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바라드의 수행성 이론
Karen Barad, ‘Posthumanist Performativity: Toward an Understanding of How Matter Comes to Matter,’ Signs, Vol. 28, No. 3,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Gender and Science: New Issues(Spring 2003), pp. 801-831
카렌 바라드, 번역: 노마(박준영, 수유너머 104)
"자연 – 문화와 반대된다는 – 이 비역사적이고 비시간적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우리는 어디서 취득했던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리함과 자기-의식성에 의해 너무 과도하게 감명받고 있다. ...... 우리는 똑같은 구닥다리 인간중심적인 어린이 동화를 반복해서 우리 자신에게 들려주는 짓을 그만 둘 필요가 있다."
- 스티브 샤비로(Steve Shaviro, 1997)
언어는 너무 많은 힘을 부여받아 왔다. 언어적 전회, 기호적 전회, 해석적 전회, 문화적 전회, 최근의 이런 것들에서 그 모든 전회마다 모든 ‘사물/사태’ - 물질성도 마찬가지로 – 가 언어의 문제이거나 문화적 재현의 이런저런 형태들로 전회한 것으로 보인다. 도처에 수군대는 ‘물질’에 대한 재담들은 공교롭게도, 핵심개념들(물질성과 의미화)에 대한 어떤 재사유의 흔적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의 문제들/물질들(matters)이 의미화의 문제들로 대체되는 한에서 징후적인 것으로 보인다(여기에는 어떤 인용할 만한 것도 없다). 언어 문제/물질. 담론 문제/물질. 문화 문제/물질. 여기에는 더 이상 물질로 보이지 않는 것들만이 물질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무엇이 우리가 재현된 사물/사태들에 대해 결핍된 그것들의 내용과 문화적 재현에 대한 어떤 직접적 접근을 가진다는 믿음을 추방하는가? 언어가 물질보다 더 믿을 만한 것이 되는 사태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왜 물질이 수동적이고 변화불능으로 그려지거나 기껏해야 언어와 문화로부터 파생적으로 변화를 위한 잠재성을 물려받는 반면, 언어와 문화는 그들 자신의 행위성과 역사성을 부여받는가? 어째서 물질성 자체가 언제나 이미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어떤 언어적 영역 안에서 형상화될 때, 자연주의적 믿음에 대한 잔인한 역전과 같은 것으로 우리를 이끌었던 물질적 조건들을 따라 우리는 탐구들을 지속하는 것인가?
언어의 힘이 실질적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너무나 실질적이라고, 또는 아마도 보다 핵심적으로, 너무 실질적으로 되고 있다고 논증할 것이다. 언어의 힘에 대한 지나친 믿음도 언어가 너무 많은 힘을 부여 받고 있다는 기존의 관점도 21세기 초에 특별히 적합한 새로운 파악은 아니다. 예컨대 19세기 내내, 니체는 문법을 너무 심오하게 취급하는 잘못된 경향에 대항하여 경고했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모양짓고 결정하기 위한 언어적 구조를 받아들이는 것, 즉 언어의 주어과 술어 구조가 실체와 속성이라는 선재하는 존재론적 실재를 반영한다는 그 믿음 말이다. 문법 범주들이 세계의 아래에 놓인 구조를 반영한다는 믿음은 어떤 계속되는 유혹적인 정신의 습관으로서 의문시될 만한 것이다. 사실상 선재하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는 단어들의 힘에 관한 재현주의적 믿음은 전통적인 실재론자 뿐 아니라, 사회 구성주의자의 믿음을 지지하는 형이상학적 전제다. 특히 사회구성주의는 사려깊고 지적인 불만을 표명해 왔던 페미니스트와 과학자 연구 집단 둘 모두 안에서 강력한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1]
담론적 실천에 관한 수행적(performative) 이해는 선재하는 사물/사태를 재현하는 단어들의 힘에 관한 재현주의적 믿음에 도전한다. 합당하게 해석하자면, 수행성이란 (물질적 신체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단어들로 되돌리는 어떤 시도가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수행성은 정확히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결정하는 언어에 주어진 과도한 힘과의 경합이다. 그러므로 수행성을, 언어를 실재의 더미라고 파악하는 어떤 언어 일원론의 형태와 동일시하는 그릇된 개념과의 아이러니한 대조에서, 수행성은 실재적으로 언어와 재현의 다른 형태들에 우리의 존재론들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허용될 만한 것보다 더 많은 힘을 부여하는 정신의 음미되지 않은 습관들에 대한 반대인 것이다. [2]
재현주의에서 수행적 대안들로의 움직임은 기술(descriptions)과 실재 간의 일치라는 문제(예컨대 그것들은 자연 또는 문화를 반영하는가?)로부터 실천/실행/행위의 문제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나는 이러한 접근방식들이 존재론, 물질성 그리고 행위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을 전면에 배치시킨다고 논할 것이다. 반면 사회구성주의적 접근법은 기하광학에 긴박되어, 마주보는 거울 사이의 무한한 이미지 놀이와 매우 흡사하게, 인식론적인 성취에 있어서 앞뒤로 움직이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기하광학의 재현주의적 덫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나는 물리광학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여기서는 반성(reflection, 반영)보다 회절(diffraction)에 관한 질문으로 초점을 옮긴다. 페미니즘와 퀴어 이론 그리고 과학연구의 성찰에 관해 회절적으로 독해한다는 것은 어떤 설명에 있어서 ‘사회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종종 날카롭게 분리되는 개별체들(entities)(그리고 일련의 분리된 관심영역들)로 드러나는 것은 실재로는 결코 절대적인 외재성의 관계를 도출하지 않는다. 경계들의 무한한 본성을 설명하는 회절 패턴들처럼 - ‘빛’의 경계들 안에 그림자를 전개하고 ‘어둠’의 영역 안에 밝은 지점들을 드러내는 – 사회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의 관계는 ‘안의 외재성’(exteriority within)이라는 관계를 가진다. 이것은 정적 관계성이 아니라 동적인 것 – 경계들을 활성화하는 – 으로서, 언제나 구성적인 배제들을 초래하고 따라서 의무성(accountability, 앞서 사려함)의 문제를 요청한다.[3] 나의 목표는 과학 연구와 페미니즘 그리고 퀴어 이론과 같은 시도들에서 수행성이라는 이론적 도구를 정련하고, 그것들 간의 상호 참조를 증진하기 위한 노력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수행성의 정교한 성찰을 제공할 것인데, - 유물론적, 자연주의적 그리고 포스트휴먼적 성찰 - 이것은 물질이 그 지속적인 ‘간-행성’(intra-activity)에 있어서 세계의 생성으로의 능동적 참여자로 기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4] 물질이 어떻게 물질이 되는가를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재현주의에서 수행성으로
"사람들은 재현한다. 그것이 어떤 개인이 되어가는 것의 일부이다. (...) 나는 말한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가 아니라, 호모 데픽터(homo depictor, 기술적 인간)라고."
- 이안 해킹(Ian Hacking 1983, 144, 132)
자유주의 사회학 이론과 과학적 지식론은 그 생각이 아주 많이 닮아 있다. 즉 이들에게 세계는 – <804>법 이전에 또는 법의 발견 이전에 실존하리라고 추정되는 – 개인들, 즉 재현을 기다리고/도입하는 개인들로 구성된 것이다. 존재자들이 그 재현에 앞서 고유한 속성들과 더불어 개체들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재현주의의 정치적, 언어적 그리고 인식론적 형태들에 대한 믿음을 지탱하는 형이상학적 전제다. 또는 다른 방식으로 논해 보자면, 재현주의는 재현들과 그것들이 재현하고자 하는 것들 사이의 존재론적 구별에 대한 믿음이다. 특히 재현되는 것은 재현하기의 모든 실행들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 즉 여기에는 두 가지 구별되고 독립적인 종류의 개별 실체들 – 재현물과 재현되는 실체들 – 이 존재한다고 추정된다. 재현의 체계는 때로 세 요소의 배치와 관련하여 명쾌하게 이론화된다. 예를 들어, 지식(즉 재현물들)에 부가하여, 한편으로 알려진 것(즉, 의도적으로 재현되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아는 자(knower, 특히 재현하는 자)의 실존이 때때로 분명해진다. 이렇게 될 때, 재현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체들 사이에 어떤 매개 기능을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당연시되는(taken-for-granted) 존재론적 간극이 재현물의 정확성에 관한 질문들을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과학 지식은 어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정확히 재현하는가? 언어는 그 지칭물을 정확히 재현하는가? 주어진 정치적 재현, 법적 의도 또는 몇몇 입법은 이른바 대표된 사람들의 관심들을 정확히 재현하는가?
재현주의는 페미니스트들, 포스트구조주의자들, 포스트식민주의 비평 그리고 퀴어 이론가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라는 이름들은 그러한 문제제기와 종종 연결되곤 한다. 버틀러는 정치적 재현주의[대의주의]의 문제점들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푸코는 권력의 사법적 체계가 그것들이 결정적으로 재현[대의]하게 되는 주체들을 생산한다고 지적한다. 권력의 사법적 관념들은 순수하게 부정적인 개념들 안에서 정치적 삶을 규제하기 위해 나타난다. (...) 하지만 그와 같은 구조들에 따라 규제되는 주체들은 그것들에 종속됨으로써 구성되고, 정의되며 그러한 구조들의 요청들에 일치되어 재생산된다. 만약 이러한 분석이 맞다면, 언어와 정치의 사법적 구성은 페미니즘의 ‘주체’로서 여성들을 재현하는 바, 그것은 그 자체로 담론적 구성이면서 주어진 재현주의 정치학 판본의 효과이다. 그리고 페미니즘 주체는 그것의 해방을 촉진한다고 가정되는 바로 그 정치적 체계에 의해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밝혀진다(1990, 2).
이러한 곤궁을 완화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판적 사회이론가들은 재현주의의 틀거리 너머로 나아가는 정치적 개입의 가능성들에 관한 이해를 형성하기 위해 분투한다.
재현주의가 과학 연구 분야에서 의문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재현주의에 관한 비판적 고찰은 과학연구가 자연과 과학적 지식의 생산에서부터 과학에 속한 실재 실천의 상세한 동력학에 관한 연구로 옮겨가고서야, 등장했다. 이 의미심장한 이동은 다양하게 분리된 학제적 과학에 관한 연구들(예컨대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사회학)과 과학연구들 사이의 강조점에 있는 차이를 거칠게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것은 모든 과학연구들의 접근법이 재현주의에 관해 비판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많은 연구들은 의문을 여지 없이 재현주의를 수용한다. 예컨대 과학적 재현물들의 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들이 있는데(과학자들이 어떻게 그것들을 생산하고, 해석하며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지에 대한 것을 포함하는) 이것은 이러한 초점, 즉 기저에 놓인 재현주의에 합당한 철학적 전망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몇몇 과학 연구자들에 의해 재현주의 너머로 가는 구체적인 움직임들도 존재해 왔다.
