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 Levi R. Bryant, “Phenomenon and Thing: Barad's Performative Ontology”, Rhizomes: Cultural Studies in Emerging Knowledge Issue 30 (2016) » https://doi.org/10.20415/rhiz/030.e11
초록
이 논문은 카렌 바라드의 ‘현상’(phenomena)과 ‘간-행’(intra-action) 개념에 대해 고찰하면서, 존재와 현상이 가소적(plastic)이라는 점을 논증한다. ‘가소성’(Plasticity)이란 개념 그 자체는 바라드에 의해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물들, 개체들, 또는 선재하는 결정적 속성들에 관한 그녀의 비판의 모든 것은 비록 그 기표적 내용이 부재한다 해도 그녀의 존재론 안에서 작동하는 이 개념이 현존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가소적인 것으로서의 사물이 함축하는 바 안에서, 우리는 상이한 상호작용들 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창조적으로 현행화될 수 있는 능력들과 힘들로서의 현상들에 접근할 가능성들을 열 것이다. 신체들, 사물들은 그것들의 속성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들 또는 힘들(capacities or powers)에 의해 정의되며, 우리는 결코 그러한 능력들에 관한 어떤 충분하거나 고정된 목록을 가지지 못한다.
1. “강철통 같은 가슴과 강인한 야생목 같은 팔다리를 가진 한 노인이 뜨거운 여름햇살 가운데 부둣가를 따라 걷고 있다. 파도는 부딪히고 게으른 돌풍이 대양으로부터 불어온다. 그러는 동안 갈매기들은, 마치 해변의 여행객들이 남기고 간 음식 부스러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듯이, 서로 노래를 주고 받는다. 그의 피부는 마른버짐으로 주름투성이인 데다가 뒤틀려 있다. 그의 걸음걸이는 특이하다. 그의 발은 닭의 가슴뼈처럼 다소 벌어져 있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걸어 다닌다. 아주 오래된 거목이나 산처럼, 그의 움직임에는 모든 방해들을 넘어서는 완연한 견고함과 부동성과 같은 어떤 것이 있어 보인다. 어떻게 해서 그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걷게 된 걸까?”
2. “우주비행사의 맥박은, 그녀가 오랫동안 갇혀 있던 우주선으로부터 내려와서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모래로 뒤덮이고 깨끗한 화성 표면에 부츠가 안착할 때 고동친다. 헬멧 안에서 그녀는 그녀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와 격앙된 숨소리만을 듣는다. 이것은 어떤 섬뜩한 음향의 생태다. 마치 그녀 신체의 음향적 흔적들이 실존하는 사물 들일뿐이라는 듯이. 그녀는 머뭇거리며 행성의 풍경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그녀는 그녀 몸이 느끼는 바가 얼마나 이상스러운지, 그것이 어떻게 해서 전체적으로 새로운 역학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지 놀란다. 300일간의 우주여행이 그녀로 하여금 무중력 상태에 익숙해지게 했지만, 이것은 뭔가 다른 것이었다. 125파운드의 강하고 체력이 좋은 정상인인 그녀가 여기서는 47.1파운드다. 그녀는 실제로 헤라클레스 같은 힘을 느낀다. 그녀가 지구 위에서 걷는 것처럼 걸으려고 시도하면, 그녀는 땅을 날아오를 것 같기 때문에, 계속 조심조심 더듬거리며 걷고자 한다. 시행착오 끝에 그녀는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묘수는 말을 타고 몰 때와 같은 자세와 게걸음을 결합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생각한다. 화성 위에서는 ‘걸어서는’ 안되고, ‘엉거주춤 걸어야’(crallup) 한다.”
3. “텍사스, 프로스퍼에서, 한 남자가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준비한 바비큐를 날랐던 식기를 씻을 준비를 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는 초대한 친구들의 얼굴에서 즐거움을 보면서 요리한 음식에 만족스럽다. 그리고 선선한 밤이 다가오는 동안 맥주를 홀짝이는 그의 친구들의 수다를 들으며, 가슴에 따뜻한 느낌이 채워지는 것이 행복하다. 그는 지난주 그의 작은 마을을 짓눌렀던 42도의 폭염을 그 누가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했었다.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여전히 안뜰에 놓인 선풍기는 바깥이 견딜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자라는 동안 많은 가르침을 준 삼촌으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에 청소하는 동안에도 그것에 상처를 내지 않았던 그의 반지를 빼려 하지만, 꼼짝도 안 한다. 반지가 손가락 마디에 걸려 고통스럽게 쓸려 나간다. ”이 봐, 나 살이 빠졌어!“ 그는 스스로에게 놀라면서 소리를 지른다.”
4. 카렌 바라드의 매우 특유한 사유의 핵심에 새겨진 양자역학에 대한 성찰은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보다 닐스 보어와 양자역학에 대한 그녀의 개입은 보다 심오하고 널리 알려진 것[수행과 간-행 - 역자]을 설명하기 위한 일단의 사례로 기여하는 것이다. 바라드에 의하면, 존재론과 인식론은 수행적인 것(performative)이 된다. 바라드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이 수행 개념, 그리고 이것의 이웃개념으로서의 현상(phenomenon)이다. 존재, 실존은 수행적이며 거기에는 오직 현상들만이 존재한다.
5. 하지만 이것이 주장되는 순간, 이 개념은 자격요건들을 도입할 필요가 생겨난다. ‘수행’(performance)이란 어떤 배우가 무대위에서 인물의 역할을 연기하는 연극적인 수행이라는 함축을 불러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수행은 역할에 대한 허구적인 연기(fictional enactment)로 생각되는데, 인간은 아주 많은 장비들과 같은 정체성들을 걸쳐 입는다. 이와 유사하게 철학 분야에서, ‘현상’이라는 개념 모두는 너무 쉽게 인간 의식에 주어진 것으로, 그리고 그것에 제한된 것으로 제시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인과성이 실제적으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 자체에 작동하는지 아닌지 결코 알 수 없다. 또는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바가 사물들의 유일한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6. 만약 ‘수행’과 ‘현상’이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된다면, 그때 바라드가 성취하고자 분투한 모든 것은 애초에 유산된다. 바라드는 실재론자이자 유물론자이기 때문이다. 실재론자로서 바라드는 수 십 년간 이론을 지배한 사회 구성주의과 언어학적 전회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바라드는 다음과 같이 본다.
