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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Sep 20. 2019

사변적 유물론에서 사변적 윤리학까지

서문사변적 유물론에서 사변적 윤리학까지[1]

- [퀭텡 메이아수 사전] 중


피터 그라톤(Peter Gratton), 폴 J. 에니스(Paul J. Ennis)




1967년 생 프랑스 철학자인 퀭텡 메이아수는 오늘날 이미 대륙 철학의 방향에 심대한 충격파를 던졌다. 일찌감치 그에 관한 개론서(Harman 2011a[2])가 출간되었으며, 그 자신은 대륙 철학에서 사변적 갱신을 구체화하하는 작업을 조력했다(Bryant et al. 2011[3]). 그의 사유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그의 장기적인 프로젝트의 개요를 그려놓은 두 개의 저작을 갖고 있다. 하나는 『유한성 이후: 우발성의 필연성에 관한 시론』(2008)이며 다른 하나는 『신성한 비실존』[4](‘Harman 2011a’로부터의 발췌본)이다. 이 두 개의 원리적인 텍스트와 더불어 여러 영어 논문들과 말라르메에 관한 연구논문인 『수와 사이렌』(The Number and the Siren, 2012)이 있는데, 이것들은 앞으로 상술될 그의 프로젝트의 여러 단면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적인 독자는 아마 설익은 그의 연구작업에 하나의 사전이 가당한지 물을 수 있다. 이것은 정당한 우려다. 하지만 아마도 곧 이 사전의 기획이 시작될 만한 정당한 이유가 나타날 것이다. 특히 메이아수의 개념들은 사전의 형식에 잘 들어 맞는다. 보다 중요하게도, 이 사전은 지난 10년 간 대륙철학에서 있어왔던 가장 중요한 논쟁을 더 앞으로 추동하는 학문적 기여를 할 것이다. 결국 이 책에 등장하는 비평가들과 지지자들은 그들이 메이아수의 생각들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 명쾌해지는 동안 핵심적인 개념들에 관한 단도직입적인 정의들을 제공받았다.



메이아수에 익숙한 사람은 그의 체계가 새로운 독자들이 자주 위압감을 느끼는 그런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의 언어는 종종 형식적이며 그의 글쓰기는 스타일에 있어서 전통적인 합리주의, 또는 심지어 영미 철학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것은 엄격함, [철학적] 야심 그리고 단순명쾌함과 관련해서 하나의 미덕이다. 하지만 맥락적인 것이 요구될 때, 때로는 지나치게 압축적일 수 있다. 이를테면 『유한성 이후』에서는 잠세적인 것(the virtual)에 대한 간접적이고 모호한 참조점들이 있지만, 이것은 「잠재성과 잠세성」(Potentiality and Virtuality)이라는 논문에 기반해서만 적절하게 상술된다. 동일한 것이 ‘흄의 복수’와 같은 장에서도 이야기될 수 있는데, 여기서 다루어지는 문제는 「자연 법칙의 우발성」(The Contingency of the Laws of Nature)이라는 논문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이 주어진다. 이러한 전체 텍스트들을 읽은 독자는 메이아수의 철학적 기획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몇몇 경우에 그것은 합리주의[이성주의]와 경험주의, 철학적 집합이론 등등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논쟁들 안에 특정 논증의 동기와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아가 『유한성 이후』에 있는 핵심 개념들의 정의는 이 서문에서도 제기되는 바, 윤리학적인 취지를 드러내게 돈다. 심지어 이것은 그의 가장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유에서도 발견된다. 영어판으로 나온 그의 텍스트들의 연대기로부터 야기되는 메이아수 철학의 수용과정을 고려하면, 문제가 좀 더 복잡해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신성한 비실존』의 경우 거의 10년을 『유한성 이후』보다 앞선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003년에 나온 [『신성한 비실존』의] 개정판이 확실히 그 텍스트를 향상시켰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두 개의 보다 독립적인 책으로 남는다. 두 개의 책에 동일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유한성 이후』가 보다 성숙한 저작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이것은 아마도 어째서 메이아수가 그토록 『신성한 비실존』의 개정판을 출간하기를 주저했는지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이다. 출판된 논문들은 그의 박사논문과 그의 생각이 일관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의 전체 기획에 그것이 현재로서 가장 좋은 기여를 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수와 사이렌』은 그의 사유 안에서 일종의 외전(外傳, outlier)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 책은 그의 전 저작에서 발견되는 그의 [이론적] 수행법, 즉 상상적 합리주의(imaginative rationalism)에 대해 말해 준다. 신지아나 라비니(Sinziana Ravini)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공상과학 소설에 대해, 니체, 뒤르켐, 헤겔 그리고 다른 식으로는 말라르메 만큼이나 다양한 주제들이 거기 있을 것이며, 그것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AOTF[5], 96). 하만과의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미래의 주제들로 다윈주의와 퓌론주의를 언급했다(IQM[6], 17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상과학 소설에 관한] 특정한 기여들은 메이아수 철학체계에 대한 급진적인 대체물이 아니라 보충물이라는 것이 공정한 판단일 것이다.



메이아수의 독자들은 그의 논증 전략과 대면할 때 즉시 어떤 경향을 발견할 것이다. 그의 거의 모든 텍스트들에서는 같은 계열의 근본적 논증들이 압축적인 형태로 반복된다. 그러한 반복되는 논증은 자주 『유한성 이후』에서 제기된 생각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명증성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의 체계가 전제하는 배경으로 이것이 취급될 때에도 마찬가지로 주제화된다. 아주 가끔 암시적인 주석의 행간에 포함될 때도 있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의 독자들이 칸트로부터 하이데거, 그리고 자신의 스승인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 대해 어떤 확고한 파악을 한다고 간주한다. 우리가 대륙철학의 몇몇 핵심 인물들에 대한 연구에 전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주석자들에, 메이아수 체계의 가장 중요한 흠결은 그와 대화를 나누는 철학자들이 단순한 캐리커처가 되기까지 그들의 복잡한 이론들이 과도하게 단순화된다는 것이다. 여기 사전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상가들의 옹호자들에게 응답하기 위한 공간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메이아수를 읽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텍스트적 맥락을 확장하는 방식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마지막으로 어떤 비판적인 교섭이 현장에서 활동하는 가장 유능한 몇몇 학자들로부터 야기될 것인 바, 따라서 독자는 메이아수의 저작들이 촉발하는 중대한 논쟁들을 맨 앞자리에서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메이아수의 영향력과 관련된 주제들을 논해 보자. 다시 한반 말하지만, 그는 종종 수수께끼 같다. 확실한 것은 그가 바디우의 이단적 제자라는 것이다. 그는 바디우의 논의에 힘입어 그의 수학적 존재론을 명석하게 설계하지만, 바디우와는 구분된다. 그의 칸토르 집합론에 대한 환기는 흄의 인과적 연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바디우의 가르침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예시다. 데카르트도 또한 그에게 명백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유한성 이후』는 분명히 칸트적인 이론틀이라기 보다 데카르트적인 것으로부터 자체적인 것에 접근하는 하나의 시도로 자리매김된다. 제일 절대자로서의 초카오스(hyper-chaos)에 관한 메이아수의 묘사는 수학적인 절대(값)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며, 데카르트의 연장실체에 관한 논증에 기반하되 적용과정에서 주요한 변형을 허용하면서 설계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질 들뢰즈가 있다. 들뢰즈는 강한 영향을 주었는데, 왜냐하면 메이아수가 그의 논증 안에 내재성과 잠세성을 새롭게 변형하여 전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의 영향력에 대한 그의 도전도 분명한데, 이런 점을 충분히 구분하는데 있어서는 주저한다. 이것은 메이아수가 『유한성 이후』에서 들뢰즈를 주체적 형이상학자의 범주 아래에 괄호쳐 넣는다는 점에서 강화된다(「빼기와 생략」[Subtraction and Contraction]도 참조하라. 여기에서는 들뢰즈와 베르그송 둘이 간접적으로 연루된다).



