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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Sep 23. 2019

들뢰즈, 베르그송, 리만

*원문 서지: Widder, Nathan (2019), “The Mathematics of Continuous Multiplicities: The Role of Riemann in Deleuze's Reading of Bergson”, Deleuze &Guattari Studies, Vol. 13, Issue 3, August, 2019, pp. 331-354.  

저자약력: 나탄 위더는 로얄 홀러웨이의 런던 대학 정치학 교수이다. 그는 『차이의 계보학』(일리노이 대학 출판부, 2002), 『시간과 정치학에 대한 성찰들』(펜 스테이트 대학 출판부, 2008), 『들뢰즈 이후의 정치 이론』(컨티눔/블룸스버리, 2012)의 저자이다. 그는 최근 들뢰즈 철학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감각 개념의 역할에 대한 긴 연구서를 쓰고 있다.          


연속적 다양체의 수학

들뢰즈의 베르그송 독해에 있어서 리만의 역할[1]     


나탄 위더

Widder, Nathan(1970~ )

초록

들뢰즈의 베르그송 독해에 있어서 핵심적인 주장은 연장적인 다양체로서의 공간과 강도적 다양체로서의 지속 사이의 베르그송의 구분이다. 이것은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이 1854년에 기하학의 기초에 관한 논문에서 발견한 이산적(discrete) 다양체(manifolds)와 연속적 다양체 간의 구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리만이 베르그송의 구분에 영향을 주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그리고 이산적인 것과 연속적인 것 사이의 구별은 리만의 발명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리만의 영향력에 대한 주장은 들뢰즈가 받아들인 바인데, 여기서 그는 ‘잠재적 수’(virtual number)의 형태에서, 양(quantity)이 여전히 연속적 다양체들과 관련 있다고 논증한다. 이러한 논증은 『지속과 동시성』에서 아인슈타인에 대한 베르그송의 반론을 보완하려는 들뢰즈의 시도를 지지할 뿐 아니라, 헤겔 변증법에 반해 베르그송을 정립하는 것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리만의 용도는 들뢰즈가 헤겔 철학에 반하는 차이의 철학을 전개하려는 보다 광범위한 초기 기획에 베르그송을 기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논문은 리만의 『교수자격 논문』(Habilitationsschrif)에서 이산적인 다양체와 연속적인 다양체 또는 다면체의 역할을 고찰하면서, 리만이 내재적 기하학(intrinsic geometry)의 기초를 수립하기 위해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살필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들뢰즈가 리만의 주제를 자신의 베르그송주의를 위한 믿을만한 원천으로 만들기 위해 재해석하는 방법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이와 같은 논의 방향의 한계를 탐색하면서, 후에 들뢰즈가 어떻게 베르그송으로부터 시작해서 리만의 주제에 관한 가설의 거부에 이르게 되는지도 알게 된다. 즉 이것은 ‘최소 부분들 안의 평면도’(flatness in smallest parts)에 관한 것으로서, 들뢰즈가 리만의 동시대인인 리하르트 데데킨트(Richard Dedekind)로부터 취한 바, 무리수 절단(irrational cut, [데데킨트 절단])이라는 생각을 향하도록 한다. 

키워드: 들뢰즈, 베르그송, 리만, 데데킨트, 수리철학.     



지속에 대한 베르그송의 철학에 관한 들뢰즈의 초기 독해에서 중심적인 것은 연장적 다양체로서의 공간과 강도적 다양체로서의 지속 간에 있는 베르그송의 구분이, 베른하르트 리만의 1854년 『교수자격 논문』에 있는 이산적 다양체와 연속적 다양체 간의 구별의 채택이라는 주장이다.[2] 베르그송은 그의 초기 저작인 『시간과 자유의지』(Time and Free Will)에서 두 가지 유형의 다양체를 정의했는데, 이것은 표면상 들뢰즈의 주장을 지지한다. 첫 번째 것은 연장된 공간 안에서 수적으로 구분되는 이산적 대상을 포함하는 반면, 두 번째 것은 상호침투하는 지속적인 연쇄 패턴이지만, 또한 지속하는 시간을 구성하고 공간 안에서 상징적으로 재현되는 존재 없이는 양화될 수 없는 의식 안의 다질적인 상태들이기도 하다(Bergson 1910: 85–7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리만이 이러한 구분에 영감을 주었다는 어떠한 직접적인 증거도 없다. 베르그송은 그의 저작들에서 리만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들뢰즈가 수학에서 베르그송의 관심사가 그로 하여금 “리만의 일반적 문제들을 잘 깨닫게”(Deleuze 1991a: 39) 해주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나아가 이산성과 연속성 사이의 구분은 그 자체로 특별히 리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복수성(plurality)과 크기(magnitude)로 양을 구분하는 것으로 소급된다. 이것은 가산적(countable)이고 측정가능한 양이다(Aristotle 1933–35: 5.13). 결국 들뢰즈 자신이 베르그송과 리만의 이론을 수용하는 바에 연결하기 위해 리만 논문 결론의 어떤 명쾌한 단락에 집중하면, 들뢰즈의 리만 독해는, 연속적 다양체에 관한 급진적으로 상이한 이해라고 해야만 파악되거나 신뢰할 수 있게 된다.    

 

Bernhard Riemann(1826-1866)

베르그송의 초기 철학은 시간과 공간의 절대적 분리를 주장하며, 따라서 질과 양도 분리한다.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그는 “비연장성과 연장성, 질과 양을 이어주는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Bergson 1910: 70) 그리고 “만약 당신 바깥의 크기가 당신 안에서 결코 강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강도(intensity)는 당신 안에서 결코 크기가 아니다”(225)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물질과 기억』 이후부터 베르그송은 줄곧 그가 애초에 본성상 전반적으로 상이하다고 간주한 개념들 사이의 다양한 화해를 제안한다. 다시 말해 “양과 질 사이의 간격은 긴장(tension)에 대한 고려에 의해 완화된다”(Bergson 1991: 183)는 생각이 들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한편으로, 양적 공간과 질적 지속 사이의 어떤 역전된 관계를 제안하도록 이끄는데, 이때 후자는 전자를 그것의 생성(생의 도약élan vital)이라는 역능의 효과로서 구성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지속의 다양한 수준이나 단계들의 가능성을 제안하게 한다. 이 두 가지 아이디어는 베르그송이 현대 물리학이 연장적 운동들이란 힘들의 미세한 연속적인 진동들로 구성된다고 이해하는 방식으로부터 이끌어낸 것과 동일한 함축을 지닌다(196–201). 이로부터 그는 수의 실재성은 이러한 힘들의 주기에 부착된 것이며 – 자외선의 경우 초당 약 4천억 번의 진동 – 이는 그 총계를 내기 위해 충분히 이완되는 어떤 지속을 가정하는 것이다(204-6).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의 지속과 일반적인 시간을 구별해야 한다”(206). 하지만 들뢰즈가 주목한 바와 같이, 베르그송 사유에서 이러한 전개과정은 그가 지속에 연장성을 재도입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한다. 또한 이것은 베르그송의 심리주의로의 표면적인 역행이라는 문제와 『지속과 동시성』에서 아인슈타인에 반대한 그의 논변에 시간과 공간의 절대적 분리가 들어서는 문제를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둔다(Bergson 1999). 여기서 그는 물리학이란 우주를 수학적 허구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생생한 지속에 속한 한 단계만이 거기[물리학적 우주-역자]에 있다는 주장을 자주 한다(Bergson 1999: 25, 32).      


리만의 영향에 대한 주장은, 들뢰즈가 어떤 비연장적이거나 강도적인 양의 형식이 여전히 질적인 연속 다양체로 지속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주제들 모두에 응답한다. 이것은 『베르그송주의』에서 베르그송이 『지속과 동시성』에서 논증한 바에 대한 들뢰즈의 재평가를 지지한다. 이는 베르그송은 아인슈타인이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연장량을 남용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만 수행된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일원론적 존재론 안에서 차이의 개념을 취급함으로써 베르그송적 지속을 드러내려는 보다 일반적 시도를 떠받치는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의 독해에서 후자의 측면은 지속이 관념적 모순으로 헤겔에 의해 파악된 내적 차이보다 우월한 내적 차이를 포함한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이를 통해 베르그송은 들뢰즈 자신의 반-헤겔주의 철학에 기여하는 것이다.      

