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 한 명이 더 합류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온 H와 독일 베를린에서 온 J. 이렇게 2024년의 끝과 2025년의 시작을 함께하기 위해 마드리드에 삼인방이 모였다.
월요일 아침부터 목이 칼칼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목감기에 걸렸다. 에너자이저인 H를 따라 퇴근 후엔 외식, 주말엔 근교여행을 감행했더니 제대로 방전됐다. 눈부터 이마까지 점차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퇴근만을 기다렸다. 아, 재택 할걸!
많은 유럽 국가가 그렇겠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전후로 긴 휴가를 떠난다. 수도인 마드리드엔 특히 많은 국적의 사람이 섞여 살기에, 가족을 만나러 고향에 가는 이들도 많다. 한 주 내내 사무실이 한적한 게 당연하다. 사람이 없는데 슬프게도 일은 그대로라,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남의 일까지 떠안게 됐다. 내가 선택한 직장인데 불평해서 무엇하리. 2주만 고생하자. 텅 빈 사무실을 헛기침과 코 훌쩍거림으로 채우며 어찌저찌 일을 했다. 교훈 - 내년 크리스마스 시즌엔 일찌감치 여길 뜨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퇴근하자마자 감기약을 종류별로 챙겨 먹었다. 한국에서 상비약을 잔뜩 챙겨 오길 잘했다. 오전에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한 J는 나 대신 H가 맞이했다. 좋은 호스트가 못 되어 정말 미안하다 J야...
약 기운에 한숨 자고 일어나니 이미 밖은 깜깜했다. 어차피 스페인에선 저녁 8시나 되어야 식사를 하니 시간은 넉넉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시내 한복판에서 만난 우리는 너무 조용한 길거리에 어리둥절했다. 평소라면 좁은 골목까지 시끌벅적하고 번쩍거리는데, 어찌 된 일인지 거리의 조명 장식만 조용히 깜빡였다. 문을 연 가게가 거의 없었고, 거리엔 양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사람이 적었다.
며칠 뒤에 동료에게 물어보니, 크리스마스이브는 주로 집에서 가족들과 단란하게 보낸단다. 우리의 설이나 추석처럼 가족적인 명절 분위기로 보내는 게 보통인 모양이다. 11월부터 도시 전체가 크리스마스 테마로 들떠 있었기에 그 생각은 못 했다. 이제 와서 홈 파티를 하기엔 공간도 음식도 없다.
그렇게 외국인 셋은 불 켜진 식당을 찾아 마드리드 길거리를 헤맸다. 열었다 하면 포장 전문인 케밥집이었다. 사장님은 다른 신을 모셔서 크리스마스에도 안 쉬고 영업을 하는 건가요,라고 속으로 질문했다. 구글맵엔 '영업 중'이라 표시된 곳도 다 닫혀 있었다. 30분 정도 방황하다 문 연 스페인 식당을 찾았다. 야외 테라스부터 지하까지, 못해도 100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식당이었다.
앉아서 식사할 곳을 찾았다는 기쁨에 우리는 음식을 잔뜩 시켰다. 애피타이저로는 부라타 치즈 샐러드, 메인으로는 소꼬리찜과 이베리코 돼지 구이. 타파스도 궁금하니까 크로켓과 올리브 추가요. 아, 이런 날 와인이 빠지면 안 되지. 화이트 까바도 한 병 주세요.
까바가 찰랑거리는 친구들의 날씬한 와인잔과 (감기약 때문에) 제로콜라를 따른 나의 뭉뚝한 얼음잔이 맞부딪쳤다. 친구들의 상기된 표정과 즐거운 재잘거림에 컨디션이 훅 좋아졌다. 역시 가까운 사이일수록 감정은 쉽게 옮는다. 음식의 맛은 그저 그랬고 서버들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지만, 그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낯설지만 그래서 설레는 이곳에서, 가장 익숙한 언어로 대화하며, 얼굴만 봐도 웃긴 우리가 함께하고 있단 그 사실이 중요했다.