반대로 메이아수가 특정한 철학적 타겟을 마음 속에 담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상관주의(correlationism)에 대한 비판은 대륙철학의 포스트-칸트 전통을 단호하게 겨눈다. ‘상관성’(correlation)이라는 개념은 칸트적인 초월론적 관념론에서부터 현상학/포스트-현상학,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호출한다. 메이아수는 프랑스 현상학에서의 신학적 전회와 연루된 사상가들에 대해 현저한 분노를 표출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성을 포기하고 그들 자신의 유사-종교적 목적을 위해 칸트적인 물자체를 복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메이아수가 전통적인 포스트-칸트 철학의 문제들로부터 전반적으로 해방된 체계를 발전시키려고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의 기획은 비판적 기획(the Critical project)을 부인한다. [메이아수에 따르면] 오히려 비판적 기획이 비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것, 이를테면 비판에 대한 자유로운 지배에 부여된 교조주의, 광신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힘과 같은 것을 생각하는 시도로부터 그것이 서서히 이탈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로서, 철학자들은 절대자가 인간 이성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공간이라는 이유로 그것에 따라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위한 보호막을 제공하였다. 처음에는 자연 과학에 관한 방어 이상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이던 이것이 그의 기획에 어떤 견고한 모서리를 부여한다.


우리는 아래에서 메이아수의 사유를 이중적 방식으로 드러낼 것이다. 우선 우리는 『유한성 이후』에서 주요하게 전개되고 「잠재성과 잠세성」, 「자연 법칙의 우발성」과 같은 영어 논문에서 풍부해진 그의 존재론에 관한 설명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신성한 비실존』에서 발전되고 「유령의 딜레마」(Spectral Dilemma), 「너머 세계의 내재성」과 같은 논문으로부터 확장된 그의 윤리적 기획을 설명할 것이다.


메이아수 체계의 중심 텍스트는 『유한성 이후: 우발성의 필연성에 대하여』이다. 이 텍스트는 메이아수 사유의 전체 범역을 다루고 있지 않으며, 그의 다른 연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그 뒤에 숨은 동기를 놓칠 수 있다. 우리는 어째서 이 저작이 그의 체계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저작은 우리가 그 위에 어떤 윤리학을 건설하기 위해 요구되는 한 무리의 존재론적 실행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은 합리적[이성적] 윤리학은 누군가가 윤리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동기화하는 존재론적 기초작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따라 합리주의[이성주의] 없이 윤리학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윤리학은 냉소적 방식, 절망, 또는 이른바 신의 죽음이라는 균열을 뒤따르는 광신적 충동에 면역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그의 논증은 인간의 위상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일 수조차 있다. 이것은 주요 오류인데, 메이아수가 뒤이어 모든 것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을 고려한다는 것이 중심 목표라는 점에서 증명된다.



메이아수의 연구작업을 이끄는 기초 존재론적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존재는 사유로부터 독립적이며 사유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논증의 핵심은 철학자가 실재적으로 원리들이 포함하는 다른 기초 원리들에 기대어 두 가지 원리들을 거부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원리는 유물론에 대한 메이아수의 일반적 수행과정으로 우리에게 드러난다. 존재는 우리와 독립적인 물질이다. 두 번째 원리는 그의 합리주의로부터 명확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가 형식 언어, 이를테면 논리학이나 수학을 사용함으로써 사유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 이론에는 또한 우리를 ‘절대자에 대한 사유의 있어서 관계의 본성’(AF, 1)을 표명하도록 이끌어 간다는 어떤 중요한 실마리가 존재한다. 그는 제1 성질과 제2 성질을 구별함으로써 이러한 관계를 생각하도록 한다. 제1 성질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질적으로 독립적인 대상에 속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거기 있든 없든 존속한다. 제2 성질은 그것과 우리의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그런 감각적 성질들이며, 그러한 관계 외부에서 그것들을 사라진다. 칸트 이후, 이러한 구분은 그것의 소박성(naivety)으로 인해 의문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었다. 우리는 주체성과 대상성[객체성](그리고 그들의 복제물avatar들)의 뒤얽힌 축들 바깥에 있는 제 1성질을 사유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메이아수는 포스트-칸트주의 철학에서 관심사가 이러한 축들 간의 상호-구축적 연결을 향해 이동했다는 것을 논증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성질이 대상의 수학적 특질들에 내재한다고 고려되는 데카르트적 변위(variation)에 따라 제 1성질을 복권시키려고 한다.


우리가 세부적으로 그의 적극적 탐구작업의 뉘앙스를 파악하기 전에, 우리는 상관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살필 필요가 있다. 그는 상관주의를 “우리가 사유와 존재의 상관관계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들에서 따로 추출해낸 어느 하나의 항목에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다는 생각”(AF[7], 5)으로 정의한다. 상관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두 가지 원리적인 논변이 있다. 그것은 상관주의적 원환과 상관주의적 ‘두-단계’로서, 어떤 것이 관계되는가라는 것보다 무엇이 상관성의 관계인가라는 논증이다(AF, 5). 원환은 실재론자에 의해 맞닥뜨리는 실증적 모순을 강조한다. 즉 ‘당신이 어떤 X를 생각한다고 주장할 때, 당신은 이 X를 정립해야 한다. 이것은 따라서 이 정립하는 특별한 행위, 즉 개념적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SR, 409). 이 원환의 함축은 모순을 겪으면서 우리가 어떤 독립적인 실재를 사유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관주의자는 사유과정이 얻기를 희망할 수 없는 것 주위에 어떤 한계로서 ‘상관적 현사실성’을 긍정하게 된다(IRR[8], 1). 상관주의가 치루는 진정한 대가는 비-관계적인 외부를 생각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라고 말해진다. 즉 ‘위대한 바깥[거대한 외계], 선-비판적 사상가들의 절대적 바깥’이 그것이다(AF, 7). 상관주의 원리의 시험을 강화하기 위해, 메이아수는 우리가 대상들을 사유하는 바깥에 존속하는 그런 대상들을 요청하는 진술들에 집중한다. 그는 [이를 통해] 현재 안에서 그것들과 우리의 관계 바깥에 존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어떤 인간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시간대에 존속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선조적 시간(ancestral time)이라 부른다.


이것은 우리를 메이아수의 과학적인 실재론, 즉 의식성의 출현 이전의 어떤 실재성을 가리키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선조적 진술들, 이를테면 135억년 전으로 추정되는 우주의 기원의 날짜 진술들에 관련된 실재론으로 데려간다. 상관주의자는 과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선조적 실재들을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규범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상관주의의 원리는 과학적 진술들의 자구적 의미를 침식하며, 보다 중요하게도 메이아수는 이것이 상관주의 자신의 의미조차 침식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선조적 진술들은 원-화석들(arche-fossils)에 기반하여 알려지는 것으로, ‘선조적 실재성 또는 사건의 실존을 가리키는’ 물질적인 것들로 정의된다(AF,  10). 상관주의자는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현재 안에 존재하는지 그래서 그것들이 어떻게 ‘동시대적으로’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지에 집중한다(AF, 12). 메이아수는 이것을 ‘근대성의 추가조항’(codicil of modernity)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모든 과학적 진술들에 ‘인간을 위해’라는 금언을 덧붙인다(AF, 13). 하지만 원-화석에 대한 이러한 겉보기에 무해한 지점은 의미심장한 결과를 초래한다. 첫째로 이것은 철학자를 선조적 진술의 자구적이고 직접적으로 실재론적인 의미로부터 떼어 놓는다. 두 번째로 이것은 과학적인 것보다 더 심층적인 것이 알려지는 의미의 새로운 수준, 즉 ‘보다 원초적인 상관주의적 의미’(AF, 14)를 발생시킨다.