이안 해킹(Ian Hacking)의 『재현하기와 개입하기』(Representing and Intervening, 1983)는 과학적 본성의 재현주의적 사유의 한계에 관한 의문을 전면에 내세운다. 과학철학과 과학연구에서 재현주의에 대한 가장 끈질기고 계속되는 비판은 과학철학자 조셉 루즈(Joseph Rouse)의 저작에서 발견될 것이다. 루즈는 재현주의적 사고방식이 과학적 실천들의 본성을 이론화하는 중에 설립하는 제한들을 따져 묻고자 했다.[5] 예컨대 과학 실재론과 사회 구성주의 사이의 진부한 논쟁이 과학철학에서부터 과학연구로 별 무리없이 움직여 가는 것에 반해, 루즈(Rouse 1996)는 이러한 대립적인 입장들이 그들의 옹호자들보다 일반적으로 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그들은 재현주의적 가정을 공유하는데, 이것은 그와 같은 끝없는 논쟁들을 양산한다. 과학적 실재론자들과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과학 지식(이론적 개념들, 그래프, 입자궤도, 사진 이미지와 같은 그 다양한 재현적 형태들)이 우리가 물질 세계로 접근하는 것을 매개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달라지는 지점은 관계항에 관한 질문 즉, 과학 지식이 세계 안의 사물들을 그것들이 실재로 존재하는 바대로 재현하는지 또는 사회적 행동들의 생산물인 바, ‘객체들’로 재현하는지에 관한 것에 있다. 하지만 두 그룹은 모두 재현주의를 허용한다.
재현주의는 서구 문화 안에 너무 깊이 퍼져 있어서, 심지어 어떤 상식적인 요청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연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탈출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재현주의는 (‘자연 그 자체’와 같은 것, 단순히 우리의 그것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 역사를 가진다. 해킹은 원자와 허공에 관한 데모크리토스적인 꿈에 있어서 재현의 철학적 문제를 추적한다. 해킹의 인간학적 철학에 따르면, 재현은 데모크리토스에 앞서 문제화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실재’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그저 규정되지 않은 닮음의 의미만을 가진다”(142).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더불어 재현물과 재현된 것 사이의 간극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바, ‘외양’(appearance)은 그것의 첫 번째 현상(appearance)을 만들어 낸다. 나무나 개개의 개별체들의 융합으로 만들어진 딱딱한 물질인 이 테이블은 허공 안을 움직이고 있는가? 원자론은 재현이 실재라는 것에 대한 문제를 드러낸다. 철학에서 실재론의 문제는 원자론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루즈는 재현주의를 데카르트주의의 부산물로 취급하는데, 특히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데카르트적 분할이라는 숨은 결과를 중시한다. 이것은 앎을 수행하는 주체라는 노선을 따라 분할된다. 루즈는 데카르트적 의심의 본성 아래에 놓인 세계에 관한 단어 안에 있는 부조리한 믿음을 조명한다.
나는 재현(즉 그것의 의미나 내용)이, 그들이 아마도 재현할 사물들보다 많이 우리에게 접근가능하다는 가정에 대해 의심할 용기가 있기를 바란다. 만약 우리가 그것의 관계항들에 직접적으로 확실히 도달할 수 있는 바 마술적인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술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사물의 의미나 재현적 내용물에 직접적으로 도달하도록 만드는 언어가 있다고 생각해야만 하는가? 보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말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보다, 우리가 의미하는 바 또는 우리의 발화적 수행들이 언급하는 바를 우리가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가정은 우리가 ‘외적인’ 세계를 결여하고 있지만, 우리 사유의 내용들에 대해서는 직접적이고 특권적인 접근을 가진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있어서, 그 언어적 변형, 일종의 데카르트적 유산이다 (1996, 209).
달리 말해, 사물/사태에 관한 재현물을 향한 우리의 접근성에 관한 불균등한 믿음은 역사의 우발적 사실이지, 논리적 필연성은 아니다. 즉 이것은 단순히 정신의 데카르트적 습관인 것이다.[6]
사실상 한편으로 재현물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 재현을 기다리는 존재론적으로 분리된 개별체가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일관된 철학적 입장을 전개하는 것은 가능하다. 수행적 이해란 초점을 언어적 재현물에서 담론적 실천으로 옮기는 것으로서, 하나의 대안과 같은 것이다. 특히, 사회구성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으면서, 과학 연구에서 뿐 아니라, 페미니즘과 퀴어 연구에서도 수행적 접근법이 촉발되었다. 주디스 버틀러의 이름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서클에서 수행성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가장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이 이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취한 아주 드문 과학연구자라면,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그리고 조셉 루즈와 같은 과학연구 이론가들이 마찬가지로 과학적 실천의 본성에 대한 수행적 이해를 제시한다는 것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7] 사실상, 수행성은 문학 연구, 연극 연구 그리고 수행 연구의 맹아적인 학제간 영역에서, 모든 수행[공연]은 수행적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야기하면서,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 되었다.[8] 이 논문에서 나는 어떤 특별한 포스트휴먼적인 수행성 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은 중요한 물질적이고 담론적이며, 사회적이면서 과학적인, 인간이면서 비인간적인, 자연이면서 문화인 요인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포스트휴먼적 사고는 ‘인간’에 관한 상이한 범주들이 그저 주어진다는 점을 의문에 붙이는데, 이때 이 상이한 경계들이 안정화되고 탈안정화되는 것을 통해 실천들을 탐구하는 것이다.[9] 도나 해러웨이의 학술적 저서들 – 영장류에서부터 사이보그, 반려종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 은 이러한 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만약 수행성이 주체의 구성뿐 아니라, 신체적 물질의 생산과도 연결된다면, 버틀러의 ‘물질화’에 관한 사유와 ‘물질화된 재배치’라는 해러웨이의 개념에서와 같이, 이때 우리가 이러한 생산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해 진다.[10] 푸코의 권력 분석은 신체의 물질성에 대한 담론적 실천들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그의 분석에서 잠재적인 것을 한계짓는 중요한 요소들과 버틀러의 수행적 노력에 의해 제한되고, 이에 따라 정확히 어떻게 담론적 실천이 물질적 신체들을 생산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앞서 가게 된다.
만약 푸코가 맑스를 퀴어링하면서, 신체를 생산적 힘의 위치에 놓는다면, 그 자리는 국지적 실천과 연결된 힘의 아주 큰 조직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신체의 물질화에 관한 강력한 이론이 필연적으로 어떻게 신체의 물질성 – 예컨대 그것의 해부학적 요소와 생리적 요소 - 과 다른 물질적 힘들이 현실적으로 물질화의 과정에서 물질이 되는지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사실상 푸코가 『성의 역사』 1권의 마지막 장에서 분명히 하는 것처럼, 그는 물리적 신체의 적절성에 대해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힘[권력]의 전개가 어떻게 직접적으로 신체와 연결되는지, 즉 신체들, 기능, 생리적 과정, 감각, 그리고 쾌락에 연결되는지를 보여 준다. 소멸되어 버릴 신체라는 규정과는 다르게, 요구되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서로 간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분석을 통해 그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은 삶/생명을 그 대상으로 취하는 힘에 관한 현대 기술의 전개이 일치하도록, 점증하는 복잡화 경향에 묶여 있다. 그러므로 나는 ‘물질성의 역사’를 기획하지 않는다. 이 역사에서는 신체들을 오직 그것들이 지각되고, 주어진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그런 방식, 그리고 가장 물질적인 것과 가장 생기적인 것이 그것들 안에 투여되는 방식으로 취급될 것이다(1980a, 151–52).
다른 한편으로 푸코는 우리에게 생물학적이고 역사적인 것이 모순되지 않게 ‘함께 묶이는’ 그 방법에 대해 말해주지는 않는다. 생물학적이고 역사적인 힘들을 동시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신체의 물질성이란 무엇인가? 그 자신의 역사성을 가진 신체적 물질이란 어떤 수준에 있는 것인가? 사회적 힘은 변화를 허용하는 유일한 것인가? 생물학적 힘은 어떤 의미에서 언제나 이미 역사적인 것이 아닌가? 역사적 힘이 언제나 이미 생물학적이라는 것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강한 사회 구성주의적 흐름에 주어진 그와 같은 질문이 21세기 초의 어떤 간학제적인 서클들에서 물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규율 권력에 대한 정치적 해부학에 대한 푸코의 강조 전반에 있어서, 그도 마찬가지로 신체의 역사성에 관한 사유를 제공하는데 실패한다. 여기서 그 역사성의 바로 그 물질성이 권력의 작동과정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 물질의 수동성에 대한 이 암묵적인 재기입은 푸코의 광범위한 포스트재현주의적 사유를 따라다니는 재현주의의 확장된 요소들의 어떤 흔적이다.[11] 이러한 결함은 중요하게도 ‘담론적’ 실천과 ‘비담론적’ 실천 간의 관계를 이론화하는 것에 있어서 그의 실패와 관련된다. 유물론적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로즈마리 헤네시(Rosemary Hennessy)가 푸코 비판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신체에 관한 엄격한 유물론적 이론은 신체가 언제나 담론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에서 멈출 수 없다. 그것은 또한 하나의 사회 구성체에서부터 다른 사회구성체에 이르기까지 신체의 담론적 구성이 어떻게 비담론적 실천과 연관되는지를 다양하고 폭넓은 방식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1993, 46).
