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하다#-가속주의자 독본』: 서문(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이 번역문은 해당 문헌의 ‘편역’이며, 초벌 번역임을 밝혀 둔다. 문헌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Robin Mackay, Armen Avanessian (ed.), #Accelerate#-the Accelerationist Reader, URBANOMIC MEDIA LTD, 2014
1858
기계류의 죽은 팔다리를 강요하는 과학은, 그러한 것들의 구축을 통해, 하나의 자동장치로서 목적의식적인 행동을 하는 바, 노동자의 의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힘으로서 기계를 통해 그에게 행위가 부과되는 것이다.
- 칼 맑스
1970
분리된 성, 인종 그리고 경제적 계급들의 융합이 성, 인종 또는 계급 혁명 각각의 전제조건인 것처럼, 기술 문명과 감각의 융합은 문화 혁명의 전제조건이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1994
파국(Catastrophe)은 흩어져 가는 과거다. 전도(Anastrophe)는 함께 도래하고 있는 미래다. 역사의 내부로부터 보면, 발산(divergence)은 임계적 범위에 도달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보면, 위기는 인류에 의해 잘못 해석된 어떤 수렴(convergence)현상이다.
- 사디 플란트(Sadie Plant)+닉 랜드(Nick Land)
2013
오늘날의 좌파에게 가장 중요한 분야는 다음과 같은 것들에 관한 주장들 사이에 있다. 즉 지역주의라는 소박한 민중 정치학(folk politics), 직접행동 그리고 가차없는 수평주의(horizontalism)가 그것이다. 그리고 추상적인 근대성, 복잡성, 전지구성 그리고 기술에 대해 편안함을 가지는 가속주의라고 불리워져야 하는 것을 개괄하는 분야도 있다.
- 알랙스 윌리암스(Alex Williams)+닉 스르니체크(Nick Srnicek)
가속주의는 정치적 이단이다.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해 가능한 유일하고 근본적인 정치적 응답이다. 그러한 응답은 자체 모순을 품고 있는 자본주의의 손아귀 안에서 저항하거나, 그것을 방해하거나, 또는 비평하지 않으며, 그것의 종말을 넋 놓고 기다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의 전복, 소외, 탈코드화, 추상적 경향성을 가속하려고 한다. 이 개념은 정치 이론 안에 어떤 특정한 허무주의적 동맹을 도입한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와 자본주의 문화 혹은 반문화의 과잉 상태와의 동맹이다. 또한 이 개념은 이러한 자본주의에서의 소외 과정의 내재성을 추구하는 글쓰기 안에 구체화된다. 가속주의는 체제에 대한 전복과 묵인 사이, 현실주의적 분석과 시적 격정 사이에서 요동치는 불안정한 지위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위가 가속주의를 치열하고도 경쟁적인 이론적 상태로 만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가속주의적 사유의 기초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놓여 있다. 즉 범죄,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은 그것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진보적인 태도와는 대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속주의는 관료주의의 사슬을 깨고 끊임없이 분기하는 실천적 가능성들의 범위 안에서 현대성의 특성들을 선도하는 해방의 동력학의 편에서 길을 모색한다. 대개 가속주의적 사유가 집중하는 것은 이러한 변형의 역능들과 오늘날 지구행성의 사회를 틀지우는 교환가치의 공리, 자본 축적 사이의 있을 법한 내적 연결의 탐색이다.
이러한 자세는 표면적으로 두 가지 주요 위험성을 제기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파국적 정치학(politique du pire)로의 냉소적인 퇴각이다. 여기서 파국적 정치학이란 가장 나쁜 것을 희망해야 하고, 묵시록적이면서 무화되어 버린 미래만을 생각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본주의가 시장의 승리에 대한 내적 모순으로 인해 사망할 것이라는 주장의 복원이다. 이 미심쩍은 급진주의는 정치 권력이 해소되어 버렸다는 수동적 묵인과 구분불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편의적인 극단주의 군상들은, 하지만 진정으로 진보적인 정치적 사유 – 전승된 권위, 이데올로기 또는 제도들에 긴박되지 않은 사유 – 가 미래지향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철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 안에서 통합된 여러 생각들에 대한 고려를 방해한다. 실로 미래지향적이고 현실적인 기초 위에서 건설된 정치학만이 인간적 기획과 도래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도전들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정치적 기획의 시작점에 서 있다는 이러한 가설은, 역사의 황폐한 종착역에 서 있다는 주장보다, 오늘날 결정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가히 풍토병과 같은 사회적 절망과 전지구적 문화의 동질화에 직면한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들의 저하경향, 기후변화와 현재진행 중인 금융 위기를 피해가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전개 그리고 사람들의 인간적 결론들에 대한 시장의 무관심에 직면하여, 가장 신랄한 자유주의자들조차 자본주의가 현대성과 진보에 있어 원동력이자 필요불가결의 것으로 남아 있다고 논증하는 데 있어, 그리고 아직까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정치적 응답이 전진적인 방향보다는 보수적인 측면에서 종종 드러난다고 주장하는 데 있어서 궁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절망은 당대 좌파의 지배적인 정념이 된 것처럼 보인다. 