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모순적인
대학생 때 친구와 방콕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한낮의 방콕 대로변 작은 펍 테라스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며 혼자 맥주를 들이켜는 외국인의 모습이었다. 앞만 보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굉장히 인상 깊게 봤으며 강렬하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때의 나는 짧은 일정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담으려 애쓰던 시기였다. 패키지여행과 다른 건 순전히 내가 자유롭게 나의 일정을 조율할 수 있냐의 차이였다. 그렇게 또 다음 행선지로 서둘러 가던 중 그 장면을 목격했다. 솔직히 나도 작은 펍에 앉아 저런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짧은 일정에 이미 계획한 것들을 포기하고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이 쉽지 않았다. 훗날 이곳을 다시 오면 해보자고 생각하며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다.
몇 년이 지나 방콕은 아니지만 나트랑에서 비교적 긴 시간을 머물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저녁 호텔 주변을 걷다 길가에 놓인 작은 테이블과 불편한 의자들 그리고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파는 작은 펍을 발견했다. 문득 대학생 때의 그 장면이 떠올랐고 비록 장소는 다르지만 그때 해보기로 했던걸 6년이 지나고 나서야 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 곳은 아니었지만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맥주를 한 모금 삼키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씨클로를 탄 여행객들이 웃음 짓는 얼굴, 밤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외국인들,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는 현지인들의 일상적 풍경.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도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서 사람 구경해 본 적은 없었던 거 같다. 술기운도 한몫했겠지만 새로운 여행의 묘미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바쁘게 여행할 때도 잠시라도 이런 시간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란 아쉬움이 묻어나기도 했었다. 그 이후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자주 이곳에 와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미쳐 하지 못한 다양한 대화를 했다.
나트랑에 온 지 2주가 되어가니 일상이 반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저녁이 되면 정말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보는 건 멀리까지 온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산책을 더 자주 했고 괜히 쇼핑몰도 한 번 더 들러보았다. 그러다 보니 하루를 술로 마무리하는 날이 잦아졌다. 나중에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새롭게 보는 도시의 야경을 안주 삼기도 하고 해변가의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보거나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듣기도 했다.
원래는 식비를 아끼려고 로컬 식당을 골라 다녔지만 매일 술을 마시다 보니 아낀 돈이 소용없어졌다. 참 모순적이다. 하지만 인생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고 어긋난 순간마다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받곤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좀 다르게 생각했다. 단순히 계획이 틀어진 것에 집중하기보단
언제 또 이곳을 와보겠어. 있을 때 즐기자!
단순하고 충동적일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단순함이 이번 여행의 즐거움이 되었다. 너무 빡빡하게 살기보다 때로는 생각이 흐르는 대로 살아보는 것. 2주가 지나자 나도 모르게 속도가 느려졌다. 물론 지갑은 얇아졌지만 말이다...
모순적인 술과 함께 나트랑 한 달 살기를 즐기고 있지만 벌써 2주가 지났다. 조금이라도 더 여유롭게 한 달을 보내기 위해 선택한 곳이지만 이대로 나머지 2주를 똑같이 보내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침대 위에서 노트북을 켰다. 조금 더 나트랑이란 도시를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본격적으로 시내를 벗어나 다양한 장소를 걸어보며 보고 느껴보기로 결심했다. 2주가 지난 것에 아쉬움과 후회하느니 기억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역시 나는 결국 걸어 다녀야 했다. 술기운에 달콤한 잠을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