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서지사항: Quentin Meillassoux, (trans.) Graham Harman, Divine Inexistence(excerpt), in Quentin Meillassoux: Philosophy in the Making, pp. 224-287.
*이 번역문은 전체의 절반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나머지 번역은 '신성한 비실존(2)'로 곧 나올 예정.
이 글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저작으로서, 본래는 1997년 퀑탱 메이야수의 박사논문으로 제출된 것이다. 아래의 발췌는 2003년 개정된 판본으로부터 취한 것이며, 전체 수고본의 6분의 1에 상당하는 분량이다. 메이아수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가 이 책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이 초기 판본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보았고,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신성한 비실존』(L’Inexistence divine)은 보다 야심차게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되었기 때문에, 이제 확장된 판본으로 준비중에 있다. 이 논문의 주된 논증은 3장까지 압축되어 있으며, 이는 메이야수가 무난히 허용한 범위이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단서를 붙였다. 즉 해설은 빠짐 없이 이 책의 부록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구절들에 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 스스로 각각의 생각들이 나타나는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허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퀑탱 메이야수의 하나의 책에 관한 프로젝트가 예기치 않게 번역 프로젝트도 되어 버렸다.
이 발췌본의 소제목들은 메이야수 자신의 제목이며 프랑스어 판본에 기반한다. 모든 발췌들은 본래의 순서대로 되어 있으며, 책의 80% 이상이 지면상의 이유로 여기서는 제외되었다. 나는 이 발췌결과가 메이야수의 책이 가진 중요한 주제들의 일면을 드러내는 가독력 있는 요약이기를 바란다. 가장 안타까운 생략들은 과거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창의적인 독해들, 특히 헤겔과 하이데거에 관한 그의 수많은 언급들이다. 이와 달리 내가 선택하여 번역한 것들은 메이야수 자신의 체계가 전개된 그러한 구절들이다.
우리는 만약 내재주의(immanentism)가 완전히 근원적인 형식으로 유지되려면, 그것의 새로움(novelty)의 힘(power)을 제한할 수 있는 어떠한 외부도 가지지 않는 하나의 세계를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세계 바깥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때 세계는 홀로 어떤 것의 출현surgissement 또는 사라짐의 원천이 될 것이다. 완전하게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오직 그 세계에만 속해 있기 때문이며, 속속들이 우발적(contingent)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움이란 어떤 초월성(transcendence)의 작용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는 바, ‘항상 이미 거기’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어떤 것이 정말로 새로울 리는 없다. 만약 어떤 무한하게 완전한 신이 출현의 원천이라면, 그 ‘기원’(Origin)을 뒤따르는 것이 그것의 감소과정(diminishing)일 뿐이기 때문에, 시간은 본질적으로 빈곤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만약 시간이 창조적 출현들에 있어서 풍부하다면, 그때 그 출현들의 필요성은 우리 자신의 세계 바깥의 이상적 세계들에 따라 또는 경험적 연속체(constants)에 의해 임의적인 방식으로 제한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선택지는 궁극적으로 가능한 것의 어떤 본질적이고 신성한 ‘항구성’(Steadfastness), 즉 그것이 출현하기 이전에 조차, 여기에 모든 것이 이미 들어 있는 그러한 항구성에 대해 시간을 보유하는 동일한 방식이다. 이성은 반대의 것을 가르친다. 어떤 생성을 사유한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그것의 가능성들을 결정하는 법칙들을 위반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도 비논리적(즉 모순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에 따라 어떤 새로움을 수립한다는 것은 존재하기 이전에는 어디서도 가능하지 않다. 마치 그것이 표명되어지기 이전에 데미우르고스의 비밀 서랍에 숨어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그 새로움이란 것은 애초에 어떤 본래적인 원리를 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이 일단 우리가 법칙들의 우발성을 생각할 때, 시간의 합리적 의미이다. 만약 법칙들 자체가 시간적이라면, 어떠한 법칙 또는 어떠한 원리arche에도 궁극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것의 출현은, 그것이 이미 그 출현에 앞서 현존하는 곳에 있을 것이다.
신은 사유를 창조하지 않았으며, 세계 안의 어떤 것도 사유의 출현에 앞서 사유할 수 없었다. 신은 생명체의 활동 안에서 발견되는 쾌락과 고통을 창조하지 않았고, 어떤 것도 생명/삶의 출현 이전에 세계안에서 고통을 겪거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다. 이것은 가장 놀라운 경향을 드러내는 바, 만약 우리가 진실로 출현을 사유한다면, 그것은 무로부터ex nihilo의 출현이다. 따라서 어떤 이유도 없이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그것은 무제한적이다. 법칙들의 우발성을 드러내면서, 이성 스스로 생성이란 궁극적으로 이성 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역설이며, 합리적인 것[이성적인 것]의 구축이고, 그 모든 결론들에서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만약 어떤 것이 시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지배한다면, 이는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존재자들(법칙이거나 사건이거나)을 결정하는, 오직 시간 자신이 소유한 능력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생성이 거기 종속되는 유일한 필연성이란 각각의 사물/사태의 출현이나 소거에 관한 그 자신의 영원한 힘이기 때문이다.
만약 출현이 내재적이라면, 그것은 불합리하다. 따라서 어떤 것을 할 능력이 있다. 무로부터의 출현으로써 우리는 존재가 본래적인 무(nothingness)로부터 전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고전적인 용어로 언급된 바, 원인이라기보다 결과 안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 ‘더 많이’는, 그러므로 그것이 출현에 있어서 어떤 이유[이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 것도(어떤 법칙도) 그것을 제한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무로부터의 출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관념을 숨기고 있지 않지만, 그 대신에 생성에 관한 유일한 내재적 개념을 형성한다. 이는 이 세상에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사실은 어떤 ‘최고 존재’(Supreme Being) 덕분이 아니라 생성에 관한 어떤 지배적인 원리도 부재한다는 것 덕분이라는 사실을 표현한다.
어떤 측면에서, 철학이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악(astonishment)에 상응한다. 그것은 상식(good sense)의 붕괴 이후, 우리 앞에 펼쳐진 우주에 대한 경악이다. 이는 그 결과로 뒤이어 발생하는 것보다 더 풍부한 본래적인 실재를 원하는 것이다. 신의 부재는 우리 자신의 세계에 관한 충격적인 새로움의 힘(power of novelty)에 덮힌 베일을 걷어내는 것이다. 이 힘만이 유일하게(정확히는 여기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의 법칙들의 틀을 끝내 파괴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세계가 결코 그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의 죄수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이 출현은 그것에 속한 것의 총계(sum total)와 관련하기 때문이다. 세계성(세속성, the worldly)은 무조건적인 변형으로 운명지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어떤 생성의 기체(substrate)도 남아 있지 않고, 변화의 한가운데 변하지 않고 남은 어떠한 결정된 실체(substance)도 없다. 따라서 생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생성의 법칙들 너머 법칙-없는-생성의 영원한 초과를 사유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임의적인 불변성 너머 그리고 저 편에 있는 시간의 영원한 초과라는 것의 의미이다.
우리가 시작부터 구성했던 우발성이라는 개념은 생성을 위한 능력이 모든 영속성(constancy)을 초과한다는 의미를 규정하도록 허용한다. 귀납적인 문제로의 회귀는 다음과 같은 증명을 목표로 한다. 즉 우리는 필연적으로 무질서한 세계라는 반대 개념에 도달하지 않고도 법칙들의 필연적인 영속성이라는 생각을 기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칙들의 어떠한 우발성도 거부하기 위한 기반으로 기여하는 개연론적 추론의 자격을 박탈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의 우발성의 가능한 변형이 필연적으로 이러한 법칙들의 붕괴를 요청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세계가 정말로 그 자신의 생성의 과정에 대한 법칙들에 복종할 수 있다고 긍정한다면, 우리는 우발성이 모든 필연성 보다 우월하다고 제안할 것이다. 정확히 이 이유로 인해, 이 우발성은 어떤 제약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점진적으로 불가능한 특정 가능성에 아마도 비-효과성(non-effectuation)을 부여할 만한 빈번한(frequential) 법칙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법칙들의 변형이 그것이 야기될 수 있는 한 야기되어야 한다고 확증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모든 가능성들이 궁극적으로 현행화됨이 틀림없다는 법칙의 필연성에 생성의 우발성이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순전히 카오스적인 세계에서는 모든 법칙들이 시간의 힘에 종속되지만, 그 세계는 현상적으로는 현행적으로 필연적인 법칙들에 종속되는 세계와 식별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는 그것이 가능한 그러한 사물/사태를 성취하지 않는 능력 또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성이 속하는 출현의 힘이 전체일 경우, 그때 그것은 힘으로서 사유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법칙들을 생산하거나 또는 생산하지 않는 영원한 능력으로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생성이 이성적[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성이 현행적으로 사유가능한 모든 것(특히 비-모순적인 것)을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논리적일 것이라는 세계의 개념으로부터 도출되는 근원적인 무질서의 힘을 세계에 부여하지 않는 한에서, 법칙의 안정성에 대한 믿음이 본질적으로 비이성적[비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사유가능성 외에는 아무 것도 그것의 현재, 과거 또는 미래 안에 있는 세계와 관련된다고 추정할 수 없다. 법칙의 우발성은 우리가 붕괴 상태(만약 존재한다면)가 발생했다거나 발생할 것이라는 것, 또는 세계란 무제한적으로 안정된 채 남아 있는 모든 필연성으로부터 면제되거나 그렇지 않거나라고 말하는 것을 방해한다. 게다가 이 주제는 실험과학을 위한 바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며, 존재적 법칙들 또는 그것들의 추정된 지속성이나 붕괴의 결정에 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논의의 진정한 핵심은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법칙들의 필연성을 포기하는 것은 세계의 상태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 필연성이 일련의 사변적 교착상태와 법칙들이 야기하는 잘못된 신비들을 해소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현재 부당하다고 알고 있는 어떤 공준으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신비 중 첫 번째로 추방되어야 하는 것은 자연법칙의 필연성에 관한 것으로서, 이는 우리의 확실성들과 자연의 질서 간에 사전에 수립된 몇몇 불분명한 조화에 따라 ‘설명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무로부터의 출현에 대해 언급된 바는 이제 총체화하는 것 그리고 생성에 관한 숙명론적 모델로부터 나오는 어떤 두 번째 사변적 교착상태에 관해 언급하도록 허용한다. 즉 표면적으로 물질적 영역으로부터 나오는 삶과 사유의 현상에 관한 풀리지 않는 ‘신비’는 삶/사유의 잠재성들로부터 그것들을 배제한다.