이들 좌파의 위기는 적들에 대한 빙퉁그러진 모방이며, 자기 위안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시끌벅적한 비난의 즐거움, 조절된 항의와 바보스러운 분열들과 더불어, 또는 자본에 총체적으로 예속된 인간의 삶에 대한 엄격하고 ‘비판적인’ 감시를 지속한다는 미명 하에 위안거리를 찾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이론의 안식처로부터 또는 ‘불확실성’이라는 최근 예술의 자기도취(self-congratulatory)라는 혼미함으로부터 저항을 구성하고자 한다. 헤게모니를 쥔 신자유주의는 어떤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기존 좌파의 정치적 사유는 계몽주의의 ‘거대담론’을 조용히 뒤로 물리면서, 자본에 의해 오염된 기술적 하부구조와의 모종의 거래에 대해 미심쩍어 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그 모든 문명사회의 유산에 질색하는데, 이러한 유산들은 한데 묶어서 ‘도구적 사유’라는 명목으로 폐기처분된다. 대안을 제공하는 것에 실패한 것이 분명한데도, 그들은 그것이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사실적인 역사들이라는 형식이나 주변적인 것들에 대한 너무나 지역적인 개입들 외에 대안은 없어 보인다. 이들 기존 좌파들에게 지구적-통합적 시스템이야말로 가장 낯선 것들인 셈이다. 일반적인 추론, 다시 말해 현대성(modernity)=진보=자본주의=가속주의라면, 가능한 저항은 오로지 감속(deceleration) 뿐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유기체적 자기충족성이든, 아니면 비참함으로의 고독한 퇴각 그리고 이성적 사유의 불안정한 반목적론(counterfinalities)에 대한 영리한 경고들이든 간에 말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부유한 자유주의 좌파는 기술이 도구적 지배와 같은 것이며, 자본주의 경제학은 한 무더기의 숫자들에 해당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적에 대해 구체적인 기술적 정신적 성과물과 경제적 논증들을 남겨 놓는다. 이들 중 몇몇은 보다 급진적인 부분을 공유하지만, 그들의 아카데믹한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기술적으로 무식하다. 이들은 이론적 구성물로 자본주의와 대면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연구작업들과 완벽하게 불화하는 것이다. 그들이 제공하는 대개의 것은 다가올 놀라운 사건들에 대한 어떤 믿음인데, 이것은 가까스로 이전의 유기체주의 정치학보다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어떤 면으로는 하이데거적인 내맡김(Gelassenheit)이나 ‘그냥 둠’이 요청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파괴적인 발전을 전반적으로 포기하는 것이고, 자연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그만두는 것이다.
비판적 사회 민주주의자로부터 혁명적 마오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오큐파이 운동의 낭랑한 목소리에서부터 후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투덜거림에 이르기까지, 이데올로기적 슬로건은 계속된다. [그런데] 거기에는 어떤 바깥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한 삶의 실재적 포섭이 이루어졌다면, 순수, 겸손 그리고 비판과 저항이라는 개인적으로 기꺼운 제의들에 대한 감성적인 애착, 또한 그들의 집단성에 관한 허망한 형식들에 수반하는 반응적 망상들에 의해 방해받는 것, 잃어 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해 이러한 체계의 요소들에 관한 선택과 규명을 위한 실증적인 기준은 자본의 부당함과 기능장애 너머의 다른 삶을 향한 견결한 이행에 효과를 가질 것인가?
가속주의가 최근들어 좌파의 선택지로 재출현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곤경의 맥락 안에서이다. 2013년 알랙스 윌리암스와 닉 스르니체크의 「#가속하다: 가속주의 정치학을 위한 선언」(MAP)이 출간된 이래, 그 용어는 전통적인 비판들과 퇴행들, 감속적인 또는 보수적인 ‘해들’(solutions) 너머의 미래를 개념화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적 기획을 수행하는 그룹을 통칭하는데 채택되었다. 최근 몇 년 간의 새로운 철학적 실재론들을 이어, 그들은 갱신된 프로메테우스주의와 합리론에 기반하는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레토릭을 우회하여 그러한 기획을 행하고 있다. 이들은 점증하는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것의 내재성이 비가역적이고 사실상 매력적이라는 점을 긍정하며, 이러한 것이 현대 정치학에 야기하는 복잡성을 새롭게 이해하면서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 새로운 운동은 이미 생생한 국제적인 논쟁거리로 부상하였지만, 교조적 선잠에 빠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기존 입장의 옹호자들에 의해 많은 오해와 악의적인 반박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가속주의의 역사적 궤적을 재구축하면서, 이 책은 핵심적인 문제특, 즉 가속주의의 역사적, 개념적 계보학을 탐사하고, 그것이 현전하는 가능성들의 분위기를 전개함으로써, 철학적 형상화와 정치적 제안 둘 모두에서 가속주의의 잠재성을 평가라려는 목표를 가진다.
