본 개체화』(이것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출판되었는데, 하나는 『개체와 심리-생물학적 발생』[1964]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이고 집합적인 개체』[1989]이다) 이후 그의 부논문인 『기술적 대상들의 실존양식에 대하여』(1958)를 저술한 동기, 다시 말해 개체화라는 아주 풍부한 개념에서 개별화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된 그 동기는 무엇인가? 나는 이 책에서 이와 관련된 역사적인 전개과정에 대한 학술적 설명을 하기 위해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시몽동의 정치적 어젠더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기술적 발전에 따른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시몽동은 자신의 책 첫 페이지에 언급하며, 이후에도 계속 언급된다. 만약 우리가 인간-기계-세계의 관계를 표명하기를 원한다면, 디지털 대상의 개체에 대한 몇몇 생각들은 철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것, 둘 모두를 노정하게 된다. 이러한 필연성, 즉 시몽동의 저작들에 명시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이 필연성을 이 책에서는 추적할 것이다. 


나는 하이데거가 시몽동의 그것과는 대비되는 관계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 대상의 개체화에 대한 이론을 발견하도록 몇몇 개념적 원천들을 제공할 것이다. 하이데거 자신은 그와 같은 요청을 즉시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실재로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관계 이론의 성과에 대해 의심했다. 그러나 나는 3장에서 어째서 하이데거가 시몽동과 더불어 관계성의 철학자로 파악되는지를 증명할 것이다. 기술적 대상들의 이해에 대한 하이데거의 기여는 『존재와 시간』에서 발견될 수 있다. 거기서 그는 '손-안에-있음'(도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이데거는 두 범주를 제안하는데, 손-안에-있음(ready-to-hand, Zuhandenheit, 용재성)과 손-앞에-있음(present-at-hand, Vorhandenheit, 전재성)이 그것이다. 우리는 손-앞에-있음을 파악의 한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사물에 의식을 위한 대상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자연적 대상의 경우와 같이 대상의 본질에 도달하도록 한다. 손-안에-있음은 상호작용의 양상으로서, [대상에 대한] 이념성과 객체성의 질문을 밀어 두고, 대상이 그 기능에 따라 우리에게 나타나도록 한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철학적] 충동을 시몽동에게서도 발견한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대상의 이해가 실체로부터 외적 환경으로 이동함으로써 규정되어 진다는 점에서 여기 등장한다. 이 둘의 차이는 하이데거가 기술적 환경을 건너 뛰고 의미화의 환경(milieu of signification)에 집중하면서, 관계성과 연관하여 환경의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의 자기-표명을 해석한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우리가 사용하는 해머의 예를 든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기 전에, 손-앞에-있음으로서의 해머의 이념성을 실재로 획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쥐고 그것이 지향하는 바, 제자리에 놓인 못을 치면 그만이다. 이러한 매일매일의 실천적인 행위들은 의식의 단순한 현실성으로서의 경험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이전의 이해와 상충하는데, 거기서 대상은 인지과정 아래에 취합되었고, 대상과 현존재(Dasein) 사이의 동력학적 관계는 무시된다. 이를테면 후설의 지향성 개념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것이 적절하게 이해된다면, 세계-내-존재의 각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지향성은 자아로부터 투사된 하나의 빛이 아니라,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자아가 따라야만 하는 관계의 장인 것이다. 


선행하는 개념작업에서, 시몽동과 하이데거는 모두 대상 그 자체로 돌아 가자고 제안한다. 나는 여기서 다소 급하게 지나쳐 왔음을 고백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대상(Gegenstand)과 사물(Ding)에 대한 하이데거의 구별과 현대 기술에 대한 그의 비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 구별에 대해서는 2장과 4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대상 그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는 잘 알려진 후설 현상학의 슬로건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후설의 접근은 여전히 주체와 실체 간의 투쟁이라는 패러다임 안에 머물러 있다. 내가 암암리에 시몽동과 하이데거에게 귀속시키는 "기술적 대상으로 돌아가라"라는 슬로건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유아론을 우회하여, 어떤 매개도 없이 '존재하는' 대상들을 받아들인다. 시몽동과 하이데거 둘 모두는 기술적 대상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로 관계의 질문에 도달한다. 시몽동에게는 개별화의 동력학을 구성하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에 관계가 존재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사물과 인간 현존재 양자에 있어서 자유의 등급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세계의 관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기술에 대한 시몽동의 관점과 세계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점이 서로 보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연결이 새로운 관점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획은 열린 채로 남아 있으며, 디지털 대상의 실존에 대한 우리의 탐구에 있어서 근본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관계성과 관련된 하이데거 독해는 우리의 기획을 그레함 하만(Graham Harman)의 객체-지향 철학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하만의 작업은 하이데거의 기획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도 또한 그의 이론을 마르틴 하이데거의 ‘손-안에-있음’과 ‘손-앞에-있음’에 대한 독해를 통해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상과 관계와 관련한 첫 번째 조우는 하만과의 2007년 개인적인 서신왕래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나는 하만의 이론과는 매우 다른 이해를 발전시켰다. 하만에게서 모든 대상은 어떤 도구-존재(tool-being)이다. 모든 도구-존재는 실재적이며 원자나 보다 작은 물리적 실체로 환원될 수 없다. 나는 최근의 정보에 대한 이해 또는 디지털 대상의 구성에서와 같이 흐르는 데이터가 가능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과 유사한 견해를 공유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다른 크기정도(orders of magnitude)로 이해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두 기획을 근본적으로 나누는 두 가지 지점을 언급하고 싶다. 


실체: 하만은 하이데거가 새로운 실체 개념을 발전시켰다고 이해한다.51) 하지만 나는 실체는 하이데거에게 질문거리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실체-우유 개념쌍은 그에게 서구 형이상학의 오류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기획에서는 실체 개념을 총체적으로 거부한다. 하이데거의 과제는 실체를 시간적 관계들로 대체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심려(Sorge)의 역학일 뿐이다. 하만은 하이데거가 시간의 철학에 대해 말한 적이 결코 없다고 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거부했다.52) 하지만 내가 읽기로는 만약 하이데거가 발명하기를 원했던 어떤 새로운 실체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하이데거가 시간 안에서 이끌어내는 그러한 주제는 디지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관계: 하만은 관계 대신에 비관계성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를테면 대상이 ‘손-안에-있음’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현존재로부터 스스로를 물릴 뿐 아니라, 다른 도구들로부터도 그렇게 한다.53) 우리가 이 기획에서 소환하려는 하이데거는 관계의 철학자이다. '손-안에-있음'과 '손-앞에-있음'은 다른 관계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전자는 시간, 또는 내가 실존적 관계라고 부르는 것이고, 후자는 내가 담론적 관계라고 부르는 바, 속성들을 지칭한다. 하만은 그가 관계로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에 대해 하만은 그의 책에서 라투르를 네트워크와 관계의 형이상학자로 규정짓는데, 하지만 이러한 관계들은 견고한 분석 없이 한 행위자에서 다른 행위자로 이동하는 어떤 종류의 행동하는 힘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는 블랙박스(행위자의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알려지지 않은 인과성)가 새로운 실체라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실체와 관계의 애매성54)은 비환원주의를 가져다 주지만, 마찬가지로 어떤 형이상학적인 블랙박스도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이 책은 하만의 사변적 실재론을 즉각 채택하는 대신, 디지털 대상에 대한 사유과 관계의 실재론의 개요를 마련하면서 시작부터 다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대상과 관련된 사유의 학파들, 특히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의 『소외 현상학』 (Alien Phenomenology , 2011), 레비 브리안트(Levi Bryant)의 『대상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 2011), 그리고 최근의 티모시 모톤(Timothy Morton)의 저작들에서 발견되는 것들 안에는 다소 다른 접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이 저자들의 노고는 매우 유익하고 감사한 것이지만, 이들 모두에 대해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책의 주제를 바꾸는 것이 될 것이다.) 


디지털

디지털 물리학과 컴퓨터 형이상학

나는 앞서의 탐색을 통해 객관적 대상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산업적인 근대의 시작점을 따라 어떤 전환을 겪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기술적 대상을 자연적 대상으로 일반화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이에 상응하도록 디지털 대상에 대한 어떤 새로운 탐구가 수행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우리는 디지털 개념과 관련하여 몇몇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탐구의 계열을 열었던 많은 탁월한 작업결과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라이프니츠와 근대 논리학자들, 그리고 기술자들, 프레게, 힐베르트, 튜링, 괴델 그리고 보다 최근의 학자들, 이를테면 에드바르트 프레드킨, 콘라드 주스, 스테펜 볼프람, 그레고리 J. 샤으탱, 루치아노 플로리디 그리고 많은 다른 이름들이 있다. 만약 우리가 2진법 체계와 관련하여 살펴 본다면, 디지털이라는 개념은 라이프니츠 이래로 잘 알려진 것이었다. 사실상 라이프니츠는 오늘날의 컴퓨터 과학의 기초와 근본적으로 관련된 인물이다. 1669년에 「이진수열에 대하여」(De Progressione Dyadica)55)라는 제목으로 3페이 정도 쓴 수고에서 라이프니츠는 이미 곱셈과 나눗셈을 수행하기 위해 이진법 체계를 이용할 가능성에 대한 개요를 작성했다. 우리는 아마도 이 발명에서 두 개의 주목할 만한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계산에 있어서 그것의 역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열 개의 숫자를 사용하던 표현방식을 두 개의 숫자로 된 체계로 효과적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가 이후에 ‘보편기호학’(Characteristica Universalis)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되는데, 이것은 일종의 기호체계(Zeichensystem)로서 그 자체만으로 모든 개념들과 사물들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아이디어들은 중국의 책들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제수이트인 요아킴 부베(Joachim Bouvet, 1656-1730)와의 서신교환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주역』을 발견한 후 매우 놀랐다고 하는데, 이미 수천년 전부터 2진법 체계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프니츠는 후기 중국 서기법을 보다 발전된 표의문자로 바라보면서, 최초의 표의문자 서기법으로 이진법체계를 이해했다. 유럽의 음성문자체계와는 달리 중국의 문자는 표의문자다. 이 방식을 고려하자면, 중국의 서기법은 보편기호학을 선취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한 세트의 제한된 기호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보편기호학은 수학적일 뿐 아니라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이다. 그것이 형이상학의 관건인 표현이론의 구축을 다루기 때문이다.56) 이러한 표현이론은 동시에 관계 이론이기도 하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논리적 관계의 이론이다. 우리는 이 지점을 3장에서 더 살펴 볼 것이다. 알고리듬 정보 이론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샤으탱(Chaitin)은 라이프니츠가 4백 년 전에 계산적 우주의 기획에 대해 알린 중요한 사상가였다고 이해한다.57) 그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서설』로부터 다음을 인용한다. 


