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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un 03. 2019

포트와인의 본고장에서 이론부터 실전까지

술알못이 포트와인과 가까워지는 과정

포르투갈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음식 중 근원지가 포르투인 것은 포트와인이 가장 대표적이다. 평소 와인뿐만 아니라 술 자체를 크게 즐기지 않는 나에게 '포트와인'이라는 단어는 정말 생소했다. 해외여행을 목전에 둔 사람답게 '포르투 특산품'이나 '포르투 기념품' 등을 습관적으로 검색하다 반드시 경험해봐야 할 음식 최상위권에 포트와인이 절대 빠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을지로에서의 날카로운 첫 만남


떠나기 1주 전 프주민들은 을지로의 어느 바(bar)에서 회동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의 혼술을 즐기는 P가 자주 찾는 곳이었다. 우리는 '포르투갈 여행 전야제'를 연 셈 치고 포트와인 한 병과 당시 최고의 '인싸' 음식이었던, 트러플 오일이 잔뜩 들어간 짜파게티를 안주로 주문했다. 한 손에 잡기엔 택도 없는 묵직한 검은 병 하나가 나왔다. 맨 윗줄엔 'KOPKE', 그 아래엔 'DRY WHITE PORTO'라 쓰여 있었다. 후에 우리는 포르투의 와이너리(winery, 와인을 만드는 양조장) 건물 중 하나에 'KOPKE'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걸 보고 반가워서 방방 뛰었더랬다.


처음 마셔보는 포트와인은 생각 이상으로 셌다. 향도, 맛도. '이거 화이트라며. 화이트가 레드보단 부드러운 와인 아니었나?'


"아니, 근데 향이 되게 좋네. 여러 번 마시니까 끝 맛도 별로 쓰지 않게 느껴지고."

술을 좋아하는 편인 P와 H는 금방 포트와인에 익숙해진 듯했다. '술알못'인 내겐 그냥 '두 배로 달고 쓴, 도수 높은 포도주'가 첫인상이었다. 결국 귀가할 때까지 나는 한 잔은커녕 반 잔도 비우지 못했다.




와이너리 투어로 차근차근 알아가기 


많은 유럽 국가들이 그렇듯 포르투갈 식당에서도 과반수의 손님이 반주를 즐긴다. 관찰 결과 맥주보다 와인이 우세하다. 뒤쳐질 수 없지. 매번은 아니더라도 고기 요리엔 레드, 생선 요리엔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하우스 와인은 가격도 탄산음료와 큰 차이가 없으니 도전할 맛이 났다. 식사가 거듭될수록 나는 반주의 즐거움을 조금씩 알아갔다. 음식이 짜든, 느끼하든, 달든 와인으로 균형을 맞추면 그럭저럭 참을 만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소맥 외길(feat. 막걸리)'을 걷던 내게 와인이라는 새로운 알코올 길이 열리나(두근).


별생각 없이 예약해둔 와이너리 투어를 가기 전날에서야 갑자기 기대가 됐다. 우리가 선택한 브랜드는 '페레이라(Ferreira)'였다. "포르투인이 운영하는 역사 깊은 와이너리를 찾는다면 이곳으로!"라는 한 외국인의 구글 리뷰에 현혹된 것이 선택의 이유였다. 



칼주름의 회색 슈트를 입고 포니테일로 머리를 단정히 묶은 가이드는 30분 간 포트와인의 유래, 제조 과정, 분류 방법 등을 설명하며 와이너리 곳곳으로 방문객들을 인도했다. 같은 조였던 중년의 영국인 관광객들에게 계속 시선이 갔다. 영국인이 설립한 와이너리도 많은데 '오리지널 포르투'를 강조하는 페레이라를 택한 이유도 궁금했고,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로 귀로는 설명을 들으며 눈으로는 와인 창고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피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투어의 마무리는 세 종류의 와인 시음과 함께였다. 배운 대로 블랑코, 토니, 루비가 한 잔씩 종이 깔개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잔을 얼굴 가까이 가져오자 강한 알코올 향과 과일향, 꿀 향, 나무향 등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냉장고 온도에서 차갑게 먹는 블랑코가 유일했다. 토니와 루비는 단 한 모금만으로도 식도를 뜨끈뜨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건 위스키나 고량주를 마실 때나 경험했던 기분인데. 입술만 축이다시피 홀짝거리다 결국 포기했다. 나의 루비와 토니는 P가 마무리했고, 그날 P는 숙소로 돌아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만 잤다. 