그러나 격리된 폭발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철학적 경향의 역사가 현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한 폭발은 매번 만장일치의 비난 그리고/또는 경멸적인 냉소의 바다 아래로 흔적도없이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부서지고, 폭발적이며, 화산과 같은’ 한 철학자로서, 질 들뢰즈는 불완전하게만 전개되어 온 가속주의라는 흩어진 에피소드들을 작동시키고자 했다. 이것들은 이질적인 영향들과 오랫동안 방해해 온 침묵에 의해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문제들의 대강을 그려보는 과정에서 최근의 가속주의를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러한 조망을 통해 이런저런 다른 궤도도 묘사한다. 이러한 경로들은 스스로를 매일 재조정하고, 재정향하는데, 이는 그것들이 주제화하는 바로 그 사회공학들에 의해 구축된 어떤 대화, ‘#가속주의’라는 테그를 부착하는 전략에 의한 것이다. 가속주의 테그를 붙이는 행위는 사람들이 제안하는 어떤 방향, 전진하는 경로로 통하는 전지구적인 주소를 부여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인쇄된 책(더우기 이만한 길이의 책에서)이 분명 그와 같은 급증하는 영역과 관련된 어떤 감속(deceleration)을 구축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이러한 반성적 계기가 바로 최근의 가속주의 사유와 많은 부분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처음부터 경멸적으로 사용되는 용어[1]의 분명한 채택은 예상되는 공격에 대한 어떤 저항의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어떤 교정적 과정이 저변에 흐르고 있음도 지칭한다. 다시 말해 어떤 정련, 선택, 변형과 이전의 경향들과의 연결 강화, 이론적 프로그램 진화로서의 가속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공격을 미숙한 도발로 간주함으로써 길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은 [사실] 거슬리는 자극일 것인데, 제도 정치학과 정치이론의 공식적인 제재 담론을 앞으로도 괴롭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므로 철학적 대항역사, 즉 가속주의 계보학(가능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텍스트들이 포함될 수도 있고, 다른 이야기들이 알려질수도 있는) 구축의 기술(wrinting)에 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동시에 이 책은 가속주의 ‘자체’를 도래할 상상적이거나 초가상적(hyperstitional) 예감으로 생산한다.
[이 책의] 네 단계들에 있는 교정적인 몽타쥬 과정에서 첫 번째로 차려진 것은 세 가지 역사적 텍스트들로서, MAP[가속주의 선언]의 출현에 뒤이어 가속주의의 미결정된 미래에 의해 전유되고 재가동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 이것은 선언의 호명에 의해 일깨워진 이어지는 당대 가속주의 텍스트들을 데려올 것이다.
예감
첫 번째 장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사상가들을 다룬다. 이들은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산업 복합체의 급속한 출현과 교환가치에 의한 전승된 가치체계의 권리찬탈에 직면해서, 기술적 체계와 경제 시스템 사이의 관계의 정확한 본성을 이해하려고 시도했으며, 인간 사회와 문화를 위한 그러한 것들의 미래의 잠재적인 귀결에 대해 성찰했다.
칼 맑스는 아마도 그의 가장 두드러진 가속주의 저술인, 『정치 경제학 요강』(Grundrisse)의 「기계에 관한 단상」으로 대표될 것이다. 여기서 맑스는 확장된 인공기관으로서 노동자 도구 사용과 인간의 인지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능력(노동력)을 증강하기 위한 기계적 생산 사이의 차대한 전환을 증명한다. 적절히 말하자면 후자는 통합된 ‘기계 자동화 시스템’의 출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 산업과정의 지렛대로 활용되는 지식과 자연에 관한 통제력은 노동이라는 직접 수단들을 대체한다. 이 시스템 안에서 노동자는 점차 보철물이 되어간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흉내낸다기 보다, 기계가 노동자들을 흉내낸다. 기계들은 노동자들을 그 자신의 ‘전능한 기관’ 중 한 부분으로, 기계의 훌륭한 솜씨에 예속된 ‘의식 기관’ 또는 ‘소외된 힘’으로 만든다. 개인들은 어떤 새로운 기계 문화 안에 육화되며, 그 세계에 알맞은 사고패턴과 습성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이들은 불가역적으로 사회적 존재들로 재주체화(재종속화, resubjectivized)된다.
사뮤엘 버틀러는 그의 책 『에레혼』의 한 장인 ‘기계의 책’에서 맑스의 기계시스템에 관한 보충개념을 어떤 완비된 기계적 환각(delirium)으로 발전시킨다. 이때 그는 사변적 인류학을 생산하는 이론적 기획의 어떤 고유한 과학적 허구의 측면으로 그것을 확장한 것이다. (...) 따라서 기계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사유는 인간이 무엇이 되며,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사유와 마찬가지의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주목할만 한 것은 ‘문화’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토스타인 베블렌의 거부감인데, 이는 개량적인 역할 안에서 협소하게 이해된 측면이 있다. 그는 자동화와 기계체계의 표준화에 부합하는 사회적 관계들과 개인들의 재형성에 의해 촉발된 ‘사회문제들’에 대해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공한다. 즉 그는 이러한 과정이 인간문화의 급진적 변형이라고 이해한다.
