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흥이 많은 편이었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발을 구르다가 이내 어깨를 들썩거렸다. 춤을 추고 싶었다. 흥에 취기가 더해지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춤판을 벌였다. 배운 춤이라고는 유치원 시절 배운 율동밖에 없었기에 그것은 하나의 몸부림에 가까웠다. “야! 좀 가만히 있어” 부끄러움은 언제나 친구들의 몫이었다.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재수 시절도 함께 보냈던 막역한 친구였다. 우리는 홍대 앞에서 만나 수험생 시절을 안주 삼아 소주를 나누어 마셨다. 한 병, 두 병, 빈 술병이 늘어나자 어김없이 어깨가 들썩거린다. 나의 정체불명의 몸부림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친구가 말했다. “야 너 클럽 가볼래?”
클럽이라니. 클럽이란 자고로 도시의 ‘핵인싸’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던가.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제 막 지하철 타는 법에 익숙해져 가던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허락된 춤판이라고는 원룸 자취방과 학교 앞 허름한 노래방이 전부였다. 친구는 살짝 우쭐대는 표정으로 “걱정하지마 내가 전에 가본 곳이 있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사실 자기도 아직은 맨정신으로는 어렵다며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 연거푸 마셨다.
우리는 남은 술병을 비우고 그곳으로 향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음악 소리와 형형색색의 조명, 그리고 사람들의 몸부림이 있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날 이후 나는 소위 ‘춤바람’이 났다.
춤바람이 나자 조금의 수치심마저 사라졌다. 술기운이 없는 상태에서도 춤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클럽에서 유행하던 춤을 연습한답시고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깡충깡충 스텝을 밟아댔다. 하루는 동아리방에서 춤사위를 뽐내다 선배들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나는 바둑 동아리 부원이었다. 혼날만했다.
나의 춤바람은 군 생활 동안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나는 카투사로 입대하여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주말이면 춤판을 벌이며 전우들로부터 천조국의 몸부림을 배웠다. 나는 춤바람에 미국병까지 더해져 LA 한인타운에서 마주칠 법한 교포 3세 흉내를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휴가를 나가 친구들을 만날 때면 늘 스냅백을 뒤로 쓰고 ‘오우 쉬에엣~’, ‘요~브뤄~’ 등 영어 추임새들을 남발했다. 이것이 미국춤이라면서 어깨와 골반을 좌우로 튕기는 괴이한 몸부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친구들의 부끄러움과 웃음은 나에 대한 걱정과 한숨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춤바람은 취업 준비를 시작한 이후로 조금씩 사라져 갔다. 어렵사리 취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눈치와 수치가 많아진 탓일까. 이제는 언제 마지막으로 춤을 추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신나는 음악을 들어도 술을 마셔도 나의 어깨는 고요하다. 가끔은 그립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추던 그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