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체스카 페란도의 포스트휴머니즘
원문서지사항: Francesca Ferrando, Philosophical Posthumanism(Bloomsbury Publishing, 2019), pp. xi ~ 6
프란체스카 페란도 홈페이지: http://www.theposthuman.org/
포스트휴머니즘이 선취한 것과 같이 포스트휴먼적 사유에 있어서 페란도의 방식은 인간의 세기말적 위기라는 의미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대신에 페란도가 촉발하는 바는 이념들, 정동들, 욕망들 그리고 열망들의 풍성한 흘러넘침이며, 이것은 그녀가 인문학 안에서 아주 넓은 범위의 담론들을 가로질러 작동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 담론들은 이를테면 철학과 같은 엄격한 학제와 더불어 미디어, 젠더 그리고 탈식민주의 연구들과 같은 간학제적(interdisciplinary) 영역들도 포함하지만, 결코 그것들 중 하나에 제한되지는 않는다. 페란도는 고전주의자이면서 마찬가지로 미래주의 사상가다. 즉 박식함과 경쾌함을 함께 갖추었으며, 헌신적이면서도 비판적이고, 개념적인 동시에 시적이다. 그녀는 잠재적으로 모순적인 관념들과 정동들을 결합하면서 균형을 맞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어떤 본래적인 논증 스타일을 벼리면서 정보를 전달하고, 자극을 주며, 도발적인 텍스트들을 생산한다. 프란체스카 페란도(Francesca Ferrando)가 이러한 긴장들을 조화시키고, 그것들을 담론의 보다 높은 질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도록 하는 것은 포스트휴먼적 조건 자체의 역설적 구조에 관한 그녀의 감식능력이다. 나는 포스트휴먼을 탈-인간주의와 탈-인간중심주의 사이의 수렴 현상으로 정의한 바 있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 한편으로 이성적 인간(남성)이라는 보편적 이념의 비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종적 우월성의 거부였다. 페란도의 연구작업은 이러한 거칠고 맹렬한 영역에 세워지며, 그녀가 인간주의와 인간중심주의 양자를 탈영토화하도록 영감을 주는 힘은 활력의 과잉(exuberant excess)이다.
페란도는 과잉을 개념들의 누증(over-compilation)과 침윤(saturation)의 형식으로 이해한다. 이때 개념들은 자신들을 가장 바깥 경계들로 밀어붙임으로써 마침내 스스로를 폭발시키게 된다. 이는 결핍으로서의 욕망에 반하여, 흘러 넘치는 것으로서의 욕망 개념에 관한 어떤 방법론적 적용에 다가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방법적 적용이란 라캉은 아니고, 헤겔은 더욱 아니며, 오히려 스피노자와 함께 하는 들뢰즈의 입장과 공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활력의 양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 아니며, 근원적으로 또는 배타적으로 비판적인 것도 아니다. 즉 이것은 창조성의 생산적인 정도를 표현하고 유지한다. 페란도가 바라는 것 - 다시 말해 그녀의 연구를 가동하는 개념적 욕망 - 은 ‘아직 아님’의 영역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그래서 관건적으로 요구되는 사변적 성찰들을 표현하기 위해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잉(excess)의 전략적 사용은 프란체스카 페란도로 하여금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 그리고 사유하는 주체의 이미지를 개괄하기 위해 철학적 사유의 기존 구조들을 초과하여 나아가도록 한다. 페란도에게 사유란 인간(남성)/인류의 예외적 특권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적 개별체들의 넓은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분배되는 것이다. 이로써 그녀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생산하는데, 여기서 인간은 초월적 의식을 부여 받은 어떤 자율적 행위주체로서가 아니라, 타자들, 즉 인간과 비인간, 유기체와 비유기적 타자들 둘 모두와의 다양한 연결들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유하는 어떤 내재적 - 체현되고(embodied) 내장된(embedded) 관계적 - 개별체로 이해된다. 이 주체의 전망과 그것이 정의하는 타자성의 풍성한 수용은 때때로 성급한 독해를 만들어 내지만, 드러난 이론적 복잡성은 페란도 텍스트의 통찰력 있는 힘에 의해 보완된다.