권력의 작동을 이해하기 위해 관건적인 것은 그 충만한 물질성 안에서 권력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것의 한정된 영역에 권력의 생산성을 제한하는 것, 또는 물질을 보다 더 물질화하는 능동적 요인이라기 보다 단순하게 생산과정의 끝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그 능력의 풍부함을 물질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신체적으로 꼴을 갖춘 인간이 심리적 과정을 통해 구성될 뿐만 아니라 게다가 생물학적 신체를 구성하는 바로 그 원자들이 어떻게 물질이 되는지,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어떻게 물질이 스스로를 느끼게 되는지를 이해할 것인가? 심리적이면서 사회역사적인 힘들이 어떻게 물질적 생산을 처리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 힘들다. 확실히 단순히 ‘사회적’이지만은 않은, 문제/물질이 되는 ‘자연적’ 힘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하나의 사례 – 논점이 ‘인간’ 신체들의 물질성에 제한된다 하더라도 – 이다. 사실상 다수의 물질적-담론적 힘들 - ‘사회적’, ‘ 문화적’, ‘심리적’, ‘경제적’, ‘자연적’, ‘물리적’, ‘생물학적’, ‘지정학적’이고 ‘지리적인’ - 이 있는데, 이들은 특정한 (뒤얽힌entangled) 물질화의 과정에서 중요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획일화하는 규율-정의된(disciplinary-defined) 결과들을 통해 규율-정의된 원인들을 따라가는 학제적 관습을 추종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특유한 일련의 학제적 관심들을 벗어나는 이 힘들 사이의 중차대한 간-행들(intra-actions)을 놓칠 것이다.[12]
필요한 것은 그 미분적인[차이나는] 구성들이 드러난 모든 신체들 - ‘인간’과 ‘비인간’ - 과 물질-담론적 실천들의 물질화에 관한 어떤 투철한 사유다. 이것은 담론적 실천들과 물질적 현상, 즉 행위주체의 ‘인간’적 형식들 뿐 아니라 ‘비인간’에 대한 사유 간의 관계의 본성에 대해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또한 계속 되는 역사성 안에 물질의 충만한 안주름[함축]에 관해 고려하는 생산적 실천의 정확한 인과적 본성도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그와 같은 이해의 전개를 향한 내 기여는 내가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이라고 불러 왔던 철학적 사고에 기반하는 것이다. 행위적 실재론은 기술과학적인 그리고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퀴어, 맑스주의, 과학이론 그리고 심오한 과학적 성찰들과 같은 여타 실천들에 대한 사유다. 이것은 특별히 닐스 보어(Niels Bohr),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미셸 푸코, 도나 해러웨이, 비키 커비, 조셉 루즈 등등으로부터 나온 중요한 사유들에 기반하여 건설된다.[13] 이러한 사유들을 여기서 충분히 전개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이 논문에서 나의 보다 제한된 목적은 수행성 개념을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그리고 과학 연구로부터 나온 중요한 성찰들을 상호간에 읽어 내기 위한 일종의 회절 장치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수행성 개념에 대한 유물론적이고 포스트휴먼적인 재생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저런 담론적 실천들, 물질화, 행위주체와 인과성이라는 친숙한 관념들의 재생을 초래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재현주의라는 형이상학적 토대에 직접적으로 도전하고, 그 대안으로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을 제안함으로써 이것을 시작한다. 이어지는 장에서 나는 담론적 실천과 물질성이라는 관념에 대한 포스트휴먼적 수행을 재공식화해 내고, 그것들 간의 특정한 인과 관계를 이론화할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나는 기술과학적 실천을 포함하여, 물질-담론적 실천들의 생산적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생기적인 인과성과 행위주체에 관한 행위적 실재론의 개념들을 논할 것이다.
수행적 형이상학을 향해
"사물과 단어들에 들러 붙어 있는 한,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말한다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본다고, 그리고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 질 들뢰즈 1988, 65.
"‘단어들과 사물들’은 어떤 문제에 대한 전반적으로 심각한 주제다."
- 미셸 푸코, 1972, 49
재현주의는 세계를 단어들과 사물/사태들이라는 존재론적으로 이접적인 영역으로 분리한다. 이때 재현주의는 지식은 가능하다는 식으로 그것들의 연결에 속하는 딜레마에 스스로를 노출한다. 만약 단어들이 물질적 세계에 매여 있지 않다면, 어떻게 재현이 그 기반을 가질 것인가?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세계라는 것이 그 특성상 세계의 표면에 새겨진 고유한 유사성들로 충만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사물/사태들은 이미 기호들로 채워지고, 단어들은 해변의 그토록 많은 모래알갱이들과 같이 기다리며 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인식하는 주체는 그와 같은 정신이 객체들로 가는 길을 볼 수 없는 재현물들의 두터운 망안에 붙잡힌다. 이 객체들은 이제 영원히 도달할 수 없으며, 언어 안에서 가시적인 모든 것은 인간성 자신의 능력에 관한 끈질긴 문제가 된다. 이때 객체는 재현주의가 그것이 내세우는 문제적인 형이상학의 수인이라는 모습을 띄기 시작한다. 제논의 역설에서 실망한 경주 선수 지망자처럼, 재현주의는 결코 그것이 노정하는 문제 해결에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형이상학적인 출발지점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에 있어서의 불가능성에 긴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출발 지점, 즉 다른 형이상학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14]
사물화(Thingification) - 관계가 ‘사물’, ‘개별체’, ‘관계항’(relata)으로 전환되는 것 – 는 우리가 세계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15] 우리는 왜 관계들의 존재가 관계항을 요청한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현대이론들과 서양 사유의 역사 전반을 뒤덮고 있는 바, 끈질기게 존속하는 자연, 물질성 그리고 신체에 대한 불신은 이러한 문화적 기질들로부터 양분을 섭취하는 것인가? 이 장에서 나는 관계항, 즉 ‘단어들’과 ‘사물들’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어떤 관계적 존재론을 제시한다. 행위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자연, 신체 그리고 물질성을 안다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이것들은 투명이나 불투명에 관한 광학에, 절대적 외재성이나 내면성의 기하학에, 그리고 순수 원인 또는 순수 결과의 이론화 중 하나로서의 인간에 의존하지 않고 그 생성의 충만함 안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앎과 됨의 착종된 실행들 안에서 행하는 역할을 단호하게 의무로 가질 수 있도록 한다.
고유한 속성들을 가진 개별적으로 유한한 실체들이라는 가정은 원자론적 형이상학의 증명서이다.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로부터 탄생했다.[16]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모든 사물들의 속성은 가장 작은 단위의 속성 – 원자(“잘려나가지 않는” 또는 “나눠질 수 없는”) - 으로부터 나온다. 자유주의 사회이론와 과학 이론들은 유사하게도 세계가 가분적으로 분배가능한 속성들로 개체들이 구성된다는 생각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 과학적, 사회적, 윤리적 그리고 정치적인 속성들 그리고 우리의 그것들에 대한 이해가 뒤얽힌 망은 이 가정의 상이한/다양한 예화들에 달려 있다. 많은 것들이 그 겉보기의 필연성과 경합하면서 미결의 상태에 놓여 있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그의 원자에 관한 양자 모델로 노벨상을 받았다. 이것은 양자이론 발전에 대한 그의 맹아적 기여에서 시작을 의미한다.[17] 보어의 철학-물리학(이 두 가지는 그에게 분리불가능하다) 뉴턴주의적 물리학 뿐 아니라, 데카르트적 인식론과 단어들, 아는 자, 그리고 사물/사태라는 재현주의적인 삼중구조에 대해서도 어떤 급진적인 도전을 드러낸다. 관건적으로 그의 지적인 스승의 도식에 관한 놀라운 역전에서, 보어는 존재론적으로 기초적인 실체들로서 ‘사물들’을 취하는 원자론적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보어에게 사물/사태는 고유하게 결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 보어는 주체와 객체, 그리고 앎과 알려지는 것 사이의 고유한 구분에 대한 데카르트적 믿음에 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보어가 발전시킨 인식론적 틀거리는 언어의 투철함과 측정의 투명함 둘 모두를 거부한다고 일컬어질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언어와 측정이 매개 기능을 수행한다는 가정을 거부한다. 언어는 사태의 상태들을 재현하지 않으며, 측정은 측정-의존적인 존재의 상태태를 재현하지 않는다. 보어는 허무주의의 비관성이나 상대주의의 끈질긴 그물에 걸리지 않고서 그의 인식론적 틀을 전개한다. 화려하고도 교묘하게, 보어는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견지하는 방법을 발견하는데, 그러는 동안 뉴턴주의 물리학과 재현주의의 거대한 구조들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뉴턴, 데카르트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와 보어의 단절은 “단순하고 나태한 철학적 반성”에 기반하지 않으며, 20세기 초의 기간 동안 빛을 비추게 되는 원자 물리학의 영역에서 새로운 경험적인 발견들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들에 관한 이론적 이해를 돕기 위한 보어의 분투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인식론적 틀거리가 요청되는 그의 급진적인 제안을 야기했다. 불행하게도 보어는 그의 성찰에서 중요한 존재론적 차원들을 탐색하지는 않았지만, 그 인식론적 내용들에 집중했다. 나는 그의 저작들에 숨겨진 존재론적 관점들을 파고들었고,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을 전개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러한 사항들을 연구했다. 이 장에서, 나는 보어의 사유의 중요한 측면에 대한 개괄을 제시하면서,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에 관한 설명으로 옮겨 간다. 이 관계적 존재론은 물질적 신체의 생산에 관한 나의 포스트-인간주의적인 수행적 사유를 위한 기초다. 이러한 사고는 ‘단어’와 ‘사물’ 그리고 이것들의 관계성의 문제에 관한 재현주의적 고정을 거부하며, 대신에 특유한 예외적 실천들 간의 인과 관계가 세계의 특유한 물질적 배치들(configurations)(즉 단어라기 보다 담론적 실천들/(함께)배치(con)figurations)과 특유한 물질적 현상(즉 ‘사물/사태’보다 관계들)으로 체현되는 것에 찬성한다. 이러한 신체적 생산의 장치들과 생산된 현상 간의 인과 관계는 ‘행위적 간-행’(agential intra-action) 중 하나다. 세부적인 것은 아래와 같다.
