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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Sep 01. 2020

물질화의 정치학

신유물과 유물론적 전회

원문서지: Diana Coole, ‘New Materialism: The Ontology and Politics of Materialisation’, Susanne Witzgall and Kerstin Stakemeier (Eds.), Power of Material/Politics of Materiality, diaphanes, 2014, pp. 27-42  


신유물론-존재론과 물질화의 정치학[1]     


다이아나 쿨, 번역: 노마(박준영, 수유너머 104)       


지난 2년 혹은 3여 년동안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 유물론적 전회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것이 유물론의 예전 형태로 되돌아가는 어떤 혁명의 완성이 아님은 분명하다. 마치 그러한 예전 형태들의 흔적들이 여전히 반향하는 듯이 말이다. 신유물론은 분명 자의식적으로 그 자신을 구성주의의 급진적 형태를 포함하는 문화분석의 언어적 양상들을 향한 초기의 문화적 전환을 따르는 것으로 자리매김할 뿐 아니라, 물질을 이해하고, 객체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도전들과 기회들에 응답하는 것이기도 하다.[2]     

나의 논문은 2부로 구성된다. 1부는 신유물론이 추구하고 있는 몇몇 방식들, 즉 그것이 영감을 도출하고, 물질화의 변덕스러운 과정을 촉발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련의 용어들이 나오는 원천들을 고려함으로써 일종의 개론을 제공할 것이다. 여기에는 그 독특한 개념적 안무(choreography)와 체현된(embodied) 사회적 행위자들이 거주하는 물질적 영역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그것의 몇몇 의의와 더불어 신유물론의 존재론에 대한 개괄이 포함된다. 2부는 신유물론에 대해 자주 제기되지만 지금까지 그리 만족스럽게 대답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의 질문을 음미할 것이다. 이는 ‘물질성의 정치학’(politics of materiality)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여러분들이 책이나 강의 등에서 참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 질문은 신유물론이 오로지 기술적인(descriptive) 것인지 또는 더불어 어떤 규범적인(normative) 기획을 이끌어내는지에 대한 것이다. 만약 신유물론이 규범적인 야심이나 함축들을 가진다면, 이러한 사항들은 어떻게 매개될 것인가? 예컨대 행위주체가 사회적 변형에 있어서 어떤 기획에 부여된 포스트-인간중심주의적이며, 평탄한(flat) 존재론과 일치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1신유물론들

연구자들의 신유물론에 대한 관심이, 정치이론 또는 건축에서부터 지리학이나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최근 학제들의 영역들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영역은 식품과 생명정치에서부터 국제관계와 시각예술에까지 이른다. 자연과학들과 급변하는 사회적 생태적 구성에 관련된 관찰들에서 전개되는 가장 드문 철학적 탐구는 모두 신유물론의 제분기 안으로 갈려 들어간다.[3] 어떤 유력한 이론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분야는 유난히 개방적이다. 신유물론은 다양한 사상들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수많은 전통들로부터 온 대표 사상가들에 의해 전개되어 오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는 고대 원자론과 근대 생기론, 홉스, 스피노자, 맑스 그리고 니체를 재-해석하는 근대 정치 이론가들이 포함된다. 또한 현상학자들, 들뢰지앙들, 푸코주의자들과 데리다주의자들이 속한다. 마찬가지로 비판적 실재론자, 사변적 실재론자 그리고 역사 유물론자들과 환경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복잡성이나 카오스 이론을 지지하는 체계 이론가들도 포함된다.      


그렇다 해도, 신유물론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관건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이 사상이 지금 등장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두 가지 구별되지만, 관련되는 연구 노선이 열려 있다. 하나는 생성의 존재론에 속하는 것인바, 여기서는 물질의 물질화에 포함된 바로 그 과정이 재-기술되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신유물론적 존재론의 리듬에 충실하면서 – 여기서 초래되는 그 모든 위험들과 기회들과 더불어 - 실재적인 물질적 변화에 초점을 두는 노선이다.       



신유물론적 존재론

신유물론의 존재론을 지지하는 것 – 인간과 비인간, 유물론과 관념론 또는 주체와 객체 간의 오래된 구별들을,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서로 중첩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거부하는 것 – 은 신유물론자의 표식이다. 이러한 시도는 생기적 유물론/유물론적 생기론 또는 발생적 내재성/내재적 발생이라는 용어에 의해 보호된다. 이러한 용어들은 신유물론의 기획과 그 존재론을 요약하곤 하는 개념들에 속한다.      


이 존재론의 독특한 특성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이것은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성(becoming)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과정(process)이지 어떤 상태(state)가 아니다.      


물질화(materialisation)의 과정에서, 물질성은 살아 있으며, 진동하고, 역동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즉 물질은 문자 그대로 물질 그 자체다.      


* 결정적으로 물질성은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행위주체에 의존하는 것으로서의 기계적인, 죽은, 비활성의, 수동적인 물질이 아니라, 그 변형에 있어서 자신의 에너지와 힘들을 포함하는 물질성이다. 그것은 자기-조직화하는 독자적인 것(sui generis)이다.     

 

* 이 생생한 내재성의 원천은 차이 또는 부정성, 틈 또는 전복, 잠재성 또는 주름들, 우발성 또는 우연에 다채롭게 귀속된다. 핵심은 이러한 발생적인 힘들이 실체들이나 행위주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것들은 물질 안에서의 균열들 또는 불-일치이며, 물질은 우발적으로, 또는 그 자신의 어떤 내적 삶/생명으로 그것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이 존재론은 파괴되지 않고, 무의미한 풍부함으로 상상되는 굳어 있는 물질에 관한 존재론이 아니다. 오히려 강조점은 관계성(relationality)과 개별체들(entities) 사이에 연합들을 수행하는 것에 놓인다. 이것들은 열린 체계들 안에 새로운 형식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물질에 속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갈라짐(fissuring)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체를 정의하는 어떤 특수하게 유기적인 가역성에 기인할 것이다. 동시적으로 접촉하고 접촉되는 바, 신체는 감각하는 실존으로서 능동적인 것이면서, 감각가능한 객체로서 수동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을 사유하는 사상가들에서처럼,[4] 이 신체적 차이는 지각되는 세계를 구조화하고 틀지우는 능력들의 진화적 기원을 표시하며, 이에 따라 기초적인 것을 불어 넣어 주면서 여전히 생산적인 행위적 능력들을 바로 그러한 세계의 살(flesh) 안에 기입한다.      