언어는 너무 많은 힘을 부여받아 왔다. 언어적 전회, 기호적 전회, 해석적 전회, 문화적 전회, 최근의 이런 것들에서 그 모든 전회마다 모든 ‘사물/사태’ - 물질성도 마찬가지로 – 가 언어의 문제이거나 문화적 재현의 이런저런 형태들로 전회한 것으로 보인다. 도처에 수군대는 ‘물질’에 대한 재담들은 공교롭게도, 핵심개념들(물질성과 의미화)에 대한 어떤 재사유의 흔적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의 문제들/물질들(matters)이 의미화의 문제들로 대체되는 한에서 징후적인 것으로 보인다(여기에는 어떤 인용할 만한 것도 없다). 언어 문제/물질. 담론 문제/물질. 문화 문제/물질. 여기에는 더 이상 물질로 보이지 않는 것들만이 물질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7. 사실상, 바라드는 주체와 재현에 관한 가정을 주체와 세계 간의 매개물로 이해한다. 즉 이것들은 인식론적 실재론과 언어적 전회와 사회 구성주의의 반실재론이라는 두 가지 공유된 가정을 가진다는 것이다(Barad, 48). 이러한 경우들에서, 질문은 우리의 재현물들이 세계를 그것이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존재하는 바로서 반영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둘 중 하나이다. 인식론적 실재론자는 우리의 재현물들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실재성의 지도를 작성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실재론자는 우리의 재현물들은 재현과 세계 사이의 상응이나 적합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식으로 ‘실재성’을 구축한다고 주장한다. 바라드는 두 재현주의 모두 – 세계와 단어 간의 날카로운 구별을 이끌어내는 모든 입장 – 근본적으로 그것들의 기초 전제에 있어서 실수를 범하게 되는 난국에 직면한다고 본다.
8. 만약 바라드의 수행 개념이 ‘역할 상연이나 흉내내기’의 하나라면, 그녀는 여전히 재현주의의 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녀의 수행성은 니체의 그것일 것인데, 니체는 이와 관련하여 가면 뒤에 어떤 동일성[정체성]도 없는 가면(하나의 재현)을 쓴다고 논한다. 바라드는 사실 동일성을 거부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는 서로 간에 단지 동일하거나 상이하게 존재하는 사물들로 채워져 있지는 않다. 관계는 관계항을 따르지 않고, 그 반대다. 물질은 고정되어 있는 것도, 상이한 과정들의 단순한 마지막 결과물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물질은 생산되고, 생산하는 것이고, 생성되며, 생성적인 것이다. 물질은 행위적이지, 사물의 어떤 고정된 본질 또는 속성이 아니다(Barad, 136-7, 인용자 강조).
9. 같은 텍스트의 다른 곳에서 그녀는 “세계가 결정된 속성들의 독립적 집합들로서의 개체적 사물들로 채워져 있다는 믿음”을 비판한다(Barad, 19). 하지만 결정된 속성들로 이루어진 자기-동일적 개별체들에 관한 그녀의 거부는, 실재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물질적인 것에 독립적인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는 반실재론적 기획에 의해 동기화되지는 않지만, 문화가 세계를 재현하거나 의미화한다는 다소 상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바라드가 ‘현상들’이라고 부른 것은 실재적인 것이면서 물질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관념론적인 구축물이 아니며 그것들에 알맞은 객체성을 가진다.
10. 논지는 현상들이 세계에 새겨진 언어의 상이한 놀이 때문에 동일성을 결여한다는 것도 아니고, 상이한 문화들이 세계를 다르게 의미화하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자의 존재도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논지는 존재자들, 현상들이 가소적이라는 것이다. ‘가소성’은 바라드가 사용한 개념은 아니지만, 사물들, 개체들 또는 선재하는 결정된 속성들에 대한 그녀의 비판 안의 모든 것은 이 개념이 비록 기표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녀 존재론 안에서 실재로 작동 중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존재는 만약 그것이 형식, 질 그리고 능력들 안에서 근본적으로 대체가능한 것으로 특성화된다면, 가소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라드가 그녀의 수행성 개념을 따라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수행성’이 어떤 인물의 역할을 행위하는 것처럼 연극적인 수행들을 의미할 수 있는 반면, 그것은 또한 행위들 또한 현행성을 의미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화학 반응이 발생할 때가 그런 것인데, 이를테면 불이 붙는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일련의 개별체들이 하나의 다른 개별체들의 집합으로 변형됨에 따라 일련의 수행들 또는 작동들이 야기된다. 이렇게 이해될 때, 수행은 언어나 개념들을 통해 어떤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물질적 존재들로 구성되며 정말로 다른 것에 대해 작용을 가하는 것이 된다. 때때로 이러한 수행들에는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들이 포함될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과 생명체가 전적으로 부재할 수도 있다. 금속에 녹을 생산하는 산화과정은 인간이 알든 또는 그것을 목격하지 않든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그 어떤 재현도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이라곤 서로 간에 작용을 가하고 변형하는 것일 뿐이다.[1]
11. 바라드가 전개하는 수행의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과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수행’이라는 말은 어떤 특정 개념적 문법에 정박하는 경향을 띄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행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수행 뒤에 수행자 또는 수행자들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래와 같이 어떤 것을 생각한다.
P가 q를 생산하는 y에 대해 작용한다.
12. 여기서 P는 ‘수행자’ 또는 ‘행위자’를 의미하며, y는 다른 개별체, 그리고 q는 어떤 질을 의미한다. 예컨대 요리사는 야채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그것들을 기름에 재빨리 튀겨낸다. 하지만 이 공식은 바라드가 회피하고자 한 그 재현주의로 되돌아 가게 만들 것이다. ‘재현’은 단순히 단어들이나 개념들이 사물들을 대표하게 하는 이론적 틀거리만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되고 질들을 가져오는 선재하는 개별체들이 거기 있는 사유의 어떤 형식도 의미하는 것이다. 위의 공식은 그것이 선재적이며 자기-동일적인 개별체들이 다른 개별체들에 작용하는 수행자의 형식 안에 있다고 가정되는 한에서 어떤 존재론적 틀과 같은 것을 전제한다.
