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몸살만 아니었어도...
스페인에 오기 한참 전부터 유럽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은 어떨지 수없이 상상했다. 어디서 무얼 해야 가장 낭만적인 순간으로 기억될지 고민했다. 친구들이 마드리드에 온다고 했을 땐 정말 더없이 행복한 연말연초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12월 초까지만 해도 몰랐지, 2주 넘게 아파서 골골거리게 될 줄은.
미국에서 온 H와 마드리드 이곳저곳을 탐방하고 주말여행으로 세비야를 다녀왔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몸살기가 알싸하게 올라오길래 테라플루를 타 먹고 푹 자면 금세 회복될 줄 알았다. 이게 웬걸, 목이 찢어지는듯한 건조함과 눈부터 이마까지 뜨끈하게 느껴지는 열감에 새벽부터 잠이 깼다. 큰일이다, 나 제대로 감기 걸렸네.
크리스마스이브에 J가 독일에서 왔을 땐 목소리도 제대로 못 낼 정도라 H가 대신 호스트 역할을 해줬다. 그렇게 며칠간 회사와 집을 오가며 감기약을 달고 살았더니 조금 살만해지는 듯했다. 갈까 말까 고민하던 발렌시아로의 근교여행을 강행한 건 그래서다. 해안 도시이니 덜 건조하고 덜 추울 테고, 그럼 금방 낫지 않을까? (아니었다...)
전편에도 썼지만, 발렌시아에 가고 싶었던 건 H와 보기 시작한 스페인 드라마 <발레리아(Valeria)> 때문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이라곤 수영복 입고 해변에 누워 있는 게 전부였지만, 주인공의 고향이란 이유만으로 나는 발렌시아가 궁금했다. 그것 외에 발렌시아에 대해 우리 셋이 아는 건 빠에야와 오렌지가 유명하다는 것뿐이었다.
발렌시아의 첫인상은 사실 별로였다. 하늘은 연한 회백색인 데다 비도 조금씩 흩뿌리는 흐린 날씨였다. 그런데 살짝 가라앉았던 기분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좋아졌다. 셋이 함께 머물 공간이라니, 조리대도 화장실도 단독으로 쓸 수 있다니! 마드리드에선 J가 따로 호스텔에 묵고 있는 상황이라 발렌시아의 호텔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첫날 저녁으로는 고민 없이 빠에야를 먹었다. 빠에야를 2인분 시키는 대신 타파스를 4개나 주문했는데, 어느 하나 빠짐없이 다 맛있었다. 오징어와 새우가 간간이 씹히는 먹물빠에야는 중독적인 맛이었고, 오징어 튀김과 감바스는 부드럽고 탱실탱실했다. 우리는 해지는 바닷가에서 모든 음식을 남기지 않고 천천히 다 먹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소파베드를 펼쳐놓고 <오징어 게임 2>를 봤다. 시즌 1은 H와 논현동에서 자취할 때 밤새가며 다 봤는데, 호들갑 떨며 한화 한화 넘기던 기억이 너무 즐거워서 시즌 2도 같이 보자고 했었다. 3년 전에 웃으며 한 얘기를 이렇게 지키게 되네. 나이가 들수록 함께할 시간은 점점 줄텐데, 과거와 변함없이 하하호호할 수 있다는 게 새삼 감사했다.
<오징어 게임 2>는 생각보다 재밌었고 우리는 어김없이 밤을 꼴딱 새웠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자고 일어나니 몸 상태가 다시 안 좋아졌다. 문제는 H도 코를 훌쩍거리고 J도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졌다는 거다. 아무래도 나한테 옮은 것 같아 시무룩해졌는데, 친구들은 괜찮다며 이렇게 된 이상 발렌시아에서는 여유 있게 놀고 먹자고 했다.
그래서 정말 관광은 안 하고 잔뜩 늘어져 있었다. 낮엔 숙소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치즈케이크를 시켜놓고 일했다. 밤엔 식당에서 1차, 숙소에서 2차 한상 차려놓고 배부르게 먹었다. 다른 건 몰라도 빠에야와 오렌지 주스는 종류별로 실컷 먹었다. 중간에 감기약과 발렌시아에서 산 영양제들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숙소에서 시름시름 앓다가도 재밌는 걸 보거나 맛있는 게 있으면 반짝 살아나길 반복했다.
우리는 여기가 스페인 발렌시아인지, 가평에 있는 발렌시아 펜션인지 모르겠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숙소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도 매 순간이 즐거웠으니, 함께하는 여행은 역시 어디를 가냐 보다 누구와 가냐가 훨씬 중요하다.
2024년 12월 31일, 우리는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2024년의 끝과 2025년의 시작은 동네 펍에서 기념하게 됐다. 연식당을 찾기도 힘들고, 사람 많은 곳을 갈 에너지는 없었으니까. 북적이는 펍의 구석자리에서 우리는 맥주와 와인을 한 잔씩 홀짝였다.
같은 자리에 두 시간 넘게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11시 반부터는 더 이상 할 얘기도 없어서 펍 안의 직원들과 손님들을 관찰했다. 연령도 피부색도 쓰는 언어도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니, 그 안에 우리가 섞여 있다니 생경하다. 여행은 여기저기 다녔어도 나는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온 서울 토박이다. 당연해서 몰랐는데 비슷한 사람들 틈에 사는 건 엄청난 안정감을 주는 거다. 그 안정감을 포기하고 타지에 정착한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타지 생활한 지 한 달 반밖에 안 된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 또 다른 형태의 안정감을 느끼게 될지 궁금하다.
나보다 몇 주 먼저 독일에 간 J는 벌써 정착 생각을 하고 있다. 미국에 간지 1년 반 정도 된 H는 이제야 미국이 좀 익숙해졌단다. 30대가 되어서도 내 미래를 궁금해할 줄은 몰랐는데, 연말의 내가 벌써 궁금하다. 비자를 연장하게 될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거참, 새해부터 무슨 연말 얘기를 한담.
2024년이 10분 남았을 때 가게의 텔레비전 화면이 방송뉴스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는 솔 광장을 생중계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걸 보며 가게 직원들은 포도알을 하나씩 삼켰다. 동료가 알려준 건데, 스페인 사람들은 한해의 마지막 12초에 포도알 열두 알을 먹는다. 새해에 행운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100년도 훌쩍 넘은 전통이라고. 따라 할 걸 그랬지, 지금 와서 아쉽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종소리와 폭죽 터지는 소리가 텔레비전 안에서, 그리고 가게 밖에서 울려 퍼졌다. 계산하고 후다닥 밖으로 나오니 길거리는 환호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보이진 않지만 소리로는 솔 광장의 불꽃놀이가 아직 진행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펑,하는 소리에 놀라 위를 쳐다봤다. 어떻게 설치한 건지 누군가의 집 테라스에서 아래쪽으로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그에 놀라 나는 나동그라졌고 덕분에 새해부터 크게 멍들었다.
사람이 적은 길가로 와서야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새해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Feliz año nuev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