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번역문은 Keith Ansell-Pearson, Deleuze and New Materialism: Naturalism, Norms, and Ethics, In; (Eds.) Sarah Ellenzweig and John H. Zammito, The New Politics of Materialism : History, Philosophy, Science(Routledge, 2017), pp. 88-108의 초역이다.
키스 안셀-피어슨(Keitn Ansell-Pearson), 워윅 대학(Warwick University)
유물론을 둘러싼 새로운 지적 작업에 관해 우리가 캐물을 수 있는 두 가지 핵심 질문이 있다. 즉 대체 신유물론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두 번째, 들뢰즈가 신유물론에 관한 이 논쟁들에서 무슨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들뢰즈가 신유물론에 있어서 중요한 이유와 그가 인간에 관한 현대 사상에 어떤 복잡한 유산을 남겨 놓는다는 점 또한 보여주고자 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핵심 작업에서, 들뢰즈의 텍스트는 일종의 휴머니즘이기도 한 풍성한 철학적 자연주의에 토대를 놓는다(그 일은 인간 해방의 증진과 이성의 자유와 관련된다). 1970년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서, 그의 작업은 보다 많은 반-인간주의적 변곡을 형성하면서 방향을 튼다(이 시기에 인간이란 그 존재론적 특권을 탈각한 채 내재성의 평면 위에 놓이게 된다).[1] 비록 몇몇 제안자들에 의해 신유물론이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와 마누엘 데 란다(Manuel de Landa)가 만들어낸 어휘라고 알려졌지만(Dolphijn and van der Tuin 2011, 383), 우리가 이제 볼 바대로, 이것은 1960년대에 들뢰즈가 스피노자 독해와 관련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2] 내 생각에 그 복잡다기한 내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들뢰즈의 스피노자주의는 인간주의와 반인간주의 양자, 그리고 심지어 포스트-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 활용될 수 있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주의는 사유의 상이한 가능성들을 포용한다. 때문에 나는 우리가 반-휴머니즘적이고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입장을 채택하고자 하면서, 내가 강조하는 바, 들뢰즈가 1960년대에 스피노자 독해를 통해 발전시킨 측면들, 특히 인간 해방의 윤리적 임무에 대한 몇몇 중요한 성찰을 경시하는 대가를 치루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 용어에 대해 어떤 ‘기술적’ 가치보다 ‘전략적’ 가치를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돌피언과 반 데어 튄(2012)이 지적했던 바와 같이, 핵심 이슈들은 신유물론의 목표들을 위해 들뢰즈를 전유하는 데에 놓인다.[3] 쿨과 프로스트(Cool and Frost, 2010)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규범적이고 실존적인 함축들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물질의 근원적 구조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것”(5)에 대한 좋은 실례가 되겠지만, 들뢰즈의 경우에 초점은 인간 되기에 관한 규범적이고 실존적 함축들에 많은 부분이 놓여 있다. 심지어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1988)의 용어들에서, 동물, 분자, 그리고 지각불가능한 것이 되는 인간을 포함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주의’의 사용에 대한 노트. 휴머니즘과 관련하여, 베아트리스 한-필레(Beatrice Han-Pile, 2010)가 쓴 바에 따르면, 휴머니즘은 미규정적인 그 만큼 폭넓게 쓰여지고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자주, 적어도 영어권에서 세속적이고 낙관적인 세계에 대한 전망과 연관되며, 비유기적 존재(또는 유기적이지만 비인간인 존재)에 대한 인간의 특권을 함축한다. 즉 이것은 “행복과 그들의 개체적 잠재성의 발전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방어하는 것”을 의미한다(Han-Pile 2010, 118). 대륙철학에서, 특히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푸코와 같은 사상가들에 의하면, 그 용어는 그 인간중심주의적 함축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오염된 단어이다. 내가 아는 한, 들뢰즈는 결코 휴머니즘 또는 반-휴머니즘이란 단어를 채택하지 않는다. 나는 들뢰즈의 1960년대 스피노자 독해의 여러 면에서 명백하게 휴머니즘적 요소를 따르는 그의 입장을 보여주고자 시도하면서, 거기에 다른 측면들, 특히 그가 그의 스피노자주의를 발전시키는 와중에 그의 입장이 반-휴머니즘으로 기운다는 것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는 들뢰즈가 인간과 다른 형식들 또는 삶/생명의 양태들 사이에 차이를 인지하기를 거부하는 어떤 존재론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간략하게나마 들뢰즈가 유물론과 자연주의를 어떻게 파악하는지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서 나는 근대사상에서 성취된 핵심적인 스피노자주의적 영감의 움직임을 지칭하는 바, ‘자연주의’에 집중할 것이다. 이때 인간은 자연의 충실한 한 부분으로서, 자연질서 안에서 그 어떤 특별한 형이상학적 가치나 특권적 위상을 누리지 않는 존재로 이해된다. 게다가 어떠한 우주적 예외주의도 허용되지 않는다.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 인간, 동물 또는 광물은 동일한 규칙에 의해 움직인다. 유물론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 관점이다. 모든 것은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이다. 이것은 예컨대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초기 그리스 사상가에서 연유한 것이며, 따라서 유물론은 물리주의이다. 존재하는 것에 관한 일반 이론으로 이해될 때, 그것은 어떤 존재론적 관점이다.
나는 시작하는 두 개의 절에서 ‘신유물론’과 ‘재자연화’(renaturalization)에 대한 엘리자베스 그로스의 기획에 대해 쓸 것이다. 나머지 장에서 나는 비로소 들뢰즈의 1960년대 스피노자주의와 그가 가타리와 더불어 1980년대에 『천의 고원』을 출판하면서 발전시킨 높은 수준의 혁신적 사유를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서 나는 몇몇 비판적인 반성들로 마무리할 것이다.
‘신유물론’을 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전형적으로 말해서 인간/비인간 이항성 안에서 정신과 주체성에 대한 강조와 물질을 수동적이고 불활성으로 설명함으로써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장 최근의 이론적 전회의 중심에는 물질 자체의 행위주체적 특성들이 주목받게 된다. 심지어 비유기적 물질 안에서도, 창발적이고 발생적인 힘들 또는 행위주체적 능력들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존재론적 수준에서 유기체와 비유기체 또는 생명과 비생명 사이의 구별을 해체한다. 나아가 물질성이란 단순한 물질 이상의 어떤 것으로 다루어진다. 쿨과 프로스트(Coole and Frost, 2010)가 논한 바에 따르면, 거기에는 “과잉, 힘, 생명력, 관계성 또는 물질을 행위적, 자기-창조적, 생산적, 예측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상호착근된 체계들과 힘들의 다양성” 중에서, 우리가 “행위주체를 위한 능력들의 위상과 본성을 새롭게 고려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9). 쿨과 프로스트가 더 나아가 말한 바에 의하면, 현재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의 견해는 “문화적 전회 아래에서 풍성해진 지배적인 담론들의 급진주의는 이제 거의 소진된다”는 것이다(6). 이것은 “사회 분석에 있어서 지배적인 구성주의적 경향이 물질, 물질성 그리고 생명정치학과 전지구적 정치 경제의 현대적 맥락을 공정하게 다루는 식의 정치학에 관해 사유하기엔 부적합하다”는 ‘느낌’으로 압축된다(6). 이들은 또한, 따라서 여기에는 “물질적 실재론과의 어떤 이론적 화해”가 요청된다고 주장한다(6). 핵심적인 성찰과 주장은 행위주체에 관한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자기-변형, 자기-조직화 그리고 주도성(directedness)이라는 자신의 양태들을 소유하는 것으로 물질을 파악하고 따라서 그것을 더 이상 단순히 수동적이라거나 비활동적이라고 보지 않는 것은 행위주체가 예외적으로 인지능력, 지향성 그리고 자율적인 결정들을 할 자유를 소유하는 인간이라는,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권리와 능력을 가진다는 당연한 가정에 속하는 전통적 의미를 거스른다. 대신에 인간 종은 그 물질적 힘 자체가 특정 행위주체적 능력을 표명하는 (...) 자연환경 안에 재정위되고 있다. 물질은 더 이상 여기서 어떤 덩어리, 불분명한 완전성으로 상상되지 않으며, 비결정적인 것, 지속적으로 예측되지 않는 방식으로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것으로 인식된다(10).
