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랏의 두 가지 매력
즉흥적으로 리조트 생활을 결정한 탓에 달랏 시내를 둘러볼 시간은 하루뿐이었다. 그래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행복한 경험을 했고, 달랏이라는 도시는 그리 크지 않아 외곽 숲까지 함께 본 것이 오히려 더 풍부한 체험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시내로 돌아오니 여전히 빗방울이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평소에도 시원한 편이지만 그날은 달랏에 온 이후로 가장 쌀쌀한 날씨라 옷을 갈아입으려고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랏에서 마지막으로 묵을 숙소에서 감사히 얼리 체크인을 해주셔서 일찍 짐을 풀고 잠깐 쉴 수 있었다. 나트랑에 있을 때는 생각나지 않았던 요리가 있었다. 바로 베트남식 바비큐. 더운 날 불판 앞에서 고기를 굽는 광경을 상상하면 지칠 것 같아 해산물 위주로 먹었는데 달랏의 선선한 공기와 숯불은 바비큐와 오히려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저녁을 바비큐로 정했다.
기분 좋은 선선함을 넘어 피부를 타고 흐르는 냉기를 녹여줄 숯불화로가 놓였다. 음식이 아직 없지만 벌써 군침이 돌았다. 이어서 나온 고기들은 마치 고춧가루에 버무려놓은 양념고기 비주얼이었지만 맛은 맵지 않고 담백하며 감칠맛이 돌았다.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한 번도 소주를 마시지 않았지만 이날은 어둑해진 달랏시내를 바라보며 소주를 들이켰다.
살짝 오른 취기와 달궈진 체온을 안고 다시 달랏의 야경 속을 거닐었다. 서두르지 않고 야시장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며 쇼핑도 하고 호기심이 가던 간식들을 하나씩 먹었다. 야시장을 벗어나 숙소까지는 걸어서 약 15분. 그랩대신 걷는 것을 택했다. 걷다 보면 양손 가득 기념품과 간식을 사서 숙소로 돌아가는 여행객들의 웃음 가득한 표정들을 볼 때가 많았다. 잠깐의 일상을 벗어나 휴식과 추억을 만들기 위해 왔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이었다. 지금의 나는 활짝 웃는 모습보단 은은한 미소에 가까웠다. 이미 이곳의 일상에서 여유를 배워가는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무리를 준비해야 한다는 아쉬움이 서서히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안 올 것만 같았던 여정의 마지막이 찾아오는 것에 대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아쉬움을 곱씹는 것은 남은 여정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내일을 기대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아침, 커튼 사이로 일렁이는 맑은 햇살에 눈을 떴다. 오늘 저녁에는 다시 나트랑으로 돌아가야 해서 캐리어를 정리하고 잠시 짐을 맡긴 뒤 밥을 먹으러 나갔다. 달랏 일일투어 당시 맛있게 먹었던 껌땀집에 다시 들어갔다. 당시에 먹었던 맛을 기대하고 먹었지만 점심시간이 아닌 터라 고기가 식어있어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다.
숲 속에서도 느꼈지만 흐린 날의 운치 있는 달랏의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고 달랏이란 도시와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맑은 날의 달랏은 마치 유럽 어느 소도시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날씨가 바뀔 때마다 다른 매력을 뿜어내는 보기 드문 도시였다. 짧은 여행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들을 한 달 살아보니 얻을 수 있었고 그 경험 자체가 값지게 느껴졌다.
골목 구석구석을 걸으며 달랏 사람들의 일상도 살짝 들여다보았다. 작은 실내 스포츠클럽에서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땀 흘리는 노동자들. 골목을 지나는 외국인이 낯선지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눈에 담고 빠져나왔다. 자칫 빠를 수 있으나 순간순간 마주친 풍경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에 괜찮았다.
달랏 중심에 작은 호수가 있었다. 물은. 탁했지만 달랏 사람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호수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영상을 만드는 젊은 베트남인들을 보며 달랏이 젊은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곳임을 다시 느꼈다. 달랏에 다시 온다면 가장 걷고 싶었던 곳이 호수였기에 천천히 걸으며 나트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릴 목적지로 향했다.
한 달 살기의 끝이 다가오자 한국으로 돌아간 뒤 어떻게 살지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진 않았지만 내년까지 해보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시도하자는 비교적 단순한 목표를 세웠다. 여기서 배운 가장 큰 변화는 조급함을 덜어낸 것. 그걸 토대로 완벽하게 생각하기보다 어설프더라도 먼저 실행해 보도록 마인드셋을 가지는 것. 긴 호흡으로 지켜보는 연습을 했다는 것이 한 달의 큰 수확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국으로 돌아가도 재밌는 미래가 그려지는 거 같아서 이곳의 마무리를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거 같았다. 이런 생각을 가진 것만 해도 한 달 살기는 굉장히 성공적이다.
한 달 가까이 붙어있어도 어찌나 대화할 게 많은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목적지인 달랏 꽃정원에 도착했다. 달랏은 커피뿐 아니라 원예산업이 발달해 꽃이 유명했다. 달랏 꽃정원입구부터 형형색색의 꽃들이 자리했고 그중 수국화가 특히 아름다웠다. 푸른색과 연분홍빛 수국화가 특히 아름다웠고 맑은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풍경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 바라보았다. 느린 여행은 놓쳤던 풍경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하고 여행 중 잠시 '멈춤'은 스쳐 지나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을 눈으로 담을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여행지라도 속도를 달리하면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랏 꽃정원은 규모가 꽤 커서 둘러보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둘러본 후 언덕 중간 벤치에 앉아 정원 전체를 바라보며 잠시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역시 우기시즌답게 금세 구름이 끼더니 비가 오기 직전이었다. 슬슬 나트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기에 비가 쏟아지기 전 서둘러 짐을 찾으러 숙소로 되돌아갔다.
약 4일간 달랏의 즉흥 여정을 달리는 밴 안 창밖을 바라보며 마무리했다. 이제 한 달 살기에서 마지막 일정만 남았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 사이에 내가 배우기 위한 '여유'가 조금씩 구체화된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이 때론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그 지루함마저 끝나간다는 사실이 오히려 서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쉬움을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한 지 고작 하루가 지났지만 나트랑으로 돌아가는 긴 이동시간 동안 자연스레 머릿속에 맴도는 것을 보니 이곳에서 한 달 동안 살아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된 거 같았다. 여태 여행 중 끝마무리가 좋지 못해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적도 있었다. 좋은 추억이 남도록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그날까지 끝을 잘 매듭짓길 다짐했다. 어두운 산길 너머로 점차 밝아오는 풍경 속에서 나트랑이 가까워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