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아르에셰르의 솔로뉴(Sologne) 중심에 위치한 라보르드 성은 신비로운 장소다. 이곳에 있는 비교조적인 정신요양원에서 정신질환자는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치료를 받는다. 시간이 지나, 그곳은 정신의학 운동이 스스로를 입증하고 발전을 거듭해 가는 어떤 실재적인 유토피아가 되었다.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을 고립시키는 전통적인 접근법을 거부하면서, 라보르드 병원은 환자들을 뒤섞고 정상인들과 환자들을 함께 놔두는 전임상적(preclinic) 접근법을 취했다. 그렇다 해도 정신병 환자들이 의학적 요법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잊어버리는 일은 없었다.
라보르드 성
이 병원은 쿠르쉐브니(Cour-Cheverny)의 중부지역 공동체에 위치해 있어서, 유명한 루아리베(Loir River)의 두 성 – 샹보르와 불루아에서 10마일 밖에 안 되었다 – 과 그리 멀지 않았다. 라보르드는 좀 색다른 세계였다. 19세기풍 성이, 몇몇 별채들을 거느린 거대한 공원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성의 일층은 사무실, 주방, 거실, 작은 치료실, 빨래방이 있었고, 2층은 환자들의 방이 있었다. 온실과 채소들이 자라는 정원은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고, 승마장, 닭장 그리고 돼지우리가 근처에 있는 숲에 위치해 있었다. 백 년 된 삼나무들이 바로 옆에 있는 성까지 자라서, 폭풍이 불면 [성쪽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성에 접한 너른 연못은 그곳이 솔로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가까이 있는 홀에는 백 여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작은 예배당은 도서관 건물로 개조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격변하는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세계를 재발명하기 위해 어떤 집단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1]
제도적 정신요법의 유산
광인들을 위한 공공 건축물의 사법적 위상을 정의하는 1838 법규는 비록 그것이 관료들의 권한 남용을 방지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들을 감금하고 학대하는 정책을 입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보다 관대하게 말하자면, 38법규는 환자의 가족이나 지역 권위자들에 의한 학대에 대항해 그 사람을 지켜줄 수 있었다.”[2]
라보르드의 역사는 1921년에 생-알바낭로제르(Saint-Alban en Lozère)에서 티소(Tissot) 박사가 설립한 정신과 보호시설에서 시작되었다. 정신의료 실천의 변화는 2차 세계 대전 말미에 매우 특유한 종류의 병원으로 굳어졌는데, 그것은 환자들의 격리로부터 효용을 얻는 것이었다. 레지스탕스 투사들의 조직들은 대개 여기서 전쟁 기간 동안 피신했고, 이후로 저항의 유산이 강력하게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또한 여기서 레지스탕스 투사들과 양심적인 반대자들이 몇몇 중요한 지식인들과 더불어 짧은 기간동안 함께 체류했다. 폴 발베(Paul Balvet)의 개혁은 간호사들을 실질적인 의료 노동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환자들에게 보다 인간적인 보호를 제공하게 되었다. 북부 로제르의 지하조직 지도자이자 공산주의자인 루시앙 보나페(Lucien Bonnafé)는 1942년에 의료원장이 되었는데, 그는 병원 환자들의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실천을 했으며,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가지도록 했다.
라보르드 정신의료원의 환자들
1939년, 카탈로니아 의사인 프랑수아 토스켈의 도착은 라보르드를 뒤흔들었다. 그는 ‘트로츠키주의 맑시스트 노동당 연합’의 투사였는데, 스페인 공화국 군대의 정신의료 활동의 책임자였었다. 그는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를 피해, 피레네 산맥을 걸어서 넘어 셉퐁(Sept-Fons)에 있는 스페인 망명 캠프에 도착했다. 또 한 사람의 카탈로니아 정신과 의사인 앙겔 비베(Angels Vivès)는 폴 발베에게 토스켈이 캠프에 와 있다고 전했다. 발베는 그 ‘붉은 의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고 캠프로 가서 그를 생-알방으로 데려 왔다.
토스켈은 16살 때부터 정신의료원에서 일을 했다. 그가 24살이었을 때, 스페인 공화국은 프랑코 장군의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 [군대가 국왕으로부터 독재권을 물려 받는 스페인식 쿠데타-역자])에 대한 반작용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레우(Reus)의 페레 마타 병원에서는 이미 4년 동안 정신의료 실천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한 세기 이상, 독서 센터에 집중하였다. 경력의 초기에 그는 카탈로니아 일반 병원에서 혁신적인 실험의 일원이었는데, 거기서는 미라 이 로페즈(Mira y Lopès) 교수가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의료 서비스를 조직했다. 그것은 대체로 독일 정신의학 임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토스켈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여행할 때, 헤르만 시몬의 『정신병원에서의 심리요법』(Psychotherapy in the Asylum)을 가지고 다녔다. 그 책은 구터슬로크(Guttersloch)에서의 시몬의 경험담이 기술되어 있었고, 정신병원과 환자들 모두가 전체 병원 공동체를 위해 직업적인 행동들을 하고, 창조적인 반응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라보르드 정신병원 모습(오른쪽 사진에 환자들 뒤로 가타리가 앉아 있다)
전쟁 기간 동안 모인 지적인 에너지는 토스켈의 전위적인 관점에 따라 생-알방 병원을 일하기에 쾌적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30세 이하였으며, 세상을 재창조할 수 있는 나이였다. 환자 클럽이 생-알방에 만들어졌을 때, 토스켈은 제뵈당 협회(Société du Gévaudan)의 결성을 이끌었던 강렬한 집단적 수행을 결합했다. “즐거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병원에 대해 토론했다. 우리는 병원을 기본 개념에서부터 급진적으로 바꾸었으며, 다른 가능한 치료 유형을 만들었다.”[4] 1952년, 보나페가 파리에 일을 잡았을 때, 토스켈은 병원의 의료원장이 되었다.