신은 가장 완전한 세계를 선택했다. 다시 말해 그는 가정에 따르면 가장 단순한 자이며, 현상에 있어서 가장 풍부한 자이다. 기하학에서 선이 그러한 것처럼, 그의 구성은 쉽고, 그의 속성들과 결과들은 궁극적으로 탁월하며 편재한다. 


이것은 세계를 표현하려고 하는 어떤 프로그램에 있어서 근본적이다. 즉 이것은 언제나 "가정상 가장 단순한 것, 그리고 현상에서 가장 풍부한 것"을 찾아야만 한다. 보편기호학의 중심적인 아이디어는 제한된 기호들로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중국 문자로 인해 흥분한 이유 중 하나이며, 중국 한자보다 더 일반적인 서기체계를 발견하려고 노력을 경주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와 흡사하게 샤으탱에게서도, 알고리듬은 어떤 특정한 집합 또는 형태의 데이타를 재현하곤 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그 알고리듬은 반드시 그러한 집합이나 데이타보다 작은 것이어야 했다. 샤으탱은 또한 재미있는 제안도 했는데, 그것은 [컴퓨터 데이터 기본 단위 명칭인] '비트'를 '라이프니츠'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58) 라이프니츠의 수학과 철학적 사색은 이후 형식 논리체계와 계산기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 역사에 대해서는 이 책의 5장과 6장에서 탐구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 안에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하는 몇몇 디지털 사상가들을 포함시킬 수도 있다. 이를테면 볼프람(Wolfram)의 계산적 우주(computational universe)나 프레드킨의 디지털 물리학 또는 디지털 철학이 그것이다. 여기서 프레드킨의 기획이 가진 기초적인 아이디어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그것은 "디지털 철학 입문"이라는 그의 글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디지털 철학(DP)은 두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는 비트로서, 컴퓨터 안에 있는 이진법 수와 같다. 이것은 상태정보(state information)의 가장 미시적인 표현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태의 시간적 진화가 컴퓨터 프로세서의 회로망에서 진행되는 것과 유사한 디지털 정보과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도 안에서 주목할 만한 명확함에 의해 고무된다. 즉 디지털 철학이 우리가 세계 안에서 관찰하는 과정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많은 것에 관해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59) 


프레드킨은 그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가정에 따라 원자론을 극단으로 밀어부쳤다. "모든 것은 몇몇 아주 단순한 개개의 과정에 기반해 있다. 시간, 공간, 그리고 모든 개별체의 상태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60) 이 관점에 따라, 물리학 법칙은 계산적으로 보편적인[우주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칙들은 제한된 크기의 알고리듬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기초 모델을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양자역학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원자의 에너지 준위가 띄엄띄엄하다는 이론이 그것이다. 비트들의 작동은 두 가지 수학적 모델에 따라 보다 잘 파악될 수 있다. 하나는 디오판토스(diophantine) 해석으로서, 어떤 대수 방정식의 총계적인 해를 결정하는 어떤 영역의 수에 관한 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자동기계 이론으로서, 자가-작동하는 가상 기계에 대한 연구며, 이는 볼프람이 발전시킨 영역이기도 하다. 

 

정보 철학 

디지털에 대한 이러한 반성이 전체 이야기는 아니다. 정보철학자인 루치아노 플로리디는 디지털 온톨로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대립을 수립한다는 이론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디지털 방식으로 이해된다면, 거기에는 아날로그가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날로그식으로 매일매일을 경험할 것이다. 불연속적으로, 그리고 원자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대신, 플로리디는 그것을 정보의 관점에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그의 글, 「디지털 존재론에 반대하여」에서 플로리디는 디지털 온톨로지스트들이 추상화(abstraction), 즉 그가 공학으로부터 채택한 어떤 방법의 상이한 수준들을 광범위하게 무시했다고 본다.61) 거칠게 말해서 추상화의 수준이란 주어진 데이터 꾸러미로 하나의 시스템을 모델링하는 방법이다. 관찰자는 자신의 입도(granularities)62)의 ‘절단위’(cut)나 ‘구분’(division)에 따라 추상화의 수준을 가질 수 있다. 디지털 온톨로지스트들에게 문제는 그들이 추상화의 상이한 수준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하고서, 오직 디지털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에 견주어 플로리디는 컴퓨터 안의 정보가 가지는 중요성을 긍정하는 것 외에도 적어도 인간적 경험을 인정하는 접근방식을 제공한다. 플로리디의 저작은 디지털 연구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정보라는 개념을 정보처리와 인공두뇌학 너머로 가져 가면서, 정보에 관한 일반철학을 구축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두뇌학에서 정보는 거의 잡히지 않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트와 엔트로피에 의해 측정되고 소통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인공두뇌학의 창시자인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의 다음 말은 유명하다. “정보는 정보다. 그것은 질료나 에너지가 아니다. 오늘날 어떤 유물론자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63)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과 위너는 ‘정보’ 개념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해석을 내놓았다. 위너에게 정보란 조직화의 척도이며, 엔트로피에 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탈조직화의 척도이기도 하다. 반면 섀넌에게 정보란 놀라움과 불확실성의 수준을 지시하는 것이다. 놀라움이란 기대하는 것(the expecting), 즉 예견(anticipation)과 기대된 것(the expected), 즉 결과(outcome) 간의 차이가 존재할 때 야기된다. 섀넌의 동료인 왈렌 위버(Wallen Weaver)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특이하게도 우리가 '정보'를 위해 수립하는 자연적 요구들을 충족시킬 양적인 것은 열역학적 엔트로피로 알려진 것에 정확히 부합한다."64) 우리는 위너와 섀넌에게 정보란 두가지 완전히 다른 양에 상응하는 대립되는 함축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로리디는 더 나아가 정보는 기계로부터 세계 자체로 재전유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말해 그것은 컴퓨터가 오직 정보철학의 일부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는 디지털화 이후에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보역"(infosphere)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이름은 "생명역"(biosphere)에서 따왔다. 


"정보역"은 "생명역"에 기반해서 몇해 전에 내가 고안한 단어다. 생명역이란 말은 생명을 기르는 우리 행성 위의 제한된 영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정보역"이란 말로 나는 모든 (정보적 행위주체들을 포함하는) 정보적 실체, 이를테면 정보속성들, 상호작용들, 정보과정과 관계들을 구성하는 전체 정보환경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이버공간"이란 말과 비교할 만한 어떤 환경이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사이버공간"은 그 자체로 정보역의 하위영역 중 하나다) 왜냐하면 정보역이란 정보의 오프라인과 아날로그 공간을 포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65) 


플로리디는 이러한 정보역이 우리 세계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리라는 것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근본적으로 새로운 실체를 창조하게 함과 동시에, 상호작용을 통해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세계를 조성할 수 있게 하기”66) 때문이다. 심지어 플로리디는, 이미 잘 알려진 사이보그와 대비해서 ‘인포그’(inforg)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인간형을 제안하기도 한다.67) 원자적이며 분할되어 있고 보편적인 컴퓨터 세계와 대비해서, 지금 이 세계는 정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플로리디는 분류체계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수학적 정보, 의미론적 정보, 물리적 정보, 생물학적 정보, 그리고 경제적 정보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어떤 정보 윤리학으로 발전한다. 디지털 온톨로지와 정보역의 이론적 배경을 가까이서 관찰하면, 그 둘 모두 새로운 철학적 사유와 새로운 탐구로 향해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기존의 추상화 모델링과 형식 논리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아주 멀리 나아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두 가지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동의되는 것은 정보가 추상적 실체라는 것이며, 이것은 물질적인 것 외부에 있을 뿐 아니라 소통에 관한 수학적 이론을 따르는 수학적 실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정보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상황을 묘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적 경험이 계산의 대상이 되거나 (이미 전산화된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인공지능기계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몽동도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모델과는 다른 정보의 일반이론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가치 있을 것이다. 양과 질 외에 시몽동은 정보를 의미(signification)로 이해하는데 나는 더 나아가 의미를 넘어선 지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은 의미의 관념일 뿐 아니라, 개체화(개별화)의 실마리를 정의하는 것이다.68) 우리는 5장에서 시몽동의 정보이론에 대해 짚고 넘어갈 것이다. 다시 플로리디로 돌아가 보자. 나는 플로리디의 디지털온톨로지에 대한 도전이 컴퓨터 연산과정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찬가지로 두 가지 이론과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 즉 플로리디의 이론이 과연 디지털과 정보의 바다에 빠져 버리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대상의 관념을 유지할 수 있게 할 것인지 말이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일상을 통틀어 우리는 정보와 더불어 대상과 상호작용 하는 바, 구체적 경험, 감각, 정서, 욕망, 등등을 그로부터 유도한다. 대상은 플로리디가 세계란 단순히 원자나 비트, 신호로 환원될수 없다고 논증한 것과 같이 그 전체가 정보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플로리디의 전산 추상화 수준의 사용은 복수주의를 여는 아주 실증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원자와 다지털의 일원론적 관점에 사로잡혀 있다. 실재로 우리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내가 이 책 전체에서 사용하는 방법, 즉 ‘입도의 질서[순서]’가 플로리디의 추상 수준이라는 것과 유사하지만, 그것과의 확연한 차이도 알게 될 것이다. 

 

디지털 대상: 기술적 체계에서 물질적 관계들 

우리에게 디지털 대상들의 탐구를 허용하는 다른 접근법을 발견할 수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해 기술적 대상들에 관한 절의 말미에 이미 약간의 힌트를 주었다. 즉 관계 개념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몽동과 하이데거의 사유에서도 관계성에 대한 명쾌한 접근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로 이 책 3장에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심지어 관계론을 발전시킬 과제를 거부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나는 하이데거의 거부가 철학적 사유 자체는 아니고 실체-속성 사유에 대한 환멸 뿐 아니라 어떤 관계적 사유를 조장하는 실체-속성 패러다임에 기반한 기술과 과학 둘 모두의 전개에 대한 것이라고 논증하고 싶다. 다시말해 실체-속성이라는 틀은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에 의해 포스트모던에 관한 그의 이론 안에서 논의된바 있다. 과학과 기술은 근대의 기획이었다. 하지만 그 발전의 어느 순간, 그것들은 근대의 한계(주인 의지) 를 폭로했다. 반면 포스트모던은 세계의 불안정하고 예측불가능한 본성을 드러낸다.69) 역사는 그 자신의 논리에 반하는 모순을 표현한다. 이와 같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등장한 양자역학은 철학자들에게 실체와 관련된 생각의 문제점을 보여 주었다. 사물들은 실재성의 다른 질서 안에 존재한다. 우리는 대상을 그것의 색깔, 모양, 그리고 질감과 관련하여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것을 원자, 전자, 또는 더 작은 입자들로 묘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시물리학에서 실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바슐라르는 ‘실체’(substance)라는 단어를 실존(existance)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하는데, 실체가 쓸모도 없고 위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70) 바슐라르의 새로운 인식론은 관계 개념을 중심에 놓는다. 즉 이러한 관계성이 특정 기술이나 관찰도구를 작동시킬 것이다. 바슐라르는 그의 논문 「변화와 축소로서의 세계」(Le Monde comme caprice et miniature, 1931)에서 "최초 시작에 변화가 있다"라고 썼다.71) 바슐라르 역시 관계성으로 사물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이 형이상학의 과제이자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외부적인 것과의 관계성이 어떤 새로운 물리-화학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막(pellicle) 안에서다. 형이상학자가 관계가 구조를 결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이해하는 지점도 바로 이곳이다.72) 


