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릴 적 첫 꿈은 프로 바둑기사였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직업 군인 시절 부대에서 사용하셨던 커다란 은행나무 바둑판이 있었다. 아버지는 종종 나에게 바둑 두는 법을 알려주셨는데 돌이켜보면 바둑이 취미는 아니셨지만 어린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바둑을 두셨던 것 같다. 반대로 나는 그런 아버지 덕에 바둑이라는 놀이에 푹 빠져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내가 바둑에 재미를 붙이자 부모님은 내 손을 잡고 그 당시 동네에 유일했던 바둑 학원에 가셨다. 나는 그 바둑 학원을 계기로 본격적인 바둑 공부를 하게 되었다.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당시에도 만화, 오락, 장난감 등 재미난 것들이 참 많았지만 난 바둑을 둘 때가 가장 즐거웠다. 몇 날 며칠 동안 고민했던 사활문제를 풀었거나 늘 내가 지기만 했던 친구와의 바둑에서 가까스로 이겼을 때면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러한 성취감 때문에 바둑에 빠졌던 것 같다.
출처 : 드라마 미생
한국기원 연구생으로도 선발되어 본격적인 바둑의 길을 걷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나의 기재가 부족한 탓도 있었겠지만 바둑판에 앉아 혼자 바둑책을 보기보다는 PC방이나 운동장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더 재미있는 나이였다. 지금은 성인이 되어서 입단하는 사례가 많지만, 당시에는 중학교 졸업 이전에 프로가 될 가능성이 적은 경우 연구생 생활을 그만두는 분위기였다. 실력이 늘지 않고 흥미도 잃어가자 중학교에 진학함과 동시에 연구생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고, 바둑도 나에게 멀어져 갔다.
바둑을 다시 만나게 된 건 대학교 신입생 때 우연히 동아리 홍보 게시판을 둘러 보았을 때였다. 교내에 바둑동아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아리 모집기간도 아니었는데 다짜고짜 동아리방에 찾아가 동아리에 가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다시 만난 바둑은 즐거웠다. 잘해야 한다는, 이겨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이유가 없으니 남은 건 처음 바둑에 빠졌을 때 느꼈던 즐거움뿐이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바둑에 몰입한 순간도 좋았지만 바둑을 즐기고 싶어 모인 친구, 선후배들과 함께 했던 소소한 시간들은 더 즐거웠다.
군대에 다녀와 정신 업이 취업준비를 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바둑은 이제 정말 나에게 멀어진 존재가 되었다. 해가 지날 때마다 늘어가는 삶의 책임감과 불안감에 비례하여 바둑도 바둑을 함께 즐겼던 사람들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졌다. 그래서 나는 가끔 두렵다. 바둑을 통해 느꼈던 그 성취감과 순수한 즐거움의 기억을 온전히 잃어버릴까봐. 바둑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잃어버릴까봐.