동네 펍에서 소시지에 맥주 한 잔씩 더 하고 돌아오는 길, 하숙집에서 3분 거리인 '알무데나 대성당'에 환하게 불이 켜 있는 걸 봤다. 가까이서 보니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문도 활짝 열어두었다. 내부는 이미 꽉 차 있었다. 우리는 누구의 동선에도 방해가 되지 않게 뒤쪽에 서서 전야 미사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미사도 찬양도 의미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성당 안을 가득 채운 따뜻하고 거룩한 공기는 느낄 수 있었다. 24일 11시 59분에서 25일 0시로 넘어가는 순간, 친구들에게 메리크리스마스를 전하며 어떠한 소원도 빌지 않고 속으로 감사함을 되뇌었다.
크리스마스 아침, 힘겹게 눈을 떴다. 가습 마스크를 끼고 잤는데도 목이 타는 듯이 건조했다. 전날 늦게까지 놀았으니 당연한 거지만, 감기는 더 심해져 있었다. 친구들에겐 저녁에 합류하겠다고 말하고, 내내 잤다. 정신을 차렸을 땐 또 밤이었다.
기운을 차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친구들이 오기 전, 동료들에게 추천받은 곳이 있어 크리스마스 저녁으로 미리 예약해 둔 식당이었다. 팀 회식으로도 방문했던 'Lamucca인데, 지점마다 메뉴도 분위기도 다르다. 회식 때 방문한 곳은 멕시칸 퓨전 메뉴가 많았는데, 이번엔 스페인식 위주인 곳으로 골랐다.
소꼬리 리조또, 치킨 피자, 참치 세비체, 그리고 스테이크까지. 너무 많이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었다. 모든 메뉴가 깔끔하니 맛있었고, 잔뜩 흥이 오른 우린 초코 케이크와 하몽 토스트까지 추가로 주문했다. 본식을 다 먹고 나서 후식과 애피타이저를 주문하는 우리가 이상한지 서버는 주문을 거듭 확인했다. 맞다니까요, 계획 없이 먹고 싶은 걸 다 주문하니 그렇게 됐어요.
이브의 저녁 식사가 끊이지 않는 수다로 즐거웠다면, 크리스마스 당일엔 정말 만찬을 즐기는 기분이었다. 지난 5월, J와 바르셀로나 여행 중 푸드 투어를 한 적이 있다. 마지막 식당에서 참여자들은 큰 테이블에 다 같이 모여 앉았는데,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게 제일 행복한 순간이다'는 스코틀랜드 부부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마드리드에서 행복한 순간을 또 경험하는구나.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2차는 식당 바로 옆의 호텔 카페로 갔다. 와인 두 잔과 제로콜라 한 잔에 당근케이크를 시켰다. 큰 기대 없이 먹은 당근케이크는 엄청 촉촉하고 녹진했다. 인생 당근케이크를 여기서 만난다고? 갑자기? 이게 크리스마스 선물이지 뭐야. 푹신한 소파에 앉아 우리는 또 한참을 떠들었다. 친구들은 술기운에, 나는 약 기운에 몽롱해져 각자 할 말만 일방적으로 던지고 있었다. 다 같이 즐거웠으면 그만이다.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서버가 건넨 영수증이 이상했다. 항목에 음료만 있고 당근케이크와 뺑오쇼콜라가 없었다. 이렇게 편안하고 기분 좋게 크리스마스를 마무리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서버에게 영수증이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는데, 빵은 본인의 선물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라울(고마워서 이름까지 물어봤다...) 고마워요. 덕분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즐거운 크리스마스였어요.
이 글을 쓰는 지금, 우리 셋은 발렌시아에 와 있다. 연말을 여기서 보내기로 한 건 역시나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본 스페인 드라마 <발레리아(Valeria)>에 자주 나오는 도시인데, 마드리드에서 기차로 겨우 두 시간이었다.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라길래 궁금했는데, 크리스마스이브의 마드리드 거리만큼이나 썰렁했다. 주말이라 그런 건지, 연말이라 그런 건지, 며칠 지내보면 알게 되겠지. 걱정은 안 된다. 아무리 썰렁해도 우리는 이 도시의 재미를 찾게 될 테니. 없으면 만들면 되고!
숙소 근처의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크리스마스의 기억들을 써 내려가는데,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도 그립단 생각이 들어 신기했다. 혼자였다면 감기 기운에 골골대며 하숙방에서 조금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보냈겠지. 친구들이 와준 덕에 무리해서라도 밖에서 시간을 보냈고, 덕분에 스페인에서의 첫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장식했다.
Gracias chic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