13. 하지만 바라드는 매우 분명하게 이런 의미에서의 사물의 실존이나 수행자를 거부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최초의 단위는 독립적으로 결정된 경계와 속성을 가진 독립적인 객체가 아니라 [...] ‘현상들’이다.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 있어서, 현상들은 단순히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인식론적 가분성 또는 측정의 결과들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상들은 존재론적이며, 행위적으로 간-행적인 구성요소들 안에서 분리불가능하다(Barad, 33).
14. 우리는 본질적으로 ‘사물-중심적’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물들을 단어 안에 놓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바라드의 논점은 개별적 실체들이 구성요소들 간의 간-행들을 앞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행이라는 생각은 개별적인 행위항들이 앞서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의 간-행을 거쳐 출현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 ‘각각의’ 행이항들은 오직 관계적으로 구별되는 것이지, 절대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행위자들은 오직 그것들의 상호 뒤얽힘과 관련됨으로써 구별될 뿐이며, 개별적 요소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Barad, 33). 바라드의 비범한 개념인 ‘간-행’의 사용을 조건짓는 것은 간-행을 앞서기 보다, 간-행으로부터 발생하는 개별체들에 대한 이러한 언급이다. 상호작용(interaction) 개념은 서로 간에 상호작용에 진입하도록 하는 선재하는 개별체들을 전제하는 반면, ‘간’(intra)은 ‘안에’(within) 또는 ‘~의 내부에’(inside of)의 뜻을 가진다. 따라서 이것은 구성요소들이 각각의 실존을 소유하지 않는 일원론적인 사건이나 과정이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바라드적 의미에서 수행이란 내적으로 관련된 구성요소들 간의 어떤 간-행 같은 것이다.
15. 따라서 현상은 어떤 수행 안에서 생산되는 간-행적 요소들의 통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드의 수행 개념에 관한 보다 정확한 공식화는 아래와 같은 어떤 것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p <-> ((x <-> y) <-> (x & y))
16. 여기서 x와 y는 특성화되지 않은 구성요소며, 상호조건 기호(<->)는 x가 y에 작용하고, y가 x에 작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p는 ‘현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공식을 다음과 같이 읽을 것이다. 즉 만약 그리고 오직 x와 y사이에 간-행이 존재할 경우에만, 그리고 만약 오직 x와 y 가 함께 존재할 경우에만 현상이 존재한다. 달리 말하자면, 바라드의 논점은 개별체 x와 y의 존재는 그것들의 간-행의 특성화되지 않는 독립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바라드에게 x와 y는 서로 간에 전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X와 Y는 그것들의 간-행의 결과 구별되고 제각각인 사물들로 갑자기 응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간-행에 앞서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논지에 대한 약간의 잠재적 문제들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17. 이 논문의 초두에 있는 짧은 글들은 이런 저런 방향에서 간-행으로서의 수행 개념과 인간 신체와 관련된 현상을 묘사한 것이다. 이를테면 노인 – 사실은 나의 할아버지 – 의 걸음걸이의 경우, 우리는 바다에서 오랜 삶을 보낸 결과를 목격한다. 생애 대부분을 바지선과 예인선 위에서 일하는 동안, 나의 할아버지는 어떤 특유한 걸음 걸이와 대서양 파도의 움직임에 조응하여 서 있는 방식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가 서고 걷는 방식은 일종의 근육 기억으로서, 특정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서게 하고 움직여 온 어떤 성향이다. 그것은 어떠한 움직이는 표면 위에서 안정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방식인 것이다. 마치 그 파도들이 신체를 형성했던 것인양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의 서고 걷는 특유한 자세가 파도로부터도 그의 신체로부터도 기인한 것이 아니며, 두 대상의 협력(collaboration)으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 또는 서고 걷는 특이한 방식을 생산해 낸 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몸의 근육들과 뼈들, 파도 그리고 보트와 바지선의 흔들거리는 표면의 간-행인 것이다.
18. 이 사례는 화성위에 있는 우주비행사의 무게와 유사하다. 왜냐하면 화성은 지구의 반 이하의 질량이기 때문에, 우주비행사는 지구 위에 있을 때의 반 정도의 무게만을 가진다. 요컨대 그녀의 무게는 그녀 신체의 고정된 속성이 아닌 것이다. - 이것은 로크와 같은 사상가가 ‘제일 성질’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니다. - 그보다 무게와 같은 속성이나 현상은 개별체들 간의 간-행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우주비행사의 신체가 지구와 같은 질량을 가진 행성 위에서의 움직임에 맞게 진화해 온 한에서, 그녀는 그녀가 낯선 행성 위를 걷는 법에 확실히 적응해야한다는 것을 안다. 그녀가 그 지역을 조금 돌아다니는 동안, 그녀는 점점 적응해 가면서, 새로운 걷기 형식 – ‘엉거주춤 걷기’ - 을 발전시킨다. 이 도보법은 그녀가 가장 효과적으로 그리고 넘어질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 바로 그 상이한 중력 공간에서 돌아다닐 수 있게 만든다. ‘엉거주춤 걷기’는 단순히 화성의 특수한 속성에 대한 배움을 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녀의 신체를 새롭고 낯선 방식으로 오랜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배움도 포함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의 신경망과 근육조직 그리고 뼈구조를 상당히 변화시킬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행성의 궤도에 진입한 우주비행사가 뼈와 근육의 질량을 상당부분 잃어 버린다는 것을 안다. 유사하게 그와 같은 공간에서의 운동이 새로운 신경적 도식을 생성시킨다는 것은 너무 분명하다. 우주정거장의 중력 0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화성과 같은 상이한 중력 환경에서 유지될리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텍사스 출신의 그 남성의 경우에, 그는 반지를 뺄 수가 없는데, 이는 그의 손가락이 8월의 텍사스의 끔찍한 폭염으로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신체 형태는 그 신체의 어떤 고유한 특성이나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체와 그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간-행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19. 이러한 사례들 각각은 그것을 둘러싼 세계 안에서 다른 개별체들에 반응하는 인간 신체의 경우인 반면, 여기서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개별체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의심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누군가를 상상할 수 있다. 즉 바위들은 어떤가? 그것들의 모양, 색깔, 다른 속성들은 다른 개별체들과의 관계로부터 독립된 바위의 결정된 특성들이 확실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현상적’ 본성은 바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물론 바위가 중력이 다른 달이냐 지구냐에 따라 상이한 무게를 지닌다는 분명한 예도 있다. 하지만 바위의 가소성과 간-행적 본성은 그것의 다른 속성들에 있어서도 진실이다. 바위의 색깔은 그 바위 위에 내려 쪼이는 빛의 상이한 파장과 그것이 간-행하는 방식으로부터 야기된다. 내가 다른 곳에서 논증했던 것처럼, 개별적 실체들은 색깔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색깔을 띈다(do not have a color, but color; Bryant 3.1). 여기서 ‘color’는 ‘to color’라는 의미의 동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위의 메짐성(brittleness)은 온도, 습도, 바위 안의 습기 등등과 같은 것들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극단적인 저온 상태에서, 바위는 박리되어 깨지기 쉽다. 반면 매우 높은 온도에서 바위는 상태가 변화되어 녹는다. 바위의 속성이나 성질은 그것을 둘러싼 세계와의 간-행의 결과이다.