저항운동은 생-알방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이후 전반적으로 레지스탕스 투사들은 무기들을 숨겨 벼루었으며, 이웃 주민들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병원을 지역의 삶 속으로 통합되도록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데 모든 노고를 기울였다. 그리고 제뵈당 협회는 ‘지리정신의학’(geopsychiatry)이라고 불렀던 것에 연관되었는데, 이는 정신치료와 전통적인 지역 운동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생-알방 병원과 도시는 아주 잘 통합되었기 때문에 의사들은 환자들의 집에서 그들을 데려 와서 돌아갈 때까지 그들을 계속 지켜보았다.
레지스탕스와 병원의 상호직조 과정은 너무가 결속력이 강해서 인턴 모집도 지역 레지스탕스 네트워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진료책임자인 루시앙 보나페는 폴 엘뤼아르(Paul Eluard)를 영입했는데, 그는 비밀문서 출판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 외에도 레지스탕스와 가까운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조르쥬 사둘(Georges Sadul)과 가스통 비셋트(Gaston Bissete)도 참여했다. 그는 특히 철학자인 조루쥬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을 찾아냈는데, 그는 툴루즈의 의학과에 있었으며,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의 공화국 협회 위원이었다. 전쟁과의 연루, 그리고 이 모든 것들, 즉 지역 레지스탕스, 오베르뉴 레지스탕스, 무쉐 산, 지식인의 저항, 비밀 출판사 등은 모두 생-알방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5], 라보르드가 형성될 방식을 궁극적으로 틀지었다. 장 위리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일종의 ‘매트릭스’ 또는 용광로와 같은 형식이었다.[6]
전쟁 후에 즉각적으로 많은 젊은 인턴들은 생-알방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장 위리는 1947년에 완전히 새로운 세대와 더불어 기차를 타고 도착했으며,[7] 토스켈과 즉시 결합했다. 18세에 위리는 그의 자유로운 친구들 사이에 연구그룹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생각했다. 가타리처럼, 그는 학생 기숙사 운동 내의 가렌느-콜롱브 행동주의자들에 깊이 개입했고, 전쟁 이후 매우 행동적이었던 젊은 그룹 안에서 속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렌느의 명망 있는 히스파노-수이자 회사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
장 위리가 생-알방에 왔을 때, 그는 라캉의 1947년 강의록을 가져왔다. 이 텍스트는 정신과 의사로서 그의 긴 경력에 이론적 기초가 될 것이었다. 정신과 의사인 아주리아게라(Ajuriaguerra), 그의 동료인 조르쥬 되메종(George Daumézon) 그리고 사회학자인 조르주 구스도르프(George Gusdorf)는 라캉이 그의 심리적 인과성에 관한 생각을 발전시켰던 1946년 본느발 회의(Bonneval meeting) 이후 고등사범학교[8]에서 일련의 강의를 조직했다. “나는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몇몇 친구들을 보았지요. 내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남성이 마침내 상당히 명석하다는 것, 그가 라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 스스로에게 ‘이제 안심이군’이라고 되뇌었습니다.”[9] 위리는 물리-화학과 심리학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지만, 라캉의 강의는 그의 선택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 후로 몇 년이 지났지만, 그는 그의 스승과 어떤 개인적인 만남도 가지지 못했다. “분석가로서 마침내 내가 그를 만났던 것은 1953년 10월이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까지 만남이 지속되었지요. 무려 27년간입니다! 일 주일에 두 번씩이나 말이지요. 왜냐하면 나는 그에 관한 불치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10] 장 위리는 라캉의 지적 모험의 동반자가 되었다. 1953년 분열 시기에도 그러했고, 1964년 파리 프로이트 학파를 창립할 때에도 그러했다. 4년 동안 그는 라캉, 세르쥬 르클레르 그리고 무스타파 사퓌앙과 더불어 협회에서 날인하는 정신분석 면허 발급을 감독했다.
장 위리: 새로운 비전
장 위리는 토스켈의 친구인 솔란느(Solanes)에게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인 1949년까지 생-알방에 머물렀다. 위리는 루아르에셰르에 있는 쇼머리(Saumery)로 가서 1953년까지 머물렀다. 17세기에 지어진 쇼머리 성은 그때 당시 지역의 유일한 개인 정신의료원이었다. 그곳에는 12개의 침상만이 있었으므로 병원으로서의 기능을 거의하지 못했다.[11] 미래의 라보르드 팀은 라수스(La Source) 의료원에서 구성되었고, 여러 방식으로 1950년에서 53년 사이 몇 해 동안 라보르드의 역사에 정점을 찍게 했다.[12]
왼쪽 부터 토스켈(François Tosquelles), 보나페(Lucien Bonnafé), 장 위리(Jean Oury)
소수의 환자 인원으로 라수스에서 구성된 그 소우주는 스스로를 특별한 공동체 유형으로 정의했다. “사람들은 매우 긴밀한 유대를 가진 집단 안에서 학생 기숙사 운동을 통해 만났으며, 위리의 관할하에 가렌느-콜롱브에서 다른 친구들이 그들과 결합했지요.”[13] 장 위리의 전체 네트워크 구성원들은 주말과 방학동안에 조직된 환자들과 활동가들을 돌보면서 의료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진정한 부족집단이었다. “쇼머리 시절은 내가 ‘출구 없는’ 기간이라고 부르고자 한 시간이었지요.”[14] 쇼머리에서 위리의 정신의료 임상은 생-알방의 경험을 활용함으로써 발전했다. “이러한 맥락화가 없었다면, 의료 행위는 교묘한 속임수에 불과했을 겁니다. 토스켈은 다중심적 이질성에 대해 이야기했고, 동시에 횡단학제성(transdisciplinarity)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당신은 환자의 직업, 그의 어린시절 그리고 그의 삶에 존재하는 물질적 조건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15] 의료원 건물의 주인들이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면서 건물을 개축하려는 어떤 제안도 거절했을 때, 위리는 다른 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위리는 쇼머리에 40개의 병상을 가진 의료시설을 만들려고 갖은 애를 다 썼지만, 그 지역에서 정신의료에 있어서 결정권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고립감을 느꼈다. 그는 또한 다른 곳에 자신 소유의 병원을 만들려고 열망했다. 1953년 4월에, 그는 6마일 정도 떨어진 라보르드 성이 매물로 나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성은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 약 2.5마일 떨어져 있었으며, 가장 가까운 도시는 약 8마일 떨어져 있었다. 그 건물은 심각하게 망가진 상태이기도 했다. 단지 1층만이 살만한 정도였으며, 여러 개의 별채들은 무너져 있었다. 위리는 라보르드 성을 매입했고 쇼머리에 있던 거의 모든 환자들과 8명의 의료인력들을 그곳으로 데려 왔으며, 마침내 1953년, 의료원을 개원했다. 정신의학의 세계는 즉시 그 창의성을 발휘했다. 1954년 현재, 루이르구이앙(Louis Le Guillant), 이블린(Evelyne), 케스템버그(Kestemberg) 그리고 조르쥬 되메종에 속한 정신과 의사들이 위리의 상담을 받기 위해 왔고 그들의 환자를 위리에게 보냈다.