다른 한편, 물질적 내재성이 내접하는(subtends) 차이는, 들뢰즈주의 생기론자들에 따르면, 생동적인 활력(vibrant effervescence)에 기인하는 것으로, 그에 의해 유목적 경향이 무기물의 세계 안에서도 발견된다.[5] 따라서 금속의 구조는 균열과 흠집으로 이루어진 얼룩덜룩한 분포를 만들어내는 결정공간들로 가득차게 되며, 이 겉보기에 가장 둔감한 물질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비결정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장인들은 사물들과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어떤 우발적인, 심지어 창조적인 물질성을 경험할 것인데, 이것은 체현된 예술가가 그 부분에 속하는 물질화 과정과의 교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마력을 불러 일으키는 다른 신체들, 힘들 그리고 감응들과 교전하는 동안 펼쳐지는 최초의 경향들로 요동친다.        

*이러한 생각은 그렇다 해도 보다 오래된 범주구분들에 적대적이다. 가장 두드러진 적대는 신, 인간 그리고 자연, 또는 인간, 동물 그리고 무기물 간에 있다. 존재의 수직적, 위계적 분류 대신에 이것은 때로, 브루노 라투르에 의해 제기된 어떤 평면 존재론(flat ontology)을 나타낸다. 평면 존재론은 수평적 흐름들, 비결정적 배치와 창발적인 실체들이 전변과 소멸의 항구적인 요동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6]     


*신유물론적 존재론은 따라서 근원적으로 비-인간중심주의적이다. 그것은 환경에 대한 파괴적인 개조에 대한 인간적 책임을 견지한다 해도, 인간 종을 특권화하거나 어떤 아프리오리한 의미에서 구별해서 파악하지 않는다.       


*여기서 핵심은 실체들(entities), 구조들, 신체들, 객체들, 모든 것들이 비안정적인 배치로 창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치는 다양체(manifold) 안으로 더 작은 그리고 더 큰 배치들로 구성되거나 접혀들어간다. 이러한 배치들은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우주에 이르기까지 다른 잠정적인 성좌들과 교전함으로써 간단없이 재형성되고 있다. 이런 빽빽한 생산적이고 가역적인 관계들을 추적하는 것은 사회과학자에게 문제제기적이거나, 내적으로 포함된 힘들을 너머 지배하기 위해 영감을 주지 않고 그것들에 참여하는 것은 예술가에게 문제제기적인 것이다.[7]     


*실체들 또는 배치들이 비선형적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생성의 춤(choreography of becoming)으로부터 도출된다. 선행하는 것들은 그것의 창발을 예견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그러므로 결정론, 인과성 그리고 목적론은 신유물론자들에 의해 상당히 조롱받는데, 이들은 그 대신에 편위(swerves)와 무리(swarms), 우연과 사건을 강조한다.      


존재론으로부터 정치학으로 곧장 진행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을 것이지만, 사건(event) 개념은 예전에는 근원적인 원인들 관련하여 설명되어져 온 존재발생(occurrences)이라고 광범위하게 이해되어지곤 했다. 따라서 예컨대 ‘아랍의 봄’과 같은 정치적 분출은 때로, 그것이 예기치 않은, 예견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 하나의 사건으로 기술되어진다. 즉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의 창조이지만 그것의 파급효과는 아직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점에서 중대한 점이 드러날 수 있다. 모든 것을 흘러 나아가는 것과 관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응고된 구조들의 관성 보다 흐름과 사건에 집중함으로써, 모든 것을 열린 배치나 개별적 실체들로 평평하게 만듦으로써, 신유물론적 사유는 특이성이나 비판적 능력을 상실하는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것인가? 신유물론의 과제가 배치를 생산하는 밀도 있는 네트워크를 추적하고, 그 명확한 현시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므로, 이 모든 다양한 관계들을 유의하는 중에 요청되는 세부사항이 아마도 보다 넓은 결과가 결핍된 사소한 인간학적 연구들이라고 비난받지는 않을 것인가? 다른 한편, 모든 개별체가 멀리 떨어진 우주적 힘들과 그 미시적 구성물들이 연결되는 어떤 전기(biography)를 가진다는 통찰은 폭넓은 협력 없이 가능한 사회과학적 탐구를 능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신유물론의 통찰에 대한 도전들 중 하나는 분명 어느 수준과 흐름ㄷ르이 중요한가를 결정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것은 가장 중요한 관계들과 현상들의 문제에 속하는 몇몇 선입견을 초래할 것이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신유물론자들은 복잡성 이론이 설명하는 것처럼, 겉보기에 카오스적이거나 제멋대로인 체계조차, 그 결과가 예측불가능하다 해도, 실재로는 보다 깊은 조직화의 패턴에서는 명징하다는 것을 정말로 알고 있다. 그리고 개별체들이나 배치들이 불안정하고 복잡할 것이지만, 그것들은 인지가능한 경계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당연히 다공적이고, 투과가능하며 다른 체계와 섞여든다. 이것이 어째서 처음에 자연 과학에 의해 사용되었던 생태학 개념이, 이를테면 도시 또는 정치 생태학에서처럼, 물질의 생명적, 비생명적 형식들과 물질 그리고 에너지가 흐름 안에 존재하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체계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8]     