요동
두 번째 장은 현대 프랑스 철학에 속하는 어떤 계기에 대부분이 할애된다. 프랑스 현대철학은 인간 욕망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이해와 정치경제학에 관한 이론적 분석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고 있는 68혁명의 사건들에 의해 촉진되고, 교조적 정당 정치의 부패한 인물들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로 이끌어지면서, 이러한 ‘맑스-프로이트적 종합’에 속한 이론가들은 변증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기계 그 자체에 의해 자유로워진 다기한 도착적 방식을 통해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들뢰즈와 가타리, 리오타르와 리포베츠키(Gilles Lipovetsky)의 저작들 안에서 가치형태에 대한 무관심, 노동의 기계적 구성, 그리고 이전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가차없는 재구성은 새로운 유동하는 사회적 신체의 창조를 위한 엔진처럼 이해된다. 내재성은 정당 정치가 그렇게 하는 것 보다, 자본이 사회적 관계들을 이끌어 가는 그 방향에서 보편적인 정신분열로 채워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로 여기 해방을 약속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68혁명의 꿈꾸는 듯한 탈주에 비해 창백해진 상태다. 가속주의의 신조가 처음으로 공공연히 공식화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리포베츠키에 의해 명쾌하게 공언된 바에 따르면, “‘[혁]진화적([R]evolutionary) 행동들’은 혁명이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면서, 자본의 시스템을 전복하기를 목표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리듬을 최대한 급진적으로 완성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그 행동들은 신체들의 변형 과정을 가속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는 정확히 그 유동성들을 발전시킨다. 즉 이들은 자본주의를 혁명적 –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과정으로서 – 이고, 끊임없이 재영토화하면서 공연히 예전의 코드들을, 그것이 풀어 놓는 흐름들을 담지한 문화의 ‘신고전적’ 환영으로 재장착하는 것으로 만든다. 진정한 가속주의적 전략이 명쾌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역동성 안에서다. 이는 좌파 정치학의 담론을 매번 쫓아 다니는 그 질문, 즉 도대체 ‘혁명의 경로’가 존재하기라도 하는가라는 질문을 재정식화하기 위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가속주의’에 관한 진술문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작 안에 있으리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앙띠 오이디푸스』로부터 나온 구절인 바, 소박한 민중 정치적(folk politics) 접근(사미르 아민의 제3세계 분리주의와 같은 경우)그리고 그것과 정반대의 방향 사이 이원론을 배경으로 언술되는데, 다음과 같다. “시장의 운동,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더욱더 멀리 가는 것? 왜냐하면 아마도 고도로 분열적인 흐름들의 이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보면, 흐름들은 아직 충분히 탈영토화되지도, 탈코드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경과[과정]에서 퇴각하지 않고, 더 멀리 가야 한다. ‘경과[과정]을 가속하라.’”[2] 적어도 1972년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가속’을 채택했다. 이들은 붕괴를 촉진시키는 모순이라는 것보다, 반대로 위기를 끌고가 자본주의적 생산성의 내재적 원천에 부려 놓는 편을 택한다. 이것은 떠오르는 새로운 모순을 소화시킬 능력을 가진 새로운 공리들의 생산을 함축하는 것이다. 들로즈와 가타리에게는 이러한 과정들을 종결할 만한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로 어떤 한계의 부재야말로 그들의 제1의 가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체가 보편적 정신분열을 내재성으로 한층 가까이 끌어들일 때, 탈주선이 어떤 진정한 전망이 된다고 제안한다.
「반복의 역능」에서 리포베츠키는 리비도 경제학 분석을 근거짓는 욕망에 관한 무근거의 형이상학(리오타르가 다른 공상이나 리비도 장치와 마찬가지로 즉각적으로 기각한 형이상학)의폭넓은 해설을 제공한다. 반복의 역능과 동일성의 복권 사이에 있는 이원론 그리고 자본의 정도를 벗어난 변태적 경향을 매우 명확하게 전개하면서, 리포베츠키는 관건적인 구별을 해낸다. 즉 자본주의가 이윤의 추출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그것의 치안을 유지하는 반생산적인 권력에 기대어 나타날지라도, 사실상 이러한 ‘경비견들’은 ‘신체들의 재조합’ 안에서 ‘촉진적 실험’으로서의 자본의 핵심적 경향에 장애물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경향은 해방적 담론과 실행에 의해 획득되어야만 하는 측면이다. ‘자본주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맑스적 반영물[반성]’에 저항하면서, 리포베츠키는 그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반면 오직 그리고 언제나 권력들의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라고 언급한다. 실재로 이러한 권력의 다양성이 자본의 진전을 제한한다. 따라서 그는 카오스와 영속적인 혁명에 대한 리오타르의 요청을 반복한다. 새롭고 낯선 재조합들이 새로운 권력의 형식 안에 돌이켜 자리잡는 것을 방해하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의 비인간적인 속도와 결합하고 넘쳐흘러야 한다. ‘어떤 영속적이고 가속화된 변형적 일탈 안에서 움직임을 유지’하면서.