여기서 목표는 엄격하게 비-인간중심주의적인 것이다. 즉 인간 신체나 심지어 행위주체로서의 인간의 능력들조차 어떤 특권을 가지지 않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을 이어간다. “결과적으로 인간 종, 그리고 자기-성찰의 질, 자기-인식 그리고 합리성은 전통적으로 자연의 나머지와 구분되곤 했는데, 이는 이제 보다 넓은 진화적 또는 우주적 생산성의 범위 안에서 단지 우발적이고 임의적인 형태들이나 과정들로 보여진다”(20).
들뢰즈적 측면에서, 신유물론은 지적이고 정치적인 아젠다를 가진다. 그것은 우리의 이론적 담론들에서 인간에 부여하는 우선성과 경합하고, 이에 따라 이 담론을 포스트-휴머니즘적 입장의 목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과정 중에, 그것은 들뢰즈 사상의 위상과 전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도록 유도된다. 즉 들뢰즈 자신의 저작과 가타리와의 협력 작업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신유물론이 그 유물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끌어오는 대부분이 후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 2015)는 다음과 같이 내가 인용한 부분과 같은 주장을 할 때, 보다 믿을만 하다.
비인간적 힘들은 - 가장 작은 아입자적 힘들에서부터 태양계의 작동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그 이상의 것들을 포함하는 힘들, 인간에 의해 이해될 수 없는 힘들 (...) 하지만 인간과 모든 것, 즉 인간과 비인간 둘 모두를 연결하는 - 들뢰즈의 전 저작에 걸쳐 일차적인 관심대상이다(19).
이와 같은 주장은 들뢰즈적인 영감에 따른 신유물론이 명백하게 포스트-휴머니즘의 입장을 따른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로스에 따르면 비인간과 관련하여 인간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과 심지어 포스트-휴먼의 학제적 특성에 관한 여러 형식들에 대한 변혁과 도전들을 초래한다(22-23). 그녀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들뢰즈에게 스피노자란 철학자들의 왕이며 이는 인간을 심대하게 자연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비인격적인 “내재성의 평면”(이 개념은 나중에 다른 장에서 다루어진다) 위에 극미한 장소를 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을 자연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그것이 작은 부분으로서 이해할 때, 인간적 특권에 대한 많은 철학적 주장들이 사라지게 된다”(22). 이 입장에 있어서 유일한 문제는 그것이 들뢰즈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수행했던 핵심적인 작업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인간 주체성, 행위주체 그리고 윤리적 교육론에 관한 질문을 중심으로 했던 작업이다. 그 입장은 또한 들뢰즈의 독해에서 주요 원천인 자연주의적이자 유물론적인 스피노자가 가진 복잡성과 난해한 진화과정을 깨닫는데 실패한다.
그로스의 작업은, 비록 그녀가 사실상 얼마간 머뭇거리면서 조건부로 그것을 수용한다 해도, 신유물론과 일치한다. 그녀는 그녀의 연구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한다. 첫째로 그것은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의 전후 담론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녀에게 이러한 담론들은 독립적인 물질적 실재의 실존에 대한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해왔다. 물질적 실재란 인간의식과 통제 너머에 있는 것이고, 실재의 구성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에 근거한다. 둘째로 그녀는 ‘다윈을 따라’ 그것의 반대 항목들, 즉 정신, 삶/생명, 형상 또는 영혼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녀는 이 기획이 여전히 유물론의 하나로 불리워질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아마도 이것은 어떤 새로운 종류의 유물론을 포함할 것이다. 또는 아마도 유물론은 더 이상 적합한 용어가 아니고, 우리는 새로운 용어를 생성시킬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삶/생명이 출현할 수 있는 잠재성의 섬광, 즉 비신체적인(incorporeal) 어떤 것도 포함하는 물질의 새로운 개념이다(Grosz 2011b, 18).
들뢰즈는 전개체적 잠재성에 대한 강조와 그로스가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과 레이몽 뤼에(Raymond Ruyer)에 근거하여, 니체와 베르그송을 경유해 다윈으로부터 끌어낸 물질 개념의 계보학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면서 이 기획의 중심에 놓인다. 본질적으로 그녀는 사태와 대상들과 관련되기 보다 사건들, 과정들과 관련되어 물질을 파악하는 신유물론을 바란다. 이미 우리는 신유물론으로 다루어지는 많은 것들이 ‘예전의’ 특성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즉 주장하건데, 실재에 관한 존재론과의 연관이 애초에 근대적인 구현 안에서 스피노자 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사건과 과정의 철학에 대한 그 욕망도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와 같은 현대적인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들 형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로스와 로지 브라이도티의 연구에서는 들뢰즈의 저작으로부터 자극 받은 신유물론의 주요 요소들 중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실재와 실재론으로의 회귀를 위한 어떤 욕망으료 표현된다. “나는 실재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데, 그것은 존재론의 질문이며, 주체성과 재현의 특권화가 차단되는 쪽으로 간다”(Grosz 2011b, 17). 그리고 브라이도티(2012)는 우리가 ‘삶/생명 자체’를 비인간적 행위주체로서 과학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의 한 가운데 놓을 필요가 있다고 논증할 때, 이것에 반향한다. 즉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것에 대한 많은 강조 이후, 현전의 존재론은 텍스트적이거나 다른 식의 해체를 대체한 것이다”(171). 따라서 그녀는 “신체적 유물론의 신실재론적 실천들”을 촉발하고, “급진적인 신-유물론(neo-materialism)이나 포스트 휴먼적 페미니즘”에 대해 언급한다. 더 나아가, 그로스(2011a)는 들뢰즈를 유물론이 아니라 어떤 ‘실재적인 것에 대한 철학’을 생산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이념적 구성요소들로부터 그것의 물질적인 것을 구분해 내지 않는 실재성을 주장하는 이론, 일종의 과포화된(supersaturated) 유물론, 통상적으로는 그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 이념적인 것, 개념적인 것, 정신 또는 의식 - 것을 신체화하는 어떤 유물론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으로 파악된다(43).
최근 수 십년 간 주체성과 재현에 대한 [물질의] 단호한 우선성이라는 조명 아래에서, 그리고 인간 너머를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가정 안에서, 이러한 것은 환영할 만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신유물론에 의해 제시된 그 우선적인 움직임은, 존재론적으로 실재적인 것에 대한 재현적 주체와 멀어진 채, 들뢰즈의 철학적 실천, 주로 그것의 윤리적 동기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지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들뢰즈는 윤리적으로 동기화된 자연주의자로서, 스스로 자연주의를 따르는데, 이는 그가 자연주의를 탈신비화와 인간 해방의 기획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 기획의 임무는 인간을 신화의 영역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즉 종교의 신화들, 그릇된 자연학의 신화들, 그리고 잘못된 철학의 신화들이 그것들이다. 비록 신유물론이 그와 같은 개념 - 탈신비화로서의 철학 - 을 환영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이것이 인간에 관한 것인 한에서, 그리고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 의해 탐구된 것과 같은 종류의 어떤 윤리적 교육론(이를테면 지식의 세 가지 주요 종류들에 있어서 교육)을 요청하는 한에서 간과할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는 물질이란 잠재성 개념에 의해 보충되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로스의 신유물론 개념이 들뢰즈에 의해 충분히 예상된 것이며, 스피노자와 같은 핵심적인 초기 근대 유물론자나 자연주의자에 관한 그의 인식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들뢰즈의 신유물론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 이미 알려진 철학사적 소산에 기대고 있는데, 그것은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피노자주의이다. 그러나 들뢰즈 자신은 신유물론을 이념성과 잠재성의 보강적 차원과 관련한 작동기제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는 잠재적이거나 이념적인 능동과 수동들을 물질 자체의 충분히 내재적인 형상들로서 이해한다. 아마도 이것이 그로스가 실재적으로 의미하는 바이며, 만약 그러하다면, 그녀가 신유물론 관해 내린 규정은 예리한 것이며, 이것은 들뢰즈 자신의 그것에 대한 개념규정과 일치한다.