장 위리(1924-2014)
라보르드는 새로운 단계의 시작이었다. 위리는 농담조로 프랑스 혁명력 1년이라고 날짜를 매긴 규정들을 쓰고, 집단 치유 수행을 위한 세 가지 지도 원리를 정의하면서, 1953년에 문을 열자마자 그곳에 세례를 주었다. 그곳의 관리자들은 [첫 번째 원리로] 스탈린이 죽은 해에 여전히 널리 알려진 맑스-레닌주의 이념을 반영하여 민주집중제에 의해 보호 받았다. 두 번째 원리는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이념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이에 따라 각 스텝 구성원들은 손노동과 지적 노동 사이를 번갈아가며 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어떤 임의적인 상태를 만들었다. 업무는 윤번제에 따라 할당되었다. 병원의 모든 사람들은 의료행위에서 집안일로, 일을 하는 것에서 연극 준비로 옮겨 다녔다. 마지막 원칙은 반관료주의적인 것이었는데, 일을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책임, 과업 그리고 봉급은 모두 공유되었다. ‘제도적 정신요법’(institutional psychotherapy)라는 말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음에도, 그것의 여러 주제들이 이미 명확해졌다. 즉 공간적인 상호침투(spatial permeability), 운동의 자유, 전문적 역할들과 자격에 대한 비판, 제도적 유연성 그리고 환자 치료 집단의 필요성이 그것이다.[16]
이러한 경향을 정의한 역설적인 텍스트는 『비연역적 현상학을 위한 존재론』(Ontology for a Nondeductive Phenomenology)인데, ‘청량음료’(A Refreshing Drink)라는 다소 젠체하는 부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은 라보르드가 초현실주의자들이 수행했던 것과 같이, 우연과 자동성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맡김으로써, 가능한한 창의적으로 새로운 접근을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 위리는 라캉과 퐁쥬를 참조했다. “프랑시스 퐁쥬의 접근법은 라캉이 사물/사태를 일컬었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특정한 [사태의] 표면을 건드렸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론이었고, 우리가 환자들을 다루는 방식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다.”[17]
프랑수아 토스켈(1924-1994)
정신 치료의 측면에 대한 그의 열정에 더해, 위리는 언제나 창의성에 열광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논문도 썼다. 광기와 창의성을 연관시킴으로써, 그는 정신병에 대한 순수하게 부정적인 관점을 논박했다. “나는 창의성을 어떤 생물학적인 방어기제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재구축하거나 변경하고자 하는 시도 같은 것이었지요.”[18] 그의 논문에서 위리는 정신병 환자들의 심리적 병변에 의해 창조되는 조각난 사념들을 자기생산과 동일시했다. “환각은 생산적이다 [...] 나는 미적 충동에 대해 말했다.”[19]
위리에게 병원은 ‘제화공장’으로 오인되지는 않았다. 라보르드의 의료 집단은 특별하게 조직되지 않았고, 전통적인 병원들에서처럼 기능적인 위계 속에 질서 잡혀 있지도 않았다. 그곳은 전문화된 직업요법가들(ergotherapists)과 사회요법가들이 그들의 특유한 일 안에 응축되어 있었고, 의료직원들의 휴식처는 따로 떨어져 있었다. 영구 혁명은 또한 각각의 기획이 잘 진행되어가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노고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것의 잠재적 생산력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봉급은 라보르드에서 가장 미묘한 문제 중 하나였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아주 복잡한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봉급을 업무의 난이도나 숙련도에 따라 사전에 가중치를 두는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다. 라보르드가 창조적으로 돌아갈 때, 위리는 생-알방의 경험을 기초로 어떤 모임을 만들었다. “오딘 박사[원문에 따르면 이것은 위리 박사라고 해야 한다]가 했던 첫 번째 일은 비누와 볼펜을 팔고, 카드놀이를 하거나 잡지를 읽을 테이블과 의자를 물색하는 것이었다.”[20] 목표는 생-알방에서와 동일했다. 비위계적인 사교모임을 만드는 것, 여기서는 의사와 간호사, 감독관과 어떤 의료종사자들도 함께 섞일 수 있다. 모임은 병원의 중심이었고 성의 완연한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널직한 1층 거실에 자리잡았다. 한 쪽에는 바에서 가벼운 음료와 담배를 파는 보다 작은 방이 있었다. 격주로 열리는 일반 회합은 이사회를 위한 것이었다. 예전에는 의료감독관들만이 이사회에 참석할 자격이 주어졌지만, 나중에는 많은 환자들이 충분히 행정적 책임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이사회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많은 노동위원회와 모든 종류의 회합들이 라보르드의 이 생생한 사교적 모임에 참여했다. 모임 위원회는 작업장을 조직했고, 기관 신문인 《라보르드 통신》(La Borde Éclair)을 관리했다. 그리고 낙화술(烙畵術) 활동들, 합창단, 인형극장 등등도 감독했다. 모임 위원회는 또한 기금을 관리했으며 재정적으로 병원으로부터 독립했다. “따라서 형식적, 민주적인 대표 체제를 수립하고 있었다.”[21] 전체 의료종사자들이 환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음식메뉴 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라보르드가 주방에서 요리사를 나오게 하고 개방한 지 7개월 후에 생겼다.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식사준비에 포함시켰고, 그것은 그룹을 더 잘 통합시켰으며 어떤 특수화된 작업들에 사람들을 가둬 두는 것을 방지했다.