리포베츠키는 또한 리오타르가 그것에 따라 이론을 확장했던 맑스의 중요한 출발점들 중 하나에 주의를 기울인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서 노동력보다 자본주의 분석에 더 기초적인 것은 자본이 신용의 기능을 통해 스스로 시간을 활성화하는 방식이다.(맑스 자신이 『요강』에서 선언한 것처럼, ‘시간의 경제, 즉 모든 경제가 스스로를 궁극적으로 축소하는 것.’) 리포베츠키는 자본의 가정된 ‘모순들’은 시간의 형상화에 관한 질문이며, 따라서 그의 가속주의는 모든 안정적인 과거에 관한 재예화(reinstantiations)에 저항하면서, 미래를 통해 자본의 현재라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시간적 순환고리를 촉진하는 것이다.
‘예감들’에 속한 저자들은 그들의 분석에서 가치-형태와 기계적 생산의 습격이 ‘단순하게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인간 문화의 변형들 중 하나이고, 사실상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강조했다. 리오타르의 「신들린 자본주의」에서 보이는 그의 민활한 관심사들에서 드러나다시피, 상이한 문화적, 기술사회적 조건들 아래에서 동일한 것이 가속주의의 이런 두 번째 단계의 텍스트들로 이어진다. 이런 입장은 급진 페미니스트 행동주의자이자 이론가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에 의해 최신의 사례들을 발견한다. 파이어스톤은 어떤 ‘반문화적’ 혁명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것은 계급 장벽과 성 이원론을 뒤섞으면서, ‘과학적 발견으로서의 신체(새로운 생산 양식)가 마침내 그것을 사용하는 경험적(자본주의적) 양식을 넘어서 자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 혁명에 대한 파이어스톤의 요청에서, 질문은 더 이상 (...) 상상적 초월을 초월의 실천적 기획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적 전망과 실천적 행위 간의 분할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파이어스톤의 문화에 관한 정의를 ‘가능성 안에서 파악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인간적 시도’라고 받아들인다면, 그때 우리는 (베블렌이 지적했듯이) 주체에 대한 기계 문화의 부식 효과를 위한 위안거리로서의 문화적 응용이 단지 문화 자체 안에서 균열을 지적하는데 그친다는 것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인간의 프로메테우스적 잠재성은, ‘환경을 통제하는 기술의 축적’이라는 것으로 명백해지는 바, 이때 기술이란 미학과 사유의 과학적 양식 간의 대화의 장애로 인해 제약을 받게 된다. 산업, 과학 그리고 기술이 상업과 교환 가치에 종속되면서, 타자성에 대한 질문, 즉 미학적 가치는 시장 ‘바깥’의 어떤 보충물에 관한 문제가 되고, 사적(이면서 시장화되는) 쾌락으로 퇴각하게 된다.
사이버컬처
90년대에 자본의 탈영토화 역능과 여러 저작들에서 일깨워진 공식적인 동요[요동] 간의 사악한 동맹은 영국에 있는 조그만 사상가 그룹에 의해 이미 더 멀리까지 추적되고 있었다. 리오타르의 지도를 받으면서, 이 책의 세 번째 장에서 소개되는 저자들은 단순히 진단적인 것만을 시도하지 않고, 인간 주체의 빈곤함과 인공적인 기계권(mechanosphere)으로의 그것의 통합을 증식시키고 가속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닉 랜드(Nick Land)의 「회로망들」(Circuitries)로 시작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논문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 리오타르와 리포베츠키의 취향에 의해 포위된 욕망하는-생산이라는 축제 분위기 위로 어떤 암흑이 강림하고 있다. 전지구적 디지털 기술 네트워크가 출현하는 새벽녘에 서 있는 이 사상가들은 후반기 연구작업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해 보면 반인간주의적 재활론(anastrophism)으로 발전해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의 텍스트들은 그러한 이념의 가장 폭력적이고 암울한 의미들을 향유하면서, 오직 자본만이 접근 코드를 가진 생체독재적 경비 구역 안에 감금된 것과 같은 인간적 특성들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식의 급진적 소외 개념을 채택한다. 이런 관점에서 (단언컨대) 리비도 경제학의 최종 단계들은 모든 원동력을 인간 주체로부터 어떤 요행에 기댄 표류 상태, 즉 인간을 위한 해방의 시발점으로서의 자본으로 이동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러한 오인지(miscognition)를 단지 애도만 하고 있는 동안, 가속주의는 이제 아주 유쾌하게 인간 문명으로부터 무엇이 탈출하고 있는지를 탐색하며, 현대성을 미래를 향한 ‘재활적’(anastrophic) 붕괴로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이 책에서 사디 플란트(Sadie Plant)와 닉 랜드가 함께 쓴 「사이버낙관론」(Cyberpositive)에서 전개되고 있다.