이 마지막 도전들은 특히 신유물론적 시도와 적절히 연관되는데, 이러한 시도는 예측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며, 여기서 인간은 물질적 체계와 객체들에 보다 밀접하게 휘말려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유물론은 21세기에 발견된 조건들에 대한 적시의 응답 – 또는 그것의 표현이기도 하다 – 으로 간주될 만하다. 왜냐하면 인간과 물질의 중첩구조(imbrication)가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 도구의 사용과 자연적 원천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보다 폭넓은 기술적이고 생태적인 체계 안에서 인간 신체들을 휘말려들게 한다. 하지만 신유물론자들은 인간이 늘 단순화될 수 없는 인간/비인간 체계들 안에 중첩되어 왔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또한 바로 그 삶/생명의 물질성이 변화되고, 침식되며 그리고 전례 없는 방식으로 급진적으로 변형적인 능력들을 부여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새로운 물질적 재료들의 발명은 여기서 예술가들이 주장하는 바, 그리고 새로운 연금술을 가공하는 자들과 공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개입과 인간적 지배권에 대한 한계설정이 가지는 위험성은 보다 더 좋은 기여를 한다. 인류세 – 물질에 관한 인간의 조작이 대지의 지질학적 직조에 직접 기입되는 시기 – 에 변화는 지구행성의 허약성과 한계들을 드러내는 예상불가능한 결과들과 더불어 보다 빠른 속도와 강도로 발생하고 있다. 유물론적 전회가 여기서 스스로를 표명하는 하나의 방법은 결과적으로 보다 광범위한 생물물리적 환경에 대한 인간적 효과들 그리고 그 역의 과정에 관한 관심 안에서이다. 이러한 전망으로부터 유물론적 전회는 생명 자체에 대한 긴급한 위협에 관건적인 관심을 직접적으로 견지하는 사회과학을 위한 중차대한 요청에 응답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인격적 정체성이나 집단인지에 속한 질문에 대한 최근의 관심을 재정립하거나 문화적 전회와 급진적인 구성주의의 형태들을 포괄하는 보다 언어적인 접근을 확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경제, 인구통계 그리고 지구과학이 전지하게 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결국 이는 보다 유물론적인 기초작업을 사회정의에 대한 사유를 위해 제공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행성의 70억 인구 중에는 최근 보다 나은 삶의 표준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략 20억명은 불충분한 칼로리와 영양분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인구의 급증은 세기말에 이르러 30억명 이상을 먹여 살려야 할 정도가 될 것이다. 이것은 기후 변화가 음식, 물 그리고 에너지 공급에 막대한 긴장을 초래하는 와중에 발생한다. 환경이 낙후되고 사람들의 요구사항이 행성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설 때, 주된 경제적 지혜는 지속적인 성장이 지속가능성과 세계적인 공정성의 해법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내 자신의 전망은 신유물론이 비판적 이론가들을 불러 모아, 다기한 체계들의 상호연쇄에 대한 어떤 전체주의적인 착취를 관통하는 이러한 고도로 일반화되고 동의할 수 없는 주장들에 응답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자주 과도하게 추상적이고 난삽한 연구들로 존재하는 것에 실재적인 물질적 안정을 가져다 주는 매일매일의 범속한 실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들을 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유물론의 과제는 다름 아니라 이러한 창발적이지만, 모든 밀도 있는 물질적 세부사항 안에 있는 잠재적으로 죽은 배치들을 묘파하는 것이다.     

  

신체 

일반적인 생각 보다 육체(flesh, 살)를 상정하기 위해, 신체에 관한 그 의의, 그리고 신유물론에 있어서 신체의 의의에 대해 캐물음으로써 시작하는 것은 도움을 준다. 신체는 당연히 신유물론의 큰 관심사다. 이것의 범속함과 일상적인 경험들에 대한 주장, 그것의 생물학적 욕구, 지각과 운동감각에 있어서의 신체적(corporeal) 능력들, 도구를 휘두르고 자신의 환경을 미적으로 변형하는 능력, 그리고 덧붙여 그것의 수행적 스타일과 정체성에 대한 최근의 강조에 있어서 보다 물질적인 차원이 그것이다. 날 것 그대로의 삶/생명의 도식 안에서,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언급한 바, 존재하기의 최소조건으로서의 신체의 생존 – 인간과 동물 – 은 잘 살아감(wellbeing)이라는 생각을 위한 규범적인 시초지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유물론적 접근은 어떻게 육체가 실재적으로 수많은 생명적, 기술적 그리고 생태적 체계 안에서, 그와 같은 체계를 변화시키는 그 자신의 효과에 대해서 뿐 아니라, 생산되고 재생산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신유물론의 존재론에서 충실성(fidelity)이란 신체를 어떤 배치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체란 박테리아의 다채로운 미시-체계에 의존해 있으며, 이는 환경요소들에 의해 영향 받는 뒤얽힌 유전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체는 단순히 진화의 우발적이고 계속되는 생산물로 간주할 만한 것이 아니라, 더 작고 더 큰 물질화와 상호작동하는 투과가능한 개별 실체 또는 그 실체들이 통과해가는 어떤 지절로 간주할 수 있다. 예컨대 신체들은 점점 더 생명-의학적 개입들을 통해 재구성되고 있고, 그들의 능력은 디지털 기술과의 상호작용으로 재정향되고 있으며, 그 능력들은 생명정치적 체제에 의해 재측정된다. 생명권력의 새로운 양상들은 통치정부들을 사회적인 기술적 인간자본과 신체적인 수용력들에 대한 전례없는 능력들로 채운다. 이것은 일상적 삶의 가장 심층적이고 미세한 세부사항들 안에 개입하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수준에서 일상적인 것은 – 쓰레기를 버리는 것에서부터 화석연료로 가동되는 전기를 사용하는 것까지 – 생물학적 존재들이 의존하고 있는 보다 먼 경제적, 지정학적 그리고 생태적 체계에 있어서 다양한 결과들을 초래한다. 동시에 신체의 생존은 보다 넓은 사회 구조들 내부에 대한 그것의 착근성(embeddedness)에 의존하며, 여기서 일상적으로 조절되거나 소비되는 객체들은 주로 세계 시장의 순환을 통과해 가는 상품들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논리학에 속한다. 그러한 매개를 통해, 그것의 잘 살아감(wellbeing)은 보다 멀리 있는 생명-물리적 체계들에 연루된다. 여기서 오래된 지질학적 연대들과 보다 최근의 기후 변화는 중대한 자원들의 잔존능력과 파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들 자원들은 기술적 배치들에 의해 재형성되고 경제체계들에 의해 매개된다.     


요컨대 이러한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생태학에서, 더 이상 인간과 비인간 또는 유기적인 것과 비유기적인 실체들 간의 구별이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9] 상이한 범역들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체계들의 휘말림이 보다 더 착종되기 때문에, 물질세계는 점점 더 신유물론의 존재론에 의해 기술된 복잡성과 역동성을 예화한다.      