휴머니즘을 넘어서는 것에 대하여
지난 수 십년 동안, 아카데믹한 인문학 서클들이 철학적인 후기-구조주의과 해체, 그리고 그와 연관된 분야로서 비판적 반-인간주의라는 방사능 낙진을 통과해 살아 남는 동안, 많은 새로운 발전들이 또한 수립되었다. 페미니즘적, 탈식민지적 그리고 반인종주의적인 비판 이론들을 포함하여, 환경 행동주의자들 장애인권 옹호자들, 퀴어 그리고 LGBT 이론가들은 유럽 휴머니즘의 범위, 기초 원리 그리고 성취들과 서구 근대성 기획에서 그것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운동들은 ‘인간(남성)’에 대한 인간주의적 관념에 함축된 것, 단적으로 ‘모든 것들의 규준’으로의 인간이라는 관념에 대해 보다 집중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이 이념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완전성과 개별적이고 신체적인 완전성을 결합한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수 세기 동안 인간 종 전체에 있어서 자기-반성적 이성에 대한 특권적 접근을 요청하는 예외적인 문명의 표준으로 나아갔으며, 특히나 유럽 문화에서 두드러졌다. 과학과 기술의 전개를 통해 이성에 대한 믿음은 인간성의 유럽중심적 전망의 합리적 진보라는 목적론적 전망과 단단히 묶인다. 1966년에 쓰여진 『인간의 죽음』에서 푸코의 날카로운 분석에 따르면, 맑시즘조차 사적 유물론의 방법을 통해, 유럽적 사유의 주체를 인간 사회와 문화 진화의 동력이라는 왕좌에 계속 올려 놓는다. 게다가 이성적 자기-확신은 유럽을 이성과 진보의 보편적 권력과 동등하게 만드는 문명 모델을 위한 기초로 정당화하고 포장하면서 주류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유럽 식민지 확장 정책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이 되었다.
페란도의 연구는 휴머니즘에 대한 이런 근본적인 철학적 비판들에 의해 풍부해지고 영감을 얻지만, 그것들에 의해 제한되지는 않는다. 탈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 세대들은, 구조화하는 권력관계에 관한 보다 정확한 분석을 생산하기 위해 보편적 입장으로부터 주체성을 탈구시키면서, 반-인간주의를 이론적이면서 정치적인 기획 둘 모두로 받아들이지만, 다른 이론적 움직임들은 휴머니즘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룬다. 예컨대 부분적으로 페미니즘 정치학은 생생한 경험과 여성적 체현의 특수성 둘 모두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기초적인 접근에 있어서 ‘입장 이론’(standpoint theory)을 개진했다. 비록 그것이 여성들 사이의 다양성(diversity)에 심대한 관심을 부여했다 해도, 페미니즘적 주체는 철회되지 않았고, 오히려 어떤 노마드적 비-획일적 특이성으로 재전유되었다. 이 주체는 권력에 대한 거시정치적 분석을 기초하기 위해 그리고 작동가능한 대안들을 세우기 위해 방법과 정치적 전술 둘 모두에 있어서 정동적이고 관계적인, 체현되고 내장된, 즉 조건화된 지식들(situated knowledges)을 생산한다.
페미니즘적, 반-인종적 그리고 다른 사회적 운동들에 기반한 이 내재적이고 유물론적인 접근방식은 페란도 저작의 상이한 지점들에서 뚜렷히 드러나면서 급진적 신-휴머니즘에 관한 자신의 변형들을 발전시켰다. 고전적 휴머니즘에 대한 급진적 비판은 두 가지 상호연관된 생각들을 겨냥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기-타자 변증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 개념의 가치절하이다. 타자성은 여기서 지배적인 주체적 위상의 부정적 대립항으로 정의되며, 열등성을 의미하는 위계 영역 안에 기입된다. 이것은 스피노자적 신-유물론에 의해 촉발됨으로써, 이제 조건화된 또는 내재적인 방법에 의해 극복된다. 사실상 차이의 변증법은 부정적 차이의 범주와 일치되는 실재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음산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즉 여성, 원주민 그리고 대지의 ‘타자들’이 가진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실존이 불안정해지며, 모든 종류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들의 신체들은 가능한 해법으로서의 휴머니즘을 고려하는 권력, 지배 그리고 배제에 관한 중차대한 이슈들을 제기한다.