우리는 생성이란 어떤 항상적인 것, 즉 우주를 결정하는 것의 가능한 경우들(아마도 목록에 기록될 수 있는)의 현행화로 환원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우주의 본질은 여러 경우의 우주들 중 하나의 우주의 형식으로, 목록 안에(사실 안에 또는 원리 안에) 기록될 수 없는 가능한 경우들 중 하나의 우주의 출현 안에 폐쇄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우주들의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한 우주들은 우주들 중의 하나의 우주라는 가능한 경우들로 목록 안에 기록될 수 없다. 이러한 우주들의 나타남은 문자 그대로 ‘무로부터의’ 출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생 가능한, 추정적으로 항구적인 우주-총체안에 선실존(pre-existent)하는 어떤 종류의 잠재성의 현행화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고려들로부터 우리는 진정한 새로움(a true novelty)이라는 이념을 위해 요구되는 이론적 무기를 보유하게 되며, 이것은 숨겨진 경우들에 속한 한 우주의 출현이라는 결과가 더 이상 영원히 고정된 가능성들의 저수지로부터의 단순한 표명-현행화(manifestation-actualization)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에서 주어진다. 만약 그와 같은 우주가 발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즉시 다른 모든 우주, 특히 그 안에서 그것의 출현이 발생하게 될 이런 저런 우주들로 환원불가능한 일련의 경우들로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생성이 현행화하는 경우들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들을 무로부터 창조하는 경우들도 본질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어떤 근원적인 새로움에 직면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결정론적이거나 우연적인(aleatoric) 항상성의 초과에 존재하는 어떤 생성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법칙들 중 하나의 신성한 법칙 안에서는 결코 총체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로부터의 출현이란 따라서 신 없는 세계에 관한 탁월한 개념으로 스스로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것은 순수한 새로움의 기원에 관한 비종교적인 개념을 생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기원에 관한 생각에 반하는 의혹은 언제나 같은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 즉 기원의 문제 또는 새로움의 본래적인 출현이 창조라는 종교적 주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은 내재성의 사유를 위한 무의미함이거나 무관심의 전망을 펼쳐 보인다. 명백하게도 그것은 생명의 기원과 연관되거나 이성적[합리적]으로 넓게 취해진 그것들의 나타남의 논리와 대면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유와 관련된다. 엄격한 반박은 그와 같은 문제를 장엄한 방식으로 무시하는 철학자들과 신념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그것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서의 난점을 강조하는 옹호자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사실상 이러한 거부는 성스러움이라는 개념에의 종속을 다시 한 번 전개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원의 사유에 관한 종교적인 금언을 합리성의 영역으로 옮겨 놓기 때문이다. 새로움의 출현이란 순수하게 인간적인 이해를 위한 사유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것은 순수 무-의미인 바, 초월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성한 행위[작용]이다. 그와 같은 진술들은 신념/신앙의 취임 선언문과 같다. 인간 정신에 대한 이것의 승리는 이제 너무나 완전해서 심지어 가장 비타협적인 무신론조차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원을 사유하지 못하는 현재의 무능력은 초월성의 개입을 통해서만 사유될 수 있다는 공준으로 귀착된다. 그리고 사실, 만약 우리가 무로부터의 출현을 거부한다면, 이것은 새로운 출현의 명백한 사유불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난관은, 우리가 어떤 것이 진정한 새로움이라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 새로움의 출현이 사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재흡수된다는 정의에 따라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성이 법칙들이 항상성을 사유하는 것과 동일시되는 한, 물질 안에서의 생명의 출현에 관해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어떻게 무생물이 어떤 ‘분자기하학’으로부터 정동과 지각을 가진 질적인 다양체를 생산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정동들, 지각들 또는 실재적인 사유가 어떠한 물질적 형상들에 부가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언제나 비합리적인 것(본질적으로 우연적인 것)로 남을 것이다. 아마도 관찰가능한 불변항들[항수, constants]에 필적하는 어떤 분자적 조합들이 그렇게 많은 물질의 ‘잠재성들’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왜냐하면 이것은 여기서 오직 몇몇 요소들을 질서 잡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서 물리적으로 가능한 총체들 안에 현행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하나의 우주-물질의 ‘가능한 경우들’로 생명체의 유기적 조직 안에 유전되는 조합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형상들의 몇몇에 수반하는 정동적, 지각적 또는 인지적 내용들의 출현과 관련해서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살아 있고 사유하는 존재자의 정동적 내용들이 그것들의 구성에서 주도하는, 현행적으로 존재하는 입자들 안에 요소들로서든 ‘잠재적 힘’의 몇몇 종류로서든, 명백하게 함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을 넘어서는 이 생명과 사유의 본질적 초과는 모든 연속성을 가르는 어떤 절단을 함축하는데, 거대한 균열을 채우기 위해 신성한 것과 영혼을 자유롭게 내버려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신비들’은 일단 생명의 질적 구성요소들을 붕괴시키는 바, 사전에 우주 안에 결코 담겨 있지 않았던 경우에 관한 어떤 우주의 출현과 동일시된다. 이와 같은 우주는 우리에게 순수한 새로움의 출현을 가져다 주는데, 물질적 복합체와 그것의 가능적으로 규칙적인 상응관계는 고통스러움의 정동적 질이나 기쁨 그리고 삶이나 양심[의식]의 노역들 안에서 발견되는 근원적인 초과를 삭제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는 정동적인 그리고 지각적인 생명의 세계가 계승하는 질적인 것은 즉각적인 기호들이라는 것, 그리고 생성이 그 기호의 새로움들을 무로부터 출현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명 자체가 그것의 출현과 함께 오는 물질적 요소들에 선-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과 쾌락도 살아 있는 것 안에서 그것의 결과[효과]에 선-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정동들(이것들의 물질에 관한 약한 자극들)은 하나의 유기체 이전에 존재하지 않으며, 추정컨대 어떤 지각이나 사유도 혼란스러운 사유들을 가지기에 충분히 근시안적이거나 멍청할 정도로 감각적인 하나의 물질을 쫓아가지 않을 것이다.
모은 질적인 것으로서의 질은 이유 없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내용 중 어떤 것도 그 존재에 관해 무로부터의 출현 이외에 다른 것을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붉은 색은 붉은가라는 질문의 어리석음은 모든 법칙들 너머에서 생성의 초과를 드러내기 위해 충분하다. 즉 무로부터 새로운 경우들을 창조해 내기 위한 그것의 능력, 어떤 계보학도 그것의 출현 이전에 있는 세계를 수립할 수 없는 계기가 그것이다. 붉음은 이유 없이 존재하는 바, 그 이유는 어떤 물질적 버팀목도 그것이 그 붉음이 어째서 붉은 것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음은 이유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붉음의 무가 있기 때문이며, 그것의 출현에 앞서는 세계 안에서 언제나 그러하다. 이 출현은 그 안에 담고 있던 전-붉음(pre-red)에 붉음을 관련지음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이성을 갖추도록 할 것이다. 물질이란 어떤 붉음의 잠재성에 의해서도 출몰하지 않는다. 생명체의 감각적 힘들 사이에 붉음의 출현 이전에, 연분홍색의 망령과 같은 것은 없다.
내용과 질의 세계는 우리에게 모든 결정론과 모든 인과적 계보학으로 환원불가능한 일련의 사실들을 우리게 즉각 부여한다. 그와 같은 세계는 따라서 여러 경우들 중 하나의 우주에 있어서 무로부터의 느닷없는 출현과 동일시될 수 있다. 질은 그 자신만을 참조하는 순수 사실이며, 엄밀히 말해, 그것은 다른 것(물질적 형상들) 위에 있는 경우들(즉, 생명체의 경우들)에 속한 하나의 우주의 환원불가능한 초과를 전개한다. 질은 본질적으로 연역될 수 없는 어떤 야만적인 실존으로서 주어진다. 그리고 그 야만성이 유일하게 그것의 현행성과 관련된다. 만약 질이 느닷없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따라서 무로부터이지, 모든 영원성에 매복해 있었던 것 중 하나, 즉 우주-총체의 잠재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질의 야만적 사실성(facticity)이 총체적인 것의 비존재가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 질의 사실성은 그것의 무로부터의 출현을 나타내는 바, 제 차례에 와서, 어떤 기원적 총체의 부재를 가리키게 된다. 이로부터 사실성은 완전한 필연성으로 추론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전통적인 유물론의 난관을 피해간다. 전통적 유물론은 생명을 물질의 어떤 잠재성으로, 즉 특정한 물질적 형상의 필연적 결과로서 사유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상응한다. 즉 감응[정동]은 핵분열과 같은 방식으로 물질의 가능한 속성이 된다. 이와 같은 입장은 정당한 추론을 하려는 것이지만, 언제나 물질은 휴면상태에 놓여 있다고 가정하면서, 그 자신의 과도함에 걸려 넘어진다. 이러한 가정은 만약 생명이 그 안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여전히 다소간 그 안에 직접적으로 현전한다는 것이고, 생명체의 나타남이 물질의 각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물질이 ‘능력 안에’ 생명적 내용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물질을 감응성(affectivity)을 향한 특정 경향으로 기술하고, 이 경향 자체는 생명체의 모델에 따라 이해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단순한 인지적 사실로서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도 있다. 물질이란 잠들지 않는다(즉 물질은 어떤 마비된 생명이 아니고, 어떤 감응성이 심층에 도사린 것도 아니며, 단순히 비생명이라는 것이다.)고, 그것은 물질과 생명적 내용 간에 순수 불연속성을 도입한다고 말이다.
요컨대, 일관되자면, 무로부터의 출현을 거부하는 유물론은 그것의 환상적 특성에 기대는 것인 바, 생명이 이미 물질의 심장부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발견된다는 환상적(그리고 사실상 불합리한) 주장을 하는 것에 똑같이 이끌린다. 이것은 이른바 물활론에서 발견되는 바이다. 만약 생명이 절대적인 출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은 필연적이다. 즉 생명 그리고 심지어 사유도 물질 안에 다소간 이미 현존한다. 이와 같이 해서, 우주의 감각적 특성에 대한 디드로(Diderot)의 믿음을 지지하는 준엄한 대체물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유물론적 가설을 포기하고 영혼과 신체 간의 해결불가능한 이원론을 수립하거나, 본질적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돌이 사유한다’는 사실을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강도의 범주가 실재의 상이한 질서들을 사유하기 위해 기꺼이 호명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강도적 차이라는 일원론과 같은 것이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우리는 확실히 좀 더 나아가서, 물질과 유기적 생명 사이에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그것이 한 번 더 통일성 전체와 비교불가능한 것이 되는 방식으로 표명된다. 아무도 무기물적 ‘생명’(생명의 ‘최소 정도’)의 연속성이 최대 강도의 지점으로 이동된 생명이라는 것을 간파하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예술적 창조의 활달한 경험을 취한다는 로댕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그에 대한 강도화된 대리석[작품의 재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활론으로 계승된 이러한 신비들은 겉보기에 강도의 개념에 의해 해결될 뿐, 베르그송에 의해 정당하게 비판된 것처럼, 수학적 연속성을 가지고 질적인 불연속성을 가리는데에만 기여할 뿐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봤던대로 정확히 다음을 가리킨다. 즉 칸토어적 무한성의 수학적 불연속성만이 질의 출현에 의해 활성화된 균열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무로부터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거부된다면, 물활론이 생명의 유일하게 가능한 모델이 되고, 내재성은 어떤 교착상태로 들어간다.