행위자

생성의 무도 안에서, 행위자의 본성은 난처한 주제로 남겨진다. 신유물론자들은 행위자란 이전에 상상되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개별실체의 영역에 퍼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특히 정치적 비평이나 개입에서 더 두드러지지만, 어떻게 해서 행위자가 그토록 넓게 만연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현대 서구 사상에서, 행위자 이론은 일반적으로 인간중심주의와 인간적 가정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이에 따라 행위자는 인간의 유별난 특성으로 진부하게 정의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들에서 그 인지 능력과 합리성이이라는 명목으로 유별나고 특권적인 종들로 특성화되어 왔다.     


그와 같은 관점들은 신체성(corporeality)에 관한 현상학적 사유에 의해 도전받는다.[10] 여기서 핵심적인 통찰은 행위자, 즉 주체성과 합리성과 같은 그러한 행위자란 결코 그것이 전개되는 신체적 과정 – 특히 지각과정 - 들과 전반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거기 의존한다는 것이다. 지각 안에서, 신체는 어떤 실천적 연루를 통해 그것과 더불어 그 환경을 구조화한다. 즉 그것은 전-인격적, 비-인지적 방식으로 의미를 생성한다. 이러한 방식은 지각이 그 환경을 패턴화하고 지배하도록 하며, 따라서 우발적, 창조적 실행을 위한 신체적 의미와 범위를 도입한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주체성과 같은 행위자는 어떤 추상으로서 반복적으로 일련의 과정들이나 능력들을 뒤섞지만, 단지 수동적으로 외부 자연의 이미지들을 수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호신체적인 육체인 (공)현존의 장으로서의 물리적 상황에 능동적으로 응답하고 구조화하기 위해 지각의 능력 안에 정착한다. 누가 또는 무엇이 행위주체인지 묻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무용한 것이다. 그보다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 도전이란 이러한 것들이, 모험적이고 일시적으로 출현하는 것으로 그러한 혼재된 행위적 능력들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같은 것이 정치적 행위자에게도 적용된다. 그 기원과 전개는 이론적으로 예상되기보다 추적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관점들이 분배된 행위자에 대한 신유물론적 지시체와 일치하는 것이며, 특별히 인간적인 속성과는 거리를 두고, 행위적 능력들이 개별체들의 보다 넓은 영역을 가로질러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역은 얼마나 넓은가? 이는 많은 부분에서 어떤 능력이 행위적인 것으로 인지되는지에 달려 있다.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지각의 우위는 두 가지 원리적인 능력들을 제안한다. 첫째 능동적 역능(potency)이나 효과로서, 이는 변화를 야기한다. 둘째, 이에 대한 성찰은 그 추동자에 대한 물질화를 야기하는데, 그 결과 효과를 동기화함으로써 작동한다.     


만약 이러한 능력들을 전개하기 위한 조건이 신체성(corporeality)이라면, 그때 이것은 행위적 능력이 매우 넓게 분배한다. 왜냐하면 동물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성찰적 특성과 그들의 환경을 구조화하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비-인간 신체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보다 급진적이면서도 상당히 어렵게도, 행위자가 또한 비-유기적 개별실체들에 귀속될 때, 질문이 제기된다. 이것은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에 의해 제기된 입장이나 몇몇 유물론적 생기론에 함축된 것이기도 하다. 라투르는 행위능력을 무생물 실체에 귀속시키기 위해 행위소(actants) 개념을 지지한다. 여기서 핵심은 행위소가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다. 즉 행위소들은 차이를 형성하면서, 효과와 감응을 생산하고, 그 행위로써 사건의 경로를 바꾼다. 라투르는 그것들이 수용하고, 촉발하며, 제어하고, 영향을 끼치며, 제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봐서 행위능력이 인간/비-인간 배치들에 귀속될 때 보다 강제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라투르는 또한 그것을 사물들에 귀속시키는데, 여기서 그는 그러한 사물들이 무기력 상태에서 깨어날 때, 전율하고, 중얼거리고, 충만해 진다고 기술한다.[11]    

 

앞서 언급되었던 두 가지 기준에 따라, 무생물 객체들은 그것들이 효능적인 한에서 약한 행위자 형태와 일치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다른 신체들에 대해 행위하고 심지어 어떤 특정한 우발성을 그것들의 물질적 구성 안에서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 물질적 구성은 열린 체계를 부여한다. 하지만 무기물들이 그것들의 생존적 물질성을 그것들에 부여하는 성찰적 특성을 결여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나는 나의 두 겹의 기준에 따라 이러한 신유물론적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좀 망설여진다. 그 유효함의 영향은 차치하고서, 무기물들은 그들의 삶/생명을 향상시키기 위해 스스로나 세계 자체를 변화할 동력을 결여하거나 잘 존재함의 능력을 증강시키지 못한다. 그들의 구조적 개방성은 그들로 하여금 유기물과의 관계 안에서 촉발된 즉흥적인 활동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속성들 자체를 결여함으로써, 어떻게 이러한 성찰이 사회 변화에 관한 비판적 기획에 영감을 줄 것인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마찬가지로 비-의인화가 그것들이 어떻게 인류세 안에서 야기하는 삶의 위험들을 개정할 특별한 책임에 조응할 수 있을 것인지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여기서 나의 의도는 생성의 무용술이 상이한 수준들, 영역들 그리고 물질화의 양상들을 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적인 능력들이 그 두드러진 특질이 문제적인 수준에 의존할 만한 물질적 실체들의 분산적이지만 다양한 특성들로 간주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어떤 넓은 분포는 실체들의 생성력과 효능에 맞추어지는데, 이는 번갈아가며 매일매일의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상황들을 제한하기도 하고 활기있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진화는 이 물질적 환경에 대한 조정과 적응의 능력을 요청하며, 따라서 유기적 물질은 보다 고도화된 구조적 능력들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세계를 재구조화하기 위한 비-인지적 능력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비인간적 신체들과 공유된다. 철학적으로 이것은 인간으로부터 특이한 위상과 능력 뿐 아니라 합리적 행위주체에 관한 하부채굴식의(undermining) 공식들도 탈취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인간은 집합적으로 특별한 책임[응답가능성]들을 가진다. 이것은 그들의 물질적 자연에 대한 지배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며, 비인간 세계에 가하는 물질적 충격에 의해 예화된다. 이 경우에 응답한다는 것은 그 구체적인 드러남이 몸짓과 물질적 습관들과 같은 것을 포함하는 어떤 우발적인 정치적 기획이라 할지라도, 정치적 행위에 관한 보다 집중화된 개념을 정말로 요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이 기획은 또한 물질에 있어서 이끌어가는 것과 저항하는 것, 그 효과 그리고 되튀김, 따라서 인간 의지의 한계와 출처를 지각할 필요성이기도 하다.      