비록 들뢰즈가 관련 없어 보이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론을 평면화할 것이라는 생각은 확인된 바 없지만, 그렇다 해도, 이는 규범성이라는 주제와 관련되며, 그리고 그러한 주제들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실존에 대하여 특출난 것에 속한다. 이것은 들뢰즈적 영감에 따른 신유물론에 대한 나의 주요한 요망이다. 즉 일련의 해석은 인간 동물이 특별히 윤리적인 성격에 속하면서, 규범성의 이슈를 중심에 놓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들뢰즈 작업의 핵심적인 측면들과의 연관성을 놓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인간 동물이 윤리적으로 구별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 주제에 대한 들뢰즈 자신의 입장에서 단서는 ‘본능과 제도’에 관한 초기의 짧은 논문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는 본능과 제도 양자의 경우에 우리가 ‘만족의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인간 주체의 경우에는 어떤 핵심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어떤 유기체는 본능적으로 외적 자극에 반응하는데, 이것은 “그 유기체의 경향들과 욕구들을 만족시킬 요소들을 외적 세계로부터 이끌어낼 때”이다(Deleuze 2004, 19). 나아가 “이러한 요소들은 여러 동물들에게 특수한 세계들을 포함한다”(19). 그러나 인간 동물의 경우에, “주체는 인공적인 만족의 수단들을 발전시키면서, 그 경향성과 외적 환경 사이에 어떤 본래적인 세계를 수립한다”(19). 여기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더 멀리까지 나아간다. “인간은 어떠한 본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제도들을 설립한다. 인간(The Human)은 그 종적 특성을 약화시키는 동물이다”(21). 요컨대 인간은 발명적 종으로서, 그 욕구와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서 제도들을 수립하고 규범들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는, 우리 삶/생명을 만족시킬 수단들이 주어져 있지 않거나 단순히 본능의 질서만이 주어져 있지는 않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 들뢰즈는 언제나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것이 근본적으로 긍정적이라고 주장했다. 초기의 글에서 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만약 경향성들이 제도에 의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제도는 경향성에 의해 설명되지는 않는다. 동일한 성적 욕구는 결코 다양하게 가능한 결혼 형식을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20). 1953년 흄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책에서, 들뢰즈([1953], 1991)는 사회계약론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그릇되고 추상적인 사회 이미지를 우리에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때 그 사회는 오로지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정의된다. 즉 이때 사회는 어떤 발명적인 노고의 긍정적인 체계라기보다 이기주의와 이익들에 일정한 한계를 둔다. “자연상태는 언제나 이미 단순한 자연상태 이상이다”(39). 들뢰즈는 사회의 문제는 한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통합에 관한 문제임을 보여주고자 애쓴다. 따라서 인간 동물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의 발명적 종이며, 따라서 비록 정의가 인위적이며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에게 그 인위성은 우리 본성의 일부이다. 정의는 우리의 정념을 확장하고 연장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쓴다. “사회란 근본적으로 창조적이고, 발명적이며, 긍정적이다”(46). 그리고 “주체는 규범적이다”(86).
이제 나는 그로스의 재자연화 전략에 집중하고 싶다. 여기서 그녀는 들뢰즈의 니체, 스피노자 독해를 발명적으로 사용한다. 비인간 행위주체들과의 근본적인 연속성을 보여 주고자 하는 우리 탐색의 결과,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 생명체의 규범적인 특성에 대한 핵심적인 들뢰즈적 성찰들이다. 이것이 들뢰즈에 관한 이 글의 두 번째 장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철학의 임무를 “인간 조건 너머를 사유하는 것”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했지만, 이 조건은 어떤 실존적 궁지가 아니라 진화론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우리의 공간화된 습관들과 기존의 재현 패턴들의 지배를 말하는 것이다(Bergson 165, 193을 보라). 그로스는 인간 너머를 사유하는 그녀 자신의 특유한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아마도 자연 뿐만 아니라 삶/생명과 생물학에 대한 상당히 긍정적으로 쓰고 있는 그녀 세대에 속한 페미니즘 문화 이론가들 사이에서 독특한 위상을 가질 것이다. 그녀는 어떤 연구자가 인상적으로 말했던 바대로, ‘재자연화의 정치학’을 발전시킨다. 하사나 샤프(Hasana Sharp, 2011)에 따르면, 그로스의 해석에 있어서, 자연은 “억제 불가능한 역동성, 자유분방한 변전, 그리고 항구적인 자기-차이화를 가리킨다. 그녀는 비인간 행위주체와 우리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자연의 새로운 모델을 탐색하며, 요청한다”(169). 물론 그로스는 수 십년 간의 탈자연화 비판과 동일시될 수 있는 함정을 감지한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 인종 이론가들 그리고 비판이론가들이 자연에 대해 제기된 강한 의혹을 진전시켜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로스의 자연에 대한 변호는 분명히 그와 같은 규범화(normalization)를 방해하기 위해 제기된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이론가들가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즉 지각불가능하게-되기라는 그들의 개념을 논쟁적으로 사용한다면, 생산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있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에 호소한다(Ansell-Pearson 1999).[4] 그래서 역사횡단적인 인간 본성을 부여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영구화하는 그러한 담론들을 탈자연화하는데 요청되는 깨달음이 과정 중에 존재하는 반면, “인간의 역능을 초과하는 자연력들과 관련된 우리의 기획들을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Sharp 2011, 174). 페미니스트로서 그로스는 단호한 반-휴머니스트이다. 즉 “그로스에게, 어떤 인간화와 인간중심주의도 팔루스중심주의적 경제와 동일하기 때문에, 그녀는 인간 범주를 그것의 배제된 타자들을 포함하는 데까지 확장할 가능성을 배척한다”(168). 샤프가 논하다시피, 그로스는 그녀의 독자들에게 주체에 관한 인간주의 철학과 비인격적이고, 자연적 힘들에 관한 비인간 이론 가운데 선택지를 강제한다(Grosz 2002, 470). 비록 샤프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스피노자에 기반할 수도 있다할지라도, 이 비인격 철학에 있어서 그녀의 원천은 니체이다.
아마도 그로스는 지각불가능성의 정치학이란 생각에 대해 가장 논쟁적일 것이다. 그녀는 어떤 재인의 정치학에 관한 기존의 휴머니즘적 주장에 대항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발전시킨다. 그녀는 ‘재인의 지배체제’에 관한 쓰는데, 여기서 그녀는 이것을 정체성 정치학과 동일시한다(Grosz 2002, 463). 여기서 정체성이란 고유한 어떤 것, 주어진 또는 내적으로 발전된 것으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그리고 오직 타자에게만 주어진 것으로서, 그에 따라 어떤 타자에 의해서만 폐기될 수 있는 것으로서” 간주된다(465). 그로스는 덧붙이기를, “정체성이란 내면화의 이중적 움직임, 또는 타자성의 투입(interjection)의 결과로서만 생겨나며, 주체와 몇몇 근본적인 유사성을 가지거나 동일화되는 타자에 대한 투사(projection)로 발생한다”(465).
정체성 정치학의 경계를 획정하는 것에 대한 그로스의 주요 주장과 논증은 무엇인가? 그녀는 주체가 오직 다른 주체에 의해 인식됨을 통해 주체 자체가 될 수 있는 헤겔적인 ‘욕망의 법칙’과 재인의 정치학을 연결한다 (Grosz 2002, 465). 그녀의 주된 염려는 다른 주체들에 의해 사회적 주체의 타당성에 입각한 정의의 전망이 노예의 정치학에 굴복하리라는 점이다. 대신에 우리는 경쟁적 힘들과 비인격적인 생성들과 관련한 정치학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언급한 바처럼, 그로스는 그와 같은 정치학을 전개하기 위해 니체에 의존한다. 예컨대 그녀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1962)을 언급하는데, 이 저작은 그와 같은 정치학의 표명 안에서 괄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신의 자기-출산성에 대한 어떤 계몽적 ‘영혼’의 움직으로서라기보다, 노예와 하층민의 노예적 이성화로서 헤겔적인 변증법에 대한 니체적 재해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Grosz 2002, 466). 이것은 정체성을 위한 욕구를 강조하는 대신에, 그로스가 문제적으로 “미래성으로의 때이른 도약”(466)이라고 부른 것을 포함하여, 힘들과 연속적인 자기-변형을 찾아내는 것을 임무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 자신이 미래적인 것들로의 그 어떤 전반적인 ‘도약’에 반하여 논증하기 때문에(이를테면 『도덕의 계보』 두 번째 논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라) 나는 이를 문제적이라고 말한다. 이 중요한 움직임은 다음과 같다. 즉 주체의 내적 구성에 기반하여 정체성을 통한 해방의 모델을 제공하는 것은 “타자의 유령에 의해 점유되는” 심리적 내면성의 모델을 제공하는바, 이것 대신에, 우리는 신체들과 힘들과 관련하여 행위하고 행위되는 능력을 생각해야 한다(466). 여기서 그녀는 정동성[정동적 신체]에 속하는 어떤 것과 힘의 개념을 결합하면서, 스피노자에 의해 영향을 받은 니체주의를 드러내는 들뢰즈를 따른다(Deleuze 1983, chapter 2를 보라).