이 보다 심층적인 의미는 당대의 과학자 집단에 의한 상호주관적 정당성과 관련하여 과학적 지식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메이아수는 단순히 현재에서의 정당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이런 경우에 어떻게 선조적 실재를 고려하는 구체적인 결정을 지향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그는 과학이 “반복가능한 실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적 참조물들의 관점에서 그 실험들을 수행한다”(AF, 17)고 주장한다. 메이아수는 이것이 보다 원초적인 의미, 즉 존재하는 것이 상관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그것의 원초적인 의미가 실재성이 상관되어 있지 않은 의미화의 목록을 언급할 능력을 가진 이 필연성을 직접적으로 어떻게 침식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그는 이러한 능력으로 수학을 내세울 것이다). 그는 질문을 더 밀어붙여, 선조적 진술들이 잠재적으로 그 자체적인 진리로 어떻게 고려될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이러한 진술들을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조건들, 그리고 이에 따라 주어진 질문들에 사람들이 대답하리라고 주장할 만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메이아수는 제1 성질들, 다시 말해 주체와의 어떤 관련 바깥에 놓인 성질을 절대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발견하길 요구한다. 그는 데카르트로 돌아가서 하나의 모델을 발견하는데, 이는 그와 같은 목표를 성취하게끔 한다.


메이아수는 ‘연장된 실체의 절대적 실존’에 관해 특별히 데카르트적 논증에 관심을 가지며, 수학의 절대적 범위를 위한 보증자로서, 어떤 ‘도출된 절대자’로 기술되는 ‘제일 절대자’가 행위하는 존재론적 증명과의 연결에도 관심을 둔다(AF, 29–30[9]). 만약 그가 유사한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학적인 제휴에 기대어 짐을 덜게 되는데, 메이아수는 제1 성질에 관한 강건한 방어를 통해 이를 수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제일 절대자)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1) 절대적으로 완전한 모든 것을 소유한 존재로서의 신에 관한 우리의 관념이 주어지고, (2) 따라서 실존(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하기 때문에)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완전함 중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3) 신은 존재한다. 메이아수는 데카르트의 증명이 ‘우리를 위한’ 어떤 관념, 즉 바로 그 신의 실존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하나의 존재론적 절대자로서의 그것의 형식적 필연성으로 우리가 이동하도록 허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것은 그가 ‘우리를-위한’ 것에서 ‘그-자체’의 것으로 가는 유사한 이동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인다. 하지만 메이아수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모델이 불충분하다는 점을 발견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충족적인 필연적 존재에 관한 교조적 주장에 심대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아수 자신의 기획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그 어떤 존재로도 재인도되지 않는 절대적 필연성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AF, 34[10]). 이것은 교조주의가 더 이상 철학의 현대적 형식을 위한 심각한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성에 대한 교조적 경로를 차단하면서, 메이아수는 실재적인 것으로 접근하는 다른 문제틀도 비판한다. 첫 번째는 칸트의 약한 상관주의로서, 이것은 우리가 실재 그 자체의 실존을 정립하도록 허용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대한 어떤 지식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두 번째 접근은 강한 상관주의인데, 이것은 두 가지 중요한 결정들로 특성화된다. 하나는 상관주의의 모든 형식에 일반적인 것으로서, ‘상관적인 것의 우선성’을 강조한다(AF, 37). 두 번째 결정은 약한 상관주의와 반대 지점에서 생겨나서 다른 선택지를 야기하는 것으로, 이른바 사변적/주체적 관념론(speculative/subjective idealism, SI)이다. SI는 상관적인 것의 절대성에 기반하여 제기되는 것이다(AF, 37). 여기에는 어떤 것에 따른 그 자체의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주체-객체[대상] 이항성 외에 아무런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AF, 37).[3] SI에 반대하여, 강한 상관주의는 상관적 형식이 오직 기술될 수 있기만 할 뿐이고 결코 절대화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AF, 38–9).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유한한 한계들 바깥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의 것에 대한 파악을 단념하면서 우리는 결국 절대자에 대한 담론이 비이성적인 한에서 합법화된다는 어떤 상황에 도달한다. 즉 “철학자들은 이러한 절대적인 것들에 관한 어떤 것만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합리성에 관한 최소한의 주장조차 결여된 것이다”(AF, 45). 이것의 결과는 의미심장한데, 강한 상관주의가 절대자에 관한 회의주의의 완만한 출현을 허용함으로 인해 우리를 신앙으로 귀결시키기 때문이며, 이로써 절대자의 본성에 대한 어떤 믿음을 합법화하는 특유한 결론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는 ‘이성의 종교화’(religionizing of reason, AF, 47)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제 메이아수 존재론의 중심으로 이동하게 된다. 바로 지식[인식]의 형식 안으로 상관주의의 현사실성을 도입하는 것이다(AF, 52). 메이아수에 따르면 현사실성은 ‘절대적’ 필연성 보다 ‘조건적’ 필연성을 드러낼 수 있는 상관주의적 입장을 명명하는 바다(SR, 428–9). 우리는 형이상학이 한때 그러했던 것처럼 단순히 설명 가능한 궁극적 기초를 구축하는 것만을, 사물/사태가 어째서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만을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인식론적으로든 또는 존재론적으로든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든지 간에, 그와 같은 한계에 따라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관점은 중차대한 이전을 함축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메이아수가 현사실성을 ‘무능력’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것의 하나의 특성으로 재도입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AF, 53). 이성[근거]의 부재는 우리의 실재성의 현행적인 특성으로 취해질 수 있다. 또는 다른 식으로 보자면, 그는 부정적인 성찰을 어떤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한계로부터 존재론적 지식[인식]으로의 전환(shift, 위치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아수는 현사실성이 이때 그 자체의 것에 관한 ‘실재적 고유성’이며, 버젓이 보이는 곳에 은폐되어 왔다고 주장한다(AF, 52). 비이성[부조리함], 즉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부재는 ‘절대적인 존재론적 고유성’에 대한 지칭을 보증한다고 여겨진다(AF, 53).