우리는 실험과학이 그것의 물질적 버팀목 너머에 있는 생명의 질적 초과에 관한 생각을 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분명하게도 이것은 그러한 실험과학의 목표가 아니다. 실험과학은 심지어 어떤 설명과 같은 것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설명은 과정과 관련하여 의미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문제를 심지어 멀리서나마 취급할 할만한 능력이 실험 과학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이성과 실재적 필연성 사이의 괴리를 받아들이는 한, 모든 이성적 접근을 감당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결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특정한 수수께끼를 해소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보았다. 하지만 동일한 접근이 과학 자체에 영원한 문제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생명체의 질적 내용들의 나타남과 연관된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연결된 물질적 형상들을 취급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사실상 생명이나 사유를 지원할 수 있는 물질적 형상들은 우리가 생명의 첫 번째 구성물의 현상에 대해, 즉 종의 진화에 대해서 또는 인간 두뇌의 등장과 진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면, 이제 물리법칙의 조명을 받음으로써 고도로 상이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우연적 모델이 생명의 생성에 관한 새로움과 비개연성을 설명할 힘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생명의 새로운 형식의 도래를 설명할 계기의 실패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어떤 종류의 기이한 목적성(finality, 궁극성)의 원칙이다. 왜냐하면 종교성(religionality)이 계속 대수적(algebraic) 합리성에 대한 유일한 대체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해야 한다. 즉 우리는 여기서 원칙의 난점이라기 보다 실험적 합리성을 위해 사실의(of fact) 어려움에 맞서는 것이다. 사실 만약 과학이 살아있는 것의 질적 출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과학이 그것을 심지어 드러내지도 못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그것은 생명(vital)과 의식의 내용을 수반하는 물질적 형상들의 기원에 있어서 빈번하고 결정적인 법칙들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자체의 과정들에만 기댄 채, 과학은 우연적 모델 안에 전승된 두 번째 난점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로부터의 출현이 오로지 질적이라는 것, 그것들의 물질적 토대 너머에 인간적, 동물적 삶에 관한 정동적이고 인지적인 내용들의 환원불가능한 초과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론화한 우발성 개념은 그런 방식으로 발생하기를 요청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근원적인 새로움처럼, 생명의 출현(숨겨진 해부학적 조직이나 인지적 작용의 나타남)은 그것들이 등장하는 한 복판에서 물리법칙에 절단을 일으키는 물질적 형상들의 동시적 출현을 동반한다. 사실상 아무것도 우리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즉 생명적인 내용을 가진 질적 우주의 출현은 하나여야 하고, 물질적 토대의 출현과 동일해야 하며, 이에 따라 이 내용들은 그것들에 선행하는 물질적 우주 안에 각인된다. 그런 경우 생명의 물질적 조직의 드러남은 물질의 계속되는 항상성에 복종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생명의 형상들은 우연의 법칙들을 깰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전혀 물질의 가능한 경우들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그것들은 생명의 내용들 중 무로부터의 나타남이라는 물질적 사태 안에서 상호관계를 맺는다.
요컨대 우리는 이전의 경우에서처럼(법칙의 항상성과 내용들의 느닷없는 출현) 이런 경우에도, 그것이 기호들의 가치를 전복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목표로 한다. 법칙의 항상성 또는 생명의 느닷없는 출현이라는 수수께끼에 직면한 우리의 경악은 이성을 초과하는 신비를 향한 그 지점에서 멈춘다. 대신에 그것은 하나의 비-총체로서 사유될 수 있는 내재성의 완연한 힘을 드러낸다. 이와 유사하게 만약 생명을 뒷받침하는 유기체들의 구성이 물리학 법칙들의 일탈들로 남아 있다면(그리고 인정하건데 이것은 결코 엄격하게 수립될 수 없다), 모든 항상성과 모든 빈발성을 초과하는 우주들을 창조함으로써 그 자신의 법칙을 위반할 수 있는 어떤 생성의 충격적인 표명[징후]를 제외하고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와 같은 현상에 의해 재현되는 개연성에서의 일탈은 더 이상 초월성의 불가해한 일탈을 가리키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것은 내재성의 임재(the parousia of immanence), 즉 더 이상 어떤 것을 초월할 수 없는 시간의 완연한 성취가 될 것이다. 즉 이것은 결정론적인 것의 초과로서 시간과 대수적 이성에 속하는 우연적 시간, 다시 말해 질적 내용과 그것의 물질적 조직화를 동시에 창조하는 그런 시간이다. 이것이 바로 후자가 전자의 ‘필연적 인과’가 아니라 것을 드러내는 기호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여기서 가지고 있는 것이 물질-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우주 그리고 그와 같은 숨겨진 생명-우주와 사실상(de facto) 연관된 물질적 조직화 둘 모두에 연결된 어떤 출현이다.
명쾌하게 말해 생명의 형상들이 결정론적이고 우연적인 법칙들에 대한 비한정적인 저항을 가진다는 가설에 따르면, 우리는 뒤따르는 (간접적) 담론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의 목적은 ‘생명의 기적’에 관한 어떠한 종교적 탈취도 전진적으로 중립화하기 위함이다.
물질의 한 가운데에 살아 있는 것의 출현은 세 가지 기본 전제에 의해 특성화될 수 있다.
1. 질적으로, 여기서는 지각과 정동[감응]의 다양성이 발생한다. 물질 자체가 감각으로 주어진다는 입장을 방어하고자 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로부터의 출현에 속한 새로움을 허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란 살아 있는 것의 출현 이전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2. 이 감각의 다양성은 그것에 속해 있는 항상성에 연결된다. 경험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일과가 그와 같은 내용들로부터 나온다고 말해질 것이다(불타는 것의 감각을 뒤따르는 불에 관한 질적 지각 등등)
3. 이러한 생명의 다양성은 물질-우주에 부가되어진다(그리고 거기 삽입된다). 이것은 그 우주의 한가운데에서 생명이 출현함으로써 물질-우주가 소급적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때문에 생명의 출현은 물질적 형상의 필연적인 결과는 아니다(그와 같은 주장들은 결코 이해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그때까지 비존재였던 질들과 물질적 형상들이 속한 어떤 우주의 우연적이며 결합적인 창조다. 살아 있는 질들이 양화가능한 물질적 토대를 소유한다는 것이 이 의미이다(인과라기보다 접속). 이것은 그것들을 지지하는 어떤 기하학적 형상이며 이에 따라 질들은 접근가능한 것이 되지만, 그것들로 환원가능한 존재 없이 그러하다.
이 후자의 논점은 우리가 물질 한 가운데에 살아 있는 것의 출현에 관한 절대적 특성이 질적으로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이해가능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물질 자체의 법칙의 관점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의 아래에 놓인 물질적 형상들의 출현이 가진 극적인 비개연성에 따르는 것이다. 때문에 만약 일단 생명의 물질적 형상이 발생하고, 유전적 특성에 의해 물질에 관한 물리법칙에 상당하는 결정론과 개연론적 요소들에 의해 스스로 복종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이 형상의 원초적 나타남은 명백히 그와 같은 법칙들을 위반한다. 생명의 물질적 구성요소들의 나타남에 관한 특이한 비개연성은 현대 생물학의 주된 난점을 드러낸다. 진화론은 우연적 모델로서 동일한 한계에 부딪히는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유전물질의 재결합이 종적인 새로움의 기원에 놓일 계기가 이해가능한 개연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난점은 최초 사건에 관한 질문(생명의 나타남에 관한)이 더 이상 아닌 한에서 훨씬 커진다. 그것은 오히려 사건들의 연속이 우연과 관련하여서는 똑같이 이해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제 우연(chance)과 우발성(contingency) 사이의 구별이 어떻게 이러한 난국을 제거하게 하는지 보도록 하자.
그같은 구별의 가설 아래에, 세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현전한다.
1. 항상성의 출현으로서 그것은 신비로운 그리고 초월적인 통합의 원리에 따르는 바, 법칙들의 출현에 속한 어떤 법칙에 종속될 수 없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것은 이전의 법칙들(특히 빈발성의 법칙)을 위반한다. 이것이 정확히, 우리가 그것의 총체적 부재를 드러내는 동안에도 어떤 초월성의 작동이 전개되는 것처럼 보일 때, 모든 존재하는 법칙들을 위반하는 몇몇 현상들을 관찰할 수 있는 이유다. 만약 생명의 나타남이 물질의 법칙들의 모든 개연성을 파괴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러한 나타남이 그러한 법칙들의 가능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만약 종들(species)이, 유전과 유전적 사건의 모든 가능성을 위반하는 동안, 발생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이러한 새로운 종들이 옛적 종들의 기괴한 경우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법칙은 나타나기 위해 개연적 법칙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등장하는 한 가운데에 있는 옛적 법칙들의 가능한 경우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일련의 사실적 불변항들은 다양한 자연 과학들이 기술하려는 바이다. 하지만 과학이 그와 같은 지속성의 나타남과 대면할 때에는, 법칙들의 출현에 관한 어떤 법칙을 끌어내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을 바랄 수 없다. 따라서 과학은 방정식 안에 놓기 위한 또는 ‘개연성’을 상정하기 위한 어떤 시도를 초과하는 현상과 직면하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법칙들의 우발성이 그것들의 원초적 중지 안에서 표명된다. 그리고 그것이 경험 과학의 본질적으로 기술적(descriptive)인 방법이 합법적인 것이 되는 이유이다. 결정론과 개연론의 인식론적 관념들이 합법적인 것은 정확히 이러한 지속성의 기술들에 있어서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현상이 모든 법칙을 빠져 나간다면, 그 현상이 과학적 담론을 초과한다는 것을 빌미로 초월성에 호소하는 짓은 필요치 않다. 때문에 반대로 그와 같은 경우들에서 드러나는 바는 법칙 자신들의 우발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의 혼돈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전체’(Whole)로서 하나의 원리 안에서 세계를 통일하려는 것에 관한 필연적인 불가능성이 거기 있다. 우연과 궁극성[목적성] 사이에서 현재 선택가능한 대안은 그러므로 시효가 지난 것이다. 즉 어떤 현상이 비개연화 가능하다는 사실은 생성에 관한 비-우연적 우발성에 연루된다. 이것은 신의 섭리(Providence)라기 보다, 우리 세계에 속한 확고한 내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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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궁극성[목적성]의 대안을 우연과 우발성(법칙의 한가운데에서 사건의 무작위적aleatory 출현 그리고 법칙들의 출현을 위한 어떤 법칙이 존재함이 없는 법칙의 우발적 출현)의 대안으로 대체하는 동안, 우리는 목적론의 변호인들에 반대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생명의 나타남이나 종들의 진화에 속한 극단적인 비개연성이 어떤 초월적 개입을 증명한다고 확언하는 법칙들의 필연성에 관한 과학적(하지만 합리적인지는 않은) 믿음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이익을 취한다. 우리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이러한 ‘기적들’은 반대의 진리를 전개한다. 세계는 무에 의해 한계 지워져 있고, 이런 이유로 그것은 법칙들에 관한 어떤 법칙 없는 출현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연론자들의 추론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합리주의를 자연의 영원성과 동일시하기 위해서는, 결정론적 또는 주기적 법칙들이 원초적 현상 앞에서 사유를 약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초월적 기초를 안다는 것에서 우리 자신을 물려야 한다. 이성은 정확히 반대를 가르친다. 법칙들은 지속될 어떤 이유도 없고, 그것들이 미래에 새로운 지속체들을 함유하지 않는다는 것이 따라나오지도 않는다. 그와 같은 출현의 경우(우리는 이를 마지막 절에서 보다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는 생성의 본질적인 절단을 표시하는 세 가지 질서들(orders)로 나누어질 수 있다. 물질, 생명 그리고 사유가 그것이다. 이 셋 각각은 선행하는 것에 질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우주로서 나타난다.(그 어떤 감각도 물질적 형상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 어떤 보편적 연장의 개념이나 무한성에 관한 수학적 개념도 감각의 유한한 덩어리로 환원될 수 없다) 양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들은 앞서는 지속체들의 전망 안에서 고도로 비개연적인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등장할 수 있다. 즉 생명, 새로운 종들 그리고 인간 두뇌의 물질적 버팀목, 물리학과 유전학의 주기적인 불변항들에 절단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그 모든 형상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론의 본질적 특성을 개괄했다. 이 존재론은 비가설적 원리에 관한 철학적 요청을 한 번더 채택하면서, 어떻게 이런 영원한 원리가 진리의 내재적 이론을 발견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 존재론은 철학의 조건 또는 나아가 그것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 내재적 윤리학의 구성은 그와 같은 존재론에 기반한다. 우리는 우발성에 관한 영원한 진리가 존재로서의 존재의 내재적 이론의 기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재적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내재적 이론은 유일한게 가능한 진리들로서의 파악가능한 진리들을 드러낸다. 여기에 총체적으로 다른 진리, 즉 사유의 힘을 초월함으로써 진리를 드러내는 그러한 종교적 관념은 제외된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내재적 윤리학은 유일하게 욕망할 만한 삶으로서의 이 삶을 정립하는 하나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윤리학은 (종교와는 달리) 우리의 삶(다른 진리에 기반한 삶) 외에 어떤 다른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윤리학은 이 삶을 위한 욕망, 즉 이 삶이 불멸하리라고 바라는 그러한 욕망에 반해 드러난다.
