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 앓고 있는 이야기가 있나요
저는 불과 2년 전 가을, 죽음을 결심했었습니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무겁고, 버거워 다음날을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루 이틀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18살 때부터 우울증을 앓아온 오래된 환자였습니다.
하루하루 침대에 누워, 밤에 잠을 자려 눈을 감을 때면 눈을 꼭 감은 채 기도를 하고는 했었습니다. 내일은, 눈을 뜨지 않게 해 달라고. 신이 있다면, 나를 이곳에서 사라지게 해 달라고 빌곤 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학교 생활을 잘했을 리 없습니다. 잘했다면, 그건 아마도 반쯤 죽어가던 몸과 마음으로 해 본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이었겠지요. 저는 수업에서는 항상 잠을 자고 있었고, 운동 시간에는 양호실을 찾아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하이얀 천장만 바라보며 수도 없이 되새기고는 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모든 걸 사라지게 해달라고 말이에요.
20살이 되고, 연세대를 입학했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입학도 하기 전이었을 거예요. 연세대 합격 문구를 보고도 전혀 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처럼 거지같이 살아가야 하는 나날이 한없이 이어짐에 절망했지요. 제 인생에는 즐거운 것도, 행복이라는 것도, 희망이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게 뭔지 모르게 자랐거든요.
누군가는 무심하고 가혹한 제 부모님을 대신 탓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건 상당 부분, 당시 한없이 불행하기만 했던 제 인생을 정확히 진단한 이야기일 것 같아요. 10살 때부터 발을 들인 무자비한 무한 경쟁 속이었을지라도 만약 제가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면, 저는 제가 단지 부모님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바둥거리는 것을 마냥 기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항상 남을 이기도록 훈련받아왔어요. 저의 어머니도, 저의 아버지도, 언제나 남을 이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부간에조차 서로를 완벽히 이기지 못해 분을 못 이기고는 하셨으니까요. 할머니조차, 과자를 주시면서 언제나 제게 "남에게 맞는 것보단 때리는 것이 낫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집안의 모두가 1등인 그곳에서, 1등이 아닌 자는 그저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을 뿐이었어요. 이기는 것이 특별하지 않았고, 이기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이기는 삶 외에는, 그 무엇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우린 어릴 적부터 들어오잖아요. 공부 열심히 해라. 1등 해라. 성적이 좋아야 한다.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 남들보다 잘나야 하고, 공부도 더 잘하고, 운동도 더 잘하고, 그래서 돈도 더 잘 벌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야 한다고요.
그러나 가장 아이러니한 게 뭔지 아시나요? 남들의 부러움을 좇아 끝없이 자신을 내몬 그 사람들의 가슴속은 텅 비어, 부러움을 받을 줄만 알지 즐길 줄은 모른다는 것을요. 부러움이란 것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 한 번 받아보면 다시 잃고 싶지 않게 되나 봅니다. 그래서일까, 제 인생은 어릴 적 언제인가 올백을 맞았던 그 순간부터 꼬였던 것 같아요.
저는 원래가 말수가 없는 조용하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그저 한 문제도 시험에서 틀리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 만에 전교생이 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전교생, 아니 그리고는 전교생의 학부모와, 그들의 친인척까지도 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그리고 저를 키운 부모를 부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죠.
우스운 일입니다. 그깟 시험, 문제를 맞고 틀리고 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시험이, 우리 인생에 대해 얼마나 잘 안다고 사람들은 그 시험지 한 장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걸까요?
어쨌든 그 일이 일어난 후로 저는 제 주위의 모든 부러움과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시선이라는 것, 누군가의 기대와 질투 어린 부러움이라는 것은 소심했던 제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13살 때부터인가, 위장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툭하면 위장이 베베 꼬여, 소화를 시킬 수도 없었고 신경성 장염으로 화장실에 시도 때도 없이 다녀오고는 했어요. 168이라는 큰 키에, 48킬로가 나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저체중으로 저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켰습니다.
전교 1등을 하면 다음번에는 혹시 누군가에게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전교 3등을 하면 사람들이 내게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을까 매일 밤 불안했어요. 무엇보다, 한 번 '전교 1등 엄마'라는 타이틀을 맛본 저희 엄마가 미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전교 1등 엄마'에게는 마성의 권력이 주어졌거든요. 말 한마디에 모두가 주목했고, 말 한마디가 없어도 모두가 부러워했습니다. 저희 엄만 그걸 아주 좋아했어요.