가속
마지막 장은 책 전체가 지향되고 있는 당대의 성과들을 펼쳐 보인다. 단순한 기술 낙관주의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지만, 현대 가속주의는 회피주의(retreatist)적 해법들에 대해 적의, 심지어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생산물인 기술을 (거부하기 보다) 재정향하고 재구성하는 것에 야심찬 흥미를 가지는 것이다. 70년대와 90년대 가속주의로부터 가장 현저하게 감축한 내용은 이론적 입장을 리비도 형상들로 축소하려는 경향이다. 현대적 계기에 대해서 보다 그와 더불어 저술하려는 시도는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계몽적 가치들에 대한 요청과 명백하게 전제적인 합리주의가 어떤 예기치 못한 모습을 드러낸다. 만약 일단 예전의 가속주의가 선구자들의 열광적인 허무주의와 불화한다면, 오늘날의 가속주의들은 20세기의 끝과 21세기의 탄생에 걸쳐 있는 몇 십년 간의 프리즘을 통해 재사유되고 갱신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폭넓게 말해서, 오늘날 ‘프랑스 이론’의 아나키즘적 경향들은 기술사회적 하부구조의 전유와 포스트-자본주의의 경제적 플랫폼들의 구상과의 관련성에 의해 억제되고 있으며, 사이버컬처 시대의 반인간주의(antihumanism)는 맑스와 페도로프(Fedorov)의 이론적 취향에서 발견되는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주의와의 종합을 통해 어떤 이성주의적 비인간주의(inhumanism)로 변형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외면적인 격절은 과도기의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는 초-자본주의적 공간들에 대한 욕구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스펙타클에 의해 대규모로 수용된다고 이해되었다. 즉 윤리적 소비주의를 위한 ‘창의성’에서부터 정치적 수평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가 기꺼이 제공했던 것이다. 사이버컬처적 예감들의 이상한 역전 안에서, 기술과 화폐화[금융화]의 새로운 양상들은 이제 진부한 재사회화 과정, 가장 제한되고 사회정체성을 중시하는 인간 운영 체계인 ‘신-아나키즘’의 재시작 안에서 지도되는 것과 분리불가능한 것이 된다. 심지어 사람들이 스카이넷(Skynet[영국 군사 통신 위성])의 통합 작업으로 실행하는 것과 같이, 이 최근 부상하는 체제 – iPod, Myspace, Facebook – 의 매우 유행하는 이름들은 탈인간화의 모험에 대리로 참여하면서 사이버컬처의 암울한 분위기를 조롱한다. 즉 우리는 모든 인간을 자기스펙타클화(autospectacularized)하는 새로운 부양자로서 그것을 소비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사회적 신의고주의가 고정되고, 자본의 약탈행위가 인간성에 실존적 위기를 드러내는데, 그러는 동안 금융자본 자체가 위기에 빠지고, 미래에는 금융 업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마침내 인간 인지 수준을 벗어나는 작동 도구들을 통해 미래가 식민화한다. 그와 같은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분명히 비가역적인 시장잠식이 발생한다. 그것은 공적 분야의 왼쪽[좌파]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국가가 기업적 형식으로 해소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며, 여기에는 어떤 확고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 곤란함이 존재한다. 요컨대 이것은 70년대에 기대했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과정들이 아니다. 그리고 디지털 포섭과정이 90년대를 풍미했으며, [마찬가지로] 그 과정들은 발생하지 않았다. 향락에 대한 약속, ‘구제불능’인 젊은 세대의 등장, 탈인간화된 경험의 새로운 장들, ‘더 많은 춤 그리고 더 적은 경건함’이라는 슬로건, 이런 것들 만이 바로 그 정체성을 중시하는 끌개들 안으로 차이-없는-반복을 통해 효과적으로 끌려 들어 갔다. 이러한 것들은 아마도 자본의 주요한 수혜자들을 위한 안정적인 미래 투자에 유일한 찬성표를 던지면서, 흩어지고 소멸할 것이다.
