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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Sep 12. 2019

들뢰즈-가타리 평전(2)

원문 서지사항: Françoi Dosse, (trans.) Deborah Glassman, Deleuze & Guattari-Intersecting Live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번역문 중, ‘[ ]’는 역자 보충이다.

*들뢰즈-가타리 평전 (1)은 아래


1부 주름평행 전기(parallel biography) 


1장 펠릭스 가타리-정치심리학의 여정, 1930-1964


펠릭스 가타리는 1930년 3월 30일에 세 아들(장, 폴, 피에르-펠릭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집에서 작은 피에르(Little Pierre)라고 불려졌다. 그의 가족은 그가 놀랍고 특이한 녀석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비록 그들이 그의 지적 능력을 확실히 예상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펠릭스는 둥지에 있는 작은 오리새끼였지요”라고 장은 언급했다. 장은 펠릭스보다 아홉 살 연상으로서 펠릭스에게는 다소간 아버지의 역할을 했다.[1] 이 상당히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가족 안에서, 막내 아들은 그의 형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만끽했으며 이른 나이에 더욱 독립적으로 되었다. 그의 큰 형은 17살 때 일을 하러 가야 했다. 피에르-펠릭스는 1945년에 15살이 되었으며, 나치로부터 해방된 덕분에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가타리의 가족은 지식인들이 아니었지만, 부모는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펠릭스의 어머니는 열렬한 독서가이면서, 박물관에 자주 갔다. 그의 아버지는 타고난 음악가로서, 처음 들은 음악이라도 한 번 들으면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서 가스 공격을 받고, 총상을 입었으며, 도박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몬테 카를로로 가족들과 이사했는데, 바다 바람이 그의 건강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벌러 공장에 가는 것과 같은 식으로 카지노에 갔다.  

   

바나니아 냠냠

전쟁 기간 동안, 펠릭스의 아버지는 피에르 라르데(Pierre Lardet)와 친하게 되었는데, 그는 1912년, 니카라과에서 바나나 가루, 으깬 씨앗들, 코코아 그리고 설탕으로 맛있는 음료수를 만든 유명한 요리 장인이었다. 1914년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라르데는 공장에서 대대적으로 그 음료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이것은 “바나니아 냠냠”(Banania Yum Yum)이라는 광고에 일정부분 이유가 있었다. 그 광고는 세네갈 포병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유명해졌는데, 그 포병는 1915년에 유명해졌다. 라르데는 부자가 되었고, 경주마를 샀으며, 대단한 부르주아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파리의 카지노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던 중 그의 친구 중 한 명이 공용기업을 인수해서 매각하자고 제안했고, 그는 에피네(Epinay) 소재의 한 초콜렛 공장을 사기로 결정했다. 사업은 망했다. 라르데는 파산 선고를 당했다. 그 이후 드라마틱한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라르데는 권총으로 재판정을 난사했다.      


펠릭스 가타리의 아버지는 그 공장이 잘 되도록 애썼지만 그가 관리할 수 있는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오르느(Orne)에 있는 작은 마을인 라 라푸이에르(La Rapouillère)로 이사 가서, 양을 기르기로 결정했다. 양 목축은 실패했고, 다음으로 그는 우아세(Oise)로 가서 앙고라 토끼를 길렀다. 앙고라는 전후 매우 유명해졌다. 피에르는 비에뇌브-레-사블롱(Villeneuve-les-Sablons, 현재 비에뇌브-르-루아)의 토끼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다음 이사 간 곳은 메뤼(Méru)였다. 직물 산업의 근대화는 전통적인 앙고라 산업을 빠르게 붕괴시켰으며, 가타리 가족은 그들의 토끼들을 먹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세 형제 중 첫째인 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토끼마저 기르지 못하게 되었지요.”[2]     


가타리와 비포(프랑코 베라르디)


가족은 파리 구역으로 돌아 왔으며, 거기서 모든 실패 이후에, 다시 어렵사리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그들은 몽트루지(Montrouge)에 있는 공공임대주택으로 옮겼다. 그 지역은 파리와 적당한 거리에 있었다. 아버지는 전망이 희박한 장사를 시작했는데, 커피와 감자를 소규모로 파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아내와 세 아들을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최악에 내몰린 시기에 그는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1934년에 그는 돈을 좀 빌려다가 사업을 시작했는데, 초콜렛 사업이었다. 그는 몽바나(Monbana)라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었다. 그는 가렌느-콜롱브(Garenne-Colombes)에 공장을 차리고, 마침내 사업을 아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사업은 그의 인생을 정점에 올려 놓았다. 펠릭스의 어머니, 쟌느 파올리는 “헌신적으로”[3] 가족을 돌보았다. 혈통상 코르시카인인 그의 어머니는 17살에 결혼을 했으며, 그때 가타리의 가족은 볼로냐에서 왔으므로, 그녀의 이탈리아 혈통과 다시 연결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1919년에 결혼했지요. 아버지는 전쟁영웅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 한 아이에게 야심 이상의 많은 것을 심어 주었습니다.”[4] 가타리 부인은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막내 아이에게 그런 방면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특히 아들만 가지기로 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 피에르-펠릭스는 어떤 특별히 부끄러움이 많고 소극적인 아이였는데, “거의 여자”[5] 아이 같았다.     



1952년, 가타리가 22살이 되었을 때, 그는 집을 떠나 그의 여자친구, 미셸린 카오(Micheline Kao)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펠릭스네 부모의 집 아래 거리에서 그녀의 부모와 함께 살았었다. 펠릭스의 일기에는 미셸린과 그의 어머니와의 다툼이 쓰여져 있는데, 여기서 그의 어머니가 가진 질투심을 엿볼 수 있다. “내가 밤에 어디서 보내는지에 대해 통제하려고 하는 어머니의 간섭은 나를 화나게 한다 [...] (나의 아버지가 모든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6] 이 조금 뒤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난 결코 내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다. [...] 당신이 당신의 어머님을 사랑할 용기가 없다면, 삶의 기간 동안 내내 비난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 난 끊임없이 세계를 날아다니고 있다. 난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 난 추락하지 않을 것이다. 난 모성적 대상으로부터 너무 가깝고 또 너무 멀다. [...] 그것은 날 죽이고 있다.”[7] 3년 뒤, 그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쓴다.      

추론에 있어서 커다란 논리적 강직함을 나에게 부여하는 그러한 완고함은 느낌들에 관련되면, 빠르게 엄격함으로 변했다. 이것은 내 자신의 체계가 없다는 의미에서 체계에 대한 생각을 품는 것이다. 난 절망 속에서, 길을 잃고 점점 악화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엄격함이 나의 어머니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몽투아르(Montoire)로 이사왔고, 그녀를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그녀는 심하게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확실히 어떤 유전적인 나의 욕구 성향은 그녀로부터 온 것이다. [...] 난 그녀를 매우 좋아한다. 그녀가 나에게 삶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 이 무슨 엉망진창이람. 그녀는 나를 좌지우지 하려고 너무 심하게 압박한다. 더 이상 공존은 불가능하다.[8]     


그의 아버지에 대한 가장 이른 가타리의 기억은 1933년 기록인데, 펠릭스는 셋째 아들이었고, 다음과 같이 그의 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난 우리가 어떤 사업을 시작할 것이라는 점을 알려야 해.” 위기의 해 초기에 절망이 생겨날 때, 그러한 언급은 그것을 해내기 위한 그의 아버지의 결정을 되비추었다. 그것은 펠릭스에게 평생 지속될 어떤 것이 되었다. 펠릭스는 그것에 의해 깊이 감명받았다. “나는 사업을 시작했고 그가 나의 인생 전체를 움직였다고 생각합니다.”[9] 일의 성공여부는 아주 어린 소년에게 몇몇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부모는 그와 함께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고, 그는 부모들이 자신을 포기했다는 것을 빠르게 느꼈다. 그는 심상했지만, 말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었다. 그의 병약함과 내성적 성격은 그의 부모들의 걱정거리였고, 그들은 그를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 의사는 전에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시골로 방문해서 처방전을 써 주었던 의사였다. “그래서 그날과 그 다음날까지 내 형제와 그 모든 것과 더불어 내 인생에 그토록 집착했던 나는 모든 것과 단절되어 노르망디에 있는 소박한 할머니에게로 추방된 나 자신을 발견했지요.”[10] 단절은 아주 나쁜 경험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시간을 내지 않았고, 그를 멀리했다고 느꼈다. “난 그들이 나를 보러 왔을 때와 떠날때 울었습니다. 난 완전히 비참한 기분이었습니다.”[11]          

  


트라우마적 장면

1939년, 루비에르(Louviers)에 있는 그의 조부모집에서, 9살의 펠릭스는 어떤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은 확실히 그의 행동에 급진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펠릭스의 새할아버지인 빅토르(Victor)는 이전에 몽쉬외 광산의 광부였는데, 그가 즐기는 라디오 시리즈인 『슈튜트가르트 반역자』를 듣고 있었다. 그는 문을 약간 열어 놓은 채 그의 라디오를 화장실로 가지고 갔다.        