그리고 그건 참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저희 엄만 제가 전교 1등을 계속하도록 만들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학원에 조금 늦거나, 학교에 조금 늦는 날이면 발로 내 얼굴을 밟으며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알아요,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아마 애초에 인성이 글러먹은 사람이었겠죠? 그렇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으로 매일을 살아가기 시작했어요. 모두의 시선이 제게 쏠려있었고, 그 시선은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속으로 질투했고, 선생님들은 자신의 실적관리를 위해 나를 이용했으며, 부모는 권력의 수단으로 나를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고, 그 엄청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날에는 비수와 같은 말과 함께 온갖 폭력이 날아들었습니다. 밖에서는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봉사활동하는 천사 같은 분이신데, 집에만 오면 15살짜리한 테 온갖 폭언과 함께 폭력을 쏟아부었지요. 단, 남들 안 볼 때에 한해서요.
그래서 저는 세상을 너무 빨리 알았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내 편인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저는 너무 일찍 배웠습니다. 제가 태어났던 날에 저희 할머니는 오지도 않았다고 해요. 딸을 낳았다고. 그리고 그런 저희 엄마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저를 저주했습니다.
전 부족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 밥을 굶거나 물질적으로 부족한 적은 없습니다만. 제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고, 눈엣가시라는 사실은 언제나 제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말이 그런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이 정말로 찌를 듯이 아팠습니다. 많이 아팠습니다. 그분이 어느 날 밤 제게 와서, 너를 낳은 것은 자신 평생의 후회라는 이야기를 토해내듯 먼 산을 바라보며 뱉어냈던 그날에는 더더욱 말이에요.
모르고 있던 사실은 아니었지만, 저도 사람이고, 누군가의 자식인지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인지 마음이 너무나 아프더군요. 아마도 그때부터였겠죠?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지나치게 애를 쓰고, 지쳐도 지쳤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끝없이 저를 채찍질하며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것은, 아마도 조금이라도 미움을 덜 받기 위한 저의 발버둥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미움을 덜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요.
그러니 제가 20살이 되어서야, 그때서야, 이 모든 아프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펑하고 터져버렸다고 하면,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처음 태어나서부터 언제나 느껴왔던 그 기시감을 그제야 알아차린 게 둔하다면 참 둔하고, 착하다면 착한 아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말해 저는 행복을 모르는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태어난 후 어릴 적 기억을 샅샅이 뒤져봐도,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엄마에게 진심으로 칭찬받았던 기억, 누군가가 아껴준다는 느낌, 나를 먼저 생각해주고, 나를 보며 나로 하여금 기뻐한다는 그런 감정이 제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억이 왜곡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것이라면 참 좋겠다고 때로 옛 생각이 날 때면 스스로 되뇌고는 했었어요. 남들은 다 멀쩡히 사는데, 나만 이렇게 산다고, 나만 이렇게 미움받으려고 태어났다고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거든요.
그 미움이 내가 못나서도, 잘나서도 아니고, 그저 그냥 우리 부모님이 부모 될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라 그렇다는 것을 먼 훗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20살이 되어 우울증이라는 것이 정말로 병이 되고, 나중에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의심했어요. 내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내가 뭔가를 잘못한 것이 아닐까 하면서 말이에요.
사실은 간단했어요. 나랑 좋은 인연이 아닌 사람들이 어쩌다 내 부모가 된 것이었어요. 남들에게 떠밀려 공부를 어쩌다 잘하게 된 사람끼리 만나, 어쩌다 결혼을 하고, 어쩌다 애가 생겨서 낳아버렸고, 그 애는 또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남들에게 떠밀려 공부를 하고, 어쩌다 성인이 되었습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공도 아닙니다. 저는 그냥 그런 사회환경 그리고 유전의 산물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행했어요. 강남에 사는 4인 가족인 우리는, 언제나 불안에 벌벌 떨며 세상이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며, 애정을 줄 줄 모르고, 행복을 느끼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3시간 자면 붙고, 4시간 자면 떨어진다 하니 공부를 했고, 예쁜 여자,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야 한다 해서 했고, 결혼하면 애를 낳아야 한다 해서 낳았고, 이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해서 돈을 열심히 벌었을 뿐이에요.