보어에 따르면, 이론적 개념들(예컨대 ‘위치’와 ‘운동량’)은 그 특성상 관념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특유한 물리적 배치들이다.[18] 예컨대 ‘위치’ 개념은 잘 정의된 추상개념으로 간주될 수 없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들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가정될 수도 없다. 그보다, ‘위치’는 고정된 부분들로 이루어진 어떤 견고한 장치가 사용될 때에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예컨대 자ruler는 실험실 안의 고정된 테이블에 박혀 있으면서, 어떤 특정 ‘위치’를 위한 고정된 참조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장치를 사용하는 ‘위치’의 어떤 측정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몇몇 추상적인 ‘객체’에 귀속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현상(phenomenon)의 속성으로서 ‘관찰된 대상’과 ‘관찰 행위의 주체’의 분리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운동량’도 가동적인(movable) 부분들을 포함하는 어떤 물리적 배치로서 의미를 가질 뿐이다. 따라서 ‘위치’와 ‘운동량’의 동시 측정 불가능성(통상적으로 하이젠베르그 불확정성 원리라고 지칭되는 바)은 ‘위치’와 ‘운동량’ 배치들(고정된 부분들을 요청하는 것과 가동적 부분들을 요청하는 보충적인 배치)의 물질적 [상호]배제라는 문제를 곧장 지칭하는 것이다.[19]
따라서 보어에 다르면 일차적인 인식론적 단위는 고유한 경계들과 속성들을 가진 독립적인 객체들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phenomena)이다.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탐구에 있어서, 현상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의 인식론적 불가분성을 단순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보다 현상은 존재론적으로 원초적인 관계들(primitive relations) – 선재하는 관계항이 없는 관계들 – 이다.[20] 간-행(상간-작용intra-action) 개념(이것은 일반적인 ‘상호작용’interaction과 대조된다. 상호작용은 선재하는 독립적 실체들/관계항들을 전제한다)은 어떤 근원적인 개념적 전환을 드러낸다. 현상에 속한 ‘구성요소들’의 경계들과 속성들이 규정되고 특정한 체현된 개념이 의미있어 지는 것은 특정한 행위적 간-행들을 통해서이다. 어떤 특정 간-행(‘관찰 장치’의 특수한 물질적 배치를 포함하여)이 행위적 절단(agential cut, 주체와 객체 간의 데카르트적 절단 - 생득적 구분 – 과는 대조적으로)을 활성화하는 것이고, 이때 그 결과로 ‘주체’와 ‘객체’ 간의 구별이 나타나는 것이다. 즉 행위적 절단은 본래적인 존재론적 불확정성이라는 현상 안에서 국지적 해결을 만들어낸다. 다른 말로 관계항은 관계에 선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상-내-관계항(relata-within-phenomena)이 특정 간-행을 통해 등장한다. 따라서 관건적으로, 간-행은 행위적 가분성(agential separability) - 현상-내-외재성(exteriority-within-phenomena)의 국지적 조건 - 을 가동하는 것이다. 행위적 가분성에 대한 사유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외재성이라는 고전적인 존재론적 조건의 부재 안에서, 그것은 객체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위적 절단은 ‘측정 대상’(‘원인’)에 따른 ‘측정 행위 주체’(‘결과’)의 구성에서 현상의 ‘구성요소들’ 중에 국지적인 인과적 구조를 가동한다. 따라서 간-행 개념은 전통적인 인과성 개념의 어떤 재가공을 구성하는 것이지요.[21]
나의 앞으로의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에 대한 연구에서, 나는 현상들이란 인간주체에 의해 가동되는 단순한 실험실 실행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또한 현상들을 생산하는 장치들은 관찰 도구들이나 단순한 실험 장치들로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록 공간적 제한들이 장치들의 본성에 관한 행위적 실재론의 이해에 어떤 면밀한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해도, 장치들이 어떤 관건적이고, 실재로 구성적인 역할을 현상의 생산에 있어서 하기 때문에, 나는 현상의 본성에 관한 질문으로 옮겨가기 전에, 장치들에 대한 행위적 실재론의 이론화의 개괄을 제시할 것이다. 이 제안된 설명은 과학적 실천들의 본성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그러한 특수성 너머에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의 함축에 관한 탐구를 할 수 있게 한다. 사실상 행위적 실재론은, ‘사회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 사이에 있는 것들을 포함하여, 상이한 구별들이 휘말려드는 그와 같은 실천들, 즉 물질-담론적 실천들의 본성에 관해 이해하게끔 해 준다.[22]
장치들은 행위들이 발생하기 전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과학적 도구들, 즉 고정장치들(inscription devices)이나 저항과 순응의 변증법을 매개하는 기계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연세계의 중립적인 탐색도구들도 아니고 몇몇 특정 결과를 결정적으로 부가하는 구조들도 아니다. 보어의 성찰에 관한 나의 더 진전된 연구에서, 장치들은 세계 안의 단순한 정적 배열들이 아니라, 오히려 장치들은 특수한 예외적인 경계들이 가동되는 역동적인 (재)배치, 특수한 행위적 실천들/간-행들/수행들이다. 장치들은 어떠한 고유한 ‘바깥’ 경계도 가지지 않는다. 이런 ‘바깥’ 경계의 불확정성은 닫힘의 불가능성, 즉 물체적 생산 장치의 반복적인 재배치(iterative reconfiguring) 과정에 있는 계속적인 간-행을 드러낸다. 장치들은 제한 없는 실행들이다.
중요하게도 장치들은 그 자체로 현상이다. 예컨대 과학자가 잘 감지하고 있을 때, 장치들은 특정한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 선반 위에 놓여 기다리는 교환가능한 객체들로 미리 형성되어 있지 않는다. 장치들은 항구적으로 재배열, 재절합 그리고 여타 재작업들에 열려 있는 특정 실천들을 통해 구성된다. 이것은 창조성의 일부이며 과학 하기(doing science), 즉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작업하려는 기구 사용의 어려움이기도 하다(이는 상이한 통찰들로서의 실험이 이루어지는 동안, 언제나 변화의 가능성에 열려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특정 장치는 언제나 여타 다른 장치들과 간-행의 과정에 있으며, 이어지는 특정 실천들의 반복들 속으로 국지적으로 안정화된 현상의 접힘(이것은 오로지 스스로를 상이하게 물질화하는 것으로 발견하기 위해서만 실험실들, 문화들 또는 지정학적 공간을 가로질러 교환될 수 있다)은 문제되는 특정 장치들 안에서, 따라서 새로운 현상 등등에 관한 생산을 초래하는 간-행의 본성 안에서 중요한 전환들을 구성한다. 경계들은 더 이상 고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지식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현상의 본성에 관한 질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현상은 물체적인 생산에 관한 다양한 장치들의 행위적 간-행들을 통해 생산된다. 행위적 간-행들은 특정한 인과적인 물질적 활동으로서 ‘인간들’을 포함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한다. 사실상, ‘인간’과 ‘비인간’, ‘문화’와 ‘자연’, ‘사회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 사이의 여러 상이한 경계들이 구성되는 것은 그와 같은 실천들을 통해서이다. 현상은 실재의 구성이다. 실재는 물-자체들 또는 현상-너머-사물을 구성하지 않지만, 현상-안-‘사물/사태’를 구성한다.[23] 세계는 그것의 상이한 물질되기(mattering) 안에서의 간-행이다. 존재의 여러 다른 의미는 지속하는 행위의 물결과 흐름 안에서 가동되는 바, 이는 특정한 간-행들을 통해서다. 다시 말해 현상이 물질이 되는 것은 – 단어의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 특정 간행들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세계는 규정적 경계들, 속성들, 의미화들 그리고 신체에 새겨진 흔적의 패턴들로 이루어진 국지적으로 제한적인 인과 구조들의 계속적인 재배치 안의 역동적인 간-행 과정이다. 세계의 ‘일부’가 스스로를 다른 세계의 ‘부분들’과 차이나게 인지되도록 만드는, 그리고 국지적인 인과 구조들, 경계들 그리고 속성들이 안정되고 탈안정되는 행위의 지속적인 흐름은 공간과 시간에 안에서 발생하지 않고, 시공간 자체의 구성 안에서 발생한다. 세계는 물질되기의 계속적인 열린 과정을 통해 ‘물질되기’ 자체가 상이한 행위적 가능성들의 실현 안에서 요청하는 의미와 형식이다. 시간성과 공간성은 이러한 과정적 역사성 안에서 창발한다. 외재성, 연결성 그리고 배제의 관계들은 재배치된다. 세계의 변화하는 위상학들은 동력학의 바로 그 본성의 어떤 지속하는 재구성작업을 이끌어 낸다.
요컨대 우주는 그 생성 안에서 행위적 간-행성이다. 우선적인 존재론적 단위들은 ‘사물/사태’가 아니라 현상이다. 여기서 현상은 역동적인 위상학적 재배치들/뒤얽힘들/관계성들/(재)절합들이다. 그리고 우선적인 의미론적 단위들은 ‘단어들’이 아니라 물질-담론적인 실천인 바, 그것을 통해 경계들이 구성된다. 이 역동론(dynamic, 활력)은 행위적(agency)이다. 행위(agency, 작인)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계속되는 세계의 재배치들이다. 이러한 수행적 형이상학에 기초하여, 다음 장에서 나는 물질성과 담론성 그리고 이것들 간 관계의 포스트휴먼적 재배치에 대해 논할 것이다.
물질-담론적 실천에 관한 포스트휴먼적 사고
담론적 실천은 종종 언어적 표현과 혼동되며, 의미화는 자주 단어들의 속성으로 간주되곤 한다. 따라서 담론적 실천들과 의미화는 특유한 인간적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상이한 구성이 야기되는 바, 경계형성적(boundary-making) 실천들에 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만약 구성의 개념이 순수하게 인식론적 사항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적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존재론적 질문들이 논의 대상이 딜 때, 그것은 전반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것이 된다. 만약 ‘인간’이 현상에 관련되고, 고유한 속성을 가진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상이한 생성 안에, 즉 인간임을 의미하는 것에서 특유한 물질적 변화를 따라 안정화하고 탈안정화하는 경계들과 속성들을 옮김으로써 세계의 특유한 (재)배치 안에 있는 존재라면, 담론성 개념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어떤 고유한 구별에 기초할 수 없다. 이 장에서 나는 담론적 실천들에 관한 어떤 포스트휴먼적 사유를 제안한다. 나는 또한 물질성 개념에 대한 어떤 조화로운 재규정을 개괄하면서 담론적 실천들과 물질적 현상 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행위적 실재론의 접근법을 보여줄 것이다.
의미화는 개별적인 단어들이나 단어들의 그룹들의 속성이 아니다. 의미화는 언어내적으로만 참조되지도 않으며, 언어외적으로 참조되는 것도 아니다. 의미론적 충족성(contentfulness)은 개별적 행위주체들의 사유나 수행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특유한 담론적 실천들을 통해 획득된다. 보어의 성찰에 있는 영감을 따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행위적 실재론의 요점들 또한 부가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의미화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의 특정한 물질적 (재)배치들이며 존재론적 불확정성과 마찬가지로 의미론적 불확정성은 특유한 간-행들을 통해 국제적으로만 해결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기 전에, 담론적 실천들의 본성에 대한 몇몇 오해들을 일소하기 위해 잠깐이나마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아마도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담론은 언어와 동의어가 아니다.[24] 담론은 언어적인 또는 기의화하는 체계들, 문법, 화행 또는 대화를 지칭하지 않는다. 담론을 기술적 진술들을 형성하는 단순한 구어적이거나 문어적인 단어들로 생각하는 것은 재현주의적 사고의 오류를 가동하는 것이다. 담론은 말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해진 것을 제한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담론적 실천은 의미있는 진술들로 간주되는 것을 정의한다. 진술들은 통일된 주체의 기원으로부터 나오는 의식성의 단순한 발화들이 아니다. 그보다 진술과 주체는 가능성의 영역으로부터 출현한다. 이 가능성의 영역은 정적이거나 단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역동적이고 우발적인 다양성(multiplicity)이다.
푸코에 따르면, 담론적 실천들은 말하기, 쓰기, 사고하기, 계산하기, 측정하기, 걸러내기와 집중하기와 같은 규율적 지식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고 제한하는 국지적인 사회역사적인 물질적 조건들이다. 담론적 실천은 단순히 기술하기보다, 지식 실천의 ‘주체’와 ‘객체’를 생산한다. 푸코의 생각에 의하면, 이러한 ‘조건들’은 초월적이거나 현상학적이기보다 내재적이고 역사적이다. 즉 그것들은 경험의 가능성을 정의하는 초월적, 비역사적, 비교문화적, 추상적 법칙(칸트)이라는 의미에서 조건들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설정된 실재적인 사회적 조건들이다.
담론적 실천에 관한 푸코의 사유는 신체들[bodies, 물체들]과 의미화의 물질적 생산에서 이루어지는 보어의 장치들 및 그것의 역할과 몇 가지 도발적인 공명(그리고 얼마간의 풍성한 반향)을 가진다. 보어에게 장치는 다른 장치들을 배제하는 어떤 개념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유한 물리적 배치들이다. 그것들은 개념화와 측정하기와 같은 지식 실천을 가능하게 하고 제한하는 국지적인 물리적 조건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생산된 현상(의 일부)에 속한 생산적인 것이다. ‘개념들’(실재적인 물리적 배치들)과 ‘사물/사태’는 규정적 경계들, 속성들 또는 그 상호적 간-행들과 동떨어진 의미들을 가지지 않는다는 그의 근본적인 통찰에 기초하여, 보어는 새로운 인식론적 틀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객체/주체, 인식하는 자/인식되는 것, 자연/문화 그리고 단어/세계라는 이원론을 의문에 부치는 것이다.