동시에 논리학과 컴퓨터공학에서 그것의 실현은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의 문제적 측면도 드러냈다. 이것은 수학에서의 관계논리(relational calculus)의 발견에 의해 명백해졌으며 이후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구축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심지어 기술자들과 컴퓨터 철학자들이 관계의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실체라는 단어를 대상을 진정 관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 계속 활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디지털 대상과 기술적 대상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한편으로 디지털 대상이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jik)가 서구 형이상학의 '실체 페티시즘'73)이라고 지적했던 바와 같은 어떤 붕괴를 가속화했다. 다른 한편으로 디지털 대상의 구체화는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다른 것들과 연결되는 가능성을 가지는 물질화된 관계성에 기반한 어떤 기술적 체계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참고적으로 관계성이나 의미에 넓게 기반하는 초기의 기술적 조화와 비교해서 우리가 이미 보았던 '손-안에-있음' 즉 기술체계라는 하이데거의 예는 디지털 대상(웹)을 통해 창조되는 것으로서 물질적 형태 안에서 끊임없이 참조관계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 진화에 관한 관점의 중심에는 내가 4장에서 '상호대상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장하는 것이 있다. 이와 더불어 디지털 대상은 네트워크들의 구성을 위한 재료들 그리고 논리적 진술들이기도 하다. 그것은 철학적 개념화일 뿐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들이다. 버틀란트 러셀은 『수학의 원리』74)에서 여러 장을 관계성에 할애했다. 여러 장을 관계성에 할애했다. 러셀은 수학이 전승된 철학적 오류 즉 대상은 주체-속성(주어-술어) 명제들로 사유되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했다. 그 대신에 러셀은 관계성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존재론 바깥으로 이동시키자고 제안한다. 즉, 


이러한 관점은, 내 생각에,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어떤 철학적 오류로부터 기인한다. 다시 말해 관계 명제가 범주 명제(또는 주체-속성 명제, 즉 범주 명제가 습관적으로 기반하곤 하는 그런 명제)보다 덜 궁극적이라고 가정하는 관습적 사유가 있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관계를 범주의 [국지적인] 한 종류로 다루고자 하는 욕망을 이끌었다.75) 


하나의 단순한 예를 들어 보자. "하이데거는 버틀란트 러셀을 안다." 또는 "나는 너보다 키가 크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자. 이 명제들을 주체-속성 범주 명제와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와 '러셀'은 범주 명제로 환원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 둘은 모두 '인간'이라는 범주를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러한 진술들을 여전히 어떤 독립된 수학적 방식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요구가 존재한다. 러셀의 제안에 따르면, 이러한 진술들은 xRy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때 x는 지시항(referent)이며, y는 관계항(relatum) R은 관계성(relata)로 이해된다.76) 현대 수학과 컴퓨터 과학에서, '관계 논리'[관계 해석](relational calculus)는 두 방향으로(상이한 연구 양상으로) 더욱 발전되어 나갔다. 투플 관계해석(tuple relational calculus)77)와 도메인 관계해석(domain relational calculus)78)이 그것이다. 투플 관계해석은 수학자이자 정보 과학자인 에드가 코드(Edgar F. Codd)가 1960년대에 도입했다. 그것은 관계모델의 한 부분이며, 다른 편에서는 관계 데이터베이스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 기술은 디지털화에 의해 더 멀리까지 실현되고, 통합된 체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채택된다. 나는 1장에서 디지털이 단순하게 0과 1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프로세스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1970년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개인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과 웹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는 정보 기술이 특정한 전문가 집단에서 평범한 사용자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아왔다. 우리는 또한 GML에서부터 SGML, HTML, XML 그리고 XHTML을 지나 오늘날의 웹 온톨로지, 즉 팀 베르너스-리(Tim Berners-Lee)가 시멘틱 웹의 전망 안에서 제안한 것에 이르기까지 출현하고 구체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여기서 흥미로운 단어인 온톨로지는 디지털 대상이 철학적 탐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기술적 질문들이 근본적으로 철학적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디지털 대상은 메타데이타 그리고 메타데이타 도식에 의해 형식화된 데이타 대상들이다. 이것들이 온톨로지라고 대략적으로 이해된다. 각각의 대상은 이 책의 서문 초반에 일러스트되어 있는 다양한 논리 진술들로 구성된다. 


컴퓨터의 출현과 막대한 양의 데이터 프로세싱 사용의 대중화는 존재자들의 관계적 전망에 기반한 정보 시스템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었다. 에드가 토드(Edgar Todd)의 관계 데이타베이스는 이러한 발전의 시금석 중 하나이다. 그리고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움(World Wide Web Consorthium)에 의해 제안된 시멘틱 웹은 대상적 관계성의 발전에서 보다 향상된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 꾸러미의 논리 진술들 즉 디지털 대상들은 연산으로 통합된다. 대상들의 정동(affectivity)과 감각(sensibility)이 계산가능해 진다. 하나의 디지털 대상이 다른 디지털 대상과 가지는 관계는, 비록 그 내용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논리적 추론을 통해 증가할 것이다. 네트워크는 어떤 매개변수들과 알고리듬들에 따라 현행화된다. 다양한 네트워크들이 프로토콜과 표준에 의해 함꼐 연결됨으로써 내가 디지털 환경[디지털 고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구성된다. 자크 엘륄(Jacque Ellul)은 아마도 1970년대에 이러한 혁신적 과정과 그것이 데이터 프로세싱과 가지는 중차대한 관련성에 처음으로 주목한 철학자였다. 그의 책 『기술체계』(1977)에서 엘륄은 시몽동의 대상과 앙상블 개념을 취해 그 자신의 기술체계에 대한 관점을 발전시켰다. 


데이타 프로세싱은 문제를 해결한다. 컴퓨터 덕분에, 거기에는 기술적 앙상블에 대한 어떤 종류의 내적 체계론이 출현한다. 이것은 정보의 수준에 의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그 수준에 기반해 작동한다. 하부시스템이 조합되는 것은 바로 상호적 총계와 통합된 정보를 통해서이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인간의 그룹도, 어떤 기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술화가 진전될 수록, 기술적 분야들이 독립적, 자율적, 그리고 개별적으로 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오직 컴퓨터만이 이것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컴퓨터일수만은 없음도 분명하다. 그것은 시스템의 모든 소통 지점에서 상호연관되어 작업하는 컴퓨터 앙상블이어야 한다. 이러한 앙상블이 상이한 기술적 하부체계들 사이에 연결들의 하부체계가 된다.79) 


인간은 이미 알고리듬 조작에 속해 있는 어떤 물질화된 네트워크 안에 통합되어 있으며, 그들 스스로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체계들로부터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그것의 기능들의 부분으로서 모든 것을 통합하고, 수렴할 힘을 가지는 기술체계를 생각할 동기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시몽동은 이와 비슷하게 구체적인 것을 사유했지만, 1950년대에 네트워크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기에는 여전히 이른 감이 있었다. 시몽동에게 네트워크는 기술적 과정의 제한이었는데, 왜냐하면 네트워크란, 인간이 그것을 변화시킬 수단을 갖지 못하는 반면, 기술적 활동들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산업적 디지털 대상들의 확산은 이런 상황을 변화시켰고 따라서 시몽동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부분을 재음미할 수 있게 했다.

 

누군가는 도구들과 기구들을 변화시킨다. 또한 누군가는 어떤 도구 자체를 구축하거나 수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네트워크를 변경할 수 없으며, 네트워크를 스스로 구축할 수도 없다. 우리는 네트워크에 긴박될 수 있을 뿐이며, 거기 적응하고,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네트워크는 개체적 존재자들의 행위를 지배하고 폐쇄(encloses, enserrer)하며, 심지어 모든 기술적 앙상블을 지배한다.80) 


만약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시스템과 관계의 물질화로 잘 진행해갈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그것이 함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들의 실존을 훨씬 더 많이 이해하기 위해 접근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러한 남아 있는 과제는 이 책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질베르 시몽동의 사유와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유라는 두 가지 관계성의 유형을 통합하도록, 그리고 데이터의 본성을 대상들로 전개하기 위해 그들의 가치와 그에 대한 성찰들을 전개하도록 추동한다. 


우리는 왜 데이터의 관점으로부터 디지털 대상들의 실존이라는 질문으로 진행하는가? 실재로 이러한 대상들은 인간 사용자들에게 다채롭고 시각적인 존재자들로 현상하지만, 프로그래밍의 수준에서 그것들은 텍스트 파일들이다. 나아가 운영체계에까지 내려가면, 대상들은 이진법 코드들이며 마지막으로 전산회로판에 이르러서는, 전압값과 논리게이트 회로의 작동에 의해 발생되는 신호들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압차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디지털 대상의 실체적 존재로 사유할 것인가? 이에 대한 탐색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실리콘과 금속이라는 매개체로 논의를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입자와 장들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상이한 층들로부터 접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겠지만, 여기에는 또한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뒤따르는 절들에서 나는 크기정도(orders of magnitude)의 분석에 기반하여 방법론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탐구를 효과적인 입장에 놓음으로써 어떤 특유한 철학적 방법을 전개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실존

방법: 크기정도

크기정도 해석은 주로 가스통 바슐라르와 질베르 시몽동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크기정도는 과학적 인식론으로 잘 알려진 방법이다. 시몽동의 접근은 그가 비록 이 방법을 과학보다는 기술 분석을 위해 도입했다 하더라도, 바슐라르로부터 매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크기정도에 기반한 이러한 분석법은 이 책의 중심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분석법은 바슐라르와 시몽동의 그것과 구분된다. 바슐라르에게 크기정도란 데카르트적인 관찰주체로부터 출발하는 하나의 수단이며, 절대적인 위치와 항구적인 개체성을 선호한다.81) 데카르트적 주체는 하나의 전망, 하나의 실재성 다시 말해 연장성으로부터 세계를 이해한다. 그런데 크기정도는 사태의 상이한 실존 양상을 관찰하도록 만든다. 바슐라르는 아래와 같이 크기정도를 정의 내린다. 