메이아수는 어떻게 이 스위치를 우리에게 납득시킬 것인가? ‘우리를-위한’에서 ‘그-자체’로 이동하는 문제가 재출현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그는 어떤 대화를 묘사하는데, 여기에는 그동안 그토록 많이 논의되었던 『유한성 이후』의 여러 행위자들이 함께 등장할 것이다. 그 대화는 우리의 ‘미래 포스트-모던’의 본성 또는 죽음을 고려한다(AF, 55). 최초로 우리는 두 명의 교조주의자를 만나게 된다. (1) 한 사람은 신앙자로서, 실존이 우리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으며 사후에도 우리가 존속한다고 주장한다. (2) 무신론자는 죽음은 엄밀히 말해 끝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따라서 (3) 어떤 엄격한(strict) 상관주의자, 즉 약하거나 강한 상관주의와 명쾌하게 동일시되지 않지만, 사후에 발생할 일에 관한 가장 훌륭한 입장이 불가지론이라고 보기 때문에 둘 모두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그런 상관주의자를 도입하게 된다. 이는 지식이 항상 이 세계에 관한 것이고 신앙자든 무신론자든 우리가 그 세계를 일단 탈출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 결론이 모두 가능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지식이 도달하는 한계 안에서만 그러하다. 이때 대화 안으로 (4) 주체적 관념론자가 등장하고 그녀는 두 가지 선택지는 사유 불가능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는 유일한 범위는 사유의 범위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교조적 입장들과 주체적 관념론에 응답하면서, 엄격한 상관주의자는 그 모든 세 가지 입장들이 가능하다고 주장해야 하며,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를 논쟁으로부터 구출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변적 철학자가 등장하는데, 이 자는 메이아수 자신을 대변한다. 그는 두 교조주의자과 주체적 관념론자는 절대자를 잘못 정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절대자가 가리키는 바는 정확히 ‘다른 것 자체로-존재하는-능력’(the capacity-to-be-other as such)이며, 이는 엄격한 상관주의자의 시선을 통해 붙잡히는 것이다(AF, 56). 이 불가지론은 절대자가 도래할 때, 그 자체의 어떤 것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몇몇 경우에, 이를테면 무신론의 경우, 이것이 ‘비-존재’의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한다(AF,  57). 비-존재는 죽음의 존재론적 명칭이며, 상관적인 것의 현사실성에 있어서 엄격한 상관주의의 수행은 상관주의자가 죽음과 같은 절대적 가능성들이 고유하게 비-상관적이라는 것을 인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상관적 실재의 가능성은 이에 따라 엄격한 상관주의 안에서 보증된다. 메이아수는 상관성의 바깥으로 이끄는 ‘단층선’(faultline)인 ‘다른 것으로-존재하는-능력’을 수용한다(AF, 57).[4] 메이아수를 따라, 우리는 여기서 상관성 너머에서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존속하는 실재들을 사유할 방법을 발견한다. 상관성에 관련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속하는 것은 어떤 ‘근원적 비인간성의 시간(time of a radical inhumanity)이며 그가 절대자를 논할 때 시간성을 몹시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MSC[11], 12). 본질적으로 그는 우리가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부재로 돌아가기를, 그리고 모든 실체(entity)가 다른 방식으로 생성할 가능성들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이것은 어떤 존재론적 원리로 가는 것인 바, 모든 실체들(entities)을 촉발하는 절대적 시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상관주의자는 이미 상관성에 있어서 우발성의 실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핵심은 실재성 자체의 징후(index, 지표)로서의 우발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 초카오스적 시간(hyper-chaotic time), 즉 모든 실체의 ‘다른 것으로-존재하는-능력’을 보증하는 이 시간이 제일 절대자를 드러내려는 우리의 애초의 욕망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상하다는 것이다. 제일 절대자는 선조적 실재들에 대한 수학적 담론의 보증자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AF, 64). 이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메이아수는 실체들이 이 모델 안으로부터 종속되는 ‘결정적(determinate) 조건들’을 도입한 것이다(AF, 66). 그는 물-자체가 비-모순적이라는 증명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 결과에 비상한 논증을 제공한다. 즉 어떤 모순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한꺼번에 두 상태를 유지할 것이고 따라서 스스로 모순 속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존재의 상태에서조차 계속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비-모순은 ‘다른 것으로-존재하는-능력’이라는 절대적 범위[시야]에 대한 우리의 수행에 의해 규정된 상태들 사이의 이동을 위해 요청된다(AF, 71). 거기에는 간격을 전환시키기 위한 몇몇 확정적 상태가 존재해야 하며, 이것이 비-모순적 실체들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 자체의 실존을 고려하면, 그의 접근은 단도직입적이다. 만약 우리가 비이성의 원리를 수용한다면, 우리는 ‘다른 것으로-존재하는-능력’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과 비실존의 두 영역들의 영속성 없이 사유 불가능한 것”을 말하며, 우리는 실체들이 최소한도 가능하지 않다기 보다, 거기에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능력을 가진 실체들이 존재함에 틀림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AF, 76).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조우했던 개념들의 적극적인 도입을 이끌어 낸다. 우리는 ‘우발성의 로고스’ 안에 연루된다고 말해지는데, 이것은 충분이유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철학하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AF, 77). 비이성의 원리는 비합리주의의 잠재적인 부정적 함축과의 관계를 끊어내기 위해 본사실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factiality)[12]라고 재명명된다(AF, 79). 이 원리는 현사실성이 사실이나 본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실체들이나 법칙들과 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보자면, 오직 우발성만이 필연적이며, 따라서 『유한성 이후: 우발성의 필연성에 관한 시론』이라는 부제가 나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가 절대자의 조건들을 발견하는 절차는 ‘도출’[파생](derivation)이라고 불리워지는 바, 이것은 ‘형상들’(figures)을 생산한다(AF, 79). 비록 우리가 제일 절대자의 몇몇 지식, 특히 비-모순의 절대적 범위를 지켜냈다 해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이행’(transition)이 데카르트적인 어떤 것일 때, 우리는 여전히 칸트적인 협력체들 안에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AF, 81). 우리는 논리적 원리들의 절대적 범위[시야]에서부터 수학적 진술들(두 번째 절대자)의 절대적 범위[시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난점이 부과된다. 즉 “우리는 여기서 문제의 완전한 해를 제시할 수 없다”(AF, 81)는 것이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으로 해결불능으로 고려되어온 다소 명백한 문제인데, 흄의 인과적 연결 문제가 그것이다. ‘모든 것들 아래에 놓여진 말해질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따라 동기화되기 때문에, 그것은 완벽한 딜레마이다(AF, 82). 그의 존재론이 폭넓은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를 보이기 위해, 메이아수는 흄의 사례를 해결하려고 하며, 이로써 본사실적 사변(factial speculation)에 대한 첫 번째 적용을 제시한다.


메이아수는 초카오스적 시간의 함의에 대한 명백한 반대입장에 대해 알고 있는데, 그것은 경험 안에 명백한 안정성(stability)이 존재한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사물/사태가 어떤 이유도 없이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과 불화한다. 따라서 이러한 안정성을 보증하는 자연법칙이나 불변하는 물리법칙이 존재해야 한다. 요컨대 ‘만약 물리법칙이 현행적으로 우발적이라면,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아챘을 것이다’(AF, 84)라는 주장이다. 흄의 당구공 예시를 취하면, 우리는 ‘동일한 초기조건이 주어지면, 동일한 결과가 단일하게 따라 나온다’는 것을 안다(AF, 85). 흄의 문제는 간단한 딜레마를 제기한다. 우리가 뒤따르는 동일한 결과를 기대하기 위해 확실하게 추론하지만, 그것은 아프리오리한 필연성을 보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의지처는 우리 자신의 경험인데, 이것은 현재에 붙잡혀 있고 오직 과거에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물리적 필연성으로 인해 우리 습관들에 따른 실수를 저지른다. 비-모순의 원리는 확실히 우리에게 ‘모순적 사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지만, 어떤 비-모순적 사건이 우리가 아무런 확증도 없이 야기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 줄 수 없다(CLN[13], 323). 이것은 근대 철학에서 가장 오래된 난문 중 하나이며, 메이아수는 전형적인 확신을 가지고 이 문제에 대한 어떤 기발한 해법을 약속한다.