2부 신유물론들윤리학과 정치학

이 마지막 언급들에 기대어 나는 이제 신유물론적 접근법이 윤리적 또는 정치적 변화와 연관된 어떤 규범적 기획을 촉발하는 방식을 탐구하고자 한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 전회 이후의 물질적 전회를 반기는데, 이는 정확히 비판 이론을 보다 강화하고 물질을 향한 행위의 변형을 개방할 가능성 때문이다.     

   

새로운 감각       

여기서 나는 인간이 그 안에 착근된(embedded) 복잡한 체계들와 비인간의 행위적 능력들을 식별하는 것이 새로운 감각이나 창조성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주장을 고려하면서 시작한다. 자연을 지배하려는 근대의 여정은 사유의 낭만적인 긴장에 의해 규칙적으로 극복되어 왔고 환경파괴로 인해 비난받았다. 상이한 에토스(ethos) 또는 세계-내-존재의 양태에 대해 응답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연에 대한 지배나 도구적 이용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찬성한다. 자연 세계와의 조우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조잡한 경험을 통해서건, 보다 매개된 예술적 추구 안에서든 간에 어떤 보다 비옥하고, 겸손하거나 창조적인 감각을 개발하는 방식들로 자주 간주된다.      


그에 관한 하나의 예는 허버트 마르쿠제의 새로운 감각인데, 이는 그의 『해방에 관한 에세이』(Essay on Liberation, 1969)에 논해진 바 있다. 1970년대 저항-문화의 맥락에서 성장의 한계에 관한 주장들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새롭게 갱신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화롭고, 에로틱하며, 흥겨운 그리고 상상적인, 이 새로운 감각 또는 미적 에토스는 마르쿠제가 내버려둠(letting-be)의 태도라고 기술하는데, 그는 이를 자연의 조정능력과 연결한다. 이것은 에로스와 연합된 생명적, 본능적 욕구들에 차례로 기반하는데, 소비자본주의와 근대 합리성의 압력에 처해 있다.      


마르쿠제는 미적 감각을 재계발하는 수단으로 예술적 활동에 특권을 부여한다. 그는 이 세계가 예술의 “보다 원초적인 ‘기술적’ 함축들” 중 몇몇을 재포획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를테면 음식 만들기, 문명화하고 성장하는 사물들이 그것이다. 즉 이러한 활동은 그와 같은 사물들에 어떤 현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때 형식이란 그것들의 물질을 거스르지도 않으며, 감각을 위반하지도 않는다.[12] 정원가꾸기, 방랑하기, 그림 그리기, 비-생산적인 에로틱한 즐거움과 같은 활동들은 여기서 자연 세계와의 어떤 밀접한 관계를 계발하고, 소비하거나 소유하거나 상품화하지 않는 그 내재적 형식에 관한 이해를 증진하는 활동적이고, 비-도구적인 행위들로서 가치를 부여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들은 칼 맑스의 1844년 수고(manuscripts)의 관점들과 공명한다.[13]      

 

나는 특히 다음과 같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생각을 좋아한다. 만약 “지중해 남부인들이 기꺼이 오물투성이인 채로 살아 간다면, 그것은 단지 물이 부족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즉 육체와 그것의 야생적 상태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악취, 먼지 그리고 해충들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든다.”[14] 그녀는 오늘날 슬로우푸드 운동과 연관될 만한 활동들의 장점들을 찬양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의 즐거움은 그녀가 가사노동의 지루함과 구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배로부터의 유용한 전환이란 그 자신의 물질적 잠재성과 형태들을 따르는 물질과의 예술적 상호작용들 안에서 표명되는 것이지, 단순히 그러한 물질 위에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인간에 관한 보다 수용적이고 개방적인 감각 그리고 보다 상호적인 방식으로 그것에 연루되는 기꺼움과 동일시된다. 차례로 그것은 새로운 문화적 에토스를 위한 초석이 되며, 마르쿠제와 같은 사상가들에게 이것은 환경에 대해 보다 책임질 수 있는[응답가능한] 행위를 포함하는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의 생생한 서곡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논증의 보다 최근의 판본은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책,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 2010)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은 새로운 감각을 양성하기 위한 신유물론의 윤리적 잠재성에 대한 어떤 예를 구성한다. 베넷은 사물에 대한 행위작용에 관한 라투르와 들뢰즈의 보다 확장적인 적용에 찬성한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그들과 만남으로써 근대적 태도와, 물질에 속한 것으로서의 행위수행의 형식들을 변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베넷은 “요구되는 것은 인간 신체의 외부와 내부를 조절하는 비인간적인 힘들에 대한 양성되고(cultivated), 견딜만 하며, 감각적인 주의집중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것을 “보다 많은 열린 결말을 가진 태도”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비인간 타자성과 행위를 고려한 양성과정과 연관시킨다. 이러한 태도는 마찬가지로 “어떤 보다 생태적인 감각”이기도 하다. 베넷은 만약 “우리가 필수불가결한 이질성에 집중한다면, 과연 우리가 그 동일하게 폭력적으로 무모한 방식들로 생산과 소비를 지속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런 식으로 베넷은 그녀가 신뢰하는 여러 생태 사상가들을 인용하는데, 이때 그녀는 “생명력 있는 물질성이라는 이름 하에 (...) 보다 많이 지속가능하고, 보다 덜 유해한 생산양식과 소비양식”에 호소한다.[15]      


하지만 이와 같은 윤리적 기획으로 충분한가? 보다 많은 생태적이거나 미학적인 감각이란 분명 매혹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최근의 물질적 조건을 보장하는 일련의 근원적인 변화들을 야기할 충분한 효과를 가지는 것일까? 확실히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것은 보다 일찍 사태를 개괄하는 일종의 비판적 분석이며, 여기에서 윤리적 존재들로 채워지고 다른 물질적 실체들에 의해 둘러쌓인 사회구조들이 신중하게 분석되며 이해되는 것이다. 물질에 어떤 보다 더 상호적인 관계를 채택하는 생기적 유물론에 의해 가장 잘 이해되는 그러한 행위자들은 재빨리 생물물리학적이고, 사회경제적이며 훈육적인 체계의 장애들을 극복할 것이다. 더 나아가 장애들은 그것의 보존에 관해 강력한 관심들이 투여된다.     