그의 발치에는 작동이 멈춘 상자[라디오]가 뒹굴었다. 내가 옷을 만들어 입힌 작은 종이 인형들도. 할아버지의 머리가 그의 무릎으로 떨어졌고, 그의 팔은 축 늘어졌다. 그가 나의 발가락을 건드린 것일까? 난 그에게 소리를 지를려고 했다. 침묵. 난 머리를 돌렸다. 천천히 – 영원히 – 라디오에서 나오는 빛을 향해. 거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소음이 나왔다. 그는 쓰러졌고, 할머니는 소리를 질렀으며, 그제야 충격이 찾아 왔다.[12]   

  

할머니가 도착했고, 파랗게 질렸으며, 할아버지의 심장이 멈추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귀끝을 잘랐다. 그것이 소용없어졌을 때, 그녀는 신문지를 들어 그녀 남편의 머리위에 올려 놓았다. 날아가버리는 그를 잡으려는 듯이.     

이 죽음과의 잔인한 만남은 펠릭스 가타리의 인격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54살이었을 때, 그는 이 트라우마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이것은 유한성, 사람들의 어리석음 그리고 사물/사태의 일반적인 허무함에 대한 단호한 감각과 심각한 불안발작(anxiety attacks)을 촉발했다. “그것은 내 위에서 폭발하는 어떤 것과 같았어요. 불안발작 말이에요. 그건 말 그대로 두려움에 떨며 바닥을 기어다니게 만들었지요.”[13] 그의 부모들은 그의 할머니를 홀로 남겨두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펠릭스가 루비에르에 있는 학교에 가기 전까지, 그녀와 얼마간 함께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의 자포자기 감각은 커졌고, 그의 할아버지의 급사에 의해 촉발된 불안감이 더 심각해졌다. 마침내 그의 할머니는 이런 상태를 이해했다. “좋아, 너는 같은 일이 내게 벌어질까봐 두려운거구나.”[14] 그리고 그녀는 그의 부모들에게 전화해서 와서 그들의 아들을 데려가라고 결정했다.    

  

 그 후에 곧, 어린 펠릭스는 급속도로 바뀌었다. 본래 내성적이었고 거의 두려움에 떨 정도로 부끄러움을 탔으며, 다른 아이들이 그의 장난감을 가져가는 것을 놔두었고, 그의 형들, 특히 둘째인 폴에 의해 지배당했고, 그 형은 그를 울보로 생각했었지만, 이제 그는 빠르게 그룹의 리더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때 나는 마치 갱단을 결성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처럼, 상대편 갱도 조직했다.”[15] 그는 가렌느-콜롱브에서 유명해졌고, 지역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때가 왔을 때, 교장선생님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의 어머니는 충분히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를 발견하려고 애썼으며, 결국 그의 아들이 악명을 떨쳐 내도록 했다.   

   


고등학교에서 펠릭스는 특출난 사회과학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는 셀레스텡 프레네(Célestin Freinet)의 제자인 페르낭 위리(Fernand Oury)였다. 펠릭스가 수업을 들었던 위리는 나중에 제도 교육론에서 유명한 사람이 된다.[16] 그들의 첫 번째 만남은 매우 짧았다. 3주간의 수업 후에, 페르낭은 사라졌다. 1943년에 독일이 그를 수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만남의 기억은 너무나 강렬해서 15살의 가타리는 해방 이후 페르낭 위리가 학생 기숙사 조직의 재결성 책임자일 때, 즉각 거기 합류했다. 형제애적인 사회성의 세계가 가타리를 위해 개방되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의 완고한 전망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가타리는 위리의 인격과 그의 교육 방식에 매료되었다. “나는 페르낭을 이해하려는 큰 욕망에 이끌렸다. 난 사물을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바라보는 그의 방식을 사랑했고, 또 그리워했다. 그것은 사물을 신비 속에 감싸인 것으로 보는 방식이다. 당신이 그의 현존 안에 있을 때, 그 신비는 유사-시학적인 베일이 된다.”[17]      


<해방>이라는 기숙사 네트워크 조직 덕분에 가난한 가족의 청소년들은 조직적인 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펠릭스는 그룹의 리더가 되었고, 기숙사는 무엇보다 그가 남자 아이들 중에서도 별나게 살았던 시기 동안 여자아이들을 발견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여행 중에 그는 같은 이름의 피에르라는 젊은 남자를 만났다. “난 말했어요. 날 피에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펠릭스라고 부르라고 말이지요.”[18] 펠릭스 아버지의 처남인 펠릭스 삼촌은 베르뒁(Verdun) 전투에서 죽었다. 블라맹크(Vlaminck, [Maurice de Vlaminck, 1876~1958,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의 열정적인 추종자였던 펠릭스 삼촌은 그의 조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내 이상형에 가까웠지요.”[19] 부모의 직업적인 문제가 발생한 이후에, 가타리에게는 모든 순간이 “사업을 벌이기” 위한 준비 상태였다. 또한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는 스스로를 다시 형성했고, 또는 행복하게 되었고, [이런 일들을 겪으며] 펠릭스가 되었다.      



매순간 행복해지고자 하는 그의 욕망과 유별난 생동감은 이전에 겪었던 유한성의 경험과 죽음의 분명한 실재성에 대한 자각 때문이다. 그가 불가피한 한계에 직면하면서 인식한 것은 ‘일[사업]을 벌이는 것’이었고, 그것은 불안을 떨쳐내는 방법이자 죽음과 같은 강제력이었다. 어린 펠릭스가 그의 할아버지의 죽음 이전에도, 죽음을 만난 적은 있었다. 1971년 7월, 그는 그의 일기에 여섯 번 또는 일곱 번 반복적인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썼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 그녀가 침대 가까이 왔고, 난 엄청나게 두려웠다. 그것은 나를 깨웠다. 난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날 밤, 형은 공기총을 내게 빌려 주면서, 내가 해야 하는 것이 그녀가 돌아오면 쏴버리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내가 총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내가 아직 이것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20] 이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펠릭스 아버지의 미망인 여동생[에밀리아]으로서, 그의 남편인 펠릭스는 베르뒁 전투에서 죽었다. 이 여인은 또한 G. 르루(Leroux)의 소설에 나오는 동명의 여성영웅인 에밀리아(Aunt Émilia)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정말로 물론, 그것은 장롱(armoire), 일렁이는(moiré) 여인, 검은 군대, 쓴 쑥(armoise), 내 팔(arms), 30대의 궁핍(mouise)이다[역자해설: 불어와 영어로 말놀이를 하는 중]. 아버지는 파산해 버렸다. 그가 이 같은 이름의 에밀리아 고모의 도움으로 앙고라 토끼들을 기르기 시작했을 때.”[21]    

 

전쟁의 끝

가타리는 해방기에 정치적으로 일찍 각성했다. 1945년, 그가 학생기숙사 조직에 가입했을 시기, 그는 공산당 회합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1930년대 크루아드푀(Croix de Feu[파시즘 성향의 프랑스 우익 정치단체])의 구성원이었고, 전쟁 중에는 충실한 드골주의자였다. 그가 아들이 가렌느-콜롱브의 기차역 다리 아래에서 공산당 기관지인 『위마니떼』를 팔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첫째 폴은 펠릭스를 조롱했다. “네 그 냉장고 정당 기관지인 『위마니떼』 복사본 좀 가져와 봐”라면서. 그리고 가족들이 그것에 반대한다는 것을 [공연히] 드러내면서.     