그로스는 이러한 힘에 관한 복잡한 생각에 기대어 사유를 계속하고자 한다. 그녀는 우리가 주체를 어떤 인과적 결과들에 관한 행위주체 또는 다른 행위주체의 희생양으로 개념화하는 것을 그만두기를 바라며, 그 대신에 정치학, 주체성 그리고 사회적인 것이 “그 어떤 행위주체도 없는 또는 행위주체와 정체성이 그 안에서 형성되는 모든 것이 없는 작용과 반작용력이라는 다양체의 작동 결과들로서” 조망되어지는 “니체적인” 방식으로 사물/사태를 이해하기를 원한다(Grosz 2002, 467). 이것은 힘을 “인간-이하(sub-human)와 초-인간(super-human) 간의 충만한 공명, 즉 둘 모두가 인간을 가능하게 하는, 그리고 인간을 동시에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주위에서, 다시 말해 인간의 범위 안에서, 인간으로서 힘들이 작동하는 세계 안에 정립하는 비인간이게 하는 그러한 공명”과 관련된 이해를 요청하는 것이다(467). 그로스에게 다른 미래를 생산하기 위한 투쟁은 그 안에서 욕망이 재인되고 가치화되어야 하는 주체들에 의한 투쟁이 아니라, “그 ‘정체성’과 ‘입장’을 구성하는 힘들, 즉 스스로를 어떤 장소와 정체성으로 안정화하는 지층화의 노선을 따라 여성들의 입장을 가동하고 변형하기 위한 투쟁이다. 정치학은 지각불가능한 힘들, 우리안의 힘들과 우리 주위의 힘들, 지속하는 갈등 안의 힘들의 투쟁으로 볼 수 있다”(467). 이러한 임무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노련한 주체들, 다시 말해 우리를 주체들로 구성하는 바로 그러한 힘들의 대가들로서 상상한다.
이제 질문이 드러날 수 있다. 그로스가 주체에 관한 휴머니즘적 철학과 힘들에 관한 반-휴머니즘적 철학 사이에 우리를 놓아 두는 ‘이론적 선택’과 관련된 용어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가? 들뢰즈는 어떤 인간주의적 지향에 친연성을 가지는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저작에서 주체의 윤리적 교육법을 제공하지는 않지 않는가? 이제 이 주제로 들어가 보자.
이제 들뢰즈로 돌아가 보자. 이 절에서 나는 자연주의와 유물론에 속하는 그의 사유의 몇 몇 현저한 특징들에 간략하게 주목하고자 한다.
그의 저작(Deleuze 1992)에서 들뢰즈는 어떤 신자연주의(new naturalism)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어떤 점에서 그가 ‘신유물론’(321)이라고 부른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신유물론의 발흥에 있어서, 들뢰즈의 저작들과 개념들이 맹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사실이 아주 드물게 인지되거나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유물론에 대한 들뢰즈의 연구와 개념들은 두 개의 주된 원천에서 발견될 것이다. 1960년대에 쓰여진 루크레티우스에 관한 논문과 스피노자에 대한 그의 책이다. 오늘날 1969년의 『의미의 논리』 부록으로 알려져 있지만, 들뢰즈의 논문인 「루크레티우스와 시뮬라크르들」는 1961년 《철학연구》(Les études Philosophiques)지에 「루크레티우스와 자연주의」(Lucrèce et le naturalisme)라는 제목으로 처음 게재되었다. 들뢰즈(1992)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프로그램의 실현”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은 기계적이고 동력학적인 측면(229) 둘 모두에서 그러하다. 사실, 그는 ‘신유물론’을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양자에 정위하며, 스피노자 쪽으로 더 분명한 지향을 드러낸다. 들뢰즈에게 스피노자는 자연주의를 포함하는 실천 철학의 전통에 속한다. 이 자연주의는 미신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는데, 이러한 미신이 우리를 행위 능력으로부터 절단하고 그것을 파괴하면서, 슬픔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즉 들뢰즈가 말하길, 자연주의는 이러한 슬픔을 물리친다(270). 스피노자는 신체와 신체들의 위상에 있어서 중요한 유물론자다. 물론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무신론에 관한 특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스피노자의 무신론에 호소하고자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도덕적인 유사-법이 단순히 자연법에 대한 우리의 오해라는 생각에 기반한다(253). 들뢰즈에게는 신유물론이란 무엇보다도 내재성의 철학이다(322). 이 유물론에서는 내재성(또는 보다 전통적으로 말해 범신론)을 중심으로 자연의 실증성을 인식하려는 시도가 있으며, 이를 통해 심오한 깊이에까지 이른다. 또한 그러한 깊이를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사유능력을 부여한다. [여기서] 자연은 수동적이거나 비활성적인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들뢰즈는 ‘표현적’ 자연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은 인과적인 펼침[설명, explication]으로서의 자연인 바, 그 자신을 표현하는 바 안에서(실체, 속성 그리고 양태를 포함하여) 표현의 내재성으로 존재한다.[5] 그는 이런 내재성에 관한 사유 안에서 그 개념이 유출적이고 창조론적인 신학이라는 초월적 개념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챈다(232). 하지만 변용으로서의 변형이 근원적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존재 위나 너머에 일자의 초월성도 없고, 또는 그것의 창조 위에 존재의 초월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는 그 모든 표현들 안에서 일의적이며, 따라서 일자는 그 모든 다양들에 있어서 하나의 단일한 의미로 알려진다.
페르디낭 알키에(Ferdinand Alquié, 1906-85)에 입각하여, 들뢰즈는 신자연주의를 데카르트주의의 반작용으로 해석한다. 수학적이고 기계과학적인 데카르트의 시도는 자연으로부터 “어떤 잠세성이나 잠재성, 어떤 내재적 힘, 어떤 고유한 존재”를 빼앗음으로써 그것을 가치절하한다(Deleuze 2002 227). 데카르트 형이상학에서 존재는 자연 바깥에서, 자연과 그것을 창조하는 신을 사유하는 주체 안에서 찾아진다. 반데카르트적 반작용의 중요성은 그것이 특별한 힘들과 능력들에 부여된 어떤 본성의 표명을 재설립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은 데카르트적 기계론의 주요한 발견을 함축한다. 실재로 모든 힘은 현행적이다. 그리고 자연의 능력은 더 이상 비의적인 실체들, 영혼 또는 그것들이 실현되는 정신을 가리키는 잠재성이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이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공식화했다. 즉 데카르트를 자연에 능동적 힘과 수동적 힘을 복원시킨 철학자로 생각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세계에 대한 어떤 이교적 전망을 떨구어내지 못한 채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자연의 우상화이다. 스피노자의 프로그램은 이와 매우 닮았다(228).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양자에서 보이는 시도가 자연철학을 복권시킨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둘 모두에서 ‘표현’의 관념이 중심에 놓인다. 사실 들뢰즈는 그들의 반-데카르트주의가 모두 이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자연은 모든 것을 구성하고 함축하며, 동시에 각각의 사물/사태 안에 펼쳐지고 함축된다. “속성들은 실체를 함축하고 펼친다. 그리고 실체는 제 차례에 와서 모든 속성들을 구성한다. 양태들은 그것이 의존하는 속성들을 함축하고 펼친다. 반면 속성은 제 차례에 와서 그 모든 양태들의 본질을 함축한다”(17).
