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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Nov 20. 2019

지구 반대편에서 아픈 나를 돌보는 법

장기 여행자의 데스티니

프라하 여행 16일차. 새벽 4시에 눈을 뜨며 생각했다. 망했다고. 침을 한 번 삼킬 때마다 거칠거칠한 테니스공을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아픔을 느꼈다. 


심한 감기 몸살의 프롤로그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발을 질질 끌어 부엌으로 나왔다. 목덜미에 누군가가 찬 숨을 불어대는 것처럼 목부터 등까지 소름이 돋았다. 패딩 조끼를 주워 입고 싱크대 앞에 멍하니 섰다. 얼씨구, 콧물까지 주르륵. 



따끔따끔한 목이 신경 쓰여 차 한잔을 진하게 우려 마셨다. 따뜻한 국물 요리가 절실했다. 식재료고 조리 도구고 여의치 않으니 라면을 끓여 먹었다. 매운 맛에 극도로 약한 방어력은 감기 바이러스로 인해 더욱 허접해졌다. 라면 한 입에 훌쩍임 한 번. 사레까지 들려 콜록콜록까지. 


나름 건강하게 먹어보겠다고 냉장고에 있던 숙주와 달걀도 넣었다


새벽 4시 반에 잠옷 위에 패딩 조끼를 입고 얼굴엔 잔뜩 열이 오른 채 기침을 참으며 라면을 꾸역꾸역 먹고 있는 모습이라니. 흔하디 흔한 감기 앞에 웬 청승이람. 잡생각을 지우려 젓가락질을 서둘렀다. 


하필이면 상비약도 소화제, 지사제, 진통제뿐이었다. 종합감기약도 챙겨가라는 엄마의 조언을 왜 듣지 않았을까. 아쉬운 대로 물을 팔팔 끓여 다시 차를 우렸다. 이불 속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200만원이 넘는 비용과 그 못지않게 소중한 3주의 시간을 들여 지구 반대편까지 온 여행자이기 때문이다.  


뭔가를 계획해서 부지런히 돌아다닐 힘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하루를 흘려보내기엔 여행자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쇠같은 팔다리를 움직여 겨우 씻고, 옷을 꿰어 입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목적 없이, 지도도 없이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프라하를 돌아보겠다고 생각하며. 



하나,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


우리가 묵은 에어비앤비 옆에는 작은 카페가 있었다. 이름은 'Sólista'. '독주자'라는 뜻인데, 이름과 달리 커피의 맛은 특별하지 않았다. 두유라떼는 샷을 반만 섞은 것처럼 커피 맛이 희미했다. 문 앞에 있는 민트색 벤치에 앉아 카페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15분쯤 지나 한 손엔 방방 뛰는 아이의 손을, 다른 손엔 김이 나는 커피를 쥔 중년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벤치에 앉고 싶어하는 눈치라 얼른 비켰다. 




둘, 동네 공원 한 바퀴


관광지 근처가 아닌 프라하는 차분하다. 아침 8시에는 더욱. 내가 머문 7구역도 그랬다. 들뜬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관광객 무리 대신 출근하는 직장인과 등교하는 대학생을 자주 마주하는 곳이었다. 그들보다 한참 느린 걸음으로 마트, 제과점, 드럭스토어를 지났다. 


나무와 잔디로 가득한 광장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나중에 구글맵으로 찾아보니 '레트나 공원(Letna Park)' 입구였다. 한 바퀴만 가볍게 돌아볼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큰 공원이었다. 


3주간 프라하에 머물며 크고 작은 공원들을 봤다. 재밌는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벤치가 정말 많다는 것이다. 산책로는 물론이고 아무도 앉고 싶어할 것 같지 않은 급경사 돌길에도 벤치가 촘촘히 설치되어 있다. 사람보다 비둘기가 많아 보이는 곳에 이렇게 많은 벤치가 있다니. 프라하는 배려의 도시구나!



레트나 공원만의 매력을 발견한 건 오르막길 끝에서였다. 블타바 강과 프라하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뷰가 날 맞이했다. 



고요했다. 눈에 보이는 풍경도, 새와 바람 소리만 들리는 것 같은 공원도. 그리고 안 좋은 몸상태에서 비롯된 우울감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은 내 마음도. 



셋, 함께 먹고 마시기


마스크에, 스카프에, 패딩 조끼까지 완전 무장하고 외출했는데 강바람 좀 쐬었다고 오한이 났다. 급히 숙소로 돌아왔다. 식탁에 잠깐 엎드려 있는데 눈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10분 후에는 한쪽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부어버렸다. 다래끼 같은 모양새인데, 이렇게 초스피드로 나는 다래끼도 있나? 당황스러움에 30분간 아무것도 못하고 거울만 들여다봤다. 별 건 아니었는지 다행히 붓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기분이 다시 엉망이 됐다. 바닥을 친 면역력을 체감하고 나니 여행자의 본분이고 나발이고 오직 침대에 누워 있는 일만이 가치 있게 느껴졌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부엌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시내 쇼핑을 마치고 귀가한 P였다. 거실로 나가보니 P의 에코백 옆에 쇼핑백 하나, 큰 페트병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음료수인가요?"

"부르착이요! 오는 길에 사옴."

"헐."


부르착(Burčák)은 체코에서 맛볼 수 있는 반쯤 숙성된 와인이다. 9월과 10월에만 구할 수 있어 가을의 프라하를 여행하는 이들의 필수 위시리스트(wish-list)다. 



P는 화이트 한 병, 레드 한 병을 사왔다. 유리가 아닌 페트병에 담긴 부르착은 와인보다 막걸리에 가까워 보였다. 약간의 바닥 침전물 때문에 더 그랬다. 맛은 묵직하고 달큼했다. 쓴맛이 거의 없어 주스처럼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었다. 그래도 술은 술인지 세 잔부터는 기분이 붕 뜨고 약간 어지러웠다. 


시내에서 작은 편집샵과 카페를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다는 P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부르착을 홀짝거리던 이 날 저녁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꼬박 3일을 더 감기의 노예로 보냈다. 귀국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도 목소리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P와는 내내 필담을 나눴다. 짜증내지 않고 답답한 나를 견뎌준 P에게 고마웠다. 혼행을 사랑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아플 때는 역시 혼자보단 둘이다. 


덧붙임.

인천공항에서 짐을 찾고 P와 헤어졌다. 공항리무진 버스를 타러 가는데 갑자기 캐리어의 손잡이가 부서졌다. 화룡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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