루시앙 보나페(1912-2003)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이 전문화를 희석시키는 것을 선호한 것은 아니다. 창조적 긴장은 정신병을 언제나 다양한 방식으로 이성적 논리에 도전하고 있는 어떤 장소에서 차이에 대해 항구적인 주의집중을 야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교환은 사람들을 그들의 고립과 반복 강박과 같은 것을 포함해서 병적인 충동들로부터 구출해 내도록 기획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주제를 가진 모임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수행되었다. 이와 같이 제도적 정신요법을 수행하는 목적은 관계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새로운 형식들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22]
장 위리는 정치활동을 통해 펠릭스 가타리에게 계속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라캉의 세미나에 대한 정보를 갱신하도록 했다. 이 세미나에 그는 1950년대 이래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가타리는 라보르드에 와서 일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였고, 그의 파트너인 미셸린 카오와 더불어 1955년에 그곳으로 이사했다. 가타리와 위리는 다소간 공유된 책임의식을 교대로 짊어졌다. 즉 가타리는 치료 모임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그에 대한 계획을 짜기 위한 외부 관계들을 책임졌다. 라보르드는 재빨리 ‘이두체제 기계’(two-headed machine)가 되어갔다. 가타리와 위리 간의 밀접한 우정은 어려운 순간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했으며 라보르드는 혁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적으로 불균형을 유지했다.
가타리가 보다 많이 매혹된 점은 정신병보다 라보르드에서 진행중인 작업들의 지적인 측면이었다. “내가 정신질환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했지만 사실이었다.”[23] 정치활동에서의 그의 경험은 그를 조직화와 조직운영에 능숙하게 만들었다. “의료진을 향한 나의 행동은 엄격하게 투사적이었으며, 그들은 매우 놀란 채로 업무과정, 회의 스타일 그리고 업무실수에 있어서 규율들이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24] 병원에서의 하루 일과는 매우 바빴다. 이를테면 기면증 환자에게 약물치료를 하기 전에, 환자들 간에 갈등이 싸움으로 번졌는데, 그들이 커피 주전자나 도구들로 머리를 갈기는 장면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생-알방 병원의 환자들과 의료진들(1952)
이미 자타공인의 그룹 리더인 가타리는 필요하면 그의 유도 실력을 발휘해서 폭력적인 사태를 진압했다. 그는 의료진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공간을 마련했다. 그가 몇몇 환자들과 상담을 시작했을 때, 그는 상당히 권위적인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났으며, 특히 침대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환자들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그들은 방 밖으로 내쫓겼고 몇 가지 계획된 활동들을 하도록 했다. 라캉의 세미나와 라보르드 사이에서, 가타리는 정말 정신의료적 훈련을 받은 것이었다.
가타리는 환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경험한 후에야 그의 방법을 완화했다. 1957년에, 위리는 그를 생-알방에 있는 토스켈에게 보내 잠시 입원시켰고, 이 때문에 알제리에서의 군복무를 피할 수 있었다. 거기서 가타리는 고압적인 간호사들의 철칙 아래에서 환자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게 되었다. 1950년대에, 사르트르와 실존주의자들의 입장이 의문에 부쳐졌다. 의사와 간호사들 간의 관계에 대해 위리와 토론 하는 중에, 가타리는 분명 기능상실에 대해 흥미를 가졌다. “주요한 관심은 다양한 역할들과 흔해 빠진 유형들을 폐지하는 것이에요. 즉 미친 사람처럼, 의사나 간호사처럼 행동하는 것 말입니다. 인간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좀 덜한 역할들과 유형들로 자동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더 이상 없어요.”[25] 라보르드 간호사들은 더 이상 헐렁한 원피스를 입지 않았으며 환자들과 구별할 수도 없었다. 위리는 한 번 환자가 되어 입원하면, 그나 그녀는 결코 풀려나지 못한다는 도그마를 뒤집으면서 유머감각을 발휘했다. 그에게는 의료진이 영원히 풀려나지 못하는 자들이었고, 환자들은 들고남이 자유로왔다. 생-알방 시기 이후로 줄곧 그리고 라보르드가 문을 연 이후로도, 위리는 광인의 말이 몇몇 진리를 담고 있다고 느꼈다. 망상적인 행위는 이상한 페티시즘이 아니라, “창조적인 요소를 발견해 내려는 진정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의료 관찰자는 우리가 광인의 초월적 차원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26]
가타리는 매우 빨리 개인적으로 많은 환자들을 관리감독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잭 브리에르(Jack Brière)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타리가 1959년 1월 29일 라보르드에 왔을 때, 그는 브리에르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리고 브리에르가 병원을 떠나게 되는 1967년까지 개인 치료를 통해 그를 관찰했다. 브리에르는 공포불안을 겪고 있었는데, 치료방식은 매우 전통적인 것이었다. “펠릭스 가타리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나는 안락의자에 누워 있고 그는 내 뒤에 앉아 듣고 있었지요.”[27] 4년 동안 브리에르는 비서이자 연금수령자들을 위한 회계담당자로 일했다. 그는 블루아(Blois)에서 장부를 기장하고 은행계좌를 관리하기도 했다. 가타리도 금속공학에 관한 책들을 사기 위해 필요한 돈을 그를 통해 빌리기도 했다. 그 책들은 그가 매우 흥미진진해하는 것이었는데, 이후에 국립공예학교에서 강의를 진행할 때 쓸모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가타리는 브리에르를 놀라게 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다녔기 때문에, ‘쾌속 가타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타리가 그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브리에르는 “사는 것이요. 그는 사람들이 그들의 욕망을 깨닫도록 밀어부쳤고 나에게는 조각을 시작할 용기를 주었지요.”[29]