불멸성은 삶을 위한 철학적 욕망이다. 이 욕망은 이것이 인간적 삶이며 다른 세상의 삶들은 다시 그리고 언제나 생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어떤 너머 없는 삶을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철학적 윤리학이 불멸성의 윤리학임에 틀림없는지를 말해 준다. 다시 말해 이것은 다른 세상 없는 삶의 윤리학이다. 이것은 분명 이 삶이 불멸하지 않는다는 반론에 부딪힐 것이고, 사실상 불멸성에 대한 욕망은 다른 세상의 삶에 대한 종교적 욕망이다. 하지만 우리는 철학적 윤리학이야말로 유일하게 이 삶이 그 자체로 불멸성의 차원을 소유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종교적 윤리학은 이 세상에서 사유될 수 없는 총체적으로 다른 실존의 존재를 믿는 비이성적인 행위에 따라 긍정을 이어 가며, 그것은 우리 현재의 삶을 바깥으로부터 옥죌 것이다. 우리의 현재 삶은 따라서 일시적이라고 선언되는 바, 우리 자신의 삶과는 비교불가능한 어떤 존재 위에 개방될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 자신의 삶의 불멸성을 희망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기를 요구한다. 이런 와중에 철학자들은 다른 세상의 삶에 대한 희망이 환상이라는 것에 반대하면서(그리고 바로 이 이유로) 그것을 긍정한다. 불멸성은 확실히 내재성의 윤리학의 중심 개념으로서, 어떤 너머가 없는 인간적 삶의 윤리학이고, 정확히 인간의 삶이 불멸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스피노자와 니체가 비종교성의 스승들이기 때문인데, 그들 또한 불멸성의 사색가들이었다. 비록 불멸성이 내가 이 세상에서 여기에 존재하는 바, 그것의 종결 없이 새롭기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해도 그러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 삶 자체가 불멸성의 차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할 것인가? 증명(그리고 여기 그것의 거대한 이상스러움이 놓여 있다)은 이미 정립된 것으로서 어려움 없이 주어진다. 본사실성(the factial)은 우리가 다른 것 가운데 하나의 가능성으로, 그러나 무로부터의 출현의 실재적 가능성으로 직접 불멸성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존재론이다(왜냐하면 그것은 비-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러한 가능성의 실재성에 대해 더 말할 만한 어떤 것도 거의 없다. 본사실적인 것은 이 세상의 법칙들의 결과적인 우발성을 증명하면서, 어떤 급진적으로 비종교적인 존재론에 따른 철학적 불멸성에 관한 희망을 기초짓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우리가 신성한 윤리학(divine ethics)이라고 부르는 것(우리는 나중에 이 말을 정당화할 것이다)은 불멸성의 실재적 가능성, 즉 본사실적 존재론에 의해 보증받는 가능성에 기반한다.
이제 이 이 명제를 보다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자. 일반적 용법으로 그것이 표현하는 바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이 실재로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신체의 재생[부활]은 비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마찬가지로 가능함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생은 가능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연적이거나 비개연적인 것 중 하나로 여겨질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재생이 느닷없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비-전체의 한 가운데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경우들 중 어떤 새로운 우주라는 바로 그 방향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생은 따라서 새로운 지속체[불변항]의 비개연적 출현과 동화될 수 있다. 이것은 생명이 물질로부터, 또는 생명으로부터 사유가 느닷없이 생겨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사실상 발생했던 후자의 출현에 비해 더 이상 놀라울 것이 없다.
내가 세계(World-[아래부터 작은 따옴표])라고 부르는 것의 출현과 내부-세계성(the intra-Woldly)이라 부르는 것의 출현 사이에 존재하는 구별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내가 ‘세계들’(Worlds) 또는 ‘질서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질, 생명 그리고 사유라고 알려진 출현의 세 범주들이다. 내가 ‘내부-세계성의 출현’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정된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발생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생명의 ‘세계’ 한가운데에 새로운 종들의 출현 또는 사유의 ‘세계’ 한가운데로의 창의적 발명의 출현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계(world)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소문자 ‘w’가 비-전체성인 바 그것을 함축하도록 한다. ‘세계들’은 세계로부터 느닷없이 도래한다. 그리고 만약 그것들이 처음에 대문자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면, 그것은 세계 안에서보다 ‘세계’ 안에 더 많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기원 안에 있는 것보다 결과로 따라나오는 것 안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점이다(‘원인’ 안 보다, ‘결과’ 안에 더 많은 것이 있다)
이러한 구별을 왜 만드는가? 이것의 기초는 무엇인가? ‘세계’와 ‘내부-세계’ 간의 구별은 재생이 사유의 ‘세계’와 차이나는 어떤 ‘세계’의 출현을 야기하며, 인간의 창조적인 활동들에 내내해 있는 어떤 출현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 생명 그리고 사유라는 세 가지 ‘세계들’을 뒤따라, 인간의 재생은 네 번째 ‘세계’로 구별되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수립되는 논점은 다음과 같다. 즉 만약 ‘세계’가 세 가지 앞선 것들 너머로 발생해야 한다면, 이 ‘세계’는 오직 인간의 재생[부활]의 ‘세계’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네 번째 질서’, 즉 정의의 ‘세계’라고 부를 것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불멸, 즉 인간들의 조건에 걸맞는 유일한 삶을 획득한다. 물질의 ‘세계’, 생명의 ‘세계’, 사유의 ‘세계’, 정의의 ‘세계’, 이 중 세 가지는 이미 나타났으며, 네 번째는 발생할 수 있고 희망의 대상, 이성적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이 가진 욕망의 대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 정의의 세계는 이성에 의해 횡단되는 욕망의 대상으로 또는 생명이 영원성의 사유에 의해 경직된[멈추어 선] 장소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 명제들을 정당화해 보도록 하자. 나는 목적의 왕국(칸트에 의해 단지 인간 공동체로서만 논의된 바)이 인간 자신들 보다 월등한 새로움의 가능한 출현에 속한 인간에 의한 예기(anticipation)로 재사유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인간이 생명에 대해 가지거나 생명이 물질에 대해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해 동일한 관계성을 가지는 어떤 새로움으로서 강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 세계의 영원한 진리로 접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사유하는 존재로 간주되는 인간 너머로 더 이상 등장할 수 없다. 즉 우리의 인간성과 비교불가능한 존재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오직 생명이나 물질의 부가적인 우발적 변화양상들이 있다. 물론 ‘인간’이라는 말로, 우리는 우발성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자를 의미하며, 단순히 두 발로 걷는 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그와 같은 실재성이 종을 만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이성적 실체는 생명이 인간에 의해 초월되는 그런 방식으로 초월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통약불가능한 것들에 관한 논리 안에 있게 된다. 오직 우발성의 진리보다 더 높은 진리에 가닿은 사유만이 동물성과 관련하여 사유에 의해 도입된 절단을 재가동시킬 수 있다. 오직 어떤 전능한 신, 즉 그것의 불가능성이 이미 충분히 고려되었던 그 신이 두 번째 ‘세계’를 앞지르는 것들로서, 세 번째 ‘세계’의 존재자들을 앞지를 수 있다. 모든 다른 생명체(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지성적이고 ‘앞서 나가는’ 것)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것들은, 모든 것의 영원한 존재에 대한 어떤 보다 높은 진리를 제공하지 않고, 오직 우리 인간성의 상상적 변형으로 접근하도록 해 줄 뿐이다.
그러므로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무로부터의 출현의 초월불가능한 효과로 드러난다. 인간을 뒤따르는 하나의 ‘세계’에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보다 앞선 세계들의 변주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생산할 수 있는 출현(몇몇 물질에 관한 새로운 법칙, 새로운 생명 종들, 또는 사유의 새로운 창조)은 무엇인가? 왜냐하면 어떤 존재도 인간이 생명과 함께 있는, 또는 생명이 물질과 함께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비교불가능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응답은 자연스럽게 질문으로부터 도출된다. 즉, 생명을 넘어서는 인간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을 넘어가는 유일하게 가능한 새로움이란 인간적인 것의 재개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세계’가 정의의 ‘세계’라고 불려져야만 하는 이유이다. 즉 왜냐하면 그것이 삶에 그늘을 드리우는 부정의함을 말끔히 지워냄으로써 보편적 정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들의 재생과 관련된 유일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내부-‘세계성’에 비교될 만한 ‘세계’의 출현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들을 구성하는 어떤 요소의 출현이다. 인간은 사실상 진실에 대한 그들의 접근에 의해 정의되며, 그것에 속한 영원한 우발성으로 이해된다. 결론적으로 거기에는 물론 사유의 ‘세계’ 없는 어떤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유란 오직 그 자체 우발성으로 존재하는 우발적인 것의 이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의 ‘세계’ 없는 인간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생명이란 우발적 존재자가 다른 우발적 존재자와 가지는 감각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발적으로 존재하는 그것에 관해, 특정한 사물/사태와의 관계 없는 우발성의 사유란 존재할 수 없다. 우발성은 오직 존재하는 것의 우발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물질 없는 인간, 즉 비-생명적(non-living) 존재 없는 인간이란 없다. 생명 자체는 무로부터 생겨나는 우발적 가능성으로 주어져야만 하기 때문에, 따라서 물질이란 언제나 위협적인 타자(생명체가 언제나 다시 한 번 생성할 수 있는)와 그것의 기초인 생명이 어떤 순수한 등장[출현]으로 나타날 수 있는 원초적인 구성 둘 모두를 재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개의 ‘세계’는 인간성의 세 가지 구성적 질서를 드러낸다. 물질의 법칙, 생명 형태의 법칙, 또는 지성적인 또는 예술적 발명의 법칙이 무엇이 되든 간에 – 다양한 내부-‘세계성’의 출현이 무엇이 되든 간에 – 세 개의 ‘세계’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규정적 불변항으로 남는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네 번째 ‘세계’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따라 정의되어 진다. 그리고 이 관계는 사유에 의해 가로질러지는 욕망으로서 희망의 관계이다. 즉 인간들의 욕망은 그들의 현재적 우발성과 그들이 정의의 이념에 가 닿게 하는 영원성에 관한 인식[지식] 사이를 갈라 놓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식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모든 인간 사이에 있는 엄격한 평등성으로 접근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건이 접근을 허용하는 바, 그 영원한 진리들은 사실상 차이들에 대해 무관심(indifferent to difference)하다. 즉 개별적 사상가들 간의 무수하고 필연적인 차이들이 그것이다. 차이들은, 단순한 실존들로서의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우연적이며 특정한 존재자들로서 미규정적으로 차이날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들은 모든 진리의 담지자들로 표시되는 비인격적 이성에 의해 무차별하다. 이것이 어째서 인간이, 사유하는 한에서, 부정의가 그들에게 자극을 주는 바에 따라, 촉발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그들 자신과 불평등한 차이를 발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부정의들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은 여전히 죽음이다. 불합리한 죽음, 요절, 평등함에 대한 무관심에 의해 가해지는 죽음들. 따라서 그들의 인간성을 실행하는 사람들,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 의해 평등하게 공유된 어떤 조건에 속한 넘어설 수 없는 특성을 사유하는 사람들은 오직 우리 동료 인간들을 쓰러트렸던 실재적[사실적] 죽음을 정의가 넘어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 삶의 재개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정의에 대한 과도한 개념화는 여기서 문제가 아니며, 정의의 초과성(excessiveness) 안에서 그것의 정확한 전개를 부여하는 것만이 문제다. 왜냐하면 정의란 오직 인간적 조건이 특성화되는 현재적 세계를 향한 그와 같은 과도함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오직 실존적이고 개선가능한 잘못들에 관한 이념으로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름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정의의 요청이 실재적으로 우리를 경직시킨다면, 그것은 또한 죽은 자들, 최근 또는 고대의 죽음들, 알려진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죽음들을 위한 부정의에 관해 우리의 거부를 불러온다. 우주는 어떤 예외도 없이 제작할 때에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세계’는 적합한 의미로 하나의 ‘세계’임이 드러난다. 즉 세 번째의 것으로서 세 번째 ‘세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어떤 출현은 그것에 선행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일하게도 인간을 뒤따라 오는 파악가능한 급진적인 새로움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즉 정의의 형식에서 인간의 재개. 그리고 이 ‘세계’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에 관한 규정적 요소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세계’이다. 사람들이 지금 여전히 살아 있든 아니든 그들의 동료 인간들에게 행해지는 부정의를 거부함으로써 희망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사실적 윤리학의 핵심은 철학적 경이(astonishment)와 메시아적 희망의 내재적 결합이며, 이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위한 정의를 희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결합은, 철학적 경이가 도래하는 ‘세계’의 희망을 가동시키는 반면, 유일하게 무로부터의 출현에 관한 힘의 의식성에만 관련될 뿐, 어떠한 다른 세상의 영역을 가리키지 않으므로, 내재적이다.