개량된 휴머니즘의 여러 가지 형태들은 탈식민주의 안에서도 드러나는데, 이것은 프란츠 파농(Frantz Fanon)과 그의 선생인 애매 세자르(Aimé Césaire)의 반식민지 현상학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그들은 휴머니즘을 어떤 불충분한 유럽적 기획으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국주의적 폭력과 구조화된 인종주의에 의해 배반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문화들 내에 여러 다른 종류의 휴머니즘이 존재한다고 논증했다. 이 입장은 환경적이고 초국적 환경 정의 행동주의자들에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근대성의 인식론적, 물리적 폭력에 관한 비판을 유럽 식민주의의 비판과 결합한다. 페란도의 휴머니즘 연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고전들에 기초하며, 현대 포스트휴머니즘 그리고 트랜스휴머니즘에 의해 작동되는바, 이러한 모든 비판적 관심에 의해 구조화되지만 이것들을 넘어 선다. 그녀는 [이를테면] 다양한 담론 공동체들을 가로지르는 개인 웹사이트를 제작하면서, 그러한 공동체들을 존중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것에 대하여
인간중심주의를 대체하는 논쟁은 어떤 상이한 질서에 속하며, 비록 종종 휴머니즘 비판과 교차된다 해도, 그것과는 상이한 계보학적 노선을 따른다. 종적 우월성에 대한 비판 - 이 행성에 가해지는 인류의 폭력적 규칙 - 은 인간 자체를 정의하는 규준들의 비판이라는 다른 노선을 열어 놓는다. ‘인간(남성)’은 과학적 진보와 지구에 대한 경제적 지배의 조합에 따라 탐욕과 강탈을 강화해 온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종의 대표로서 책임을 면치 못한다. 페란도의 저작에서는 명백하게 모든 것에 대한 보편적인 휴머니즘적 척도로서 ‘인간’도 아니고, 사유라는 임무에 있어서 중심 위치를 요청할 수 있는 지배 종으로서의 인류도 아니라고 설명된다. 현대 세계를 틀지우는 포스트휴먼적인 수렴 안에서, 사유의 힘은 많은 종들을 가로질러 분배되고 자주 기술적으로 매개된 지식생산 시스템들, 즉 네트워크들과 컴퓨터 프로세스에 의해 수행된다. 유전공학적이고 전산적인 발전들은 오로지 인간적 삶/생명으로서의 바이오스(bios, 생명론 또는 전산입출력체계-역자)와 보편적 생명력(zoē) 간의 분할, 즉 동물과 비인간적 개별체들의 삶/생명 분할에 도전해 왔다. 대신 앞으로 도래할 것은 어떤 인간/비인간 연속체로서, 이것은 전반적인 기술적 매개에 의해 통합될 것이다.
이 전환의 정치적 함축들은 의미심장하다. 만약 페미니즘적, 퀴어적, 반-인종주의적, 생태적 그리고 탈식민지적 비판들에 의해 진전되는 휴머니즘의 교정이 성화되고(sexualized)과 인종화된 - 하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 ‘타자들’을 강화한다면, 인류의 위기는 자연적인(naturalized) 타자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따라서] 동물들, 곤충들, 식물들, 세포들, 박테리아 그리고 사실상 이 행성과 우주는 어떤 정치적인 각축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 비인간 개별체들과 행위자들은 페란도의 저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그들은 마치 ‘개념적 인물’처럼 재고되고 재개념화된다. 그 주요한 기능은 자연-문화 구별,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인간중심적인 예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페란도의 저작에서 도발적인 면모는 비인간 종들의 급진적 타자성 안에서 특별히 즐거워하는 그녀의 능력이다. 여기서 이들 비인간 종은 공포와 통제가 아니라 경탄과 찬탄의 원천이 된다.
프란체스카 페란도의 저작에서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측면은 통합적인 문해력(multiple literacies)이라는 재능이다. 독자들은 그녀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인문학에 속하는 문화에서부터 과학과 기술에 속하는 문화로, 그 둘 사이의 어떤 이원론도 피하면서, 이동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페란도가 역사, 문학, 철학 그리고 종교 연구가 어떤 지구-중심적, 매개적, 그리고 비인류중심적인 참조틀 안에서 지구행성적 전망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요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많은 전통적인 인문학 학제들을 요구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너무 깊숙이 인류중심주의적 습관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기에, 인류 절멸의 전망은 고사하고, 인류중심주의를 탈중심화하는 것에 대해 쉽게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란도의 연구는 또 다른 복잡성의 수준을 가지는데, 그것은 젠더, 페미니즘, 퀴어, 인종과 탈식민주의 뿐 아니라 문화 연구, 영화, 텔레비전 그리고 미디어와 같은 연구의 장들을 급진적으로 횡단하기 때문이다. 이 ‘연구들’의 영역은 인문학의 중심에서 주류적인 것으로서 유럽중심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방법론적 민족주의를 드러낸다. 이러한 것들은 인문학 학제의 경계들을 확장하고 어떤 면에서 그것을 파열시킨다. 하지만 과학적 근거와 폭력의 양립가능성을 깨닫는 것은 명백하게 휴머니즘에 관한 거부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 대신 등장하는 것은, 21세기 휴머니즘의 혁신적인 재공식화를 포함하여, 인간과 거기 붙들려 있는 관계망에 관한 일련의 대안적 전망이다.