개념들이 관념적이지 않고 실재적인 물리적 배열이라는 보어의 통찰은 확실히 통상적으로 일컬어지던 것 너머로 의미의 물질성 형성을 밀어붙인다. 이것은 쓰기와 말하기가 물질적 실천이라는 현대적인 규정에서 빈번하게 알려진다. 보어는 푸코가 주장했던 것처럼 물질적 실천이라는 말로써, 단순하게 담론이 ‘뒷받침된다’거나 ‘존속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마치 몇몇 실존론적-실증적 철학이 목표로 하는 것처럼 비담론적 (배경지식) 실천들이 담론적 실천들을 규정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25] 그보다 보어의 주장은 개념들과 물질성 간의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도출한다. 이러한 관계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언어학적 개념들로부터 담론적 실천으로 초점을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보어의 이론적 틀과 관련해서 행위적 실재론의 기여에 따르면, 장치들은 다른 타자들[장치들]을 배제하는 특정한 개념들을 체현하는 세계 안의 고정적 배열들이 아니라, 특정한 물질적 실천을 통해 의미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결정성이 간-행적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즉 장치들은 물질되기의 배타적 실천들을 통해 지성과 물질성이 구성되는 바 그것이다. 장치들은 물질적인 (재)배치/담론적 실천이며, 물질적 현상들을 그것의 담론적으로 미분화된(differentiated) 되기 안에서 생산한다. 현상은 역동적인 관계성으로서, 상호적으로 결정되는 그것의 물질과 의미화 안에서(어떤 특정 현상 안에서) 특수한 인과적 간-행들을 통해 국지적으로 확정된다. 특유한 행위적 간-행의 바깥에서 ‘단어들’과 ‘사물/사태들’은 불확정적이다. 그러므로 물질성과 담론성에 관한 생각들은 그 상호적인 함축을 깨닫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특히 행위적 실재론의 사고에 있어서, 물질성과 담론적 실천들 둘 모두는 간-행과 관련하여 재사유된다.
행위적 실재론과 관련해서, 담론적 실천은 세계의 특수한 물질적 (재)배치로서, 이를 통해 경계들, 속성들 그리고 의미되기의 국지적 규정들이 다양하게 작동된다. 즉 담론적 실천들은 세계에 관한 계속되는 행위적 간-행들이며, 이를 통해 국지적 결정이 생산된 현상 안에서 가동되는 것이다. 담론적 실천들은 인과적 간-행들이다. 이것들은 국지적인 인과적 구조이며, 이로써 그 차이나는 절합에 속한 하나의 ‘구성요소’(‘효과’)가 된다. 의미화는 개별적 단어들 또는 단어 그룹의 속성이 아니며, 그 차이나는 지성 안에서 세계의 지속적인 수행이다. 담론적 실천은 행위적 간-행의 계속적인 동력학 안에 어떠한 궁극적 목표도 가지지 않는 경계-형성적 실천이다.
담론적 실천은 화행, 언어적 재현들 또는 심지어 언어적 수행이 아니라, 물질적 실천과의 어떤 특정되지 않는 관계를 품고 있는 것이다. 담론적 실천은 개별적인 주체들, 문화 또는 언어의 투사된 행위주체를 위한 의인화된 대체 기호(place-holder)가 아니다. 사실상 이것은 인간기반적인 실천들이 아니다. 반대로 담론적 실천들에 관한 행위적 실재론의 포스트휴먼적 사유는 분석이 진행되기 이전에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확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담론적 창발에 관한 계보학적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사실상 요청한다). ‘인간 신체들’과 ‘인간 주체들’은 그 자체로 선재하지 않으며, 또한 단순한 마지막의 생산물도 아니다. ‘인간’은 순수 원인도, 순수 결과도 아니며 그 개방적 되기 안에 있는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의미화와 마찬가지로 물질은 개별적으로 표명되거나 정적인 실체가 아니다. 물질은 자연의 작은 부분도 아니고, 빈 서판, 표면 또는 수동적으로 의미화를 기다리는 터가 아니다. 또한 물질은 과학, 페미니즘 또는 맑스주의 이론들을 위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어떤 토대가 아니다. 물질은 지지대, 위치, 참조물 또는 담론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아니다. 물질은 부동의 것도, 수동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문화나 역사와 같이 그것을 완결하는 외적 힘의 표식을 요청하지도 않는다. 물질은 언제나 이미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역사성이다.[26]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서, 물질은 어떤 고정된 실체를 지칭하지 않는다. 그보다 물질은 그 간-행적 생성 안에 있는 실체다. 그것은 어떤 사물/사태가 아니며, 하나의 함(doing)이며, 행위작용의 응결이다. 물질은 반복적 간-행(iterative intra-activity)의 안정화하고 탈안정화하는 과정이다. 현상들 – 가장 작은 물질 단위들(관계적 ‘원자들’) - 은 그 계속적인 간-행의 과정을 통해 물질이 된다. 다시 말해, 물질은 현상들의 물질성/물질화를 드러내는 것이지, 뉴턴 물리학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객체의 고유한 고정된 속성(원자들과 허공에 관한 데모크리토스 꿈의 근대적 실현)을 지칭하지 않는다.
물질은 단순하게 “일종의 인용성(citationality, Butler 1993, 15)”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 신체의 표면 효과나 언어적인 또는 담론적인 행동들의 최종 생산물도 아니다. 물질적 제한들과 배제 그리고 규제적 실천의 물질적 차원은 물질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들이다. 간-행의 활력은 그 계속되는 물질화에서 능동적 ‘행위작용’으로서의 물질을 수반한다.
경계-형성적 실천, 다시 말해 담론적 실천들은 간-행의 활력 안에 완연하게 기입되며, 그것을 통해 현상들은 물질이 된다. 달리 말해, 물질성은 담론적이다(즉 물질적 현상들은 신체적인 생산의 장치들로부터 분리불가능하다. 즉 물질은 그것의 계속되는 경계 배치과정의 일부로부터 창발하고 그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마치 담론적 실천이 언제나 이미 물질인 것과 같다(즉 그것들은 계속되는 세계의 물질적 (재)배치이다). 담론적 실천과 물질적 현상들은 서로간에 외재성의 관계로 정립되지 않는다. 그보다 물질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은 간-행의 역동성 안에 상호적으로 착근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서로에게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물질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은 상호함축 관계의 한 항들이다. 이들은 다른 것의 부재 안에 표명되고/표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물질과 의미화는 상호적으로 표명된다. 담론적 실천들이든 물질적 현상들이든 존재론적으로 또는 인식론적으로 선행하지 않는다. 둘 중 어느 쪽도 다른 것과 관련하여 설명될 수 없다. 둘은 어느 것도 다른 것을 규정하는 특권적 지위를 누리지 않는다.
신체적 생산의 장치들과 그것들이 생산하는 현상들은 본성적으로 물질-담론적이다. 물질-담론적 실천들은 특수한 반복적 상연(enactments) - 행위적 간-행 – 이며, 이를 통해 물질은 (경계들과 의미화들의 출현 안에서) 차이나게 연루되고 절합된다. 이때 이 실천들은 행위주체적인 간-행의 반복적 역학 안에서 가능성의 물질-담론적 장을 재배치한다. 간-행은 인과적으로 불확정적인 상연들을 제한하고, 이로써 생성-과정-중-물질은 앞으로 더 물질화되는 것 안에 침전되고 접혀들어 간다.[27]
물질적 조건들은 중요한데(matter), 그것들이 신체들의 구성 안에 실재적인 생성적 요인들인 특유한 담론들을 ‘뒺받침’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성 안에서 세계의 반복적 간-행을 통해 물질이 물질이 되기[중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핵심은 단순하게 담론적인 것들에 부가하여 중요한 물질적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되는 것이 제한들, 조건들 그리고 실천들의 결합된 물질-담론적 본성이라는 점이다. 물질적이고 담론적인 제한들과 배제들은 물질적 또는 담론적 요인들의 개별적 효과들을 결정하려고 시도하는 분석의 제한된 타당성에 있어서 서로 뒤얽힌 지점들이다.[28] 더 나아가 행위적 실재론에 의해 제공된 물질성의 개념화는, 다시 한 번 세계의 투명한 또는 즉각적 소-여(give-ness)와 관련된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가정을 재기입함이 없이, 그리고 단순히 세계에 대한 매개된 접근에 관한 어떤 인지작용을 요청하는 분석적 교착상태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서, 즉 그것 그대로 물질적 제한들과 조건들을 고려할 가능성을 만든다. 도처에 존재하는 선언들, 즉 경험이나 물질적 세계가 ‘매개되어’ 있다는 주장은 어떻게 일을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가치 있는 도움도 주지 못했다. 매개에 대한 생각은 너무 오랫동안 경험세계에 대해 보다 총체적 사고하는 방식 안에 서 있었다. 물질성의 재개념화는 여기서 경험세계를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사고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번에 그것은 객체적 지칭물이 현상이며, 세계의 ‘즉각적으로 주어-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
모든 신체는 단순히 ‘인간’ 신체만이 아니라, 세계의 반복적 간-행, 즉 그것의 수행성을 통해 물질이 된다. 이것은 신체의 표면이나 윤곽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그 ‘원자들’도 포함하여, 물질성의 충만함 안에서의 신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신체는 고유한 경계들과 속성들을 가진 객체가 아니다. 신체들은 물질-담론적 현상이다. ‘인간’ 신체들은 본래적으로 ‘비인간’적 신체들과 다르지는 않다. ‘인간’(그리고 ‘비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어떤 고정되거나 먼저 주어진 관념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유롭게 부유하는 이념성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몇몇 잘못 정의된 과정에 의해 인간적 기초를 가진 언어적 실천(물질적으로 이런저런 불특정한 방식으로 뒷받침되는)이 실체적인 신체들/신체적 실체들을 생산해 낸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행의 물질적 역동론이다. 물질적 장치들은 물질적 현상들을 특정한 인과적 상호작용을 통해 생산해 낸다. 여기서 ‘물질’은 언제나 이미 물질-담론적, 즉 물질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what it means to matter) 그것이다. ‘인간’ 신체들의 물질화에만 예외적으로 집중하는 이론들은, 바로 그러한 실천에 의해 ‘인간’과 ‘비인간’의 미분적 경계들이 그려진다는 것과, 그것이 언제나 이미 특정 물질화 과정 안에 기입되어 있다는 중요한 점을 놓친다. ‘인간’(‘비인간’)의 미분적 구성은 언제나 특유한 예외들을 동반하고 언제나 경합(contestation)에 열려 있다. 이것은 행위적 간-행들, 즉 내가 다음 장에서 채택할 중요한 지점에서의 불확정적 인과성의 결과이다.