정리해보자면 그런 거였어요. 난 내가 이렇게 불행해진 데에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게 가장 크다고 생각해요. 목적지 없이 마냥 옆사람보다 앞서 나가려 무작정 달려가기만 하는 지금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쟁이라도 난 듯,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육아를 하고 일을 하며, 자신은 모른 채 자신을 새하얗게 불태우며 세상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한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 속한 모두는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 속에는 개인의 행복이 빠져있습니다.
자녀인 나와, 나를 낳은 부모는, 사회적으로 객관적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불행하며 눈동자는 텅 비어있습니다. 빈 마음을 혹자는 술로 채우고, 혹자는 남에게 기부를 하며 채웁니다. 그러나 그래도 마음이란 것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잠시 술이 그 빈 공간을 매우고, 남보다 잘났다는 우월의식과 안도감이 잠시 보이지 않게 공허함을 가릴 뿐이지요. 우리는 목적 없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공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약한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세상의 흐름에 '노우'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보다, 내 속을 파먹으며 나를 갉아먹기를 택한 그저 용기가 없는 순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랬어요. 저는 이해받지 못한 채 달려나기가 만 하다 망가졌어요. 그리고 저의 남은 다른 가족들은 아마도, 본인들이 망가져 있는 것인지도 평생 모를 채 살아갈 것입니다.
스스로를 세뇌하며 살겠죠. '모두가 이렇게 산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태국의 빈민촌에 가면, 그곳의 사람들은 만면에 웃음과 여유가 가득합니다. 스스로를 남들과 비교하며 불행에 빠트리지 않고, 그저 매일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날씨 좋은 날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것에, 맛있는 점심을 해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자신의 정원과 집과 가족을 돌봅니다. 월에 15만 원을 벌어도 부끄럼 없이, 나는 얼마 벌지 못한다고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경제적으로는 힘들지만, 그게 오늘의 행복과 직결되지 않아요. 그저 지구 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한 사람으로서 오늘을 즐기고, 오늘의 날씨가 따뜻하고 먹을 음식이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빈부격차는 그곳에도 존재합니다. 한국보다 훨씬 더 큰 격차가 그곳에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돈이 인생의 다가 아니란 것을 압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투잡, 쓰리잡을 뛰고 하루를 꽉 채워 일하지 않습니다. 한 달에 15만 원을 벌던, 30만 원을 벌던, 60만 원을 벌던 상관없이, 날씨가 안 좋으면 쉬고, 날씨가 좋으면 햇빛을 받으러 나가고는 합니다.
삶의 중심이 어느새부터인가, 한국에서는 많이 틀어져있다고 저는 느낍니다. 한국에서 나의 삶은 내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방향이 세워지고 내 주위 사람들은 그 방향으로 똑바로 내가 가고 있는지 감시하는 파수꾼처럼 잔소리쟁이가 됩니다. 물론 그들도 나의 삶을 버겁게 할 의도는 없었을 거예요. 다만 스스로도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통제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우리는 그렇게, 모두가 한 몸처럼,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가 서로를 통제하며, 스스로를 무한 경쟁의 굴레에 결박합니다. 자녀든, 부모든, 애인이든, 친구든, 우리는 내가 아끼는 사람이 모두가 아는 잘 되는 그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이 과정에서 수없는 우울증 환자가 발생하고, 자살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에요. MBTI만 해도 16가지나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바른 길은 한 가지거든요. 옷 입는 법도 한 가지, 말하는 법도 한 가지, 진로도 한 가지, 대학도 한 가지, 결혼 적령기도 한 가지, 모든 것에 대해 딱 정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 좁디좁은 정답인지도 당최 알 수 없는 한 가지 길에 맞추기 위해 5000만 명이 오늘도 달리고 있습니다. 그중에 이기는 사람은 몇 명일 까요? 피라미드 꼭대기에 당도하여, 모든 정답을 맞힌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요? 우리는 대체 왜 달리고 있을까요?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정말인지.
아, 이제야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생각이 나네요.
저는 노마드 인 서울이라는 작은 커뮤니티를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외로워 시작한 이 작은 모임은 이제 아직도 작기는 하지만 따뜻한 몇 백 명이 참여하는 커뮤니티가 되었지요. 이 중 제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해 본 사람은 어제 보니 100명 정도가 다 되어 가더군요.