근원적으로 기술친화적이 되는 것, 그리고 현대 과학과 기술의 매개적 용어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에 대해, 페란도는 휴머니즘 비판과 더불어 인간중심주의의 거부 둘 모두를 완성해 냈다. 하지만 페란도는 페미니즘적 신체의 정치학을 과학과 기술 연구들에 통합하는 것과 일치하여, 과학적 게임의 규칙도 함께 변경하고자 한다. 해러웨이와 브라이도티를 따르면서, 그녀는 인간중심주의를 인간와 비인간 간 일련의 관계적 연결들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 연결에는 원주민들, LGBT, 다른 종들, 기술적 인공물들 그리고 어떤 우주적 타자들이 포함된다. 인류로부터의 페미니스트의 집단적인 탈출은 어떤 위기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새로운 시작의 폭발을 의미한다.
비록 페란도가 우리의 기술적으로 진보한 역사적 조건의 비인간적 면모들, 즉 집단 이주, 전쟁들, 테러리즘, 주거지 강탈, 외국인 혐오와 추방에 대해 적확하게 깨닫고 있을지라도, 또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녀는 연대, 공감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책을 관통하여 흐르는 어떤 깊은 정서적 광맥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우리 종[인류]에 대한 불신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러한 정서는, 비판적 거리란 쉽게 이루어지지 않지만, 협력적인 노력을 요청한다는 연민과 각성에 의해 풍부해진다. 심지어 우리들 가운데 가장 기술친화적인 사람이라 해도 대개 새로운 기술이 가진 해방적이고 횡단적인 잠재력조차 그것들을 지지하는 금융적인 그리고 다른 사회적 기구들의 확고한 보수주의와 충돌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포스트휴먼적 전회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병리적인 것들, 심지어 고통까지 포함하여, 정동적 힘들, 정념에 의해 충전된다.
더 나아가, 페란도의 담론적인 다중우주는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섹슈얼리티의 다형적이고 변형적인 구조로 되돌아가는 어떤 생기론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섹슈얼리티를 젠더 너머에서 그것 없이 재사유하도록 허용한다. 성차에 있어서 이탈리아 학파를 상당히 의식하면서, 그녀는 그것의 재생산 능력 - 모성적 유물론에서 연구중인 - 을 포함하여 또한 여성적 체현성의 생성력[생식능력]을 재검토한다. 페란도의 접근은 섹슈얼리티가 아마도 사회화된 섹스-젠더 이항성에 붙잡혀 있지만, 그것으로 환원가능하지는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젠더 체계에 속한 포획의 이항적 메커니즘은 섹슈얼리티가 횡단적이고, 구조적이며 생기적인 함축들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생명-력으로서의 섹슈얼리티는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정동과 욕망의 조직화를 위한 비-본질적이고 종-횡단적인 존재론적 구조를 제공한다. 페란도의 지성적 우주에서, 그것은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 타자들 간의 혼종적인 교차-수정(cross-fertilizations)과 생성적인 만남들을 포함하는 가능한 섹스들과 관계들의 환등상(phantasmagoria)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감정은 창조적 실천으로서의 비판적 사유에 대해 표현하는 심원한 신뢰이다. 그녀는 인간중심주의와 같은 오래된 사유의 습관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것을 즐기도록 도울 수 있는 어떤 유쾌한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실천한다. 그녀는, 비일원적인 근거의 흘러넘침과 더불어, 낯선 영역들 안으로 우리를 유혹하면서 사유의 새로운 지평으로 두려워하기 보다 기운을 가져다 주고 그녀가 발견한 것들을 실천하도록 한다. 페란도의 방법론적 과잉의 방식은 내가 들뢰즈를 인용하며 ‘잃어버린’ 민중이라고 부르는 것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지원한다. 그녀는 집합적인 자기-지명(self-styling)에 관한 너그러운 제스처 또는 상호적 설명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문화상호적인, 종내적인(intraspecies) 그리고 조정된 공동체를 열망한다. 그녀에 의하면, 포스트휴먼은 결코 탈정치적이지 않지만, 어쨌든 횡단적이며 관계적이다.