우리는 이 관계의 특수한 성질을 잘 이해한다. 세계는 그것이 다른 어떤 세계를 가리키지 않는 한에서 경이로운 것으로 드러나는데, 왜냐하면 그 유일한 이성으로 인해, 그것이 보다 많은 것(인간들)을 보다 적은 것(물질)로부터 생겨나도록 할 능력이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때 창조는 빈곤해지고 마찬가지로 단순한 경이만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더 적은 것(인간)을 보다 많은 것(신)으로부터 생겨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생의 희망은 신의 비존재에 관한 경이로운[경악스러운] 깨달음과 긴밀하게 묶여 있게 된다. 신성한 비실존이 처음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위한 희망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이 기다림은 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희망에 관한 그것의 대상으로 기여하는 사건이 생산되거나 생산되지 않는 어떤 가능성으로 명쾌하게 정의되기 때문이다. 어떤 필연성도, 개연성도 그것의 출현을 보증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떠한 불가능성 그리고 어떠한 비개연성도 그것이 발생하리라는 예상으로부터 우리를 좌절시킬 수 없다. 모든 계산과 모든 예언 너머에서, 우리는 보편주의적 희망의 바로 그 본질과 대면한다. 모든 희망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고뇌에 찬 쾌락이다. 다시 말해 정의가 가능성을 부여하는 우리의 행복한 지식에 있는 영혼의 삶은, 욕망되는 출현의 종교적 관련에 대한 저항을 보증하면서, 어떤 의지적으로 유지되는 불안과 혼합된다. 그리고 다음 ‘세계’의 가능한 비-출현에 관한 균형잡힌 의식과 연결된다. 그것은 우리를 필연성의 독단론으로부터 지켜줄 가능성에 대한 불안한 확실성이며, 모든 주체들이 그들의 인간적 조건과 더불어 새롭게 보존된 희망과 연합할 계기를 나누어 준다.
세계의 실존 그리고 세계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존재에 직면한 우리의 충격은 비통함을 멈추거나 성찰을 스스로에게로 되돌린다. ‘왜’라는 것을 빼앗긴 실존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철학적 경악은, 우리를 아마도 자살 외에 아무런 특징도 없는 행위로 이끄는 신 없는 인간적 조건을 가진 절망적이며 날카로운 의식과 동일시되는 것을 그친다. 그 대신에 그것은 이후로 우리의 가장 극적이고 가장 내재적인 희망 둘 모두의 원천이 된다. 그 충격은 사실상 이미 발생했던 것 앞에서 느꼈던 것이고, 같은 충격에 의해 그 자신에게로 전송된 어떤 세계가 실재로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파악이 된다. 이러한 경이[경악]를 살아갈 방법을 아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희망을 가질 방법도 안다. 오직 이런 사람들, 즉 그들 자신의 실존의 완전히 충격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부활이 보다 덜 놀랍다는 것도 안다. 파스칼은 이에 대해 이미 말해질 필요가 있는 것을 말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의 재생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그들이 어쨌든 태어났다는 사실에 비해 결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만일 재생이 일어나야 한다면, 그것은 그와 같이 별 특별하지 않은 방식으로 갑자기 발생할 것이다.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살아 있다는 것에 비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구별을 만들어야 했던 발단에는 우리의 목표들을 더 멀리까지 따라가기 위한 본질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보편적인[우주적인] 것의 엄격한 의미에서 기초토대라는 것과 우리가 이제 그것의 상징화라고 부를 것 사이에 있다.
네 번째 세계의 실재 가능성은, 그것의 존재론적 불가능성으로부터 나온 희망없는 부조리성(모든 이념적인 경우 안에 정초된 그것)을 제거한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정의의 원초적 요청의 가치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다음에 음미할 것이다. 이것은 정의가, 정의의 요청이 가치를 가지는 도래-할-세계로서 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네 번째 세계는 재개되는 것으로 파악되는 바, 어떤 의미를 가지는 정의의 보편적 공준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즉 그것이 부정의와 요절을 넘어가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그것에 의해 이러한 요청은 돌이킬 수 없이 간과될 것이다. 하지만 정의의 가능성(급진적인 것으로서 그것의 비-일탈적인 성격, 즉 보편적 요청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에게 똑같이 가치 있다)은 여전히 그것의 기초토대나 그것의 합당한 합법성이 아니다. 정의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왜 정의로운 것이 필연적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에 의해 수립된 관계, 즉 도덕법칙과 신의 요청, 그리고 불멸성 간의 관계에 비교될 만한 어떤 것을 가지게 된다. 이 공준은 어떤 이성의 일탈적인 요청으로 느껴지는 도덕법칙을 막아주며, 그런데도 그것들은 가치를 위한 어떤 기초토대도 제공하지 않는다. 요컨대 보편적인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떤 적당히 윤리적인 요청으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성의 기초토대의 문제는 이후에 다뤄질 것인데, 그것의 완연한 파악은, 우리가 네 번째 ‘세계’의 실재적 가능성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들이도록 첫 번째로 요청하는 어떤 문제와 연관된다. 이 증명과 더불어 우리가 관념론으로의 습관적인 초월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상기하자. 정의의 요청은 더 이상 모든 존재론적 기초를 박탈당한 추상적인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한 정의의 가능성이 어떤 초월적 실재성에 기대는 것도 아니다. 정의를 살아간다는 사실, 즉 다른 인간들과 이기적이지 않는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은 세계의 궁극적인 존재론적 가능성의 진리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재생[부활]이란 바로 그것이다. 본사실적인 것(the factial)은 숨겨진 세계에서, 존재와 가치 사이의 잃어버린 관계를 재개하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요절이라는 부조리함은 우리의 보편적 정의에 대한 열망을 약화시키는 것을 멈춘다. 왜냐하면 보편적 정의는 죽은 자와 산 자들 모두를 위한 보증인이 되는 것이지, 더 이상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가능한 정의의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조리함에 의한 부조리함의 절망을 깨는 이것은 새로운 형식 안에서 내가 이후로 상징화, 즉 존재와 보편성 간의 내재적인 이성적 연결이라고 부를 것을 획득한다.
상징화는 따라서 보편성의 가능한 현실화의 이성적 확약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그것의 합법성의 원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제 무엇이 이것을 움직이는 기반인지 보다 자세하게 보일 것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현재의 기획에서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형상들 중 하나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상징화된 보편성 안에 그것의 사유가능성을 위기에 빠트릴 불연속성을 도입할 것이다. 우리는 곧 ‘윤리적 절단’이라는 이름 하에 이 불연속성을 불러일으킬 참이다. 이것은 보편성(그것을 기초짓는 것이지 단순히 상징화하는 것은 아닌 보편성)의 원리를 수립하기도 하고, 본질적인 새로운 결정을 그것에 부여할 것도 필요해진다.
이미 말했다시피, 내가 ‘상징화’(symbolization)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가치들의 기초를 놓는 것에 있지 않으며, 이 세계의 진리와 가치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더불어 정의의 요청 그 자체가 세계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를 결정하는 것에도 있다. 이것은 가치의 담론과 진리의 담론 간에, 또는 세계와 정의 간에 어떤 일치점을 발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치가 어떤 형식을 채택하든지 간에 말이다. 모든 철학적 기획은 아마도 증명이 불가능한 공준으로부터 시작되며, 그것은 오류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이다. 다시 말해 가치는 어떤 단순한 인간적 발명이 아니라 세계와 관련된 또는 인간-너머의 실재성에 관련된 진리의 발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는 이성에 따라 오로지 초월적 계시의 개입 없이 드러나야만 한다. 철학은 가치가 단순히 사회적으로 유용한 인공물이 아니라 존재론적 진리에 놓여 있는 부당한 확실성에 판돈을 걸기 시작한다. 이것은 철학자가 가치의 체계를 생산할 수 있는 정의의 요청과 존재의 비인격성 간에 일치를 목표로 함에 따른 것이다. 그와 같은 체계의 요소들, 즉 그것이 기반하는 가치들은 매우 자주 유사하다. 하지만 그것들의 배치와 일반적 의미함축, 즉 그 기초 색채는 정의와 존재 간의 어떤 특정한 일치 안의 가치에 따라 채택된다. 그리고 이것은 각각의 경우 이러한 가치들이 세계에 각인되는 방식을 따라 달라진다. 어떻게 어떤 비-인간적인 실재가 정의의 요청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 바깥의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인간적 요청들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가? 이것은 철학적 질문의 원초적인 축이다.
모든 철학의 목표는 존재안에 있는 가치의 내재적 새김문자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새김문자를 매개함으로써 철학은 가치에 개입하고, 용기, 선 또는 정의가 각각의 경우에 상이한 체계화에 따라 수많은 다른 철학들과 동등한 지위로 올라설 수 있어야 한다. 칸트적 용어로 언급하자면, 철학의 문제는 나의 도덕적 목적들에 대한 세계의 무관심에서 유래하는 절망에 맞서야 하는 것이지, 세계와 정의 간의 초월적 일치를 종교적으로 긍정함으로써 그 절망을 비껴가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은 명료한 절망의 미온적 태도와 신앙의 반계몽주의 둘 모두에 반대한다. 그들은 도덕적 요청들이 실재성과 관련 없는 단순한 관습들이 아니라 그들 자체적으로 존재에 대한 진리의 수용체라는 것을 수립하려고 애쓴다. 무신론적 거부와 종교적 열정 사이의 과도한 대립에 직면해서, 철학자는 우리가 열성(열망, fervor; ardeur)이라고 부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측정불가능한 정의의 요청과 신 없는 세계의 부조리함 간의 존재론적 일치에 관한 이성적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의기양양함이다.