Bergson, Henri(1859-1941)

헤겔에 대한 들뢰즈의 초기 비판은, 흄에 대한 그의 독해에 함축되어 있으며, 베르그송에 대한 여러 독해에서 드러나 있다. 이에 따르면 모순이나 대립은 이미 현행화된 항들에 대해서만 적용 가능한 외적 관계이며, 이러한 항들과 그것들이 점유하고 있는 연장성 양자의 구성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둔다는 생각으로 향한다. 대립이라는 외적 관계를 다룬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외적 차이를 구성한다 할지라도 단지 변증법적인 추상물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안에서 어떤 잠재적인 것의 현행화를 보는 것 대신에, 현행적 항들 간의 관계로서  언제나 관점들로부터 구성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Deleuze 2004: 28). 잠재적인 것은 여기서 충분히 실재적이지만 재현에 좌우되는 것은 아닌 구성적 차이들, 다시 말해 베르그송이 사물/사태들의 본성을 형성하는 바, 시간성에 관련된다고 말한 그 차이들의 영역에 속한다. 들뢰즈에게 지속이란 변증법적 대립에 반하여, 어떤 잠재적 차이이며, 그것이 불어넣어진 실체들(entities)에 대해 비연장적이고 내재적이다. 이것은 “사물/사태 자체, 본질에 따른 것이자, 그것이 아닌 바, 모든 것과 차이를 형성하는 것, 다른 말로 내적 차이 안에 있는 것이다”(32). 마찬가지로 들뢰즈가 베르그송의 후기 저작들에 관해 논증하는 바에 따르면, 연장성과 공간성은 현행적 사물/사태들이 구별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드러나는 곳으로 간주된다. 이런 식으로 지속은 어떤 연속적 다양체로 이해되는 바, 리만의 용어에서, 이산적 다양체인 그러한 연장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강도적인 연속적 영역이 연장성을 구성하는 방식을 개념화하는 것은 리만의 기획과 하등 관련이 없다. 그보다 리만은 여러 겹으로 확장된 크기들의 영역(domains of multiply-extended magnitudes)*에 관한 일반적 기초를 윤곽짓기 위해 노력한다. 이 영역의 구성 요소들은 이산적이거나 연속적이거나 둘 중 하나이며, 그는 공간이라는 실재 구조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실재로 이 영역은 오직 하나의 연장된 크기들의 영역이다. 이런 저런 측면에서 그의 기획은 본질적으로 베르그송 – 그리고 들뢰즈 – 의 것과 구분된다. 심지어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기획과 그 자신의 기획 둘 모두에 리만이 기여한 바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 조차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리만의 사유를 그의 독해와 베르그송을 변론하기 위해 채택할 만한 긍정적인 방법으로 생각한다. 들뢰즈가 연속적 다양체 내에서 내재적이고 강도적인 불연속체라는 생각을 통해 그 둘 모두 너머로 방향을 트는 것도 또한 이 베르그송-리만 조합에서 나온 이론적 구성물을 통해서다.    


  


아래에서는 리만의 다양체 개념의 대한 첫 번째 평가가 있으며, 그것은 내적 기하학의 기초를 수립하는 데에 유용하며, 또한 리만의 공간에 관한 논의의 결론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의 전개와 들뢰즈가 베르그송의 독해를 통해 리만을 채택하는 것, 둘 모두를 어떻게 정립하는지를 살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들뢰즈가 리만의 논제를 그의 초기 베르그송주의에 적용하는 방식을 개괄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들뢰즈 사상의] 변화의 한계들을 탐색하고, 베르그송으로부터 후기의 전회가 리만의 분석이 가진 결정적 가정에 대한 거부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필 것이다. 리만의 가정이란 여기서 ‘최소 부분들 안의 평면도’이다. 다음으로 리만의 동시대인인 데데킨트로부터 취한 들뢰즈의 ‘무리수 절단’의 도입을 음미함으로써 결론에 이를 것이다.   


   

I. 리만에 있어서 이산적이고 연속적인 다양체들

리만의 논제는 “공간적 크기량(size in space)들이 파악되는 바, 여러겹으로 확장된 크기들이라는 일반 개념”(der Begriff mehrfach ausgedehnter Grössen)과 관련되며, “양이라는 일반 관념으로부터 나온 여러겹으로 확장된 크기(Grösse)라는 개념을 구축하고자 한다”(Riemann 1929: 411).[3] 그는 그와 같은 양들의 구축을 위한 일반 조건들을 탐구하고자 하며,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여러겹으로 확장된 양이라는 것은 다양한 계량적 관계로 입증가능하며, 이에 따라 공간은 세 겹으로 확장된 크기들 중 오로지 하나의 특정한 사례를 구성한다. 이것의 필연적인 귀결은 기하학의 명제들이 양이라는 일반 개념들로부터 도출되지 않고, 공간이 다른 파악가능한 세 겹으로 확장된 크기들과 구분된다는 그러한 특성들이 경험적으로만 취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411-412).     


경험이란 유클리드 명제들이 관찰가능한 영역에서 높은 타당성을 지시하지만, “관찰의 한계 바깥으로, 즉 측정불가능한 광대함을 향해서 뿐 아니라, 측정불가능한 미세함을 향해서 그것들을 끌어낼 수 있을 만한 가능성”(412)을 결정하는 것은 이와 별개의 문제이다. 이미 살펴보았다시피, 리만은 물리적 공간이 이산적[불연속적]인지 연속적인지에 대해 그것이 자연과학에 속하는 경험적 질문이라고 간주하면서,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다(424-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제는 연장되고, 가분적이며, 양화가능한 크기들이다.      


여러겹으로 확장된 크기들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양에 관한 일반적 관념은 “결정의 다양한 양상들을 허용하는 일반 개념”이라는 전제로 구축된다(Riemann 1929: 412). 이것은 다양체(manifold, Manningfaltigkeit) 개념으로서, 다양한 차원들을 따라 조직화된 형식들 또는 요소들의 영역을 함축한다. 리만은 이것을 단순한 수학적 개념이 아니라 철학적인 것으로 도입한다.[4] 우리가 어떤 확고한 방법에 따라 다양체의 구성요소들 중 하나로부터 다른 것으로 가는지 아닌지에 대해 물어가면, 결정[계산]의 양태는 연속적이거나 이산적인 다양체를 산출하며, 이에 따라 그 다양체는 양화될 것이다. 어떤 이산적 다양체는 셈할 수 있는 요소들의 집합으로부터 나온 복합물이다. 그 요소들은 마치 나무에 달린 이파리거나 농장 안의 동물들과 같다. 또는 몇몇 고대인들이 믿었던 바와 같이, 공간의 경우 원자적 단위들이 구성되어지거나, 러셀(1926)이 언급한 대로 유사한 것들, 즉 잘 정돈된 수학적 점들의 무한성끼리 묶여지기 위해 구성된다면 그렇게 된다. ‘이산적 양에 관한 이론’에서, 수학자들은 “주어진 사물/사태들이 단 하나로만 고려되어야한다는 요청을 단번에 정립할” 수 있다(Riemann 1929: 413). 반대로 어떤 연속적 다양체, 이를테면 ‘감각 대상들의 위치 그리고 색채’(413)와 같은 것은 하나나 그 이상의 연장된 연속체들 – 예컨대 일상적인 공간 개념에서 길이, 폭 그리고 높이 – 을 포함한다. 여기서 양은 점들 간의 거리, 영역 또는 체적을 결정하는 측정치들을 포함하며, 이러한 점들은 연속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나 하나의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의 전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5]     


이산적[불연속적] 다양체 안의 양은 단순히 계산됨으로써 비교되어진다. 이를테면 농장에는 소보다 양이 더 많다와 같은 식이다. 하지만 연속적 다양체에서 측정이나 비교는,  


비교되어지는 크기들의 중첩으로 구성된다. 왜냐하면 하나로 다른 것을 측정하기 위해 몇몇 도구들이 하나의 크기로 이동하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서, 하나는 두 크기들을 비교할 수 있는데, 오로지 그 하나가 다른 것의 부분일 경우에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는 ‘얼마나 많이’라는 질문이 아니라 ‘더나 덜’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만 계산할 수 있게 된다(Riemann 1929: 413).     