메이아수에 따르면, 흄의 문제에 대해서는 가능한 세 가지 응답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완전한 존재의 실존을 증명하는데, 이 존재는 우리의 법칙들이 우리 우주를 지배하는데 있어서 최선의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자로서 행동한다. 두 번째는 회의주의적 또는 흄적인 해법이다. 비록 우리가 인과적 필연성을 아프리오리한 것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그 문제를 ‘그 필연성에 대한 우리 믿음의 근원’을 향해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AF, 88). 이것은 우리가 결과의 항상성에 직면할 때 마다 시간을 거듭해 만든 습관화의 방법이다. 세 번째 잠재적 응답은 초월론적 또는 칸트적 해법이다.[5] 이것은 인과적 필연성 부재의 결과가 야기할 것에 대해 상상해 보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칸트에 따르면 그 결과는 재현, 대상성 또는 심지어 의식성의 불가능성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재현의 사실’이 법칙들의 우발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CLN, 325). 메이아수는 이 세 가지 입장 모두가 ‘일반적 가정’에 고착되어 있다고 믿는다. 즉 인과적 필연성의 진리는 의문에 부쳐질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AF, 90). 정확히 이것이 그가 의문시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는 네 번째 사변적 해법을 제시하면서 이 관점으로부터 흄적인 회의주의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성이 법칙의 필연성을 아프리오리하게 증명할 수 없다고 논증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이성이 법칙들의 우발성을 아프리오리하게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메이아수가 하는 바는, 충족이유율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 즉 우리가 이성이 인과적 필연성에 대해 아프리오리하게 말하는 바를 수용하는 것에 대한 흄의 의심을 가볍게 넘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메이아수의 야심적인 비판에서 물리적이거나 자연적 법칙 그 자체에로 확장된다. 만약 인과적 연결이 ‘증명될 수 없다’면 그때 우리는 그것을 포기해야 하며, 우리의 이성적[합리적] 본능들을 신뢰햐야 한다(AF, 91).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전히 딜레마에 처해 있는데, 그것은 어째서 자연 법칙과 물리 법칙이 그토록 항구적으로 안정적이며, 어째서 이성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되는 카오스에 직면하는가에 관한 것이다(AF, 94). 이 추론은 ‘법칙의 안정성은 [...] 그 법칙들의 필연성을 전제한다’(AF, 94)는 것을 취한다. 이는 아래와 같이 작동한다. (a) 만약 법칙이 아무 이유 없이 변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빈번하게 그러할 것이다. (b) 그러나 법칙들은 그렇지 않으며, 따라서 (c) 법칙들은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며, 그럴 수밖에 없다. (b)가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이제 가는 (a)에 집중하는데, 이것은 전체 논증을 붕괴시킬 만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빈도주의적 내포’(frequentialist implication)이라는 논증의 역량을 요철하는데, 이 논증은 자연법칙의 우발성이 그것들의 빈번한 변형을 야기할 것이라는 믿음을 약화시키는 방식이다(AF, 95).


이 제안에는 어떤 난해한 움직임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법칙의 안정성을 위한 논증이 의식되지 않은 수학적 추론의 형식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장-르네 베른(Jean-René Vernes, 1982[14])의 연구에서 이끌어내어진 바에 따라, 메이아수는 빈도주의적 내포가 개연적 추론을 혼란에 빠트린다고 생각한다(AF, 95).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언제나 같은 면으로 떨어지는주사위 판에 임한 노름꾼의 예를 가져 온다. 여기서 이 노름꾼을 이끌어가는 것은 ‘매우 개연적으로 주사위 안에 뭔가가 채워져 있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다(AF, 96). 주사위 던지기라는 매우 고전적인 시나리오에서도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동일한 개연적 결과들이 존재한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동등하게 사유될 수 있는 [아프리오리한것은 동등하게 가능하다’(AF, 96). 일단 주사위가 던져 지고 결과가 도래하면, 우리는 다시 발생할 우연[한 기회]들에 개연적 추론을 할당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러한 동등한 개연성의 테제로 시작한다면, 그리고 동일한 결과가 계속해서 발생한다면, 우리는 우연[한 기회]을 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할 이유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숨겨진 원인이 결과를 보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만일 주사위가 단지 게임이 지속되는 동안 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생애에 걸쳐 같은 면으로 떨어지면, 그때 우리는 그 상황에서 물리 법칙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어째서 그러한 것들이 항상 재발생하는지에 대한 몇몇 은폐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흄이 믿었던 바처럼 아마 이 이유를 아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지만, 거기 뭔가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우주를 다루면서 그 안의 사건들을 취급하는 우리의 방식에 있다. 다시 말해 개연적 추론을 사용하는 그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대안적인 물리법칙으로 모든 우주들의 어떤 완전한 집합을 파악할 위치에 있기를 요청한다. 메이아수가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가능세계들이 상이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각각의 주사위 던지기는 어떤 새로운 가능세계와 결과를 초래하는 그 법칙들을 재현한다(IWB[15], 448). 우리의 예시에서, 주사위-우주는 언제나 우리의 세계가 우리를 빈도주의적 추론을 하도록 이끌어 가게 판이 형성된다. 자연법칙들의 명백한 안정성이라는 사실이 주어지면, 우리의 법칙들이 우발적이라는 것은 개연적이지 않다. 메이아수는 우리가 추론하는 그 필연성이 어떤 ‘보충물’이라고 생각해야 함을 논증한다(AF, 98). 안정성을 위한 논증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우주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고려될 수 있는 ‘가능적 우주들 전체’를 재현하는 주사위-우주라는 개념에 달려 있다(CLN, 330). 하지만 그와 같은 전체는 이런 경우 합법적인가? 그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우주의 한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몇몇 정의된 총체에 따라 계산될 수 있지만, 물리법칙과 관련하여 논의되어지는 그 총체성은 우리가 현행적으로 경험 안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있을 법하지도 않은 것이다.[8]


총체적인 것(the Whole)은 이론적으로 포스트-칸토르 시대에서도 보증되지 않는다. 바디우는 칸토르를 활용하여 체계를 건설하면서, 집합이론이 어떤 고정된 총체성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현재의 표준 학설을 따른다.[9] 간략하게 말해서, 이론적인 총체성이나 집합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가능세계들에 대한 계산을 수행하도록 요청되는데, 이 세계들은 그 생성의 불가능성에 의해 즉각적으로 제거된다. 이는 칸토르의 말에 따르면, 좀 더 큰 집합은 언제나 우리가 총체성으로 취하고자 했던 것의 탈총체화를 초래하는  집합을 포함하여 구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증 가능성에 기반하여 이것을 개연적으로 만드는 총체성은 수행되는 증명을 위한 신빙성 있는 기초가 아니다.[10] 우리는 총체화가 가능한지 그리고 이것이 그 기초에 있어서 형성된 논증들을 기각하기 위해 ‘충분한지’에 대해 무시하며 넘어간다(CLN, 333). 이것은 증명이 아니라 빈도주의적 내포의 가정된 합법성의 의심이며, 이 내포는 만약 법칙이 우발적이라면, 더 자주 표명되리라는 점을 견지한다. 우리는 빈번한 변화가 개연적이라거나 안정성이 어떤 추론과 같은 것에 기반하여 비개연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과적 필연성에 대한 그의 비판을 확증하기 위해 메이아수는 즉각적으로 그가 약속한 해법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는 어떻게 이것이 성취될 것인지에 대해 대략적인 개요를 이후 작성할 것이지만, 우선은 선조적 실재성이라는 초기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 간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이전과 이후의 사건들 둘 모두가 지배되는 사유와 존재 사이의 ‘시간적 불일치’라는 진술에 대한 보다 더 확장적인 의미를 도입하는 것으로 나아간다(AF, 112). 통-시태성(dia-chronicity)이라는 개념은 이 보다 넓은 의미를 감당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AF, 112). 그는 [이론적] 견인력을 얻기 위해 그와 같은 진술들을 허용하는 응답가능한 인물들로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와 더불어 근대 과학의 사건으로 주의를 돌린다. 이 사건은 ‘자연의 수학화’와 연결되는데, 이것은 형식 언어들을 촉진시키는 것으로서, 우화(fabulation)에 의존하지 않고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의미있게 만드는 담론을 부여한다(AF, 112). 이 탈-신비화의 과정은 나아가 세계의 자율성, 즉 우리와 무관한 세계 그리고 우리의 현재와 관련없이 존속하는 세계에 관한 깨달음에 수반된다(AF, 115). 우리는 이러한 비-상관적 세계에 수학 개념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의미 있는 기초 가정들에 기대어 접근한다. 따라서 메이아수는 칸트적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보다 적합한 이름을 제안하고자 하는 바, 이는 그 소관 범위에서 이 갈릴레이-코페르니쿠스적 영혼을 제거한 것으로, 철학에서의 ‘프톨레마이오스적 반-혁명’이라고 이름 붙여진다(AF, 118).