생산의 본성/자연과 본성/자연의 생산: 행위작용과 인과성
이런 사유로 인한 인과성의 본성은 무엇인가? 행위작용(agency)을 위해, 즉 세계의 생성에 개입하기 위해 무슨 가능성들이 존재하는가? 책임성(responsibility, 응답가능성)과 의무성(accountability, 사유가능성)이 진입할 여지들은 어디에 있는가?
행위적 간-행은 인과적 실행이다. 행위적 절단이 현상의 여러 ‘구성 부분들’의 국지적 분할가능성을 초래한다는 것을 상기하라. 이것은 (인과성이) 결과하기와 타자성(결과성)에 흔적을 남기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과학적 맥락에서, 이러한 과정은 ‘측정’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측정’이라는 생각은 하나의 인과적 간-행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29] 그것이 ‘측정’으로서의 사유든지, 또는 우주의 일부로서 그것의 계속적인 미분화하는 인식가능성과 물질화 안에 있는 다른 부분을 알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다.[30] 다른 한편으로 인과적 간-행에 대해 중요한 것은 흔적들이 신체들 위에 남는다는 사실이다. 객체성이란 신체 위에 남은 흔적들에 대한 의무성(사유가능성)을 뜻한다.
이 인과적 구조는 중요한 점에서 절대적 외재성과 절대적 외재성 간의, 그리고 결정론과 자유의지 간의 일반적인 선택과는 다르다. 절대적 외재성의 기하학의 경우, 문화적 실천들이 물질적 신체들을 생산한다는 주장은 전자와 후자의 존재론적인 구별이라는 형이상학적 전제에서 시작한다. 구성주의의 기입 모델(inscription model)이 이런 종류의 것이다. 문화는 수동적 자연에 작용하는 어떤 외적 힘으로 형상화된다. 이 모델에는 자연이, 문화에 의한 그것의 흔적남기기에 앞서는 어떤 선담론적인 형식 안에 실존하는지에 관한 모호함이 있다. 만약 어떤 선행하는 실체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때 그것의 실존 자체가 구성주의의 고유한 한계를 표시할 것이다. 이런 경우 수사적인 것(the rhetoric)은 문화의 힘이 자연(본성)을 ‘형성하는’ 또는 ‘기입하는’ 것이지만, 물질적으로 그것을 생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정확하게 반성하기 위해 누그러뜨려져야 한다. 한편으로 만약 어떤 선재하는 자연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 문화가 물질적으로, 단적인 방식으로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 그것, 즉 자연을 생산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다. 이 생산의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또 다른 통상적인 대안도 마찬가지로 옹호될 만하지는 않다. 그것은 절대적 내재성의 기하학으로서, 이것은 그 원인으로 결과를 환원하는 것인 바, 이런 경우 자연을 문화로, 또는 물질을 언어로 환원한다. 이는 하나의 형식 또는 관념론적인 다른 하나에 상당한다.
행위적 분할가능성은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선택지들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드러낸다.[31] 그것은 ‘외부성 내부’(exteriority within)에 관한 감각을 가정하는데, 이는 이전의 기하학들을 거부하고 어떤 변화하는 위상학으로 보다 합당하게 사고되는 보다 더 확장된 공간을 개방한다.[32] 더 특수하게는, 행위적 분할가능성(agential separability)은 외재성 내부(물질-담론적) 현상들의 문제/물질이다. 그러므로 물질성이나 담론성 둘 중 하나에 선행성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33] ‘인과적 장치들’과 ‘감응된 신체’(body effected) 사이에 절대적 외재성의 기하학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둘의 관념적인 충돌도 없다. 오히려 여기에는 그 자체 위에서의 시공간적 다양체[겹주름,manifold]을 접는 계속적인 위상학적 역동성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신체적인 생산의 장치들이 (또한) 그것들이 생산하는 현상의 일부라는 사실의 결과이다. ㅁ물질은 그 반복적 물질화 안에서 능동적인, 다시 말해 사실상 행위적인 역할을 맡지만, 이것은 단지 행위작용의 공간이 다른 많은 비판사회 이론 안에서 제기되는 바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는 이유만은 아니다.[34] 간-행들은 언제나 특유한 예외들을 생산하고, 예외들은 결정론의 가능성을 제외시키면서, 열린 미래라는 조건을 제공한다.[35] 그러므로 간-행은 제한하는 역할을 하지만, 결정하지는 않는다. 즉, 간-행은 엄격한 결정론의 문제/물질도 아니고 무제한적인 자유의 그것도 아니다. 미래는 근원적으로 모든 계기마다 열려 있다. 미래적인 것(futurity)에 관한 이 열린 감각은 문화적 요청들의 충돌이나 격돌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보다 이것은 간-행의 본성 안에 고유한 것이다. 장치들이 우선적으로 강조될 때조차, 행위작용은 배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간-행 개념은 전통적인 인과성 개념을 재공식화하며, 어떤 공간, 즉 사실상 어떤 상대적으로 큰 공간을 행위작용의 물질-담론적 형식들을 위해 열어 놓는다.
수행성의 포스트휴먼적 공식화는 ‘인간’, ‘비인간’ 그리고 행위작용의 ‘사이보그’적인 형식(사실상 그와 같은 모든 물질-담론적 형식들)에 관한 사유의 중요성을 확증한다. 이것은 가능하기도 하고 필연적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행위작용은 신체적 생산의 장치들 안에서 변화들의 물질/문제이기 때문이며, 그와 같은 변화들은 다양한 간-행들을 통해 발생한다. 그것들 중 몇몇은 ‘인간’의 상이한 구성을 윤곽짓는 경계들을 표시한다. ‘인간’을 고정된 범주로 간주하는 것은 전진적으로 가능성들의 전체 영역을 배제한다. 이때 권력의 작동이라는 중요한 차원들이 삭제되는 것이다.
행위적 실재론의 사고에 있어서, 행위작용은 그 전통적인 인간주의적 궤도로부터 풀려 달아난다. 행위작용은 인간적 지향성이나 주체성을 따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단순히 어떤 반휴머니즘의 사회 기하학 안에서의 재의미화나 다른 특수한 종류의 운동들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행위작용은 간-행의 문제/물질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행위수행성(enactment)이지,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소유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행위작용은 ‘주체’들 또는 ‘객체들’의 속성으로 간주될 수 없다(그것들이 그 자체로 선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작용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즉 그 ‘간-행’ 안에서 ‘함’(doing)이든 ‘있음’(being)이든 간에 어떤 속성이 아니다. 행위작용은 간-행의 활력을 통과하는 특정한 실천들에 대한 반복적 변화들의 행위수행성이다. 행위작용은 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들을 재배치하게 하는 의무성(사려가능성accountability)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는 인과 구조의 행위수행성 안의 그러한 실천들에 의해 드러난 경계 표명과 배제가 포함된다. 행위를 위한 특정한 가능성들은 모든 순간에 존재하며, 이러한 변화하는 가능성들은, 물질/문제인 것과 물질되기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경합시키면서 재작동시키기 위해, 세계의 생성에 개입할 책임성을 이끌어 낸다.
결론
페미니즘 연구, 퀴어 연구, 과학 연구, 문화 연구 그리고 비판사회이론의 학문작업들은 세계의 무게감과 부합하는 난점과 분투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한편으로 거기에는 물질을 인지하고 표명하기 위해 어떤 표현된 욕망이 있으며, 문화, 정신 그리고 역사의 친근하고 편안한 영역들로부터 탈출한 그 동종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는 타자들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서발턴(subaltern)을 대신하여 이타주의적인 찬성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고려할 방식을 발견할 것이라는 희망이다. 만약 토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계들과 제한들을 그것의 생산성 안에서 담론-지식[인식]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 하지만 그 본질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무한한 가능성들의 횡행 안에서 풀려 나오는 것이 물질/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물질/문제로 정의되는 것은 바로 그 유한성의 실존이다. 거울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는데 사로잡히면, 그것은 초월의 얼굴 또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물질을 개념화하는 어떠한 대안적 방법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유일한 선택지는 경험론의 소박성이거나 오래된 자기애적인 자장가 이야기들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물질성을 어떤 주어진 것 또는 인간 행위작용의 단순한 효과 중 하나로 위치짓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수행성을 고려하는 포스트휴먼적인 유물론을 제안했다.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 있어서, 물질성은 물질화의 과정 안에서 어떤 적극적 요인이다. 자연은 문화의 기입을 기다리는 수동적 표면도 아니고, 문화적 수행의 마지막 생산물도 아니다. 자연이 침묵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믿음, 그리고 문화안에 의미와 변화를 위한 모든 전망들이 남겨져 있다는 믿음은 페미니스트들이 실재적으로 맞서고 있었던 자연/문화 이원론의 재기입이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그 충만한 역사성 안에서 물질을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이론에 새겨 넣어진 인간/비인간 구분도 그러하다. 특히 페미니즘 과학연구자들은 자연/문화 이원론의 각인이 어떤 식으로 ‘자연’과 ‘문화’가 형성되는지에 대한 이해, 즉 페미니즘과 과학적 분석에 중차대한 어떤 이해를 폐색시킨다고 강조해 왔다. 그들은 결코 ‘구성’의 이념이 ‘자연’ 또는 ‘문화’ 중 하나의 물질적 실재성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해 오기도 했다. 그러므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 수행적 사고는 그 기초에 있어서 인간중심적 가치들과 같은 것을 끌어오는데 있어서는 불편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제안하는 수행적 사고의 중차대한 부분은 담론적 실천들과 물질적 현상,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성의 관념에 대한 재사유다.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서, 담론적 실천들은 인간-기반 행위들이 아니라, 경계들, 속성들 그리고 의미들의 국지적 결정들이 미분적으로 가동되는 특수한 물질적 (재)형상화들이다. 그리고 물질은 어떤 고정된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물질은 그 간-행적 되기 안에서 실체이며, 사물이 아니라 운동이며, 행위작용의 엉김(congealing)이다. 그리고 수행성은 반복적 인용성(iterative citationality, 버틀러)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오히려 반복적 간-행으로 이해된다.