    

Eucleides

아주 중요한 문제가 그의 짧은 언급 안에 들어 있다. 규칙적이고 ‘평평한’(flat) 다양체 안에, 어떤 위치로부터 취해진 크기는 나머지 부분을 위한 측정 단위로 기여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일상 공간에서, 센티메터 단위 안에 기입되어진 직선의 모서리가 가장 짧은 거리를 측정하기 위한 어떤 두 점 사이의 직선에 중첩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은 다양체는 유클리드 평면이나 공간이 그러한 것처럼 격자화될 수 있다. 이때 어떤 두 점들 간의 거리는 독립적인 측정 단위가 될 수 있다. 동일한 것이 규칙적이지만 곡선인 다양체에도 적용된다. 그것은 마치 기하학적 구면체의 표면과도 같다. 이 표면의 어떤 부분으로부터 취해진 곡선이 다른 어떤 부분 위에 말끔하게 중첩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방향에서 곡률이 어디서나 똑같기 때문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측정값은 위치에 독립적이며, “그것들[다양체들] 안에 놓인 도형들은 늘어나지 않고 움직여질 수 있다”(420). 하지만 이와 같은 보편적 측정 표준은 어떤 다양체의 차원들이 늘어나거나 불규칙적으로 굴곡지는 경우에는 부재할 것이다. 완전구체의 표면을 생각하지 않고 지구 표면과 같은 거칠고 불규칙적인 표면을 가정해 보자. 거기서는 어떤 직선이나 곡선도 단순하게 한 부분에서 취해져서 다른 부분으로 겹쳐질 수 없다. 왜냐하면 두 크기들의 곡률이 필연적으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측정값은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가능한데, 그것은 곡률이나 늘어남이 일정한 지역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 리만이 계속 가정하다시피 – 충분히 작은 크기를 가진 선들이 어떤 다양체의 부분 위에 중첩가능해지는 선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달려 있다. 하지만 심지어 이러한 균일성(uniformity, 획일성)의 부재 안에서도, 다른 것에 대한 측정치로서 하나의 크기를 이동시킬 방법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개의 크기들은, 만약 하나가 이미 다른 것의 부분이라면 오직 비교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며, 보다 작은 것의 다양(a multiple)이 되기 위해 보다 큰 것을 허용하는 다양체 안에서 어떤 일관성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개의 크기들의 계산[규정]은 오직 ‘얼마나 많이’에 의해서 어떤 특성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나 덜’의 측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경우들의 탐구에서, 리만은 다음과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 “이 경우들은 측정값에 독립적인 양이라는 이론 중 어떤 일반적 부분을 형성하며, 크기들이 위치에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단위로 표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단지 다양체 안의 영역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으로 생각된다”(413). 그러나 문제를 더 밀어붙이기 보다, 그는 그가 오직 이러한 사유로부터 여러겹으로 확장된 크기들의 구축이라는 것을 어떻게 파악할지, 그리고 그것들 안에서 위치의 결정으로부터 양적인 결정[측정]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언급한다(413). 이런 방식으로 리만은 스스로를 계측이 가능한 다양체의 경우로 한정한다.      


리만은 처음에 규칙적 다양체나 다양체 영역 안에서 계측을 탐구해 간다. 그와 같은 측정값들은 “다양체가 위치로부터 독립적일 것을 요청한다”(Riemann 1929: 415). 따라서 리만은 “선들의 길이는 그들의 조건에서 독립적이며, 그러므로 모든 선은 모든 다른 것에 의해 측정가능해진다”(415-16)고 말한다. 이러한 논의들은 ‘무한하게 작은’ 수준, 즉 ‘최소 부분들 안의 평면도’를 담고 있는 그러한 수준을 가정하는데에 이른다(419). 다른 말로 해서, 무한소 미분의 수준에서, 점들 간의 거리는 직선에 의해 주어지며, 이렇게 해서 그것들은 한 점으로부터 다른 점으로, 각각의 다양체의 차원들을 따르는 거리들 제곱의 총합의 제곱근과 같다. 이것은 유클리드 평면에서 직선의 길이가 그것의 X-와 Y- 길이 제곱의 총합의 제곱근인 것과 같으며, 유클리드 공간에서 그것의 X-, Y- 그리고 Z- 길이의 그것과도 같다.[6] 그러므로 비록 보다 큰 범위에서, 그것이 비-유클리드적이라 해도, 최소 부분의 평면도는 모든 다양체가 무한소미분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으로서 일관적이다. 만약 그와 관련하여 규칙적 다양체에서 각각의 점이나 영역이 그 차원들 각각에 할당된 수들에 의해 정의된다면 - 그때 유클리드 공간에서 한 점이 X, Y 그리고 Z의 조합로 이루어진 수직선들에 의해 결정되고, 이런 식으로 모든 가능한 위치 관계들, 즉 측정치의 관계들이 연속적이라도 어떤 이산적 다양체를 구성하게 된다(423) -  거리, 면적, 체적의 측정치 등등은 적분 과정을 따라 미분소들의 무한한 총합으로 주어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공식들은 다양체나 고려되는 영역적 존재가 평평하다는 것을 가정하며, 이는 그것이 곡률 0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게다가 만약 다양체나 영역이 굴곡지거나 늘어나게 되면 측정이 요청된다. 이것은 “최소 부분들 안의 평면도가 가정되는”(422) 한, 미분소들의 적분을 통한 측정값에 상응하게 된다. 양의 곡률을 가진 특정 다양체에 의해, 단편들이 묶이지 않은 채 그것들 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 – 물체들이 공간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방식 – 이것은 마치 완전구체의 표면에 투사된 어떤 기하학적 도형이, 그것이 표면 위 어디를 움직여 가든 간에, 원래 모양을 유지하게 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곡률 0인 다양체에서만 운동의 방향은 마찬가지로 위치에 독립적이다(421-2).    

 

리만은 그래서 특정한 삼차원 다양체로서의 공간에 대한 그의 분석이 가진 함축을 사유하는데, 비록 거기에 측정에 있어서의 지속성이 존재한다 해도, 선, 물체 그리고 그것들의 방향이 장소, 무한소 수준에서의 평면도 그리고 국소적인 불연속성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가정하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가정은 관찰가능한 공간을 허용하지만, 관찰가능성의 최대치와 최소치 너머로 그것의 확장은 불확실하다. 최대치 너머로의 확장을 생각할 때, 리만은 측정불가능할 정도로 큰 공간은 무제한적인 확장성을 가지지만, 필연적으로 무한한 크기는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위치로부터 물체들의 관찰된 독립성은 공간이, 비록 곡률 0이라 해도, 불변 곡률을 가지는 것이 틀림없음을 가리키지만 만약 공간이 심지어 가장 미세한 양의 곡률을 가진다면, 우주는 그 스스로에 대해 폐색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의 크기는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Riemann 1929: 423). 그러나 최소치 너머에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 다시 말해 이것은 “현미경이 허용하는 공간적으로 작은”(424) 것 너머,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현상으로서, 거기에서는 해석학적 수학에 의해 주어지는 정확성만이 허용된다 – 상황은 더욱 더 문제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위치로부터 독립적인 관찰가능한 물체들이 오직 현상이라면, 그때 “우리는 큰 것들 안에 있는 것들로부터 무한하게 작은 것들 안에서의 계측 관계(metric relation)를 계산할 수 없”(424)기 때문이다. 관찰가능한 최소치를 너머, 실재 공간은 임의의 값을 가진 불규칙적인 곡률을 함축할 것이며, 심지어 그 관찰가능하고 측정가능한 수준에서의 전반적인 곡률이 0이거나 그것에 근접한 것으로 남는 동안에도 그러하다(424). 게다가 “선적 요소는 2차 방정식의 미분적 표현에 속한 제곱근에 의해서도 재현가능하지 않은데, 그것은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424). 다시 말해 최소 부분들 안의 실재적 공간의 평면도에 포함되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고, 이 경우에 무한소 수준에서 측정의 일관성(consistency)은 유지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현상에 기반한 공간적 측정치에 해당되는 경험적 개념들(notions), 즉 고정된 물체와 광선의 개념들은, 무한하게 작은 것에 적용될 때 그 타당성을 잃어 버린다. 따라서 무한정하게(indefinitely) 작은 것 안에 있는 크기의 공간적 관계들은 기하학의 공준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는 현상에 관한 더 단순한 설명을 받아들이자 마자, 정말 이러한 가설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424).       

그러나 이것은 관찰가능한 영역에 포함될 법한 측정치들이면 무엇이든지 간에 적분 과정에 기초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함축한다. 그리고 다른 방면에서 이 실재성에 대한 사유가 요구될 것이다.      


따라서 최소 부분들 안의 평면도가 허용하지 않는 가능성, 즉 리만이 더나 덜이라는 계측 관계 뿐 아니라 얼마나 많이라는 계측관계가 가능한 다양체를 검토하기 위해 보류해 놓았었던 어떤 암시적인 것은 “공간적 크기량의 관계들의 궁극적인 기초와 관련된 질문”으로 이끈다(Riemann 1929: 424). 이런 측면에서,   

  

이산적 다양체 안에서 계측 관계의 원리가 그 다양체의 개념 안에 함축되는 반면, 그것은 연속적 다양체의 경우에 속하는 다른 어딘가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 위에서 작용하는 힘들을 결합하면서, 어떤 공간의 기초작용을 형성하는 현행적 사물/사태가 이산적 다양체를 구성해야 하든, 또는 계측 관계의 기초가 그러한 현행성 바깥을 탐색해야 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424–5).          