전후에 젊은 기숙생들의 분위기는 특히 강렬했다. 많은 젊은 가수들 – 프랑시스 르마르크, 자크 형제, 바르부스, 피에르 뒤당 – 과 이브 로베르 같은 배우들은 거기에서의 철야 공연에서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문화적-행동주의 감독들, 그리고 정치적 리더와 조합 리더들로 훈련되었다. 가타리는 여기서 그의 첫 번째 낭만적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그가 그의 여자 친구인 아닠(Annick)을 그의 부모님 집에 데려왔을 때, 그녀는 그의 어머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녀가 펠릭스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고, 이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1944년 젊은 펠릭스는 소설과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그의 꿈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지적으로 재능이 있었다. “나는 쓰는 법과 읽는 법을 거의 즉각적으로 배웠습니다. [...] 반 아이들은 더듬댔지만, 난 아주 잘 읽어 내려갔지요.”[22] 그는 쿠르베봐(Courbevoie)의 폴-라피 중등학교(Paul-Lapie Junior High)에서 우수한 학생이었고, 그것은 콩도르세(Condorcet)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년까지 이어졌다. 그는 1948년 철학-과학 바칼로레아 시험을 통과했다. 그는 철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으며, 그가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교수가 그 분야에서 그의 공부를 격려하고 이끌어주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바칼로레아 시험에서의 훌륭한 점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에 대해 그의 교수와 논의할 수 없었으며, 그의 선택에 대해 불확실한 채로 남겨졌다. 그의 형인 장은 그가 지독히 꺼려함에도 불구하고, 약학을 공부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1948년 7월에 첫 번째 인턴쉽을 베콩 레 브리예르(Bécon les Bruyères))에 있는 제약회사에서 수행했고, 그것이 완전히 바보같은 짓임을 깨달았다. 그는 첫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다. 그의 형들의 감시 하에, 그는 두 번째 시험 준비를 했으나 두 번째도 시원찮은 결과가 나왔다. 무엇보다 그가 원했던 것은 집을 떠나서 공적 업무에서 직업을 가지는 것이었고, 마침내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신전화국(Post-Telephone and Telegraph)에서 치르는 학생 조사관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고려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미셸린 카오에게서 어떤 소울메이트를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젊은 중국 여성이었는데, 그가 16살, 그녀가 14살 때 만났다. 그들은 가렌느-콜롱브에 있는 에이글 거리(rue de l’Aigle)에서 이웃이었고 1946년, 페르낭 위리가 결성한 알프스의 외비어-르-뷔(Aubier-le-Vieux)로 가는 방학 여행 동안에 만났다. “나는 어른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했던 한 소년을 기억합니다. 그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요.”[23] 미셸린 카오는 펠릭스에 대해 매우 흥미로워했고 다소 신기해 했다. 그는 영원한 사랑을 외쳤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우정 이상의 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1951년까지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다. “난 그를 원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난 이를테면 결국 ‘항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24]    

        

1951년에 그들은 미셸린 카오의 노동계급 부모의 집에서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 카오의 부모들은 이 두 사람을 매우 반겼다. 그들은 그들의 물건을 1층으로 옮기고 젊은 커플이 편안하도 사생활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펠릭스는 그의 책과 함께 피아노도 옮겼다. 미셸린의 아버지는 펠릭스를 아들로 생각했다. 펠릭스의 가족 구성원들은 그의 이사를 인정했지만, 두 사람은 모두 펠릭스의 말을 경청해 주는 그 가족과 더불어 아래 거리로 이사하는 그를 보며 놀라면서도 유쾌하지는 않았다. “카오씨는 펠릭스의 저녁식사를 그의 침대까지 가져다 주었어요!”[25] 펠릭스의 부모는 카오 가족이 그들의 아들을 훔쳐가려 한다며 두려워했다.  

    

이러한 정서적 재구축 과정은 심대한 직업적 혼란이라는 배경에 대항하여 발생했다. 가타리는 약학 공부 때문에 글쓰기로부터 유리되는 것에 대해 스스로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쓰기는 그에게 어떤 실존적 필연성이었다. “나는 내가 더 이상 어떤 것도 쓸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상당히 화가 났어요. 나는 더 이상 읽지도 못했으며, 따라서 애써 쓰기 위해 책을 발췌했습니다. 난 카뮈의 책을 몽땅 베낀 것을 기억합니다.”[26] 더 이상 그의 아버지와 대화하지 않았기에, 펠릭스는 그의 직업적 경로를 발견하기 쉬웠다. 그는 점점 더 그가 잘못된 직업을 선택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약학 공부를 그만두기로 결정했으며,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등록했다. 그의 아버지는 거의 대화가 없었는데, 실재로 그는 아들의 고통에 많은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어느날 집 앞의 눈을 치우면서, 아버지가 느닷없이 그의 아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피에르, 왜 공부를 그만두려는 거지?’ 난 말했죠. ‘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건 전혀 내게 맞지 않은 공부에요.’ ‘그럼 넌 뭘 공부하고 싶은 거냐?’ 모든 이들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수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난 철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오, 음, 그래? 그럼 철학을 공부해.’”[27] 비록 펠릭스가 1953년 일기에 그의 도덕 구조가 부성적 이미지(imago)에 기반하고 있다고 썼지만 그 몇 해 동안, 아버지의 모습은 분명 희미해지고 있었다. “도덕적이면서 국가주의적인 자, 크루아드푀의 일원, 독일과의 거래 금지, 영어로 듣기, 가족에 대한 존중, 그리고 동시에 자유에 괴롭힘 당하는, 중도, 거짓말쟁이, 여행자, 도박꾼, 사업가, 지성적인 자.”[28]     



1950년대 초, 가타리는 사르트르의 영향을 너무나 강하게 받아서, 그의 일기에 사르트르의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쉽게 이해할 만한 실존주의적 주제를 담고 있다. “이 (시간의) 객체화는 우리가 시간을 느끼게 만드는 반정립에 기여한다. 다시 말해, 그것을 세계로부터 제거한다.”[29] 시간과 무, 죽음 그리고 고질적인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필연성, 이런 것들은 그를 쥐고 흔들었으며, 마치 로욜라의 영적 연습을 실행하는 방식처럼 현상학적 연습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도록 촉발했다.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어떤 나쁜 신앙 같은 것을 물리치기 위해.     