칸트는 철학으로부터 교조적인 형이상학을 실행하기 위해 요청되는 반면, 근대 과학의 ‘사변적 중요성’(speculative import)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AF, 120). 어떤 면에서, 메이아수는 자연과학이 우리에게 위대한 외부풍경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철학이 다른 길을 찾아 떠났음에도 제한된 가능성들이라는 외딴 장소 이상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망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철학에 갈릴레이-코페르니쿠스적 영혼을 회복할 것인가? 우리 앞에 어떤 사변적 임무가 남아 있는가? 『유한성 이후』는 이와 같은 요구에 대한 윤곽을 그리면서 끝난다. 특히 메이아수는 우리가 형식 언어로서이 수학의 역량과 본사실성의 원리 사이의 연결을 발견해야 한다고 믿는다.[11] 이 도출적인 것을 위한 동기화는 우선적으로 선조성의 문제로부터 일어나는데, 이는 ‘수학적으로 파악가능한 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어떤 도출적인 것을 요청하며, 따라서 이를 통해 상관적 실재들 너머에서 존속할 수 있다(AF,  126). 두 번째로 이 도출적인 것은 인과적 연결의 문제를 합당하게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며, 명백한 안정성과 관련된 비총체화를 위한 존재론적 지지대를 제공하도록 허용한다. 왜냐하면 현상태에서 비총체성 가정은 단지 다른 것들 가운데 집합이론에 대한 하나의 독해 가능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AF, 127). 따라서 두 가지 절대화 과정이 요청된다. 하나는 존재적인(ontic) 것으로 선조적 실재들의 가능성과 관련된다. 다른 하나는 존재론적(ontological)인 것으로 ‘비-총체’와 관련된다. 이것은 『유한성 이후』에서 중단된 부분이며, 우리가 이제 메이아수 사유의 전체적으로 다양한 국면으로 방향을 틀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메이아수의 연구는 단순히 추상적 절대자의 본성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윤리적 차원을 포함한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 전통에 속한 사상가의 오래된 노선을 따라, 새로운 존재론 체계의 건설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일반적 가능성들을 고려하는 그런 방식을 재형성하고자 한다. 메이아수는 그의 윤리학을 어떤 희망에 따라 전개하는데, 그것은 이성주의적 고려들에 따라 단단히 뒷받침되며, 우리의 전락한 세계를 치유할 미래의 신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메이아수에 의하면, 초카오스의 주어진 역량으로 인해 자연법칙의 최근의 안정성이 이전부터 파괴되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즉 물리법칙이라는 사실들은 자체적으로 변화되어 온 것이다. 메이아수는 우리 세계 보다 이전의 세계들이 존재했다고 논증한다. 이 세계들은 비-총체의 세계와 우리 세계를 구분하는 것으로 특성화된다. 이 세계들은 (1) 비유기적 물질의 세계 (2) 유기적 물질의 세계 그리고 (3) 유기적 물질과 사유의 세계이다. 이런 방식으로 메이아수는 대문자 세계(World[이후 볼드체: 역자])와 소문자 ‘세계’(world)의 개념 사이를 구분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세계는 초카오스의 ‘세계’로부터, 즉 무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지점은, 일단 우리가 어떤 비-모순적 가능성도 기각될 수 없는 메이아수의 존재론적 전망을 수용하게 되면, 그때 우리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의 가능성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윤리적으로 거대한 함축을 지닌다.


메이아수는 하나의 세계로부터 다음 세계로 가는 여러 지점들에 대해 논증하는데, 이는 이전에 존재했던 물리 법칙과 관련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질적인 도약에 있다. 따라서 각 세계는 독자적으로(sui generis) 존재하거나 자기-원인으로 존재한다. 사유의 세계는 유기적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들로부터 나올 수 없었을 것이고, 그가 단언하는 바, 유기적 물질은 단순 물질에 의해 야기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사변적 유물론은 ‘우리 세계의 근원적 우발성’을 ‘긍정한다’(IRR, 11). 우발성에 경도된 철학자는 이에 따라 ‘존재’(l’être)에 관심을 두지 않고, 즉 무엇이 널리 존재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메이아수가 언급한 ‘가능 존재’(the perhaps, le peut-être)에 관심을 가진다(TWB, 11). 가장 긴급한 윤리적 의미에서, 가능한 것이란 그에게 어떤 최상의 의미에서 이 세계 너머의 다른 세계 즉, 플라톤주의의 부박한 형식으로서의 그런 세계가 아니라 도래할 다른 세계들이다. 이 세계들은 당대의 예화(instantiation) 위에 건설되며 그것과 내재적으로 뒤섞인다. 그가 이러한 가능 세계들에 부과하는 유일한 제한은 이전에 존재했던 것 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그것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당대적인 형상화 안에서 지속적으로 결여된 것들을 인지함으로서 가장 있음직한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러한 가능성들이야말로 사변적 철학자의 활동 분야라고 믿는다.


의문스러운 ‘결여’란 신성한 비실존이라는 개념에서 표현된다. 메이아수는 그의 존재론적 탐색작업을 존재하는 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신에 대한 관심으로 정향하지 않으며, 아마도 존재할(may be, 또는 지금으로서는 비-실존인) 어떤 신으로 방향 잡는다. 이 신의 출현은 정확히 이미 언급된 세계들 너머의 네 번째 세계일 것이고, 우리는 그것이 발생할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 잠재적인 출현은 현재의 허무주의 너머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세계에 부가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이 우리가 유령적 딜레마(spectral dilemma)라고 부른 것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완전한 정의가 존재하도록 만들 것이다. 유령이란 역사 안에서 잃어버린 그 모든 것에 대한 애도(mourning)에 따라 우리의 범속한 실존을 좇아 다니는 것을 지칭한다. 이들은 그 죽음이 우리가 이성적 질서나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놓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메이아수는 그 모든 종류의 유령들에 대한 자세하게 기술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죽은 아이, 모든 종류의 가증스러운 학살의 희생자들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중 가장 비감응적인 유일한 것은 이런 저런 죽음의 공포 뿐 아니라 그 모든 역사적인 홀로코스트가 가지는 실존적 무게에 대해 무감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애도[비탄]의 폭넓은 작동이라는 그늘 아래에 산다는 것이다. 메이아수에 의하면, 이런 유령들 너머의 본질적인 애도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들을 생각하며 우리가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메이아수의 방식, 즉 우리가 과연 그와 같은 죽음이 발생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어떤 신을 허용할 수 있는지 아닌지라는 문제에 대해 간접적으로 표명하는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메이아수는 다소 다른 방향에서 데리다의 전망, 즉 우리의 삶이란 언제나 애도의 작업으로 연명한다는 것을 따른다. 하지만 데리다가 이러한 유한성을 냉혹한 어떤 것으로 바라보는 반면, 메이아수는 초카오스의 본성이 우리의 조건을 다른 것이 되도록 할 수 있음을 보증한다고 논증한다. 누가 그와 같은 죽음들을 허용하는 어떤 신을 믿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믿는 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정확히 허무주의에 의해 직면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고인들을 위한 정의를 부여할 만한 세계에서 작동하는 어떤 초월적 원리의 결여로부터 발생하는 딜레마다. 메이아수에 의해 생산되는 바, 그 논증이 윤리적 수준에 놓인다는 것을 잘 살펴야 한다. 이것들은 어떤 시계제작자 신이나 자연을 근거짓는 어떤 단순한 제일 원리를 위한 메마른 증명이 아니다. 이것은 철학자들의 신이 아니다. 그보다 그 핵심에서, 이것은 어떤 인격주의적 신과 관련된 유령적 딜레마, 우리의 기도에 대답하는 어떤 사람과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들 모두를 위해 자비를 행할 수 있는 어떤 인물에 관한 것이다. 이 신은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윤리적이다. 우리의 가장 어두운 공포들을 내쫓아 버리는 어떤 빛에 대한 간구인 것이다. 유령적 딜레마에 직면한 무신론자들에 대해 메이아수가 제안하는 대답은 신 존재를 위한 이런저런 증명의 형식이 아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기각하는 진화론이나 빅뱅에 관한 물리학적 설명, 또는 우주론적 증명의 논리학적 문제틀에 대한 설명, 또는 잘 알려진 비-신앙자의 그 모든 방식들로부터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다. 무신론자는 그보다, 정확히 윤리적인 개념들에 있는 이 딜레마에 응답한다.