알렉스 윌리암스와 닉 스르니체크의 「가속주의 선언」은 현대 가속주의 좌파의 입장에 대한 피셔(Fisher)의 요청[3]을 존중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오늘날 진보 정치 이론과 행동에 널리 퍼져 있는 현대 좌파의 흔한 기술문맹질환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스르니체크와 윌리암스는 정확한 인지적 지도제작의 필요성, 따라서 인식론적 가속주의를 주장한다.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은 대안은 사유가능하다고 말하며, 분명한 어조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불공정하거나 부정의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역동성과 진보성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진술한다. 보다 긴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기획의 밑그림을 그려가는 동안, MAP는 즉각적인 명성을 얻었지만(온라인에 게재된 그 달에 수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마찬가지로 다음의 세 가지 일반적 요청들에 관한 그 이상의 해결책을 여전히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첫 번째로 새로운 지적 하부구조의 창조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로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미디어의 재구성에 관한 것이며, 세 번째로는 계급적 역능의 새로운 구성들의 재구축에 관한 것이다. 맑스의 예를 따라 - ‘모범적인 가속주의 사상가’로서의 맑스를 따라 – 윌리암스과 스르니체크는 지난 10여년 간 좌파에 들씌워진 기술에 관한 불신을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최근의 사변적 [유물론의] 철학의 이성주의적 분파에 밀착하면서, 어떤 소박한 민중 정치학(folk politics)에 열렬히 반박하기 위해 ‘민족 심리학’(folk psychology)의 토포스를 채택한다. 이것은 가속주의와 더불어 전승되고 직관적으로 도구화된 범주들에 기초한 정치학이다. [하지만] 가속주의 정치학은 그와 같은 범주들을 벗어나는 ‘추상적인 근대성, 복잡성, 전지구성 그리고 기술’에 기반한 프로그램을 파악하는 것이다.
좌파 프로메테우스적 정치학의 핵심 요소는, 그로부터 도출되는 ‘변형적 인간학’을 포함하면서, 기술의 변형 잠재력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하고, 기술적 진화를 더 앞으로 가속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새로운 가속주의는 최근의 기술 체제와 가치체계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광범위하게 기반하는 것이다.
맑스로의 회귀 또는 그로부터 출발?
이 서문을 끝내기 전에 맑스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책의 많은 부분이 암시적으로든 공공연하게든 그의 기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의 지리멸렬함은 근본적으로 맑시즘을 따라 ‘불가피한 미래를 사유하는 것에 있어서의 실패’(카마테Camette) 에서 나온다. 즉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의 갈등이 변증법적 승화의 순간에 도달하거나,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를 혁명적 행위주체로 구성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실패를 역사의 ‘내적인 유기적 발전’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기-파괴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후 상황(스펙타클로의 실재적 포섭)에 대한 이론적 분석은 변증법적 대립의 긍정적 가능성을 전혀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오직 대립의 양상을 자본주의 재생력의 불가피성과 [혁명적 행위주체의] ‘방해’ 사이의 인지적 부조화 내부에 경직된 상태로 몰아 넣는 것이다. 가속주의는 맑스에 의해 드러난 몇몇 근본적인 문제들로 되돌아감으로써 그러한 이론적 곤경에 대면하는 방식에 있어서 괄목할 만하다. 가속주의는 주류 맑시즘의 여러 맑스주의 교설들 이를테면 변증법, 소외 그리고 노동 가치 이론과 같은 개념과 교전하는 것이다. 사실상 가속주의의 하나의 특성은 이러한 근본적 성찰로 반복적으로 되돌아가, 매번 한 무리의 절박한 조건들 아래에서 때로는 폭력적인 거부를 요구하는 어떤 급진적 반복을 통해 이 시대의 주류 정치적 조건들에 관련된다는 점이다. MAP가 의미하는 바대로, 맑스의 저작으로부터 나오는 가속주의 경향은 편향된 독서의 결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기계 체계에서 산 노동자들의 집합성으로서 노동의 단일성은, 생산력의 기초이긴 하지만 흩어져 있다. 여기서 인간노동은 외적인 자동화된 생산과정의 ‘최소한의 그리고 사라져 가는 [...] 단순한 계기’일 뿐이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자본을 위한 보다 만족스러운 형식 안으로 원초적인 인간적 재료를 재생산한다 해도, 맑스에게 기계 체계는 그것이 도입하게 될 다른 생산 관계의 가능성을 미리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계체계는 인간의 특정한 변형과 분리불가능하고, 사회적이면서 인식론적(자연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통제에 의존하는) 그리고 기술적인 어떤 시스템에 각인되어 있다. 인간은 더 이상 생산과 직접적 연결을 가지지 않으며, 축적되고 분기된 객관적인 사회적 장치들에 의해 매개된다. 이 장치들은 소통, 기술적 기구들, 지식과 기술들의 복제와 증강을 통해 구축되는 것이다. 맑스는 이를 ‘사회적 노동으로 직접 노동의 상승’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인간과 기술의 사회적 본성의 유연성이 전진적인 가속의 척도로 이해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맑스의 투쟁은 사회체의 자본주의적 추상성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종속될 수 있는 획일적인 사회적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놓인다. 