생-알방 병원에서의 토스켈 박사
자크 베스(Jacques Besse)는 가타리에게 특별히 중요한 환자였다. 그는 탁월한 예술가이자, 시인이면서 음악가였다. 베스는 1955년에 라보르드에 와서 1999년 5월 30일 죽을 때까지 거기 머물렀다. 그는 1921년에 태어났으며, 아주 뛰어난 고등학생이었는데, 그때 이미 2년 간 일류 대학의 예비 과정을 통과했다. 그는 철학을 공부했고, 1943년 찰스 뒤랭 공연단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이브 알레그레(Yves Allégret)와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영화에 음악을 작곡해 주었고 피아노 협주곡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1950년, 그가 알제리 여행에서 도보로 돌아왔을 때, 그의 삶은 붕괴했다. 위리와 가타리가 그를 라보르드로 데려오기 전까지 감옥과 정신병원을 왔다갔다 했다. 라보르드에서 그는 심지어 그들의 저널인 《탐구》(Recherches)지에 실을 몇몇 논문을 출판하기도 했다.[30]
베스는 영감을 얻기 위해 자주 병원을 떠나 파리 근교를 걸어다녔다. “내가 자동적으로 생-제르망-데-프레(Saint-German-des-Prés)로 걸어 돌아올 때면, 나는 사랑의 무게나 댓가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시시한 행동들의 신성동맹에 있어서, 가장 시적인 것에 지불해야만 하는 희생은 아니었지요. 즉 우리는 가장 엉망진창인 사람들입니다.”[31] 가타리는 그가 산책을 할 때마다, 그에게 오 백 프랑짜리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베스는 술에다 돈을 쏟아 부은 것이다. 한 번은 빌-에브라르(Ville-Evrard)구역에 있는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는데, 그 이후 라보르드로 이송되었다.
베스는 라보르드에서 매일 저녁마다 모든 문화행사에 참여했는데, 그러면서 『이국적인 서구』(The Exotic West)라는 제목으로 한 시간 짜리 극본을 쓰게 되었다. 그것은 공연되지는 않았지만, 완성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영화감독인 자크 바라티어(Jaques Baratier)는 라보르드에 베스를 정기적으로 보러 왔고 2004년에 공동시나리오 작업을 한 후 그에 대한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었다. 로랑 테르지에프(Laurent Terzieff)가 베스를 연기했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유명하다. “말 뒤에서, 환자가 아니라 시를 찾아라.”[32]
알랭 레네(1922-2014)
지나치게 커지거나 고만고만한 치료 모임들을 대체하기 위해, 라보르드에서는 작은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기묘한 이름을 가진 여섯 개 또는 일곱 개의 모임을 만들었지요. 거기에는 1970년 이후로 ‘유실물’이라고 불렀던 그룹도 속해 있었습니다.”[33] 결국 환자들의 주체적인 구성과정을 만들어가기에 적합하도록 추진되어, 환자들과 의료진들의 규모가 같은 치료 단위들이 생성되었으며 그 수는 마침내 열 다섯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규칙이 있었다. 그룹들은 그들이 언행에 집중하는데 어려움을 극복하는 개인들을 돕기 위한 주체들을 위해 대표권한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작은 그룹들은 극도의 친밀성과 친근감을 강화하고 창조하는 의도치 않은 효과를 가졌다. “난 1971년에 여기에 왔던 한 환자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에게 ‘당신은 이 모임 단위 안에 있게 될 것이에요’라고 말했으며, 다음 날 그는 날 보러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난 내 가족과 몇몇 문제가 있어요.’ 난 그가 떠날 수 있도록 돈을 구했지요.”[34]
‘야만인’의 급습
가타리가 라보르드에 왔을 때, 그는 여러 명의 젊은 전투적 학생들을 초대해서 함께 머물면서, 정신질환의 세계와 직접 접촉하도록 했다. 위리는 그들을 ‘침략자’들 또는 ‘야만인들’이라고 불렀지만, 병원이 1955년에 48명의 환자에서 1958년에 90명의 환자로 늘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유용했다. 대개 정치적 투사들과 휴머니스트들이었던 첫 번째 그룹은 펠릭스 갱단 출신의 철학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루시앙 세바그, 미셸 카트리, 알프레드 아들러, 클로드 비비앙 그리고 미래의 심리학자인 쥐네트 미쇼(Ginette Michaud)가 그들이었다. 이들 모두는 잠재적으로 휴머니스트들이었다. 그들은 펠릭스를 소르본 대학 도서관에서 만났는데, 이 장소는 정치적 사교관계가 형성되는 곳이자 지적으로 풍성한 도서관 사서인 로뫼씨(Mr. Romeu)로 유명한 곳이었다. 로뫼씨는 학생들에게 그들의 학업 뿐 아니라 공산당 행동주의에 그들을 입문시키는 데 있어서도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라보르드는 가타리의 정치적 신념을 갱신하는 장소였으며, 그의 ‘갱단’을 정치적인 행동들에 참여토록 하기 위해 초대한 장소이기도 했다.
미셸 카트리는 1953년 봄에 라보르드에 초대되었다. 그때는 병원이 막 개소한 시기였다. “라보르드는 우리에게 굉장한 유토피아였지요. 난 위리가 우리를 블루아 기차역에 만나러 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밤새도록 그의 사무실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Diary of a Seducer)에 대해 토론했지요.”[35] 나중에 인류학자가 될 카트리는 어떤 젊은 정신분열증 환자에게 배당되었는데, 가타리는 그와 더불어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시도 썼고, 일기도 썼으며, 라캉의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가타리는 그를 가끔 파리에 보냈는데, 그때 그를 돌보기 위해 카트리에게 부탁했다.