20. 이제 우리는 바라드가 수행을 이해한 바에 따라 그것이 연극적 수행[공연]과 같을 수 없는 이유와 왜 현상이 의식에 주어진 것으로 이해될 수 없는지를 파악할 만한 보다 좋은 위치에 있게 된다. 연극적 수행 안에서, 배우는 누군가를 재현하고 그들이 무대를 내려오면 그들 스스로로 되돌아 간다. 그들은 그들의 수행의 결과로 확실히 변화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와 그 배우가 연기하는 역할 사이에 구분을 이끌어 낸다. 브루스 윌리스는 존 멕클레인이 아니다. 존재론적 수행의 경우에, 존재는 이 수행 또는 간-행의 결과이다.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노인의 걸음걸이는 단순히 그가 몇 시간 동안 연기한 역할이 아니라, 그의 살에 기입된 물질적 실재이다. 화성에서 우주비행사의 무게는 그녀가 그 행성에 있는 한, 존재의 실재 특성이다. 높은 철을 함유하는 바위의 붉음은 산소포화 상태에 존재하는 그것들의 존재의 실재 특성이다. 허구나 재현을 표시하는 것과 아주 다르게, 수행은 사물 안에 실재적인 것과 물질적인 성질들을 생산하는 일련의 물질적 간-행들을 함축한다.
21. 동일한 것이 바라드의 현상 개념에도 적용된다. 칸트적 전통에서 ‘현상’이란 마치 우리의 세계 본성에 대한 지식-주장(knowledge-claims) 현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에 제한되는 것처럼 의식이 세계를 만나는 방법을 함축한다. 이 칸트주의 테제는 우리가 대상을 알기 위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어떤 것을 관찰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모든 실재론자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이 관점을 고수한다. 오히려 반-실재론적 주장이 훨씬 더 급진적이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 자체를, 그것이 우리에게 현상으로 주어지는 방식으로, 우리와 떨어져서는 결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오직 우리의 관찰만이 바위가 추울 때 잘 부스러진다는 점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과 무관한 실재의 진리인지 아닌지는 우리 스스로와 분리되어 있는 세계 다시 말해 우리의 전망 바깥에 있는 세계를 결코 관찰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잘 알려진 칸트의 말처럼 우리는 “신앙을 위한 여지를 남겨 놓기 위해 [물-자체에 관한] 지식을 거부해야 한다.”(Kant, bxxx). 만약 세계에 관한 지식이 외관이나 현상에 제한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때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는 실재-자체로서의 신앙을 위한 여지를 남겨 놓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경험이나 현상들이 우리의 신경계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인다고 하면, 이는 오직 외양이나 현상의 영역을 위한 것이다. 물-자체의 단계에서, 인간은 사실상 자유 의지를 가질 것이다. 칸트에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영원히 지식의 영역 너머에 있는데, 왜냐하면 인식은 외양에 긴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식이 외양에 한계지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신이나 자유 의지와 같은 사태에 대한 신앙을 가질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22. 바라드는 ‘현상’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현상은 그것들을 목격하려고 거기에 누군가가 있는지 아닌지에 상관 없이 발생한다. 예컨대 가스상태에서 액체상태로의 메탄의 상태변환은 관찰자 없이도 잘 일어난다. 토성의 타이탄 위성에는 누군가 알든 모르든 간에 메탄 비가 내린다. 메탄의 현상성은 그것이 의식에 주어지는 것에 달려 있지 않고, 여러 가지 행위소들 또는 개별체들 사이의 관계의 네트워크로부터 나오는 속성들 – 이를테면 액체가 되는 속성 – 즉 이러한 특정 성질들이 속한 어떤 개별체를 발생시키는 그것들에 놓여 있다. ‘현상’이란 동력학적으로 분리불가능하게 서로 간에 얽혀 있는 간-행하는 구성요소들을 드러낸다.
23.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에 관한 바라드의 관계적 형이상학으로부터 심오한 결론이 따라 나온다. 만약 바라드가 옳다면 – 그리고 내가 믿듯이 그녀가 어떤 자격이 있다면 – 존재하는 것이란 그것들의 다른 개별체들과의 역동적인 간-행의 결과라고 추론된다. 나는 내가 이 논점에 대해 생각하는 바에 대해 좀 더 말함으로써 분위기를 좀 더 완화하고자 한다. 어쨌든 존재론적 수준에서 이 테제는 속성이 개별체들 안에 존재하는 결정된 특성들이 아니라, 개별체들 간의 인과 관계의 결과라는 것이다. 확실히 저 남자의 부은 손가락은 그의 신체의 특성이지만, 이 특성은 그의 신체가 그를 둘러싼 세계와 간-행하는 방식으로부터 초래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개별적인 실체들이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고유하게 소유하는 고정된 특성들로서의 속성이나 성질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보다 어떤 개별체의 속성들은 이러한 속성들을 생산하는 그것들을 둘러싼 세계와의 협력 안에서 역동적인 생성, 되기의 결과이다.