이 책은 친근한 가치들의 탈-정체성(dis-identification) - 또는 탈-영토화 - 이 정서적인 요청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창조적인 유목적 전환들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한다. 그러한 전환은 새로운 것, 즉 ‘아직 아님’인 것을 향해 가기 위한 개념적이고 정동적인 디딤돌처럼 작동한다. 프란체스카에게, 이러한 운동은 비극적인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열광적인 출발점, 이를테면 여왕벌의 탈주선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우리 시대의 철학이다. 이 주제에 관한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학회, 연구들 그리고 성찰들은 커다란 관심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포스트휴먼’은 20세기와 21세기의 존재-인식론 뿐 아니라 과학적이고 생명-공학적인 발전들을 따라, 인간의 개념에 관한 어떤 강렬한 재정의의 긴급성에 대처하기 위해 당대의 아카데믹학 논쟁에서 핵심 개념이 되어 왔다. 그 이후 철학적 전망 안에는 여러 사상 학파들과 운동들이 포함되었다. ‘포스트휴먼’이라는 표지는,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 모두에게 방법론적이고 이론적인 혼동을 만들어내면서, 일반적이고 포괄적으로 이러한 상이한 전망들을 지칭하기 위해 자주 환기되었다.[1] 특히 ‘포스트휴먼’은 포스트휴머니즘(철학적, 문화적 그리고 비판적),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생명확장론, 자유주의 트랜스휴머니즘 그리고 민주주의 트랜스휴머니즘 등등의 변형들이 포함된다), 신유물론(포스트휴먼적 틀 안에서의 특유한 페미니즘적 전개), 반-인간주의의 이질적 전망, 객체-지향 존재론의 장, 탈인간적인 것들과 초인간적인 것들(Metahumanities)을 포함하는 포괄적 용어가 되었다. 이 책은 한편으로 여러 용어들과 학파들 간의 유사성과 차이들을 그것들의 계보들, 연속적 형태들 그리고 중첩들을 따라 뚜렷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이며 윤리적인 기초들에 대한 이론적 노력을 전개하면서,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본래적인 기여를 제공한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세 가지 노드들(nodes) 주위에서 전개되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일치한다.
1.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2. 포스트휴먼에서 ‘포스트’는 어떤 인간인가?
3. 인간은 언제나 포스트 휴먼이었는가?
세 가지 질문들은 명쾌한 주제적 분야들을 구성하지 않지만, 논의 전개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기입되는 제안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각 장들은 각 부분들이 절합되어, 연속적으로 세 부들을 가로질러 순서가 매겨진다. 이것은 서술 경로의 유연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특유한 질문들이 탐색도구(navigational tool)로서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여 도구로 주어졌는 바, 이는 독자들이 뚜렷하게 드러난 서술을 좇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질문들의 전체 리스트는 이 서문 끝에 달아 놓았다). 주석은 텍스트에 필수적인 기여를 할 것이고 서술 전체의 통합적인 부분으로 고려될 것이다. 세 가지 주제적 노드들로 돌아 가면,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의 역사적 회고(1장에서 10장까지)는 첫 번째 질문과 통한다.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은 최근의 비판적이고 문화적인 포스트휴머니즘의 전개를 드러내며, 문학 비평 분야 - 처음으로 이 용어가 등장한 때(Hassan 1977)로부터 1990년대 이래, 그리고 캐서린 헤일스(Katherine Hayles)가 쓴 핵심적인 텍스트인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How We Became Posthuman, 1999)의 출판까지 - 에서 등장했다. 문화비평 포스트휴머니즘과 관련하여,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은 여전히 진행중이 어떤 철학이며, 21세기의 첫 10년 동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보다 엄격하게 철학적인 접근을 발전시켰다. 그 계보학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947)의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통과해, 차이의 연구들(특히 젠더 연구, 비판적인 인종 연구, 퀴어 이론, 탈식민주의 연구, 장애 연구를 포함한다), 그리고 사이보그 이론을 지나고 있다.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은 계보학적으로 ‘인간’에 관한 급진적 해체와 관련맺고 있으며, 1960년대의 정치적 변화에 기인하여 시작되었고, 1970년대에는 아카데믹한 기획에 들어 왔으며, 1990년대에는 인식론적 접근으로 진화하면서, 다양한 전망들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의 인식적 한계(인간을 위해 그리고 인간에 의해 이론화된다는 한계)를 깨달았음에도, 포스트휴먼에 관한 비-위계적 관점은 인간에게 어떤 우선권도 주지 않으며, 인식/지식의 자리로서의 비인간적 경험과 연관된 인식론을 위한 조건들을 표현한다. 이것은 비인간 동물(Wolfe 2010)로부터 시작해서 인공지능, 로봇공학 그리고 심지어 미지의 생명 형태들(Badmington 2004)에까지 이른다. 이와 같은 포괄적인 접근은 차이가 이미 젠더화된 모든 것, 인종적,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변이들과 더불어 인간 종의 구성물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인간적 타자성들에 관한 포스트휴먼적 인지는 인간적 타자성의 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번째 물결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이것은 종우월주의의 이론적 개정작업, 즉 타자적 종들에 대한 몇몇 종들의 특권으로 그것을 이끌로 감으로써, 그 극단적인 결과들에 있어서 인간의 해체를 초래하는 방식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존재-인식론적 개방성은 인간성 자체의 혼종적(hybrid) 관점 안에 정립된다. 즉 사이보그를 통해, 특히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1985)의 비판적 성찰 안에 수립된 그에 관한 논의를 통해, 포스트휴머니즘은 그 출발지점(즉 기원을 가지지 않는 기원[3])으로 혼종적인 것을 내면화했다. 다른 한편, 포스트휴머니즘은 ‘탈-인간주의’(post-humanism), 즉 휴머니즘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으로 비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휴먼-주의’(posthuman-ism)를 의미할 수도 있는 바, 이때 이것은 구성적으로 인간인 여러 측면들을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의 구성적 한계들을 넘어 간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일종의 실행(praxis)인 동시에 중재의 철학, 다시말해 탈-이원론적이며, 탈-중심화운동이자, 포괄적인 철학이자, 그 접근들이 타자성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타자성 안에서 인지한다는 의미에서 ‘인정/긍정’(acknowledging) 유형의 접근들이다(이 용어는 특히나 적합한데, 왜냐하면 그것의 중의적 성격, 즉 인정하기와 지지를 표하기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승인acknowledgment’의 철학에 상응한다).