기술과학적 실천들에 관한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 있어서, ‘아는자’(knower)는 탐구되어지는 자연 세계에 절대적 외부성의 관계 안에 서 있지 않는다. 거기에는 그 어떤 외부적 관찰자 시점도 존재하지 않는다.[36] 따라서 그것은 객체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인 바 절대적 외부성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적 가분성(separability), 즉 현상 내부에서의 외부성이 있을 뿐이다.[37] ‘우리’는 세계 바깥의 관찰자가 아니다. 또한 우리는 단순히 세계 안의 특정 장소들에 붙박혀 있지도 않다. 이것이 닐스 보어(Niels Bohr)가 우리의 인식론은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그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에 도달하려고 했던 바로 그 지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우리’에 관한 궁극적인 인간주의적 이해로 인해, 이러한 전망의 중요한 포스트휴먼적 함축을 결여하고 있다. 비키 커비는 이 중요한 포스트휴먼적 핵심을 다음과 같이 아주 열정적으로 표현한다. “나는 어떤 지금-여기로서의 인간 정체성, 즉 폐쇄되고 끝나버린 생산물, 자연에 인과적 위력을 가하는 그것의 위치성(locatability)을 복잡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또는 [...] 자연 내부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그렇게 한다. 나는, 마치 자연이 어떤 저장고인 것인양, 자연 안에 존재하는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정체성은 고유하게 불안정하며, 미분화되어 있고(differentiated), 분산되어 있으며, 정말 기이하게도 일관적이다. 만약 내가 ‘이것은 자연 그 자체다’라고 말한다면, 즉 이것이 하나의 표현으로서 관점적인 본질주의를 통상적으로 함축하고, 이 본질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회피의 이유라 한다면, 나는 실재로 이러한 ‘그 자체’를 작동시켜 왔고, 또한 심지어 ‘사유하기’가 자연의 타자가 아니라는 점을 제안했던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 차이나게 수행한다.”[38]
어떤 장치가 취하는 특정 배치는 ‘우리’ 선택행위의 부수적인 구성물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인과적으로 결정적인 권력 구조의 결과도 아니다. ‘인간’은 단순히 특유한 지식 기획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상이한 장치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자체가 세계의 지속적인 재배치과정의 특수한 국지적 부분들인 것이다. 실험실 조작, 관찰자 개입, 개념들 또는 다른 인간적 실천들이 활동하기 위한 역할이라는 수준에서, 그것은 그 간-행적 생성 안에서 세계의 물질적 재배치의 부분으로서 있게 된다. ‘인간’은 그 역동적 구조화(structuration) 안에서 세계-신체 공간의 부분이다.
앎의 실천이 인간적 실천들로서 충분히 주창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존재하는 바,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우리의 실천들에서 비인간적 요소들을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앎이 다른 부분에 대해 인식 가능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세계의 부분의 한 물질/문제이기 때문이다. 앎과 존재의 실천들은 고립될 만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들은 상호적으로 함축된다. 우리는 세계의 바깥에 섬으로써 지식을 획득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안다. 우리는 그 미분적 생성 안에서 세계의 일부이다. 인식론과 존재론을 나누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 정신과 신체, 물질과 담론 사이에 어떤 고유한 차이를 가정하는 형이상학의 반향이다. 존재-인식-론(Onto-epistem-ology) - 존재 안에서 앎의 실천에 대한 연구 – 은 아마도 특유한 간-행이 물질화되는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요구되는 일련의 이해들에 대해 사유하는 더 좋은 방법이다.
Women’s Studies Program, Philosophy Department, and Program in
Critical Social Thought
Mount Holyoke Col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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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논문을 끈질기게 요청해 준 산드라 하딩(Sandra Harding)과 케이트 노르베르그(Kate Norberg)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또한 유익한 조언과 계속적인 지원, 격려로 유익한 조언을 주고 그의 연구작업의 영감으로 도움을 준 조 루즈(Joe Rouse)에게도 감사드린다.
1) 이러한 불만은 1980년대의 저술들에서 표면화된다. Donna Haraway’s “Gender for a Marxist Dictionary: The Sexual Politics of a Word” (originally published 1987)와 “Situated Knowledges: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and the Privilege of Partial Perspective” (originally published 1988)을 보라. 이 둘은 모두 Haraway 1991에 재수록되었다. 또한 Butler 1989도 참조.
2) 이것은 어떤 특정한 수행적 고려들이 언어에 과도한 권력을 부여한다는 타당한 관점을 해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핵심은 이것이 수행성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어떤 역설적인 난문(難問)이라는 것이다.
3) 해러웨이는 회절 개념을 기하학과 관계성의 광학을 재사유하기 위한 은유로 제안한다. “페미니즘 이론가 트린 민-하(Trinh Minh-ha)는 [...] ‘차이’를 어떤 ‘내부의 관건적 차이’(critical difference within)로 형상화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지, 아파르트헤이트처럼 차이를 기초짓는 특별한 분류학적 흔적으로 차이를 형상화하지는 않았다. [...] 회절은 반영(reflection)이나 반영이 그러는 것처럼, 위치가 바뀐 ‘동일한 것’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회절은 간섭의 사상(寫像, mapping)이지, 복제(replication),반영 또는 재생산의 사상(寫像)이 아니다. 회절 패턴은 차이가 드러나는 곳에서 지도를 그리지 않으며, 차이들의 효과들이 나타나는 곳에서 지도 그리기를 한다”(1992, 300). 해러웨이(Haraway 1997)는 회절에 대한 생각을 네 번째 기호론의 범주로 승격시킨다. 물질화하는 차이들에 대해 생각하기 위한 이 풍부하고 매혹적인 물리 현상을 유용하게 도입하자는 그녀의 제안에 촉발되어, 나는 회절이라는 개념을 나의 곧 출간될 책에서 (비록 네 번째 기호론 범주는 아니라 해도) 분석의 변형된 비판 도구로 더 심도 깊게 다룰 것이다.
4) 자연주의의 재사유에 대해서는 Rouse 2002를 보라. 신조어 간-행(intra-activity)은 아래에 정의되어 있다.
5) 루즈는 Knowledge and Power(1987)에서 재현주의에 대해 캐묻기 시작한다. 그는 권력과 지식 간의 관계의 본성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어떻게 지식의 재현주의적 이해가 획득되는지 탐구한다. 그는 Engaging Science(1996)에서 재현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과 과학적 실천들의 본성에 대한 대안적 이해의 전개를 이어간다. 루즈는 우리가 과학적 실천을 상황적 행위의 계속적인 패턴으로 이해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How Scientific Practices Matter (2002)에서 더욱 연구를 심화시킨다.
6) 재현주의의 유혹은 그 대안들을 상상하기 힘들게 만든다. 나는 아래에서 수행적 대안들을 논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하나만이 아니다. 구체적인 역사적 예는 이러한 시점에서 도움을 줄 것이다. 푸코는 16세기의 유럽에서 언어가 어떤 소통도구로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보다 그것은 단순히 “세계의 형상들 중 하나”였다. 즉 그것은 내가 제안하는 포스트휴먼의 수행적 사유에서 어떤 돌연변이 형태와 공명하는 생각이다.
7)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 1995)은 수행적 양식을 위해 재현주의적 양식을 명쾌하게 회피한다. 하지만 피커링의 수행성 개념은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공히 재현주의의 치료제로서 수행성을 포용한다해도, 그리고 인간주의에 대한 거부를 공유한다 해도 말이다. 그 개념에 대한 피커링의 접근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어떤 인식 – 논쟁적으로 고유하게는 퀴어적인 - 도 포함하지 않는다(Sedgwick 1993 참조). 또는 그것이 현대 비판 이론들, 특히 페미니즘과 퀴어 연구 학자들/활동가들에게 지속적으로 중요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그는 다양한 결정적인 성찰들에 따라 다니는 중요한 정치적 역사성을 회피한다. 특히 피커링은, 의미, 인식가능성, 중요성, 정체성 구성과 권력에 관한 질문들을 포함하여, 중요한 담론적 차원들을 무시한다. 이러한 차원들은 ‘수행성’의 후기구조주의적 정당화에 핵심적이다. 그리고 그는 개별적 실체들(인간들은 물론이고 기후체계, 가리비조개 그리고 입체음향장치와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의 속성으로 행위성이라는 인간주의적 개념을 기꺼이 수용한다. 이런 것은 모두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문제시하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후기구조주의적 접근은 ‘비인간 행위자’를 고려하는데 실패하는 데, 이는 피커링 관점의 핵심에 있는 것이다. 보다 상세한 논의는 (곧 출간할) 책을 참고.
8) 수행성 개념은 철학에서 어떤 구별되는 이력을 가지는데, 대개의 다종다양한 교전들이 철학에서는 허용된다. 수행성의 계보는 일반적으로 영국 철학자인 J.L. 오스틴의 화행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특히 그는 말함과 행함 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자크 데리다는 이를 자주 가져와 쓰면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후기구조주의적 변형을 이 개념에 가했다. 버틀러는 정체성 개념을 수행적으로 이론화하면서 규율 권력의 생산적 효과를 이해한 푸코를 통해 데리다의 수행성 개념을 탐구한다. 버틀러는 그녀의 젠더 수행성 개념을 『젠더트러블』에 도입하면서, 우리가 젠더를 하나의 사물/사태나 일련의 부유하는 속성ㄷ르로 이해한다고 문제제기한다. 젠더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의 ‘행함’(doing)이다. 즉 “젠더는 그 자체 일종의 생성이나 행위성이라는 것이다. [...] 젠더는 어떤 명사나 실체적 사물/사태 또는 정적인 문화적 기입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고 반복적인 몇몇 행위이다”(1990, 112). Bodies That Matter(1993)에서 버틀러는 젠더와 수행성 그리고 성화된 신체들의 물질화 사이의 연결을 논증한다.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Eve Kosofsky Sedgwick, 1993)은 수행성의 계보가 고유하게 퀴어적임을 논증한다.
9)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이러한 개념은 다음과 같은 피커링의 특이한 규정과는 다르다. “포스트휴먼적 공간은 인간 행위자들이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는 곳이지만, 이제 비인간과 불가분하게 뒤얽히면서, 더 이상 행위의 중심에서 그것을 지배하지 않는다”(26). 하지만 인간의 탈중심화는 포스트휴머니즘의 한 요소일 뿐이다(피커링의 ‘뒤얽힘’ 개념이 뚜렷하게 인식론적이며, 존재론적이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라. 그가 ‘포스트휴머니스트’에 관해 재우쳐 말할 때 중요한 점은, 그것이 인간과 비인간 행위주체들의 상호적 적응 또는 반응성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10) ‘물질화된 재배치’(materialized refiguration)는 ‘물질화’(materialization)의 전격적인(enterprised up, 해러웨이의 어휘) 판본이다. ‘물질화’ 개념은 전자의 보다 풍부한 사유를 암시한다. 사실상 버틀러와 해러웨이의 중대한 성찰들의 회절적 탐색에서처럼, 이러한 노선을 따라 나의 포스트휴먼적 수행성의 사유를 읽는 것이 가능하다.
11) Butler 1989를 보라.
12) 결합 개념인 물질-담론적(material-discursive)과 간-행과 같은 다른 행위적 실재론의 개념들은 아래에 정의된다.
13) 이 에세이는 내가 ‘Barad 1996, 1998a, 1998b, 2001b’을 포함하는 초기 저작들과 출간 예정인 책에서 발전시킨 주제들의 개괄이다.
