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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2개월 후 쿠바에 가는 사람(2)

어서 와, 수동식 엘리베이터는 처음이지?

by 리틀풋

세 번째 종양 제거 수술 2개월 후, 나는 쿠바로 떠났다. 내게 주는 가장 확실하고도 값진 선물은 역시 여행이지.


당시 인천 공항에서 토론토를 경유해 쿠바의 수도 아바나(Havana)에 도착하는 항공편이 나름 최단 시간이라 예약을 한 건데 이마저도 경유 시간을 포함해 17시간 정도 걸리는 비행이었다. 환승 시간도 2시간 남짓으로 그리 길지 않은 편이라 아바나까지의 대부분의 시간을 내리 좁은 이코노미석에 갇혀 있어야 하는 일정인데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내 체력으로 버틸 수 있을까 새삼 걱정이 되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세 번의 수술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나 쪼그라들게 하고 걱정쟁이로 만들어 버린다.


주위를 봐도 애초에 가지고 태어난 몸이 약하고 자주 아픈 사람치고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이런 경향을 보며 몸이 약해서 정신까지 약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기질적으로 예민한 사람이 잘 아픈 것일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그리고 나는 2년 동안 세 번의 수술을 겪으며 알게 되었다. 완벽히 전자가 맞다! 육체가 삐걱거리고 원치 않게 고통과 통증을 느끼는데 마음이 잔잔하고 무던하기는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건 해야지. 아니, 몸이 약할수록 더더욱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때그때 해야 한다. '언젠가' '다음에'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겨우 아바나 공항에 도착했다. 가뜩이나 쿠바는 인터넷 사용도 여의치 않다는데 유심도 없이 숙소까지 잘 찾아갈 수 있을지 비행기 착륙 전부터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아바나 공항에 도착하자 숙소에서 합류하기로 했던 H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숙소로 가지 않고 아바나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 H는 나보다 대여섯 시간 먼저 아바나에 도착했지만 나와 함께 가려고 그 긴 시간을 공항에서 기다려 준 것이다.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우리는 함께 택시를 잡아 타고 숙소로 향했다.


출발 전부터 아바나는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허름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숙소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였다면 폐건물로 착각할 만한, 지체 없이 개보수가 필요할 정도의 외관에 내부는 더욱 거칠고 낡은 모습이라 우리가 맞게 도착한 건가 싶기까지 했다. 심지어 숙소는 건물의 꼭대기 층인 9층에 위치했는데 늦은 시간인 탓인지 글쎄 건물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우리는 매우 당황했지만 하는 수 없이 나보다 언제나 여행에 짐을 간소하게 챙겨 오는 H가 먼저 계단으로 9층까지 올라가 보겠다고 했다. 참고로 나는 여행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엄청난 보부상인데 여행 때는 한층 더 심각한 보부상이 되는 편이다. 그래서 쿠바 여행 때도 가장 큰 (거의 이민용...) 캐리어를 가져갔는데 이걸 짊어지고 무너지면 어쩌나 싶은 낡고 좁은 계단을 올라 9층까지 가야 한다니 까마득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낑낑대며 그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 보았는데 당연하게도 예상했던 것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9층에 도착하겠지 하는 체념과 함께 2층 반 정도까지 올라갔을까. 위쪽에서 H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올라가 호스트 아저씨를 만난 모양이었다. 밤 시간엔 엘리베이터 작동을 중지하는 게 이 건물의 규칙인데 일시적으로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켜 줄 테니 아래에서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별로 못 올라간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땀범벅이 된 채 다시 아래로 내려가 겨우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웬걸, 이 엘리베이터 또한 추락 걱정을 거둘 수 없는 수준의 무려 '반(半) 수동식' 엘리베이터였다.

IMG_4818.JPG 숙소 건물 엘리베이터의 외관. 마치 실내에 있는 방 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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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직접 열어주셔야 들어 갈 수 있는 엘레베이터의 문 (오) 엘레베이터의 내부

외형을 보면 엘리베이터라기보다 마치 방 문처럼 벽에 손잡이가 달린 문이 덜렁 있는데, 문 자체가 여닫이 식이고 안에서 엘리베이터 담당 직원 할머니께서 열어주시면 비로소 탑승할 수 있다. 그리고 신기했던 건 우리처럼 숙소에 묵는 손님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지만 일반 이용객(?)들은 돈을 내고 타는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오른쪽 사진처럼 되어있는데, 할머니가 저 의자에 대부분 앉아 계시고 이용객들이 올 때마다 레버를 작동시켜서 원하는 층까지 운행하는 시스템이다.


건물 자체도 무너지면 어쩌나 싶은 외관인데 엘리베이터는 더더욱 불안한 모양새였다. 오죽하면 저 공간에 내내 앉아계시는 할머니가 걱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무려 9층에 묵고 있지 않은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층 수였다. 설마 우리가 탔을 때 무슨 일이 나겠어하는 마음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타고 다녔고 실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나라를 가든 갖춰진 환경은 천차만별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두 사람 사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이걸 잊지 않는다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함을 줄일 수 있다는 걸 여러 번의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우리 눈에는 한참 허술해 보여도 각자의 방식으로 잘 돌아가게끔 짜여있다.



인천에서 출발해서부터 이렇게 한 시름도 마음을 놓지 못한 채 겨우 당도한 우리의 숙소는 아바나의 명소, 말레꼰(Malecon)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꼭대기 층 숙소인 만큼 방과 루프탑이 바로 연결되어있었고 그곳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한밤중이라 당장 눈에 보이는 건 검게 넘실거릴 뿐인 바다였지만, 신기하게도 당장의 아바나까지의 여정과 그리고 수 차례의 수술로 지쳤던 몸과 마음을 보듬어 주는 듯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바다였다. 겉보기에 너무나도 허름한 아바나가 이런 보석을 품고 있었다니.


세 번째 수술 따윈 이미 머릿속에 없었다. 잘 왔다.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다.


IMG_4737.JPG 숙소에서 본 아바나의 일출
IMG_0171.JPG 말레꼰 해변의 해 질 녘. 해 질 무렵이면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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