학교에서 과학을 배울 때, 우리는 탐구되는 현상의 크기정도에 동의하면서 사고하는 것을 배운다. (...) 이 크기정도는 증명의 첫 번째 단계로 고려될 수 있다. 그 자체로 그것은 종종 충분한 증명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방법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혼란스러움과 마찬가지로 실존의 기호로도 나타난다. 이것은 물리학자들의 존재론적 신념에 대한 결정적인 흔적이다. 심지어 이것은 어림짐작된 존재자의 애매함으로 인해 놀라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도 하다.82) 


크기정도는 또한 어떤 근사값이거나 부정확한 값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세계를 절대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충분히 분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세계를 상대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단지 하이젠페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준 영향의 결과만이 아니라 크기정도가 우리에게 상이한 지식구현체를 부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구현체들은 상호간 '배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특정한 입도의 질서(order of granularity)는 선택된 실재성이다. 추상화 수준은 기술적인 수단으로, 그것에 의해 복잡성이 이해가능한 항으로 환원된다. 그것은 어떤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상이한 추상화 과정에 따라 문제를 분리한다. 크기정도는 도구들로 관찰자들을 매개함으로써 그 질문을 이런저런 실재들로 나누는 것이다. 관찰 아래에 놓인 대상들의 실존을 분석하기 위해, 관찰자는 어떤 크기정도에 특화된 도구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빛의 입자-파동 이원성 때문에 우리는 상이한 관찰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바슐라르의 '현상기술' 개념의 핵심 아이디어이다. 각각의 크기정도에서 우리는 대상으로 완전히 침투해 들어갈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만 한다. 즉 "우리가 무시할 수 있는 것, 무시해야만 하는 것"83)말이다. 


시몽동에게 입도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기술적 대상들의 여러 실존 양상들뿐 아니라 발명의 다른 층들에 대한 개선된 연구를 허용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기술성, 미학, 또는 감각과 관련하여 그 대상들에 접근할 수 있다. 『기술적 대상들의 실존양상에 대하여』에서 시몽동은 인과관계의 구체화와 기술 지식의 대중성의 진전을 통해 기술적 대상에 접근한다. 『상상력과 기술』84)에서 그는 이미지와 상상을 통해 그 대상들에 접근하는데, 이때 그는 대상의 외부, 중간, 내부의 층과 관련해서 산업 생산물을 바라보고 있다. 즉 외부층은 그것의 바깥 세계에 있는 대상의 어떤 표명이며, 중간층은 반(semi)기술적, 반언어적으로 존재하고, 내부층은 순수하게 기술적으로 존재한다.85) 우리가 시몽동과 바슐라르 사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뉘앙스의 차이는 시몽동에게 기술적 설비-도구들이 어떤 현상의 깊이의 상이한 수준들을 우리가 관찰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일 뿐 아니라 두 가지 크기정도를 이어주는 어떤 도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두 번째로 플로리디의 추상화 수준 용법과도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왜냐하면 추상화 수준이란 하나의 분석 도구이지 종합적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합적 수단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시몽동은 두 가지 질서에 따르는 종합으로부터 산업화의 소외가 야기된다고 주장하는데, 미시기술과 거시기술이 그것이다. 장인들에게 대상들 즉 역동적이고 통합된 이것들은 가능하지 않았지만 산업기술의 대상들에서는 나타난다.86)  


도구에 의한 이러한 매개 역할 안에서, 우리는 상이한 크기정도들을 횡단하는 어떤 도약과 같은 해결책을 발견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물질적 구조물은 두 가지 상이한 크기정도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는 방아쇠가 되는 '정보'로 활동하며, 그 결과 모든 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수반되는 그러한 도약은 시몽동을 따르자면 우리가 '변환'(transduction)이라고 부르는 어떤 재구조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이런저런 크기정도 사이의 일치를 창조하는 어떤 일반적인 철학적 수단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하며, 체계적으로 공속면(들뢰즈의 용어)을 구축한다. 칸트의 유명한 이율배반 논증은 동일한 탐구대상에 있어서 두 가지 극단적인 크기정도를 수립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첫번째 이율배반논증에서 우리는 "세계는 시간적인 시작을 가지며 공간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와 뒤따르는 명제인 "세계는 시작을 가지지 않고 공간적으로 한계가 없으며, 시간과 공간 양자에서 무한하다"87)를 읽게된다. 우리는 첫번째 크기정도가 물리학과 연관되며 두번째는 직관과 연관됨을 알 수 있다. 이 두가지 극단적인 크기정도의 해법은 칸트에게 어떤 일치하는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동기와 철학적 방법을 준다. 비록 플로리디도 그의 방법을 칸트의 이율배반에 연관시키지만 나는 여기서 해법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싶다. 


우리의 방법은 그 자체로, 상이한 크기정도에 대한 접근에 기반하며 관계이론의 전개를 통해 각기 다른 크기정도들에 다리를 놓는 어떤 사유체계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철학적 개념은 두 가지 질서 간에 존재하는 양립불가능성 또는 심지어 무관함을 극복하기 위한 발명들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이 경우에 기술적인(technical) 것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철학자는 기술자와는 다르다. 바슐라르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결과적으로 기술자는 인격성으로 가득찬 어떤 작품을 창조하거나 거기에 서명하는 예술가는 아니다. 그는 기하학자이고, 합리적 방법의 수호자이며, 그의 시대에서 기술사회의 진정한 대변자다. 그는 마치 물리학자처럼, 실재화에 가까운 것들의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 마침내 정확한 결말을 보게 된다.88) 


철학자들은 이러한 합리성이 어떤 절대적인 수단이 아니라 상대적인 수단으로 보이는 그와 같은 상대성들을 탐색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합리적 방법을 불안정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다른 크기정도에 접속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여러 크기정도에 따라 디지털 대상들에 접근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어떤 정확한 지식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어떤 사유의 선, 즉 기술적 사유와 철학적 사유 양자 모두의 설립을 도모하는 것이며, 디지털 대상의 상이한 실재성들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이러한 크기정도의 방법을 근거짓는 것은 바로 관계에 대한 이해이다. 왜냐하면 관계는 하나의 시스템에서 다른 시스템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하나의 크기정도에서 다른 것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방법과 철학적 사유 간의 일관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계는 결코 일원론이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내재적 복수주의"(immanent pluralism)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이것은 어떤 수평축을 구성하는데, 이러한 수평축에 상응하는 것은 우리가 '본다'는 것, 즉 theoria라는 수직축이다.89) 만약 기술자들이 관계들의 원천으로서 구조를 이해한다면, 그때 바슐라르가 말했던 바, "형이상학자는 관계가 구조를 결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이해할 것이다"90)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크기정도는 이 책의 일반적 방법이다. 이것은 또한 철학적 사유의 새로움을 부여하고, 철학적 사유가 얼마나 멀리 어떤 체계를 넘어설 수 있는지 알게 한다. 이것은 크기정도에 접속함으로써 이미 시스템을 통합한다.  


개체발생(Ontogenesis): 온톨로지들 vs. 온톨로지 

크기정도에는 여러 상이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것은 몇몇 오래된 연구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우리는 크기정도의 첫번째 집합에서부터 접근해갈 수 있다. 이것은 거시물리학의 질서로부터 컴퓨터 화면 위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다. 두 번째 집합은 시멘틱 웹 구축에서의 기술적 사양(specification)에 의해 드러난다. 세번째 스펙트럼은 코드에서 현상에 이른다. 우리는 세 번째 스펙트럼을 선택해서 데이터의 관점에서부터 접근해갈 것이다. 왜냐하면 전산과정과 인간 경험 간의 매개를 구성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디지털 대상들의 실존에 있어서 낮은 수준과 높은 수준 모두를 분석하고 주장할 수 있도록 하는 크기정도일 것이다. 이 책에서 탐구되는 것을 드러내는 질문은 어째서 그것이 실존 양태(mode of existence)보다 실존(existence)과 관련되는가라는 것이다. 실존 양태라는 말은 시몽동과 더불어 에티엔 수리외(Etienne Souriau, 『실존의 여러 양태들』 2009/2012)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브루노 라투르도 그의 최근 책인 『실존의 양태들에 관한 탐구』에서 사용하였다. 사실상 몇몇 독자들에게, 내가 규명하고자 하는 크기정도나 디지털 대상의 실재성의 여러 수준들이란 '실존 양태'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심지어 그 말이 대상을 더 잘 묘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퇴행(이 말의 가장 좋은 의미에서), 즉 실존 양태로부터 실존으로 되돌아가기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디지털 대상들의 실존 양태들의 기술에 대한 것 뿐 아니라 그것들의 잠재력과 문제틀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어떤 기획을 전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대상들의 실존과 연관된 기획은 인간과 대상들에 조응하는 어떤 개체에 기반한 기술체계 안에 존재하는 인간과 대상들 둘 모두의 위상들을 재정립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이 기획을 근거짓는 것은 어떤 개체성의 정치 아젠다인 것이다. 


실존과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 크기 정도를 표명할 수 있다. 그것은 온톨로지들(ontologies)과 온톨로지(Ontology, 존재론)가 그것이다. 온톨로지는 그리스어 on과 logos에서 유래한 것이다. On은 einai의 현재분사형이며, '있음'(to be)를 의미한다. Logos는 legein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서, '~에 대해 말하다'(to talk about)이란 의미다. 또는 그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바로는 "앞에 놓여 있음"(to lay down in front of)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이 책의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특히 2장에서) 전산과정에서 사용되는 온톨로지들과 형상적 온톨로지(존재론) 그리고 하이데거가 근본 온톨로지(존재론)이라고 부르는 것 간의 긴장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책을 통틀어, 우리는 대문자 O를 사용하는 온톨로지[Ontology]로 후자를 지칭하고, 온톨로지들[ontologies]로 정보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지칭할 것이다.) 온톨로지들은 우리가 디지털 대상의 구조의 핵심에 놓인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하이데거에 의해 실존의 형이상학적 망각상태라고 비판된 바 있다. 하이데거에게 형이상학은 오직 온톨로지들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존재(Being)에 관한 질문이 물어지지 않은 채로 남겨진 것이다. 이러한 망각상태는 일종의 흠결로서, 현대 기술의 문제적인 발전 과정 안에 함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현대의 기술과학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를 인간이 잡아쥐고 통제가능한 방식(온톨로지들)으로 묘사할 수 있는 하나의 그림처럼 취급하면서 위기로 이끌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또한 기술로부터 기술론으로의 이동이 18세기에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17세기의 근대 물리학의 시작에 의해 먼저 틀잡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동은 또한 어떤 지구적인 발전-근대화 기획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론의 본질은 전혀 기술적이지 않으며, 그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바, 닦달(Enframing, Gestell)이다. 닦달은 동사 stellen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놓다'(to put), '거기 무언가를 놓다'(to set something there)란 의미를 가진다. 이 '거기 놓음' 안에는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이 비축되어 있다(Bestand).91) 우리의 탐구에서 '기술적'(technical)이라는 단어가 '기술론적'(technological)이라는 단어보다 더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폭넓은 기술론의 개념 뿐 아니라 부정적 기술론들이 뭔가 긍정적인 것으로 변모할 가능성도 함축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온톨로지들이 디지털 대상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라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온톨로지들은 디지털 대상을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어떤 대상이 되게 한다. 온톨로지들은 칸트의 범주와 마찬가지로 생산적이다. 범주는 데이터를 낚아채서 그것들을 현전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조직화한다. 이와 유사하게 온톨로지들은 기계에 인지 능력을 부여하고, 대상을 무작위 데이터가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것으로 작동시킨다. 1장에서 우리는 대상들에 속한 질문을 둘러싸고 디지털 환경안에서 두 개의 운동들이 평행하게 수립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데이터의 대상화(objectification of data)를 가지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대상들의 데이터화(dataification of objects)를 가지게 된다. 온톨로지들은 웹과 다른 어플리케이션들의 전개 단계에서 여전히 주목할만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온톨로지들은 또한 관계의 원천이 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단순한 재현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관계들은 다양화하고 강화되는데, 특히 대상들이 보다 확장된 환경 안에 놓일때 그러하다. 3장과 4장에서 볼 것인바, 정보기술론은 관계의 기술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질문을 드러낸다. 만약 우리가 이미 기술체계 안에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이데거의 비판에 맞설 것이며, 어디서 기초존재론(근본 온톨로지)을 위한 자리를 발견할 수있을 것인가? 