더 나아가 이것은 특별하게도 생산과 소비를 위한 사례이다. 즉 이는 21세기에 마주치게 된 대부분의 객체들이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 뿐 아니라, 상품화되어 가는 정도에 주목하는 영역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경쟁시장들의 논리에 종속되는 곳에서 생산체계와 교환 과정을 통과해 가며, 많은 경우들에, 광고의 힘에도 종속된다. 이런 관점에서 많은 신유물론자들(그리고 어떤 강한 구성주의자들)에게 간과된다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체계는 정치 경제학이다.       


현재의 신유물론 비판 이론

라투르는 그가 사회체에 관한 사회학이 배치들을 창발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억압하는 추상적인 이론틀들 제시한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그것을 거부한다. 그는 특히 비판 사회학을 특히 경멸하는데, 그것의 구조주의적 형식에 있어서 더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것은 구체적인 추상물들을 사용하는 경향을 전형적으로 대표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어떤 실재적이고, 숨겨진 행위주체가 사회적 장면들의 배후에서 작업한다는 음모이론을 진작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라투르는 “행위를 제압하는 모든 행위자들을 사회, 문화 또는 구조와 같은 일련의 행위체들 안으로 뒤섞어 넣지 않는” 것이 관건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보다 행위란 꼼꼼하고 인내를 가지고 접근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 “천천히 엉킨 것이 풀어져야만 하는 많은 놀라운 일련의 행위자들의 덩어리”이다.[16]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뒤엉킨 구조들이 재생산되고 지속되는 방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나는 라투르가 그러한 경향들에 대해 심려하는 것이 옳다고 보며, 21세기에 적합한 비판적인 유물론적 사회 이론을 촉발하는 풍부한 방법을 제안하는 창발적인 사회 구조들의 경험적인 세부사항들을 재발견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접근법에 찬성한다. 그러나 권력관계가 결집하는 방식 뿐 아니라 적합한 수준들의 선별을 이끌어갈 수 있는 몇몇 비판적 관점들을 가지고서 현존하는 물질적 조건들에 대한 특정한 관심들에 기여할 만한 방식들을 확실히 하는 것도 분명히 필수적이다.      


이에 상응하여 내가 추천하고자 하는 접근방식은 내가 잠정적으로 “수용적 역사 유물론”(capacious historical materi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체들이 내밀한 신유물론의 범역 안에서 이해될 만한 방식에 있어서 보다 이른 사례들을 수립하면서, 나는 그와 같은 접근법이 일상 생활의 가장 부박하고, 평이하며, 물체적인(corporeal) 경험들로 시작할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들을 야기하고, 그 다음으로 보다 넓은 지구적이고 행성적인 체계를 촉발하는 자본과 거버넌스를 매개하는 방식을 검토할 필요성도 있다고 제안한다. 이는 물론 물질적 효과들이 수준들의 이러한 위계를 통과해 흘러 넘치는 방식을 검토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일상적인 가사노동과 같은 것은 경제적인 것을 재생산하고 환경 문제들에 기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접근법의 목표는 다름 아니라 현재의 물질화에 관한 어떤 생물물리학적 추론과정이다.      


도식화하자면, 나는 여기서 뒤따라 나오는 세 가지 상호연관된 분석이 수준들을 제안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미시-수준의 탐구는 체현된 일상사의 실존적 세부사항들에 적용되며, 중간-수준에서 분석은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거버넌스적인 구조들과 직접 연관된다. 여기서 생산, 소비, 분배와 자원경영과 체현된 개체들이 발생한다. 따라서 거시-수준은 행성적 체계에 속하는데, 이때 ‘자연’은 사회적 통제와 보다 낮은 수준의 물질성들과 접촉함으로써 열등화되거나 존속하는 복잡한 생태-체계들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회피한다. 각각의 수준들이 그 자체로 중차대한 복잡성을 식별할 것이지만, 중요한 점은 어떻게 이러한 양태들이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는 이러한 세 수준들의 내적 논리학과 그들 사이의 연결들이기도 하고, 각각에 내속하는 물질적 차원이자 그것을 초래하는 일련의 행위적 능력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은 현대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이해와 결정적인 중재를 위한 지렛대의 힘점에 대한 규명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이는 비록 맑스주의에 빚지고 있다 해도, 그 안에서 발전된 역사 유물론보다 어떤 훨씬 광범위하고, 보다 다층적인 종류의 탐구를 제안하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이나 진보에 관한 거대 서사들로의 경향을 회피하지만 권력이 정위하는 방식과 위치를 이해하고 그 물질적 효과들에 대한 비판적 시도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유물론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구체적인 연구들이다. 여기서 나는 실재적이고 직감적인, 그리고 경험적으로 단도직입적인 감각 둘 모두에 있어서 그리고 맑스가 추상에 반대하여[17] 구체적인 것을 정의한 그 의미에서 구체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역사 유물론자들에게 구체성이란 관계성이라는 내밀한 장 안에 있는 시간적인 어떤 지점에서도 현상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모든 복잡한 역사적이고 개념적인 매개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역사 유물론을 여전히 어떤 비판이론으로 만드는 것은 체계적인 논리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진보적 사상가들이 단순히 문화적 전회 아래에서 종료해 버리지 않은 어떤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효과들을 심각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나의 요점은 따라서 한편으로 교조적인 역사 유물론이 경제적 수준에서 너무나 배제적이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제 단순히 어떤 미시적인 것(매일매일의 체현된 삶)과 거시적인 것(행성적 차원에서의 생물물리적 체계) 간의 매개적 수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여전히 물질의 흐름들, 순환과 전환지점들을 추적하는데 관건적이라 해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적 전회 아래에서, 구체성에 대한 유용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문화가 일련의 비판적 유물론을 탈구시켜 버렸다는 점이다. 신유물론의 목표가 최근의 생산과 소비의 헤게모니적 체계에 도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베넷이 제안한 바, 그 생태적 감수성(green sensibility, 녹색 감수성)이어야 한다. 그때에 유기체적 관심에 관한 탈신비화와 구체적인 사회구조들이 결정적인 단계를 밟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오로지 이러한 구조들이 재생산되는 방식에 관한 참신한 분석의 잠정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거시-수준 분석