난 거기 뛰어 들었다. 난 어떤 항구적인 불안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 기차 안에서, 만약 어떤 방법이 있다면, 난 누군가를 비본래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그 방법을 찾을 것이다. [...] 어떤 종류의 공허함이 존재하는 동안에 [...] 우리가 비자발적인 주체로 스스로를 만드는 모든 대상들을 설명하고, 분명히 하자. [...] 그 모든 주제는 타인이 당신을 본다는 것, 당신 존재의 총체적 전망을 그가 가진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가 당신을 그를 위해 실존토록 하는 바, 그 지향성에 달려 있다. 사르트르적 전투는 계속된다. [...] 세계 안에는 시간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세계 위에 투사한다. 지난 밤에 내가 유일하게 이해한 것을 생각하기 위해.[30]     


펠릭스 가타리는 심지어 일기에 『존재와 무』에 대한 주석도 달았다. ‘부정으로서의 결정에 대하여’ 장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대자적 존재는 세계를 하나의 총체성으로 설립한다. 거기에는 존재하는 것이란 무이다. 이 총체화는 존재 너머 에 속한다. 그것은 총체화하면서 동시에 파편화한다. 나는 모든 것에 속한 이 관념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것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31] 결과는 어떤 절망을 가져다 주는 실존적인 주제, 즉각적인 행복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는 것에 대한 것, 현재 순간의 강렬함과 그것이 이끌어 내는 행동들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나는 행복감을 찾는 것이 필연적인 어떤 것이라고 느꼈다. [...] 이 ‘최고의 위로’는 과거와 미래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것들은 가장 즉자적으로 현재적인 존재에서 발견되어진다. 당신은 세계 내 존재가 되어야 하고, 미미하게 행복한 것이나마, 세계에 행복의 이미지를 부여해야 한다.”[32] “『존재와 무』는 장엄하다. 장려함.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녹색 연필로 모든 구절들에 동그라미를 쳤고, 유쾌해졌다. 그 책은 나를 일깨운 것이다.”[33]     


가타리는 사르트르에 대한 그의 선호를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1990년, 삶의 말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에게 사르트르는 괴테와 베토벤과 같은 작가이며, 내 전부임에 틀림없다. 나는 15년 동안 사르트르의 작품과 행동들에 완전히 푹 빠져 지냈다. [...] 내가 말하거나 했던 모든 것은 분명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소멸, 탈총체화에 관한 그의 독해는 곧 나의 개념인 탈영토화가 되었으며, 그의 계열성(seriality), 실천적 불활성(pratico-inert) 개념은 내게 와서 집단-주체가 되었으며, 그의 자유에 대한 이해와 지식인의 수행과 책임에 관해 그가 구체화한 모든 것이 나에게 정언적이거나 최소한 즉각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남아 있다. 난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에 동의하면서 올바르기 보다, 사르트르와 머물면서 오류를 범하기를 더 선호한다.[34]     


펠릭스는 일찍부터 쭉 아나키스트였지만, 프랑스 공산당의 구성원이었다. 그런데 기숙사 구역에 속한 교외에서 1948년 그는 트로츠키주의 투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국제공산당의 제4인터네셔널 프랑스 지부의 정치적 행동주의자가 되었다. 그때 이 조직은 프랑스 공산당이 노동계급의 가장 악질적인 적으로 상정했던 자그마한 반체제 그룹일 뿐이었다. 가타리는 파리 학생 기숙사 그룹에 있는 트로츠키 분파 넷 중 하나의 지도자가 되었다. 

     

가렌느의 히스파노-수이자(Hispano-Suiza) 공장에서 젊은 노동자들의 특별히 역동적인 그룹 하나가 조직되었다. 이 공장은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프랑스 맞춤으로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1차 세계대전에는 이곳에서 모든 전투기들이 생산되었다. 가렌느는 푸조 공장과 히스파노 공장으로 나뉘어진 노동자 공동체였으며, 이 두 거대한 공장 덕분에 직업활동이 활기를 띠고 있었기에, 일종의 프롤레타리아들의 핫스팟(hotspot)이었다. 히스파노에서 일하는 카리스마적 투사인 레이몽 프티(Raymond Petit)는 젊은 노동자들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으므로, 단숨에 그들의 정신적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영향은 히스파노의 젊은 그룹을 조직하기 위한 지역 노동자 위원회와 경영자회를 설득하여 휴가와 스키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할 정도였다. 그것은 기숙사 네트워크에도 이득이 되었다. 프티의 전염성 강한 열정은 경영진의 의심을 샀고, 그들은 그를 선동가로 취급했다. 그는 젊은 공장 노동자들의 휴가를 위한 노동자 위원회 평생 맴버직을 제안받았다. 프티는 그의 원래의 장소로부터 자신을 잘라내는 위험을 알았지만, 그 승진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새로운 위치에서 그는 히스파노[남미계 노동자들] 공장을 이끌어서, 21살 아래 노동자들이 겨울 스키 휴가를 보내는 첫 번째 기업이 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그들이 3주간의 유급 휴가를 가지는 것과 같았다. 이때가 1950년이었다.      



트로츠키파에의 전념

레이몽 프티는 모든 형태의 관료주의에 사납게 맞서 싸웠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였다. 그것은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들의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 공산당으로부터 숙청당한 뒤, 그는 젊은 로저 파나제(Roger Panaget)와 더불어 자신의 거점과 현장으로 돌아왔다. 파나제는 1947년에 히스파노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주말과 휴가를 쟁취하기 위한 주간 회합을 열었다. ‘젊은 노동자 그룹’(Young Workers Group)과 함께 그는 박물관 방문, 가요 페스티발, 포크 댄스, 동굴탐험 여행, 야외 영화, 극장 방문, 스터디 그룹 그리고 배구 팀들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장거리 여행 중에 팀들은 분업했다. 나무를 자르고 모으기, 청소, 야채 껍질 벗기기 등”[35] 집단 생활은 사람들을 분할하는 위계를 없앴고, 강한 우정이 젊은 남녀 사이에서 발전했다.      


그들의 열정은 히스파노 공장 너머로까지 전달되었고, 그 지역의 다른 젊은이들까지 거기 결합했다. 펠릭스 가타리는 그 경험에 매료되었으며, 그룹 활동들에 탐여했다. 거기서 그는 레이몽 프티와 로저 파나제를 사귀었다. 펠릭스에게 프티는 앙가쥬망[실천]의 모범이었다. “지난 밤 레이몽과 보내면서, 나는 나의 공부가 이제 직접적으로 내 혁명적 이념틀의 부분이 되고 있음을 알았다.”[36]     


가타리가 1955년 라보르드로 옮겼을 때, 그는 로저 파나제에게 카오의 부모님 집에 있는 그의 침실로 이사오라고 제안했다. 가타리는 ‘젊은혁명가 운동’에 속해 있었고, 이전에 이미 국제공산당 조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피선거권자로 허용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트로츠키주의도 어떤 ‘지하의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동일하게 공산주의 운동들에 침투되어야만 하는 어떤 스타일이었다. 그는 티토를 후원하는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군 정당(brigade parties)과 같은 일련의 주도그룹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때 티토는 프랑스 공산당에 의해 탄핵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노동자 여단의 의장에 지원했으며, 1949년 자그레브(Zagreb) 미래 대학의 기초를 닦는 작업을 도왔다. 전투적인 리더로서 그는, 돌을 옮기거나 참호를 파야할 때, 일을 지체하거나 불평하는 일부 반항적인 노동자들의 식권을 압수하기도 했다.  

    

파리의 서부 외곽지역의 공산주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투적인 트로츠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은 아니었다. 티토 지지의 세가 1950년에 널리 전파되고 있었을때, 펠릭스와 그의 트로츠키 그룹은 특히 밤새 지속되었던 폭력적인 전투에서 프랑스 공산당에서 보낸 깡패들의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 공산당(FCP)의 지도급들은 펠릭스를 주목하기 시작했었고, 그를 위험한 티토 지지 선동가로 간주했다. 어느날, 그는 심지어 그의 동지들에게 그의 반-정당 행위들로 기소되어 불려가기도 했다.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면서, 그의 트로츠키주의 친구들은 그 회의에 가지 말라고 설득했다. 거기에 가면 그는 두들겨 맞은 일 밖에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코민포름(Cominform)이 티토의 조력자들을 음란한 뱀이라고 비난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티토는 제국주의의 첩자로 취급되었으며, 파시스트 독재자로 둔갑되었다. 회의 전날 밤, 가타리는 다시 한번 파리에서 어떤 폭력적인 대립에 연루되었다. 한 회합이 유고슬라비아로 가는 여단의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개최되기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파리 연맹(Paris Federation)의 지부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우리는 당 투사들로부터 수 시간 동안 공격 받았다. [...] 마침내 사나운 스탈린주의자들 무리가 우리를 지하철에서 추격해 왔다. 나는 대사관에서 일하는 밀레바라는 젊은 유고슬라비아 여인을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주고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 아름다워서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37] 가타리의 트로츠키주의자 친구인 파울로는 부상을 당했고, 머리에 붕대를 감았다. 그는 다음날 회의에 펠릭스와 함께 갈 것이라고 우겼는데, 그러한 행동은 더 심한 폭력을 쉽게 일으킬 수 있었다. 가타리는 그가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설득했고, 혼자 그 회의에 갔다. 그는 학생 기숙사에서의 그의 명성에 힘입어 상황을 모면하도록 이끌었다. “SH에서 온 빨간머리가 거기 있었습니다. 난 안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서로 토론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주먹질을 하지는 않았어요.”[38] 젊은층에서의 그의 유명세는 사태가 심각해질 수도 있었던 것으로부터 그를 구해 주었던 것이다.   