시간이 날 때, 코로나가 허락할 때면 오프라인 모임을 하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너무나 다른 개성과 성격과 직업의 멋진 분들을 많이 뵙습니다. 닉네임 때문인지, 커뮤니티의 어떤 그 분위기 때문인지, 저의 이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모임에서 풀어놓고는 합니다.
많은 분들이, 사회적으로 정말 잘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속으로는 힘들어하는 분이 참 많다는 것을 모임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유학파, 대기업, 프리랜서, 스타트업, 거의 모든 업종의 분들이 오시는데요, 모든 분들이 똑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내 주변에 나밖에 없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풀어드리자면, "나 같이 한국의 정해진 정답에서 벗어나 자기 생각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직도 주변의 공감과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이상한 취급을 당한다. 그리고 그게 슬프고 외롭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딱 2년 전까지만 해도요.
한국인 모두가 선망하는 진로와 인생 경로를 한창 밟던 그 가을에 저는 달리는 버스에 치여 죽고 싶었던 적이 저도 있거든요. 그 누구도 진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음에 절망해서, 나의 성격에, 가치관에 오히려 의구심을 품고, 스스로를 포기할 뻔했던 적이 오랜 시간 있었거든요.
만약 그날 제가 정말로 버스에 달려들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저는 없었겠죠? 정말로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날이 있었기에, 소심했던 저는 한국 사회의 소위 말하는 '기득권'들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처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장도 마이너스에, 카드빛에 신용 불량까지 갈 뻔했던, 알코올 중독자에 공식적으로 우울증 환자였던 저는요, 2년이 지난 오늘, 월수입 1000만 원+을 찍었습니다.
대학도 자퇴하고, 부모님과의 연도 끊고, 땡전 한 푼 없이 집을 나온 지 1년 7개월 되는 날이네요.
큰돈을 벌었다는 것보다는, 이렇게 여러분, 정도를 걷지 않아도, 아니, 한 때 알코올 중독자였더라도, 오랜 우울증 환자였더라도, 가족한테 버림받았더라도, 그렇게 재기불능일만큼 망가진 것처럼 스스로가 느껴져도, 그래도 괜찮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아. 정말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 그 편이 정말로 더 행복하다고, 그래서 저는 오늘 정말로 행복하다고, 처음으로 내일을 맞는 것이 무섭지 않게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게 되었다고, 저의 소소한 근황을 말씀드리고 싶었네요.
처음으로 저의 불우한(?) 과거를 이야기해드렸는데요, 생각보다 주변에 잘 둘러보면 참 많습니다. 저의 불행은 특별하지 않고, 그러니 당신도 오늘 잠이 오지 않을 만큼 내일이 걱정되고 어제가 후회되고 스스로가 쓰레기 같아 인생을 끝내고 싶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혹시,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그냥 별 건 아니지만, 이야기해드리고 싶었어요.
용기를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이건 정말 아닌데, 주변 사람들이 다 맞다고 해서 혼자 마음고생을 오래 하고 계시다면. 아니면 정말 하고 싶은데, 모든 걸 잃을까 두려워 망설이고 계시다면. 아니면 오늘 당장 죽고 싶다면. 진짜로 한 번은 해보고 죽으라고요. 눈 꼭 감고 진짜 해보고 싶었던 거 하면 그거 알아요?
진짜 기적이 찾아와요. 제가 그때 썼던 글이 제 생애 첫 블로그 글이자 브런치 데뷔 글인, "연세대를 자퇴한 이유"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호기롭게 자퇴한 줄 아시지만, 아니요. 저는 이렇게 엉망이었어요. 두 손을 덜덜 떨면서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자기혐오에 빠져 생을 끝내고자 했던 그 순간, 해보고 싶었던 게 글이었어요. 작가가 되어보고 싶었어요. 커뮤니티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 번쯤은, 진짜 돈도 많이 벌어보고 싶었어요.
알코올 중독에 우울증에 공황 증세까지 있어 덜덜 떨던 손으로 삽시간에 써 내려간 첫 글이 이틀 만에 10만 뷰를 찍었고, 지금 하는 커뮤니티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는, 제 글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해피엔딩입니다.
죽고 싶으면 눈 꼭 감고, 진짜 하고 싶은 거 손 덜덜 떨면서 무서워도 한 번 해보세요.
그게 인생을 바꾸는 첫 발걸음이 되어줄 거예요. 확신합니다.
여러분의 길고 어두운 밤을 응원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