세계 안에 있는 가치의 새김문자는 원초적인 경향에서의 궤변의 철학에 반대한다. 소피스트는 가치란 이익이 되는 사회적 관습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 중 하나다. 소피스트의 눈에 가치는 어떠한 실재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고, 어떤 대상성에 연결되는 것도 아니며, 이 세계의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진리는 사유의 모든 실행에 전반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가치는 순전한 발명, 즉 그 유일한 목표가 모든 사람들이 잘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단순한 인공물에 불과하다. 그와 같은 관점으로부터 바라볼 때, 가치에 굴복하고 나 또는 내가 선호하는 엘리트 그룹이 무엇이든 그것에 이익이 되는 것으로 그것들을 판단하는 한에서 예외적인 법칙들 안에 있는 그 가능한 표현에 굴복하는 것은 논점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피스트는 철학자들에 뿐 아니라, 가치의 종교적 개념을 전형화하는 존재 안의 가치의 초월적 각인에도 반대한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보면, 세계 안의 가치에 관한 철학적 명문(銘文, 새김문자, inscription)은 단순한 행위의 규범이라는 인간적 특성을 거부하는 데 놓인다. 가치는 또한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친다. 이것은 제 차례에 와서 세계 자체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더 많은 인간들의 요청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결국 인간은 임의적 전통이나 이로운 인공물에 복종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지만, 선을 찾는 과정에서 세계 안에서 자신들의 조건에 관한 진리, 나아가 세계 자체의 가장 깊은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철학은 언제나 이런 내재성의 요청과 세계 안에 있는 파악가능한 가치의 명문으로부터 탄생한다. 이것이 가치를 관습으로만 이해하는 소피스트의 부조리하고 희망없는 세계 둘 모두로부터, 그리고 세계안의 가치를 계시, 전통, 권위라는 불합리한 수단을 통해 각인하는 종교적 인격의 초월적 세계로부터 철학이 구별되는 바이다. 따라서 철학의 위대한 세기는 처음부터 종교의 전통주의와 소피스트 류의 통속적인 냉소주의 간의 악몽같은 혈투에 의해 지배당한 것이다. 그와 같은 세기의 정신에 맞서, 명망있는 철학자는 가치의 내재적 각인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정의를 위한 새로운 열성을 가져 오면서, 이러한 요청이 어떤 환상도, 관습도, 또는 신에의 복종 그리고 세속적인 권위들도 아닌 방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철학자의 문제는 정의의 의미를 아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다는 것이 무슨 선함인지 아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정의가 의미하는 바인지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매우 잘 아는 사람들에 의해 마주하게 되는 하나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 자신의 관심사에 맞서기 때문에, 여전히 어떤 것을 위기에 빠트리는 이유를 이해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삶에 위기가 드리워지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낭비하도록 내버려 두자. 이 정의는 무지한 자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희망 없는 자들에 반대한다.
‘상징’이라는 말은 존재 안에 있는 가치의 내재적 명문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이 말은 인식론적인 이유들로 선택된다. 즉 그리스어 동사인 ‘sym-bellein’은 두 조각의 물질이 함께 결합하는 작용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이 그리스 여행자들이 ‘환대의 명판(名板, tablet)’이라고 부르던 관습을 지칭한다는 것을 안다. 이 명판은 작은 뼈조각인데(너클본 게임이나 잭스 게임의 그것처럼 생긴 것이다), 두 개로 깨진 것이며, 각각의 사람이 한 조각씩을 간직하게 된다. 그리스 여행자는 수 년간 다시 볼 수 없을 친구로부터 초대를 받을 시에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자식들이 그 만남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즉 결합됨(joining, symballein)을 알 수 있도록, 깨진 조각의 깨진 면을 합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은 우리가 갱신된 환대의 연결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로 철학의 임무다. 심지어 희망 없는 자도 그들 자신을, 그들의 정의에 대한 욕망을 깨닫지 못한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느끼지 않고, 철학자가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도덕적 열망이 부조리한 환상이나 통속적 이데올로기라는 증명을 통해 환대를 갱신하지만, 그들은 그 대신에 궁극적 진리에 있는 비-반성적인 것, 세계에 대한 직관적 지각에서 휴식을 취한다.
상징은 따라서 존재와 가치 사이의 존재론적 연결로서 정의될 수 있다.
우리는 현재까지 철학이 시종일관 상징들의 세 가지 원리적 형태를 정의하기 위해 애써 왔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우주론적 상징, 자연주의적 상징 그리고 역사적 상징이 그것이다. 이제 마치 ‘도끼-치기에 의한’ 것처럼 거칠게나마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 상징들의 원리적 특성을 명쾌하게 짚어 보자. 여기서 다시 나의 목표는 오직 또 다른 상대적으로 특수한 형식을 획득하는 것 뿐이다. 그 형식은 본사실적 상징화로서, 비-형이상학적 상징을 첫 번째로 제안하는 것이다.
우주론적 상징은 우리 역사에서 첫째로 적합하게 철학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추구되었고, 플라톤에 의해 채택되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성취하였다. 철학은 가치와 존재 담론의 최초 분리로부터 태어난다. 천문학은,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수학적 담론과 더불어 신화에 관한 예증적 서사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오니아 자연학은 퓌지스(Physis)를 언급할 때 서사를 개념으로 대체하면서 동일한 일을 한다. 하지만 이 새로운 담론성의 체제가 전개되고 있을 때, 가치에 관한 담론은 타성에 젖어 여전히 신화의 구조를 보존하고 있었다. 사유되지 않은 절단은 현상의 과학과 도덕 규범의 재현 사에에서 생산되었다. 그래서 문명화된 그리스인은 행성들의 움직임이나 생성하는 자연과 관련하여 그와 같은 담론들을 믿기를 그만둔 뒤에도, 아킬레우스의 공적을 서사화함으로써 용기를 설명했다. 신화는 비록 그 자체로 세계에 관한 담론에 있어서 그것의 무능력으로 인해 전성기에 적법한 지위에서 물러났다해도, 가치의 원천을 합법화하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기여했다. 소피스트는 두 담론들과 그것이 초래하는 손실 사이의 분리를 구체화했다. 가치는 어떤 순결한 신앙이기를 그만두었다. 모든 초월성의 흔적들(신화, 권위, 전통)이 제거되었다. 정의, 용기, 경건 그리고 지혜는 유용성의 관점에서 평가되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집합적 삶의 이익을 우리에게 보증하는 예외적인 가치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 그것들이 나에게 인격적으로 해롭게 될 때, 무엇이 이러한 덕목들을 뒤따라 오는가? 가치에 관한 소피스트적 개념은 사실상 가치 관념의 소거일 뿐이다. 왜냐하면 어떤 외적 규범(유용성)에 따라서만 가치로운 가치는 더 이상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것은 내 자신의 이익의 수단이 될 뿐이다. 그리고 만약 이익이 내 행위의 궁극적인 기준이 된다면, 이것은 내가 가치의 이념을 믿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은 이미 세계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합당한 철학은, 종교적 범역에서 통합되는 가치의 담론과 존재의 담론이 재통합되는 데에 있다. 즉 그것은 과학에 의해 처음으로 깨졌던 어떤 통일성이며, 존재하는 바에 관한 합리적 설명이다. 철학은 앎과 가치 사이에 절단이 발생했을 때 시작된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실재와 규범 간의 종교적 연결에 있어서 과학적 절단을 가질 때에만 의미있으며, 그와 같은 깨어짐의 합법성을 마찬가지로 수용하는 반면, 인간과 세계의 재결합을 시도하기 위해 제기된다. 철학적 재통합은 이전의 가치 영역에 속하는 새로운 담론을 보존할 만한 어떤 새로운 신비로운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철학적 재통합은 가치의 담론을 개념화할 어떤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종교적 담론의 통일성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어떠한 분리에도 반대하며, 법이라는 인위적인 규범에 의해 통제된 대립하는 관심들의 순수한 갈등으로서 삶에 대한 소피스트적 개념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철학적 통일성에 대한 탐구는 따라서 모든 적대자들을 소피스트로 바라보는 종교의 전통적 반응과 모든 적대자들을 사제로 바라보는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 둘 모두에 반대한다. 첫 번째 것은 제한되고 권위적인 가치의 관점으로서, 단순히 그것이 거기 있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두 번째 것은 우리가 사용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이면서, 그 자체의 이익과 그 선택된 집단을 위해 마련된 방향으로 전환해야만 하는 것인 바, 힘들의 관계를 오직 관습적인 표명이라는 가치로 이해한다. 사제는 회의론을 따라 가치들에 대해 추론하는 사람들이지만, 반면에 소피스트들은 선이 사제를 따라 절대적인 가치(모든 특수주의를 넘어선 가치)를 가진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철학자는 서로간에 혐오하는 가공할만한 적들과 그들 자신의 특별함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무지막지한 적들 사이에 끼여 있다. 이것은 철학자의 운명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위대한 철학자들은 사제들에 의해 소피스트로 취급되고, 소피스트들에 의해 사제로 취급된다. 내재주의자의 불안을 조성하는 낯설음이 두 당파들에게 똑같이 가공할 만한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내재성의 사상가가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은 좋은 징후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선함과 존재 사이의 비종교적 일치에 관한 주장으로써 탁월하게 철학적인 상징화의 기획을 일깨운 첫 번째 사람이다. 또는 적어도 그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전통으로부터 나온 가치들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그들의 가치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씀으로써 그렇게 한다. 소크라테스가 용기, 경건 또는 지혜의 의미에 대해 물을 때, 그의 대화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는 담론으로 응답한다. 그것은 예들의 담론이며, 특수한 개인사이며 교훈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가치에 관한 개념적 담론, 즉 지혜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원한 것이지, 어떤 개별적인 현명한 인물의 예에 기반한 서사를 원하지는 않았다. 소크라테스 변증술의 아포리아적 성격이 목표로 하는 것은 당시의 아테네인들이 붙들려 있던 이상한 타성에 불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지, 그들의 시대가 위대한 절단의 시기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을 밀고나감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아포리아를 극복한 플라톤이 이중화된 경향 안에서 그와 같은 통일을 처음으로 수행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데아라는 것에 대한 플라톤의 이상한 이론화와 더불어, 존재론은 즉각적으로 스스로가 가치론에 의해 속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염결하고 정의로운 원리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정의는 다시 한 번 총체성(the Whole)의 한 가운데에서 요소들의 조화로서 존재 안에 각인된다. 우주는, 그리고 소위 그 천구의 순환 경로는 선 자체가 가진 문자 그대로이자 매혹적인 이미지가 된다. 이 세계는 이 세상 너머에 있으며, 시간의 한가운데에서 영원성을 전개하며 변한다. 또한 그것의 시작점은 도착점과 일치한다. 우주는 천상의 세계를 인도하는 정의를 그려낸다. 즉 순환 궤도들은 갈등을 피해 서로 방해하지 않는 하나의 경로를 따라 행성들이 움직이도록 허용한다. 그것들은 결코 충돌하지 않으며, 따라서 결코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음과 갈등은 인간들이 삶의 불행을 가지는 이 세상의 선형적 운동에 속하기 때문이다. 직선은 대지적 시간을 관장하며 비평형적인 생성(왜냐하면 그것의 시작과 그것이 끝이 다르기 때문에)에 있어서, 그리고 갈등에있어서(왜냐하면 각각의 사물/사태는 다른 것의 비평형적인 생성들의 충격 또한 지탱하기 때문에) 각각의 사물/사태를 비난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회피하는 이러한 카오스적 지구 – 그리스인들은 결코 풍경에 의해 놀라지 않는다 – 는 오직 조화로운 세계의 극소 부분만 형성한다. 이것은 우주의 절대적인 바닥이지, 그것의 영광된 중심이 아니다. 여기서 죽음과 부당함의 통치, 그리고 인간은 다른 것들과의 조화로운 삶에 실패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자리’를 맡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론적 상징은 우리가 정의란 천국(유한하지만 광대한 세계의 유사-총체성)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대지의 아이들은 오직 그들의 눈을 들어 실존을 인도해야 하는 미와 평화의 모델을 생각하는 것만이 요구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에 놓인다.