온톨로지들과 온톨로지는 이 책에서 두가지 다른 크기정도이다. 이 두 개념은 이들의 긴장을 해결할 세번째 개념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시몽동을 따라 온토제네시스(ontogenesis, 개체발생)이라 부를 것이다. 반면 우리가 존재자(being)와 존재(Being)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하는 개념은 관계성이다. 온토제네시스는 어떤 개별적 조직체의 발생과 전개를 의미한다. 이것은 개체가 무엇인지라는 것보다, 그것이 스스로 어떻게 개체화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집합적으로 그렇게 하는지에 더 관련된다. 우리는 아마도 온톨로지가 근거이고 온톨로지들이 형상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형상(형식)은 그들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형상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상들을 운반하는 근거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은 형상이 근거에 반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현상이 근거보다 덜 중요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시몽동이 제안하는 사례에서 생명은 근거이고 사유는 형상(형식)이다. 생명 없이 존재하는 사유는 없다.92) 시몽동은 또한 거기서 기술적 대상과 살아 있는 존재 간의 어떤 유비를 발견하기도 했다. 기술적 대상들의 형식은 다른 기술적 대상들과 환경의 앙상블로서의 어떤 환경(milieu)이 요구된다. 사실상 만약 우리가 기술체계를 고려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인간을 포함해서 생명체들을 기술체계의 일부로서 이해한다면, 그때 이러한 형식과 근거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여기에 바로 실존과 관련된 어떤 기획의 정치적 아젠다가 놓여 있는 것이다.  


망상조직과 수렴 

시몽동의 저술에서, 우리는 아마도 기술적 대상의 실존 양태가 그것의 상이한 망상조직 양태들 안에 있으며, 여러 기술적 요소들, 개체들을 조직화하는 내적 구조에 걸쳐 있고, 어떤 기술적 대상이 거주하는 범위에서 보다 넓은 환경과 앙상블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몽동에게 소외의 문제는 기술에 대한 오해나 이해의 결여, 따라서 기술적 앙상블의 잘못된 구축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근거와 형식 간의 격절을 초래한다. 시몽동은 처음에 소외가 연합된 환경이 더 이상 형식을 규제할 수 없을 때 야기된다고 생각했다. 형식은 근거를 촉발하는데, 여기서 근거는 형식과 어떤 반복적인 인과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반복적 인과성은 바로 연합된 환경이다. 두 번째로 지식의 분기(bifurcation)가 어떤 상황을 생산했는데, 이렇게 해서 문화가 기술로부터 분리된다. 4장에서 우리는 시몽동의 사변적 기술사를 다시 보게 되는데, 거기서 마술은 기술적 대상과 종교로 분기된 것으로, 이와 더불어 기술은 더 나아가 과학(이론적)과 기술론(실천적)으로 분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시몽동에게는 문화와 기술 간의 대립을 완화시키고 소외에 대항하는 기술적 휴머니즘을 발명하는 철학적 사유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철학적 사유는 분기가 완료된 이후 수렴을 창조할 임무가 있었던 것이다. 


시몽동이 생전에 알아챘듯이, 우리의 탐구에서 우리가 속한 그 환경은 더 이상 기계와 조작자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대상들과 사용자들의 다양한 네트워크로 구성된 어떤 정보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소외가 연합된 환경의 기능부전상태라고 분석될 수 있다면, 이것은 사회적 규범성이 기술적으로 분석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기술체계 안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산업화로 인한 소외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면, 그때의 과제는 기술체계를 분석하는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의 엄격한 방법을 요구할 것이다. 이 책은 관계들의 통합성으로서의 인간과 대상들로 구성된 기술체계를 이해하길 원하며, 여러 크기정도에 따라 관계들을 조직화하기를 제안한다. 따라서 기술체계에 접근하기 위해, 그리고 올바른 입장에서 그것의 연합된 환경을 수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실존적 관계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 근거와 형식을 엮기 위해 담론적 관계들(discursive relations)로 움직여가야 한다. 이러한 시몽동과 소외문제에 대한 독해는 물론 하이데거의 기술의 본질에 대한 비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수렴의 아젠다는 또한 후기 하이데거 사상의 핵심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그의 1950년 논문에 등장하는 '사물/사태(The Thing)'에서 등장하는데, 거기서 그는 네 겹, 네 차원의 방법으로 어떤 사태를 이해하자고 제안하는 바, 그것은 신, 하늘, 대지 그리고 죽음이다. 하이데거는 비록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전화와 같은 기술적 발전이 사물들 간의 거리를 극적으로 축소시켰다 하더라도, 사실상 인간과 사물 간의 거리는 더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살핀다. 하이데거는 단어 '사물/사태'(Ding)의 의미로 되돌아가자고 하는데, 이 말은 독일어 'dinc', 즉 '모으다'(to gather)라는 의미를 가진다. (하이데거의 병jar의 예에서) 사물/사태는 이 경우 그 네겹의 차원을 모으는 어떤 자리가 된다. 소셜 네트워크의 사용자들은 이를테면 어떤 디지털 대상, 즉 페이스북 이미지가 다른 사용자들로부터 오는 코멘트와 논의들을 모으는 기능을 제공한다는 것을 안다. 하이데거는 그와 같은 개념을 의심했을 것인데, 그것은 그가 전화와 텔레비전에 의문을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이데거를 따라, 여기서 드러내고자 하는 질문은 우리가 이미 네트워크를 창조할 수 있게 된 때에, 수렴에 관한 질문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반면 사물의 네 겹의 본성으로 돌아가자는 하이데거의 견해와 시몽동의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는 어떤 상호대상적 사유(우리가 4장에서 설명할 것인 바)를 발전시킬 가능성을 드러내며, 그것은 곧 기술의 체계화를 이해하기 위한 분석도구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의 목표는 디지털 대상 그 자체로 돌아가 경험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수렴과 망상조직의 다른 형식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이 책의 3부의 과제이다. 1부에서 2부로 가면서 시스템으로부터 대상으로, 즉 온톨로지들로부터 온톨로지로 이동해 가며, 마침내 관계와 온토제네시스 안에서의 해법에 도달한다. 근본적으로 3부에서는 디지털 대상으로의 회귀가 있게 되지만 이때 우리는 논리와 대상 간의 관계, 다시 말해 상이한 크기정도에 직면한다. 디지털 대상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는 웹을 횡단하는 어떤 논리적 언어를 수행하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후설은 이미 유럽학문의 위기의 한 표현으로 형식 논리의 문제를 바라보았다. 후설은 형식논리를 기술화(Technisierung)로 이해했으며, 이것을 통해 우리가 더 이상 논리의 근원으로서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후설에 의하면, 우리는 상징 논리보다는 경험에서 판단의 보다 강력한 관념을 발견할 수 있다. 상징 논리와는 반대로 그는 지향적 논리(외연적 논리에 반하여)로 논리의 기초를 재수립한다. 오늘날 분석철학자들 사이에서는 후설과 형상적 존재론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오고간다. 하지만 형식 논리를 극복한 후설의 강력한 주장에 대해서는 논의가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책에서처럼 후설적인 명법이 디지털 대상을 사고하는데 있어서 실질적인 것으로 회복되고 부여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형식논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브라이언 캔트웰 스미스(Brian Cantwell Smith)가 탁월하게 해낸 것처럼, 컴퓨터 처리 수준에서 후설적인 개념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비판은 후설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기술화는 형이상학적 실책의 표현이다. 하이데거가 기술의 본질이라고 부르는 닦달(Enframing) 즉, [닦달의 의미‘frame’으로서의] 형식틀들은 앞서서 오며, 산업화의 힘이 된다. 이 과정에서 시간은 형식틀의 동기화(synchronization)로 봉사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점점 더 그들의 삶을 조직화하기 위해 기계에 의존하며 휴대폰에 그들의 만남, 식사, 수면 등등을 동기화하기 위한 책임을 부여한다. 이러한 동기화에는 하이데거가 심려(care)라고 부른 시간의 통일성 파괴가 존재한다. 매일매일의 산만함(distraction, 오락거리)이 기술적 발전에 의해 확대될 것이다. 이것은 기술의 표현이라는 문제일 뿐 아니라, 그 근저에는 사유의 문제, 즉 논리라는 특권적 형식으로서의 사유의 문제가 놓여 있다. 논리는 사유의 질문을 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논리는 하나의 개념으로부터 응고된 관계에 따라 다른 개념으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살핀 바에 따르면, 인공지능의 발명은 언어의 논리화이다. 언어는 일단 그것의 시간적 첨단을 상실한 채 폐쇄적으로 이해된다. 존재의 탈은폐라는 그것의 기능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언어는 그 형식에 의해 근거를 박탈당한다. 철학자들도 사유하기를 그친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아무도 더 이상 사유하지 않으며, 아무도 철학으로 스스로를 지배하지 않는다."93) 하이데거는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초월적 파악 능력으로서의 초월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형이상학의 기초를 복원하기를 원했다. 이에 반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B판에서 초월적 상상력의 이 역할을 삭제했으며, 그것을 기능들 중의 하나로 취급했다. 대신에 그는 거기에 도식화의 능력, 즉 범주와 논리의 능력을 부여했다. 하이데거는 칸트를 신칸트주의와 실증주의적으로 재독해 하기를 원했는데, 이들은 논리가 형이상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다. 하이데거적 의미의 형이상학은 인공지능에 의해 완결된다[종결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의 끝에 살고 있다. 