따라서 포스트휴머니즘은 트랜스휴머니즘과의 주요 차이점들을 시작으로(4장에서 7장까지) 사유의 다른 흐름들과도 비교될 것이다(3장). 두 운동들은 1990년대 보다 명확하게 발생했으며, 그들의 관심사들은 비슷한 주제 주변을 지향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동일한 근원도 전망도 공유하고 있지 않다. 포스트휴머니즘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생겨나는 동안, 트랜스휴머니즘은 그것이 기원을 계몽주의에서 찾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휴머니즘을 갈아엎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극단적-인간주의’(ultra-humanism”, Onishi 2011)로 정의될 수 있다. 인간 능력을 극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트랜스휴머니즘은 실재하고, 막 출현하고 있으며, 공상적인 기술들(이를테면 재생의학, 극단적 수명연장, 정신-업로딩 그리고 냉동인간)에 의한 인간조건의 급진적 변형을 채택한다. 몇몇 트랜스휴먼주의자들에게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형함으로써 급진적으로 포스트휴먼이 되는 것이다(포스트휴먼이라는 개념 자체는 특정한 트랜스휴먼적 방식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트랜스휴머니즘이 동질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히 우리는 생명확장론(Extropianism, More 1990, 1998) (Vita-More 2004), 민주적 트랜스휴머니즘(Hughes 2004) 그리고 특이성(Kurzweil 2005)에 관한 몇몇 주요한 주장들을 제시할 것이다. 이런 다양한 흐름들은 특정 입장들로 분기하지만, 트랜스휴머니즘의 주된 목표를 공유하는 바, 그것은 인간의 강화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만약 트랜스휴머니즘적 관점의 강화가 과학기술에 의해 제공된 가능성들에 대한 그것의 개방성에 놓여 있다면, 거기에는 그것의 허약성도 있게 된다. 그것은 기술-환원주의적 존재 동질화 안에서, 그리고 해체적 실천에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 진보주의적 접근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만약 합리성과 진보가 트랜스휴머니즘적 가정의 핵심 즉, 그 동일한 관념에 관한 급진적 비판이 반인간주의의 핵심이라면, 철학적 입장은, 비록 포스트휴먼과 더불어 탈근대성에 있어서 근원을 공유한다 해도, 그것과 일치되지는 않아야 한다(9장). 트랜스휴먼적 성찰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해체는 반인간주의에서는 관건적 요소다. 이것은 포스트휴머니즘과 일치하는 그것의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반면 이들의 주된 구별점은 이미 그 형태론들(morphologies) 안에, 특히 그 구성 안에 내장되어 있다. 즉 그것은 구조적 대립으로서, 접두어 ‘anti-’가 포스트휴먼적인 탈-이원론적 과정-존재론의 지평에 의해 도전받아 왔다는 것을 함축한다. 결과적으로 포스트휴머니즘은 위계적 휴머니즘의 가정들이 쉽게 해체되거나 제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런 관점에서 포스트휴먼은 푸코의 인간의 죽음이라는 주제보다, 데리다의 해체적 접근과 일치되는 경향이 있다(1967). 이 장에서는 니체(Friedrich Nietzsche, 1882; 1883–5)의 초인(Übermensch)이 상이한 전망으로부터 관련될 것인데, 그것은 포스트- 와 트랜스- 그리고 반-휴머니즘 둘 모두이다. 포스트휴먼적 시나리오(여기서는 광의의 의미로 이해되는) 안에서 비교되는 방식으로 드러날 만한 다른 측면은 인간 개념이 되돌아 옴으로써 제공되는 기술과 그것의 잠재력들이다(8장). 트랜스휴먼적 성찰에서, 그와 같은 초점은 대개 중심화되거나 도구화된다. 즉 기술이 특정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목적으로 해소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점차 진보되고 있는 기술이 불사성, 즉 극적인 수명 연장을 재정의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편으로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은 기술을, 하이데거가 「기술에 관한 질문」(1953)에서 했던 것처럼, 그리고 이에 따라 그 존재론적 실존적 잠재성들로의 재-접근의 드러남의 양태로서 탐구한다. 다른 한편 자기성의 기술들(Foucault 1988)이 어떤 포스트휴먼적 시나리오에서 유력해지는데, 그것은 자기/타자 이원론을 해체했다(10장).