만약 공간이 정말로 이산적 요소들로 구성된다면, 모든 측정치들은 계산의 대상으로 환원될 것이고, 따라서 공간의 계측 관계 원리는 그것의 연장 관념 바로 그것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만약 공간이 실재 연속적이라면, 이 원리는 바깥으로부터 부여되어지고, 공간을 묶어내는 힘들과 관련된다. 후자는 임의적이지만 표준적인 측정 단위들로의 나눔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힘들을 초래할 수 있다. 즉 이러한 힘들은 어떤 연속적이지만 규칙적인 형식으로 공간을 구성하며, 이로부터 유클리드의 공준들과 일치할 것이다. 또는 모든 측정 단위를 국부적으로 폭넓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리만이 관찰로부터 도출했던 입장과는 반대로, 유클리드적 가설을 유지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은 리만의 분석을 공간을  위한 계측(metric) 원리가 그것이 점유하는 바, 물체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견지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때 각각의 물체들이 가진 중력은 공간을 휘게하고 그 결과 그 운동의 영역 안에서 계측 원리(metrical principle)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대답이 오직 거시천문학적 실재에만 적용되며, 리만으로 하여금 그의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도록 촉발하는 무한소미분적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물론 아인슈타인이 그의 발견에서 이 방면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결코 일반상대성 이론과 이산적 에너지 상태, 즉 비국소성(non-locality)과 불확정성에 속하는 양자 세계의 법칙을 화해시킬 수 없었다는 것도 살펴 봐야 한다.  



II. 리만을 통한 들뢰즈의 베르그송 독해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리만에 연결시킬 때, 그는 이산적 다양체와 연속적 다양체에 있어서 계측 원리에 관한 리만의 결론을 많이 참조한다.      


리만은 [...] 이산적 다양체와 연속적 다양체를 구별한다. 전자는 그것들 자체에 계측 원리를 함축하고 있다(그 부분들 중 하나의 측정치가 그것이 포함하는 요소들의 수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후자는, 비록 그 안에서 펼쳐지는 현상에서만 또는 그 안에서 작동하는 힘들 안에서만이라 해도, 다른 것 안에서 계측 원리를 발견한다. (Deleuze 1991a: 39).       

하지만 들뢰즈는 베르그송이 “연속적 다양체가 그에게 본질적으로 지속의 영역”과 질의 영역에도 마찬가지로 “속하는 것으로 추정하는”(40) 방식에 따라 “근본적으로 리만적인 구분의 방향을 변경했다”(39-40)고 생각한다. 베르그송은 끊임없이 그가 이산적 점들의 실재적 무한성을 함축하는 것으로서의 공간에 관한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개념 둘 모두를 고려한다는 점을 표명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고려는 어떤 순간들의 무한성으로서의 시간이라는 특정화된 잘못된 개념화를 가동시키는 점까지 감안하게 된다.[7] 여기서 그는 가산적인 양과 측정가능한 양을 분명 혼동하는 듯한 진술을 한다. 이를테면 “저장하는 것(container)과 저장되는 것(conteined) 각각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오름차순의 수를 정렬할 바로 그러한 가능성”(Bergson 1910: 2)이나 “수에 관한 모든 명확한 생각은 공간 안에서의 시각적 이미지를 함축한다. 그리고 이산적 다양체를 구성하기 위해 진행되는 단위들에 대한 직접적 연구는 수 자체의 탐구로서 이러한 지점과 동일한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79)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언급들은 만약 이산적 다양체 내에서 측정의 원리가 그것의 확장을 구성하는 수적 단위들 안에 정초되어 있는 리만의 주제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면, 불합리하게 된다. 더 나아가 베르그송은, 이미 보았다시피,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양적 공간과 질적 지속의 절대적 구분을 주장하며, 심지어 양과 질에 관련된 후기의 언급들에서도, 양에 대한 질의 절대적 우선성을 유지함으로써만 그렇게 한다.[8] 하지만 공간이 리만적인 의미에서 어떤 이산적 다양체이자 연속적 다양체로서의 지속 둘 모두라고 가정함으로써, 들뢰즈는 비록 베르그송이 연속적 다양체를 질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을지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양적인 종류의 어떤 것이 속해 있게 된다. 리만과의 연결지점을 가정함으로써,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주장한다. “베르그송에게, 지속은 단순히 불가분한 것만이 아니라, 측정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것은 본성상의 변화에 의해서만 나누어지는 것이자, 각각의 분리의 계기마다 그것의 계측 원리를 확장함으로써만 측정에 노출된다”(Deleuze 1991a: 40). 이것은 들뢰즈로 하여금, 베르그송에 따라 “지속에 알맞은 다양체는 [...] 과학에 필적할 만한 ‘정확성’을 가진다”(40)라는 주장을 하게끔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들뢰즈는 『지속과 동시성』에 등장하는 후기 베르그송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논박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연속적 다양체 개념 – 이것은 리만과는 반대로 연장적인 것이 아니라 강도적인 것이며, 현행적인 것이라기보다 잠재적이다. 또한 이것은 공간보다 지속에 관련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산적 다양체를 구성한다 - 이 여전히 직접적으로 리만에 빚지고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들뢰즈는 아인슈타인과 베르그송 사이의 쟁점이 연속적 다양체로서의 시간의 본성에 있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비판이 그의 리만적 영향권에서 나온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그 비판은 아인슈타인이 시간을 오직 이산적 다양체에 적합한 방식으로 연장되고 수적인 것으로 잘못 해석한다는 것이다(78-89).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지속은 여전히 계측 원리를 포함한다.[9]   

  

연속적 다양체로서의 지속은 이때 비연장적이며, 잠재적이고, 구성적이며, 질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성상의 변화 없이는 나누어지지 않지만, 각각의 분리에서 어떤 새로운 계측 원리를 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지속이 내적 차이인 바이며, 이에 따라 사물/사태는 그것이 아닌 모든 것과 차이나게 된다. 한 사물/사태는 그것이 참여하는 과거와 기억 덕분에 특유하다. 즉 질적으로 구별되는 상태들의 연속적인 기록과 종합 덕분에 그러하다. 비록 본래 심리학적인 주제라 할지라도, 들뢰즈는 『물질과 기억』으로부터 계속해서 지속이, 그것 없이는 과거와 기억이 살아있을 수도 없고, 현재의 경과가 불가능한 어떤 존재론적 기록이 된다고 주장한다. 현재는 오로지 그것이 존재하는 바로부터 차이를 만들어낼 때에만 지나갈 수 있지만, 만약 그것이 이미 그 자체로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도착하는 미래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를 구성할 수 없다. 이러한 난맥상들은, 만약 현재가 현행적으로 현재(actually present)인 것과 같이, 동시에 잠재적으로 과거(virtually past)인 경우에만 해결될 수 있다(Deleuze 1991a: 59–60). 모든 현재는, 그 안에 전체 과거를 담고 있는 방식으로 또한 잠재적으로 과거이다. 하나의 현재에 속한 잠재적 과거는 이어지는 현재의 잠재적 과거 안에 어떤 층(a layer)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과거는 무한한 층들로 구성되는 바, 이것은 번갈아가며 현행적 현재에 대해 공명하고 반복한다. 이것은 베르그송이 『물질과 기억』에서 원뿔 이미지로 표사한 유명한 부분과 같다(Bergson 1991: 152). 각각의 현재는 그것 전에 오는 모든 것 때문에, 존재하는 바 그것이 된다. 그리고 현재는 그것 안으로 과거 전체를 응축해 넣는 바, 이러한 잠재적 과거에 의해 어떤 열린 미래로 밀려 들어가게 된다. 이는 과거를 현행화하는 것이지만, 차이의 형태, 즉 창조적 진화의 형태로만 그러하다.     


