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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an 09. 2020

프라하는 과연 로맨틱한 도시일까

이 도시의 어두운 이야기들

프라하에 가는 것이 결정되고 걱정이 있었다. 그곳은 내게 어쩐지 낭만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하에 다녀온 친구들이 보여주었던 사진들, 이를테면 해지고 난 후 까렐교에서 보이는 오래된 도시의 불빛들, 고즈넉한 분위기를 간직한 성 비투스 대성당, 반짝거리며 유유히 흐르는 블타바강의 풍경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여행자를 다양한 부류로 나눠본다면, 나는 따뜻하고 로맨틱한 공간들에 벅찬 감동을 느끼는 카테고리에는 속하지 못한다. 내가 여행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들은 도시 외곽 지역에서 방금 태어난 콘크리트 덩어리들 사이를 산책할 때, 괴짜 건축가가 제멋대로 만든 난해한 건물을 우연히 발견할 때, 탁 트인 대학교 학생 식당에서 3유로짜리 식사를 할 때다. 



그러니까 프라하에 도착한 첫날 구시가 광장을 산책하고 까렐교를 건너고 프라하성을 관광하는 동안 아주 적은 감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3~40명을 대동한 패키지팀이 매분마다 행진하며 몸을 부딪히고, 대마초 관련 상품과 압생트를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에드 시런 음악이 나오는 유람선이 네온 불빛을 쏘며 블타바강을 가로지르는 것까지는 상관없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점들이 프라하의 ‘낭만’을 방해한다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나는 애초에 프라하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오는 그 모든 단점을 상쇄시켜줄 ‘낭만적인 풍경’에 눈이 가지 않았다.



프라하에 대해서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말할 때 꼭 빠지지 않는 로맨틱하다는 수식, 거기서 조금 비껴가서 이 도시를 찬찬히 살펴보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는 프라하에서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도시를 탐색하기 위한 열흘 정도의 시간이 정신없이 흐른 뒤, 드디어 도심을 조금씩 벗어나 낭만이라는 필터가 벗겨진 프라하의 민낯을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이 도시의 어두운 이야기들


까렐교 위 얀 네포무츠키 성인의 동상


까렐교를 건너다보면 사람들이 유독 줄을 서서 소원을 비는 한 동상을 지나치게 된다. 얀 네포무츠키 신부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동상을 쓰다듬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다. 잔잔한 강물에 비친 도시의 빛, 멀리 보이는 고즈넉한 프라하성과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동상까지…. 이 정도면 도시 낭만 패키지 아닌가?


하지만 이 인기 많은 동상에 얽힌 이야기는 그렇게 달콤하지 않다. 얀 네포무츠키는 비투스 성당의 성직자로, 왕비의 고해성사를 폭로하라는 바츨라프 4세의 협박에도 끝까지 비밀을 지키다가 화가 난 왕에 의해 바로 이 까렐교에서 블타바강 아래로 던져졌다. 동상의 머리 주변을 다섯 개의 별이 둘러싸고 있는 이유는 그의 시신이 얼마 후 다섯 개의 별과 함께 블타바강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까렐교를 건너 구시가지 광장으로 왔다면 꼴레뇨 굽는 자욱한 연기를 따라가 보자. 구시청사 앞 바닥에 흰 십자가 스물 일곱 개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1621’이라는 연도도 함께 표기되어 있는데, 27명의 개신교인이 가톨릭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저항하다 처형당한 날짜다. 매 정시마다 시계탑에서 펼쳐지는 인형극을 보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순교자들의 피를 기억하는 바닥을 밟고 있는 셈이다. 


프라하성 황금소로에 있는 카프카의 집


그 다음 이야기는 프라하성의 황금소로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란츠 카프카가 2년을 지냈던 집이 있어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는 황금소로의 구석에는 숨겨진 지하감옥이 있고, 이 지하감옥의 첫 투옥자는 명망 있는 영주 달리보르였다. 포악한 영주로부터 고통받고 있던 많은 농노들을 구해낸 달리보르는 결국 남의 재산을 탈취한 죄로 프라하성의 지하감옥에서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성 비투스 대성당


강물에 던져진 성직자와 참수된 스물일곱 명의 귀족, 농노를 위해 지하감옥에 투옥되고 죽음에 이른 영주까지. 프라하의 낭만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잔혹하거나 정의롭거나 성스러우며 영감을 주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적 있는 오래된 도시인만큼 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땅 여기저기에 배어 있는 것이다. 



 발걸음 닿는 장소들에 담긴 제각각의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해질녘 유유한 블타바강에 반사된 프라하성은 평온하고 낭만적으로만 보이지만, 종교전쟁부터 프라하의 봄까지 이 땅은 격정적이지 않은 때가 없었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기에 이곳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가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낭만이 도사리기 쉬운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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