이제 만약 정보체계, 즉 실제적으로 시멘틱 웹이 어떤 논리언어를 획득하려고 분투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것이 데이터가 되고 논리적 진술 안에서 재현되고 있을 때, 그리고 알고리듬에 따라 자동화될 때, 이것은 어떤 더 높은 수준의 닦달의 한 양태이지 않은가? 이것은 어떤 교착상태, 즉 하이데거를 따라 논증하거나 그를 거슬러 논증하거나 하는 상태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 차이를 크기정도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시간이 형이상학의 기초라면, 기술도 또한 시간으로 이해될 수 없는가? 이것은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gker)이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는 기술을 시간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자고 제안했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는 그것을 세 번째 다시당김(파지, retention)이라고 한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스티글러의 관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기술체계 안에서 시간에 관해 사유하기 위한 영감을 제공받을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기술체계 안에서 시간의 상이한 크기정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시계 기반 시점, 간격들 그리고 기간들, 위상학적 시간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4장에서 자세히 논할 것이다. 스티글러의 세 번째 다시당김에 기반하여 우리는 또한 알고리듬에 의해 가능해진 어떤 세 번째 미리당김(예지, protention)를 알아챌 수 있다. 실재로 우리는 후설과 하이데거에 따라 이러한 당김들에 기대어 논리와 디지털 대상들을 재사유할 수 있다. 우리는 논리가 단지 이러한 관계들의 한 집합인지 아닌지, 이와 같은 경우 우리는 관계의 새로운 유형 그리고 관계를 조직화하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할 수 있지는 않은지 물을 수 있다. 후설적인 비판과 체계화가 디지털 대상의 경우에도 가능할 것인가? 우리는 새로운 개체 형식(대상의 형식과 현존재의 형식)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어떤 기술체계에서 변환논리(transductive logic)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때 이미 기술 안에 현실화되어 있는 어떤 관계적 사유가 어떻게 스스로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즉 어떻게 스스로를 다른 가능성으로 재정향할 수 있는가? 이것은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시를 인용하면서 기술의 위험에 대해 말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위험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자라난다
구원의 힘도 또한94) 


우리는 이와 비슷한 논리를 리오타르가 그의 포스트모던 기획 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실체-속성 비판에서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은 기술발전을 향한 감수성과 사유의 엄격한 방법을 파악하는데 놓여 있다. 그러므로 관계성과 관련하여 디지털 대상의 발생을 분석하는 것과 상호대상성의 진전으로서의 기술적 발전과정의 실재성에 대한 이해는 기술에 의해 가능해지는 대상들과 더불어 새로운 감수성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철학적이고 기술적인 개념 둘 모두에서 연합된 환경의 재평가를 통해 우리가 어떤 변형의 가능성을 발견하리라는 것도 거기 존재한다.  


이 책의 구조 


이 책은 대상에 대한 하이데거와 시몽동의 이론들을 통해 마크업 언어(HTML 등)와 온톨로지들의 발전상을 연구함으로써 디지털 대상의 철학적 탐구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스스로를 상이한 현대 이론들, 즉 객체-지향 철학(그리고 심지어 사변적 실재론), 정보철학 그리고 디지털 철학과 같은 이론들 사이에 정위하면서, 이 책은 대상에 대한 연구를 위한 어떤 관계론적 사유를 제공하고자 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기술적 인공물들을 디자인하기 위한 비판적 질문들로 번역하고자 한다. 이것이 어떤 야심적인 기획으로 비춰질지라도, 미래에 이루어질 디지털 연구의 보다 큰 틀에 대한 기여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 간의 종합을 점점 더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나는 디지털 대상의 생애주기(life cycvle)를 그림 6에 대략적으로 그려 놓았다. 따라서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부 '대상', 2부 '관계' 그리고 3부 '논리학'. 각각의 부는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1장은 GML부터 HTML, XML 그리고 웹 온톨로지에 이르기까지 시멘틱 웹 운동에 의해 제안되어 온 마크업 언어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디지털대상의 발생을 스케치한다. 이 장은 이러한 기술사를 시몽동의 기술적 대상들에 대한 분석과 나란히 읽고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기술사를 구체화(concretization)과 개별화(individualization)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개별화는 사회-경제적 구성과 관련하여 그것들을 이해하기 보다 기술적 대상들의 내적 역학의 진화과정으로 분석하기 위한 방법으로 드러난다. 나아가 이 장은 만약 디지털 대상의 개체화(individuation)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지 묻는다. 이 질문은 탐구를 더 멀리까지 밀어붙이고자 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시몽동이 개체화라는 용어를 기술적 대상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기술적 대상의 개체화를 통해 소외에 대항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기술적 대상에 대한 시몽동의 기획을 명쾌하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몽동으로부터 유래한 이 요청은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른다. 그리고 개체화의 개념 뿐 아니라 변환(transduction)의 관념도 간혹 선택될 것이다. 


2장은 두 개의 대립쌍으로 시작된다. (1) 온톨로지들과 온톨로지 그리고 (2) 의미론(semantics)과 문법(syntax). 이 장에서는 전산과정에서 온톨로지와 대상 개념의 차이를 톰 그루버(Tom Gruber)의 연구를 통해 조망하고, 베리 스미스(Barry Smith), 니콜라 구아리노(Nicola Guarino), 보리스 헤닝(Boris Henning) 등의 연구에 따라 형식 온톨로지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형식 온톨로지는 에드문트 후설이 그의 『논리연구』와 이후 『형식적, 초월적 논리』 에서 제안한 개념이며 정보체계를 연구하는 현대 철학자들이 전진적으로 취한 것이기도 하다. 후설에 대한 이러한 참조가 사실은 후설 기획의 기초적인 목표 즉 논리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을 간과한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이 장은 어떤 새로운 관점을 통해 대상개념과 온톨로지를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컴퓨터 인지 과학자인 브라이언 캔트웰 스미스(Brian Cantwell Smith)의 연구를 채택한다. 그는 그의 책 『대상의 기원에 대하여』에서 온톨로지에 대한 컴퓨터 과학자들의 교조적 접근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전산처리과정을 위한 기초 형이상학을 제안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즉 캔트웰 스미스의 접근은 후설의 그것에 매우 가까우며, 특히 형이상학적 시각에 있어서 유사하다. 이것을 형식 온토로지스트들에 의해 무시되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장은 온톨로지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을 도입하는데, 그것은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 또는 온톨로지이다. 이 장은 이러한 대립들이 세 번째 개념, 즉 관계(의 이론)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고 제안함으로써 마무리된다. 


2부는 관계에 관한 유물론적 이론을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3장은 철학사 안에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흄, 하이데거 그리고 버트란트 러셀의 연구에서 관계 개념을 독해함으로써 그과 같은 이론을 스케치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형식, 즉 담론적 관계(discursive relations)와 실존적 관계(existential relations)로 관계성을 이해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이 장은 더 나아가 어떻게 해서 담론적 관계가 전산과정에서, 처음에는 관계논리(relational calculus)를 통해, 다음으로는 에드가 코드(Edgar Codd)가 제안한 관계 데이타베이스를 통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맨틱 웹의 최근 발전과정 안에서 보완되는지 설명한다. 이것은 디지털 대상의 개별화를 이해하기 의해서는 담론적 관계와 실존적 관계 간의 긴장을 극복할 필요가 있으며 이 긴장의 해소는 곧 기술체계의 담론으로 이끈다고 주장한다. 


4장은 기술체계 개념을 계속 진작시키는데, 이때 이 개념은 상호대상성 개념에 초점을 둔다.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utz)의 현상학적 사회학 뿐 아니라 현상학적 탐구는 상호대상성에 그리 많은 관심을 두지 않고서 상호주체성에 집중했다. 나는 상호대상성을 담론적 관계와 같이 물질화될 수 있는 관계, 이를테면 기계류, 형식논리 등등에서의 물리적 연결들로 의미화한다. 이러한 주장은 상호주관성 대신 상호대상성 개념을 쓰는 것이 기술의 진화과정을 이해하는데 더 발전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나는 정보체계 즉 웹과 자크 엘륄(그는 시몽동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과 역사가인 버틀란트 질이 내세우는 기술체계에 관한 논의에 주목한다. 이로써 나는 환경이라는 관념이 체계 관념으로 서서히 대체되어 왔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이 장은 하이데거의 1950년 논문인 「사물」(Das Ding)을 상호대상성을 재구축하는 하나의 제안으로 읽자고 요구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상호대상성을 네 겹(사방세계, das Geviert)이라고 부르며, 기술들(TV, 라디오, 전화기)이 인간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가정된 사실에 비추어 인간과 세계를 결합한다. 또한 시몽동이 제기하는 사변의 역사에도 주목하는 바, 그는 기술의 역사를 마술로부터 분기하는 과정으로 보고 결과적으로 끊임없는 분기가 뒤따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그의 제안은 인간과 세계를 재결합하는 어떤 수렴을 창조하기 위한 철학적 사유를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우리가 사물(하이데거)이나 기술적 대상(시몽동)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즉시 반론에 부딪힌다. 이 반론에 따르면 우리는 분명 이미 네트워크화된 사회에 살고 있으며, 거기서 사물과 인간과의 거리는 사라졌다고 한다. 특히 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의견들은 대상들이 현대문화에서 새로운 행위주체의 수준을 획득한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논증하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네트워크는 실재로는 수렴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생산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체계의 기술적 실재성이라는 한계 안에서 사유하기를 원한다면, 디지털 대상이라는 개념을 더욱더 발전시킬 어떤 방법이 있을까? 비록 시몽동이 우리에게 어떤 직접적인 대답을 줄 수 없다 해도, 기술적 대상의 발전과정에 대해 사유하려는 그의 노력과 어떤 기술적 휴머니즘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이 책의 3부의 중심에 남아 있다. 3부에서는 이 질문을 탐구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데, 이 탐구는 이전의 장들과 날카롭게 갈라서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이전의 장들이 디지털 대상들에 대한 사변적 철학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이제 나머지 두 장들은 인간 경험과 형이상학을 다룬다. 나는 이것이 현대 기술론에 대한 하이데거와 시몽동의 논의에 근본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3부는 독자들이 보게 될 바, 대안적인 논리의 역사를 드러낸다. 이 역사는 물론 디지털 대상 뿐 아니라 컴퓨터실행[전산처리]의 근본적인 부분으로 비춰질 것이다. 이 두 개의 장은 논리를 형성하는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재논의하는데, 그것은 20세기 초에 이미 수행되었다. 즉 특히 후설과 하이데거의 저작들에서는 이런저런 디지털 대상들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수렴[디지털 컨버전스]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제안했다. 