앞에서 내가 언급했던 아래로부터의 유물론은 신체들과 그 욕구들에 대한 보다 큰 주의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특히 경험적 세부사항들을 탐구함으로써 그리고 보다 현격한 체계들과 정책들과의 상호직조의 충돌을 탐구함으로써 미시-수준에 놓인다. 이 수준은 잘 존재함(wellbeing)의 경험들을 함축하거나 그것들을 잘 조화시키는 작은 요인들이 널리 퍼지는 지점이다. [또한] 탈취와 기능부전의 경험들이 문제시되고 미래에 이의 제기를 야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을 기술하는 것은 비판적 사회과학이나 잘 알려진 번영의 원동력에 관한 관심들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최근 영국 언론에 관심을 기울였던 어떤 작은 논쟁은 내가 생각하던 일련의 현상의 사례를 제공한다. 그것은 교육부 장관과 건축가들 간의 논쟁과 연관 있다. 장관은 그의 직업이 이러한 전문가들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학교들을 비용효율적으로 짓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더 좁은 복도와 더 작은 매점을 지으라고 명했는데, 이는 더 낮은 비용에 관한 실천적인 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비판자들은 학생들의 흐름과 그들의 복리적인 감정들에 있어서 가져야 할 공적 공간을 축소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효과들을 강조한다. 그러한 세부적인 것은 매일매일의 경험들을 거주시키는 것인데, 이때 신유물론자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물질적 공-현존이라는 다양한 세부사항들에 차례로 비춘다. 이런 경우 물질적 공간들은 삶의 질에 기여하거나 교묘하게 그것을 침식한다. 이것은 삶, 물체적[신체적] 경험 그리고 정부 정책이 물질적으로 상호직조되는 공간의 한 예일 뿐이다.        

경제적인 기계에 대한 투입이 가동되는 것은 이러한 미시-수준이기도 하다. 자원이 소비되고, 낭비되며, 재활용되고, 따라서 지구대지를 약취하면서 거리가 먼 시장들을 먹여 살리는 것도 이 지점에서다. 마찬가지로 훈련되고 노련한 육체, 행위적 능력들 그리고 무능력들, 즉 인간 자본이 겉보기에 인격적이지만 사회적으로 선규정된 실천들, 습관들과 일상적 과정들을 통해 부양되는 것도 이곳에서다. 사회체계의 재생산이 순응적인 주체들을 양산하는 통치성의 양태에 의존하는 것은 이곳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풍족함과 결핍이 여기서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물질과 자연자원이 가정을 통해 소비자에 지속적인 방식으로 순환하는 경로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수준에서 작은 훈육적 실행들이 생산 체계에 연료를 공급해야 하는 체현되고 욕구하는 개인들을 생산하고 제한하기 위해 작동하는 방식과 공공-정책적 규범들이 가족적 삶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을 꿰뚫고 지나감으로써 행위를 촉발하는 방식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미셸 푸코의 실제적인 역사가 상연을 시작하는 지점이며, 그가 말하듯이 신체가 “식습관이나 도덕법칙들을 통해 음식과 가치들에 의해 감금됨으로써 [...] 노동, 휴식 그리고 휴일의 리듬에 의해 망가지는” 그 지점이다. 신유물론은 물질적 실행들과 미시권력이 신체들을 전략적으로 그 능력을 발전시키고 변형하기 위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강조에 있어서 푸코의 보다 유물론적인 계보들, 특히 그가 『감시와 처벌』(Discipline and Punish, 1975)에 기대고 있다.[18]      


이것은 또한 최저임금, 사회 보장의 감축, 페기, 최저 생계 임금, 국가 부채의 경쟁적인 침식작용이 다이어트, 건강 그리고 절망으로 번역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고통과 쾌락, 탈취와 욕망이 실재로 변형되는 곳이다. 이것은 보다 높은 수준의 구조적 또는 이론적 분석에 관한 물질적 기본 원리이다. 요컨대 이것은 정치적인 것이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권력 구조로서 개인적인 것으로 되는 장소이며, 이는 신체들의 완결성과 잘-삶을 위한 실재적 결과들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이 장소는 또한 풍족함이라는 미명 하에 매일매일의 삶의 무수한 실천들이 발생하는 곳으로서, 그러한 풍족함은 보다 높은 체계들이 재생산되거나 손실을 입는 방식으로 투입되는 것을 통과하며 야기한다.      


사회-경제적 구조들과 거버넌스의 중간-수준

중간적 수준에서 신유물론의 관심을 보증하는 주요한 구조는 넓은 의미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이다. 사회경제적 구조는 여기서 전반적인 물질-존재 지도작성학 안에서 핵심적인 전환점으로 파악될 것이다. 그러한 구조는  자연 생태체계를 촉발하는 경제적인 것을 경유하여 위로 흘러 넘치는 도관들(conduits)과 경과들(relays)을 담고 있으며, 거기서 역으로 환경적 요소들은 그것들이 육체 위에 흘러 내려와 충격을 가하기 전에 재구성된다. 요컨대 매일매일의 일상적 사태/물질과 자연 자원들 간에 두드러진 매개자로 존재하는 경제적 구조와 거버넌스 체제와 더불어, 치밀한 매개물들과 흐름을 양 방향에서 탐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만약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남아 있다면, 공공 자산, 즉 공동성(the commons)에 대한 시장의 지속적인 침투가 일단 존속되면, 그들은 자본 축적과 이윤의 추구를 따르도록 강제될 것이다. 그리고 기본 물품들을 교환하기 위한 최저 생계 임금도 없이 살아 간다는 곤궁함이 계속된다. 여기에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경제 성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보다 많은 소비를 진작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영역들로 광고가 침투해 들어가는 것, 빚 청산 능력을 넘어서는 소비를 확장하는 신용의 이용, 환경을 가격이 매겨진 수많은 생태 서비스들로 간주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이로써 만약 물질적 흐름과 차단의 회계적 계산을 완성한다면, 신유물론자들에 의해 파악될 필요가 있는 거대하고 강력한 요인들이다. 자본주의 체계의 저변에 흐르는 논리는 가차없는 상품화와 공동성의 사유화에 기반한다. 즉 이 과정은 단순히 신유물론이 객체들의 출현과 복잡한 체계 안에서의 중첩에 대해 고려한다고 해서 무시될 수는 없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추상적인 모델들이나 분석들에 의존하기 보다, 어떤 갱신된 정치 경제학으로서 자본의 변덕스러운 움직임과 그것의 연합된 실체들을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거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추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라투르가 개별적인 기획과는 상관 없이 생명과 삶의 계기들을 틀짓는 행위 능력을 가진 행위자(2005)라고 부른 강력한 행위소(actant)로 남는다.  