잠재적인 내적 차이는 따라서, 현행성을 구성하는데, 이는 연장되고, 불연속적이며 양적인 것에 반해, 차이 나고 색다른 것으로 특성화되어 남는다. 현행화는 이러한 현행성의 두 가지 측면 모두에 응답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창조적 지속에 반하는 물질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특별히 『창조적 진화』로부터 논지를 이끌어내는데, 여기서 베르그송은 공기중으로 뻗어나가는 물줄기의 이미지를 통해 지속과 물질 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와 더불어 들뢰즈는 현행화된 물질과 연결된 응축을 통해 형성되는 물방울들로도 설명한다. 이때 물질은 잠재적 증기에 반하여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며 되떨어진다. 심지어 후자의 힘이 둘 모두를 조정하도록 구성하고 그 자체로 위쪽으로 향해 간다 해도 그러하다(Bergson 1998: 247). 이런 방식으로 지속과 물질은 역진적으로 관계되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어진다(201). 들뢰즈에게 지속이란 내적 차이다. 반면 물질은, 그것이 그 자체 바깥의 어떤 차이가 되기까지, 이완되고 연장되는 이 동일한 차이이다. 이에 따라 물질은 이산적 다양체의 일부가 된다. 이는 들뢰즈가  잠재적 과거와 현행적 현재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이완과 응축을 활용하는 바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현행적 현재는 그것이 최고로 응축될 때 잠재적인 것이지만, 여기서 현행적 물질은 그것이 가장 이완되었을 때 잠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이한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의 현행화(actualisation)에서, 현재는 잠재적 과거의 가장 응축된 형식으로서, 그것이 창조적 진화를 향해 터져 나가는 그 지점에 응축된다. 반면 그것의 현행성(actuality)에서, 즉 물질과 공간에서, 그것은 외화된 지속과 차이이자, 다른 현행적 실체들 뿐 아니라 지속 자신의 생의 약동(élan vital)과도 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현행성은, 오직 현행화의 응축된 힘이 망각될 때에만, 단지 연장성 안에 놓인 실체들의 이산적 세계로 보여질 것이다. 들뢰즈에게, 응축과 이완과 관련하여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을 관계짓는 이러한 방식은 외견상으로 화해 불가능한 이원론으로 비춰지는데, 이는 베르그송이 본성적 차이와 정도의 차이, 질과 양, 지각과 회상(recollection), 과거와 현재, 기억과 물질 간에 수립한 것이기도 하다. 이원론은 정도의 차이로부터 이러한 것들을 분리함으로써 본성적 차이를 규정짓는 방법을 성찰하며, 절합(articulation)이나 경향들에 따라 주어진 것들을 분할한다(Deleuze 1991a: 44–5; 2004: 33–4를 보라). 하지만 본성적 차이와 정도의 차이 간에 있는 이러한 외적인 본성적 차이 – 즉 그 자체로 내적 차이인 것과 공간 속으로 외화된 내적 차이 – 는 궁극적으로 다른 것의 가능성의 조건에 따라 규정되어지는 하나의 경향으로서 일원론이다. “만약 [경향으로의] 분할에 특권화된 절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절반이 그 자체로 다른 것의 비밀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Deleuze 2004: 27). 따라서 최초 이원론의 두 면들은 지속적인 것으로 드러나며, 각각은 상대적인 응축과 이완과 관련하여 그 외적 모순과 구별된다. 이에 따라 현행적 경향들의 이원론은 그것의 잠재적 통일성이라는 수준에서 일원론이 된다(Deleuze 1991a: 93).       


응축과 이완은 마찬가지로 인간 의식 – 베르그송이 『물질과 기억』에서 특별하게 취급하지만, 『지속과 동시성』에서는 기각하는 주제 - 에 의해 생생해지는 단계 아래와 위에서 생생한 지속의 질서들을 차이화한다. 이때 들뢰즈는 이러한 지속에 속한 차이의 리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시간에 속한다고 주장한다(Deleuze 1991a: 76–8, 82–5). 하지만 들뢰즈가 인식한 바에 따르면, 베르그송이 비판하는 모든 것은 이제 그의 철학의 핵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응축과 이완의 차이가 베르그송이 질적인 내적 차이를 해석하기 위해 사용되는 추상적이면서 흠결 있는 이산적 다양체들이라는 바로 그런 종류에 속하는 양적인 정도의 차이 – 즉 강도적 크기 -  정도로만 보인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이것은 그것의 대체로 기능하는 잠재적 차이 안에 구체화된다(75-6). 들뢰즈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차이의 정도’에 해당되는 응축과  팽창이라는 지속의 수준들을 수용함으로써 응답한다(93). 그리고 잠재적인 것에 특화된 어떤 새로운 양의 개념을 도입한다. 여기서 베르그송의 연속적 다양체는, 특성상 리만적인 것이 되며,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세우는 힘 안에서 그것들의 계측 원리들을 발견한다. 이에 따라 들뢰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도출한다. “베르그송의 보다 흥미로운 생각들 중 하나는 차이 자체가 어떤 수, 즉 잠재적 수, 순번이 매겨진 수(numbering number, 서수)를 가진다는 것이다”(Deleuze 2004: 34). 또한 베르그송에 따르면 “질적으로 폐쇄된 수, 즉 지속 안에 포함된 강도들이 존재한다”(Deleuze 1991a: 92). 연장적이고 이산적인 크기를 포함하고, 그것들 간의 수적 차이들로 고정된 정도의 차이와는 달리, 잠재적 수는 차이의 정도들을 연합하는 바, 잠재적인 것이 창조적으로 현행화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만들어지는 각각의 차이로 변화할 것이다. 따라서 잠재적인 강도적 양은, 고정된 측정 기준이 없이 두 크기들이, 오직 하나가 다른 것의 부분이 될 때에만 비교될 수 있는, 그리고 심지어 오직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더나 덜’과 관련하여서만 비교될 수 있는 리만의 조건에 부합할 것이다.[10] 요컨대 이 조건들은 크기들이 위치에 독립적이고, 이러한 다양체를 함께 묶고 현행화하는 힘들에 의지하지 않는 장소이다. 지속은 즉각적으로 그 자신과 차이날 때, 이와 같은 상황조건을 표현하며, 연속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의 종합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을 현행화하는 생의 도약과 더불어 변화한다. 잠재적 양은 이러한 현행화와 상호관련된 그 경향들 또는 차이화의 힘들을 가리킨다.   

    


III. 베르그송과 리만 너머로 가기: ‘무리수 절단

만약 지속이 연속적 다양체처럼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더나 덜을 포함하는 강도적 양을 야기한다면, 그때 리만에 의해 제안된 계(系, corollary)가 도출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어떤 상황조건, 즉 최소부분들 안의 평면도가 가정될 수 없는 지점이며, 따라서 “계측적 결정요인들로부터 독립적”이며 “어떤 단위에 의해 표현되어질 수 [...] 없는” 영역이다(Riemann 1929: 413). 그와 같은 양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순번이 매겨진 수’라는 특별한 형식에 의해 특성화되는 ‘유목 과학’ 그리고 ‘특성의 기하학’이라고 부른 것에 일치한다(Deleuze and Guattari 1987: 361–74; 387–94). 또한 연구자들이 리만의 패치워크 공간(patchwork space)으로 이해한 것은 일반적으로 들뢰즈의 후기 저작들에서 전개된다(Calamari 2015: 77–83; Duffy 2013: 107–15; Plotnitsky 2009: 202–7를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가 베르그송적 지속을 충분하게 발견함으로써, 이러한 양적 형식에 대해 탁월한 진술을 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여기서 관건적인 것은 강도의 본성과 그 원천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거기 적합한 개념화를 부여하기 위해 취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지한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베르그송의 강도량에 대한 비판이 “의문스러워 보인다”고 말한 이유는 베르그송이 “이미 질을 강도량에 속하는 모든 것에 속성화”했기 때문이었다(Deleuze 1994: 239). 이때 그는 재빨리 차이의 정도를 베르그송의 입장을 회복시키는 방법으로 제안하며, 이것이 정말로 질과 연장성 모두를 촉진하는 지속의 종합 안에서 강도의 차이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들뢰즈가 제안하는 강도에 대한 베르그송적 사유는 그 자신의 보다 넓은 용어들에 기대어 제한된다. 베르그송의 그 개념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기억의 종합’(239)인 것이고, 그에 따라 들뢰즈가 시간과 공간 둘 모두의 구성에 대한 설명을 위해 도입한 세 가지 [시간의] 종합 중 두 번째만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종합은 강도를 펼쳐내는(explicate) 연장성 안에서 강도의 함축(접힘, implication)과 관련되며, 어떻게 이러한 함축이 강도량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이는 연장성을 기초짓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들뢰즈는 강도가 우선은 스스로 함축되어진다고 주장하며, 이에 따라 그것은 “자체 안에서 불균등성을 포함”(232)함으로써 어떤 “보편적인 근거와해”(230)를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강도는 더욱이 개체화의 전-수량적이고 전-질적인 힘과 잠재적인 것의 현행화를 결정하는 극화(dramitisation)와 연결되어진다.[11] 이것은 세 측면에서 정의된다. 즉 “함축하는(enveloping) 차이, 함축되는(enveloped) 거리, 그리고 본성의 변화를 위해 물질적인 것을 공급하는 본성적인 ‘잔여’의 실존을 증명하는 자체 안의 불균등성[즉 어떤 본성상의 차이]”(238). 내 생각에 들뢰즈는 결코 베르그송을 이 강도 자체와 결부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 강도를 끊임없이 다른 철학자, 이를테면 니체와 같은 철학자에게로, 지속의 근거를 와해하는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의 부분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틀어 놓는다.      

  

들뢰즈의 베르그송-리만 구조와 관련해서, 마지막 장에서 나는 ‘무리수 절단’을 ‘최소 부분에서의 평면도’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도전으로 고려할 것이며, 따라서 들뢰즈가 베르그송적 지속으로부터 니체의 영원회귀로 이동해 가는 경로와 관련되는 수학적인 측면을 제공할 것이다. 무리수 절단은 『시네마 II』(1989)에서 분명하게 전개되지만, 마찬가지로 『주름』(1993)에서는 암시적으로 발견된다. 그것은 어떤 맹아적인 것이지만, 매우 다른 용법으로 들뢰즈가 ‘데데킨트 절단’을 언급할 때 『차이와 반복』(1994: 172)에서도 보인다. 리하르트 데데킨트는 그러한 아이디어의 저자이며, 동시에 베를린 대학에서 리만이 친구이자, 리만의 『교수자격 논문』의 사후 출판을 책임진 사람이었다.      