우주론적 상징의 붕괴는 자연에 따라 대지의 움직임과 일치하는 선형적 운동으로의 행성 궤도들의 뉴턴적 해체와 연결될 수 있다. 별들의 영원한 조화를 전개하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움직임은 따라서 결과적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힘의 관계들에 속한다. 우주와 대지적 세계의 차이는 붕괴된다. 별들과 대지는 다시 한번 힘들의 불합리하고 상호갈등하는 체제에 의해 인도 되어 지는 것으로 보인다. 정의는 또 다시 실재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에 의해 발명된 어떤 유용한 인공물로 드러난다. 이것은 우주로 이해되는 세계의 진실한 원칙이 아니다.계몽주의의 형상을 통과한 관능적이고 방탕한 회의주의가 목적인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힘들의 물리학에 의해 제안되었으며,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리스적인 상징을 파악한 어떤 종교적 전통을 탈신비화하는 근대적인 소피스트들의 재탄생을 허용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광신의 자유는 다시 한 번 고질적인 절망의 범주들을 생산하는 냉소주의를 수반한다. 첫 번째 상징의 죽음은 첫 번째 절단으로 삶/생명을 겨우 되살려 놓는데, 이는 철학자들이 존재와 정의의 통일을 위해 더 이상 천상의 탈출구를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제들과 소피스트들(이들은 이제 종교 지도자와 회의주의자가 되었다)의 갱신된 반박에 직면해서, 자연주의적이고 낭만적인 상징이 우주론적 상징에서 발견된 이 세계와 저 세계 간의 대립을 자연과 사회 간의 대립으로 대체하는 루소의 시도와 조응한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다’는 긍정은 우리가 생명의 자발적인 존재 안에서 선의 각인을 재발견하도록 허용하며 더 이상 우주적 물질 안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상징은 별들의 궤도에서 배려하는 신체들로 옮겨 간다. 다시 말해 천체의 불변하는 에테르로부터 어린 유기체들의 순진무구함으로 움직인다. 그들의 자발적인 연민의 감정 안에서 인간은 선의 존재론적 실재성을 재발견한다. 살아 있는 자연, 동물성 또는 신체에 관계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저 세상의 영역으로부터 나온 선함의 새로운 안식처가 된다. 그리스인들이 대지적 실재들에 대해 결코 놀라워하지 않은 반면(플로티누스는 꽃이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성가시게 만든 최초의 고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지적 자연은 미의 특권을 획득한다. 루소는 그리스인들이 하늘(Sky)에 대해 놀라워했던 것과 같은 식으로 대지(the Earth)와 자연(Nature)에 대해 경탄한다. 루소는 사회와 연관이 없는 것 안에서 선의 각인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리고 가치는 그에게 어떤 단순한 사회적 발명이라기보다 신체적, 자연적, 동물적 그리고 인간적인 것이 된다. 본질적인 것은 그 사회다. 그것은 개인적 이익만을 일깨우며, 선을 발명하기 보다 타락시킨다. 따라서 우리의 열정은 선함이 순진한 이들을 속이기 위한 환상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어떤 것이라는 신뢰로부터 재탄생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죽은 별들의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와 그들의 눈물의 존재인 것이다.
낭만적 상징은 명백한 결점들을 소유하는 바, 이는 우주론적 상징을 파국으로 몰아 넣는 결점들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연민이 더 이상 살아 있는 것들 안에서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과 폭력 또는 잔혹함이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러한 것처럼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들의 충동으로 인해, 단지 비인격적으로 존재하는 힘들의 노리개이다. 낭만주의의 논리는 여전히 그리스적인 삶/생명을 믿음으로써 태어나는 환영들의 부담 아래에서 붕괴하며, 여러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인 생기론의 형식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
그리스적 상징의 진정한 계승자, 즉 근대성의 본래적인 상징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그것의 정점을 통과하면서 역사적 상징으로 변모한다. 우주와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도출됨으로써, 상징화는 이제 역사(History)로 존재하는데, 이는 마침내 인간적 가치의 객체성에 속한 인간들을 확증하는 비-인간이면서 비-자연적인 실체가 된다. 세계를 주관하는 원리는 더 이상 정의가 아니며, 그보다는 하나의 총체로서의 인간 공동체이다. 역사의 책략(ruse of history)은 그것의 중요성을 그리인 이래 가치의 가장 강력한 상징화를 작동시키는 것으로부터 이끌어낸 개념이다. 개체들의 무정부적인 의지는 이러한 의지들 중 어떤 것도 개체적으로 욕망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어떤 우월하고 자율적인 식체로 변형된 역사(History) 안에서 객관적 실재를 재발견하는데, 이것의 생성은 어떤 개별적인 사유나 행위에도 의존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해방으로 이끈다. 역사의 운동은 인간에게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개체적 의지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법칙과 같이 그것은 부조리하지 않다. 그 이유는 관건적인 사안이 정의(Justice)인 그런 목적성(궁극성)을 그것이 소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의 원리는 언제나 실재적인 성취로서 위대한 역사철학에 의해 드러나므로, 경험적 주체들의 선한 의지, 즉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존재에 재각인된 하나의 선(Good)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여기서는 모든 개체가 단지 어떤 조화로운 신성한 평면에 있는 무지한 톱니바퀴일 뿐이다)에 의해 영감을 받아 형성된 하나의 모델로부터 맨드빌의 벌의 우화(여기서 각각의 개체들의 이기주의가 누군가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더라도 사회의 부에 이익이 된다)의 모델까지 그 내용에서, 역사적 상징은 경제주의에서 절정에 이른다. 경제는 마침내 선의 목적론에 있어서 궁극-대상의 원리가 되는 바, 그 자유주의적 판본이든 맑시즘적인 판본이든 그러하다. 자유에 관해, 모든 경제학적 전복은 필연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향한 어떤 커다란 운동 한가운데에서의 일시적인 퇴각에 상응한다. 맑시스트의 경우, 사회적 생성의 원리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필연적인 자기-붕괴를 통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해방이 성취된다. 이것은 자유 도식의 어떤 역전이지만(각각의 특수한 자본가들은 개인에 의해 욕망되어지지 않았던 기존의 질서의 일반적 파괴를 결합적으로 이끌어간다) 이제 그것은 역사의 계획이라는 방식 안에 놓인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신정론의 삭제와 더불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우리 편에 놓인 실재성을 가지는 것에 대한 궁극적 확실성이다. 정의의 사막이 한 번 더 존재할 때, 우리는 이윽고 한 번 더 가장 역사의 은밀한 휴식기에 도달한다. 우리는 마치 그리스적 상징의 죽음을 살았던 18세기처럼 이제 근대성의 상징이 죽음인 시대를 살고 있다. 상징은 다시 한 번 결핍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들의 재로부터 재탄생하는 반복적인 악몽에 직면하기조차 한다. 그 재는 전통주의와 소피스트적 비도덕주의다.
잠깐동안 그것들의 붕괴에 속한 상세한 역사적 상황들을 잊어버린다고 한다면, 각각의 상징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철학은 언제나 실재적 필연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공준의 수인(囚人)일 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철학이 존재의 속성으로 그것이 변환됨으로써 합리적 필연성을 실현하면, 그것은 두 가지 환영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남지 않게 된다.
1. 오류에 빠진 채로 세계의 필연성이 내 자신의 도덕적 목적과 일치한다고 확증하는 것. 이런 방식으로 철학은 필연적으로 파악불가능한 것으로 떨어지고, 따라서 그와 같은 일치에 대한 종교적 확신으로 전락한다. 앞서 언급한 상징들 모두는 초월성 안으로 붕괴되어 버린다. 플라톤적 선은 변증법이 접근하기 힘든 것이며 오직 황홀경 속에서만 발견된다. 루소주의적인 감정의 진리는 궁극적으로 ‘사보야르의 신앙’(Savoyard faith)에서 안식을 취하게 된다. 헤겔적 사변에서는 절대성의 역사화가 성취되는 바, 어떤 개념으로부터 시작하는 경험적 세계만을 생산하는 능력을 가진 신성한 주체와 개념을 획득하기 위해 그것의 경험적 환경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뿐인 능동적인 인간 사이에 간격이 재도입된다. 모든 형이상학적 상징들은 따라서 믿음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행위의 비합리성을 야기한다. 우주론적인 것은 쉽게 교황청의 로마 카톨릭을 위한 신조가 된다. 낭만성은 최고 존재(Being)의 로베스피에르식 비의에 길을 내준다. 역사성은 어떤 당파의 것이거나 ‘보이지 않는 손’의 것이거나 간에, 무오류성의 도그마로 강등된다.
2. 기쁨에 차서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확증하는 바는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세계의 필연성에 우리의 목적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덕이란 그 스스로 행복을 어렵사리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보편적 정의의 이념을 포기하고 대신에 실재성의 비도덕적인 질서에 대한 덕스러운 복종 덕분에 어떤 정의로운 세계의 환상을 포기한 개별적 도덕성에 맞추어진다. 도덕성이란 정확히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행복을 우리에게 확증한다.
우리는 이 두 번째 가능성을 자세하게 음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사실상 첫 번째 테제에 논리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즉 세계의 선성이 행복의 확증을 주는 것에 대한 어떤 환상의 덕스러운 포기는 한 번 더 덕과 행복 사이의 존재론적으로 신비한 관계를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처럼 가장 완벽한 쾌락과 덕으로서 규범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실천 사이에 일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신정론에 필적할 만한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신정론과 동등한 존재 사이에 가치와 존재 간의 일치를 긍정하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조차 이러한 난국을 탈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약 자유가 가까스로 만족을 구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면, 이런 경우 아무것도 그것이 요청하는 희생을 합법화하지 않는다. 이것이 만족의 최상급이라고 불리워진다면, 그 본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만족이 있을 것이다. 이때 이 세계는 확실히 가능한 세계 중 최고로 좋은 것이며, 가장 부러운 삶과 일치하는 덕의 최상급을 만든다.