다시 말해 기계 체계가 제 자리에 남아 있고, 인간 생산자가 이미 이러한 생산 수단들을 더 이상 소외시키는 것으로 마주하지 않는 어떤 상황이 필연적으로 인간의 더 나아간 변형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맑스에 따르면 기계 체계 안에서 인간은 인지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쇠약하게 만들고 힘을 앗아가는 매개로서의 분화되고 복잡해진 네트워크를 통한 그들 노동의 생산에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맑스는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강조하듯이) 자본주의는 마치 그것의 필연적 가정이 여전히 ‘노동 시간의 절취’에 기초한 ‘[민중의] 가난’이라는 듯이 작동을 계속한다. 기계 생산의 ‘새로운 근간’이 ‘이러한 기초를 하늘 높이 날려 버릴 물질적 조건’을 제공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불변 자본의 ‘기계적 잉여가치’(들뢰즈와 가타리)에도 불구하고, 인간 노동의 강탈은 여전히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로 놓여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사회적 공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혁신하는 것에 무관심하며 가능한한 손쉽게 잉여가치를 추출할 필요성 아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은 산업예비군을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부유하는 쪽을 택한다. 따라서 가속주의의 중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기술의 사회적으로 소외하는 효과와 자본주의 가치 체계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해서 기계 생산의 ‘새로운 기초’가 가진 해방의 효과가 자본의 경제적 체계에 의해 좌초되는가? 만약 고정자본이 새로운 포스트자본주의 사회체 안에서 재전유된다면 사회적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전진
새로운 가속주의의 핵심에, 그리고 MAP의 개괄적 형식을 채우기 위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심도 있는 응답을 하는 와중에, 네가레스타니(Negarestani), 싱글턴(Singleton) 그리고 브라시에(Brassier)에 의해 제안된 새로운 철학적 틀이 프로메테우스주의를 재긍정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어떤 변형적 인간학, 새로운 사변적, 실천적 이성의 개념, 그리고 일련의 도식들로 묶어 세운다. 이 도식들을 통해 포스트 자본주의의 질서로부터 유래하는 불가분적인 사회적, 상징적 그리고 기술적 물질들[재료들]이 구성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애매하게 알려진 방향에 있는 가속주의도 아니고, 순전한 속도는 더욱더 아닌, 그러한 가속주의에 찬성한다. 그것은 리드(Reed)가 제안한 바, ‘편중심성’(eccentrication) 그리고 네가레스타니, 브라시에와 싱글턴이 강조하는 다양한 방법들, 즉 ‘항해술’(navigation)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가속주의이다. 이 가속주의는 미래를 향한 어떤 행위로 개방된 공간 안에 있는 바, 그 자체로 스스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자신의 행위주체의 본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요동’에 포함된 저자들의 운명은 여기서 매우 교훈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탈영토화에 대한 주의를 요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용의주도한 분석을 통해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가졌던 태도를 『천의 고원』에서 다소 희석시켰다는 주장은 충분히 가능하다. 리오타르는 얼마가지 않아 그의 ‘사악한’ 가속주의적 계기를 공개적으로 뉘우쳤으며, 대신에 – 결과적으로 카마테의 페시미즘에 동조하면서 – 미학적 저항이라는 소수 전략을 전개해 나갔다. 이와 흡사하게 리포베츠키의 1983년 선집은 『공허의 시대』(The Era of Emptiness)라는 강렬한 제목을 달고 있는 바, 이것은 혁명적 어조를 암묵적인 허용 가운데 하나로 변조한다. 비록 그가 여전히 ‘가속적인 탈안정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제 그는 그것을 ‘인격화의 과정’을 통해 광범위한 작동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이 과정이란 해방의 벡터가 나르시시즘과 편재하는 ‘소통’의 스펙타클한 소비 속으로 응축됨으로써 균형잡힌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본 아래에서, 개인은 그들이 사회적 존재로서 가능하게 하는 막대한 생산력으로부터 격리되며 피드백은 최소한의 ‘환류’(reflux)로 제한된다. 이것은 일종의 ‘구매력’으로 축소되며, 질적으로 자본의 거대한 흐름과 비교불가능한 수준이 된다.
가속주의 정치학을 구축하는 노동, 즉 그것의 기계들과 인간들은 매우 중요하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산의 과정에서 인간을 고려하는 것 [...] 그리고 동시에 실천, 실험 과학, 물질적으로 창조적인 그리고 객관화하는 과학도 마찬가지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그것의 머리가 축적된 사회적 지식으로 되어가는 인간으로 간주된다.” 만약 “우리가 아직 현재 기술사회적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모른다면” 비인간의 이러한 노동이 단순히 합리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생기론적 관점에서 기술과 사회적 인간의 불가분성 – 인간 즉 기계homo sive machina – 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세계와 기술 자신에 의한 집합적 노동의 두 측면이다. 능산적 인간과 소산적 인간?(Homo hominans and homo hominata?)
[주석]
[1] ‘가속주의’라는 용어는 처음에 로저 젤라즈니(Roger Zelazny)가 1967년에 쓴 SF 소설 『빛의 주인』에서 사용되었고, 벤야민 노이스에 의해 『부정의 지속』(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0) 4-9쪽에 걸쳐 비판적 용어로 채택되었다. 노이스는 그의 가속주의에 대한 사유를 『해로운 속도: 가속과 자본주의』(London: Zero, 2014)에서 계속한다
[2] [역주]Deleuze, Gilles and Félix Guattari (2004)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39–40; Kor. 김재인 옮김, 『안티 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분열증』, 민음사, 2014, 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