데데킨트의 주제는 연속성과 그것에 관한 수학적 사유를 완결시키는데 필요한 무리수 개념과 연관된다. 무리수는 무한소미분 분석을 위해 결정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리만 자신의 주제에도 기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연속성에 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주어지지 않는다”(Dedekind 1963: 2). 게다가 무리수의 도입은 “직접적으로 연장적 크기들 – 신중하게 정의하자면, 이것 자체는 아무 곳에도 없다 - 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계급의 다른 것에 의해 그와 같은 크기를 측정한 결과로서 수를 설명한다”(9–10). 이에 반해 데데킨트는 연속체와 무리수 둘 다 “순수하게 산술적인 방식으로 수립”(2)되어질 것을 요청한다. 이에 따라 “산술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나온다”(10).     


유리수를 산술적 도구를 사용하여 도출해 낸다는 것은 데데킨트에 따르면 매우 간단하다. 그는 “어떤 필연적인 것으로서 산술적인 모든 것, 또는 적어도 자연적인 것은 가장 단순한 산술적 조작, 즉 셈하는 것의 결과”라고 간주한다(Dedekind 1963: 4). 비록 빼기와 나누기 각각에서 발생하는 한계들이 음수와 분수에 상호관련적인 발명이라는 형식 안에서 “새로운 창조적 작용”(4)을 요청한다 해도, 궁극적으로 “모든 유리수 체계는 [...] 사칙연산에서 직접 도출되는  R�(4-5)12이라는 공식에 의해 표시된다.”(4) 이 체계의 완결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0으로 나누는 것을 제외하고, 사칙연산은 어떤 두 개의 유리수를 사용하여 수행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어떤 유리수를 도출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확증된다(5). 그러나 체계는 나아가 “두 대립하는 면들 위에 무한성으로 확장하는 하나의 차원을 포함하는 정렬된 영역”을 형성한다는 특성에 의해 규정되어진다.(5) 이것은 각각의 유리수가 전체 체계를 두 개의 서로 배제하는 계급들로 분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 하나는 주어진 숫자보다 더 적은 모든 유리수들을 포함하며, 다른 것은 그것보다 더 큰 유리수 전체를 포함하는데, 수 자체는 첫 번째 계급의 가장 높은 수나 두 번째 계급의 가장 낮은 수 중 하나로 자유롭게 분배될 수 있다(6). 나누기에서처럼 각각은 하나의 수에만 조응하며, 어떤 두 개의 구분되는 수들에 의해 구성된 계급들처럼, 서로 간에 어떤 접근성이 있음에도 동일할 수는 없다.  

     

Dedekind(1831-1916)

데데킨트는 따라서 유리수 체계를 직선의 점들과 비교하면서, 그들 간의 유사성이, “우리가 직선에 따라 어떤 한정적인 기원이나 제로 포인트 0을 선택하고, 선분들의 측정을 위해 길이의 한정적 단위들을 선택할 때, 실재적인 상응관계를 형성하게 된다”(Dedekind 1963: 7–8)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장적 크기와 크기들의 중첩을 통한 측정이 도입되지만, 기하학적 이미지는 수 체계의 산술적 연역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리수의 도입을 위한 경우는 아니다. 어떤 두 유리수들 사이에는 무한하게 많은 다른 유리수들이 놓여 있다는 사실(6)은 유리수 체계와 연속적인 직선의 완전한 상응관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각형의 대각선의 측정불가능성에 대한 고대 그리스의 발견에 따르면, 그 대각선의 끝점에서 수평선 위로 그려진 어떤 호(arc)는 그로부터 수직선을 확장하면, 사각형의 밑변을 측정하게 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유리수와도 상응하지 않는 점에서 그 직선과 교차할 것이다. 이것은 “직선 L에는 무한하게 많은 점들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유리수와도 상응하지 않는다”(8)라는 것을 증명하며, 이는 “직선 L이 수-개체 안의 유리수인 영역 R보다 무한하게 더 풍부한 점-개체들이다”(9)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수들의 영역을 구성하는 것이 필연적이며, 이때 이 수는 “동일한 완결성, 또는 우리가 단번에 말할 수 있는 바, 직선을 통해 동일한 연속성을 획득할 것이다”(9). 이것이 “실수 전체에 해당되는 ℜ체계”이다(19). 이 체계는 모든 유리수와 무리수들을 포함한다. 기하학적 사유가 이러한 연장을 위해 ‘즉각적인 계기’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그 자체로 “수의 과학인 산술 안으로 이러한 낯선 관념을 도입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10)가 아니다. 따라서 데데킨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유리수 단독으로 무리수를 정의하기 위해 전적으로 탐구에 매진해야 한다”(10).     

‘무리’를 정의하는 이 맥락은 데데킨트로 하여금 수 체계 안에 ‘절단’(Schnitt, Dedekind 1963: 13)에 관한 생각을 도입하도록 이끌었다. 이것은 각각의 유리수가 그 체계 R을 두 가지 구별되는 무한한 계급값으로 분리한다는 생각에 의해 구상되었는데, 그 분리하는 수는 둘 중 어느 한쪽의 계급에 할당할 수 있지만, 중요하게도 그 특성은 유리수 자체를 정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기초적인 산술 과정들로부터 이끌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단 유리수와 무리수 양자에 적용하는 절단이라는 특성을 도입한다 해도, 그것은 전자의 연장성으로 후자를 정의하기 위한 토대인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실수 체계가 증명해야 하는 연속성을 정의하는데 사용된다. 데데킨트는 이것을 총괄하여, 다시 기하학적 참조점을 활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만약 직선의 모든 점들이 첫 번째 계급의 모든 점들이 두 번째 계급값의 모든 점들의 왼쪽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이, [수의] 두 계급값에 맞아 떨어진다면, 그때 거기에는 모든 점들을 두 계급으로 나누는 법을 생산하는 오직 하나의 점이 실존할 것이다.”(11) 각각의 유리수는 두 절단을 작동시키는 것 같다. 하나는 그것이 창조하는 보다 낮은 계급값에서 가장 높은 것에 있으며, 다른 것은 다른 계급의 수에 가장 낮은 것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두 절단은 “오직 비본질적인 차이”(17)이다. 반대로 두 구별되는 숫자는, 그것들이 유리수이건 무리수이건, “오직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차이나는 절단에 상응할 때에만, 언제나 차이 또는 불균등성”(15)으로 고려된다. 이것은 절단하는 수를 부가하면서, 거기에 적어도 절단을 위한 보다 높은 계급에 속하는 하나의 다른 수가 존재하는 바, 이는 하나의 수와 절단을 위한 보다 낮은 계급값이 다른 것에 의해 만들었던 것이다(17).     



데데킨트는 증명을 이어가면서 “유리수들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 무한하게 많은 절단들이 존재한다”(13)고 한다. 이러한 절단들에 상응하는 수들은, 그 제곱근이 정수가 아닌 양의 정수 D에 관한 정리를 통해 규정된다. 이에 따라 근은 두 개의 잇따르는 정수, λ와 λ+1 사이에 놓이게 된다. 이것의 제곱은 제각기 D보다 더 크거나 작을 것이다. D의 근은, 그 제곱이 D보다 큰 양의 유리수 전체가 D의 제곱근 보다 더 클 것이라는 방식으로 수직선을 나눌 것이다. 반면 다른 모든 유리수는 그것들이 양이든 음이든, 함축적으로 근보다 더 적다. 하지만 간접 증명에 따라 증명됨으로써, 근 자체는 어떤 유리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13–15).[13] 이 무리수는 데데킨트가 주장하길, 유리수 ‘사이’를 매우며, 이제 그것들 사이를 절단한다고 일컬어지는 무리수 보다 더 적거나 큰 유리수의 계급은 이 무리수에 근접하지만, 결코 도달하지는 못한다. 이런 방식으로 무리수는 유리수의 수렴 계열의 극한으로서 부여되지만, 이것은 무리수 자체가 다른 계급에 할당되지 못할 것이므로, 연속성의 이념을 위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유리수의 특유한 자리는 실수 체계가 차원과 연속성 둘 모두에서 정렬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며, 이를 통해 필연적으로 어떤 무리수와 어떤 다른 유리수 혹은 무리수 사이에 놓인 유리수의 무한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뒤따른다. 그래서 유리수 또는 무리수 두 수 중 어떤 것도 동일한 두 계급 안으로 실수 체계를 절단하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모든 실수는 그 절단을 만들어내는 계급들 중 하나에 자유롭게 할당될 수 있을 것이다(20-1)[14]. 유리수에 관한 산술 연산은 분명한 결론을 도출하며, 마찬가지로 실수에 관한 산술 연산도 그러한데, 그것이 절단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두 수의 합은 다른 한정적인 절단이 될 것인 바, 그것이 유리수든 무리수든 마찬가지다(21-4). 나아가 실수 체계의 연속성은, 최종적인 극한값의 존재를 확증함으로써 무한소미분적인 분석의 발견들을 보증하며, 그래서 예를 들어, U2 계급에 속한 최소값인 결정적인 값 a는 ℜ의 절단에 의해 형성되며, x의 값이 그것에 도달함이 없는 더 낮은 계급 U1의 무한한 값을 지나감으로써 접근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24-7).     