   


가타리의 정치 분파는 1951년에 파블로-프랑크 그룹과 랑브르티스트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전자는 관계를 청산하고 FCP와 결합되는 길을 택했고, 후자는 그 결합에 반대했다. 펠릭스는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등록했으며 거기 간여할 수 없었다. 그가 트로츠키주의자로 너무 잘 알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소르본에서 투사들의 네트워크를 결성하려 할 때, 그는 프랑스계 중국 친구들에게 스며들었다. 희망이 밝아 왔다. 1949년 마오의 승리가 멀리 동쪽 하늘에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1953년, 히스파노 그룹으로부터 온 레이몽 프티는 첫 번째로 중국을 방문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다음 해에 장 에펠, 르네 뒤몽, 미셸 레이리스, 클로드 로이 그리고 두 명의 학생들을 포함한 49명의 프랑스 대표단이 베이징에 갔다. 펠릭스는 그 그룹의 일부였다. 그의 형은 그 일을 놀라워하면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날 르부르제(Le Bourget)에 차로 데러댜 줄 수 있어? 나 베이징에 갈 거거든.’”[39] 그 짧은 여행은 그가 일기에 쓴대로 무척 즐거웠고, 예측불허였다. “중국까지의 나의 여행에 함께 했던 것은 꿈의 인상이다. 내가 어디에 있었지? 누구와? 난 어떤 역할을 한 것이었을까?”[40] 그가 프랑스계 중국 친구들에 포함되기로 결심했을 때, 가타리는 장 세스노(Jean Chesneaux)를 만났다. 그는 중국 역사가로, 중국 공산당에서 온 투사들을 프랑스 지식인들과 연결해 주는 인물이었다.   

   

가타리가 그의 정치적 업무를 소르본의 FCP ‘철학 그룹’으로 옮기고 있었기 때문에, 1956년 미국 20차 공산당 대회 이후, 국제 공산당의 멤버이자 당 관료인 드니 베르제(Denis Berger)에게 <토론 회보>(Discussion Tribunal)라는 등사판 소식지를 간행하자고 제안했다. 그 소식지는 5개의 단 구성으로 제한되었는데, 거기에는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고 들으려고 하는 긴급한 욕망이 있었다. 흐루시초프 리포트 발행은 몇몇 의문을 제기하는데 유용했지만, 그것은 아직까지 어떤 대안적인 정치 조직화를 제안하는 순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필요한 것은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들에 대해 토론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펠릭스는 미래의 인류학자들인 뤼시앙 세박, 미셸 카트리, 그리고 알프레드 아들러 뿐만 아니라 필립프 지라르와 안느 지아니니 모네(장 모네의 친척으로서, 현대 유럽의 창시자로 간주된다)를 국제 공산당에 데려왔다. 그렇다 해도 그들은 합쳐서 80명 정도의 작은 그룹이었다. <토론 회보>의 유통은 소르본 학생들의 범위를 넘어 확장되었으며, 프랑수아 샤틀레와 앙리 르페브르라는 두 명의 유명인사의 지원을 받았다. 장-폴 사르트르도 계획을 지지했으며 1958년에 이르기까지 기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그는 HK, 즉 ‘하이데거/키에르케고르’라는 이름으로 명단에 올라 있었다.) 사르트르는 프랑스가 이웃 나라들의 파시즘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고, 따라서 FCP와 결속을 다지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956년 가을에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비판적 담론의 필요성은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 보다 긴급한 현안이 되었다. <토론 회보> 그룹은 여타 소식지, 이를테면 <불꽃>(L’Entincelle)과 같은 잡지로부터 밀려난 다른 소규모 공산주의 지식인 그룹을 가까이 끌어들였다. 그 그룹은 유명한 철학자인 빅토르 르뒥, 장-피에르 베르낭, 이브 카셍(마르셀 카셍의 조카이자 FCP의 설립자), 장 브뤼아, 아나톨 코프 그리고 제라르 스피처 주변에 조직화된 파리 11구역으로부터 온 활동적이고 핵심적인 투사들도 포함되었다. 스피처는 1943년에 프랑스 노동자당에 가입했고, 해방 기간 동안에는 FCP에 있었다. 그들은 함께 스탈린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이슈화했고 알제리에서의 전쟁에 대한 FCP의 합당하지 않은 저항, 특히 공산당이 군대에 권력을 부여하는 투표를 지원한 행위를 격하했다. 1956년 3월 12일, SFIO[국제 노동자 동맹 프랑스 지부-프랑스 사회당의 옛명칭] 서기장인 기 몰레(Guy Mollet)는 나중에 사회주의자들이 합법적인 선거에서 이겼을 때, 의회의 의장이 되는데, 이때 군대에 특별한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그 행동 반경을 엄청나게 넓힐 수 있는 법률을 제안했다.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의회 그룹들은 그 법률에 찬성표를 던졌다. 히스파노에서는 전쟁을 위한 모병활동에 대한 즉각적인 저항이 발생했다. 프티와 파나제, 레빌디어(Levildier) 그리고 브리베트는 첫 번째 시위를 조직했으며, 부아-콜롱브에서 경찰과 폭력 충돌을 지휘했고, 이 사건은 FCP의 기관지인 『위마니떼』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두 그룹의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FCP의 지도부가 트로츠키 그룹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탄핵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섬광>(L'Etincelle)의 대부분의 투사들을 위축시켰는데, 스피처의 그룹(시몽 블뤼망탈, 폴 칼베즈)을 제외하고, 그들은 당이 시키는데로 했기 때문이다. 스피처 그룹은 이전의 <토론 회보> 그룹과 연합을 유지했다. 이 유동하는 그룹들은 새로운 등사판 <공산당 반대파 회보>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1958년에 <공산주의의 길>(La Voie Communiste)이 되었다. 국제 공산당의 정치부원 멤버인 드니 베르저(Denis Berger)는 피에르 프랑크에 저항하는 전투를 이끌으며, 이 간행물을 허용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 일은 상이한 그룹들이 함께 어떤 단순한 내부 회보 이상을 지향하도록 했다. 베르저는 그것이 공적으로 가판대에 배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국제 공산당 지도인사들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난 배제되었고, 1950년에야 다시 합류했습니다.”[41] 이때쯤 레이몽 프티와 가타리는 국제 공산당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공산주의의 길>은 간행물 이상이었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라는 주변부 인자들의 작은 조직화였다. 첫 번째 호는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를 위한 공산주의의 길을 찾는 것”[42]. 그 간행물은 알제리 전쟁 반대 시위의 한 가운데에서 태어났다. 이 문제에 관해 이 저널은 1962년 이래 첫 번째 [이론적] 전장이 되었다. 세 번째 호는 “알제리 우선”[43]을 제호로 걸었다. 이 권호는 알제리 전쟁이 4공화국의 기초를 뒤흔들면서 발생한 위기의 시기에 나왔다.      



