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차게 보낸 첫 연차
11월 말에 입사했더니 올해 쓸 수 있는 연차가 두 개라고 했다. 스페인의 법적 연차는 총 23개인데, 일할 계산하면 하루 정도 쓸 수 있겠다 싶었다. 근데 두 개라고요? 감사합니다...
친구가 놀러 온 김에 하루는 크리스마스 전에 쓰기로 했다. 마드리드에 있을까 하다 세비야로 근교 여행을 가기로 한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친구는 토트넘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보겠다며 짧게 런던 여행을 간 참이었고,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이 마드리드보다 세비야가 훨씬 싸다고 했다. 그래? 세비야에서 만나 그럼.
금요일 아침, 마드리드에서 가장 큰 기차역인 아토차(Atocha) 역에 턱끝까지 숨이 찬 상태로 도착했다. 여유롭게 준비하다가 문득, 유럽의 기차역에선 짐 검사를 하니 최소 30분의 여유는 두는 게 좋다는 게 생각났다. 결국 기차에 오른 건 출발 시간을 3분 남기고였다.
지정 좌석에 갔더니 할아버지 한 분이 옆자리에까지 짐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봤다. 표를 보여주자 어깨를 으쓱하며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스페인어를 빨리 배워야겠다고. 양보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대꾸 한마디 못하고 밀려나는 건 싫다.
약 3시간 후, 세비야의 산타 주스타(Santa Justa) 역에 도착했다. 가방을 끌어안고 꾸벅꾸벅 졸면서 왔더니 몸은 뻐근하고 정신은 몽롱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온 곳이라 급할 게 없었다.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한 건 길가를 따라 즐비한 오렌지 나무들을 봤을 때다. 주먹보다 큰 오렌지들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가로수인 곳이라니, 낭만적인 걸! 심지어 가까이 가니 오렌지 껍질을 깔 때의 상큼한 향도 났다.
첫끼로는 훈제연어와 수란이 올라간 토스트를 먹었다. 카푸치노까지 여유롭게 마신 다음, 뭘 하고 싶은지 생각했다. 세비야는 8년 전 배낭여행에서 짧게 들렀는데, 그마저도 <꽃보다 할배>에 나온 소도시 '론다'와 묶어서 다녀오느라 기억이 거의 없다. 처음 온 거나 다름없는 이 도시를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둘러보기로 했다. 관광보다는 휴식이 목적인 근교여행이니까.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다음으로 큰 도시란다.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항구 도시이며, 도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Guadalquivir)' 강이 흐른다. 지도 없이 앞으로만 걸었더니 강을 만났다. 바람은 쌀쌀한데 햇빛은 찬란할 정도로 맑은 날이라 그냥 걷기만 해도 좋았다.
파리의 센 강에 퐁뇌프와 퐁데자르가 있듯, 런던의 템즈 강에 타워브리지와 밀레니엄 브리지가 있듯, 세비야의 과달키비르 강엔 '이사벨 2세' 다리가 있다. 19세기 중반, 당시 스페인을 통치하던 여왕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이 다리는 겉에서 보이는 특별함은 없었다. 군데군데 사랑의 말을 적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강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관광객들이 보이는 유럽의 여느 철제 다리. 야경이 멋지기로 유명하다는데, 날씨가 도와주니 낮에 내려다보는 강가의 풍경도 참 예뻤다. 아무 노래나 틀어놓고 강변을 따라 죽 걸었다. 그 풍경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저녁 식사는 런던에서 돌아온 친구와 함께했다. 손흥민을 보고 와야겠다며 충동적으로 런던행 티켓을 끊은 친구는 토트넘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직관했다. 토트넘이 4:3으로 승리했고, 마지막 골은 심지어 손흥민이 넣었다! 천운이 따른 것 같다며 친구는 잔뜩 신났고, 경기 전 펍에서 있었던 일부터 피날레를 장식한 손흥민의 골까지 분 단위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은 나 역시 못지않게 흥분 상태였다.
우리는 히터 아래의 테라스 자리에 앉아 이베리코 돼지 구이와 소꼬리찜을 먹었다. 여기에 달짝지근한 카바(Cava, 스페인의 대표 스파클링 와인)를 곁들였는데, 한 잔이 두세 잔이 되며 얼큰하게 취했다. 금요일 밤의 세비야는 환하고 떠들썩했다. 저마다의 이유로 모두가 술과 즐거움에 휘청거렸고, 우리도 그에 섞여 토요일을 맞이했다.
9시가 넘어서야 호텔에서 눈을 떴다. 피곤했지만 숙취는 심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다. 낡은 하숙방이 아닌 잘 정돈된 호텔에서 밤을 보냈으니까. 라디에이터도 잘 안 되는 마드리드의 내 방이 떠올라 살짝 울적해졌다가 아침 먹을 생각으로 극복했다. 추로스 먹고 힘내자!
세비야를 비롯한 안달루시아 지방의 추로스는 마드리드의 그것과 모양새도 식감도 다르다. 마드리드의 추로스는 가느다랗고 길쭉하다. 겉이 조금 울퉁불퉁하다. 세비야의 추로스는 훨씬 두껍고 매끈하다. 밀도가 낮아 생각보다 가볍다. 마드리드에서는 이렇게 생긴 걸 '뽀라스(porras)'라고 부르더라.