‘야만인들’은 학교가 쉬는 때면 어김없이 라보르드에 왔으며 전반적인 활동들에 참여했다. 인쇄작업, 도자기 작업장 일, 그리고 의사, 간호사 그리고 환자들과의 회합이 그런 활동이었다. “광기를 어떤 단순한 질환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지적인 발전에 연결했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그리고 시적으로 모든 것이 매우 새로웠습니다. 그것은 평범한 시절은 아니었지요.”[36] 카트리는 인류학을 연구하기로 결정했고 그의 아내 크리스티안은 라보르드의 관리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기서 2년 간 살았으며 아들도 거기서 태어났다.
키에르케고르
카트리의 고등학교 친구인 알프레드 아들러도 나중에 인류학자가 되었는데, 라보르드에서 같은 열정적인 경험을 했다. 그는 가타리를 그의 ‘영적 스승’(guru)으로 생각했다. 사실상 야만인들은 가타리의 ‘작은 병정들’로 불리워졌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들러도 알제리 징집을 피할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래서 파리 대학 병원의 르보비치 박사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카트리를 라보르드에서 약 6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병원으로 보냈다. 그곳은 가타리의 친구인 클로드 장지라르(Claude Jeangirard)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아들러는 라보르드에 매일 올 수 있었으며, 그의 여러 활동들을 가타리와 더불어 할 수 있었다. 클로드 비비앙이 프레네(Freinet)에 대해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곳도 라보르드였다. “우리는 다락에서 침낭을 뒤집어 쓰고 잠에 들었습니다.”[37]
쥐네트 미쇼는 약학과 심리학과 학생이었지만, 라보르드는 그녀가 진로를 심리학자로 정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나는 횡단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펠릭스와 그것에 대해 토론했지요. 그는 그래서 그것에 대해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겁니다.”[38] 그때 쥐네트 미쇼는 루시앙 세바그와 함께 살고 있었다. 루시앙은 젊은 철학자로서,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레비-스트로스의 숨은 계승자로 알려졌다. 세바그 또한 라보르드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의 영민한 수학자 형제인 로베르를 따라 합류했다.
1962년 알제리 전쟁의 막바지에, ‘야만인들’의 두 번째 물결이 라보르드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가타리가 재결합하면서 만들어졌던 ‘프랑스학생연합’(National Union of French Students)과 프랑스학생운동(MNEF) 그룹의 구성원들이었다.1962년과 알제리 독립 사이 그리고 1968 혁명의 직전에, 많은 학생들은 라보르드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의료작업을 열정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그들은 강렬한 정치적 이념들을 가졌는데, 라보르드를 정신의학의 세계이자 원초적인 사회의 유토피아를 재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라보르드에 여름 어느날에 갔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그때 제 나이는 스물이었지요. 전쟁은 끝났고, 내 남자친구는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날들이었습니다.”[39] 이것은 당시 파리고등사범학교 문학부 학생이었고 이후 작가가 되는 마리 드퓌세(Marie Depussé)가 라보르드와 그녀의 첫 번째 만남을 기술하기 시작했던 방식이었다. 그녀는 라캉의 세미나에 그녀의 철학과 남자친구와 정기적으로 갔는데, 그 남자친구는 폭력적으로 변했던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3개월 간의 감옥생활을 하고 막 나온 참이었다. 고향으로 오는 길에, 그의 출소를 기념하기로 결정했고, 곧장 라보르드로 가서 그곳에서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난 라보르드에 머물렀지요. 왜냐하면 환자들과 그들이 대우받는 방식에 깜짝 놀랐기 때문입니다.”[40] 마리 드퓌세는 공식적인 인턴들이 있기 전인, 1962년 라보르드의 인턴이 되었고 정말 떠나지 않았다.
마리 드퓌세(1935-2017)
라보르드에서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많은 환자들에 의해 요청되는 일련의 전기충격 요법이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폭력적인 환자에 대해 토론하는 동안, 드퓌세는 환자가 험한 말과 폭력으로 어떤 대화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제안을 했다. “펠릭스는 나를 굽어 보더니, 웃었고 매우 빨리 나에게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그만 두라고 말했지요. 왜냐하면 나의 미래는 라보르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펠릭스가 ‘세계는 라보르드에 있다’고 말하곤 했던 그 시기였어요. 그것은 상당 정도로 진실이었습니다.”[41] 마리 드퓌세는 망설였고 그때 그녀는 국가 교사 자격 시험인 아그레가시옹 준비를 위해, 주중에 파리와 고등사범학교 사이에 있는 자신의 시간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보르드에는 주말이 할당되었으며, 설거지와 집 청소를 포함해서 주어진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건축가였는데, 성 주변의 공원 안에 아름다운 목조 가옥을 지어 주었고, 그녀는 거기 눌러 살았다.
드퓌세는 또한 위리에게 열광했다. 위리는 지칠줄 모르는 희망 공급업자로서, 심지어 가장 까다로운 환자도 안정을 찾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매일 티타임에는 유토피아적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졌다. “라보르드에서 사람들은 오후 4시에 참피나무꽃차 한 잔을 손에 쥐고, 테이블을 둘러싸고 서 있었는데, 그때가 가장 우아한 때였다. 그때 그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었다. 침묵의 연회 [...] 한 시간 동안 시간은 멈추었고, 우리는 내면을 조율했다.”[42]
자살 소동이 있었을 때, 드퓌세는 특히나 가타리의 분석적인 영민함에 감사했다. 펠릭스는 그녀의 오빠로부터 급한 전갈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의 상태가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멍청하게도, 나는 라보르드 사무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펠릭스에게로 뛰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했지요. ‘응? 그래서, 아마도 넌 죽고 싶은 것 같은데. 좋아, 내가 뭔가 네게 말해주지. 개굴개굴!’ 난 웃었지요. 이런 게 적재적소에 그가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펠릭스가 일하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그는 정말로 치유적인 힘을 가졌습니다.”[43] 마리 드퓌세는 라보르드에 머물러서 병원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썼다.[44] 그녀는 천부적인 작가였는데, 가타리의 글들을 편집하면서, 그가 소설을 쓰려고 하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다. “그는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 평생토록 과도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는 조이스와 더불어 태어나고 죽었지요. 조이스는 참 많은 사람들을 망쳤습니다.”[45] 하지만 횡단성에 관한 펠릭스의 텍스트를 편집하면서, 그녀는 그의 사유의 질과 복잡성에 충격을 받았다.