지도부들은 매주 만났다. 가타리는 클로드 아리외(Claude Arrieux)라는 필명으로 열정적으로 기사를 썼다. 1961년 2월, 그, 클로드 드빌, 그리고 장 라브르는 사르트르를 인터뷰했으며, 1962년 초, 그는 FCP의 혁신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는 글을 썼다. 그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16차 당대회가 어떻게 준비되고, 조직화되었는지를 밝히면서, 그 대회가 가진 스탈린주의적 충성심을 맹비난했다. 히스파노 그룹은 출판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그것은 심카 그룹(Simca Group)이 그들의 첩보활동을 보호하고 스탈린주의 지도부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가타리는 <공산주의의 길>에 재정적 생명줄이었다. 왜냐하면 라보르드에 있는 병원이 그 재원의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45] 알제리 전쟁에 저항한 운동이 일어나자, <공산주의의 길>은 즉각 약 2백에서 3백 정도의 연락처를 만들었다. “그것이 펠릭스가 그 일을 파악했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프로그램에 데려왔고, 그들과 함께 일했지요. 라보르드에서 그의 일은 그에게 매번 유용했으며 그는 그 일들을 이론화하기 시작했습니다.”[46] 그 이론적 아이디어란 고전적인 당이 아니라, 히스파노의 젊은 그룹의 노선을 더 많이 함축하는 그런 조직화로서의 비종파적인 그룹을 창조하고자 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길> 지도자 중 세 명인 드니 베르저, 제라르 스피처 그리고 로저 레이는 알제리 독립을 위한 투쟁을 지원하는 은밀한 일에 보다 특별하게 개입했다. 1959년에 편집자 스피처는 국가안보를 위협했다는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감옥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는 1960년 2월 27일부터 3월 20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단식 투쟁을 벌였다. 그는 18개월 후에 석방되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의 길>에 의해 수행된 엄청난 정보 캠페인 덕분이었다. 그것은 엘리 블롱쿠르(Élie Bloncourt)가 주도한 변론 위원회를 만들어 냈다.[47] 그러는 동안 베르저는 도피자들을 조직하는데 있어서 전문가가 되었다. 프랑스 정보국은 1958년 12월 5일 그를 체포했으며, 10일 동안 구금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국제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1년 2월, 그는 ‘알제리 민족해방 전선’에 속한 여섯 명의 구성원을 탈출시키는 일을 조직했다. 이를 위해 파리 수감자 그룹인 로케트(Roquette)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았다. 1958년과 1965년 2월 사이, <공산주의의 길> 49호가 간행되었는데, 이 권호는 제도적인 지원이 없었음에도, 광범위한 독자층에 의해 읽혀졌다. “알제리 전쟁에 불복종할 권리에 관한” 121인 선언이 이슈화됨과 함께, 그 신문은 그것을 출간했고 즉각적인 주목을 받았다.[48]  

   

<공산주의의 길>에서 학생과 노동자라는 두 상이한 그룹은 서로 연락을 취하며 소르본 대학과 히스파노에 위치해 있었다. 가타리는 이 두 세계 사이를 옮겨 다니면서, 1952년 교육 과정에서 만나 친구가 된 미셸 카트리(Michel Cartry)를 영입했다. 미셸 카트리는 FCP 철학 그룹에서 펠릭스와 합류했고, 파리에 있는 ‘외벽’(la Contrescarpe)이라는 장소에서 만났다. “펠릭스는 우리를 트로츠키에 입문시켰습니다.”[49] 그들은 동지들의 우편함을 <토론 회보>의 복사본으로 채워넣었으며 교조적인 FCP 투사들을 분개시켰다. 그들은 자신들 깐에는 노동계급의 대의를 배반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충격을 받은 것이다. “당의 철학 분과의 회의에서, 누군가가 소리쳤죠. ‘여기 배신자들이 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50] 하지만 그가 <토론 회보> 일을 시작했을 때, 미셸 카트리는 펠릭스가 조직화된 트로츠키주의 투사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펠릭스가 그와 루시앙 세바그에게 좀 더 진전해서, 제4 인터네셔널에 가입하자고 요청했을 때였다. 1958년 소르본 대학의 안 마당에서 특별 권한을 가진 자들의 투표를 비방했을 때, 루시앙 세바그, 미셸 카르티 그리고 필립프 지라르는 공산당 학생 조합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미셸 카르티와 알프레드 아들러는 콩도르세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는데, 둘 다 사르트르의 신봉자였다. “나는 신발도 신지 않은채 벌거벗은 채로 눈길을 가로질러 갓 나온 『현대』(Les temps modernes)지를 사러 갈 수도 있었지요.”[51] 사르트르가 공산주의에 가까워졌을 때, 아들러는 1953년 FCP에 가입하기로 결심했으며, 미셸 카트리, 피에르 클라스트르 그리고 루시앙 세바그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다. 가타리는 라캉의 저술들을 그에게 보여줌으로써 아들러와 사르트르 사이에 어떤 거리를 조성한 책임이 있었다. “그것이 내가 흔들리게 된 계기였지요.”[52] 그러나 정치적으로, 아들러는 여전히 그 자신을 흠결 없는 공산주의자로 간주했다. “난 실재로는 집 벽에 스탈린의 초상을 걸어놓고 있었지요.”[53] 1956년에 사태가 변했다. 아들러와 그의 친구들은 <공산주의의 길>에 합류했고, 그들의 구성원들은 그때 미래의 작가인 피에르 파쉐(Pierre Pachet)와 미셸 뷔텔(Michel Butel) 뿐 아니라 가타리 갱단 출신인 다른 소르본 학생들도 영입했다. 유명한 영입인자들 중에는 다니엘 콩방디(Daniel Cohn-Bendit)의 동생인 가비 콩방디(Gaby Cohn-Bendit)도 있었다. 1956년에 그도 역시 소르본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1956년 가비 콩방디의 친구인 클로드 비비앙과 피에르 파쉐도 철학 그룹에 속했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만나 본 그룹 중 가장 탁월한 그룹이었지요.”[54] 비비앙은 가장 어린 멤버였고, 그는 모든 토론과 공동체 생활에 참석했다. 그들은 라탱지구(Latin Quarter)에 살고 있었다. 이때는 파시스트그룹과 긴장을 유지하던 시기였고, 반전 시위가 자주 일어나던 때였다. 스탈린주의로부터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데 그의 방법은 유용했다. 가타리는 비비앙을 라보르드에 초대해서 한 주간 지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나는 광인들을 만났고 그들이 나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지요.”[55]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비앙은 이틀을 잡고 라보르드에 갔지만, 결국에는 4년을 머물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그의 철학연구와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또한 <토론 회보>의 저항 활동에도 간여했다. 펠릭스는 그가 트로츠키를 읽도록 했으며, 제4인터네셔널에 가입하도록 했다. 1956년에 프랑스 공산당이 철학 분과를 추방하고 UEC를 만들었을 때, 비비앙은 그곳의 비서관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의 길>에 가타리, 스피처와 더불어 합류했는데, 비비앙은 이들을 몹시 흠모했다.[56] 드니 베르저와 미래의 법관인 시몽 블뤼망탈도 여기 함께 했다.   

  

1962년까지 <공산주의의 길>은 알제리 식민 전쟁이라는 악행에 효과적으로 이의제기를 했지만, ‘에비앙 협약’이 조인되자, 상황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모함메드 부디아프(Mohammed Boudoaf)의 ‘사회주의 알제리 혁명당’을 죠프루아-생-힐레르 가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와 같이 여전히 타협의 여지는 있었다. 가타리는 부디아프와 가깝다고 느꼈고, 그를 <공산주의의 길>에서 접촉했다.[57] 사태는 매우 빠르게 붕괴되어 갔고, <공산주의의 길>은 1965년에 사라졌다. 어떤 구성원들은 벌써 마오주의를 습득했는데, 그것은 시몽 블뤼망탈과 베니 레비(Benny Levy)가 권유한 것이었다. 반면 다른 구성원들은 벤 벨라(Ben Bella, [알제리의 혁명 지도자. 이후 수상을 거쳐 대통령이 됨])에 대한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1961년 <공산주의의 길>은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글을 출판했다.[58] 하지만 1963년에 알제리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 간행물은 마오주의의 색채를 띄었고, 중국 공산당의 정치 프로그램에 관한 25가지 사항들을 출간했다.[59]    

 

이러한 움직임들은 가타리의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리고 1964년 그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비판적 연구물을 썼다. 그는 점점 그 저널의 방향성에서 괴리되고 있다고 느꼈으며, 아주 빠르게 그 일을 그만두어 버렸다. “나는 그 모든 일들에서 급박하게 손을 뗐지요. [...] 1964년, 난 아예 진저리가 났습니다.”[60] 특히 제라르 스피처는 가타리의 결정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를 <공산주의의 길>의 자금 담당에서 해고해 버렸다. 그러나 가타리는 어떤 기관이 그것의 소규모 문화 자본에 따라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진공 속에서 존속하는 것이라고 느꼈을 때, 다른 곳에서 다른 가능성들을 창조하기 위해 그것을 파괴하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1964년에는 학생운동이 보다 급진적으로 되어갔고, 그것이 그를 이끌어 갔다.      