이 표현적 존재론에서, “실체는 속성 안에서 자기-표현적이다. 실체는 속성들에 의해 표명되고 그것들 안에서 스스로를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실체의 본질은 실체의 자기-표현이라는 의미이다”(Wasser 2007, 53). 하지만 들뢰즈(1992)는 스피노자의 체계를 라이프니츠에 의해 표명된 그것에 대한 일련의 고려로부터 방어하는 것에 더 가깝다. 라이프니츠는 표현이 우리에게 피조물로서의 무력함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양태론은 오직 피조물들의 능동성, 활력, 개체성, 그 모든 본래적인 실재성을 그로부터 빼앗는 수단일 뿐이다. 양태들은 오직 환영들, 유령들, 어떤 단일한 실체의 환상적 투사들일 뿐이다”(226) 들뢰즈에게, 스피노자에게서 드러나는 모든 것은 그와 같은 해석과 모순된다. 피조물들로부터 힘을 탈취하기 위해 양태에 관한 생각을 이용하기보다, 그것은 들뢰즈가 주장하길, 사물/사태가 신의 역능에 참여하는 방식을 보여줄 유일한 길이다. 즉 “그것들이 어떻게 신성한 힘의 일부가 됨에도, 특유한 부분들, 강도적 양, 환원불가능한 정도들이 되는지”를 아는 것이다(227). 만약 인간이 신(또는 자연)의 역능이나 본질의 일부라면, 그것은 신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을 통해 스스로를 펼치는 한에서만이다. 들뢰즈에게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사실상 신자연주의의 기획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일치한다. 차이는 스피노자의 자연철학이 둘 중 보다 역동적이고 비목적론적이라는 것에 있다.
들뢰즈가 지지하는 신자연주의는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독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들뢰즈가 어떤 윤리학, 규범적인 행위의 개념, 그리고 인간과 다른 삶/생명의 형식 간의 차이와 더불어, 인간과 동물을 관계 짓는 동물행동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이러한 자연주의 안에 근거하면서부터다. 다시 말해 인간 동물로서 어떤 독특하게 규범적인 것으로서의 우리의 과제는 단지 이것이 초래하는 바와 들뢰즈가 그와 같은 관점을 수행하게 된 이유를 적절히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일의성과 내재성에 대해 들뢰즈는 삶/생명의 형식들과 존재 또는 권력의 양태들 사이에 만들어질만한 구별이 더 이상 없는 존재론을 만들지는 않으며, 그래서 그의 저작에는 인간 동물이 탁월한 규범적 동물이라는 어떤 명확한 인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신유물론과 결연할 수 없으며, 이때 신유물론은 규범적 구별들과 부딪히고, 그 규범적 특권을 인간에게서 빼앗지만, 우리는 그것과는 다르게 해석한다.
들뢰즈의 사유에는 두 가지 핵심 측면들이 있는 바, 나는 이제 그것을 탐색하고자 한다. 첫째로 그의 자연주의에서 자연, 그리고 둘째로 어떻게 그는 이 자연주의가 규범들과 윤리학에 대한 사유와 일치하는지 증명하는지이다. 목표는 들뢰즈가 인간 동물의 규범적 특성에 대한 일련의 구별된 성찰을 가짐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 볼 바, 가타리와의 함께 한 그의 연구가, 인간과 비인간적 삶/생명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가져감으로써, 사유와 삶/생명에 대한 새로운 존재론적 가능성을 열어 젖힌다 해도, 심지어 여기에도 인간 동물이 윤리적으로 구별된다는 인식이 있다.
들뢰즈는 종종 스피노자의 ‘신유물론’에 대해 쓰는데, 이는 대개 ‘신자연주의’를 의미한다. 내가 지적했듯이, 전자의 개념은 내재성과 신체에 대한 사유를 중심에 놓으며, 후자는 표현적 자연에 초점을 둔다. 스피노자에게서 자연은 어떤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역능으로 규정된다. 모든 유한한 것들이 양태들의 복수성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한한 자연이라는 한계 안에서이다. 즉 자연은 초월적인 신의 창조물이 아니며, 사유하는 주체는 자연의 질서 바깥에 놓이지 않는다. 두 가지가 강조될 가치가 있다. 첫째, 들뢰즈는 우리 존재 - 스피노자의 용어로 우리의 코나투스 - 의 역동적 특성들이 기계적인 것들과 충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신체의 코나투스는 그것이 자연에 의해 결정되어진 그 상태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요청한다. 동시에, “복합 신체의 코나투스는 또한 수많은 방식들로 변용되는 신체의 능력을 유지하려고 애쓴다”(Deleuze 1992, 230). 따라서 우리는 변용될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안에서 결정되며, 우리가 수동적 정동들에 의해 촉발되어 남는 한에서, 우리의 코나투스는 수동적인 정념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 수동성 안에서 우리의 욕망은 탄생한다. 하지만 우리의 무능력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감을 증명하는 수동적 정동의 수준에서조차, 우리는 비록 최소한의 것이지만, 능동적 행위의 몇몇 수준으로 이끌린다(231).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사항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데, 그것은 윤리적 과제가 어떤 지속적인 노고라는 것이다. 실체로서, 신은 필연적으로 그의 모든 변용들의 원인이며, 이러한 변용이 그것들이 ‘능동’이라고 불리워지는 그의 본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그런 원인이다. 이것은 우리들 같은 유한 양태 안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그와 같은 양태들은 그 자신의 본성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것의 존재는 외부로부터 촉발되고 결정되는 연장적 부분들로 구성된다. 이것이 왜 우리가 양태들의 변용이 정념들(passions[수동, 겪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즉 양태들이 겪는 변화는 그것들의 본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린시절은 우리 모두가 처했 있던 불운한 상태로서, 우리가 외적 인과에 막대하게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경우에 해당되는 분명한 예시이다. 이제 윤리적 질문과 임무가 전면에 나선다. 이것은 다음과 같다. 유한 양태는 능동적 변용의 상태를 획득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여기서 우리는 가능한 것에 대한 보다 완화된 개념이 필요하다. 즉 우리가 유한 양태로 존재하고, 그것이 정념의 수준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은 그와 같은 정념이 오직 우리 자신의 작은 부분을 점유하도록 하는 것이다(219).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스피노자의 동력학은 [...] 모든 유한성을 신중하게 배제한다”(Deleuze 1992, 233). 스피노자에게, 목적론은 자연 안에서는 소용 없는 것이다. 즉 “자연은 선결정된 목적 없는 어떤 복잡한 과정이다 [...] 자연 바깥에는 그 어떤 궁극적인 근거도 없으며, 다만 내재적 힘, 관계 그리고 자연 그 자체로 구성된 신체적 복합체들만이 있다”(Hayden 1998, 110). 표현적 자연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이 자연이 신에 의해 그리고 선행하는 조화에 의해 주어진다는 어떤 역전된 기계론으로 존재하는 라이프니츠의 목적론을 유지한다. 사물/사태는 스피노자에게서 매우 다르다. 그에게서 우리는 어떤 순수 내재적 인과성을 발견하는 바, 그것은 그 자신의 역능의 힘을 사물/사태에 부여하는 사유임에 틀림없으며, 양태로서 그것들에 속한다. 이러한 자연의 개념에서 목적성은 배제되며, 이것이 코나투스 개념의 진정한 의미이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론은 어떤 목적론적인 의미도 남김없이 사라진 것에 대한 역동론을 드러내는 것 외에 어떤 기능도 가지지 않는다” (Deleuze 1992, 233). 거기에는 어떤 도덕적 조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본질의 형이상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 어떤 현상의 기계론도 없다. “자연에서 표현이란 결코 어떤 목적론적 상징도 아니지만,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인과적 펼침(explication)이다”(232). 들뢰즈의 스피노자에게 그 어떤 기계론 또는 결정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그는 모든 것이 물리적일지라도, 거기에는 또한 역능과 역동론의 물리학이 실존 안에스 그 자체를 내세우는 본질을 받아들이고 행위의 힘이 가진 다양한 변이들을 받아들이는 수준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것이란 세 가지 방식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a) 양태적 본질들에 상응하는 강도적 양에 관한 물리학, (b) 양태들이 존재 상태로 진입하는 어떤 기게론으로서의 연장적 양에 관한 물리학, (c) 본질들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존재 안에서 드러나고 행위의 힘의 변이들을 채택하는 ‘역동론’을 재현하거나 의미하는 힘의 물리학이 그것들이다.