다른 방식을 주장할 수 있음에도, 데데킨트가 연속성과 실수의 정렬적 성격을 위해 엄격한 산술적 증명을 계속 제안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무리수는 사칙연산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지만 대신에 절단에 의해 정의되며, 오직 그렇게 정의될 때에만, 그것으로 연산이 수행될 수 있고 이에 따라 수들이 그러한 연산으로부터 도출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결정적인 결론들이 따라나오게 된다. 기하학적인 버팀목은 바로 이 절단의 개념 안에서 존속하며, 이는 수직선을 자르는 사각형의 대각선이라는 도형으로부터 도출될 뿐 아니라, 모든 언어 안에서 그와 관련하여 어떤 형상들을 차용할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데데킨트의 경우, 어떤 단순한 가설로 남아 있는 바, 무리수는 실재로 수라는 것인데, 이것은 수에 의해 수행되는 연산이 마찬가지로 무리수에 대해서도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기하학적 이미지와 연관되는데, 이때 이 이미지는 새로운 수가 측정불가능한 길이에 상응하는 직선 위의 한 점이 어디에 있든 간에 요청되는 것으로 보인다.[15] 이러한 가설이 없으면, 연속체 안에서 무리수들의 정렬된 장소는 직선의 정확하고 정렬된 절단의 이미지로만 남게 되는데, 이는 정렬된 유리수들이 그것에 접근하지만 결코 도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반대로 각각의 무리수의 끊임이 없으며, 결코 반복하지 않는 산술적 확장은 완전하게 주어지지 않을뿐더러, 유리수들에 점근하기만 할 뿐이다. 심지어 π가 20억의 소수들로 계산될 때조차, 결과는 여전히 단순하게 어떤 유리수이다. 따라서 무리수는 더 이상 연속성이 요청하는 정의로 자유롭게 할당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유들은 무리수 절단을 일차원적 수직선의 연속성을 완결하는 정렬된 보충물들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데데킨트를 참조할 때, 그는 절단에 잠재적인 것의 구성력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수의 다음 종류, 연속성의 이념적 원인 또는 양화가능성의 순수 요소”(Deleuze 1994: 172)이며, 이로써 잠재적인 것은 그럼에도 양이 귀속하는 연속적인 다양체가 된다.[16] 하지만 나중에 그가 절단에 대한 생각을 했을 때에는 오직 무리수 절단에만 집중하는데, 이것은 불연속성과 측정불가능성의 힘을 표현하는 매우 다른 역할을 하게 된다. 『주름』에서 무리수와 미분적 관계는 함께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유리수에 속한] 두 수렴 계열의 공통 극한이며, 그 중 하나는 최대치를 가지지 않으며, 다른 하나는 최소치를 가지지 않는다[왜냐하면 어떤 유리수도 그것의 무리수적 극한에 ‘최근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소멸하고 있는 두 양 사이 관계의 공통 극한[dy와 dx 각각이 0에 접근하는 것처럼]이 된다”(Deleuze 1993: 17). 그러나 무리수와 미분몫이 공유하는 것은 “어떤 원인으로 작동하는 곡면 요소(curved element)의 현존”(17)이다. 이것은 데데킨트 자신에 의해 수직선을 절단하고 그 위에 내려 그리는 대각선으로부터 나오는 호를 사용한 도형으로 설명되어진다. 하지만 완전하고 정렬된 수직선의 본성을 증명하기 보다, 들뢰즈는 그것의 불연속성과 본성상의 차이(disparateness)를 증명하는 것을 고수한다.       


무리수는 유리수 점의 직선 위로 원호(circular arc)가 내려 앉은 것을 함축하며, 어떤 잘못된 무한성으로서 유리수 직선을 드러낸다. 이것은 어떤 구멍들의 무한성을 포함하는 단순한 비한정성이다. 즉 이것이 연속적인 것이 직선으로 재현될 수 없는 일종의 미로일 수 있는 이유이다. 직선은 언제나 곡선과 뒤섞여 있어야 한다.(17)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이 동일한 이미지를 동일한 사건들의 회귀가 아니라 시간 자체의 불연속적인 구조로 이해되는 영원회귀에 적용한다. 그것은 “직선의 미로 [...] ‘비가시적이고, 끊김이 없는”(Deleuze 1994: 111) 것이지만, 또한 이것은 탈구된 선으로, “영원히 탈중심화하는 원을 재구성”(115)하며, 오직 차이만이 제 차례에 돌아온다는 것을 보증한다.      


들뢰즈가 무리수 절단을 “이미지 간의 측정불가능한 것을 결정하는” 현대 영화 기술로 도입할 때, 그리고 그 자체로 “더 이상 연합된 이미지들이 지나가는 것으로 가정되는 구멍(공백, lacuna)이 아니”라고 할 때, 그는 직접적으로 그것을 절단에 관한 수학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영화와 수학은 여기서 동일한 것이다. 가끔 절단, 이른바 합리적(유리수적, rational)이라고 불리는 절단은 그것이 분리하는(한편의 끝 또는 다른 편의 시작) 두 집합 중 하나의 부분을 형성한다. [...] 가끔 현대 영화에서는, 절단이 틈(interstice)이 되며, 이는 비합리적(무리수적, irrational)이며 둘 중 어느 집합의 부분도 구성하지 않는다, 하나는 더 이상 어떤 끝이 아니고, 다른 것도 어떤 시작이 아니다. 거짓 연속성은 그와 같은 비합리적(무리수적) 절단이다(181).    


이러한 절단은 또한 직접적으로 베르그송적인 지속에는 없는, 니체의 ‘거짓의 역량’에 연결된다. 거짓의 역량이 도입될 때, 베르그송이 들뢰즈의 영화 분석으로부터 사라진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양립불가능한 현재들의 동시성을 노정하는 한, 또는 비필연적으로 진리인 과거들의 공존을 노정하는 한, [...] 현재로 펼쳐질 수 없고 대체불가능한 차이들은 과거에 대한 참과 거짓 사이에서 결정불가능한 채로 존재한다”(131). 잠재적 과거와 현행적 현재에 속한 지속의 연속성이 “시간의 질서, 즉 관계나 시간에 내재하는 요소들의 동시성”인 반면, 거짓의 역량은 “시간의 계열에 관련되며, 그것들을 분리하는 대신에, 어떤 생성 와중에 있는 전과 후를 묶어 세운다. 그것의 역설은 순간 자체 안에 끈질긴 간극을 도입한다는 점이다”(155). 무리수 절단은 이것을 성취하는 바, 그 이유는 심지어 그것이 묶어 세우는 이미지들이 어떤 연장적 분리도 없이 동일한 순간에 견지되는 반면, 무리수 절단은 서로 간에 탈구(out of sync)된 채로 남으며, 따라서 결코 동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시간적 규정으로 변경하면, 무리수 절단은 들뢰즈에 의해 탈구된(out-of-sync) 시간의 구조로 파악된 영원회귀와 꼭 들어맞게 된다.      


따라서 무리수 절단은 최소 부분에서의 평면도를 “두 이미지들의 이접(선언, disjunction)이면서, 그 이미지들의 새로운 관계 유형, 다시 말해 매우 정밀한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의 관계”(Deleuze 1989: 256)의 구성으로 대체한다. 이것은 유리수적인 연속적 다양체들 안에 근본적인 무리수 불연속성의 원리를 장착하는 것이다. 계열들로서의 그것의 시간은 “시간으로 되어가는 바, 순간적 질”(275)을 표현한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적 절단(cuts, 편집컷)과 같은 특정 무리수 절단이 차이를 도입하게 되는 반면, 하나의 구조로서 무리수 절단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의 생산이 아니며, 단지 독특함(novelty)의 가능성에 관한 보증자이다. 즉 이것은 창조적 진화가 사실상 창조적이라는 것을 확증하며, 이런 방식으로 그것은 내재적, 강도적 차이이며, 지속이 의존하는 역량이다.            



[주석]

1. 이 논문의 초기 판본들은 ‘2016 유럽철학협회’에 제출되었다. 이 협회는 유럽철학을 위한 포럼으로서 매년 러던의 리에장 대학(Reagents College)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이 논문은 토론토에서 열린 2017년 <들뢰즈 연구>지의 연간 학술대회에도 제출되었다. 