14) 형이상학이 20세기 내내 불명예를 뒤집어쓴 용어라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이 실증주의적 유산은 심지어 그것을 비난해 마지 않는 사람들의 중심에서도 살아 있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이 사형집행장에 단순히 가장 최근에 서명한 자들일 뿐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에 대한 우리의 강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사형선고에 따른 의무는 여전히 이행되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형이상학은 우리의 위기의식에도 불구하고 감행될 것이다. 사실상, 새로운 ‘실험적 형이상학’ 연구는, 통상적인 믿음, 즉 ‘물리적이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사이의 고유한 경계가 존재한다는 그 믿음을 의문에 붙이면서, 미국과 해외의 물리학 실험실들에서 실행되는 중이다(‘Barad forthcoming’[근간서]을 보라). 이러한 사실은 형이상학이 철학사에서 어떤 특별한 기원을 가지지 않으며, 오히려 본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관한 저술들 뒤에 온 글들을 지칭할 뿐이라는 것,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뒤 3세기 후,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Andronicus of Rhodes)에 의해 배열된 저술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15) ‘관계항’은 관계들의 선행 요소라고 지목되는 어떤 것이다. 형이상학적 원자론에 따르면, 개별적 관계항은 언제나 그것들 사이를 묶어 줄 어떤 관계들에 앞서 존재한다.
16) 원자론은 레우키포스와 더불어 유래했고,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심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열정적인 민주주의자였으며, 그 민주주의의 인간학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의미들을 연구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자주 가장 성숙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 지목된다. 그는 플라톤과 에피쿠로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것은 근대초기에 이르기까지 계승된다. 원자론은 또한 근대과학의 초석을 형성한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17) 아인슈타인과 동시대인인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는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며, 도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양자론 해석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이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이후 국제적으로 인정된 물리학 연구기관 본부는 그의 이름을 땄다).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대한 나의 독해에서, 보어는 과학적 실천들의 원수행적(protoperformative) 사고방식을 제안한 인물로 이해될 수 있다.
18) 보어는 이 단일한 관건적 성철의 기초에 대해 논증하면서, ‘간-행들’이 측정에 있어서 고유한 불연속성을 가진다는 경험적 발견을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관찰자와 관찰대상, 아는 자와 그 대상의 본래적인 분리를 전제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Barad 1996(근간)를 보라.
19) 양자역에서 소위 불확실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는 ‘불확실성’의 문제가 전혀 아니라, 불확정성(indeterminacy)의 문제다. Barad 1995, 1996(근간)을 보라.
20) 즉, 관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는 ‘관계항’으로부터 이차적으로 파생되지 않으며, 오히려 ‘관계항’의 상호적인 존재론적 의존성 – 관계성 - 이 존재론적인 원초항이다. 아래에 논의되는 바에 따르면, 관계항은 오직 특유한 간-행의 결과로서 현상 안에 존재할 뿐이다(다시 말해 어떤 독립적인 관계항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관계-내부-관계항만이 존재할 뿐이다).
21) 구체적인 예가 도움이 될 것 같다. 빛이 두 슬릿 회절 격자를 통과할 때 그리고 회절 패턴을 형성할 때, 그것은 파동과 같은 현상을 전개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빛이 포톤(photons)이라 불리는 입자와 같은 성격을 드러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가설을 실험해 보길 원한다면, 회절 장치는 어떤 주어진 포톤 입자가 어느 슬릿을 통과하는지 결정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다(왜냐하면 입자는 오직 한 번에 하나의 슬릿만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 실험을 시행한 결과 회절 패턴이 무너졌다! 고전적 관점에서 이러한 두 가지 결과[입자와 파동-역자]가 함께 발생하는 것은 모순으로 보인다. 이것은 빛에 관한 진정한 존재론적 본성을 특성화하는 것을 무위로 만들어 버린다. 보어는 이러한 파동-입자 이원성 역설을 다음과 같이 해결한다. 즉 객관적 대상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어떤 추상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장치들과 간-행하는 빛의 현상이다. 첫 번째 장치는 ‘파동’의 관념에 대해 확정적 의미를 부여하지만, 반면 두 번째 장치는 ‘입자’의 관념에 확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파동’과 ‘입자’의 관념은 그 간-행에 선행하는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고유한 특성을 가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는 없다. 두 가지 다른 장치들은 상이한 절단들(cuts)을 초래한다. 즉 ‘측정된 대상’과 ‘측정하는 도구’를 기술하는 상이한 구별들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고유한 존재론적 불확정성에 관한 국지적인 물리적 해법들에서 다르다. 거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는데, 왜냐하면 이 두 상이한 결과들은 상이한 간-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한 것은 ‘Barad 1996(근간)’을 보시오.
22) 이러한 탐구작업은 어떤 유비적인 외삽과정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보다, 나는 그와 같은 실험실 내부 실험에 대한 인간중심주의적 제한들이 정당화되지 않으며 사실상 보어 자신의 논지와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논증한다. 나의 곧 나올 저술을 참조하라.
23) 왜냐하면 현상은 존재론적 원초성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현상의 배후나 그 원인들과 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사태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본질적으로 어떤 본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현상만이 있다. 행위적 실재론의 현상은 칸트의 현상도 아니며, 현상학적인 현상도 아니다.
24) 나는 여기서 푸코적인 담론 개념(담론적 실천)과 관련되고 있는 것이지, 영미 언어학, 사회-언어학과 사회학으로부터 온 형식주의와 경험주의적 접근과 관련되지 않는다.
25) 푸코는 ‘담론적’ 실천과 ‘비담론적’ 실천을 구별하는데, 여기서 후자의 범주는 사회제도적 실천들로 환원된다. “‘제도’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거의 제한된 행위에 적용되는 바, 어떤 사회 안에서 강제 체계로 기능하고, 발화되지는 않는 모든 것, 요컨대 비-담론적 사회체로서 하나의 제도로 존재하는 것이다”(1980b, 197–98, 바라드 강조). 이 특별한 사회과학의 구획은 일련의 행위적 실재론의 포스트휴먼적 사유 안에서 특유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즉 이것은 사회적인 것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는다. 사실상 만약 우리가 그 간-행적 개념에서 인과성의 개념을 저버리고자 하지 않는다면, ‘비담론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의미 없다.
26) 그녀의 페미니즘 이론에서의 구성주의 비판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이 중요한 지점들을 파악하는 물질화에 관한 사유로 밀고 나아간다. 물질 개념을 물질화의 과정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그 역사성 안에서 물질을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전경화하고, 직접적으로 물질에 관한 재현주의의 해석에 도전한다. 이때 재현주의는 물질을 문화의 능동적 기입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빈자리, 그리고 물질성과 그 절대적 외부성의 하나로서 담론의 관계에 있어서 재현주의자적 입장짓기로 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버틀러의 이론은 궁극적으로 물질을 바로 그 물질화 과정에 참여하는 능동적 행위자로 보기 보다 담론적 실천의 어떤 수동적 생산물로 재기입한다. 이러한 결점은 중요한 인과적 요인들에 대한 불완전한 평가의 징후이면서 그 생산성 안에서 담론적 실천(그리고 물질적 현상)의 본성을 이해하면서 ‘인과성’에 관한 불완전한 재구성의 징후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버틀러의 물질론은 인간 신체들의 물질화 또는 보다 정확하게 인간 신체의 윤곽의 구축에 대한 사유에 제한된다. 행위적 실재론의 관계적 존재론은 버틀러의 인간중심적 한계들 없이도 담론적 실천들과 물질적 현상 간의 중요한 연결이 존재하고 깨닫는 물질화 개념의 보다 심오한 재구성을 가능하게 한다.
27) 인과적 간-행의 본성은 다음 장에서 더 깊이 논의된다.
28) Barad 1998b, 2001a, 2001b와 곧 나올 저서들을 참고하라.
29) 나는 이 논점을 (개인적인 대화에서) 너무나 우아하게 제기해 준 조 루즈에게 감사드린다. 루즈(Rouse, 2002)는 측정이란 실험실 조작들에 관한 어떤 술어로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무언가가 존재하는지 아닌지가 측정이라고 답하기 이전에, 아프리오리한 질문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른바 무엇에 관한 측정인지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30) 인식가능성(Intelligibility)은 인간적 기초를 가진 사태가 아니다. 그것은 미분적 절합들과 미분적 책임성(응답가능성)/교전(engagement)의 문제다. Vicki Kirby (1997)에도 비슷한 관점이 있다.
31) 버틀러는 또한, 그녀가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라고 부르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면서, 이 선택지들 모두를 거부한다. ‘구성적 외부’란 언어 안에서의 외부성이다. 이는 언어가 포획될 수 없는 것의 끈질기게 존속하는 상실이나 부재를 포획하기 위한 반복되는 시도 안에서 응답을 강요당한다는 “바 그것”이다. 그 재반복의 계기들 안에서 재의미화를 위한 공간 – 행위작용의 형식 –을 여는 요청이란 바로 이런 끈질긴 해결을 위한 요청, 불가피한 실패, 즉 언어적 해법이다. 하지만 언어 자체는 재의미화하는 언어 작용에 공헌하는 어떤 잘못된 물질의 재기입에 상당하는 구성적 외부를 담고, 행위를 위한 가능성을 축소시키면서 수용불가능한 인간중심주의적 시도를 전개하는 일종의 울타리이다.
32) 기하학은 형태와 크기들에 관련된다(이것은 심지어 비-유클리드적 다양체들에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이를테면 평면들 위가 아니라 구면과 같은 곡면에 구축되는 기하학적 구조들이 그런 것이다). 반면 위상학은 연결성과 경계들이 문제를 탐구한다. 비록 특별히 닫힌 특성들(크기와 형태 같은)과 관련하여 공간성(spatiality)이 자주 기하학적으로 사유된다 할지라도, 이것은 오직 공간(space)에 관해 사유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위상학적 다양체 도형들은 극도로 중요할 수 있다. 예컨대 기하학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점들은, 어떤 특정한 공간적 다양체의 특유한 연결성이 주어지면, 실재로 서로 간에 근접하게 된다(예컨대 ‘웜홀’wormholes이라고 불리우는 우주론적 객체들이 그것이다).
33) 예를 들면, 버틀러의 ‘구성적 외부’와 대조적으로.
34) 예를 들어, 행위작용의 공간은 버틀러나 루이 알튀세르의 이론에 의해 입론된 그것보다 훨씬 더 넓다. 거기에는 언어적 재의미화의 가능성보다 행위작용에 대해 더 많은 공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결정론적 성과의 책략은 장치/담론적 요청들의 충돌을 요청하지 않는다(예를 들면 중층결정).
35) 원자적 수준에서도 이것은 진실이다. 보어가 강조한 바에 따르면, 사실상 ‘위치’와 ‘운동량’의 상호배제성은 양자역학에서 뉴턴주의 물리학에서의 인과성의 결정론적 의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과성에 관한 관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36) 다른 이들도 이 지점을 언급했다. 예컨대 Haraway 1991; Kirby 1997; Rouse 2002와 보어.
37) 행위적 가분성 개념은 간-행에 관한 행위적 실재론의 개념에 입각하는 것으로서, 훨씬 급진적인 결론을 내포한다. 사실상 이것은 ‘측정 문제’와 오래된 양자이론의 문제 해결에서 어떤 중차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Barad(근간)’를 보라.
38) Vicki Kirby (개인적 대화 중, 2002). 자연/문화라는 집요한 이분법에 대한 커비의 끈질긴 추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데리다 이론에 대한 괄목할 만한 ‘유물론적’(나의 규정) 독해에 대해서는 ‘Kirby 1997’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