들뢰즈에게 스피노자는 자연철학에 가장 철저하게 연루된다. 하지만 들뢰즈에게 그것은 또한 스피노자가 실천철학의 가장 위대한 전통에 속하는 경우에서만이다. 이 실천철학의 주요한 임무는 탈신비화(신화들과 미신들에 속하는)이다. 두 가지 기획이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자연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 -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우리가 충분하게 그것에 함축되는지를 알게 되는 방식에 대해 캐묻는 것 -를 거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월한 인간 본성’을 획득하고 개발할 수 있으며, 능동성에 속하는 우월함으로 인간의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조건들을 옮겨 놓는다. 여러 가지 것들 가운데 미신은 우리 행위 능력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하며, 그 능력을 제거한다. 여기에는 공포 그리고 그 공포와 연결된 희망이 포함되고, 마찬가지로 우리를 환영으로 이끄는 불안도 있다. 들뢰즈(1992)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루크레티우스처럼 스피노자도 철학자에게 슬픔인 모든 것, 슬픔에 기생하는 모든 것,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슬픔을 필요로 하는 모든 자들을 고발하는 과업을 부여한다. “군주제의 거대한 비밀과 그것의 사활이 걸린 관심사는,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의 안녕이 문제이기라도 한 듯이 예속을 위해서 싸우도록 그들을 속박하는 공포를 종교의 이름으로 변장시킴으로써 사람들을 기만하는 데 있다 [...]” 슬픈 정념들의 평가절하, 그것들을 배양하고 이용하는 자들에 대한 고발이 철학의 실천적 목적을 형성한다(270).
물론 들뢰즈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이것보다 다소 더 복잡한 지점이 있다. 그것은 몇몇 슬픈 정념들이 사회적 기능을 가지며 사회적으로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희망, 겸손, 연민 등등). 하지만 들뢰즈에게 자연주의는 - 루크레티우스로부터 스피노자 그리고 니체에 이르는 - 긍정의 철학에 의해 움직여지고 방향을 잡는다. 즉 “스피노자의 자연주의는 그의 실체론 안에서 사변적 긍정에 의해 정의되며, 그의 양태 개념 안에서 실천적으로 정의된다”(272).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잘 알려진 지혜의 단편을 인용한다. 즉 자유로운 인간이란 다름 아니라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 진정한 지혜란 삶에 대한 성찰이지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자연주의로부터 들뢰즈는 어떻게 규범적인 윤리학을 전개할 것인가? 그는 고전적인 자연법 이론에 반하는 홉스의 성찰로부터 자연권 이론을 발전시키는 스피노자에 대해 쓴다. 자연법에 관한 고대적 전통(키케로)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발전시킨다. (a) 우리의 존재는 목적들의 질서 안에서 그 완전성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우리는 자연적으로 이성적이고 사회적이다). (b) 자연 상태는 사회를 앞서지 못한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는 어떤 선한 시민 사회 안에서 자연에 일치하여 살아간다. (c) 이런 상태에서 우선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이 의무들이다. 우리의 자연적인 권력이 단지 잠재적이며, 그러한 것들이 기여하는 목적들에 관여하는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한 이성의 행위를 요청한다.
스피노자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이것을 변형하는데, 이것은 모든 것이 자연권 또는 힘 안에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는 따라갈 필요 없는 세부사항들이다. 들뢰즈(1992)에 있어서 우리의 사유에 발생할 필요가 있는 핵심적인 발전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 그것은 능력들과 힘들에 속하는 어떤 문제로서, ‘법칙’이 거기서 ‘권리’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되며, 이것은 자연법들이 의무의 규칙들이라기보다 힘의 규범들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법이라는 단어의 바로 그 의미이다. 자연법은 결코 의미의 규칙이 아니라, 힘의 규범, 권리와 힘과 그것의 실행의 통일성이다”(258). 이 모델에 있어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의무들은 언제나 우리의 힘과 우리의 권리의 실행 있어서 부차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나아가,
따라서 금지하고 명령하기 위한 도덕법은 어떤 종류의 신비화를 포함한다. 우리가 자연법, 즉 삶/생명의 규범들을 보더 덜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명령들과 금지들로서 그것들을 해석한다. 철학자가 ‘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 망설일 수밖에 없는 지점이 이것이며, 따라서 어떤 도덕적인 분위기가 유지된다(268).
이 규범들은 그것들이 개체들의 행위 능력과 힘과 관련된 의미에서 삶에 속한 것들이다. 우리는 어떤 특수한 동기의 바깥에 있는 규범적 유형 또는 동물이다. 즉 우리는 느닷없는 우연에 속한 주체로만 존재하기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연적 힘들의 이성적 조직화를 탐색하며, 이 문명과 힘의 향유를 강화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스피노자가 논증한 것에 대한 한 사람의 주석자로서, 그가 비록 심대한 자연주의자이며, 바위들이 정신을 가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는 “이러한 정신들이 해방 또는 이성에 대한 응답과 같은 행위주체들을 요청하는 사물/사태일 수는 없다는 것을 수용”하는데 어떤 어려움도 없다(Kisner 2011, 59). 따라서 인간이 다른 양태들처럼 하나의 양태라 할지라도, 그것은 또한 가장 복잡한 양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가장 많은 정동과 관념들이 속하기 때문이다.
자연법과 시민법 사이의 차이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적이고 일원론적인 사유에서 최소의 것이다. 인간의 법들, 즉 시민법은 특수한 방식으로 인간의 관심에 속한다. 반면 자연법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법은 인간이 그 자신을 보존하는 자연적 충동(자연법)을 따르는 바, 그것의 발명이라는 의미에서 자연법의 ‘표현’이다. 한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자연 자신은 그 세부사항에서 시민법을 낳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은 확실히 시민법에 힘을 전달하며, 이는 인간이 규범들을 파악하는 그만큼, 음식을 쫓는 원시인으로서 자기-보존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연적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다(DeBrabander 2007, 90).
자연 안에서 우리는 - 선과 악이라는 - 어떤 도덕적 차이를 보지 못하지만,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합법적인 ‘윤리적’ 차이를 정립할 수 있다. 예컨대 현자와 바보의 차이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성의 내용은 힘 또는 자유다. 들뢰즈는 이러한 차이가 코나투스와 연관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바보와 무지한 인간은 이성적이고 강한 인간 만큼이나 자신의 존재 안에 머무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윤리적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며, 그것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들뢰즈(1992)에 따르면, 이 질문은 우리의 코나투스를 이끄는 일련의 정동들을 중심에 놓으며, 적합관념과 능동적 정념들의 발전을 함축한다. “이성, 힘 그리고 자유는 [...] 어떤 형성과정, 전개, 문화와 분리불가능하다. 아무도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으며, 아무도 이성적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의 본성에 일치하는 것에 대한 느린 배움과정, 즉 우리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느린 노력을 용인할 수 없다”(262). 들뢰즈에게 이성이란 우리가 윤리적이고 규범적인 주체들을 생성하는 모든 단계들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공통개념들과 적합관념들과 만나는 우연의 악의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으며, 보다 사려 깊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일치와 어긋남들을 포함하여 우리의 만남들을 조직하려는 노력을 돕는다(280). 따라서 들뢰즈에게 이성은 - 심지어 그것의 이른바 ‘계율들’ 안에서조차 - 우리로부터 무언가를 욕구하지는 않는 바, 이는 자연에 저항하며 따라서 이성적 존재는 “전체적으로 자연의 노력을 재생산하고 표현한다”고 알려질 수 있다(265). 들뢰즈는 이성을 단순히 인위적 노고(‘인습’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는)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보다 이성은 인위적인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자연적 조합에 의해 진행하는 것을 평가하는 것에서 필수적이며, 여기서 강조점은 사회 통합을 발생시키기 위한 자기-투여와 관심들에 관한 신중한 계산이 아니라, “일종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직접적인 재인(reconnaissance)”이라고 할 수 있다(264).