24. 표현형 유전자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연구됨으로써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사례를 취해 보자. 유전자는 표현적인 특정 성질들이나 발전된 유기체의 청사진으로 다루어진다. 다시 말해 유전자 x, y, z가 주어지면, 파란 눈에 갈색 머리라는 식이다. 유기체가 되어 갈 것을 주도하는 코드는 그것의 환경과는 무관하게 개체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된다. 그러한 코드는 그 자신은 조건화되지 않은 채로, 그 외 모든 것을 조건지으며, 모든 발전과정을 이끈다. 그런데 여기에는 환경에 의해 제한되는 표현형의 특성들과 유전자에 이해 제한되는 그러한 특성들이 있을 것이다. 환경적 특성은 그것들이 발전하는 유기체와 어떤 특정한 화학 물질 또는 방사능 물질의 몇몇 특성들 사이에 우연적인 만남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우발적(contingent)일 것이다. 반대로 유전자는, 일련의 화학 물질이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그것들이 코드화하는 표현형의 특성들이 착근가능한 모든 환경들 안에서 발전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예컨대 만약 눈색깔이나 성을 코드화하는 유전자가 있다면, 이 특정한 게놈을 갖춘 유기체는 가능한 모든 환경 안에서도 필연적으로 그 특정 눈색깔이나 성을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다. 반대로 폐활량은 환경의 결과일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안데스 산맥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마도 고도의 영향으로 보다 뛰어난 폐활량을 발전시킬 것이다. 반대로 그 똑같은 사람이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면 그 도시가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보다 낮은 폐활량을 가질 것이다.
25. 하지만 만약 바라드가 옳다면, 이런 유전자 결정론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유전자 자체는 총체적으로 간-행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며, 그것들이 단백질을 배치하는 계속적인 방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그렇게 해서 다른 배치에서는 다른 유형의 세포가 나온다). 여기서 핵심은 미묘하고도 놓치지 힘든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논점은 ‘유전자’ -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2] - 가 발전 과정에서 인과적 요인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일련의 수행들 또는 외-유전적(extra-genetic) 구성요소들과의 간-행 결과인 현상들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표현형의 특정 성질에 대한 유전자 코딩에 대해 말할 때, 마치 그것들이 다른 구성요소들과의 간-행 바깥에 있는 것처럼 다룬다. 하지만 만일 바라드가 옳다면, 이것은 유전자가 다른 개별체들과 독립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경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그 자체로 간-행의 생산물이다. 이는 단순히 바라드의 존재론으로부터 나오는 사변적 결론이 아니다. 여기에는 ‘발달체계 이론’(developmental systems theory)으로 알려진 점점 두각을 나타내는 생물학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경험적 증거에 기반하여 발달에 있어서 유전자중심적 사고를 강하게 비판하며, 우리가 유기체가 생성되는 그 발달체계의 바깥에서 발전과정이나 진화에 대해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논한다. 이러한 발달체계들은 환경과 유기체 둘 모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우리는 본질적으로 ‘간-행적 장’(intra-active fields)이라고 부를 수 있다.[3]
26. 이제 생물학의 이러한 유전자 중심주의에 대해 응답하면서 우리는 실험실 안의 생물학자들이 표현형 안에서 변화하는 것들을 생산하는 ‘유전자 전원’(turn genes off and on)을 가동할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해 진다. 예컨대 실험실 생물학자는 초파리가 커가는 와중에 특정 유전자를 켤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파리들이 날개를 한 쌍 더 가지도록 할 수 있고, 날개가 있어야할 등에다가 다리를 생성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바라드의 존재론의 인식론적인 결론들로 나아간다. 여기서 쉽사리 놓치는 것은 이러한 조건에서 실험실 과학자가 환경이나 간-행적 장을 특수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점은 간-행으로 생산된 현상들이 객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발생하는 특정한 간-행적 장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험실 생물학자의 오류는 그가 어떤 특정 유전자를 켜고 끌 때, 이런 저런 효과들이 생산된다는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유전자와 표현형의 특성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모든 환경들에 걸친 범위로 확장하는 것(또는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취급하는데 있다. 하지만 생물학자 리차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이 지적한 점에 따르면, 문제는 식물들과 동물들을 기르는 응용 생물학자의 경우와도 매우 다르다. 이를테면 다양한 지역들에서 재배되고 몇 해 동안 길러진 유전자 변형 식물들이 있다. 지속적으로 싼값에 농부들에게 팔린 씨앗은 필연적으로 가장 많은 수확을 내는 것이 아니라, 여려 환경들을 거치고 매 년 가장 지속적으로 재배되는 것이다(Lewontin, 55-6).[4] 응용 생물학자, 즉 농업 연구자의 가르침은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유전자 변형 식물이 상이한 표현형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표현형의 동일성 – 이 사례에서 – 은 과학자들의 선택행위를 통해 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때 이 선택은 농부들에게 팔릴 만한 특정한 지속적인 형질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어떤 유전자도 현상들의 생산에서 간-행적이며 이에 따라 그것이 환경의 영향 바깥에서는 어떠한 인과적 지배요소로도 취급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27. 따라서 인식론의 수준에서 세 가지 결론이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으로부터 따라 나오는데, 이들은 모두 재현에 관한 그녀의 비판의 핵심에 가 닿는다. 첫째, 만약 모든 존재자들이 간-행을 통해 생산된 현상들이라면, 이때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고전적인 인식론에 의해 제안된 바에 의해서는 분리될 수 없다. 고전적 인식론은 인식 대상을 관찰자와 독립적인 어떤 것으로 취급하는데, 이때 관찰자는 대상이 관찰되든 그렇지 않든 상관 없이 그 특성들을 소유한다. 우리가 위의 응용 생물학자들과 실험실 생물학자들의 예들 뿐 아니라, 바라드가 양자역학으로부터 도출한 풍부한 예들에서 볼 수 있다시피, 관찰자는 관찰대상이 속한 간-행적 장의 한 부분이며, 현상을 활성화하고 생산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역할을 맡을 뿐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중요한 지점이 있다. 바라드의 주장은 이러한 간-행적 장에서 생산되는 현상이 우리에게만 진실일 뿐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녀가 반-실재론의 오래된 노선 안에서 또 다른 칸트주의적 반-실재론에 불과한 케이스가 된다. 짐작컨대, 그 현상들은 과학철학자 로이 바스카(Roy Bhaskar)가 ‘초사실성’(transfactuality)이라고 부른 것에 속하는 특성을 가질 것이다, 여기서 그와 같은 현상들은 적합한 간-행적 장이 발생하는 한에서 관찰자에 대해 독립적인 맥락에서 야기될 수 있다(Bhaskar, 14). 핵심은 관찰자가 현상을 생산하는데 있어서 멀리서 그것을 단순히 관찰하기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생산된 현상들은 절대적으로 실재적이며 객관적이다. 이에 반해 실험도구들과 실험을 통해 연구하는 과학자는 그 현상의 생산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실체들에 대한 상이한 행위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상이한 현상들을 생산한다.