2. 리만의 다양체(Manningfaltigkeit)는 영어로 직접 번역하면 ‘manifold’이지만 프랑스어로는 ‘multiplicité’이며, 이 프랑스어의 영어 번역이 ‘multiplicity’이다. 그러므로 나는 리만의 저작을 인용할 때에는 ‘manifold’를 사용할 것이지만,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저작을 다룰 때에는 ‘multiplicity’를 쓸 것이다[이 번역에서는 공히 ‘다양체’로 번역함-역자]. 


*[역주]이 번역어는 이정우의 논문 「리만 다양체의 존재론적 의의」, 『시대와 철학』,  2019 제30권 2호(통권 87호), pp. 163-97에서 사용되었다. 본 역자는 이를 따른다.


3. 나는, 리만의 저작에 관련된 다른 들뢰즈학자들, 이를테면 칼라마리(Calamari, 2015),  뒤피(Duffy, 2013), 뒤리(Durie, 2004), 플로트니츠키(Plotnitsky, 2006; 2009), 그리고 보스(Voss, 2013)와 같은 사람들이 사용한 1873년의 클리포드(William Kingdon Clifford) 오리지날 번역(Riemann 1882) 보다 스미스(Smith)의 『수학 원전』(A Source Book in Mathematics, Riemann 1929)을 저본으로 삼은 헨리 S. 화이트(Henry S. White) 번역을 사용할 것이다. 화이트의 번역이 일반적으로 명쾌하고 보다 쉽게 이해된다는 것 뿐 아니라 화이트가 ‘Grösse’를 ‘magnitude’[크기] 나 ‘quantity’[양]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Grösse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것의 수학적 의미에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양’을 가리키는데, 증가되거나 감소될 수 있는 어떤 것을 지칭한다(‘als fachausdruck der mathematik viel gebraucht, und zwar als verdeutschung von quantitas: quantitas, eine grösze, heiszet in der mathematik alles, was sich vermehren und vermindern lässet’ [Grimm and Grimm 1935; 나에게 이 용법을 지적해 준 줄리아 엔지Julia NG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특히 ‘Grössenbegrif’는 일차적으로 ‘notion of quatity’[양의 개념]으로 번역되며(이것은 또한 ‘concept’가 될 수도 있다), ‘Grössenbestimmung’은 맥락에 따라 ‘determination of quantity’[양의 규정(한정)] 또는  ‘determination of magnitude’[크기의 규정(한정)]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크기를 양의 부분집합으로 정위하고 후자를 불연속적이고 연속적인 형태들로 나누면서 다루는 그의 텍스트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뉘앙스는 화이트의 번역이 리만의 수학적이면서 철학적인 탁월함고 일치하도록 만든다. 리만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철학적으로 훌륭한 훈련을 한 사람이었다(Plotnitsky 2009: 191을 보라). 반대로 클리포드는, 비록 ‘Grössenbestimmung’을 대체로 화이트의 방식대로 번역하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언제나 ‘양’이 보다 적합한 지점에서 ‘크기’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위의 마지막 인용의 번역과 비교해 보자면, 거기서 리만이 그의 기획을 보다 순환적이고 불확실한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 겹으로 확장된 크기를 크기의 일반 관념으로부터 구축하는 것”(Riemann 1882: 55–6).


번역의 요상함은 이러한 다른 저자들이 수행했던 저술을 위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 뒤리는 제외되는데, 그는 리만의 텍스트를 밀착 독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것이 베르그송에 대한 들뢰즈의 초기 저술과 연관된다는 점도 살피지 않았다(이것은 심지어 제목에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가 있는 칼라마리의 논문에서도 마찬가지다). 뒤리는 대신에 수학사에서 후기 리만적인 영감의 전개에 대해 집중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들뢰즈의 후기 저작들에 영향을 주었는지 살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문제적 진술들에 대해 의심하는데, 그것은 리만에게 연속적 다양체가 양적이라기보다 질적이고 비-계측적이라는 관점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진술들, 또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이산적인 것에 적용될 뿐, 연속적 공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그런 진술들이다(Duffy 2013: 103–7; Durie 2004: 65 and 67n16; Plotnitsky 2006: 191 and 2009: 200을 보라). 이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번역어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에 의해 참조된 리만의 프랑스어 번역(Riemann 1898: 280–299)은 모든 경우에 ‘Grösse’를 번역하면서 그와 연관된 ‘grandeur’[크기]라는 용어를 쓰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일상적으로 크기를 가리키지만, 그것이 수학적 용법은 ‘Grösse’와 흡사하게,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양”(‘Quantité, tout ce qui est susceptible d’augmentation ou de diminution’, Littré 1957)이다. 


4. “내가 첫 번째로 이러한 문제들 중 첫째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동안, 다양체 개념은 다양하게 확장되는데, 나는 이와 같은 철학적 본성에 속하는 문제에 익숙하지 않은 까닭에, 사려깊은 판단을 요청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어떤 난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 해석 안에 있다기보다 개념들 안에 있다”(Riemann 1929: 412). 들뢰즈의 수학에 관한 다수의 참조가 거의 언제나 수학의 철학적 기초와 명백히 연관된 텍스트나 생각들을 포함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와 같이 그의 수학에 관한 참조사항들은 철학적 개념들을 위한 어떤 토대를 제공하는데 기여하거나, 그러한 개념들에 유비적인 생각들을 제공하지도 않을뿐더러, 그와 같은 개념들의 사변적 구성의 형식으로 기여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그것들은 수학적인 범역에 기초가 되거나 그것을 따라 등장하는 철학적 문제들을 표명하는 역할을 한다. 


5. 그러므로 연속적 다양체의 개체적 양상들은 ‘점들’이며, 이산적 다양체의 양상들은 ‘요소들’이다(Riemann 1929: 412). 그리고 다양체의 규정적 부분들은 표면적인 ‘표지’ 또는 실질적인 ‘경계’에 의해 구분될 수 있다(413).


6. 따라서 유클리드 공간에서, 두 개의 위치를 가진 점들이 X0, Y0, Z0 그리고 X1, Y1, Z1에 주어진다면, 그것들 사이의 거리 S는     

이며, 이것은 차원의 보다 높은 수와 유사하다. 최소부분들의 평면도를 가정한다는 것은 이러한 공식이 비록 다양체의 곡률이나 늘어남이 보다 큰 크기들에서 이를 차단한다 해도, 무한소미분적인 수준에서 수용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ds= 

이다.


7. 예컨대, 베르그송(1983: 142–58; 1991: 206; 1998: 154–57)을 참조하라. 그리고 또한 베르그송이 그의 라틴어 텍스트에서 하는 주장도 참조하라. 거기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어떤 물체를 다른 부분들을 담고 있는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Bergson 1970: 70).   


8. 이 점에 관해서는 Widder(2012) 참조.


9. 하지만 아인슈타인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특수상대성이론을 겨냥하는 것이지, 중력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리만의 사유에 따라 수립되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다. 


10.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강도량 개념에 대한 베르그송의 초기 비판과 비교해 보면, “측정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외의 강도라기 보다 더나 덜에 해당된다고 일컬어질 수 있다”(Bergson 1910: 3). 베르그송의 답변은 이것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사태가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고 생각되자 마자, 그것이 얼마나 감소하는지, 또는 얼마나 증가하는지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이기”(72)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비판이 애매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단지 심리적 상태들의 강도라는 생각에 반하여”라기 보다 “강도량에 관한 바로 그 관념에 반해 정향된다는 것”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Deleuze 1991a: 91–2). 이로 인해 몇몇 양의 형식이 베르그송의 질적 지속이라는 생각 안에 잔존한다는 들뢰즈의 주장은 잘 알려진대로 애매하다(92-4).  


11. 강도가 어떻게 잠재적인 것을 구성하는 차이와 같지 않은지 결정하는 것은 들뢰즈의 중심적인 사항이다(1994: ch. 5).


12. 데데킨트의 논문은 칸토르가 집합이론을 수학에 도입한 것보다 2년 정도 빠르다. 


13. 간접증명은 질문 안의 제곱근이, 가설이 변수들 중 하나로 인해 유지될 수 없다고 증명되기 이전에    

의 형태로 두 개의 정수의 비로서 산입될 수 있는 어떤 유리수라는 가설을 처음에 펼친다. 이러한 필연성의 증명은 음의 실수를 생략한다. 왜냐하면 어떤 음수의 제곱근에 관한 성찰은 허수 단위(i)를 포함하는 복소수 체계의 도입을 요청한다. 하지만 음의 실수는 논증으로부터 도출되는 양의 실수에 대한 기초 연산들의 응용을 뒤따를 것이다.    


14. 이 번역은, 실수는 실수 체계 ℜ보다 유리수 체계 R을 절단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증명을 부정확한 결론으로 이끈다. 독일어 원문과 비교하라(Dedekind 1872: 26).


15. 이것과 연관된 데데킨트의 비판을 Widder(2008: 22-33)를 보라. 


16. 『차이와 반복』에서 데데킨트에 대한 이 참조의 역할에 대해서는 Voss (2013: 236–41)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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