우리는 이제 두 번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포스트휴먼에서 ‘포스트’는 어떤 인간인가? 역사적으로 인간의 지위는 규칙적으로 인정과 불인정이 교대했다. 예컨대 서양사에서 ‘인간’ 개념은 배타적 특성에 의해 특성화된 범주들 안에 재각인되어 왔다. 일련의 차별의 형식들을 따라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계급차별주의, 세대차별, 동성애혐오 그리고 장애차별이 인간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람에 대한 인정에 관한 명문화된 법과 관습법들이 전해져 온 것이다. 예컨대 많은 여타 범주들 중 노예들과 여성들은 인간들 가운데 잉여적인 존재, 카오스, 훈육불가능한 존재로 재현되었다(14장). 보다 특정하게도 서양사에서 ‘인간’은 백인, 남성, 이성애자이면서 유산계급 시민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제도화된 규범들 뿐 아니라 인종적, 문화적 그리고 신체적 특성들에 순응한다. 인간 개념에 대한 어떤 포괄적이면서 ‘인정’(acknowledging)적 접근에 조응하고자, 하나의 결정적인 질문이 제기될 필요가 있다. 즉 반복적으로 탈인간화되는 인간(의 범주)은 어떻게 그들의 인간성(humanness)을 처리해 왔는가? 그들은 어떻게 그와 같은 거부된 지위를 재구성해 왔는가? 포스트휴먼적 접근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 ‘타자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전개된 자기성의 기술들에 대해 탐색하고(15장), 그리고 헤게모니 그룹들이 형성하고 수립해 온 방식을 폭로하는 두 가지 모두에서 인간의 개념이 가진 의미에 대해 반성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인간화의 과정에 대해 탐구할 것이며 - 여기서 ‘인간화하기’(12장)는 하나의 동사로 파악되지, 어떤 ‘인간중심주의적 기계’(Agamben 2002)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13장) - ‘인간’이라는 개념을 떠받치는 의미론적이며 화용론적인 측면을 캐들어갈 것이다(16장). 특히 인간은 라틴어 어원론(Humanitas) 안에서(17장) 동시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분류학적 나눔 안(18장)에서 탐구될 것이다. 그와 같은 탐구들은 인간의 개념에 붙여 ‘포스트’를 제기하는데 있어서 타당성을 성찰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한편으로 포스트휴먼은 인간에 대해 계보학적 관계 안에서 알려져야 하며, 따라서 이것이 야기하는 바, 역사적이고도 철학적인 의미를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의 조건들을 관통하는 그 접근에 대한 비판적 수행과 수립을 성공적으로 표명한다(11장).
포스트휴먼은 인간에 대한 관념에 의해 드러난 한계와 상징적 경계들을 탈안정화한다. 인간/동물, 인간/기계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인간/비인간과 같은 이원론은 대립적 도식들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 어떤 지각을 통해 재-검토된다. 같은 방식으로 포스트휴먼은 삶/죽음, 유기체/인조체 그리고 자연/인위의 분명한 나눔을 해체한다. 우리는 이제 세 번째 질문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인간은 언제나 포스트 휴먼이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생명’(bio)의 영역을 탐색할 것이다. 즉 생명과 생물학이 그것이다(19장에서 22장까지). 뿐만 아니라 여기서 우리는 포스트휴먼의 생명윤리와 생명공학적 진화들도 살필 것이다(23장에서 25장). 보편적 생명력(zoē)가 아니라 특권적인 생명(바이오스, bios)이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선택지는 ‘삶/생명’ 자체의 배제적 영역을 노정한다. 이것은 보다 명확하게 인간적 인지 기제에 기반한 인간 관념을 드러낸다. 이 부에서 포스트휴먼적 관점의 접근은, 니체(1887; 1901/6)의 제안을 통해 역사적으로 개괄된 그것의 체현된 특성 안에서 승인될 것이고(27장), 생물학적으로는 ‘자기제작’(autopoiesis, Maturana/Varela 1972) 개념에 대한 비판적 옹호를 통과해서 그렇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포스트휴머니즘은 존재의 물리학에 대한 양자적 접근 안에서, 생명있는 것과 생명 없는 사이의 경계를 날려버림으로서, 생명중심주의, 정서중심주의(sentiocentrism), 생기론 그리고 생명 자체의 개념을 극복한다. 이제 포스트휴먼의 재구성에 있어서 세 번째 단계로 접근할 것인데, 이것은 더욱 더 특유하게 존재론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자역학과 끈이론을 통해 역동적이고 복수적인 물질의 자연문화(natureculture)[4]를 탐색함으로써 시작할 것이다(29장). 이것은 철학적으로 신유물론의 틀 안에서 탐구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여기서는 카렌 바라드(2007)의 성찰을 통과해서 그녀의 관계적 존재론을 들여다 볼 것이다. 이런 사유틀과 더불어 인간은 단일한 행위주체로서가 아니라 기호론적, 물질적이면서 다차원적인 네트워크의 부분으로 파악된다(Latour 1987, 2005).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미 포스트휴먼이다. 그 유물론적 배치들에서 진화는 존재의 기술로 접근될 수 있다. 모든 물질적 표현은 다중우주(multiverse)에 접근하는 복수주의적 일원론(pluralistic monist)과 마찬가지로 일원론적 복수주의에 따라 생성의 노드들로 파악될 것이다.