28. 둘째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따라 나온다. 즉 현상들이 간-행들의 산물이기 때문에, 지식이란 그것들이 야기되는 더 폭넓은 세계와의 관련 안에서 사물/사태의 분석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것을 고립시킴으로써, 사물 자체 내부에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서의 속성들과 질들을 취급하는 어떤 유감스러운 경향이 존재한다. 예컨대 우리는 우울증을 어떤 사람의 유전성향이나 화학적 불균형과 연관해서 설명할 수 있다. 자, 확실히 만약 모든 사유가, 점점 사실이 그러한 것으로 보이는 바, 뇌에 기반하고 있다면, 우리의 인지적이고 감응적인 삶 안에서 발생하는 어떤 것을 위한 화학적 징후들이 존재할 것이다. 내부적이며 고립된 어떤 개별체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면서 잠재적으로 놓치는 것은 현상이 출현하는 간-행적 장이다. 어째서 우울증과 불안장애의 발생이 지난 세기 동안 증가해 왔던 것으로 보이는 것인가?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이 개념들을 전에는 가지지 않았고, 따라서 과거에는 우울증을 진단할 수 없었기 때문인가? 적어도 이것은 우울증이 광범위하게 알려진 개념이라는 사실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혹시 우리의 정서적이고 인지적인 삶에 유해한 어떤 것이 새로운 사회적 세상에 널려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현상이 생산하는 것으로서의 어떤 현상이 음식 섭취 습관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가 바다에 버렸던 화학물질들이 토양을 채우는 것은 이러한 현상들을 생산하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인가? 이 상황들을 야기하는 것에 대해 인지하게 하는 새로운 미디어를 요청하는 어떤 정보들이 있는가? 이러한 현상들을 야기하는 모든 것들, 또는 그것들의 어떤 조합이 있는가? 존재생태론적(onticological) 실재론은 물론이고,[5] 현상들에 접근하는 행위적 실재론은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을 제기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우리가 흔히 정치적인 것과 관련이 없다고 보는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와 같은 문제가 사실은 심층적인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가진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29. 마지막 세 번째로, 지식 생산은 결코 단순한 응시, 즉 멀리 떨어진 존재자들을 관찰하는 구경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요컨대 지식[인식]은 사물들의 질이나 속성을 오래된 식물분류학에서처럼 짚어주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껏해야 이러한 속성들의 목록은 무언가를 알려주는 어떤 예비적 수순일 뿐이다. 속성들은 설명하지 않지만, 설명되어지는 바로 그 사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행위하는 것에 따라 그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현상들이 간-행들을 통해 생산될 뿐이라면, 우리는 오로지 그것들에 가해지는 작용들을 따라, 또는 그것들이 어떻게 다른 개별체들에 의해 작동되는지를 탐구함으로써 사물들의 ‘무엇’을 발견할 뿐이다. 예컨대 우리는 나트륨 원자들이 무엇‘인지’를 그것들을 가열하고, 식히는 작용을 가하면서, 그것들이 다른 원자들과 결합하면서 무엇이 발생하는지 등등을 봄으로써, 전기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의해 발견한다. 이 모든 결합들을 따라, 우리는 새로운 현상들을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오직 간-행들을 통해 발생한다.
30. 이를 통해 봤을 때, 우리는 바라드 사유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함축들을 간파할 수 있다. 관찰자가 관찰대상에 독립적이지 않고, 지식 생산에서 생성되는 현상 안에 한 요소로 존재하는 한, 탐구작업에 있어서 윤리적 책임성[응답가능성]의 차원이 존재한다. 우리가 현상들을 ‘현실화’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은 우리가 연루된 선택의 차원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현상들을 차이나게 현실화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농업 생물학자가 예전에 논했던 적용 사례를 취해보자. 그녀는 종자 지속성으로 인해 팔리고 있는 한 계통의 옥수수 씨앗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여러 환경과 시기에 모두 재배되는 종자다. 선택된 종자의 유전계통은 개당 가장 많은 옥수수를 수확하지는 않는 것이다. 여기서, 응용 생물학자[농업 수행자]는 그 종자가 농업 시장에 가장 많이 퍼지게 되는 한에서, 문자 그대로 옥수수의 ‘보편적’ 종을 구성하고(constructing)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성과정은 어떤 의미론적이거나 언어적인 구축이 아니라, 절대적인 실재적이며 물질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행위소 또는 옥수수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다른 것들 가운데 그 종이 우리의 신체의 구성이나 섭식에 대한 영향을 통해 차례대로 그 종의 계통이 우리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그 생물학자의 행위에 의해서다.
