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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풋 Jan 23. 2024

나의 자연재해 역사의 서막, 동일본 대지진(3)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온다 - 메니에르

김언수 작가의 소설 <캐비닛>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불행은 결코 할부로 오지 않아.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오지'


일본에서의 평화롭던 나의 일상을 뒤흔든 동일본 대지진.

원전 폭발로 인한 전력 부족으로 실시된 계획정전으로 정전 시간이 되면 옆 동네로 피신하는 생활이 몇 주 동안 계속되었다. 내 집인데 집 안에 머무를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 조선시대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있었다면, 동일본대지진 당시에는 집을 집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주시길. 그래도 목숨을 잃거나 피난소 생활을 하지 않는 게 어딘가 하며 스산한 마음을 위로했다.


회사에서는 전력 절감에 동참하여 어두컴컴해지기 직전까지는 전기를 켜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직 쌀쌀하던 3월 초순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난방도 하지 않게 되었다. 원체 추위를 매우 많이 타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무실에서 쓰는 작은 휴대용 발난로를 켜고 업무를 보았는데 그 마저도 직원 중 누군가 전력 낭비라며 나 없는 곳에서 내 상사에게 불만을 표한 모양이었다. 나의 상사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추위를 많이 타서 힘들겠지만 요즘 상황이 이런데 주위의 눈이 있으니 발난로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모두 괜찮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음이 좁아지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디스토피아는 이런 모습일까?




대지진 직후 원전이 폭발하고 방사능 유출에 이르기까지 설상가상의 상황에 일본에 거주하는 많은 외국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 돌아갈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일본에서 죽을 때까지 거주할 마음으로 간 것이었고 직장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지진을 이유로 한국에 돌아가는 선택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본에 거주한 후 가족들과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화로 안부를 전할까 말까 했었는데 대지진 이후 통신 장애가 해결되고 나니 매일 같이 집에서 얼른 돌아오라며 전화가 왔다. 대충 얼버무리며 괜찮다고 했는데 나중엔 생전 통화해 본 적도 없는 큰아버지한테까지 전화가 와서 너희 엄마 너 때문에 다 죽어간다고 얼른 오라는 호통을 듣기까지 했다.


나는 하루하루 나에게 주어진 일을 소화해 내며 대지진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고도 평범한 삶을 이어갔다. 정전으로 옆 동네로 도망가야 할 상황이면 도망을 가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활자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마트에 식량과 생필품이 채워졌다는 소식이 들리면 서둘러 장을 보러 갔다. 어둡고 추운 회사에 각종 방한 용품을 챙겨가 일을 했고, 땅이 흔들리면 또 여진이구나 했다. 그때까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는 허세로 가득 찬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지진을 겪고 나니 비로소 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대지진은 분명 전 세계와 일본의 지진 역사에 그리고 내 인생에 굵직한 생채기를 남길 만큼 거대한 사건이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내가 내일 죽거나 세상이 끝나는건 아니었다. 대지진의 여파를 맞은 모두가 그저 묵묵히 각자의 사과나무를 돌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느끼지 못한 사이에 대지진 시절을 '생존'해 나가려는 일상들이 내 몸에는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했던 걸까. 비정상적인 생활이 일상화되어 가던 무렵의 어느 평범한 퇴근길, 자전거로 마트를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돌연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자전거를 타면 어지러워서 쓰러질 것 같아서 자전거를 끌고 집까지 오는데도 너무 어지러워서 메스꺼움을 느낄 정도였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지만 누우면 어지러움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에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으면 눈앞이 핑핑 돌아 게슴츠레 눈을 뜨고 숨만 겨우 쉬고 있다가 구토를 했다. 너무 어지러워서 공복인데도 몇 번이나 구토를 하고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동안 살면서 느꼈던 두통과는 차원이 다른, 몸을 가눌 수 없는 어지러움이었다.


사실 대지진 이후 몇 차례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양치를 하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회사에서 누가 날 불러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치 커다란 배에 탄 채로 파도에 흐름에 따라 너울거리는 듯한 이상한 어지러움이었다. 당시에는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대지진 이후 수십 차례 이어진 규모가 작은 (진도 1~2 정도의) 여진 탓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했었다. 미세하게 느끼고도 모른 척했던 탓일까, 이 간헐적인 어지러움은 그 퇴근길에 갑자기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폭발(?)해버렸다. 메니에르의 시작이었다.


이 어지러움은 한 번 시작되면 아주 미세한 각도로 고개를 돌리는 것도, 눈을 떴다 감는 것도, 앉거나 눕거나 걷는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종류의 녀석이었다. 어릴 때 했던 코끼리 코 하고 스무 바퀴 돌기 한 직후의 상태가 몇 시간 동안 지속되는 느낌이랄까. 메니에르가 시작되면 천천히 몸을 움직여 최대한 덜 어지러운 각도를 찾아내어 비스듬하게 어딘가에 기대어 어지러움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증상이 발생한 후 평균적으로 3~6시간 정도가 지나면 그 고통스럽던 시간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는 듯 멀쩡한 상태로 되돌아온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린 경우 며칠에 걸쳐 증세가 조금씩 악화되다가 절정에 다다른 후 천천히 식어가듯 낫지 않는가. 감기는 이렇듯 완만한 곡선으로 언덕을 그리는 형태로 진행되는 데에 반해 메니에르의 경우 'all or nothing'이다. 일단 증세가 시작되면 일상생활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절정의 고통이 몇 시간 동안 유지되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렇게 동일본 대지진 이후 시작된 메니에르는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한 해에 2~4차례 정도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딱히 전조 증상이 뚜렷하지 않지만 패턴을 분석해 보자면 극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나 잠을 많이 못 잤을 때 주로 생긴다. 나의 경우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도 소용이 없어 증상이 시작되면 앞서 말한 대로 덜 고통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가만히 증상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날 때부터 허약 체질에, 이제는 머리로 다 기억할 수가 없어 워드 파일에 표를 만들어 거쳐온 병명과 시기와 시술, 수술 관련 세부 사항들을 기록해 놓을 정도인데 그중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고통스러운 병을 꼽으라면 그건 단연 메니에르다.


앞으로의 삶에도 언젠가 찾아올 메니에르. 잘 어르고 달래며 살아보는 수밖에.


살면서 언젠가 이때처럼 불행이 일시불로 찾아오는 날들이 있을 테지만 그건 내 잘못도 아니고 나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이 이상할 일도 아니다(이걸 받아들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할부로 찾아오는 행복으로 일시불의 불행을 상쇄시키며 살아가는 수밖에! 껄껄.


최근의 내게 할부로 왔던 행복은 케냐에서 열기구를 타고 초원의 일출을 보았던 일이다. 역시 할부로 오는 행복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여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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