다중우주 개념(30장)은 물질화의 미시적 수준에서 거시적 수준에 이르기까지이 과학적 탐구들과 연관되며, 최근 들어 동일한 가설적 결론에 대한 상이한 장들(양자역학에서 우주론과 천체물리학에 이르기까지)을 만들어냈다. 즉 우리의 우주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다중우주론은 본래적으로 포스트휴먼적이다. 그것은 단지 어떤 하나의 우주-중심적 전망(포괄적인 우주를 문제화하지만 여전히 중심화된 우주 개념)을 확대하지 않지만, 엄격한 이항성, 이원론적 양식들 그리고 예외주의적 접근들의 해체를 구체화한다. 그리고 여전히 이 생각이 가진 의문의 여지 없는 비인간-중심적(nonhuman-centric) 특성에도 불구하고, 다중우주 가설은 대체로 인간-중심적이고 유아론적 용어들을, 과학적이자(Everett 1956) 철학적으로(Lewis 1986) 전개해 왔다. 대신에 우리는 그와 같은 생각을 리좀 개념(Deleuze and Guattari 1987)을 통해 다시 다루고 그것을 사변적으로 발전시킬 것이다. 이는 어떤 본질주의, 양극성(polarity) 또는 완고한 이원론을 고려함으로써가 아니라, 혼종적, 매개적, 그리고 과정-존재론적 전망에 의존함으로써 수행된다. 이로써 우리는 자기성의 사변적 지각을 확장하는 사유실험과 더불어 현실적인 다중우주로부터 생겨나는 어떤 가능한 물리학을 밝힐 물질적 가설들을 통해 ‘포스트휴먼 다중우주’(posthuman multiverse)라고 지칭될 만한 다중우주에 대한 해석을 제안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가설은 자기성/타자성 패러다임의 해체에 기반하여, 관계성과 자율성이라는 두 가지 과정 안에서 물질, 즉 이 우주를 구성하는 동안, 마찬가지로 무한한 수의 다른 우주들을 현행화하는 그러한 물질을 도출하게 된다. 다중우주에 관한 이 근원적인 의미 획득은 어떤 엄격한 이분법에 관한 포스트휴먼적 극복을 물질화하는 포스트휴먼 존재론을 위해 그 자체로 귀납되어 드러난다.
[주석]
[1] 이 책은 나의 논문 「포스트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 반인간주의, 초인간주의 그리고 신유물론들: 차이와 관계」(“Posthumanism, Transhumanism, Antihumanism, Metahumanism, and New Materialisms: Differences and Relations”, 2014c)에서 처음으로 연구된 주제에 대한 확장이다.
[2] ‘사이보그’(cyborg)라는 용어는 1960년에 만프레드 클라이네스(Manfred Clynes)와 나탄 클라인(Nathan Kline)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생물학적이고 인공적인 부분 둘 모두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를 지칭한다(Clynes and Kline 1960).
[3] 사이보그는 해러웨이가 강조했던 것처럼, 어떤 원초적 신화를 대변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사이보그는 서구적 의미 안에 아무런 원초적 이야기를 가지지 않는다 [...] ‘서구적’이라는 것 안에서 원초적 이야기, 즉 인간적 의미는 원초적 통일성의 신화에 의존한다”(1985; 51). 우리는 22장에 이 지점으로 돌아올 것이다.
[4] 자연과 문화적 특성들의 혼종으로서 ‘자연-문화’(nature-culture)라는 용어가 예컨대 ‘Latour 1991’에서 이미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여기서 나는 도나 해러웨이(2003)에 의해 특히 개발된, ‘자연문화’(natureculture)라는 신조어(하이픈 없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이 이미 문화이며, 역도 마찬가지라는 것, 따라서 각 용어의 단순화나 본질화를 회피한다는 것을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