1963년 3월에, 작가이자 ‘좌익학생연합’의 급진 행동주의자인 미셸 뷔텔(Michel Butel)이 처음으로 라보르드에 방문했다. 그의 누이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고, 그이 친구인 장-클로드 폴락이 그녀를 위리와 가타리에게 데려가도록 조언했다. 뷔텔은 처음에는 그 만남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고 가족적 의무감 외에는 별 흥미 없이, 시큰둥하게 참석했다. 그는 천식환자였으며, 자정에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그가 약을 찾고 있을 때, 가타리가 나타났다. “그 만남은 내 인생을 변화시켰지요. 우리는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물의 핵심으로 곧장 치고 들어감으로써 사람들을 깨닫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는 놀라운 방법을 가지고 있었죠. 그는 어떤 것에 관해서든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46] 가타리는 뷔텔보다 열 살이 위였고, 가타리의 지적 호기심의 숨결은 이 젊은 청년의 열정을 지폈다. 그들은 정치활동에서의 관심사를 공유했으며, 그것은 단숨에 그들을 공통된 지반으로 올려 놓았다. 그들 사이의 평생에 걸친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뷔텔은 인턴 일을 하기 위해 라보르드에 여러번 왔으며 그의 친구 펠릭스가 병원 어디에나 편재해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워했다. “그는 라보르드에서 신이었어요. 그는 언제나 거기 있었지요. 그 당시에 그는 병원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아 가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어떤 일이 발생할 때마다, 심지어 그것이 새벽 세 시라 해도, 당신은 그에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요구사항에 맞추는 것에 무척 매진했지요. 그는 병원의 영혼이었습니다! 위리는 후견인과 같은 인물이었지만, 펠릭스는 매일매일 일이 진행되는 것을 유지하는 인물이었습니다.”[47]
미셸 뷔텔(1940-2018)
전문적인 정신과 의사인 장-클로드 폴락은 1963년에 라보르드에 도착했고 이후 병원의 주축이 되었다. 폴락은 1954년에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해서 1962년에 대학 견습 과정을 마쳤다. 그도 병원의 인턴으로 있는 동안, 마찬가지로 유명한 학생 리더였다. 1961년에 그는 프랑스학생연합의 의대 분과를 이끌었으며, 여기에는 1만 2천명의 구성원들이 속해 있었고 그들의 지도 이념은 알제리 전쟁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이었다. 폴락이 라보르드에 속했을 때, 그는 연합의장 선거에서 막 떨어진 참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소수파였지만 실재로는 연합의 다수파였던 그룹의 좌익 분파는 그를 지원했지만, 탈렌스에서 연합의 총회가 진행되던 기간 동안 그는 그의 계획에 대해 인터뷰를 했는데, 이 계획은 극좌적이며 폭력적이었다. 그는 이것을 ‘전학련’으로 알려진 일본의 매우 폭력적인 학생 운동 그룹에 기반해 기획했다고 말했다. 그 기획은 그로부터 선출기회를 앗아갔으며 소수파는 보다 그들의 구미에 맞는 후보자를 찾아 허둥지둥 그로부터 떠났다.
폴락은 라보르드에서의 그의 인턴쉽에 관해 매우 흥분해 있었다. 그는 그가 속해 있었던 상호부조 그룹에 따라 라보르드를 조직화했다. “이 일에 나는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그곳은 내가 정신의료가 실재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알게 된 첫 번째 장소였지요.”[48] 그는 군대에 있기에는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 병원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라보르드에 관한 책을 정신과 의사이자 그의 동료인 다니엘 시바동과 함께 공동저술했다.[49] 폴락이 라보르드를 발견했을 때, 그는 학생지도자 네트워크, 프랑스학생연합의 투사들에 속했으며, 새롭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열정으로 혁명가들에 대해 묘사했다. 그는 ‘작은 근시의 남자’[가타리]와 함께 온 밤을 세우며 모든 것, 즉 삶, 죽음, 사랑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그의 친구들을 가능한한 라보르드에 오도록 강제했다. 그러는 동안 1965년에 그는 마리 드퓌세의 집에서 가타리와 회합을 조직했다. 거기서 그들은 좌익 반대파와 그 기획에 대한 플랜을 세웠던 것이다. 미셸 뷔텔과 장-클로드 폴락이 가세했고, 미래의 사회학자인 리안 모제르(Liane Mozère)와 에르베 뫼리(Hervé Maury), 프랑수아 푸케(François Fourquet), 피에르 아루체프(Pierre Arutchev), 조르쥬 프렐리(Georges Préli)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나는 그 당시 26세였고 우리는 모두 미친 사람들과 사랑에 빠졌지요.”[50]
1965년 여름 기간 동안 근무했던 인턴 중 프랑수아 푸케를 포함하여 몇몇은 잔류했고, 1966년 가을에 라보르드로 이사했다. “나는 라보르드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지요. 펠릭스는 나를 놀라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뭐라고? 네 앞는 대학에서의 경력이 놓여 있어.’ 그는 옳았습니다. 난 이후 교수가 되었지요.”[51] 하지만 푸케는 라보르드에서의 일로부터 추방되었다고 느꼈고, 정치과학원에서 그의 학업을 마친 뒤에 방법을 찾아냈다. 병원에서 메니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가타리는 푸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신이 났다. 그는 병원이 국가건강보험체계에 통합되도록 하는 긴 과정을 관리했으며, 그 결과 환자들은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푸케는 수 백명의 환자들, 관리자들, 인턴들, 간호사들 그리고 의사들에 대한 관리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는 난국을 날 헤쳐 나갔다. 일을 시작한 첫 달에 그는 서류들을 정리하기 위해 밤 10시까지 일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에 더해, 그는 필요할 때에는 직업 간호사인 그의 아내 쥬네비에브과 더불어 간호사로서도 일했다. “나는 정말로 라보르드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간호사와 사랑에 빠진 것이지요. 우리는 딸도 가졌습니다.”[52] 푸케는 또한 다양한 모임들과 작업장들에 활동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우선적으로 1972년까지 가타리의 행정 조교일을 수행했다.