5장은 최근의 논리에 관한 몇몇 논쟁(패트릭 해일스와 팀 베르너스-리)을 다룬다. 그것은 특히 웹 상의 의미화와 지칭성에 대한 것으로, 프레게, 퍼트넘, 크립케과 데이비드슨의 이론이 여기에 도입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해 어떤 대안적인 이해법을 여기서 제안하기도 하는데, 후설의 논리 비판(이것은 오늘날 컴퓨터 과학자들과 컴퓨터 전산 이론가들이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임에도, 이들은 후설의 형식 논리를 채택하고 있다)과 시몽동의 변환논리를 재사유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논쟁은 연장논리(extensional logic)에 대적하는 지향논리(intentional logic), 고전 논리에 대항하는 변환논리의 싸움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후자는 지향적 행위와 의미화의 지평 위에서 작동하지만 전자는 상징과 규칙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장은 인지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지점에 어떤 새로운 수렴을 생산하기 위해, 웹에 대하여 후설의 비판을 응용함으로써 그것을 더 멀리까지 밀어 붙일 가능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는 더 나아가 어떤 종류의 수렴이 이것을 이끌어야만 하는지 물을 수 있다. 이것은 확실히 피에르 레비에 의해 제안된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나 좀더 정확하게는 리클레이더(Lickleider)에 의해 예견된 공생체(symbiosis) 또는 바렐라(Varela)와 마투라나(Maturana)가 제안한 자기제작(autopoiesis)의 선을 따르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기술과 인간성 양자에 있어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어떤 것으로 고려할 수 있는가? 이와 함께 독자들은 이 장을 순수자아의 기반을 약화시킴으로써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재발명하려는 것일 뿐 아니라 들뢰즈의 정신 안에서 후설과 시몽동 사이에 조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6장은 이 '집단지성'을 문제화하면서, 논리에 대한 하이데거와 신칸트주의 간의 논쟁으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이 논쟁은 형이상학의 근간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재판에서 초월적 상상력에 대한 절을 삭제했을 때, 그는 뭔가 관건적인 것을 회피하면서 뒤로 물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데거의 과제는 따라서 초월적 상상력이 논리보다는 시간으로 이해되고, 형이상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이 장은 이러한 논쟁을 후설과 스티글러 그리고 들뢰즈 독해로부터 도출한 시간의 새로운 종합으로서의 '세번째 미리당김'이라는 개념을 제안함으로써 조화시킨다. 세번째 미리당김에 관한 논의는 알고리듬과 디지털대상의 환경의 탐구로 이어진다. 알고리듬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전통적인 예시는 그것이 마치 요리법과 같이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나는 알고리듬을 재귀(recursion)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데데킨트, 스콜렘, 괴델과 튜링과 같이 우리가 기계 해석학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해준 사람들의 수학사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의 과정에서 알고리듬의 강화란 시몽동이 기술한 연합된 환경의 파괴라는 문제를 야기하는데 이에 따라 기술적 대상의 내적 역학은 유지될 수 없게 된다. 이 장은 기술체계를 넘어 연합된 환경의 구축에 대한 반성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면서 마무리된다.   


 


[주석] 


1) [역주]원문 출전은, Yuk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6 이다. 번역문에서 ‘[ ]’는 이해를 돕기 위한 번역자 보충.

2) [역주]‘크기정도’는 수를 등급별로 분류한 체계이다. 각각의 등급은 그 이전 수 등급의 10배다. 이것은 지수로도 표현가능하다. 만약 두 수의 비율이 10배 이하면, ‘두 수의 크기정도는 같다’라고 말한다. 이 개념은 원자 이하의 극미세계나 천체의 극대 세계를 표현할 때 많이 쓰인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https://ko.wikipedia.org/wiki/%ED%81%AC%EA%B8%B0_%EC%A0%95%EB%8F%84 참고.


3) Martin Heidegger, Schellings’s Treatise on the Essence of Human Freedom, trans. Joan Stambaugh(Athens: Ohio University Press, 1985). 
4) Gilber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Paris: Aubier, 1999), 61-65. 
5) Mats Alvesson and André Spicer, “A Stupidity-Based Theory of Organization,” Journal of Management Studies 49 (2012): 1194-220 
6) [역주]프로그래밍 과정에서 재귀 함수는 실행 명령을 담고 있는 함수 안에서 그 함수가 다시 시작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n까지의 합을 구하는 함수를 프로그램한다면 ‘3+2+1’의 경우, ‘3+2’까지의 합으로도 표현할 수 있고 2까지의 합도 2+1까지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n까지의 합은 ‘n+n-1까지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n까지의 합을 구하는 위 함수를 sum(n)이라고 이름 짓는다면 sum 함수 안에서 또 sum 함수를 불러서 계산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재귀 함수는 어디서든 볼 수 있다. 프랙털 도형이 자기 자신과 같은 모양의 작은 도형을 무한 개 그리는 모습을 재귀 함수의 예로 들 수 있다. 프로그래밍에 재귀함수를 적용하면 연산식은 재귀함수를 이용하여 연산을 끝없이 반복하게 된다. 만일 재귀 함수를 이용한 연산을 끝내려면 연산을 끝낼 수 있는 조건인 '탈출 조건'을 정해주어야 한다. 만약 탈출 조건이 정해지지 않으면 프로그램이 연산을 멈추지 않는 무한 루프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611999&cid=58598&categoryId=59316 참조. 
7) 육 후이는 홍콩에서 분석 철학과 더불어 이 분야에 대해 연구했고, 골드스미스와 런던 대학에서 대륙철학을 공부했으며, 나는 거기서 후이를 만났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논문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 논문은 지금 작업의, 토대가 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후 해리 할핀과 더불어 내가 회장으로 있는 파리의 '연구혁신기구' 안에서 함께 연구했다.  
8) [역주]월드 와이드 웹 브라우저와 서버를 표준화하기 위한 여러 교육, 연구기관을 통칭하는 단어다. 이 단체는 WWW나 HTTP 등의 표준화를 진행해 왔다. 현재 이 기관은 웹 기반 가상 현실을 표준화하기 위한 연구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9) [역주]“시맨틱 웹 기술은 컴퓨터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웹상의 정보를 탐색 및 수집하여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정보처리기능이다. 이에 따라 인터넷 정보를 의미망으로 통합한 온톨로지(ontology) 형태로 이루어진다. 즉, 정보를 이해하고 다양한 정보 간 의미요소를 연결함으로써 지능적 판단에 따라 추출ㆍ가공하는 처리방식을 말한다. 이를 위해 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는 언어(시맨틱 마크업 언어)를 이용해 웹페이지의 정보를 나타내는 방식이 적용된다. 시맨틱 마크업 언어로는 XML(eXtensible Markup Language: 확장생성언어), RDF(Resource Description Framework: 자원서술체계) 등의 언어기술이 표준화되어 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9719&cid=43667&categoryId=43667 참조. 
10) 여기서 우리는 육 후이 또한 랭보의 한 독자이자 동조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014년 11월에 진행된 켄트 대학의 한 강연에서 그는 하이데거의 랭보 '투시자의 편지'(Lettre du Voyant) 주해를 분석했다. "그리스에서 ... 시와 리라(lyres)는 행동을 리듬으로 변화시켰다. 이후 ... 시는 더 이상 행위 안에서 맥박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 행위 이전에 존재할 것이다." 
11) Vincent Bontemps, “Quelques élé pour une épistémolgoie des relations d’échelle cher Simondon,” Apprails 2 (2008), http://appareil.revues.org/595.  
12)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사태(사물)들은 어떠한가? 또는 우리가 비경험이라고 부르는 것들, 예컨대 디지털 대상들의 소여(giveness)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알고리듬의 실행과 같은 것들은 어떤가? ... 우리는 전자가 우리 피부를 치고 지나가는 경험을 가질 수 없지만,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이와 흡사하게 우리는 알고리듬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우리 인지 능력의 한계 안에서 상상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비경험적인 것들이 지금 구체적으로 우리 상상 안에 참여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6장) 
13) [역주]이것은 웹 온톨로지를 의미한다. 어휘나 개념의 정의 또는 명세로서 정보 시스템 분야에서 시스템이 다루는 내용에 해당하는 구성 요소의 의미. 시멘틱 웹을 위해 사람이 직관적 또는 의미적으로 판단ㆍ처리하는 부분을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도록 공통 어휘를 기술한 것으로, 존재론에서 거론하는 모든 형상에 대한 표현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웹이라는 특정 분야에 한해 W3C에서 확장성 생성 언어(XML) 및 자원 기술 프레임워크(RDF)를 기반으로 웹 온톨로지 언어를 설계하였다.-『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참조. 
14) 망상화된 디지털 대상은 "프로그램 가능한 기억"을 직조한다. "이 기억은 시몽동과 하이데거의 기술적 대상과 기술적 환경과 프로그램 가능한 맥락으로서의 디지털 대상을 확실히 구분한다. 이것은 datum이라는 단어의 두 번째 '주어짐'(given)[두 번째 의미]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첫번째는 감각데이터를 가리킨다.)" 이러한 디지털 대상의 분석은 21세기의 일상적 모습들의 예시를 통해 수행된다. "우리는 유투브에 관한 우리 경험을 예로 들머 이 장을 마칠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환경(milieu)이 어떤 방식으로 상이한 역할을 취하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다."(3장) 
15) 1901년 '다섯번째 논리연구'의 6장에서 후설은 의식이란 다시당김과 미리당김으로 이루어진 어떤 흐름(flux)이라고 규정했다. 1905년에 그는 이 다시당김과 미리당김의 구조에 대한 연구를 더 밀어부쳐 우리가 최초의 다시당김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두 번째 미리당김으로부터 우리는 지각의 시간성을 구성하며, 이는 기억의 재조합, 즉 과거의식을 형성하는 것이 된다. 1936년에 『기하학의 기원』에서 그는 글쓰기란 기하학적 사유가 형성되는 의식의 흐름의 구성요건이라고 언급했다. 나는 글쓰기의 문법화(written grammatization)를 세 번째 다시당김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첫번째와 두 번째 다시당김을 제어하고, 그리스적인 로고스(logos)를 구축하는 이러한 미리당김의 새로운 형식들의 투사(projection)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세 번째 다시당김이라는 개념을 기억 외재화(mnesic exteriorization)의 모든 형태로 확장했다. 이러한 기억의 외재화는 인간진화의 초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문법화는 시간의 공간화이며 통제를 가능하게 하며 그 대신에 능동적(writerly)[능동적 쓰기]이면서 수동적(readerly)[수동적 읽기]인 의식의 다시당김적[보전적](retentional)이며 앞서당김적인[예측적](protentional) 이완을 가져온다. 이에 대한 질문에 관해서는 베르나르 스티글러의 『충격의 상태-21세기의 지식과 우둔함』(다니엘 로스 번역, Cambridge, Mass: Polity Press, 2015) 108-11쪽을 보라. 여기서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있는 사변적 명제의 조건으로 독서와 쓰기를 분석한다. 
16)  '재귀성'(recursivity)과 컴퓨터 해석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6장의 한 절에서 육 후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할 때, 비재귀 함수를 사용할 수 있지만, 기초적으로 모든 제어작용과 숫자를 재귀함수로 환원할 수 있다. 관찰의 광범위한 독립성이 바로 어떤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이 해석학은 분리된 상상의 과정으로 파악될 수 없다." 
17) [역주]디지털 융합이라는 뜻으로, 하나의 기기와 서비스에 모든 정보통신기술을 묶은 새로운 형태의 융합 상품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크게 유선과 무선의 통합, 통신과 방송의 융합,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 등 3가지로 압축된다.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34481&cid=40942&categoryId=32828 참조. 
18) [역주]야콥 모레노(Jacob Levy Moreno, 1889 –1974)는 ‘사회관계망 분석’(Social Network Analysis, SNA)의 최초 연구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누가 살아 남을 것인가?』(Who Shall Survive?, 1934)에서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의 네트워크 그래프를 그렸다. 그것은 ‘노드들’(nodes)과 ‘연결들’(links)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SNA연구자인 프리만(Linton C. Freeman)에 따르면, 모레노의 주장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1) SNA는 사회적 행위자들을 연결하는 묶음에 기반한 구조화된 직관에 의해 동기화된다. 2) SNA는 체계적인 경험적 데이타에 근거한다. 3) SNA는 그래픽화된 상상력에 아주 많이 기반한다. 4) SNA는 수학 그리고/또는 컴퓨터 모델들의 사용에 의존한다. https://knightlab.northwestern.edu/2014/12/18/what-can-we-learn-from-the-history-of-social-network-analysis/ 참조.  
19) [역주]사용자와 직접적으로 상호 작용하지 않고 프로그래머 또는 관리자만 접근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시스템의 후면 부분. 시스템의 시작점이나 입력 부문을 의미하는 전단부(frontend)와 대비되는 용어로서 컴퓨터 시스템에서는 주로 데이터베이스와 같이 시스템의 후면에서 시스템을 지원하는 부문을 지칭한다. (IT용어사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20) [역주]API는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의 약자이다. 이것은 운영체제와 응용프로그램 사이의 통신에 사용되는 언어나 메시지 형식을 말한다.  
21) http://developers.facebook.com/docs/reference/api/.   
22) [역주]‘객체지향프로그래밍’이란 모든 데이터를 오브젝트(object;물체)로 취급하여 프로그래밍 하는 방법으로, 처리 요구를 받은 객체가 자기 자신의 안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 오브젝트에는 유(class)의 개념이 있어서 상위와 하위의 관계가 있다. 오브젝트 사이는 메시지의 송신으로 상호 통신한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각 클래스에 그 메시지를 처리하기 위한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오브젝트지향개념은 인공지능을 위한 소프트웨어 기법(技法)의 하나로 되어 있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28207&cid=40942&categoryId=32837 참조. 
23) [역주]그래함 하만(1968-  )은 미국 로스앤젤리스 소재의 SCI-arc 대학의 교수이다. 철학계의 최신 사조에 해당되는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의 기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객체지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객체지향 철학은 개인적 편차에 대해 상당한 여지를 남기는 꽤 일반적인 일련의 최소 기준들을 포함한다. 여러분은 나보다 화이트헤드에 동의하면서 여전히 객체지향 철학자일 수 있다. 내 자신의 판본은 하나 뿐 아니라 두 개의 기본 원리을 포함한다. 1. 서로 다른 다양한 규모의 개별 존재자들(매우 작은 쿼크와 전자들뿐 아니라)은 우주의 궁극적인 질료이다. 2. 이 존재자들은 무엇이든 그것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이나 심지어 모든 가능한 관계들의 총합에 의해서도 결코 완전히 규정되지 않는다. 객체들은 관계로부터 물러난다. 내 철학의 나머지 부분은 이 두 원리로부터 도출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 http://blog.daum.net/nanomat/53 참고. 
24) Aristotle, Categories, 2a13-2a18,4. 
25) Gilson, L’être et l’essence, 51. 
26) Aristotle, Metaphysics, 1028b4, 168. 
27) Ibid., 172 
28) Marx, Werner, Introduction to Aristotle’s Theory of Being as Being, 36. 맑스는 eidos와 morphe를 동등하게 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미세하게 구분되어져야 한다.  
29) Rotenstreich, From Substance to Subject, 2. “실체는 사물의 질서 안에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주체는 자아나 영혼의 질서 안에 있는 것이었다. 또는 칸트적 의미에서 자아는 주체의 통일성이다” 
30) Ibid., 1 
31) Stern, Hegel, Kant and the Structure of the Object, 10. 여기서 스턴(Stern)은 실체가 “실재적 본질(real essence)”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로크의 경우는,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442를 보라.  
32) [역주]육 후이가 말하는 ‘수동적 종합’은 들뢰즈가 흄을 정의할 때 사용한 그 용어임이 분명하다. 
33) Hennig, “What Is Formal Ontology?” 
34) Frank, Eine Einführung in Schellings Philosophie, 43. 
35) Tillette, “L’absolu et la philosophie de Schelling,” 208. 
36) Verene, Hegel’s Absolute, 6. 
37) 헤겔은 이것을 물을 통과하는 광선의 회절에 의해 왜곡된 상을 예로 설명한다. 철학적 탐구는 빛의 회절원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경험, 참인 지식을 구축하는 그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수행되는 것이다. 
38) Hegel, Logic of Hegel. 
39) 헤겔은 색상 스펙트럼으로서 백색 광선에 대한 뉴턴이론에 반대하는 괴테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에게 백색광선은 빛과 어둠의 통일성으로 이해된다.  
40) Heidegger and Hegel, Hegel’s Concept of Experience, 20. 
41) Ibid., 22 
42) 후설의 헤겔과의 연결지점은, 내 생각에 하이데거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헤겔의 경험 개념과 후설의 범주적 직관 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  
43) 후설에게서 기술적 대상들의 부재는 베르나르 스티글러에 의해 『기술과 시간』 1권과 2권에서 더 심도 있게 연구되었다. 스티글러는 후설이 첫번째와 두 번째 다시당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으나, 세 번째 다시당김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 세번째 다시당김이 기술적 대상들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라고 논한다.