31. 이 모든 것에서 윤리적 주제들이 어디에 있는가? 이를테면 한편으로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옥수수를 구성할 때 우리는 유전자 변형이나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방향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1845년과 1852년 사이에 벌어진 아일랜드 감자기근과 비교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실천들에 있는 잠재적 위험들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단일 계통 감자에 의존하는 것이 감자 병충해의 막대한 가능성을 개방함으로써 광범위한 기근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당대의 생물다양성 감축에 있어서 이와 유사한 위험성이 우리에게 닥치고 있지는 않은가? 바라드는 ‘행위적 절단’(agential cuts)이라는 현상의 생산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결정들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구성요소들에 어떤 구성요소들을 연관시키는 행위적 절단에 참여하는 지식 생산에 연루될 때마다, 우리는 또 다른 구성요소들을 배제하고, 특정한 방향을 따라 생성하는 벡터에 기여하게 된다. 이런 행위적 절단은 단순히 우리가 행위하는 것에 따라 개별체들을 촉발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생성 가운데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다시피, 우리가 생산하는 옥수수는 우리의 섭식과정을 통해 되돌아 오며, 우리 자신의 신진대사의 구성에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 지식 생산에서 우리가 기여하고 있는 일련의 생성과 현상에 대해 반성해야할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
32. 하지만, 존재에 대한 바라드의 관계적 접근은 또한 현상의 예기치 않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차원들에 주의를 요한다. 우리의 경향은 사실상 관계되는 것을 고립시켜 다루는 것이다. 우리가 위와 같이 본다면, 우울증과 같은 현상들은 인격적(personal) 문제들이자 물질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그것을 겪는 개체에게만 해당된다.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우리가 정치적 투쟁의 어떤 장소로서 우울증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훨씬 더 넓은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장에 개방될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억압에 관한 이 인과적 차원을 모호하게 보는 심리 치료사들과 정신의학 연구자들은 우울증에 영향을 주는 그러한 보다 넓은 차원을 지워버림으로써 윤리적 실책을 범하게 되고, 이로써 연구와 실천 양자, 또는 정치적 투쟁의 경로를 차단하게 된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은 약을 삼키는 것 보다 훨씬 더 ‘치료적’일 만한 그러한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조건들에 대항하는 투쟁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인가? 이와 같은 예들은 끊임없이 부가될 수 있다. 행위적 실재론의 틀거리 안에서, 현상이 생성되는 간-행적인 장이 폐쇄될 때, 비정치적이고 윤리적 문제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많은 것들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의 자리로 드러난다.
33. 나는 이 에세이를 어떤 유화적인 비평과 우정어린 도발, 그리고 바라드의 관계주의와 그 다양성들 사이의 생산적인 대화로 마무리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좋은 말이 부족하긴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자주 바라드의 논의가 존재론적인 지향성들, 즉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으로 지칭되는 바에 반한다고 논한다. 여기에 도달하기 전까지, ‘객체-지향 존재론’이라는 기표는 어떤 특정 존재론이나 입장을 지칭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이것은 그레이엄 하만의 객체-지향 철학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객체-지향 존재론은 종종 서로 간에 논쟁이 촉발되는 광범위한 입장들을 아우르는 ‘경험론’이나 ‘합리론’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러한 논쟁에는 존재가 분리된 단위들 또는 개별체들(객체)로 구성된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단위들이 그들의 관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 또는 오직 서로간의 관계에 따라 존재하는지는 객체-지향 존재론자들 사이에서 논쟁 사안이다. 이와 흡사하게 이러한 단위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객체-지향 존재론자들 사이에 논쟁이 분분한 사항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레이엄 하먼은 모든 객체들이 모든 상황에서 불변하는 물러난 본질(withdrawn essences)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반면 나는 객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과정이나 행위들이라고 주장하며, 그것들의 유일한 정체성은 계속하는 행위들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신체가 항구적으로 죽은 세포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세포들을 생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는 모든 객체-지향 존재론들에게 하나의 ‘객체-지향 존재론’의 논지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 그 개념은 모두 함께 포기되어야 하는데, 그것의 의미지향이 하만의 존재론과 동일 수위에 있기 때문이다.
34. 이제 나는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 안에서 칭찬할 만한 것을 많이 발견하며, 그녀의 이론적 동기들과 수행들 중의 많은 것을 공유한다. 바라드와 마찬가지로 내가 흥미를 가지는 지점은 무엇보다 개별체들이 상호간에 관계(relation) 또는 상호작용(interaction)에 돌입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고립된 단위들 또는 객체들은 어떤 전체의 합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들이 상호작용할 때 생산하는 현상들이다. 바라드와 더불어 나는 비록 그것을 상호-작용( inter-active)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특별히 ‘간-행적 장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관심이 간다. 왜냐하면 나는 현상들(내가 ‘국지적 표현들’이라고 부르는 것)의의 생산에서 환경이나 다른 개별체들이 역할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국지적 표현들은 부분적인데, 왜냐하면 그 성질들, 속성들 또는 행위들이 오직 어떤 특정한 관계들(대항-사실적인counter-factually, 다른 개별체들과 상이한 일련의 관계들이 상이한 표현들을 생산할 것이다)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바라드와 함께 나는 관계들, 네트워크, 상호작용들 등등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중요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관련하여 책임성의 감각을 증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35. 하지만 나는 바라드가 아마도 사물이나 가분적인 단위들의 존재를 거부하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서두르지 않나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저작 전체를 걸쳐, 바라드는 끊임없이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관계를 앞서는 관계항(개별체들)은 없고, 어떠한 분리된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한다. 그녀의 의도는 아주 분명하다. 즉 개별체들이나 사물들의 실존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의 뒤얽힘(entanglement)과 현상 안에서의 우리의 복잡성을 거부하는 정치적이고 윤리적 태도들을 조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별체들의 관계적 본성에 대한 강조는 아마도 우리가 얼마나 세계에 연루되어 있는지에 관한 보다 큰 주의를 환기하고 보다 커다란 책임성에 대한 감각을 고무한다. 이러한 것들이 나도 마찬가지로 동의하는 바이다.