1964년에 장-클로드 폴락의 친구인 미셸 로스텡이 CERFI 그룹과 NFSU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로스텡도 1960년대에 라보르드를 발견하고는 신이 났다. 라탱 지구[고등사범학교]의 지식인인 그는 철학 공부를 마쳤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규칙적인 일상 너머의 어떤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는 펠릭스에게 전화를 했고, 펠릭스는 라보르드에서 얼마간 일하도록 불렀다. “그는 말했지요. ‘와, 하지만 넌 일을 해야 할거야. 설거지도 하고, 환자들과 이야기도 하며, 주사 놓는 법도 배워야 하지. 야근도 하고, 정신질환자와 꽃도 팔아야 할거야. 그리고 조직편성에 대해서도 토의해야 해.’”[53] 로스텡은 라보르드에서의 말하기의 자유에 깊이 이끌렸으며 맑스, 프로이트 그리고 라캉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에도 이끌렸다. 그러는 동안 그는 병원의 현실 안으로 견고하게 닻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는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매년 라보르드로 왔다. 그 기간은 한 번에 3개월에서 12개월이었다. 펠릭스 갱단이자 프랑수아 푸케의 친구인 리옹 뮈라르도 구성원이었다. 그는 푸케와 정치과학원에서 학위과정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1966년에 라보르드에 왔고 즉각 병원에 매료되었다. “그곳은 어떤 종류의 위계도 방지하기 위해 기능으로부터 사람을 구분하면서 작동하고 있었지요.”[54]
프랑수아 팽
1966년 정신과 의사인 토니 랜느(Tony Laine)의 의붓형제인 프랑수아 팽(François Pain)이 푸아티에로부터 라보르드로 와서 한 달 간의 인턴쉽을 거쳤다. 그는 7년을 거기 머물렀다. 그는 막 고등학교를 마쳤고, 바칼로레아 시험을 치루었으며, 라보르드 가까이 머물기 위해 투르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거기서 페르낭 델리니(Fernand Deligny)로부터 배웠다. 그는 다니엘 루뢰(Danielle Rouleau)와 친했는데, 그는 쥐세 대학(Jussieu University)를 그만두고 의학을 공부했으며, 가타리와 정신분석을 배웠다. 가타리는 팽을 라보르드에 오랫동안 붙잡아 두었다. 첫 번째 인턴쉽에서, 그는 전부 프랑스 출신인 50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에서 함계 사는 것에 대해, 그리고 매일매일 세계를 재발명하는 과정에 대해 열광했다. 팽과 가타리는 변함없은 친구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위리와 가타리는 팽을 정신분석을 시작하도록 그 병원의 정신적 아버지인 토스켈에게 보냈다. “한 번은 내가 정신분석 의자에 앉아 위리를 한 5분 동안 비판했는데, 그 후에 토스켈은 나를 제지하고는 펠릭스를 오랫동안 통렬하게 비판했지요. 대화의 말미에, 그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난 아직 지불하지 않은 수업료가 많이 있다고 말했지요. 그리고서 난 그 빚은 이제 취소되었다고 말했습니다.”[55]
[주석]
1. Anne-Marie Norgeu and Roger Gentis, La Borde: le chateau des chercheurs de sens? La vie quotidienne Ia cliniquepsychiatrique de La Borde (Paris: Érés, 2006) 참조.
2. François Tosquelles, in Frangois Fourquet and Lion Murard, Histoires de la psychiatrie de secteur (Paris: Recherches, 1975), 22.
3. Hermann Simon, La psychothérapie de l'asile (Paris: Société générale d'imprimerie et d'édition, 1933).
4. Frangois Tosquelles, in Frangoi s Fourquet and Lion Murard, Histoires de lapsychiatrie de secteur, 68.
5. Ibid.,72.
6. Jean Oury,ll, donc (Paris: Matrices, 1978), 73
7. 이 그룹에는 장 에임므(Jean Ayme), 로베르 밀리옹(Robert Million), 모리스 드스피노이(Maurice Despinoy), 클로드 퐁생(Claude Poncin), 로저 장틸(Roger Gentil)과 호라스 토루비아(Horace Torrubia) 등이 포함된다.
8. 고등사범학교는 울름가에 있는 유명한 교사양성대학이다. 이후로 ENS라고 표기함.
9. Jean Oury, interview with the author.
10. Ibid.
11. Jean Oury,in Frangois Tosquelles, Histoires de Ia psychiatrie de secteur.
12. Jean Oury (called Odin), Histoires de La Borde, in Recherches 21 (March—April 1976) : 35.
13. Félix Guattari, "La grille," lecture at La Borde training (January 1987), IMEC
archives.
14. Jean Oury, interview with the author.
15. Ibid.
16. Jean Oury, Histoires de La Borde, 26.
17. Ibid., 31.
18. Jean Oury, "Créativité et folie," transcript ofdebate with Félix Guattari (July 1, 1983), IMEC archives.
19. See Jean Oury, Essai sur Ia conation esthétique, Le Pli (2005).
20. Ginette Michaud, "La notion d'institution dans ses rapports avec la théorie moderne des groupes," thesis for diploma ofadvanced studies (DES), 1958, quoted in Histoires de La Borde, 61.
21. Jean-Claude Polack and Danielle Sivadon-Sabourin, La Borde ou le droit à Ia folie (Paris: Calmann-Levy, 1976),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