Jaques Lacan(1901-1981)


펠릭스초기 라캉주의자

1950년대, 가타리는 그의 정치적 투쟁성과 라캉주의 전문가로서 알려졌다. 소르본에서 그는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는 라캉에 의해 쓰여졌지만 알려지지 않은 텍스트들을 발굴했으며, 라캉의 매우 모호한 연구를 초심자들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이론가로서 특정한 권한을 누렸다. 그는 또한 라보르드에서의 임상 연구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소르본에서는 바로 그 점에서, 나는 라캉인 것처럼 알려졌으며, 라캉에 대한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있었습니다”[61]        


이런 것 때문에라도 가타리와 정신분석가인 장 위리의 만남은 결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타리는 1945년에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가 위리의 학생이 된 때는, 기껏해야 15살 때였다. 그 당시 그는 그의 학생 기숙사 그룹에서 정기적인 회의를 조직하고 있었다. 페르낭의 형인 장은 그때 21세였고, 형제가 살고 있던 가렌느-콜롱브에서 어린 가타리를 처음으로 만났다. 생 알방(Saint Alban)으로 위리가 떠난 것은 펠릭스와의 우정에 잠시 간의 틈을 만들었고, 당시 펠릭스는 약리학을 공부하면서 정말 지루하고 답답해했다. 1950년 12월, 가타리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망설이던 페르낭은 정신과의사이자 그의 형인 장을 방문하자고 제안했다. 그때 장은 루아르에셰르(Loir-et-Cher)의 소메리 병원의 감독관이었다. “페르낭은 내게 말했다. ‘무엇보다 그를 망치지는 마.’ 그는 내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62] 가타리는 장 위리의 정신과 연구에 매료되었다.      


장 위리는 가타리에게 라캉을 읽도록 강하게 설득했고, 그에게 라캉의 연구에 대한 정보를 계속 알려주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의 정신과 업무가 라캉이 가르치는 파리에 갈 시간을 너무 적게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장 위리는 가타리보다 6살 많았으며, 도덕적인 고해신부 같은 역할을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상이 다른 것으로 대체된 것과 비슷했다. 1952년, 가타리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JO(Jean Oury) 노선: 보호 금지, 즉 어떤 식의 공격(타격, 부상 입히기)이 없는 한 사태를 그냥 놔두기. [...] 이를 위해 당신은 침묵하고 냉정해질 필요가 있음. 단순해지기.”[63] 26살에 장 위리는 이미 노련한 정신과 의사였으며, 가타리와 더불어 그의 경력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지리한 토론으로부터 몇몇 실효성 있는 조언을 이끌어냈다.      


Jean Oury(1924-2014)


장 위리는 가타리가 약리학을 그만둘 수 있도록 지원했으며, 그가 철학 공부를 시작하도록 격려했고, 라캉과 더불어 사르트르 그리고 메를로-퐁티를 읽기 위한 몇몇 조언들을 했다. 이것은 위리가 가타리의 삶에서 해낸 역할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들 사이에 자라났던 관계의 강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라보르드에서 그들이 창조했던 강력한 폭풍과도 같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기계가 가진 파괴불가능성을 의미했다. 가타리는 그의 스쿠터를 타고 파리와 소머리(Saumery)에 있는 장 위리의 병원 사이를 오갔다. “우리는 밤새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구체적이고 단단한 음악[과 같은 담론]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새 소리들을 녹음했으며 그것은 ‘박하와 물’이라고 우리가 불렀지요. 그것은 어떤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기 위해 대상들을 취하고 그 주위에서 문장들을 만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64]       


위리 덕분에 가타리는 가족의 특성에 관한 라캉의 텍스트를 읽었다. 그것은 거울상 단계, 공격성 그리고 지성적 세계라는 안온한 개념보다 앞서 나온 라캉의 텍스트들이었다. 그는 그러한 텍스트들을 진심으로 배워나갔으며, 그것에 의해 감응되어, 1951년과 1952년에는 듣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그 내용을 읊어줄 정도가 되었다. 1953년, 가타리는 파리의 렌느 가에 있는 철학학교(Collège de Philosophie)에서 개최한 괴테에 대한 라캉의 강의에 갔다. 라캉은 그를 열광시켰다. 1954년 말에 라캉은 파리의 생-안느 정신병원에서 연 세미나에 가타리를 초대했다. 이것은 라캉의 강의가 사람들로 가득 차기 이전이었다. 라캉이라는 대가의 세미나 참석한 사람들 중에 “나는 첫 번째 비정신분석학자, 의사 아닌 자였다.”[65] 이 당시 라캉은 아직 파리의 지성계에 평판이 나지 않았었다. 같은 기간 동안 가타리는 언어학 분야를 발견했는데, 이 영역은 그가 이후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같은 해에 라캉의 그 유명한 로마 강연이 있었다. 여기서 라캉은 정신분석학에 있어서 언어학적 방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렇다 해도 가타리가 언어학을 도입한 것은 라캉 덕분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언어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라캉과 그의 블롱델(Blondel)에 대한 독설 때문에 그것은 내게 하나의 주제가 되었을 뿐이다. 이자르(Izard)와 그의 시에 대한 사랑, 다른 무엇보다 더. 루당(Roudant) 때문에. 나는 내가 얼마나 지금 그의 기획을 이해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언어 안에 구현되지 않는 사유란 존재하지 않는다.”[66]     



언어학이 점점 통속화되는 동안, 언어가 기능하는 방법에 대한 그의 관심 너머에서 가타리는 어떤 작품(opus)을 창조함으로써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 욕망은 그에게 반복강박과 같았다. 1953년 9월 1일, 그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난 책을 쓰기를 원한다.”(I WANT TO WRITE A BOOK). 그 달 말에 그는 도대체 무엇에 대해 쓸 것인지 생각했다.      


글쓰기. 난 글쓰기를 원한다. 그것은 어떤 긴급한 요청이 되고 있다. [...] 하지만 무엇을 쓰지? 아마도 나의 문제들로 쓰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과연 철학적 문헌을 작성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죽음에 대해? 하지만 난 어떤 것도 읽지 않았다. 얼마간 난 어떤 것에 대해 독서를 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 그렇다, 물론, 하지만 그것들은 기억이 도래할 때에만 내게 온다. 당신은 그것들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땅을 파고 들어가기, 그것이 첫 번째 구멍이다. 그것은 상황에 관한 어떤 시적 깊이를 요한다. 소외된 것들을 시적으로 취하고, 철학적인 어떤 것으로 취하는 것이라면, 나의 선택은 소설이나 일기다. 난 지루한 소설과 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설을 쓸 수 없다면, 일상을 쓰는 것, 나와 함께 있는, 미셸린, JO. 어떤 이상적 여자에 대해 쓰는 것, 등등. 어떤 것, 내가 거기 끼어 있도록 소통하고 응결시키는 어떤 것. 책을 쓴다는 것은 내 청년기의 거대한 신비다.[67]     


