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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Oct 02. 2019

백조와 빨간 트램이 익숙해지는 곳

프라하에서 느낀 이국적인 감성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의 기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왜 다른 나라에서 현관문 같은 작은 것에 유혹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일상에서 그냥 지나치던 것들도 여행지에서는 특별하게 느껴진다. 프라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파스텔톤으로 알록달록 칠해놓은 건물 외벽도, 축 늘어진 이파리를 잔뜩 달고서 바람에 몸을 맡긴 가로수들도, 영업을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두운 조명의 동네 슈퍼도 프라하의 분위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러한 감성이 사랑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빵에 버터를 바르는 방식’이나 ‘구두를 고르는 사소한 취향’을 보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듯이, 어떤 여행지가 좋아지는 것도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라하 도착 첫날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두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백조’와 ‘트램’이다.



백조가 (심지어 떼로) 왜 거기서 나와?


14시간 비행 끝에 프라하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을 위해 쏟아지는 잠을 애써 참으며 오후 3시에 좀비처럼 숙소를 나섰다.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걷다 보니 블타바강이 보였다. 소문처럼 경치가 근사했다. 경사진 언덕에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고 중간에 솟아 있는 첨탑들이 시선을 끌었다.


높은 곳에서 본 프라하 시내와 블타바강


기대했던 풍경이고, 정말 멋있는데 왠지 감동보다는 친근함을 느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세 달 전에 다녀온 포르투의 도루 강변에서 반대편을 바라본 모습과 닮아 있었다. 주황색 모자를 쓴 집들도, 초록빛 언덕도, 그 앞에 물결 모양 따라 부서지는 햇빛까지. 아이러니하게도 프라하의 강변에 서서 5월 포르투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키가 내 허리까지 오는 금발머리 소녀가 무언가를 향해 갑자기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 발견했다. 강물에 둥둥 떠있는 솜뭉치들을. 가까이서 보니 백조였다.

“백조가 이렇게 도시 한 복판에 있다고?”



햄버거와 핫도그를 파는 배 모양의 가게들 앞으로 유유히 백조 무리가 지나가는 모습은 너무나 생소했다. 비둘기도, 오리도, 갈매기도 아닌 백조가, 그것도 스무 마리나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는 게 신기했다.


새하얀 깃털이 푹신해보이는 몸은 고요했다. 가늘고 긴 목은 이따금씩 탁한 강물에 먹이를 찾아 들락날락했고, 방향키 역할을 하는지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물 아래에서 엔진 노릇을 하고 있을 발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고고하고 우아한 이미지의 백조가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라니.


기분이 좋아짐과 동시에 내가 있는 이곳이 서울도, 포르투도 아닌 새로운 도시 프라하라는 것이 실감났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우연히 만날 작은 즐거움들이 수놓을 프라하에서의 한 달이 궁금해졌다.


TMI. <패트와 매트>가 체코 애니메이션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걷기 마니아도 사랑한 빨간 트램


‘어떤 사람에게 프라하를 추천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겁많은 혼행족’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치안도 좋고 교통도 정말 편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프라하의 대중교통은 한 시간 이하의 거리라면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나까지도 헤비 유저로 만들었다.


여행 첫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 달 교통권을 구매했다. 30일 간 버스, 지하철, 트램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패스였다. 가격은 670코루나, 한화로 3만 3000원 정도다. 이용 방법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간단하다. 소지하기만 하면 된다. 표 검사는 랜덤인데, 머무는 동안 딱 한 번 경험했다.


유효 기간이 10월 9일까지인 30일 교통패스


교통권을 개시한 건 백조 구경 후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까지 발바닥이 따끔거리도록 걸어다닌 후였다. 구글맵을 켜 숙소까지 가는 길을 찾아보니 걸어서 40분, 트램 타고 20분이었다. 이미 체력이 바닥난 상태라 트램을 이용하기로 했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의 정류장은 퇴근한 직장인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만원(滿員)열차는 만(萬)원을 내고서라도 피하고 싶은 몸 상태였다. 탁한 종소리와 함께 도착한 빨간색 트램에는 걱정과 달리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내부는 밝고 깔끔했다. 유모차를 끌고 탄 중년의 여성, 무릎 위에 검정색 서류 가방을 올려둔 채 졸고 있는 남성, 빵 봉투를 안고 서 있는 젊은 여성 등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하루를 보냈을 이 곳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서울에서부터 계속된 무박이일 동안의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 통유리창 너머의 프라하 시내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기 시작한 도시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서울보다 사람도, 차도 적은 곳. 그래서인지 관광지만 벗어나면 차분하고 조용한 곳.


그렇게 나는 프라하에 마음을 열었다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행 1일차에 백조와 트램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둘은 공통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여유와 평화가 느껴졌다.


백조를 바라보기만 했는데, 트램에 앉아 가만히 바깥을 구경하기만 했는데 나에게도 그 평온함이 옮아오는 듯했다. 나만의 이국적인 대상을 찾는 것, 이를 통해 나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것은 여행의 수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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