36. 그러나 독립적이고, 개체적인 존재자를 거부하는데 있어서 어떤 반대방향에서의 위험성은 없는 것일까? 바라드는 마치 존재자의 존재가 간-행들을 통해 생산된 현상들 안에서 소진된다고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그녀는 효과를 산출하는데 있어서 상호작용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능숙하게 주의를 환기시키지만, 어떤 신-실증주의(neo-positivism)에 빠지는 위험 또한 가지게 된다. 이안 해킹(Ian Hacking)이 기술한 바에 따르면, 실증주의자는 오직 소여된 것(the given)만이 존재하며, 현상 아래나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Hacking, ch 3). 더 나아가 실증주의자는 주어진 것 뒤에 주어지지 않은(비-현상적인) 이론적 개별체들의 실존을 내세우는 어떤 이론도 거부한다. 예컨대 실증주의자에게, 오렌지의 주어진 성질 뒤에 어떤 ‘실체’가 선천적으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넌센스이다. 오렌지는 문자 그대로 그것을 구성하는 성질들로 존재한다. 이런 방식으로 실증주의자는 관찰될 수 있는 것에 대해 주장하는 지식을 한계짓는 바, 인식에 있어서 어떤 안전한 토대를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바라드는 독립적인 사물들에 대한 그녀의 거부에서 그와 같은 입장에 대단히 근접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7. 하지만 우리의 존재론으로 사물들을 허용할 만한 좋은 이유가 있지 않은가? 사물/사태라는 개념은 인식론, 정치학 그리고 윤리학에서 가치 있는 작업을 수행하지 않는가? 나는 그러하리라고 믿는다. 주어진 성질이나 현상을 초과하는 사물/사태의 개념은 우리에게 신중함(caution)을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히 그 주어진 성질로부터는, 즉 현상들로부터는 그 사물/사태에 대해 결코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해 준다. 왜냐하면 그 개별체가 어떤 상이한 맥락, 일련의 상이한 관계들로 진입할 때, 그것은 바로 그 상이한 방식들 안에서 행위할 것이다. 여기 살충제 DDT가 아주 좋은 사례를 제시한다. 연구실 환경에서, DDT는 티푸스와 말라리아를 아우르는 해충들을 박멸하는 유능한 살충제로 보인다. 그러나 바깥 환경 속으로 투여될 때, 그것은 새들에게 재앙적인 영향을 미치며 암을 유발한다. 여기서 DDT는 한 계열의 관계들, 즉 실험실로부터 다른 계열 즉 보다 넓은 환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 새로운 계열의 관계들로 들어서면서, 그것은 아주 다른 종류의 현상 또는 국지적 효과들을 생산했던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만약 DDT와 같은 개별체가 그 관계들로부터 최소한의 자율성을 누린다면, 즉 그것들이 다른 일련의 관계들로 옮겨 가거나 진입한다면, 이와 같은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8. 우리는 보다 넓은 환경으로 DDT를 살포한 과학자들의 오만이 그들의 실증주의로부터 나왔다고 의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실험실 안에서 DDT에 주어진 행태로 그것을 환원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약품이 환경 안에 투여될 때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리라고 추정했던 것이다. 실체나 사물/사태가 그들의 주어진 속성들과 다르다는 점, 즉 그 사물들이 새로운 환경으로 진입할 때, 언제나 경이의 가능성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존재론은 신중함에 찬성하는 존재론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현상으로 주어진 것이 필연적으로 그것의 전부는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와 같은 관점은 바라드가 우리는 결코 신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한 테제에 기반한 신중함의 윤리와 더불어 제안한 관계적 책임성의 윤리학을 보충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물/사태들은 은밀한 권능안에 정박해 있으면서, 새로운 간-행적 장들 안에서 언제나 매우 놀랍고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행위한다.
39. 나는 모든 것이 ‘사물’에 대한 전통적 개념의 비판 주위를 돈다고 생각한다. 바라드는 올바르게도 고정되고 결정된 본질로서의 전통적인 개체, 사물 또는 실체 개념을 비판한다. 하지만 왜 철학은 평범한 언어적 가정들과 편견들에 고개를 숙이면서, 고정되고 결정된 성질들의 구성물로서의 사물 관념을 던져 버리지 않고, 사물 개념 전체를 던져 버리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는 한 계열의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할 수 있고, 다른 관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는 어떤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우리는 또한 고정되고 결정된 정체성들을 취함으로써 그러한 유목적 사유를 포기할 필요성도 있다. 하지만 만약 달리 이유가 없다면, 사물들과의 연결이 보여 주는 것은 단지 그 생각이 어떻게 실수에 불과한가일 뿐이다.상이한 상호작용들 아래에서 여러 방식으로 창조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역능들과 힘의 장소로서, 사물들을 가소적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더 멀리까지 나아갈 수는 없지 않을까? 이것은 바라드의 간-행주의(intra-activism)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동기와 성찰 둘 모두를 포괄하는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가? 어떤 특정한 시간 지점에서 표명되는 현상들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 위와 너머에 있는 모든 개별실체들에 함축된 초과와 능력의 의미 또한 포착하면서 말이다. 스피노자의 유명한 말에 따르면, “우리는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Deleuze, 226). 신체들, 사물들은 그것의 속성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들 또는 힘들에 의해 정의되며, 우리는 그러한 능력들에 관한 어떤 충분하거나 고정된 물품목록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인용된 문헌>
Barad, Karen.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Quantum Physics and the Entanglement of Matter and Meaning.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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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라드는 그녀의 포스트휴머니즘 적용에 있어서 늘 일관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우주의 중간에서 만나기』(Meeting the Universe Halfway)의 초두에서 “[물]질([m]atter)과 의미는 분리된 요소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서로 불가분하게 융합되어 있으며, 어떤 사건도, 그 어떤 강력한 것도, 그것들을 서로 찢어 놓을 수 없다. [...] [물]질과 의미는 화학적 과정에 의해서든, 원심분리기에 의해서든, 원폭에 의해서든 분리될 수 없다”(Barad, 3)고 쓰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의미라는 현상이 복잡성의 어떤 적당한 수준에 속한 생명체에 제한되는 것으로 비춰진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토성에서의 가스 입자들의 상호작용이 단순히 어떤 인과적 상호작용으로 존재한다기 보다 의미와 같은 어떤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해야할 이유가 분명하지는 않다. 우리는 “모든 의미는 물질과 융합되어 있다”는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모든 물질이 의미와 융합되어 있다”는 논지에는 동의할 수 없다.
[2] 유전자가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실재로 생물학에서 수많은 논쟁과 토론들이 있다.
[3] 관계적 존재론에 있어서 발달체계 이론의 의미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Bryant, 5.1’을 보라.
[4] 르원틴은 실험실 생물학자들의 경우에서조차 표현형의 발달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고 지적하는데, 그 이유는 유전자들을 상이한 경로로 이끄는 “발달 노이즈”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5] ‘존재생태론’은 나 자신의 특유한 존재론적 입장을 명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