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발리의 기상천외한 연애법
나는 발리에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노마드, 힙스터, 인플루엔서들이 득실득실 모여있는 짱구에 살고 있다. 1년이 다 되어 간다 벌써.
발리에 살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진다.
여기에는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통의 관계“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친구들에게 “남자친구가 생겼어”라고 말하면, 친구들의 첫 질문은 “is it exclusive (다른 사람은 안 만나고 서로만 만나는 거야?”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이 질문의 배경은 이렇다.
이곳 발리에서는 한 사람이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진득하게 만나는 관계가 잘 없다. 통상 우리말로 “사귄다”는 말이 없다. 애초에 사귀자고 몇 월 몇일부터 사귀는 거, 우리는 1일!이라고 얘기하는 문화 자체가 서양에는 없지만, 대다수의 서구 국가들 역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기에 거기에 걸맞게 관계가 진지해질 즈음에는 “남자친구, 여자친구, 파트너”라고 관계를 규정하며 “exclusive" 한 관계라고 서로 간에 약속을 한다.
즉, 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안 만나겠다는 약속이다.
이건 서양권에서 데이트할 때는 자주 묻는 질문이다. 처음에 데이팅 관계에서 스킨십도 하고 잘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둘이 우리나라 개념의 “사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전히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않더라도 굳이 규정하지 않으면 진지한 관계는 아니라는 얘기다.
데이트만 몇 달을 하다가 비로소 관계를 규정하고, "exclusive" 하게 보기로 하는 사람들도 있고, 관계는 규정하지 않되, 일단 ”exclusive" 한 거다 먼저 얘기할 때도 있다. 어쨌든 그냥 데이트보다는 진지해진 거고, "exclusive" 하다고 합의를 보면, 상대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화를 낼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발리는 조금 다르다. 발리에는 워낙에 한국적 개념의 “사귀는” 관계가 드물다. 워낙 관광객이 많아서도 있고, 여기 사는 사람도 항상 발리에만 사는 사람보다는 다른 나라를 자주 오가며, 여행하듯 사는 사람이 많기도 하다. 백인들이 많고, 유럽인, 러시아인, 호주인, 미국인 다 섞여서 문화적으로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대략의 ”보통의 관계” - 즉, 평균적으로 데이트는 이러하고 관계는 이러해야 해라는 관습적인 합의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양한 데이팅 방식이 생긴다.
최근에는 아는 친구네 커플이 새로운 여자친구를 들였다. 남자-여자 둘이 만나는 커플이었는데, 여자친구를 추가한 것이다.
남자가 여자친구 두 명을 사귀는 게 아니다. 남자가 여자 둘 다 만나고, 여자도 여자를 만나는 거다. 다 같이 셋이 데이팅 하는 거다. 그리고 이들은 이 사실을 트위터에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저희 셋,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어요!”
아니 그런 미친 친구가 있냐고 보통의 한국 사람들은 날 벌써 재단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발리는 예산 발리가 아니다. 발리는 대부분이 이 모양이다. 이들 모두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 멀쩡하게 사는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다. 비정상에 범주에 섣불리 끼워넣기에는, 여긴 “정상”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일례로, 아까 그 질문을 한 친구들은 가족끼리도 모두 아는 6년 차 장수 게이 커플인데, 오픈 릴레이션쉽(open relationship)을 하고 있다.
오픈 릴레이션쉽이 무엇이냐. 여러 명을 마음껏 만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혹자는 다자 연애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연을 들어보니, 둘이 처음에 만날 때는 진지하게 서로만 만나는 보통의 사귀는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난 지 일 년 차가 넘어갈 즈음, 한 명이 게이바에서 너무 멋진 남성을 봤고, 이를 두고 남자친구에게 “나, 쟤랑 자고 싶어”라고 얘기했다고.
남자친구는 생각해 본 뒤에, 둘 다 각자 끌리는 남성과 원나잇을 하는 건 서로 오케이 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다만, 잠자리를 가지기 전, 남자친구와 그 원나잇 파트너에게 알려야 한다고.
그렇게 감정적인 메인 유대는 지속한 채, 몸은 밖에서 따로 섞고, 때론 모두 다 같이 섞는 식으로 관계가 5년 더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 둘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업가 커플로, 아침 7시에 기상하여 같이 크로스핏을 가고 매달 나라를 바꿔 여행하는 사랑이 넘치는 파워커플이다.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엘리트 그 자체란 얘기다. 한국 사람의 눈으로 재단하자면, 이 사람들은 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비주류에 속하는 이상한 사람들일까?
발리에서는 이런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너무 많다. 그리고 애초에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자유를 찾아온 열린 마음의 사람들에게 기존 나라의 관습을 고집하는 건 이상한 일로 들리기도 한다.
여기서 지내면서 기존에는 생각하는 것만으로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것이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다양한 실험적인 사회적 관계와 개념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나는 충분히 내 마음대로, 손가락질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형태의 사랑을 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 나는 그렇다면, 원하는가? 다자연애를? 셋이 같이 하는 연애를? 아니면 동성 간의 연애를? 연애란 언제 성립되는 것인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설레는 감정을 느낄 때? 그럼 하루 동안 설렜다면, 나는 하루 동안 충실한 연애를 한 것일까?
규율이 없는 곳에서는 스스로의 혼란을 막기 위해 스스로 원칙과 규칙을 만들어 살게 된다. 혹자는 이를 취향이라고도 부른다. 나는 이런 게 좋고, 저런 건 싫더라. 스스로에게 완전히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수많은 형태의 관계를 보고 나니, 관계를 규정하고, 이건 맞고, 이건 틀리다고 하는 이야기가 참으로 지엽적이고, 좁은 생각인가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관계에 대한 집착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다 풀어놓고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게 된 것 같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묶으려 한들 묶이지 않는 사람이 있고, 풀어둬도 내 옆에서 진득이 나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그때 그때 오고 가는 사람들을 나는 막을 수도, 조정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때 이 시간 감정 순간에 충실하게 친절한 것뿐.
완전한 자유가 역설적으로 완전한 해탈로 이어졌고, 해탈이 온전한 자유를 줘서, 나는 누구보다 사랑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같다.
그래서 한국식으로 사귀라고 하면, 해볼 수도 있다. 내가 선택해서 그리하는 것이고, 나는 언제든지 다른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고, 나만의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완전히 관계에서 자유로워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