아침 7시부터 영업하는 동네 카페테리아에서 추로스와 핫초코 세트, 그리고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작은 가게인데 발 디딜 곳 없이 사람으로 북적였다. 방금 튀긴 추로스는 따끈하고 바삭했고, 녹진한 핫초코와 궁합이 좋았다. 양옆의 스페인 사람들은 혼자 추로스 한 접시를 다 비우던데, 우리는 둘이서도 조금 남겼다. 이 달고 느끼한 게 어쩌다 대표적인 해장 음식이 된 걸까?
오후엔 알카사르 궁전(Real Alcázar)에 갔다. 세비야의 대표 관광지 하면 빠지지 않는 이곳은 지금까지도 스페인 왕실에서 왕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슬람의 건축 양식이 곳곳에 드러나는 게 특징인데, 과감한 아치 형태의 건물 외관이나 다채로운 타일 문양과 색채를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건물만큼이나 정원도 개성 있었다. 나무들엔 오렌지와 레몬이 탐스럽게 열렸고, 잔디밭엔 오리와 공작새들이 돌아다녔다. 공작새 무리를 이렇게나 가까이 본 게 처음이라 한참을 따라다녔다. 그중 한 마리가 정원 벽에 사뿐히 올랐고, 사진 찍던 우리에게로 날아왔다. 꼬리가 무거워서 잘 못 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악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친구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공작새가 자기 머리에 앉는 줄 알았다는데, 괜찮냐고 묻는 와중에 그게 너무 웃겨서 한참을 정신 못 차렸다.
마지막 행선지는 플라멩코 박물관이었다. 8년 전에 가족여행으로 세비야를 왔던 친구는 플라멩코 공연 봤던 게 참 좋았다며 같이 가보자고 했다. 전날 예약했더니 늦은 시간대만 남아 있어 타파스에 맥주 한 잔씩 마시고 갔다. 공연장은 작았고, 우린 중앙 뒤쪽과 고민하다 사이드 맨 앞 좌석을 택했다.
한 시간 남짓의 공연은 환상적이었다. 춤, 노래, 기타 연주가 삼 박자를 이루는 플라멩코 공연은 열정 그 자체였다. 무대와의 거리가 가까워 댄서들이 치마를 펄럭일 때마다 바람이 느껴지고 비누 향이 났다. 댄서들은 기타 연주에 맞춰 발을 구르며 박자를 쪼개기도 늘이기도 했다. 가사 한 마디 못 알아들어도 열정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좋은 공연을 대하는 관객의 본분은 진심을 담은 호응이기에, 손바닥이 얼얼할 때까지 손뼉 치고 환호했다. 공연장을 나가는 길에 관객 한 분이 나에게 '스윗 오디언스'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는데 어찌나 뿌듯하던지!
친구도 나도 이전의 세비야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로는 '스페인 광장'을 꼽았다. 벽돌색 건물은 바로크와 고전주의 양식이 섞여 있다는데, 건축은 잘 몰라도 내뿜은 아우라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건물 앞으로 흐르는 물길, 곤돌라를 탄 관광객들, 그 모든 걸 환하게 비추는 햇빛.
반원형으로 생긴 광장 안쪽을 돌아보니 58개의 스페인 도시들을 타일로 표현한 벤치들이 줄지어 있었다. 알파벳 순이길래 몇 개 모르는 도시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라나다(Granada), 마드리드(Madrid), 말라가(Malaga), 세비야(Sevilla)까지. 같은 햇빛 아래서도 물과 타일은 다른 느낌으로 반짝였는데, 눈이 따가운데도 자꾸 번갈아 보게 됐다.
되는 데까지 해를 즐겨보자 싶어 늦은 점심도 테라스 좌석이 있는 식당에서 먹었다. 애피타이저로는 베이컨치즈롤, 메인으로는 소꼬리찜과 대구구이를 시켰다. 소꼬리찜은 첫날 먹은 게 더 맛있었지만, 부드럽고 가격도 저렴해 만족스러웠다. 지방이 많이 섞인 부위였는지 밤까지 느끼함에 고생했지만. 먹을 때 즐거웠으니 됐다!
여행의 마무리는 축구 경기 관람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와 세비야 FC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고, 티켓값이 비싸 직관은 못 하지만 아쉬운 대로 펍에서라도 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축구를 틀어놓은 펍이 많지 않았고, 개중에 호텔 근처의 작은 펍을 골랐다. 공간에 비해 TV 스크린이 엄청 컸고, 손님들은 모두 스크린을 향해 한 방향으로 앉아 있었다. 영업 생각이 없는지 직원들도 손님 틈에 섞여 축구 경기를 관람했다. 레알 마드리드가 4:2로 이겼고, 세비야 출신이 아닌 건지 화난 손님은 없었다. 아는 얼굴은 음바페뿐인데도 꽤나 재밌게 봤다. 직관... 도전해 봐?
돌아오는 기차는 한산했다. 순식간에 지나간 2박 3일은 타지 생활에 조금 지쳐있던 내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마드리드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을 거듭 마주하며 설레는 감정은 조금씩 깎여 나갔다. 이러다 나중에 여행의 즐거움도 잊어버리면 어쩌지,라는 생각도 했다. 완전 기우였다. 시작과 끝을 아는 여행에선 이번에도, 앞으로도 마음껏 설레고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마드리드 살이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힌트를 얻었다. 지구 반대편으로 온 김에, 평소보다 여행의 비율을 높여 살아보는 거다. 모르는 도시에 충동적으로 가보고, 파리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보고, 배낭 하나 둘러메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삶. 그럼 마드리드에서의 일상도 훨씬 풍성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