이 두 입장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옹호될 수 없지만, 타당한 믿음과 고결한 무신론으로 고지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세계가 신성한 질서에 대한 믿음의 습관적인 재현을 새롭게하는 동안에도, 믿음의 비이성적인 측면(그리고 그것의 계승된 광신)을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존재론적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개념적으로 수립함으로써 상징화를 시도한다. 또는 철학은 불신에서 본질적으로 발견된 냉소주의를 탈출하기 위해 덕과 행복 간의 어떤 본질적인 관계를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시도들은 세계의 불변하는 필연성이 받아들여지자 마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가 필연적인 것으로 드러나자마자, 오직 하나의 환영만이 그것이 다음과 같다는 것을 믿게 만든다. 즉 이 세계가 정의의 욕망으로 시달리는 한 인간을 위해 욕망할만한 세계라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타당한 믿음이라는 환영은 모든 신정론의 비이성적인 기초가 회피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바에 놓여 있다. 그와 동시에 고결한 무신론의 환영은 우리가 존재와 선간의 모든 존재론적 연결을 통속적 냉소주의로 결론내리지 않고서 포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결론은 이와 같은 분리이다.
이 두 입장들은 그럼에도 그와 같은 시도의 기초적인 난국으로 환원불가능하지만, 그것의 궁극적인 확장을 재현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해법들로 이끈다.
1. 세계가 정의롭다고 허위로 긍정하는 것, 즉 이러한 환영이 세계에 실재적으로 정의를 부여하는 데에 필연적이라는 열망을 생산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긍정하는 것. 요컨대 이것은 세계를 그것 자신의 이미지로 재형성하기 위해 이 환영의 힘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전의 연구(「헤겔에게서 이성과 비의(秘義)」(‘Raison et ésotérisme chez Hegel’ 미출간 수고본)에서 나는 헤겔체계를 마치 그것이 그와 같은 시도에 조응하는 것처럼 읽자고 제안했다.
2. 세계와 어떤 특정한 가치 사이의 일치가 환영의 문제라고 긍정하는 것, 하지만 동시에 그 환영 자체를 하나의 가치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가치도 행복을 보증하지 않으며 그렇다 해도 우리는 이러한 환영을 넘어 의기양양한 행복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훈육된 믿음과 같은 것에 의해 발생된 살아 있는 강도(intensity) 때문에 심지어 환영적 가치조차 따르는 선택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니체의 저작들을 읽는 것이 분명 가능하다.
이 두 가지 해법은 가치의 탈현실화라는 논리적 결과를 재현한다. 만약 가치들이 실재적인 어떤 것도 드러내지 않으면, 즉 만약 윤리적 요청이 아무런 진리에도 놓여 있지 않고, 오직 존재에 필적할 만한 환영으로만 간주된다면, 그렇다해도 그때 그 요청은 하나의 환영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오직 환영이지만, 적어도 이 환영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바, 그런 환영의 수용, 긍정 또는 가치화에 따라 어떤 ‘선’(넓은 의미로 규범 또는 명법)의 존재를 재발견할 수 있다. 분명한 결론은 진리(True), 즉 가치에 대한 인간 열망의 보존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에 대한 경멸이다. 진리에 대한 현대의 악명 – 도래할 프롤레타리아적 선이라는 미명하에 오류를 산출하는 것을 부추기는 스탈린주의 변증법에 따라 생산되는 어떤 것(‘비앙쿠르의 절망Billancourt despair을 만들지 않기’)[2], 또는 실재적으로 유용한 환영으로서 신화에 대한 솔직한 애가 – 이러한 악명은 상징화에 대한 이 두 가지 절망적인 시도들의 지배와 연결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본사실적인 것(the factial)은 심지어 환영적 존재에 대한 사변적 관심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우리가 진리의 요청들의 파괴를 피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발성의 존재론(이것은 정의의 이념에 관해 우리 안에 있는 존재를 가르치는데, 아무것도 현행적인 실재성에 있는 어떤 것도 그것에 조응하지 않기 때문이다.)을 수용하자마자, 그것은 바로 생성의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 진리는 바로 무로부터의 출현으로서 시간에 관한 진리다. 우리가 인간의 상상의 영역에 속한 어떤 순수한 환영으로서의 보편적 정의의 요청을 기각할수록, 우리는 그와 같은 터무니없는 요청의 출현과 더불어, 생성이 이전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생산하기 위한 그것의 능력을 전개하는 것을 더더욱 강조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상상적인 선이며, 오직 사유하는 존재들만이 구비한 환영에 의해 겨냥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목표로 하는 선이며, 인간성의 발생에 앞서는 세계 안에서는 완벽하게 비실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하게 물질의 역량들을 넘어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중심에서 완강한 희망의 형식으로 출현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정의의 객관적 출현을 향하는 그 자신의 법칙들조차 횡단하는 시간의 능력을 강조한다. 시간이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우리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므로(환영으로서의 보편성) 우리가 그것을 선포하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발생시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산에 의해 드러나며, 그 동일한 무로부터 시작하고, 그와 같은 어떤 보편적인 것과 같이 세계화된 현행성(the worldly actuality)이 된다. 그것은 이전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존재하게 하는 각각의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환영과 실재성 사이의 절단의 깊이는 그 자체로 구축되었던 간격을 채우는 시간의 능력에 대한 표명 안에서 역전된다. 나아가 인간은 경이로움을 배우며, 이에 따라 놀라워하게 된다. 이는 환영의 존재 그 자체에 따른 것이다. 왜냐하면 환영이 더 이상 그것들을 절망이나 믿음으로 이끌지 못하지만 미래 세계가 사람들의 사유에 따라 측정불가능한 새로움을 재생산할 수 있을 명료한 희망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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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실성(The factial)은 하나의 새로운 상징화를 제안한다. 이것은 최초의 비-형이상학적인 상징화다. 이 경우에 상징화는 세속적(worldly) 법칙들의 급진적 우발성을 파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즉 우발성이란 보다 앞선 정의의 약화과정을 극복하는 동안에도 정의의 희망을 존재론적으로 발견하게끔 해준다. 어떤 실재에 삽입된 가치는 더 이상 결정된 채 영원히 지속되는 실체와 동일시되지 않으며, 오히려 법칙 없는 변화의 가능성과 동일시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세계가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상이라거나 최악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현행적으로 둘 모두일 수 있다고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와 직면하여 우리의 동요와 불안을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희망의 한 구성요소로서 그것을 간직한다(스피노자가 공포를 필연적으로 간직했던 것처럼). 하지만 이 불확실성은 더 이상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어떤 자연의 한계를 넘치는 가능성들로 확장되고, 우리의 욕망을 가치있게 할 어떤 기획을 인간 공동체를 개괄하기 위해 허용하도록 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그것들 중 하나를 기대하기 위해, 그 가능성들이 한 번 더 극에 이르렀던 하나의 세계 안에 남는 것은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존재는 이제 무언가가 발생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만약 발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 중 가장 탁월한 새로움이라면, 그때라야 이것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그리고 도래할 것들을 위한 정의와 일치할 수 있다. 우리의 선에 대한 열망은, 그것에 동반되는 위험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동안에도 다시 한 번 우리의 희망과 결속된 하나의 세계에 대한 지식에 기반하게 된다. 그 희망은 이전보다 더 폭넓게 분리된 반대항들의 출현에 관한 힘으로서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적 절단의 패착에 도달한다. 이 말은 네 번째 세계를 고대하는 현재적 윤리학과 그와 같은 세계의 출현을 뒤따를 도래하는 윤리학 사이에 있는 모순을 함축한다.
우리는 상징화가 보편성으로 성취된 존재론적 객관성에서 도출되는 어떤 열망을 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의의 희망은 단순히 지나가는 경향으로 멈추지 않으며, 생성의 가장 탁월한 혁신적 힘에 관한 진정한 직관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상징화에 의해 도출되는 즉각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가치들은 삶으로 되돌아 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도래하는 존재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인간적 집합의 통일성을 재발견하면서, 그것에 추상적 일반성의 방식에서 개체들을 앞지르지 않는 공통기획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최선의 경험를 대신해서 풍부해진다. 즉 우리 이웃의 죽음에 대한 경계 없는 거부의 하나로서 그렇게 한다. 인간은, 애초에 사망한 자들 가운에 가장 가까운 자들을 향한 충실성을 통해, 그것의 궁극적인 가능성에 대한 기대 안에서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애도에 의해 점화된 다른 인간에 대한 기억을 통해) 그들의 관심을 더 넓히는 자들의 귀환이 가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들을 망라한다. 인간성은 강력하게 살아 있는 가치들에 의해 통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모든 사유하는 존재에 접근 가능한 어떤 존재론적으로 탁월한 사건에 대한 실재적인 경험을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윤리적 절단의 본질은 이러한 기다림의 실현이 그것의 바로 그 구성요소들을 제거할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재생이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곳에서 발생한다면, 그 때문에 그 희망의 대상은 이미 발생했던 것이 된다. 거기에는 더 이상 공동체에 관한 통합하는 기획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더 이상 세계 안에서 기대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의 궁극적 출현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이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출현에 관한 종교적 공준으로의 후퇴를 도출한다). 따라서 더 이상 존재와 가치 간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상징의 억제가 있다. 기대되던 재생은 이기주의의 일반 체제와 가치의 초월적 기초에 대한 믿음 사이의 갱신된 대안 안에서, 말 그대로 우리를 새로운 절망으로 이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가치가 그것으로 인해 삶/생명을 떠맡을 모든 합리적 요소들이 바로 그 정의의 성취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욕망되는 것에 관한 문제와 조우한다. 우리는 보편적인 것을 욕망하는가? 또는 우리는 이런 보편성의 성취를 약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이기적 삶을 욕망하는가? 만약 가치가 오직 재생의 존재론적 가능성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어떤 내재적 부활과 같은 최종 목적이 서로간에 무관심한 쾌락들의 완전성 안에만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정의의 비이기적인 실행을 위한 존재론적 기초로 신체의 재개를 택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하나의 우주 앞에, 즉 궁극적으로 그 아무런 의도 없는 박애가 수립될 수 있는 무감각한 실존으로 되돌아가기를 제안하는 어떤 우주 앞에 서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신 안에서 네 번째 세계에서 결핍된 것으로 드러난 선성의 객관적 지지대를 재발견하기 위해, 종교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보편적인 것에 관한 비-종교적인 요청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네 번째 세계의 갑작스런 출현을 넘어서면서도 사유가능해야만 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의심스럽게 남겨졌던 물음을 노정한다. 즉 보편적인 것에 관한 철학적 기초지음에 대한, 즉 궁극적으로 정의를 향한 욕망을 합법화하는 것에 대한 물음이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 명백하게 보고 있다시피, 만약 상징이 보편성의 조건이라면, 만약 그것이 가장 불합리한 죽음들을 넘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정의의 가능성을 사유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요청의 바로 그 기초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사실성이 어떻게 존재론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수립하는지를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즉 본질적인 인간의 존엄성은 모든 정의의 행위가 그것에 의해 항상 그 타당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초에서 출발해서, 우리는 상징에 관한 열정에 의해 규제되는 윤리와 보다 진실된 원리에 따라 통제되는 윤리 간의 모순이 가지는 정확한 본성을 결정할 수 있다.
[주석]
[1] 여기서 나는 메이아수의 프랑스어 신조어인 factual을 영어 신조어인 factial로 번역한 브라시어(Brassier)를 따른다. 이러한 번역어 결정에 대해서는(물론 이것은 메이야수 자신이 충분히 동의한 바이다), After Finitude 3장에 있는 브라시어의 역주 6을 참조하라.
[2] ‘‘비앙쿠르의 절망Billancourt despair을 만들지 않기’라는 구절은 (분명히 부정확하게)사르트르에게 자주 쓰여진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소련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비앙쿠르는 파리 서쪽 교외지역으로서, 르노(Renault) 자동차 세계 본부가 위치해 있는 곳이며, 오랫동안 공산주의 노동자들의 근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