 그 당시, 가타리는 라캉적인 ‘언어’를 언급하면서, 그의 스승[라캉]에게 편지를 썼다. 그 스승은 만나서 이야기할 시간을 잡자고 답장했다. 마침내 가타리는 ‘정신과 치료 의자’에 앉았다. 라보르드 진료진(모든 사람이 바라던 것)에 첫 번째로 발탁된 것이다. 그것은 한 세션 동안 50프랑을 받는 일이었는데, 당시로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클로드 비비앙을 정치적으로 전향하게 한 후, 가타리는 1956년 그를 데리고 라보르드로 갔으며, 생-안느의 라캉 세미나에도 데려갔다. “그것은 내게 엄청나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내개 알고 있던 소르본의 교수들을 박살내고 있었거든요. 그들은 단순한 인물들이 아니었지요. 이를테면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장 발, 페르디낭 알키에 등이었습니다. 난 열광되었습니다. 그리고 펠릭스는 라캉과 더불어 분석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습니다.”[68] 1954년 가타리는 오로지 라캉에 대해서만 집중했다. “나는 철학자인가? 난 그냥 철학도일 뿐인가? 최근 철학적 주제에 대한 관심사의 유일한 징후는 라캉의 가르침에 있었다.”[69]      


가타리의 노트들은 기계에 관한 그의 아이디어의 출현을 드러내는데, 이 주제는 그가 이후 체계화하는 것이지만 1954년 후반과 1955년 초반기, 라캉의 강의들을 들으며 이미 표명된다. “개체-기계로서 주체의 무의식적 표현들이 존재하는 바, 만약 그 표현들이 실재 안으로 재도입되어야 한다면, 특별한 취급을 요청할 것이다.”[70] “데카르트에 따르면 기계는 시계다. 이 기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다(아라공Aragon은 시계에게 경의를 표한다).”[71] “만약 기계가 맥스웰의 악마처럼 지식의 퇴락한 형태들을 통합한다면, 그것은 기적을 성취할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엔트로피의 역습이 있다.”[72] 구조에 대립하는 기계는 이후 펠릭스 가타리의 유명한 주제들 중 하나로 탄생한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유명한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73]  


  



[주석]     

1. Jean Guattari, interview with the author.

2. Jean Guattari, interview with Eve Cloarec (November 15, 1984), IMEC archives.

Ibid.

3. Ibid.

4. Ibid.

5. Félix Guattari, interview with Éve Cloarec, IMEC archives.

6. Félix Guattari, notebook no. 3 (November 27, 1952), IMEC archives.

7. Félix Guattari, notebook no. 3 (December 19, 1952), IMEC archives.

8. Félix Guattari, notebook no. 4 (January 13, 1955), IM EC archives.

9. Félix Guattari, interview with Éve Cloarec, IMEC archives.

10. Ibid.

11. Ibid.

12. Félix Guattari, La révolution moléculaire (Paris: Encres, Recherches, 1977), 11-12.

13. Félix Guattari, interview with Eve Cloarec, IMEC archives.

14. Ibid.

15. Ibid

16. 위리에 따라 제도교육은 학교 안에서의 생활을 위한 규율들을 수립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학생들이 의견을 표출하도록 격려하고 선생들과 학생들이 서로 도우면서 밀접한 관계에서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위리는 이러한 교육론이 군사 학교들을 대체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이 되리라 희망했다.   

17. Félix Guattari, notebook no. 3 (November 14, 1952), IMEC archives.

18. Félix Guattari, interview with Éve Cloarec, IMEC archives.

19. Ibid.

20. Félix Guattari, 1971 Journal, La Nouvelle Revue Francaise 563 (October 2002):320.

21. Ibid.

22. Félix Guattari, interviewwith uve Cloarec (July 10, 1984), IMEC archives.

23. Micheline Guillet (Kao), interviewwith eve Cloarec (September 20, 1984), IMEC archives.

24. Ibid.

25. Jean Guattari, interview with Virginie Linhart.

26. Félix Guattari, interview with Éve Cloarec (August 23, 1984), IMEC archives.

27. Félix Guattari, interview with Éve Cloarec (July 10, 1984), IMEC archives.

28. Félix Guattari, notebook no. 4 (November 1953), IMEC archives.

29. Félix Guattari, notebook no. 1 (January 1951), IMEC archives.

30. Félix Guattari, notebook no. 2 (October 4, 1952), IMEC archives.

31. Félix Guattari, notebook no. 2 (October 8, 1952), IMEC archives.

32. Félix Guattari, notebook no. 2 (October 13, 1952), IMEC archives.

33. Félix Guattari, notebook no. 2 (October 24, 1952), IMEC archives.

34. Félix Guattari, "Plutôt avoir tort avec lui," Libération (June 23—24, 1990).

35. Ouvriers face aux appareils, une expérience de militantisme chez Hispano-Suiza (Paris: Maspero, 1970), 39.

36. Félix Guattari, notebook no. 3 (November 27, 1952), IMEC archives.

37. Félix Guattari, "1971 Diary, [September 10—13]," La Nouvelle Revue Frangaise 563(October 2002):349.

38. Félix Guattari, interview with Eve Cloarec (August 23, 1984), IMEC archives.

39. Jean Guattari, interviewwith Eve Cloarec (November IS, 1984), IMEC archives.

40. Félix Guattari, notebook no. 4 (November 26, 1954), IM EC archives.

41. Denis perger, interview.

42. La Voie Communiste 1 (January 1958), BDIC archives.

43. Headlines of La Voie Communiste 3 (April—May 1958), BDIC archives.

44. La Voie Communiste 20 (February 1961), BDIC archives.

45. See chapter 2.

46. Denis Berger, interviewwith the author.

47. On March 17, 1960, a telegram signed by Élie Bloncourt, Claude Bourdet, Albert Chåtelet, Gilles Martinet, Daniel Meyer, Marcel Prenant, Oreste Rosenfeld, Jean-Paul Sartre, and Laurent Schwartz was addressed to the president of the French Republic, to the attorney general, and to the minister ofthe armies demanding the liberation of Gérard Spitzer, published in La Voie Communiste 12 (April 1960), BDIC archives.

48. "The Manifesto of the 120," La Voie Communiste 16 (September 1960). 이것은 이 텍스트의 첫 번째 출간본이었으며, 불복종의 입장을 취했다.

49. Michel Cartry, interview with the author.

50. Ibid.

51. Alfred Adler, interview with the author.

52. Ibid.

53. Ibid

54. Claude Vivien, interview with Virginie Linhart.

55. Ibid

56. 제라르 스피처는 저항의 초기 멤버가 가지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 헝가리 의사였고 추방당했다. 그는 1943년 그레노블에서 레지스탕스에 가입했다. 그가 15살 때, 그는 파리 구역을 책임진 프롤레타리아 계급 출신의 명사수였다.

57. Interview with Mohammed Boudiaf, La Voie Communiste 31 (November—December 1962), BDIC archives.

58. La Voie Communiste 23 (June—July 1961), BDIC archives.

59. La Voie Communiste 36 (June—July 1963), BDIC archives.

60. Félix Guattari, interview with Eve Cloarec (July 10, 1984), IMEC archives.

61. Ibid.

62. Jean Oury, II, donc (Paris: Matrices, 1978), 25.

63. Félix Guattari, notebook no. 2 (October 2, 1952), IMEC archives.

64. Jean Oury, interview with the author.

65. Félix Guattari, interview with Eve Cloarec (August 29, 1984), IMEC archives.

66. Félix Guattari, notebook no. 3 (March 28, 1953), IMEC archives.

67. Félix Guattari, notebook no. 3 (late September 1953), IMEC archives.

68. Claude Vivien, interview with Virginie Linhart.

69. Félix Guattari, notebook no. 4 (May 1954), IMEC archives.

70. Félix Guattari, "Lacan 1954—55 notebook," class notes (December 15, 1954), IMEC archives.

71. Félix Guattari, "Lacan 1954—55 notebook," class notes (January12, 1955), IMEC archives.

72. Félix Guattari, "Lacan 1954—55 notebook," class notes (January 20, 1955), IMEC archives.

73. Félix Guattari, "Machine et structure," lecture for the Ecole Freudienne de Paris, 1969, published in Change 12. Reprinted in Félix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Paris: Maspero, 1972; repr. Paris: La Découverte: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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