들뢰즈가 이 ‘재인’을 강조함으로써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인가? 이것은 그로스가 그토록 비판하던 재인의 관념과 많이 다르게 작동한다. 우리의 삶에서 슬픈 정념들의 역할을 제거하려는 노력 하에, 우리는 이성적으로 우리의 만남을 조직화하려는 쟁투를 벌인다. 진정한 유용성은 자연 안에서 우리와 일치하는 신체들을 만나기 위한 투쟁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유용한 것을 조직하기 위해 탐색할 때 발견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모든 ‘나쁜’ 만남, 예컨대 질병과 죽음과 같은 만남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과 통합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가능하며, 즐거운 정동들의 최대치를 기대할 수 있다. 들뢰즈(1992)는 이제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만약 우리에게 가장 유용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것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리적으로 자연 안에서 인간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또는 진정하게 인간에게 유용하다”(261). 이것은 이성적인 만남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이 그 자체로 결합가능한 관계들 안에서 인간 존재의 어떤 연합을 형성하는 노력으로 변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실천이란 자연과 대립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수행된 요청이 오직 모든 사람이, 행위능력을 고양시킴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그들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이 그들 자신에게 유용한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따라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위성이나 관습성도 이성의 코나투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이성의 상태는 더 높은 수준의 신체의 구성이며 이로써 더 높은 수준의 영혼의 구성에 일치한다”(264). 인간은 인간을 인식하며, 우리는 유한양태로서, 공통개념들을 통해 자연의 긍정적 질서를 확인한다. “신체들이 서로 간에 일치하고 대립하는 바, 구성적이거나 규정적인 관계들, 자연의 법칙은 더 이상 명령과 금지로 나타나지 않으며, 구성의 규범들, 힘의 실현을 위한 규칙들이 [...] 그 본성이다”(291). 이런 맥락에서 재인은 일종의 보상(gratitude)이다. 스피노자(1996) 자신이 쓴 바에 따르면 “오로지 자유로운 인간만이 서로 간에 충분히 감사해 한다”(IV: p. 71)
규범이란 무엇인가? 들뢰즈는 흄을 따라 그것을 ‘일반규칙’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규범들 - 소유의 권리, 상호작용의 규칙들 - 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은 인간에게 능동성과 안정성 그리고 공동체성을 이루는 코나투스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 다시 말해 “규칙의 기능은 어떤 안정되고 공통된 관점, 즉 견결하고 조용하게, 우리의 현재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관점을 결정하는 것이다”(Deleuze 1991, 41). 들뢰즈에 의하면, 인간 동물은 문화적 구성으로 인해 어떤 발명적 종이며, 들뢰즈에게 이것은 자연 안에서 우리의 역할이다. 비록 우리가 인간성을 ‘자연화’할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윤리학과 정치학을 우리의 본성으로서(as our nature) 요구한다. 들뢰즈는, 분명히 문화 비판과 그것의 발명들에 대한 여지가 충분하게 존재하지만, 인간적 발명, 즉 관습, 인공물, 그리고 협약과 같은 영역을 존재론적으로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가타리와 들뢰즈의 협력 작업과 들뢰즈의 후기 스피노자주의로 넘어가고자 한다. 나는 존재론적 일의성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들뢰즈가 인간 동물이 윤리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구별된다는 생각을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적 모델을 선호하는데, 여기서 강조점은 계통발생적 계보들을 가로질러 그리고 계보학적 나무 모델들에 반하여 발생하는 횡단적 소통에 놓인다. 진화는 가계와 혈통에 따라 그려진다. 예컨대 리좀은 ‘반-계보’적이며, 가계나 혈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변화, 확장, 정복, 포획, 파생’을 통해 작동한다. 그들은 이것을 진화의 발명적 영역으로 바라보는데, 이것이 새로운 결연이나 창조적 생성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쓴다. “만약 진화가 어떤 진정한 생성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공생(symbiosis)의 영역 안에서인데, 공생은 총체적으로 상이한 범위와 왕국을 그 어떤 가능한 가계도도 없이 작동하게 한다”(Deleuze and Guattari 1988, 238).
『천의 고원』(1988)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연을 “거대한 추상 기계와 같은” 혼효면(plane of consistency)으로 정의한다. 우리는 이것을 “기계적 퓔룸”(machinic phylum)으로 부른다. 이것은 ‘추상’이지만 ‘실재적이고 개체적’이다. 즉 “그것의 편린들은 여러 배치들이자 개체들이다. 이것들 각각은 상호결합된 관계들로서만 어떤 무한성으로 진입하는 입자들의 무한성을 함께 그룹화한다”(254). 사실상 이것은 어떤 새로운 일원론을 정립하는 것인데, 여기서 자연의 평면은 “비생명적인 것과 생명적인 것,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에 평등하게 적용되는” 어떤 통일성을 향유한다(254). 이러한 평면의 규정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글을 길게 인용하는 것은 가치 있다.
그것의 통일성은 사물들 깊이 묻혀 있는 어떤 근거와 무관하며, 신의 정신 안에 있는 어떤 기획이나 목적과도 무관하다. 대신에 그것은 모든 것이 놓여 있는 평면이며, 모든 형식들의 교차지점, 모든 기능들을 가진 기계와 비슷하다. 그리고 이것의 차원은 증가하지만, 그것이 가로지르는 개체들의 다양체의 차원들과 더불어 증가한다. 그것은 고정된 평면으로서, 사물/사태들이 오직 속도와 느림에 의해서만 서로 간에 구별된다. 일의성의 평면은 유비와 대립한다. 일자는 모든 다양들에 있어서 하나의 단일한 의미로 말해진다. 존재는 그 모든 다양들을 단 하나의 의미로 표현한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실체의 통일성이 아니라 이러한 특이한 삶/생명의 평면 위에서 서로간에 부분으로 존재하는 변양들의 무한성이다(254).
여기에는 확실히 설명할 만한 많은 것들이 있다. 나는 이것을 이 지면에서 할 수는 없다. 난 대신에 다음 사항에 집중하고자 한다. 즉 들뢰즈는 우리가 어떻게 신체와 그것의 존재와 행위의 힘들을 정의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에게 신체는 거의 모든 것일 수 있으며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첫째로 운동과 정지, 속도와 느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어떤 무한한 수의 입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신체는 어떤 ‘정동적’(affective)인 것인바, 거기서 신체는 다른 신체들을 촉발하고 그 다음으로 그 다른 신체들에 의해 촉발된다. 들뢰즈는 신체에 관한 스피노자적 규정이, 정말로 신체를 정의하는 것이 형식도 기능도 아니라, 운동과 정동의 관계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들뢰즈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생물학과 행동학, 특히 윅스킬(von Uexküll)의 저작에 대해 논하도록 이끄는 두 번째 주장을 개괄하자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어떤 동물 또는 어떤 인간을, 그 형식, 그 기관들, 그리고 그것의 기능에 의해서가 아닌 것으로서, 그리고 마찬가지로 어떤 주체가 아닌 것으로서 정의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가능한 정동들에 따라 정의할 것이다”(Deleuze 1988, 124). 따라서 그는 우리가 스피노자 이후 오랫동안 윅스킬과 같이 동물의 세계를 정동[촉발]들과 그것의 능력들로 기술하는 생물학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을 발견한다고 주장한다.