      

거시-수준지리-체계생명-체계생태-체계

만약 내가 신유물론적 비평을 수용력이 큰 역사 유물론으로 부른다면, 그 이유는 이것이 경제학을 유일하거나 심지어 분석의 원리적 수준에서 취급하기 때문이 아니다. 신유물론은 다양한 거시-수준 현상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에, 마찬가지로 사회 구조, 특히 생산과 소비가 고려되는 그 지점에서 보다 넓은 지정학적, 기후적, 지리학적, 생태적 그리고 인구학적 체계와 분리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 거시 수준에는 보다 낮은 수준들이 그 안에 놓여 있으며, 거시-수준은 거기에 의존한다. 이것은 습하고 녹색 – 또는 건조하고 갈색 – 인 물체들이 놓여 있는 곳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곳은 인류세라고 생각되는 곳이기도 하고, 그것이 정보를 제공하는 세부적인 과학적 연구들이 놓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구들은 유용하며, 경제적, 인구학적 그리고 가사노동 체계들의 환경적 영향들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제공한다.      


결론

신유물론에 관한 나의 입론은 발생적 되기의 가장 희박한 영역들에서부터 신체적 욕구의 가장 내밀한 세부사항들까지 많은 근거들을 망라한다. 나는 신유물론이 21세기에 걸맞는 비판 사회이론을 떠맡을 만한 어떤 새로운 존재론적 상상, 즉 새로운 감각과 실천 지침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유물론적 전회는 물질 세계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그것의 생동하는 형태들에 접속하도록 하며, 우리가 조우하고, 촉발되며, 응답하고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중첩되는 다양한 방식들, 즉 물질에 대해 활발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주석]

[1] 나는 3년 간의 연구 프로젝트에 재원을 조달해 준 레버흄 재단(Leverhulme Trust)에게 감사한다. 이 논문은 이 재단의 후원 아래에서 준비되었다.

[2] 나는 「행위적 능력과 수용적 역사 유물론-정치학에서이 신유물론을 생각하기」(Agentic Capacities and Capacious  Historical Materialism: Thinking with  New Materialisms in the Political Sciences,  Millennium – Journal of International Studies vol. 41.3, 2013, pp. 451-469)에서 최근의 강의와 논문을 수립하고 확장했다. Diana  Coole and Samantha Frost, eds., The New Materialisms. Ontology,  Agency, and Politics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0)와 Bruce Braun and Sarah Whatmore,  eds., Political Matter. Technoscience, Democracy, and Public Lif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0)도 보라.    

[3] 예를 들어, 스웨덴 룬드 대학(Lund University)은 2012년 10월 동안  Matter Matters: the Social Sciences beyond the Linguistic Turn 이라는 제하에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그 다음 달에 런던 경제대학에서는 Materialism and World Politics라는 국제 컨퍼런스가 잇달았다. 브리스톨의 켄트 대학 지리학과와 정치학과에 위치한 ‘정치학과 물질’ 그룹과 같은 새로운 연구집단들도 이 주제로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그러는 동안 Materialism and New Materialism across the Disciplines와 같은 야심찬 장기 프로그램들이 텍사스 라이스 대학(Rice University) 인문학 연구센터에서 준비 중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지금 독자들이 읽고 있는 이 Power of Material/Politics of Materiality에 대한 강좌가 2012년과 13년에 뮈니히(Munich)에서 겨울학기 동안 개최될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신유물론에 대한 관심과 최근에 개방되고 있는 탐구의 영역이 폭넓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4] 여기서 나는 특히 프랑스 현상학자인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를 염두에 두고 있다. 특히 The Phenomenology of Perception(London: Routledge, 1962)과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8)을 보라. 

[5] 예컨대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London: Athlone Press, 1994), Jane Bennett “A Vitalist Stopover on the way to a New Materialism”, in: Coole,  Frost 2010 (footnote 2), pp. 47–69을 보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금속과 야금술은 물질에 걸맞는 생명, 물질의 생기적 상태를 드러낸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대개는 숨겨져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넌지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금술과 연금술의 관계는 모든 물질 안에 있는 신체성의 내재적 힘 안에, 그리고 그것에 수반하는 신체들의 영혼 위에 휴면상태로 있다.” 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London: Athlone Press, 1988), p. 411.

[6] Bruno Latour,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참조. 

[7] 이것은 내가 Millennium(2013)에서 수용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8] 예컨대  Journal of Political Ecologies, http://jpe.library.arizona.edu. Also Paul Robbins, Political Ecology: A Critical Introduction (Oxford: Blackwell, 2004)를 보라.

[9] Latour 2005 (footnote 6), Jane Bennett, Vibrant Matter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0) 참조.

[10] Diana Coole, Merleau-Ponty and Modern Politics after Posthumanism (Lanham MD: Rowman and Littlefield, 2007), Merleau-Ponty 1962 (footnote 4).  

[11] Latour 2005 (footnote 6), p. 72.

[12] Herbert Marcuse, An Essay on Liberation (Harmondsworth: Penguin, 1969), p. 39.

[13]  Karl Marx, The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of 1844, ed. Dirk Struik (NY: International Publishers, 1964).

[14]  Simone de Beauvoir, The Second Sex (Harmondsworth: Penguin, 1972) [orig. 1949], p. 471.

[15] Bennett 2010 (footnote 9), pp. 10, 14, 17, 111 참조.

[16] Latour 2005 (footnote 6), p. 53, 67 참조.

[17] 예컨대 Grundrisse, ed. Quintin Hoare (Harmondsworth: Penguin, 1973), pp. 100–101에서 정치경제학의 방법에 관한 맑스의 사유를 참조하라.  

[18]  Michel Foucault, “Nietzsche, Genealogy, History”, in: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Selected Essays by Michel Foucault, ed. Donald F. Bouchard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7), p.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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