44) 기술철학이 19세기 유럽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산업혁명 때문이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에른스트 캅(Ernst Kapp, 1808~96), 만프레트 슈뢰터(Manfred Schröter, 1880~1973), 프리드리히 데사우어(Friedrich Dessauer, 1881~1963),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귄터 안데르스(Gümter Anders, 1902~92)와 같은 인물들, 그리고 20세기 북미에서 등장한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알버트 보그만(Albert Borgmann), 돈 이데(don Ihde), 칼 밋첨(Carl Mitcham) 그리고 앤드류 핀버그(Andrew Feenberg) 등의 인물이 있다.

45) Heidegger and Boss, Zolikon Seminars.

46) Simondon, On the Mode of Existence of technical Objects, 39.

47)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56.

48) Simondon,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79.

49) Simondon, “Genesis of the Individual,” 297-319.

50) Simondon,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83.

51) Harman, Tool-Being, 3.

52) Ibid., 66.

53) Ibid., 5.

54) Harman, Guerrilla Metaphysics, 88. 하만은 실체와 관계가 상호교환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55) Leibniz, De Progressione Dyadica.

56) Widmaiter, Die Rolle der Chinesischen Schrift in Leibniz’ Zeichentheorie, 25.

57) Chaitin, “Leibniz, Information, Math and Physics.”

58) Ibid.

59) Fredkin, “An Introduction to Digital Philosophy,” 189.

60) Ibid., 195.

61) Floridi, “Against Digital Ontology”

62) [역주]“입도는 어떤 객체나 활동을 특성을 나타내는 상대적 크기, 비율, 자세한 정도 및 표현의 깊이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용어는 천문학, 사진술, 물리학, 언어학 그리고 정보기술에서도 꽤 자주 사용된다. 이것은 사진의 선명도 또는 사람의 일생을 묘사하기 위해 제공된 정보의 량 등과 같이 객체들이나 행위들에 대한 등급체계를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사용되는 상황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가 항상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http://www.terms.co.kr/granularity.htm 참조.

63) 플로리디로부터 인용. “Philosophical Conceptions of Information,” 13-53.

64) Weaver, “Recent Contributions to the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 103.

65) Floridi, “Peering into the Future of Information”

66) Ibid.

67) Floridi, “Web 2.0 vs. Semantic Web.”

68) Hui, “Simondon et la question de l’information.”

69) Lyotard, Postmodern Condition.

70) Lecourt, L’épisitémologie historique de Gaston Bachelard, 25.

71) Ibid.

72) G. Bachelard, La nouvelle esprit scientifique, 129.

73) Sloterdjik and Heinrichs, Die Sonne und der Tod, 137-39

74) Russell, Principles of Mathematics.

75) Ibid., section 24.

76) Ibid., section 29.

77) 투플(tuple)은 말 그대로 다양한 것들의 어떤 그룹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식물, 동물), (3,5)와 같은 그룹과 같은 것이다. TRC는 어떤 관계성을 구획하는 여러 투플 변수들을 특성화하는 것에 기반한다. 이것은 간단한 예시로 설명 가능하다. 관계 데이터베이스 안에 아래와 같은 정보를 가지는 어떤 회사를 고려해 보라. EMPLOYEE(SSN, Name, Bdate, Address, Salary, Dept Id). TRC의 쿼리(query[컴퓨터 질의어])는 “봉급이 3만보다 큰 피고용인을 모두 찾아라” 또는 {t|t EMPLOYEE ∧t. Salary > 30,000}과 같은 것이 된다.

78) DRC는 어떤 속성의 도메인으로부터 값을 취하는 도메인 변수(투플 대신)를 사용한다. 우리가 위의 주석에서 사용한 동일한 예시를 이 경우에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봉급이 3만보다 큰 피고용인을 모두 찾아라” 또는 {<id,n,b,a,s,d>|<id,nn,b,a,s,d>EMPLOYEE ∧s > 30,000}

79) Ellul, Technological system, 102

80)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302.

81) Bontems, “Queques éléments pour une épistémologie des relations d’échelle chez Gilbert Simondon.”

82) Lecourt, L’épistémologie historique de Gaston Bachelard, 24-25, G. Bachelard, Essai sur la connaissance approchée, 78에서 인용.

83) Tiles, “Technology, Science and Inexact Knowledge,” 167.

84) [역주]이 책의 제목은 L’Invention dans les techniques, Cours et conferences이다.

85) Simondon, Imagination et invention, 165.

86) Bontems, “Queques éléments pour une épistémologie des relations d’échelle chez Gilbert Simondon.”

87) Kant and Pluhar, Critique of Pure Reason, A426-27, B454-55.

88) Bachelard, Essai sur la connaissance approchée, 181.

89) De Carvalho, Poésie et science chez Bachelard: lieu et ruptures épistémologiques, 119.

90) G. Bachelard, La nouvelle esprit scientifique, 129.

91) Heidegger and Lovitt, Question Concerning Technology를 보라.

92)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72.

93) Heidegger, “Letters on Humanism,” 221.

94) Heidegger, Question Concerning Technology,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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