포르투 와인바에서의 색다른 경험


히베리아 광장에서 여유롭게 야경까지 본 어느 날 밤 우리는 'Prova'라는 근처 와인바를 방문했다. 오후 10시에 이곳은 만석이었다. 대부분 40대 이상의 현지인들이었다. 와인바를 집 앞 마트처럼 드나드는 듯한 손님들의 편안한 표정과 태도에 조금 위축된 나는 삐걱대며 바 안쪽으로 이동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연한 파란색 니트를 입은 곱슬머리 호스트는 무엇이든 친절히 대답해줄 것 같은 얼굴로 메뉴판을 건넸다. 그제야 윤활유를 바른 듯 긴장이 풀리고 동작이 자연스러워졌다. 



이왕이면 포트와인을 주문하자며 자신 있게 메뉴판을 펼치자마자 당황했다. 옵션이 너무 많았다. 이제 겨우 블랑코와 토니, 그리고 루비의 차이를 알게 된 우리에게 메뉴판은 너무 어려웠다. 막 줄넘기를 배운 아이가 하루아침에 쌩쌩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상냥한 호스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블랑코 한 잔과 토니 두 잔을 가져왔다. 안주로는 치즈 플래터를 추천해주길래 이미 예스맨이 된 우리는 "오케이, 오케이!"를 외쳤다. 



나이가 3년 반인 블랑코는 치즈 때문인지 눈 앞의 재즈 공연 때문인지 목 넘김이 수월했다. 삼키기 아쉬워 입에 잠시 머금고 있기까지 했다. 한 잔씩을 비우고 흥이 오른 프주민들은 일반 와인을 한 잔씩 더 마셨다. 포트와인을 먹고 난 뒤 맛보는 일반 와인은 산뜻한 포도주스 마냥 순하게 느껴졌다. 


"옆 테이블에서 시킨 술, 저거 뭐지."

큰 와인잔에 얼음과 민트 잎(으로 추정)을 띄운 투명한 음료가 여기저기 서빙됐다. 우리만 모르는 인기 음료였나. 지나가는 직원 한 분을 붙잡고 질문했다. 

"방금 만든 그 음료는 무엇인가요?"

"이건 포트토닉이에요. 포트와인과 토닉워터를 섞은 칵테일이죠."

"...!"

그냥 마시기엔 조금 센 술과 토닉워터의 조합은 원래 믿고 마시는 것 아니겠는가! 포트토닉 역시 배신하지 않았다. 얼음의 시원함과 탄산의 청량함이 포트와인과 만나 입안에 은은한 단맛과 쌉쌀함을 가득 채웠다. 


술알못 동족 여러분, 포트토닉 추천합니다. 포트와인의 풍부한 향과 맛이 100프로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내 돈 내고 술 먹는데 분수에 맞는 방법대로 즐기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밥보다 술을 더 먹은 현지인 집에서의 저녁식사 


숙소 근처 버거집에서 알게 된 현지인 미구엘이 본인 집에서의 저녁식사를 제안했다. 그의 집까지는 우버로 15분 정도의 거리였다. 뾰족한 지붕이 아닌 직육면체 주택들만 줄지어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참고글 :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건다


미구엘은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것도, 직접 요리하는 것도 거의 처음이라고 했다. 서툰 손길로 레토르트 식품 포장을 뜯은 다음 식기류를 찾느라 허둥지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정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샐러드와 빵, 오븐에 구운 라비올리, 야채 소시지를 차례로 먹었다. 


음식은 단출했지만 음료는 화려했다. 와인은 물론이고 위스키나 패키지가 화려한, 딱 봐도 멀리서 온 듯한 술들이 나무로 된 진열장에 정리되어 있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좀 어수선하다는 그의 집에서 가장 깔끔히 정리된 공간이었다. 그는 20분에 한 번씩 새 술병을 들고 나왔다. 개중에는 당연히 포트와인도 있었다. 앗, 잠깐. '당연히'가 맞을까? 


"포르투 사람이라면 누구나 집에 포트와인이 있나요?"

"음... 자주 마시지는 않더라도 한 병쯤은 집에 다 있는 것 같아요."


미구엘에 의하면 포르투 사람들도 일반 와인을 더 많이 마신다고 한다. 아무래도 강한 맛 때문에 포트와인을 일상적으로 먹기엔 현지인들도 무리인가 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 포트와인을 가지고 있다니, 아마 이 술이 가진 상징성 때문이겠지. 우리나라에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김치 한 통 없는 가정을 찾기는 어렵듯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냥 포르투 사람이니까 포트와인 한 병쯤은 집에 있는 거다. 그러다 멀리서 친구라도 오는 날엔 함께 따라 마시며 오늘의 만남을 기념하고, 또 다음을 기약하면 되는 거다. 


미구엘은 이 날 집에 있던 페레이라(!) 블랑코 포트와인을 우리를 위해 개봉했다. 그새 포트와인에 익숙해진 건지, 토닉워터에 섞어 먹어 그런지, 아니면 좋은 기분에 이미 취해 있어서 그런지 향과 맛이 와이너리 투어 때 시음했던 그 쓴 술과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미구엘이 자랑한 본인 집 창문에서 보는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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