비로소 들뢰즈는 인간세계와 동물 세계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지만, 이러한 새로운 동물행동학이 인간의 경우에 유용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무슨 정동들이 우리가 진전되는데 발휘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며, 이것은 “아주 긴 기간의 실험, 멈추지 않는 사려” 그리고 내재성의 평면을 구축하는 지혜를 포함하는 삶에서의 ‘경험적 교육’ 안에 있다. 이러한 되기-윤리학과 관련하여,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살아가고 실험하는 실천의 한 양태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더 나아가 능동적 삶/생명, 긍정적 활동성이다. 예컨대 증오, 공포 그리고 잔혹함이라는 수동적이고 슬픈 정념에 반하여 관대함과 즐거움이라는 능동적 정서를 배양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심지어 동물행동학이 어떤 정치적 함축과 적용가능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더 이상 유용성이나 포획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화가능성과 공동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1988, 126). 인간 공동체와 관련하여, 과제는 더 높은 개체를 형성하는 것이며, 근대 정치적 사유의 모든 고전적 질문들이 다음과 같은 지평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를, 타자의 관계들과 세계를 보존하고 존중하면서도, 세계 안으로 어떻게 취하는가?”(126) 우리는 또한 인간 동물로서 우리에게 유용할 수 있는 여러 상이한 사회성의 유형들을 탐색할 수 있는데, 인간의 공동체와 이성적 존재의 그것 사이의 차이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들뢰즈가 그의 가타리와의 후기 작업, 그리고 「스피노자와 우리」에서 발전시킨 삶/생명의 모습은, 그가 비인간과 인간, 자연과 문화, 자연과 인공물 간의 구별들을 완전히 붕괴시켰다고 잘못 생각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쉽게 길을 잃도록 만든다. 물론 이것은 위대한 자연주의적 관점이다. 즉 인간으로부터 수위성을 찬탈하여 자연화하는 것이다. 그로스(2011a)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그것의 목표는 삶/생명을 ‘인간이라는 특권’으로부터 떼어내어, 생명과 비생명의 세계로 가져다 놓는 것이다(39). 들뢰즈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물/사태는 서로 간에 관련되어 있다. 이는 형식과 기능의 붕괴를 통해 진화에 있어서 가계적 친족적 모델들 너머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윤리적 생성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특수하거나 단독적인 어떤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론에서 나의 주요 논점은 다음과 같이 표명될 수 있다. 일의성에 대한 언급은 모든 생명 체계들과 실체들이 동일한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실재성을 누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면, 1950년대와 60년대 그의 저작에서 들뢰즈는 흄과 스피노자에 있어서, 인간 동물이란, 흄이 ‘발명적 종’이라고 불렀던 것에 따라, 탁월한 규범적 동물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그와 더불어 인간을 파괴적인 종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들뢰즈가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 현존하는 상이한 공동체들과 사회체들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자연이나 생태적 주제들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들뢰즈가 우리에게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비판적 작업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들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저술 안에서 수행되었다. 예를 들어, 생명체들이 불변하는 질서에 의해 고정되지 않는 삶의 내재적 평면으로 파악되는 자연에 대한 가능한 생태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만약 자연이 정동적 삶 그리고 정동적 관계들에 관해 분배적이라면, 그때 세계 안의 각각의 사물/사태들 사이의 연속성을 긍정하기 위한 어떤 기반, 또한 자연의 다중성과 다양성을 헤아리기 위한 기반이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기반은 생물다양성 개념을 포용하고, 우리에게 생태적 복잡성의 모델을 부여한다(Hayden 1998, 118). 여기서 우리는 생태적 환경의 다양체, 그들의 상호작용적인 요소들의 다양성, 그리고 환경들 간의 역동적 관계들에 호소한다. 이 각각의 것은 항구적으로 번성하기 위해 내재적인 외재성(immanent exteriority)에 연결된다. 우리는 이 평면에 대해 무관심것으로도 밀접한 체계로서도 정립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인간/비인간 구별의 종말이며, 존재론적 수준에서 의미 있다고 가정할 것이다. 비록 내가 다른 수준들, 즉 문화적, 역사적, 윤리적 또는 정치적 수준에서 그것이 붕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해도 말이다.
우리는 들뢰즈가 새로운 자연주의를 그의 스피노자주의(그의 에피쿠로스주의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에 대한 재작업을 통해 어느만큼 제공하는지를 이해했고,[6] 마찬가지로 그의 경우에 이러한 자연주의에 대한 연구가 윤리적으로 어느 정도로 이어지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의 주요한 주장은 비록 들뢰즈가 어떤 혁신적인 존재론 또는 존재-윤리론을 생산한다 해도, 그가 인간 동물로부터 그것의 윤리-규범적 특유성을 박탈하는 그러한 지적 운동과 일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진실로, 들뢰즈는 인간 주체 안에 지식을 근거짓지 않으며, 재현에 지식을 제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그를 그토록 도전적으로 만드는 바이며, 이에 따라 소위 탈-근대 사상가로 자리매겨지게 되는 바이다. 즉 그는 형이상학을 수행한다. 하지만 우리는 들뢰즈의 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상이한 요소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그것들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생산적이거나 그보다 더 낮은 수준에서 그의 지적 수행들이 야기하는 그 어떤 긴장도 없다(예컨대 누군가는 니체주의에 대한 수행작업과 베르그송주의에 대한 그것 간에 존재하는 유별난 긴장을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 장이 적어도 독자들로 하여금 신유물론에 따라 들뢰즈를 전유하는데 있어서 재사유할 거리를 제공하고, 윤리적 질문들과 규범적 주제들을 신중하게 고려하게 하기를 희망한다.[7] 현대 사상에서 들뢰즈의 유산이 상당히 복잡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신유물론’과 관련하여, 들뢰즈가 고전적 자료들에 기반하여, 1960년대에 그와 같은 유물론에 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동시에 포스트-휴먼적인 전회의 가치와 우리가 엘리자베스 그로스의 저작에서 만나는 그러한 인간과 정치학을 자연화하기 위한 시도를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는데, 이로써 새로운 생태학적 사유 방식들을 개척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지금 지구행성이 직면한 생태-정치적 위기에서, 만약 그것을 통해 그리고 거기 연루되면서 적합하게 사고된다면, 들뢰즈적 영감을 얻은 유물론의 원천이 요구된다는 것에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손쉽게 철회될 수 없는 것은 들뢰즈의 스피노자주의에 있는 그 인간적 요소들, 그에 따른 탈신비화와 인간해방의 임무에 대한 그것의 실행이다.
[주석]
[1] 이것이 과도한 단순화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1968년의 스피노자에 관한 책의 핵심에 어떤 윤리적 교육론이 있다는 것과 그것의 ‘휴머니즘적’ 지향이 들뢰즈의 해석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무시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1960년대 ‘스피노자’에 대한 반휴머니즘적 독해에 대해서는 Peden 2014, 6장을 보라.
[2] 전형적으로 들뢰즈는 신유물론자가 아니라 ‘신생기론자’로 설명된다. 들뢰즈가 실재로 ‘신유물론’이라는 말을 그의 1960년대 스피노자에 관한 저작에서 사용했다는 사실에 대해 무시하면서, 쿨과 프로스트(Cool and Frost, 2010)는 이상하게도, “질 들뢰즈는 새로운 존재론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급진적인 경험주의와 물질화에 대한 주목할 만한 기술들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유물론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3] 쿨과 프로스트(2010)가 『신유물론』의 편집자 서문에서, 신유물론의 등장을 ‘갱신된 유물론’(6)이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최근의 연구에서, 클레어 콜브룩(Claire Colebrook, 2016)은 유물론은 “언제나 되돌아 오며, 그러한 되돌아옴은 언제나 어떤 유물론적 전환의 일부에 속한다. 그러므로 유물론은 언제나 ‘신’유물론이다”라고 논했다.
[4] 이 저작은 들뢰즈의 생명철학적 기여에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신유물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들뢰즈가 이 유물론에 영감을 가져다 준 측면에서 그러하다.
[5] “실체는 그것의 속성들 안에서 첫 번째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이때 각각의 속성은 하나의 본질을 표현한다. 하지만 속성들은 재차례에 와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즉 그것들은 그들의 종속적 양태들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며, 그와 같은 각각의 양태는 속성의 변용을 표현한다”(Deleuze 1992, 14)
[6] 이것에 대한 통찰은 나의 논문 “Affirmative Naturalism: Deleuze and Epicureanism”(2014)을 참조.
[7] 최근에서야 규범적 사상가로서 들뢰즈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어떤 해석자에 따르면, 들뢰즈 철학의 도덕적이고 가치론적인 측면들이 존재론적, 역사적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 의해 심히 무시되어 온 경향이 있었다(June 2011, 89). 다른 사람들이 소위 ‘포스트-모던’ 사상가라고 부르는 데리다와 푸코를 따라, 들뢰즈는 도덕적 상대주의, 회의주의 그리고 심지어 허무주의를 고발했었다. 앤더스 크리스텐슨(Anders Kristensen, 2013)이 쓴 「들뢰즈 철학에서 사유와 규범성」(Thinking and Normative Deleuze’s Philosophy)은 이 주제에 전념하는 논문집인데, 규범적 사상가로서 들뢰즈의 면모를 해석한다. 이에 따르면 들뢰즈는 결코 단순히 그가 주장하는 주체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적 진술들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변화와 (...)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11). 들뢰즈의 기획으로 기술된 “형이상학적 과학”은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발병되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규범적이라고 말해질 것이다.즉 “그것은 새로운 지반의 발명으로서, 행위와 신념의 새로운 형식을 열 수 있는 사유의 상이한 방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12). 들뢰즈에게서 규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Hughes 2012, esp. 144–46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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