[유신론자가 말하길] 당신은 희망을 원한다. 어떤 것들을 위해, 죽은 자들을 위해 [...] 당신의 내세에서의 정의를 희망한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에 근거할 것인가? 정의가 실행되는 것은 가장 사악한 행위가 저질러지는 것조차 그 자신에게 허용해 왔던 어떤 신의 전조 아래에서이다. [...] 당신은 단지, 그리고 심지어 좋은, 그런 신을 요청한다. [...] 그와 같은 삐뚤어진 존재의 통치권 아래 살기 위해, 가장 고귀한 말들 – 사랑, 정의 – 을 그의 가증스러운 행위들로 타락시키는 그런 존재. 이것은 지옥에 대한 합당한 정의가 아닌가? [...] 이 지옥을 말하기 위해 당신은 그것들을 바라며, 나는 나 자신으로서 그들을 위해, 무를 선호한다. 무는 사람들을 평화 안에 남겨둘 것이며, 그들의 위엄을 지키도록 할 것이다. 반면 당신은 당신의 냉혹한 데미우르고스의 처분 아래에 사람들을 놓아 둘 것이다(DI[16], 265).


이러한 입장들 중 어느 것도 죽은 자에 대한 윤리적 응답을 고려할 수 없으므로, 메이아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무신론자는 그와 같은 공포스러운 신의 관념 그것을 혐오하는 반면, 믿는 자들은 삶이 ‘끔찍스러운 죽음의 절망에 의해 유린되는 것’이 아닌 어떤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DI, 265). 무수한 책들이 그와 같은 신의 가능성에 반하여 그리고 그것을 위해 논증하며, 그 논증들은 너덜너덜해진 채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메이아수의 『유한성 이후』의 독자들도 아무도 신성한 비실존을 고려하는 그의 논증이 그와 같은 윤리적 근거 위에 놓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유한성 이후』가 신의 존재에 반하는 어떤 간접 증명을 제공한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메이아수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바, 어떤 필연적이고 비인격적인 신조차 유령적 딜레마에 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딜레마의 양측면은 인격적 신의 실존과 여타의 신이 우리의 실존을 위해 의미없어 보이는 한에서, 이것이 옳다는 것, 그리고 그 신이 어떤 형이상학적 딜레마에 대한 답을 구해준다는 것에 놓여 있다.


메이아수는 따라서 신존재나 비존재에 관한 이항 대립적인 논쟁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는 세 번째 입장을 설명해 보인다. 그의 관점은 두 측면이 모두, 신이 존재한다면, 그의 실존은 필연적이라고 기꺼이 인정한다는 것이다. 즉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는 것뿐 아니라, 그가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도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믿는자가 된다는 것은 신의 본질적인 실존에 대해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다”(SD, 268). 하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유한성 이후』의 논증으로부터 따라 나올 뿐 아니라, 신이 무수한 이 세계의 공포들에 책임 있는 자로 남지 않으면 안 되므로, 어떤 가치 있는 신으로 요청된다는 것에서도 도출된다. 하지만 신은 또한 현재로서는 역사의 죽음들을 위한 의미의 결여에 직면한 어떤 실존을 위해 희망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메이아수는 더 나아가 최악의 체제들, 이를테면 소비에트와 같은 체제의 문제들이 살아 있는 것들과 죽은 것들의 불평등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들 체제는 죽은 것들을 미래에 생존할 누군가의 이름으로 창조한다. 따라서 그는 정의의 신은 살아 있는 것들에 자비롭지 않으며, 죽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도래할 세계의 모습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신이 “우발적으로 배제되어 정립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만약 그것의 사유가능성이 아무 것도 그것의 개입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반대로 어떠한 예정 법칙도 그것의 출현을 보증한다고 가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SD, 271).


메이아수는 현재의 자연법칙 아래에서 우리가 죽은 자의 재생을 희망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그는 충족이유율에 집착하지 않는데, 충족이유율에 따르면 이 우주의 법칙들은 영원하다. 그보다 메이아수는 흄을 급진화함으로써 무신론을 전복했다. 이런 방식으로 자연은 전증한 신의 지원을 받지 않으며, 초카오스는 이 세계 너머에서 그것의 희망을 제공받지도 않는다. 메이아수의 사유는 그러므로 우리의 죽을 운명이라는 상황에서 그리 멀리까지 달아나지 않는다. 그의 기획은 궁극적으로 어떤 추상적 의미에서 실재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박사논문부터 쭈욱 우리 현재의 조건의 부조리함에 촉발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근거들을 대면서 신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리라고 볼 수 있다. 메이아수는 우리에게 어떤 타당한 유령학, 즉 이러한 유령들, 그가 말하길, 산 자들의 세계에 여전히 속하되 ‘통과가 거부된’ 자들, 심지어 우리가 단지 온순하게 지지하기 시작할 수 있는 어떤 끝나지 않은 그림자들에 대한 연구작업을 부여하는 것이다(SD17, 262). 그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사유가 신이 어떤 단순 미래의 세계를 표시한다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세계에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도 가져야 한다 것도 의미한다고 논증한다. 희망 없음을 부추기는 실존적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그 추론하는 능력과 도덕법칙에 대해 스스로에 기반을 제공하는 능력에 놓여 있었다. 메이아수에 따르면 궁극적인 존재는 실재의 본사실성을 사유할 수 있는 자이며, 따라서 도래할 내재적 세계를 위한 어떤 이성적 희망을 가지는 자이다(IWB, 462). 이러한 형상은 그가 제안하는 바, 인간이 그 한 가지 유형으로 존재할 수 있을 법한 것으로서, 그것의 ‘인지적’ 그리고 ‘비극적’ 특성 둘 모두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것이다. 즉 그것은 모든 것의 우발성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며, 도처에 존재하는 그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도 아는 존재의 형상이다. 메이아수가 네 번째 세계를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신은 우리 신체들의 파괴를 막을 것이지만, 신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가 영원하다거나 지속한다는 것에 대한 희망을 펼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메이아수의 체계에서조차, 정의와 평등은 언젠가 승리할 것이고, 죽음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초카오스의 권력에 주어진 우발적 가능성으로 존재할 것이다. 메이아수가 네 번째 세계의 형식적 가능성을 그려내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 논점은 이러한 ‘충만한 가능성’이 이 세계 안에서 우리의 행위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사유에 놓인다. 이러한 어떤 미래의 전망은 그가 종말론적 또는 ‘벡터적’[동경적](vectorial) 주체라고 칭하는 바를 사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래할 세계의 해방에 의해 자석처럼 끌어당겨지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IWB, 463). 




[주석]

1. [역주] 이 번역은 초벌번역임을 밝혀 둔다. 원문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Peter Gratton, Paul J. Ennis (ed.), The Meillassoux Dictionary, Edinburgh Univ Press, 2014, 8-24.

2. Harman, Graham (2011a), Quentin Meillassoux: Philosophy in the Making,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3. Brassier, Ray (2011), ‘Concepts and Objects’, in The Speculative Turn, ed. Levi Bryant, Nick Snricek, and Graham Harman, Melbourne: repress.

4. L’Inexistence divine, Doctoral Disseration, Université  de Paris, 1997, available at <http:// www. scribd. com/ doc/127012496/Quentin-Meillassoux-L-Inexistence-Divine> (accessed 1 September 2013)

5. ‘“Archaeology of the Future”: Interview with Quentin Meillassoux’, Paletten 1–2 291/292 (2013), pp. 86–97.

6. ‘Interview with Quentin Meillassoux (August 2010)’, in Graham Harman, Quentin Meillassoux: Philosophy in the Making,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1, pp. 159–74.

7. After Finitude: An Essay on the Necessity of Contingency, trans. Ray Brassier, London: Continuum, 2008; Kor. 정지은 옮김,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관한 시론』, 도서출판 b, 2010. Kor., 18.

8. ‘Iteration, Reiteration, Repetition: A Speculative Analysis of the Meaningless Sign’, Paper presented at the Freie Universität, Berlin, Germany, 20 April 2012, available at <oursecretblog.com/txt/QMpaperApr12.pdf>(accessed 1 September 2013).

9. [역주] 해당 부분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는 연장 실체의 절대적 실존이라는 테제를 – 그러니까 물체들과 관계하는 수학적 담화들의 비-상관관계적 영향력이라는 테제를 – 어떻게 합법화하는가? 그의 추론은 다음의 방식으로 간단하게 재현될 수 있다. 1.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신의 절대적 실존을 증명할 수 있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성찰』에서 신의 실존에 대해 제시된 세 가지 증명 가운데 하나가, 칸트 이래 존재론적 증명(혹은 논증)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원리는 무한하게 완전한 존재라는 신의 정의로부터 신의 실존을 추론하는 데 있다. 신은 완전한 것으로 정립되고, 실존은 완전함이기 때문에 신은 실존할 수밖에 없다. 신을 사유하기 위한 내가 존재하든 아니든 상관 없이, 데카르트는 신을 전적인 필연성에 의해 실존하는 것으로서 사유하기 때문에 절대적 실재 – 나의 사유에 비상관적인 거대한 외계 – 로의 가능한 접근을 내게 보증해준다. 2. 신은 완전하므로 내가 나의 오성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 – 내가 명석 판명한 관념들을 통해 추론할 때 – 나를 속일 수 없다. 3. 내가 삼차원적 연장이라는 속성만을 부여할 때 판명한 관념을 갖게 되는 그런 물체들이 나의 외부에 실존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따라서 그 물체들은 결과적으로 나의 외부에 실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진실되지 않을 텐데, 이는 그의 본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데카르트에 의해 수행된 절차의 본성을 고려한다면 증명이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1. 절대자의 실존을 확립하기: 완전한 신(이것을 ‘첫 번째 절대자’라고 부르자). 2. 완전한 신은 기만하는 자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로부터 수학적인 것의 절대적 범위를 도출하기(이것을 ‘도출된 절대자’라고 부르자). ‘절대적 범위’는, 물체들에서 수학적으로(산술이나 기하학에 의해) 사유가능한 무엇이 나의 외부에 절대적으로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증명 형식만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수학적 담화를 다른 어떤 방식으로 절대화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다. 즉 우리는 절대자에 접근해야 하는데, 절대자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수학적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면(완전한 신) 그것은 우리가 거기서 절대성을 끌어내도록 허락할 수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연장체들의 실존을 보증하는 진실된 신). 따라서 우리 자신이 그러한 형태에 복종하는 증명을 산출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로부터 내용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데카르트의 증명의 내용이 어떤 점에서 상관주의의 비판에 항거할 수 없는지를 설명해야 한다.”(Kor. 45-47)

10. [역주] Kor. 54.

11. ‘Metaphysics, Speculation, Correlation’, Pli: The Warwick Journal of Philosophy, 22, (2011), pp. 1–26.

12. [역주] ‘본사실성의 원리’에 대해 『유한성 이후』에 나온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실성(facticité)의 사변적 본질을 본사실성(factualité)이라는 용어로 부르게 될 것이다. 이 용어는 모든 것의 사실성 자체가 하나의 사실처럼 사유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사실성은 사실성의 비-사실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실성의 자가-부여의 불가능성[사실성이 스스로에게 사실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성의 비-중복’(non-redoublement de la facticité)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비-중복은 비-독단주의적 사변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절대적 필연성의 기원을 기술한다: 존재하는 무엇에 있어서, 그것이 하나의 사실이어야 하는 필연성.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부정적이라는 결함을 지닐 뿐인 ‘비이성의 원리’라는 표현을 우리의 탐구의 실제적 영역을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본사실성의 원리라는 표현으로 대체한다. 사실 그 자체의 사실적이지 않은 본질, 즉 사실의 특별한 조건들의 필연성으로서의 사실의 필연성으로 말이다. 우리는 본사실성의 조건들을 탐구하고 규정하는 사변을 본사실적(factuale)이라고 명명할 것이다(우리는 이러한 사변적 체제를 지시하기 위해 보다 간략하게 본사실적인 것du factuale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진술을 사실성의 조건처럼 확립하는 증명 방법을 도출(dérivation)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모순 혹은 ‘있음il y a’(무엇이 있다-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과 같은 조건들을 형상들(Figures)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본사실성의 원리는 이렇게 진술된다. 사실성만이 본사실적이지 않다-존재하는 무엇의 우발성[번역수정: 우연성→우발성] 그 자체만이 우연적이지 않다. 이 원리를 공식화하는 데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은, 본사실성이 원리가 우발성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지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발성만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충실하게 지지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본사실성의 원리는 형이상학에 속하지 않는다”(AF, 79-80; Kor. 133-135)

13. ‘The Contingency of the Laws of Nature’, Environment and Planning D: Society and Space, 30:2 (2012), pp. 322–34.

14. Vernes, Jean-René (1982), Critique de la raison aléatoire, ou Descartes contre Kant, Paris: Aubier.

15. ‘The Immanence of the World Beyond’, in Connor Cunningham and Peter Candler (eds), The Grandeur of Reason: Religion, Tradition, and Universalism, London: SCM Press, 2010, pp. 444–78.

16. ‘Appendix: Excerpts from L’Inexistence divine’, in Graham Harman, Quentin Meillassoux: Philosophy in the Making,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1, pp. 175–238.

17. ‘Spectral Dilemma’, in Robin Mackay (ed.), Collapse Volume IV: Concept Horror, Falmouth: Urbanomic, 2008, pp. 2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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